1999
여름 향기가 가득하다고 말하던 장미 덩굴 담 너머로 윤정한과 나는 열여덟의 언저리에 얽혀 습관처럼 청춘을 소비하는 데에 심혈을 기울였다. 일종의 관성과도 같이 서로에게 돌아오는 철칙. 그대로 우리는 우리끼리 몇 달을 붙어살았다. 살갗이 닿게끔. 그게 우리의 성질일지 익숙해진 타성일지는 뭐가 되었든 중요치 않았다. 싸웠다가도 시간만 지나면 스르륵 풀리는데. 자연히 서로를 찾는데. 윤정한과 나는 어지간히 맞아야 할 취향이 맞지 않아서 그거는 그거대로 분투하기 일쑤였지만 그런데도 우리는 살을 비비며 지냈다. 왜일까. 나의 의문에 윤정한이 카프리썬의 스트로우를 고무줄 씹듯 질겅이다 나를 본다.
─본능이지.
─본능이야?
─어. 그냥 그런 거야.
당연하다는 듯 결론을 매듭지은 윤정한의 턱이 상하 운동을 하기에, 따라서 나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단지 그런 거. 그러자 윤정한은 나를 지나쳐가며 중얼거렸다. 시시해. 흥미가 성립되기 전까지 한껏 지체되는 윤정한. 윤정한은 나를 다루는 법에 능숙해서 가끔은 자신을 조절하지 못했다. 윤정한이 보여주는 세상은 날마다 신선하고 발랄한 유희로 가득했지만 대체로 윤정한은 나보다 불감하는 듯 했다. 한번 거쳐 간 흥밋거리는 곧 제 역할을 다하여 금방 초기화 상태로 돌아가서, 나는 그저 나의 관심을 갖고 싶은 걸지도 모른다고, 단순히 생각하기로 했다. 햇볕에 그을린 바람이 불어왔다. 팔다리를 쭉 뻗은 채 누워있던 윤정한이 침대에서 일어나 창문을 한번 보고 나를 한번 봤다. 여울진 빛이 이글이글하다. 하여간 나가자는 신호다. 윤정한의 방 창밖으로는 숲 입구에 자리한 체리 나무가 저 끝으로 하나 보이는데, 매년 칠월에서 팔월 사이. 붉게 여물은 열매를 수확하여 냉장고에 보관해둔 다음, 오늘과 같은 무더운 날에 파이로 만들어 먹는다고 한다. 윤정한은 내게 자랑인 듯이 으스댔다. 결국 우리는 잔디밭에 앉아 서로 간에 짧은 화담을 주고받는 그림이 된다.
─꽃으로 요리해봤어?
─아니.
대답에 상응한 윤정한의 입꼬리가 올라가 살짝 미소짓는다. 거기서 위험을 감지했다. 뭐든 간에 그 사고가 더 폭발하기 전에 고개를 재빨리 내저어보지만…….
─알았어. 내가 해줄게.
윤정한은 녹록하지 않았고. 나는 떠밀릴까 싶어 윤정한을 다른 자극으로 유인했다.
─꽃은 꺾으면 죽는데?
윤정한은 죽음에 여유로운 태도를 보인다. 언젠가 같이 보던 공포영화는 유혈과 시체가 낭자하여 러닝타임 내내 어깨에 불쾌감을 지고 있어야만 했다. 그날따라 윤정한이 내 옆에서 있어도 없는 것처럼 조용해 내 기억에 선명히 새겨졌다. 영화의 하이라이트라고 하는, 괴이한 무언가가 문 뒤에서 튀어나와 주인공을 덮치는 장면에 이르자 윤정한의 낮은 한숨과 함께 갑자기 세상이 꺼졌다. 눈을 떠보니 나는 콘소메맛 팝콘을 뒤집어쓴 채로 그 난장판 속의 주인공이 되어있었다. 헛웃음이 올라왔다. 정한아 보고 있는 거 맞지? 하고 묻자, 윤정한은 손으로 시선을 차단하며 말했다. 보고 있어, 보고 있지. 뻔뻔한 윤정한. 눈을 가린 두 손을 잡아 내린 뒤 윤정한의 손바닥에 팝콘을 주워 몇 개 올려주니, 아하하 웃는다. 장난친 거야. 야, 나 이런 거 안 무서워해. 놀란 나를 놀려대며 내게 부대껴온다. 그러니 그날을 지금도 기억한다. 윤정한이 행복하게 나를 놀려대던 유쾌한 서사를.
─진짜 꺾을 거야?
─괜찮아 내 재산인걸.
─이 정원을 다 네가 가꾼 거야?
─어. 내가 다 했어. 그러니까, 내가 진짜 깜짝 놀랄 만큼 맛있는 거 만들어줄 테니까…….
