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술 안쪽에 화상을 입었다. 나는 필히 그것이 보석에 짓눌린 자국이었으리라 믿는다.
함께 살아가는 거, 공생이라고 하죠?
눈앞에 교단을 서성거리며 팔을 휘두르는 이름 모를 늙은 교수는 지난 시간부터 지나치게 사람과의 유대를 강조하는 주장을 펼쳤다. 사람과의 관계에 대한 구체적이고 본질적인……, 무언가. 무언가 세세하고 전문적인 단어들의 집합을 열거했다. 그래봤자 주관적 견해인 뻔한 이야기. 자신보다 몇 배의 삶을 더 산 남자는 이것 보세요, 하며 자신의 경험담을 때 묻혀 줄줄 늘어놓았다. 아직은 청춘이라 칭하는 나이대에 속해서 반 정도는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였다. 아무리 학구열에 지속하는 취미라 해도 이런 내용까지 원한 건 아니었지만 준훼이는 가방을 열었다. 꼬박꼬박 오르는 참여율은 신경 안 쓴 지 꽤 오래고, 어찌 됐든 간에 시작한 거 포기하기가 아까웠다. 그렇게 합리화했다. 그나저나 펼친 책을 봐야 하는데 자꾸만 시선이 다른 곳으로 간다. 옆자리가 비어있다. 평소대로라면 옆의 남자가 무심한 표정으로 앞을 주시하고 있어야 하는데. 그를 보며 붉은 머리카락이 예쁘다는 생각을 했다. 그의 팔 아래에는 매번 파란 책이 깔려있었고 쉽게 눈에 띄었다. 필수 탐구 이론. 팔이 글자 일부를 가려 무슨 책인지 자세히 알 순 없었지만 한글이라서 반가웠다. 지난 이 년 동안 한국에 있었고, 올해부터는 홍콩에 거주하고 있었던 터라 말을 걸어 볼까 싶었다. 준훼이는 펜을 딱딱 깨무는 남자를 향해 몸을 기울이며 속삭였다.
한국 사람이에요?
그가 살짝 곁눈질하더니 같이 속삭였다.
네.
오, 그렇구나! 저도 꽤 오래 한국에 있었거든요.
아, 대단하시네요.
그는 예의 바른 미소를 지었다. 조명 때문인지 두 볼이 분홍빛으로 빛났다. 사실 빛난 거까지는 아니지만 그래도 준훼이의 눈에 그렇게 보였으니까. 그래서 남자와 이름을 교환했다. 아니, 요구했다. 준훼이는 수첩을 꺼내 남자의 코앞으로 빈 종이를 들이밀었다. 그는 잠시 망설이더니 곧 펜을 들어 글자를 적어 내려갔다.
한국어로는 윤정한으로 읽나요? 준훼이가 턱을 괴며 말했다. 맞아요. 맞췄다! 정한의 수긍에 기뻐하던 준훼이는 함박웃음을 지었다. 준훼이씨는 밝으시네요. 정한이 말했다. 네? 저를 보셨어요? 네. 보이잖아요. 옆에서 항상. 그러네요. 그러자 준훼이는 해맑게 웃는다. 정한 씨는 이 수업 왜 들어요? 잊으려고요. 무엇을요? 그냥. 이것저것……, 다요.
저도요? 이번엔 정한이 웃었다. 아니요. 준훼이 씨는 못 잊을 거 같아요. 왜요? 제가 말 걸어줘서? 그렇죠. 준훼이씨는 한국에서 무슨 일 하셨어요? 번역이요. 주로, 잠깐이었지만. 아. 그럼 한국어도 잘하시겠네요. 아하, 들켰다. 준훼이가 두 눈을 굴리며 멋쩍게 웃었다. 그 행동에 정한도 아하하, 하고 소리를 냈다. 정한 씨. 내일도 와요? 묻는 준훼이는 정한의 눈에 보석처럼 찬연했다.
와야겠죠.
내일 끝나고 같이 밥 먹을래요?
안돼요.
왜요? 마음에 안 들어요?