이런 경우는 꼼짝할 수 없다. 어쩔 수 없이 나는 윤정한의 제의로 인해 꽃 몇 송이를 떼어오는 작업에 투입되었다. 꽃을 왜 먹으려는 걸까. 나는 속으로 반신반의했으나 윤정한은 그런 내 마음을 개의치 않아 했다. 그래서 간단히 정의를 내렸다. 윤정한은 독특한 미식에 꽂혀있거나, 나를 놀리고 싶을 뿐이거나. 요즘의 윤정한은 그렇게 이분화로 나누어진다. 직사각형 마당을 빙 둘러싼 초록 잎들이 청량감을 더하고. 뒤의 체리 나무는 그 이파리마저 살랑댄다. 달콤한 향이 바람과 함께 다가와 코끝을 자극했다. 옆의 화단은 윤정한을 닮았다. 싱그럽고 탐미적이며 탐구 가치가 있는. 온갖 생명력을 끌어다 쓰는 것 같았다. 여름이 이렇게 생생한 건 윤정한 때문이다. 윤정한이 원치 않아도 당연히 이루어질 섭리. 윤정한이 수도에 호스를 연결하여 잔디밭에 물을 뿌렸다. 그러자 내게로 물이 바짝 튄다. 물에 젖은 나를 보며 윤정한은 아이같이 해맑게 웃었다. 젖은 우리는 금세 열에 익어서 축축하던 것이 증발했다. 나는 들어가자고 윤정한의 손을 잡아끌었다. 깜짝 놀랄 만큼 맛있는 걸 만들어주겠다며 호기로운 선언을 뱉었던 윤정한이 그 기세가 위축되어 내 옆에서 자꾸 헉헉대는 건……,
여름, 이었기 때문에.
─덥다.
─그러게 왜 하자고 한 거야.
─그런 너는 나 따라왔잖아, 살면서 이런 거 먹어본 적 있어?
─음……. 아니. 한 번도.
─그러니까.
그러니까 하는 거지. 윤정한은 가스레인지 위에 물을 채운 주전자를 올려놓은 후 방으로 들어갔다. 나는 늘어져 있는 전선을 주워 콘센트에 꽂았다. 네 개의 팬이 달달 돌아가는 좌식선풍기가 후더분한 바람을 출력하자마자 우리는 셔츠 카라를 털며 앞다투어 바람을 쐬었다. 윤정한은 강아지처럼 두 눈을 느리게 감았다 떴다. 나른했다. 녹을 거 같은 시간. 물이 끓여지는 동안 나는 침대에 몸을 뉘었다. 그러자 무언가 생각난 듯 윤정한이 내 옆을 비집고 들어온다.
─기타 쳐줘.
윤정한이 주머니에서 구겨진 종이를 꺼냈다. 내가 클래식 기타를 조율하는 건 윤정한이 나에게 곡 제목들을 필기해서 줬기 때문이다. 윤정한은 나를 이용해 듣고 싶은 선율을 들었다. 나는 윤정한이 열거한 목록들을 눈으로 읽으면서 침대 구석 밑에서 기타를 꺼냈다. 내가 손끝으로 줄을 튕기자 윤정한은 시끄럽게 떠들고 있는 텔레비전에 화가 났는지 발밑에서 리모컨을 찾았다.
─차라리 꺼.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왜 틀어놓는 거야?
─아까 네가 틀어놓은 거야, 정한아.
윤정한이 전원 버튼을 눌렀다. 그러나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정한아. 그거 고장 났어. 그러자 윤정한이 짜증을 내며 텔레비전 앞으로 기어갔다. 그리고 다시 왔다. 윤정한은 나한테 다가와 내 어깨에 턱을 올렸다. 나는 조용히 입을 다물고 있었고 윤정한은 나의 관심을 돌리려는지 내 목덜미에 손바닥을 대어 쓸어내렸다. 그러던 때마침 부엌 쪽에서 주전자가 픽픽 거리며 뜨거운 김을 분출한다. 찬장에서 꺼낸 쿠키 상자를 열었다. 윤정한은 갖고 있던 직사각형 모양의 미니 플레이어를 꺼내 식탁에 올려놓았다. 내가 말했던 것도 넣었어? 했지 당연히. 음색이 너무 좋아. 윤정한이 금방 대꾸한다. 다른 애들은 이 노래 잘 모르더라. 윤정한은 푸른빛의 찻잔을 꺼내 뜨거운 물을 따랐다. 요즘의 윤정한은 플레이리스트를 업데이트하며 때때로 찻잔을 수집하는 취미에 사로잡혀있다. 그거 아니면.
─뭐 하는 거야?
일생의 파랑을 전부 섞어놓은 듯한 묘한 색감을 주시하던 윤정한이 물음에 고개를 돌린다.
─귀엽지, 코발트블루. 이렇게 센 파랑은 지금껏 본 적이 없어. 너는?
윤정한은 더운 히비스커스 차를 담은 코발트블루 찻잔을 내 앞에 놓더니 물결에 꽃잎을 띄웠다. 옆에 놓은 쿠키와 같이 보니, 누가 봐도 먹음직스러웠다.
─정한아. 너는 안 마셔?
─아냐. 너 많이 마셔.
찻잔을 모으며 차를 마시지 않는 윤정한은 예의 모순을 품은 모습으로 확립되어 나는 단지 윤정한이 대개는 귀여운 것에 관심이 있을 뿐이라 여겼다. 어린 날의 한 페이지로 기록될 오늘의 나는 평범한 하루의 끝이란 영영 다가올 차례가 아니라 믿는다. 유난히 푸르렀던 여름. 언제부턴가 벽에는 곰팡이가 피었고 우리는 벽을 보며
식사
를
했다
Y
교실에서의 홍지수는 으레 추앙을 받는다. 아이들은 저마다의 시간에 저마다의 빨간 손으로 홍의 검은 머리카락을 헤집었다. 홍은 그에 의한 반응으로 금방 입꼬리를 올렸다. 덜 망가진 참나무 책상 위를 낙서하다가도 손들이 다가올 때면 홍은 씨익 웃었다. 교실 전체가 홍의 상냥으로 온통 도배되어 덧칠되는 꼴이 사납다. 나는 다 망가진 책상에 눌어붙어 여력 없이 퇴색하고 홍은 졸지에 짙음이 농후해진다. 주변의 머리들은 곧잘 홍을 쫓아 전염되기를 원하였고 그래서 다들 하나씩 병에 걸렸다. 병은 그들의 만족을 생성한다. 홍은 그렇게 해서 태어났다. 군중 속에 묻힌 홍은 과감히 빛을 낼 뿐 나는 섞이지도 못한다. 여기까지가 홍의 서사…….
─윤은 왜 말을 안 해?
불시에 시선 끝에서 떠들던 외로운 담적색 머리 하나가 발설했다. 나는 담적색을 본다. 눈이 마주쳤다. 담적색은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린다. 더러운 담적색. 최근에야 알았는데 그는 작년부터 홍을 염원해왔다. 그런 말 하지 마. 이번에는 입을 연 홍과 시선이 맞물렸다. 웃는다. 시끄러운 대화. 본연의 색을 잃어버린 머리들. 솟아오르는 빨갛고 단단한 손 덩어리들. 나는 구역질 나는 교실을 빠져나오고 싶어 온몸이 계속 근질대다가도 홍을 보며 참았다.
─뭐가 좋다고.
결국 말했다. 입이 참지 못해서. 그러니 담적색이 바로 내 쪽을 본다. 홍도 따라 나를 본다. 담적색은 나의 언어를 읽어내지 못하고선 여러 번 삐걱거린다. 그런데 대체 왜? 홍은 내 눈을 보며 자꾸 웃었다. 이상한 일이다.
─뭐가 좋다고 웃냐고.
나는 강조했다. 형형색색의 머리들은 이미 담적색과 하나가 될 준비를 마쳤다. 뭐라 그러는 거야? 몰라. 머리들이 웅얼웅얼. 그러나 나는 연속하는 홍의 유연한 발음이 부러웠다. 간지럽히는 저 눈웃음이 간절했다. 홍이 자꾸만 나를 보고 또 감상했기에 떠올린다. 홍을 처음 봤던 때를. 나는 태초부터 홍을 염두에 두지 않았다.
H
기억도 안 나는 옛날부터 자주 이상한 꿈을 꾸었다. 형이상학적 기호와 눈에 담을 수 없는 처음 보는 색채들. 색들이 섞이고 섞여서 형성되는 오묘한 거리의 잡학적 물질들. 의식도 없는 유형물. 꿈이 보여준 건 그런 것들이었다. 추상(抽象). 설령 아닐지라도 그렇게 표현하는 것이 한계였다. 나는 온갖 관념에 허우적대는 꿈에 빠져 연명했다. 만들어진 공간에서 생명이 붙은 건 오로지 나 하나였고 그런 꿈속에서 나는 대부분 숨이 막혀오거나, 급해지곤 했다. 누군가 있는 것도 아니고, 소리가 나는 것도 아니었다. 대개는 사라지지도 않는 답답함 속에서 몸 쓰는 일을 했다. 몸을 둥글게 말아 누워있거나 아무것도 없는 색 위를 계속 걷고 뛰는 행위. 공허에 갇힌 나는 변화하질 못했다. 이에 엄마는 내 손을 잡아끌며 치료를 권했으며 병원에 동행할 때마다 이렇게 말했다. 악몽을 자주 꿔요. 뜸을 들이던 의사는 나의 부분마다 뚫어질 듯이 살피더니 과거에 어떤 트라우마가 있었는지를 물어왔다. 나는 말한다. 아니요. 사실, 공포를 잘 모르겠어요. 그가 놀라 눈을 크게 뜬다. 악몽만 꾸는데도? 그는 의심을 품는다. 하지만……, 고통스럽지가 않던데요. 확실히 꿈은 낯설고 신비로웠다. 하지만 어떠한 감정이 드는 건 아니었다. 그것만으로 지속했고 그래서 나는 태연히 꿈을 답습했다. 변질하지 않았다. 나도, 꿈도. 비약적 암유가 겉도는 세상. 적절한 감상은 무가치한 행태로써 살았다. 그리고 무한한 걱정만이 밤마다 엄마를 사로잡아 나는 걱정하는 엄마를 걱정하는 게 일이었다.
또, 필연이었다. 윤정한을 처음 본 것은. 옆집으로 한 가족이 이사를 왔다는 얘기를 익히 들어 알고는 있었지만, 그동안 윤정한은 형체를 드러내지 않았다. 아버지와 단둘이 산다는 것만이 내가 아는 윤정한의 전체였고 주제였다. 동네에서 아저씨를 마주칠 때마다 그는 나를 살갑게 반겨주셨다. 우리는 자주 윤의 집 문 앞에 서서 얘길 나누었는데 집 안 어딘가에서 정한이 그를 부르면 아저씨는 곧바로 나를 돌려보냈다.
─워낙에 낯을 가리는 애라서.