아니요. 좋다고 말하고 싶어요. 그런데……,
그러기엔 해결할 일이 좀 많아서요. 실망한 여력의 얼굴이 되었지마는 준훼이는 나름 이음새를 잘 메꿨다 생각했다. 그러나 다음날 와야겠다고 한 정한은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 그래서 여기까지가 정한의 서문. 다음 장을 넘기면 정한은 오렌지카운티의 한 변두리 모텔에 머무르게 된다.
주어 없는 사랑 얘기할까요?
관계를 맺고 난 다음 날 김민규는 그런 말을 했다. 주로 사랑에 관한 얘기. 철 지나 잊어버린 사랑들. 아니면 잊기 위해 노력했던 사랑들. 김민규는 버릴 것에 호기심을 가졌다. 특별히 윤정한의 것이라면 끝까지 전부 다 알고 싶어 했다. 그러나 정한은 지금까지 가르쳐준 적이 없다. 없는데.
손 차가워요. 민규는 정한의 목에 얼굴을 파묻으며 중얼거렸다. 맞닿은 손이 열을 빼앗았다. 정한에겐 그 상냥이 달지 않았다. 잡지 마. 싫어, 잡을래. 차가워도 잡을래. 정한은 자신의 위로 엎어진 민규의 등을 쓸었다. 민규가 고개를 들었다. 괜찮아. 여기가 따뜻하니까……. 더듬거리는 손으로 정한의 입술을 찾아 문다. 정한은 김민규에게 사랑을 강요한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그런데 김민규는 마치 강요받은 사람처럼 굴었다. 날마다 같은 치사량을 정한에게 주입했고,
정한 씨가 사랑한 사람들은 다 어떤 사람들이에요?
주입받길 바랐다. 어디서, 누굴 만났어요? 끈질긴 김민규는 상당히 어려웠다. 김민규는. 윤정한은 머리를 비워야 했다. 그렇지만 머리 안에 문장 하나가 흘러 다닐 뿐 떠나지 못한다. 윤정한은 김민규를 정의해야 했다. 그래서 괄호를 열었다. 김민규는. 사랑을 아는 사람. 그리고 괄호를 닫는다. 만들어놓은 괄호 안에 잘 안착한 김민규는 쉽사리 벗어나질 않고 있다.
이런다고 나랑 가까워지는 거 아니잖아.
정한이 팔을 뻗어 솜이 가득 들어찬 베개를 잡았다. 민규도 무슨 말을 하고 싶은 듯이, 따라서 정한의 손을 찾아 자신의 손을 포개는데 모든 손가락의 마디가 끈적였다. 민규가 내뱉는 숨이 가슴에 닿아서 간지러웠다. 간지럽고 뜨거웠고. 답답함마저 느껴져서 정한은 몸속에서 뭐라도 긁어내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그럼 나 죽이고 돌아갈 거예요?
민규가 얼굴을 바짝 붙어오며 입꼬리를 올린다. 지금 터트리기엔 적절하지 않은 말이었다.
그래서 온 거잖아요.
내가 왜 너를.
내가 그 사람들 배신해서.
정한이 볼 때 민규는 처음부터 이미 일에 지쳐있는 것처럼 굴었다.
지긋지긋해 죽겠어……, 혹시 이 판 뒤집고 싶지 않아요? 나는 그런데.
얘는 뒷일이 어떻게 될 줄 알고. 정한은 그 많던 업자들이 민규가 조직에 들어왔을 때부터 엄청 뭐라 하던 것이 왜 인지 어렴풋이 이해가 가서 웃었다.
왜 웃어요.
이제 와서 계약 어긴 건 안 무서워?
응. 무서워요. 그런데 내 뒷조사 다 하고 온 거 맞아요? 이렇게 될 줄 몰랐나 봐요. 사랑에 빠질 거라곤 생각도 못 했겠지.