아저씨가 변명에 공을 들여 궁금증은 더욱 기폭 한다. 그때, 하얀 벨벳 커튼이 쳐져 있는 창문 너머로 갑작스레 어떤 록 밴드의 기타 러프가 시큰시큰하게 뿜어져 나왔다. 폭주하는 드럼에 이어 거칠게 이뤄지는 변조. 커튼이 열리며 슬며시 얼굴이 나왔다. 검은 머리. 희끄무레한 낯. 동그란 은테 안경이 나를 보고 있어, 나는 속절없이 빛에 반한다.
─그래도 정한이는 너를 좋아할 것 같다.
아저씨는 흙이 묻은 손을 털며 말을 이었다. 곧이어 그가 문을 열고 들어감에 나는 뒤늦게 맞장구를 쳤다.
─네. 저도, 얼굴이라도 보고 싶네요.
Y
새학기에 홍과 같은 반이 된 건 우연이었다. 교실에서 동양인의 형색을 띤 사람은 우리 둘뿐이라서 아이들은 말하지 않아도 우리가 접촉하길 바라는 눈치였다. 같잖은 철칙. 나는 같잖은 것들의 신념을 따르지 않기로 한다. 그래서 홍이 천사의 도시 태생이라는 것은 불필요한 낙인이고 관심 밖의 범주였다. 걔가 한국인이든 그리스인이든 서인도인이든 뭐 어떡하라고. 홍지수는 어차피 조슈아였고 또다시 홍지수라서 주식으로는 애먼 신성함을 먹었다. 그저 나는 잠식을 삼키며 책상에 엎드려서는 이름을 하나씩 적었다. 발음 같지도 않은 발음을 위해서 혀를 굴렸다. 블러드blood…블렌드blend… 브레드bread… 브랜든? 키 큰 저 남자애가 브랜든이었나, 확실치 않았다. 관심을 주는 건 고된 행위다. 그 순간 종이 울렸다. 점심을 먹기 위해 카페테리아로 가려는 찰나, 둥그런 무리 속에서 몇 명이 일어선 나를 응시하고 소리쳤다.
─헤이, 윤!
떫은 얼굴로 쏘아대는 육성이 짓궂다고 생각한다. 나는 입을 다물었다. 쏟아지는 그들의 질문에 대한 답으로는 일순간의 미소만을 지었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이름을 쓰다 천천히 죽을지도 모른다. 적당한 나의 명칭을 정하지 못한 아이들은 너스레 혀를 굴려 정한, 이라 부르곤 했다. 나는 그런 억지 따위가 듣기 싫어서 차라리 윤, 이라고 불러 달라고 했다. 내가 조합된 알파벳의 원형들에게 일체의 관심을 주지 않으려는 것처럼 그들도 나와 마찬가지로 서서히 내게서 멀어지기를. 그렇다면 작전은 원활하다. 눈에 비친 화면이 그렇게 안정을 찾아가는 줄 알았으나 신경을 쓰지 않았던 사이, 이 모든 굴레를 무시하며 직진하는 원형이 하나 있었다. 홍지수. 또는 조슈아. 홍에게서는 나의 언어를 들었다.
─정한아!
홍이 내가 있는 곳으로 다가와 앞자리에 착석하고는 우리 아빠와 어떻게 친한 건지에 대한 이력을 설명했다. 그러지 않아도 되는데. 애석하게도 홍이 너무 신난 모습인지라 나는 그냥 듣는다. 홍과 가까이 있고 싶었다. 내가 먼저 움직이자 홍이 나를 따라왔다. 우리는 주인이 없는 자리를 찾아 테이블 위에 식판을 놓았다. 홍은 샌드위치를 한입 물었다. 이것도 먹을래? 고개를 끄덕인 홍이 팩에 담긴 사과 맛 주스를 받아든다. 나는 홍의 앞에 앉아 홍의 모습을 눈에 담았다. 눈이 맑고 표정은 수줍었다. 샐러드 소스가 입술에 묻어 미끄러워 보이는 홍은 정말…… 아, 생긴 것도 예쁜데.
먹는 모습이 저렇게 예뻐가지고 어쩔거야…….
─정한아, 왜?
─어…, 뭐가?
─네가 내 입술만 보고 있길래.
생각을 멈춰야 했다. 홍이 잠자코 있던 나를 깨워서 간신히 정신을 차렸다. 나는 급하게 말을 돌렸다.
─아니야, 아무것도. 잠시 딴 생각 좀 하느라…….
홍이 내 손을 잡아 왔다. 긴 손가락에 나의 손가락이 얽혔다. 손끝을 거슬러 따라올라, 홍의 눈을 봤다. 걱정어린 눈으로 홍이 재촉해 온다.
─정한아. 너는 안 먹어?
─나는 이거면 돼.
눅눅해진 샌드위치를 크로스백에 집어넣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수많은 발이 지나간 자국들에 더럽혀진 체크 타일 위를 걸었다. 걷는 동안 홍의 시선이 붙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대로 사라지고 싶었다. 손가락이 근질거렸고 그게 무슨 기분인지 형용할 수 없어서 불안했다. 운동장을 지나오는 내내 나는 고찰해야만 했다. 심장이 어떻게 이렇게 빠르게 뛸 수 있는가에 대해.
그리고 그날 밤, 희한한 사건이 터졌다. 처음으로 약을 먹지 않고 잠자리에 들었다. 이례적인 일이다. 지난 겨울부터 불면을 앓고 살던 나는 다른 사람들의 꿈이 생산되는 밤에, 천장을 바라보며 살아갔다. 어제도, 그제도. 책상 서랍 안에는 멜라토닌이 벌레 떼처럼 득실거렸고 나는 그 벌레들을 하루에 하나씩 입에 넣어 죽였다. 약사는 흐름이 중요하다고 했다. 규칙적인 생활을 해야죠. 운동 열심히 하고. 카페인 조심하고. 네. 네. 그럴게요. 나는 나약한 손으로 바지 주머니에 약 봉투를 넣으며 대꾸했다. 그의 말대로 흘러가듯 흐름 따라 살고 싶은데. 꿈 좀 꾸고 싶은데. 겨울부터 수만 번 머리에 새겼던 염원. 하지만 홍을 만난 날. 홍이 내 이름을 부르던 그 날. 꿈에 홍이 나온 건 흐름을 깨는 일이었다.
─정한아.
내가 달고 살던 불면을 역설해버린 홍이 나를 부른다. 꿈속에서, 연한 갈색의 눈을 동그랗게 뜨며 해맑게 웃는 홍은 봄을 닮았고 꿈속이 아닌 지금도 그랬다. 이렇게 되면 안 되는데. 홍지수는 자꾸만 나를 귀찮게 한다.
─너는 왜 나를 정한이라고 불러? 다른 애들은 다 윤이라 부르는데, 너만 자꾸 정한이라고 하잖아. 정한아. 정한아. 내 이름 좀 그만 부를 수 없어?
그런데 홍은 화내지 않았다. 내 고집에도 홍은 차분했다.
─네가 정한이 아니면 누가 정한이야.
홍의 한마디에 나는 내 이름 밖으로 탈피하는 순간을 겪는다. 나의 주체성을 일관되게 지각하는 홍지수. 어쩌면 홍지수는 앞으로 나보다 나를 더 잘 설명할 수 있겠다 싶었다. 그래서 나는. 그제야 나는, 홍을 지수… 라고 발음해본다.
H
지수야. 우리 집 가자. 윤정한이 다된 저녁에 제안했다. 럭비 경기가 한창인 운동장 너머 일몰이 져가고 있었다. 찌르는 휘슬 소리에 귀가 먹먹하던 차에 윤정한이 몸을 붙여 온다. 섬유유연제 향이 풍겨왔다. 나는 고갤 끄덕이고 일어섰다. 윤정한은 내 뒤에서 가방을 잡고 나를 조종했다. 늘 같이 걷던 하굣길이었으나 특별한 게 있었다. 윤정한이 내 허리를 팔로 감싼 채 나와 함께 나란히 걸었다는 거. 나도 윤정한에게 바짝 다가갔다. 선이 예쁜 얼굴이 노을빛에 젖어 얼굴 위로 그림자가 유영했다. 집 안으로 들어서자, 서늘한 집안에 흐릿하게 열감이 돈다. 아저씨가 요리하던 중이었다. 뜨거운 프라이팬과 그 옆으로는 열에 달궈진 오븐. 구이에 몰두하던 아저씨는 내가 들어오는 소리에 나를 보고 환히 웃었다.
부자(父子)와 함께 저녁 식사를 했다. 자리에 앉은 후 포크를 들기 전, 아저씨는 먼저 기도를 하자고 하셨다. 정한이가 좋은 꿈을 꾸게 해달라는 내용의 읊조림. 윤정한이 나를 힐끔 쳐다봤다. 실은 내가 먼저 윤정한을 보고 있었다. 윤정한은 맞은편에 앉은 내게로 몸을 숙여 속삭였다. 잠을 잘 못 잔다고. 불면증이면 꿈도 못 꾸는 거야? 윤정한이 고개를 끄덕이고 눈을 감는다.
─그런데, 처음으로 꿈을 꿨어. 거기에 네가 나왔어.
나는 윤정한을 보다 시선을 올렸다. 천장 가까이 목재로 된 십자가가 있었다. 있잖아, 정한아. 나는 악몽을 꿔. 윤정한이 감은 눈을 떴다. 미칠 것 같아. 꿈이 너무 재미없어. 윤정한은 내 입 모양을 읽는다. 우리는 기도를 멈췄고 그 틈에 시간도 멈춘 듯이 가만히 서로를 보기만 했다. 아저씨가 두 손 모아서 기도 중인 시점에, 우리는 하던 걸 잊고 서로의 눈동자 안에 자신을 공유했다. 그런데 그날 나는 거짓말쟁이가 되었다. 꿈에 윤정한이 나온 것이다. 고급스러운 천이 덮인 식탁에서 육즙이 새어 나오는 고기를 써는 윤정한이……. 이상했다. 내 꿈에는 나도, 사람도. 어떤 누구도 나오지 않았는데. 처음이었다. 병원에 다시 찾아가 봐야 하나 싶었다. 꿈에서 본 온갖 것 중에 생명을 부지한 건 윤정한이 처음이라 이제는 꿈을 악몽이라 칭할 수 없다.
윤정한은 잠을 못 자고 나면 마치 피복이 벗겨지는 것 같다고 표현했다. 그래서 우리는 또 식사를 했다. 자주 식사를 했다. 같이 식사를 한 날이면 윤정한은 가까스로 선잠에 들고 나는 윤정한이 나오는 꿈을 꿨다. 우리의 식사는 답습마냥 굳어버렸다.