내가 너랑? 민규는 정한의 셔츠를 풀고 쇄골에 얼굴을 묻었다. 응. 막힌 입술 새로 대답이 새어 나왔다. 그걸 듣는 정한은 사멸하는 기분이었다. 손을 들어 천장으로 뻗었다. 빛이 손바닥에 담겼다. 시선에 잡히는 손등은 어두침침했다. 정한은 그 손을 내려 민규의 목덜미를 매만지며 눈을 감았다. 이 모텔에 머무른 지 닷새가 지났다. 즉, 하루에 끝내야 할 일을 못 하고 닷새 동안 질질 끌고 있다. 로스앤젤레스에서는 다른 애가 목 빠지게 기다리고 있을 텐데. 하지만 걔는 얘와 달리 절대 티 내지 않는다.
있잖아요……. 민규가 정한의 속눈썹을 만졌다. 정한은 가지처럼 이어지는 생각을 쳐냈다. 쇄골 위로 덜 마른 잉크가 번져 흘러 질질 떨어지는 모양새. 써지는 활자가 난잡했다. 정한은 일어나서 벗어둔 겉옷을 다시 걸쳤다. 탁자 위에 둔 핸드폰이 반짝거리며 시간을 알리길래 화면을 보니 자신을 태워갈 로스앤젤레스행 택시가 벌써 여기로 진입하고 있었다. 어느새 민규는 정한이 떠난 침대에 일어나 앉아있다. 나갔다 올게. 정한의 말을 듣자마자 민규가 베개를 집어 던졌다. 떨어진 베개는 바닥을 한번 뒹굴었고 민규는 시무룩한 표정으로 일갈했다.
나 찾아 죽이라고 시킨 사람 누군데.
자꾸만 충돌을 일으키는 김민규는 마침내 본문에 모습을 드러낸다.
썩은 피를 골라내자던 건 앞에 앉은 전원우 씨의 주장. 화이트 셔츠 끝자락을 털며 차가운 사탕을 씹는 원우가 정한에게 물었다.
그 새끼는 만났어?
만났지.
뭐 했어.
걔 착하던데.
내가 그거 물어봤어?
창문 밖에는 다운타운의 찬란한 불빛들이 서성이고 있다. 어디서 봐도 음영의 조화란 언제나 신비로웠다. 여기가 원래 야경이 예뻤던가. 정한은 평소처럼 고즈넉하게 사색했다. 불안한 평화였다. 그 속에서 정한은 원우를 찾았다. 원우야 마실 것 좀 줄래. 전원우는 한숨을 쉬고 몸을 일으켰다.
언제까지 그러고 살래.
김민규 걔, 배우래.
알아. 난 걔가 출연한 영화도 봤어, 어제.
원우는 정한에게 다가가 입술 끝에 머그잔을 대었다. 금방 데운 따뜻한 온도가 불시에 입가 전체에 퍼졌다.
배우면 배우라고 얘기를 해줬어야지…….
잘생겨서 놀랐잖아. 뜨거운 코코아를 한입 마신 정한이 낮게 중얼거렸다.
말도 없이 홍콩은 왜 갔어.
거기가 내 집이잖아.
말할 때 근질거리는 혓바닥이 따가웠다. 정한은 혀끝을 손톱 끝으로 쓸었다. 아마 뜨거운 온도에 덴 듯했다.
형. 착각하지마. 형의 집은 여기야.
마주 봐야 할 언어들이 연결되지 못하고 맥없이 뚝뚝 끊어졌다. 원우는 정한의 허리를 끌어당겼다. 원우의 두 팔 안으로 정한의 몸이 갇힌다. 코가 맞닿을 듯이 가까워서 윤정한은 전원우를 보며 생각했다. 어린 게 하는 말마다 장난이 서려 있어. 원우는 자기가 쓰고 있던 안경을 정한에게로 옮겼다. 정한의 시야가 희뿌옇게 흐려진다. 정면으로 보이는 원우는 그 모습 그 상태 자체로 흥미로움에 기반했다. 알싸한 사탕 향을 자꾸만 내뱉으며 형의 집은 여기야. 라고 하는 전원우. 얘는 언제나 동정심을 머금은 채로 산다. 그래서 정한은 원우를 타인에게 대입해본다. 만약 전원우가 김민규라면. 김민규는 어떻게 말하더라. 나랑 같이 살래요? 형이랑 나랑 여기서 살까요? 맞아. 걔는 말끝마다 물음표를 붙였는데. 원우의 문장엔 온점만이 박혔다. 원우는 말 안 해도 스스로 온점을 찍는 사람이었다.