마침내 윤정한은 여름을 벗어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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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여름의 끝무렵이었다. 화학 수업 때 내가 바나나우유를 마시고 있었던 게 잘못이라면 똑같은 것끼리 잘도 논다고 한 담적색 또한 잘못이다. 자유 실험 시간이 시작되자 담적색은 자리를 옮겨 지수와 마주 보고 앉았다. 나는 옆 책상에서 그 둘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지수가 준 바나나우유를 만지며 손을 꼼지락거렸다. 담적색이 지수를 좋아하는 건 우리 학년이면 다 아는 사실이다. 언제부턴가 담적색이 지수의 캐비닛에 채워 넣던 편지들에는 애정을 갈구하는 비문이 가득 담겨있어, 나는 그것이 거짓이었음을 바랐다. 까만 글자들이 개미 떼처럼 살아 움직이는 것 같다. 지수는 편지를 가져갔다. 가져가서 어디에다 뒀는진 모르겠지만 나는 당시 내내 그게 신경이 쓰였다. 지수는 담적색에 대해 일관적으로 무관하게 굴었다. 비커 안의 액체를 스포이드로 옮기던 담적색이 지수에게 물어온다. 윤과 항상 같이 다니는 이유가 뭐야? 황당한 질문이었다. 그러나 지수는 당연한 듯 대답했다. 우린 친구니까. 오케이, 조슈아. 그렇지만 걔는 널 행복하게 못 해. 지수가 내 쪽을 본다. 나는 일부러 시선을 피했다. 왜 정한이를 욕해. 지수가 조곤조곤히 타이른다. 뭐? 윤정한이 뭐라고 대체 너는 내 편지들을 무시하는 거야? 그렇게 안 봤는데 너……. 담적색은 자기 머리카락 색처럼 붉어진 얼굴로 홍지수를 핀잔했다. 그래, 알았어. 똑같은 것들끼리 잘도 놀아봐. 오, 어쩌면 둘이서 이미 그런 짓도 했을지 모르지. 담적색의 카랑한 음성에 주변 아이들이 모두 지수를 쳐다봤다. 웅성대는 분위기. 저마다 입을 가리고 우리를 씹어댔다. 나는 화가 치밀어 올라 충동적으로 몸을 일으켜 둘에게 다가갔다. 지수가 천연한 눈으로 나를 올려다봤다. 그것도 화가 났다. 아무것도 모르면서. 쟤네는 우릴 모르잖아, 지수야. 나는 속으로 말을 건다. 지수와 내가 서로에게 필요한 존재인 걸 누구에게도 이해시킬 마음이 들지 않았다. 대신, 교활한 알파벳 덩어리들의 시선을 훑는다. 그리고 처음으로 담적색의 이름을 불렀다. 야, 이것 봐. 부르는 내 목소리에 담적색이 몸을 틀자 나는 마시던 바나나우유를 걔 얼굴에 들이부었다. 얼이 빠진 담적색이 소리를 바락바락 질러댄다. 속 시원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차마 발이 안 떨어졌다. 그때, 가만히 있던 나를 지수가 깨웠다. 지수는 내 손을 잡아끌었고 우린 교실을 벗어났다. 지수가 이끄는 대로 달리던 나는 앞서가는 지수의 체크 남방을 보며 심장이 달음박질하는 걸 느꼈다. 아마 뛰어서 그런거 같다. 얼마만큼 뛰었을까. 지수가 속도를 낮추고 뒤 돌아 나를 봤다. 우리는 화장실에 들어갔다. 문을 잠근 후, 지수가 내 얼굴로 바짝 붙어 다가왔다. 정한아. 내가 정말 미친 게 아니라면……. 지수는 내 안경을 벗겨 세면대에 올려놓는다. 네가 너무 예뻐 보여. 두근거리던 것이 그때 한번 멈췄다. 지수가 고개를 꺾고 입술을 맞붙여와 자연적으로 눈을 감았다. 너는 바보도 아니면서. 내 입술을 물던 지수가 목에 키스하고는 내 어깨에 머리를 비비적거렸다. 맞아, 바보는 너야. 지수의 귓가에 속삭이자 지수는 말간 웃음을 내뱉었다. 다음 날 나는 상담실에 불려갔다. 온 세상이 내가 지수와 같이 못 있게 하기 위해서 안달 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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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를 염색했다. 나 말고 윤정한이. 윤정한은 거의 하얗게 머리를 물들었다. 이제 곧 겨울이잖아. 윤정한은 나름의 취향을 이유라 쓰고 방어했다. 광장의 커다란 스피커에서는 씨티팝이 흘러나왔고 우리는 시끄러운 음악을 배경으로 햄버거 가게 안에 있었다. 반쯤 벗긴 포장지를 잡자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내가 햄버거를 한입 무는 사이, 윤정한은 옆자리에 둔 가방에서 딸기 맛 우유를 꺼냈다.
─햄버거 안 먹어?
─괜찮아. 너 먹는 것만 봐도 배가 부른데 뭐.
─너 정말 대단하다. 정한아.
윤정한은 낯간지러운 말을 서슴없이 했다. 아마 옛 여름날, 화장실에서 키스한 후로부터 변한 게 맞는 듯하다. 갑자기 그때가 생각나 얼굴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나는 단지 윤정한을 그 교실에서 꺼내고 싶어서 그랬다. 윤정한도 그걸 알았는지 내 허리에 팔을 감았다. 그 뒤로 가끔 우리는 서로의 입술을 탐했다. 그러고나서는 빤히 쳐다보는 시선이 좋았다. 그 시선을 나누면 몸 안에 따뜻한 게 가득 차는 기분이 들었다. 나를 보며 스트로우를 물던 윤정한이 프렌치프라이 하나를 집어 입에 넣는다. 윤정한과 식사를 하면서 알게 된 것이 하나 있는데, 그건 바로 윤정한은 매번 음식을 다 먹지 않고 조금씩 남긴다는 것. 그리고 먹기보다 자주 무언가를 마셨다. 물이든, 주스든. 윤정한의 옆에는 항상 마실 것이 준비되어 있었다. 윤정한이 갑작스레 내게 프렌치프라이 한 개를 던진다. 장난기에 불이 붙은 거다. 그래서 나도 맞대응을 했다. 윤정한의 안경에 맞고 튕겨 난 감자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윤정한은 아이처럼 웃었다. 그렇게 몇 번의 주고받기를 하며 장난이 고조되어 가던 찰나, 서서히 문이 열리며 가게 안으로 누군가 들어왔다.
─오, 여기 있었네. 너 참가 신청 명단 왜 안 적고 갔어.
윤정한이 나를 보더니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내일 적고 갈게.
─그래. 까먹지 말고.
나는 영문을 몰라 궁금함을 참지 못해 물었다.
─무슨 일이야?
─어라, 못 들었어? 수학 올림피아드 말이야. 겨울 지나면 곧 합숙 시작하거든. 윤, 그거 참가한다고 에스더 선생님께 얘기 들었는데. 조쉬한테는 말 안 했어? 당연히 알고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말을 끝까지 잇지 못한 걔는 우리의 눈치를 살피다 지나쳐갔다. 나는 테이블에 올려 둔 윤정한의 손을 잡았다. 윤정한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내게 시선을 두었다.
─정한아. 왜 나한테 말 안 했어?
─내년 여름엔 나 여기 없을 거야. 그래서 말 안했어.
메마른 목소리로 설명하는 윤정한. 나는 목소리를 빼앗긴 것처럼 말을 잃어버렸다.
─지수야. 네 꿈에 여름이 없을까?
윤정한이 나를 뚫어지라 보며 물어왔다. 나는. 상상할 수가 없었다. 여름에 볼 수 없는 윤정한을. 생각에 잠기는 동안 가게 안의 네온사인이 번쩍거리며 빛을 과시했다. 매끈한 타일 벽면이 네온에 의해 색색이 입혀지는 걸 잠시 동안 보고 있자, 윤정한이 말을 돌렸다.
─요즘에는 어때, 또 악몽 꿨어?
나는 말했다.
─아니. 내 꿈엔 네가 나와.
내 단언에 윤정한은 빙그레 웃었다.
─정말?
─응. 너랑 시간을 보내고 나면 그날 밤에 네가 식사하는 꿈을 꿔.
그래서 나는 악몽을 잊은 거야. 네 덕분에.
─좋겠네.
─좋아. 정한아. 꿈에서도 널 봐서 좋아.
윤정한이 상체를 일으켜 내 볼에 입술을 대었다가 뗐다. 사랑스러운 시간이었다. 나와 윤정한은 오래도록 남을 그 페이지에 스며든다. 나는 그날 저녁에 윤정한을 우리 집으로 데리고 왔다. 우리는 단숨에 옷을 집어 던지고 풀장으로 뛰어들었다. 모든 것이 어두워 형체밖에 보이지 않았지만 다가오는 원형의 선만 봐도 윤정한이란 걸 알았다. 천천히 윤정한의 목에 팔을 감았다. 차가워. 찰박거리며 물이 튄다. 우리는 모두 눈을 감고 서로의 온도를 차지했다. 나는 벌어지는 윤정한의 입술 사이로 키스를 퍼부었다.
─합숙은 어디로 가?
─대만. 멀지?
─많이 머네.
─갖고 싶은 거 있어, 홍지수? 아, 내 지식 말고.
농담을 한 윤정한이 해맑게 소리를 내며 웃었다. 가까운 우리의 얼굴 사이로 뜨거운 숨이 자꾸만 맞닿았다.
─영원했으면 좋겠다.
코끝을 서로 맞대고 있으니 바로 앞에 보이는 청연한 눈이 말도 안 되게 아름다웠다. 쏟아질 정도로 밤하늘에 깔린 별들이 윤정한의 눈에서 빛을 내고 있었다. 윤정한은 입을 열었다.
─나도.
그래. 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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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워하는 동안 기억이 떠올랐다. 그 예전 상담실에서, 나는 담임선생님이 나를 혼낼 줄 알았다. 그런데 선생님은 한가지 제의를 건넸다. 조쉬와 있으면 말썽을 부리는구나. 비로소 운을 뗀 선생님은 줄줄이 이야기를 꺼내셨다. 수학 성적이 정말 좋던데. 어렸을 때 한국에서 상 받은 경력도 있고. 이거 참여해보지 않을래? 선생님이 책상 위로 종이를 밀어 나는 그 종이를 받아들었다. 월요일에 간단한 테스트를 해보자. 달콤하진 않았지만 끌리는 제안이었다. 무엇보다도 몇 개월 동안 다른 나라에 있어야 하는 것이. 내가 있어서 지수는 불편을 겪는다. 담적색과 있었던 사건 때문에 지수가 나 대신 벌을 받았다. 그러니 나를 만나지 않았다면 홍지수는 평범하게 살았을 것이다. 다른 애들하고도 무리 없이 친하게 지낼 수 있을 텐데. 나 하나 때문에 지수가 손해라면. 나는 그걸 원치 않는다. 씻고 옷을 갈아입고 나와보니 지수는 비디오테이프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무슨 영화야?