원우야. 너는 내가…….
정한이 입을 연다.
그러니까, 전원우는 윤정한에게 크게 빚진 게 있다. 오래된 일이었고 윤정한은 잊어버려야 할 일이라 했다. 둘은 늦은 밤에 주차장에 있었다. 떨어져 있는 기둥에 각각 기대어 시선을 주고받았다. 일종의 사인. 그러나 그게 곧 누군가의 사인으로 귀결될 거란 걸 알아차리지 못한 채 기다리고 기다렸다. 대상이 보일 때까지. 마침내 목표하던 대상이 모습을 드러내자 그 찰나, 눈 깜짝할 새에 정한이 먼저 돌진했다. 원우도 뛰쳐나갔다. 그런데 목표는 하나가 아니었다. 뒤에서 원우를 끌어안은 자가 칼을 휘둘렀다. 원우의 신음과 더불어 자상이 길게 남은 허벅지로부터 피가 연신 뿜어져 나와 바닥이 젖었다. 원우는 팔꿈치로 뒷 놈의 복부를 갈겼다. 놈과 원우, 둘 다 차가운 바닥으로 쓰러졌다. 놈은 떨어진 나이프를 주워 원우의 복부에 꽂아 넣었다. 그리고 재빨리 도망쳤다. 주차장 바닥을 마찰하는 구두굽소리가 멀어져갔다. 숨이 끊어져 가는 원우는 조치가 필요했다. 정한은 원우를 병원으로 옮기고 수술실 밖에서 손을 떨며 기다렸다. 다행히 원우의 숨이 다시 붙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다행이었다. 그건 정말로 다행이었다. 다행이지 않은 일은 따로 있었으니까. 푸르스름한 병실 안에서 원우가 재생산되는 동안 정한의 부모가 도망쳤던 놈들로부터 기습을 당했다. 새벽으로 넘어가는 자정에서였다. 치료를 맡은 담당의사는 과다출혈 때문이라고 소견했으나 정한은 사유 따위 개의치않기로 했다. 그 일은 남모를 일로 남아버렸다. 실제 사인은 눈뭉치처럼 결집한 전원우와 윤정한이 된다. 그리고 아무도 울지 않았다.
정한은 울지 않는다. 그래서 원우는 정한을 살리고자 했다. 정한이 준 목숨을 어떻게 쭉 유지해서. 하지만 이 지경까지 올 정도로 잘 안 됐다. 윤정한은 부모를 따라서 이딴 일을 하게 되었다고 하야말간 한 얼굴로 시체처럼 읊조렸다. 어느 날의 부모님의 장례식에서. 원우는 금방 죽을상인 낯빛으로 윤정한을 해석하기 바빴다. 비석 옆에 서서 윤정한은 참담했다. 참담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둘의 입 밖으로 숨이 새어 나와 얼어붙은 공기를 배경으로 연기처럼 피어올랐다. 높기만 한 파란 하늘은 윤정한을 안기에 턱없이 부족했다.
……내가 왜 좋아?
반응을 바라는 정한의 눈은 너무도 무구해서 원우는 입술을 달싹였다. 하마터면 눈빛에 휩쓸려 대답할 뻔했다. 원우는 가끔 정한과 소통을 못 할 때가 있어 안도한다. 단순하고도 슬픈 이유였다. 자신은 모국어 외에 들을 수 있는 언어가 없었으니까.
형. 내가 모르는 말 하지 말고.
그러니까, 부모님을 따라한 윤정한을 따라한 전원우가 이 일에 뛰어든 건 윤정한을 살리고 싶을 뿐이라고.
그리고 저 책 좀 치우면 안 돼?
정한은 원우가 가리킨 침대 서랍 위를 쳐다봤다. 살인 필수 탐구 이론. 기억하기론 언제였던가 분명 누군가한테 전달받은 책이었다.
다 티나, 윤정한.
윤정한은 부모님이 찍어놓은 발자국을 따라 청부살인을 맡게 되었으나 살면서 이제껏 살인한 적이 없다. 그래서 전원우는 그걸 자신과 윤정한의 매개체로 쓴다. 이로써 윤정한의 발문(跋文). 그건 전원우가 집필한다.
전화가 한 통 걸려왔다. 하필이면 이때에. 원우는 키스를 멈추고 정한에게 휴대폰을 건넸다. 정한은 수화기에 귀를 대고 한참을 가만히 있었다. 민규가 다 말할 때까지. 시시콜콜한 얘기를 종알거리는 민규는 할 말이 더 없어 보였다. 관심 없죠. 그럼 이제 관심 가질 만한 얘기를 할게요. 그건 선언과도 같았다.
생각해봤는데요. 내가 당신들한테 내 다이아 주기로 했잖아요. 내 목숨 대신에. 근데 내가 그 계약인지 뭔지 다 깨부숴서 나 찾으러 온 거고…… 하지만 형은 바보같이 나도 못 죽였고…….
민규의 말이 줄줄 잇따라 나오는 와중에 원우는 정한의 목 부근을 깨물었다. 정한이 얕은 신음을 냈다. 원우는 정한의 볼을 쓰다듬던 손을 뗐다. 쇄골과 목 옆에 새겨진 발그스름한 상처들이 원우의 눈에 들어왔다. 이거 누가했어. 민규. 김민규……. 내가 그 새끼 잡아 오랬지, 몸 섞으라 했어? 낮은 목소리로 귓가에 속삭이는 원우를 정한이 비웃는다. 내가 왜 네 말을 듣겠어. 그때 민규가 수화기 너머로 부끄러운 듯이 조곤조곤히 자신의 언어를 내뱉었다. 그러니까…… 한 번 더 나한테 와줄래요. 다이아든 뭐든 줄 테니까. 나 아직 사랑한다고 말 못 해서……. 술이라도 마셨는지 민규는 발음마저 알코올에 잠식한 것 같았다. 이번엔 원우가 비웃었다. 사랑 참 좋아한다. 원우는 휴대폰을 옆으로 치워버리고 정한에게 더 밀착했다. 하아… 전원우, 잠시만. 원우가 턱에서부터 쇄골 아래까지 내려가며 입술로 정한의 표피를 문질렀다. 간다고 해. 어? 쟤한테 간다고 말해요, 형. 원우의 뜨거운 숨이 정한의 목에 닿기를 반복했다. 원우는 냉랭한 손으로 정한의 옷 안을 탐미한다. 아. 하지 마, 차가워. 참아요. 따듯해져. 원우가 아래에서 물어왔다. 여기도 만져줘? 정한이 야살스러운 눈으로 원우를 응시한다. 응. 그래서 원우는 바로 셔츠의 모든 단추를 다 풀어 벗겼다. 셔츠는 침대 옆으로 떨어졌다. 원우는 정한의 귀를 물기 위해 고개를 꺾었다. 그러다 보이는 유난히 빨갛고 탐스러운 귓바퀴에 눈길을 두었다. 누군가에게 잘근잘근 먹힌 흔적. 짜증나. 여기도 있네 이거. 원우는 다시 위치를 바꿔 정한의 입술을 씹어 삼킬 듯이 물었다. 애무는 한동안 이어졌다. 원우는 정한의 몸 이곳저곳을 손으로 부드럽게 쓸었다. 닿는 곳마다 차갑고 따듯하고 온갖 온도가 중첩해 금방 출처를 알 수 없는 열이 올랐다. 위로는 여러 번 입술이 맞닿았다 떨어지기를 반복했다. 마치 시간에 갇힌 둘처럼. 질척이는 음파가 골과 마루를 만들듯 끊임없이 되풀이된다. 전원우. 하아… 윤정한. 원우야. 응… 정한아, 정한아, 윤정한. 시발, 원우, 야. 조용히 해…….
뭐해요, 형 지금.