─글쎄. 주인공 둘이 사랑하는 내용이래.
지수는 테이프를 레코드에 집어넣었다. 그러자 지지직거리며 영상이 틀어졌다. 나는 지수의 무릎에 기대어 누웠다. 우리는 영화가 재생되는 동안 숨죽여 감상에 몰두했다. 지수의 머리에서 맺힌 물이 나의 이마로 뚝뚝 떨어졌다. 나는 지수의 손을 찾아 손깍지를 꼈다. 지수의 손을 만지면 마음속으로 평온이 찾아온다.
─가만히있어, 정한아.
손을 치워버리는 지수가 미웠다. 그래서 말 하지 않고 영화에 집중하려는데, 마침 주인공들이 옷을 벗기 시작하더니 서로의 몸을 찾았다. 그것도 풀숲에서. 그런데 지수가 손을 잡아 왔다. 가끔 애 같은 구석이 있어. 이럴 때 지수를 놀리는 건 재밌다. 그래서 나는 한탄하듯 말을 꺼냈다.
─영화에선 왜 저렇게 풀숲에서 섹스를 하는지 모르겠어. 저게 낭만인가.
─편견이야 정한아.
─하지만 영화에 자주 나오잖아.
─네가 그런 영화만 봤으니까.
─너도 같이 봤잖아.
─맞아. 너의 추천을 믿는 게 아니었어.
─영화가 재미없지는 않던데.
─나는 재미없던데.
─괜찮았거든.
─그래. 네가 그렇담 그렇게 할게.
─재미없어. 재수 없고 홍지수.
네 고상한 취향 좀 버려. 나는 몸을 일으켜 반대편에 깔린 러그 위로 넘어졌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지수는 한마디도 안 진다. 거기에 네가 있는데 어떻게 버려. 지수가 텔레비전을 끄더니 내 위로 엎어졌다.
─우리도 해볼까.
그 말에 나는 대답 대신 지수의 옷 안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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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이다. 예상보다 봄이 일찍 다가왔고 이별은 벌써 지나쳤다. 윤정한은 마침내 출전 대표로 뽑혀서 합숙을 위해 멀리 떠났다. 겨울에 떠나느라 따뜻함도 껴안지 못한 채였다. 떠나기 전날, 윤정한은 자기가 돌아오면 같이 살자고 했다. 그러다가 뭔가가 떠올랐는지 말을 바꿨다.
─아니다. 우리 집이 네 보금자리잖아.
나는 대답보다 미소를 지었다. 윤정한도 같이 웃었다. 윤정한이 떠나는 것도, 어쨌든 몇 계절이 지나면 돌아올 거라서 아무래도 상관없다. 윤정한의 집에서 함께하던 식사 시간이 내게 큰 의미로 남았으니까. 만약 윤정한이 떠난다고 미리 말했다거나 미처 말하지 못했어도, 거기에 어떤 이유가 깃들었는지 상관없었다. 갑자기 사라져버린다 해도 이해할 수 있다. 우리는 처음부터 서로의 결점을 채우기 위해 공생하던 것이 목표였으니.
떠나는 날 아침, 윤정한은 대회를 위해 공항으로 출발했고 그 시간에 나는 휑한 풀장을 빙빙 돌았다. 달력이 한 장씩 넘어갔다. 기다리는 날들이 서서히 줄어들어갔으나 이상하게도 시간은 점점 늘어났다.
정한이, 불면증 때문에 힘들 텐데. 괜찮으려나.
엄마는 빵에 버터를 바르며 중얼거렸다. 내가 없으면 윤정한은 치렀던 불면의 기로에 다시 서릴 것이다. 약에 의해 합선하고 다시 피복이 벗겨지는 일련의 과정을 겪어야 한다. 윤정한이 내 생각을 했으면 좋겠다. 내 생각을 해 조금이라도 버틸 수 있다면. 그런 생각에 미치자, 가슴 한편에 죄책감이 쌓여 심장을 둘러싸는 것 같았다. 행복한 기억을 더 많이 만들어 줬어야 하는 건데. 흰 알약을 입에 털어 넣으며 윤정한은 무슨 생각을 할까.
그런데 말이야. 사실 불면증보다 더 심하게 앓던 게 있대. 어제 교회에서 정한이 아버님을 뵙고 들은 이야기인데, 혹시 너도 아니.
자리에서 일어나려는데, 엄마가 불신이 팽배한 말로 내 발목을 잡아 온다. 그로 인해 그 앞에서 나는.
맛을……,
잘 못 느낀다더라.
나는. 적당한 은유를 찾지 못하고 무너졌다. 나의 꿈은 늘 추상적이었고 가까스로 들추어 찾아낸 구체는 윤정한의 식食행위. 유일했다. 꾸준히 추종했던 추상. 이제야 나는 실재하는 것에 의아한 사랑을 감지한다. 애당초, 윤정한의 미각이 허상이라는 걸 알았을 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