그 순간 말 없던 민규의 음성이 간신히 새어 나왔다. 목소리는 기계 같았다. 둘은 소리가 나오는 곳을 본다. 거친 호흡이 내뱉어졌다. 원우는 한번 머리를 쓸어넘기고 이를 보이며 미소짓는다. 그리고 정한의 이마에 차가운 입술을 짧게 붙였다가 뗐다. 상체를 일으킨 원우는 눅눅한 침대 시트 옆으로 방치된 정한의 휴대폰을 집어 들어 통보했다. 끝까지 잠근 자신의 카라 티셔츠 단추를 차례대로 풀면서.
야. 거기로 윤정한 갈 거야. 알아서 준비해 놔.
준훼이와 윤정한은 오랜만에 서로 얼굴을 봤다. 윤정한이 자기 자리로 돌아간다고 말하는 홍콩에서. 그때 그 강연장에 윤정한은 또 책을 들고 왔다. 파란 책. 필수 탐구 이론. 앞에 뭐라고 쓰여 있는 게 분명한데 표지 일부가 뜯어져 있다. 손으로 잡고 찢은 게 확실해 보였다. 준훼이는 추측했다. 그러니까 그 앞에 연애사랑로맨스연인. 뭐가 맞는지는 몰라도 들어갈 말은 무수해 보였다.
정한 씨 아직도 그 책 갖고 다니네요.
그러게요.
작문 수업은 왜 안 왔어요? 그동안.
우리 오랜만에 보면 반가울 거니까.
그 말은 정한에게 잘 어울리는 예쁜 말이었다. 홍콩에서, 정한은 오로지 글을 쓰기 위해 수업에 참여했다. 칼만 잡고 산 날들 때문에 연필 잡는 법이라도 까먹지 않아야 했다.
정한이 자리로 가 앉기 전에 준훼이는 정한의 의자를 손수 빼주었다. 준훼이는 그 어느 날보다 화사했다. 입고 있는 노란 카디건이 완연한 봄을 알리는 듯이. 수업이 진행되는 동안 책상 위로 서로의 팔이 자꾸 왔다 갔다 해서 교수로부터 몇 번 주의를 들었다. 정한과 준훼이는 오 미리미터씩 가까워졌고 그건 당연하게 같이 저녁을 먹자는 약속을 잡기에 충분했다. 둘은 택시를 타고 이동해 준훼이의 아파트에 도착했다. 집안에 들어서자마자 탄성이 터져 나온다. 준훼이가 마련해 놓은 피아노를 위한 거실. 베란다 창문에서 비추는 햇살이 투영해 피아노 몸체에 반사됐다. 모습이 지나치게 아름다웠다. 정한이 물었다. 피아노 잘 치세요? 그러자 준훼이는, 같이 할까요. 알려 줄게요. 소곤댔다. 상냥한 정성, 정성스러운 친절. 어쩌면 혹여나 관계의 발전 그 이상을 위한 필수적인 친절일지도. 정한이 생각하는 그 사이, 준훼이는 악보를 꺼내면서 다른 것도 같이 끄집어냈다.
맞다. 요즘은 집에서 시나리오를 번역해요.
준훼이가 책장에서 꺼내 온 대본은 내용물이 색색의 밑줄과 한자어로 가득 차 있다.
감독님이랑 친한 사이기도 해서 제가 맡았어요. 평소엔 공고문 정도만 번역하다가……, 이런 프로젝트는 처음이라서 설레요. 이건 이번에 미국에서 촬영할 영화예요.
정한은 건네받은 대본을 휙휙 넘기다가 손을 멈췄다. 머리말에 익숙한 이름이 쓰여있었기에 한 페이지를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주연 김민규. 김민규랑 아는 사이인가요. 정한에게선 갈라지는 목소리가 나왔다.
어떻게 알았어요? 미팅 자리에서 만나서 친해졌어요. 내 일을 좋아해 줘서.
준훼이의 기분 좋은 웃음에 정한은 침을 한번 삼키고 입 밖으로 궁금증을 꺼냈다.
만약에. 나를 좋아하는 사람이 내 목표를 쥐고 있다면 어떤 방식으로, 어떤 사람이 되든 기꺼이 그 사람과 함께할 의향이 있나요.
급작스러운 질문에 준훼이는 잠깐 뜸을 들였다. 짤각대는 시계 초침 소리만 또렷이 들려왔지만 정한은 귀를 막기 싫었다.
정한 씨는 어떤데요, 그 사람을 좋아해요?
준훼이가 물었다.
좋아할 거 같아서요.
그럼 하지 마요.
창밖으로 빗방울이 투둑투둑 떨어지는 소리가 조용한 공간을 울렸다. 준훼이는 정한을 잡아당겨 정한과 함께 피아노 의자에 앉았다. 펼친 악보에는 준훼이의 이름이 쓰여 있다. 그것을 한동안 쳐다본 정한이 말을 꺼냈다.
한국어로는 문준휘라고 읽나요.
맞아요.
준휘는 건반 위에 양손을 올렸다. 그리고 가만히 있는 정한의 두 손도 올렸다. 정한이 곁눈으로 보며 하나씩 음계를 건드릴 때마다 어여쁜 소리가 방 안에 울렸다. 정한은 준휘가 치는 손을 따라 한 옥타브 밑의 건반을 손댔다. 봄비가 어설프게 내리는 밤. 피아노를 연주하는 정한과 준휘는 말을 소곤거리며 주고받는 장면으로 남는다. 둘은 자꾸만 웃음을 참지 못했다.
주말에 뭐해요?
비행기 타요.
멀리 가요?
응.
못 보겠네요.
못 보면 어때서요. 보고 싶기라도 해요?
네.
정한이 손가락을 멈추고 준휘를 빤히 봤다. 준휘도 옆으로 고개를 돌려 마주 볼 수 있게끔 시선을 맞췄다. 그리고 정한의 어깨에 스르르 쓰러져 기댔다.
보고 싶어 할 테니까. 기다려 줄래요.
분명 준휘가 한 말이었으나 마치 자기가 내뱉은 것만 같아 혼란스러웠다. 정한은 자신의 일생을 돌아봤다. 남과 하고 싶은 말이 같음에 익숙지 않음을 느낄 정도로, 자신의 그늘에 깔려 황폐한 주검처럼 살아온 삶이었다. 그랜드피아노 정면에 위치한 거울에 비친 정한은 모습이 붉었다. 불그름하게 충혈된 눈으로 거기 있었다. 놀란 정한이 황급히 준휘를 쳐다본다.
준휘씨. 저 빨개요?
네. 새빨개요.
준휘는 정한의 입술을 보며 말했다.
어떡하지. 나 빨간 거 안 좋아하는데.
나도 안 좋아하면 되죠.
제가… 준휘씨를요?
아니요. 제가 정한 씨 우는 거를요.
나 운 적 없는데.
그래요. 그러니까 만약에라도 울게 되면.
그럴 일 없을 거예요.
내 생각을 해요. 나는 당신과 함께 살아가는 거 하고 싶어요.
닿았다 떨어지는 입술 안쪽이 열에 데인 것처럼 뜨거웠다. 여러 가지 색으로 천변하는 준휘는 정한에게는 순기능이었다. 김민규가 탐색하고 전원우가 연민할 때. 그럴 때 문준휘는…… 윤정한이란 이름부터 좋아해 마지않는다고. 이제 정한은 해야 할 일이 하나 남았다. 몇십 캐럿짜리 패물을 뺏는 일도 아니고 사람을 죽이는 일도 아닌, 잊지 않기 위해 주어를 수립하고 머릿속에 주입하는 일. 그것은 정한이 손수 만들어야 할 차례였다. 처음으로 푼 실타래에서 확증을 얻었다. 정한의 주어는 자신이었고, 정한은 그 자신을 주체화했다. 그로 인해 결국 윤정한은 깨닫고 깨달은 윤정한은 마지막 장을 찢고 찢어낸 윤정한은 책의 표지를 덮는 거로 끝내고자 한다. 지금으로부터 가장 붉어질 누군가로 인해.
주머니 안에서 원우가 쥐여 준 편도 티켓이 찢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