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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20. 12. 31. 13:00
작성자
hhh..


우의 이름표는 상앗빛이 난다. 우의 하얀 가운과 상앗빛 이름표. 가운은 세탁한 지 얼마 안 되어 보이나 종이는 빛이 바래 이름 끝이 잿빛으로 변색했다. 민규는 머릿속에 그걸 패러독스라 새겼다. 원 우. 신물 나도록 듣고 봤던 이름. 이름표에 쓰인 이름을 작게 읽다 글자 위에 부착된 생기 없는 얼굴을 주시했다. 생기뿐만 아니라 핏기도 없다. 피가 돌고 있긴 한 거야? 민규는 우의 왼쪽 가슴의 인쇄된 얼굴과 실제 낯을 번갈아 보며 그가 살아있음에 의아함을 품는다. PVC 명찰 안의 종이는 쭈글쭈글했다. 어쩐지 바탕색이 말갛지 않은 게 커피에 한 번 빠졌었나 하고 상상하지마는 별 볼 일 없는 생각이라 처분하여 포기한다. 그랬음 젖은 종이를 바로 빼버리곤 새것을 출력해서 넣었을 것이다. 향에 민감한 사람이라 들었으니. 민규는 그동안 얘기로만 들었던 우의 특성을 한가지 빼내어 적당한 입맛의 가설을 세웠다. 민규가 만든 가설들은 몇십 개씩 쌓여 그의 상상 안에 진득하게 눌어붙었다. 그런데 무언가 석연치 않았다. 우는 자기 앞에 펼쳐놓은 책을 주시하고 있었고 민규는 아까부터 시간을 셌다. 제가 들어왔는데도 우는 한마디 말이 없어, 이 침묵의 기록이 언제 깨질지 숨죽여 그를 지켜보기로 한다. 결국에 먼저 반응한 쪽은 민규였다. 민규가 주먹을 입술 쪽으로 갖다 대며 헛기침을 일삼자 그 가뿐한 행동에 마침내 우의 신경이 온통 민규쪽으로 기울었다. 우는 민규를 쏘아본다. 하지만 그렇게 보이려고 한 행동은 아니었다.



우는 선이 날카로운 사람이다. 허여멀건 낯에 기다란 눈매, 단단한 어깨뼈가 우의 냉철함을 곱절로 더했다. 때문에 어릴 때는 종종 기분이 안 좋냐는 질문을 들어야 했고 커서는 뭘 그렇게 노려보냐며 혼나기도 했다. 물론 고의는 아니었다. 우의 냉한 표정은 그저 일말의 꼬투리로써 유용했다. 새 학기에는 그래서 다들 우를 피해 다니다가도 어느샌가 우와 말이 트인 아이들은 나 쟤랑 이런 것도 했다며 죄다 자랑을 했다. 그 바람에 반 아이들은 누가 더 우와 친밀한지를 따졌다. 우를 조금이라도 점령한 자가 이기는 게임. 우가 차가운 아이가 아니란 것을 확정 지은 아이들은 곧잘 우의 억울함에 녹아들어선 우를 변호했다. 원 우 착해요. 따뜻한 아이인데. 그 말은 교무실에까지 번져나가 어느덧 당연시되는 문장으로 공공연히 사용되었으나 우는 그 변호의 원래 의미를 졸업할 때까지도 알아채지 못한 채로 살았다. 그러던 시간이 꽤 지난 어느 날의 술자리에 동창 A가 회포를 풀며 이야기를 꺼내서야 알았다. 어깨동무하고 으스대던 얼굴들. '그때 우리는 다 널 좋아했지.' 이런 삼류 고백 같은 문장으로 회고되는 자신의 학창 시절에 거대한 반감을 품을 수밖에 없는 것이, 구역질이 났다. 우는 차갑다는 소리를 듣고 자란 게 억울했던 적이 없다. 남들과 다르다는 이유로 특이 취급을 받았다는 게. 내가 특이한가? 하고, 사실에 관조해본다. 그제야 자신을 구경거리처럼 세워놓고 반응을 엿보던 엑스트라들의 얼굴들이 하나같이 떠올랐다. 우는 그 시절의 내깃거리였다. '야, 쟤 반응 어떨까? 해보자.' 하며 친절 속에 숨겨져 있는 본심을 지고 우를 감싼 아이들이 속으로 키득거리며 우를 질시했다. 결국, 우는 속속히 밝혀지는 A의 넋두리를 차마 더 듣지 못하고 양해를 구한 뒤 자리를 뛰쳐나왔다. 메스꺼운 속으로 허둥대며 집에 도착해서는 몇 번이고 음식물을 게워 내야 했고, 그날 밤에는 그 시절 친구들의 연락처를 한꺼번에 삭제한 뒤에야 잠들었다. 삭제는 한순간이었다. 워낙 교류도 없었던 사이라 고민 따윈 불가역적인 항목에 속해서. 그 후 남들이 지껄이는 평가는 더는 듣지 않기로 다짐했다. 일방향성 표류. 우는 머리 위로 떨어지는 파도에 자신을 담갔다. 한 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한창 학구열에 물들던 대학 시절, 후배가 지나가는 말로 우의 심기를 건드리는 발언을 내뱉고야 만다. '우 형은 차가운 나라에서 온 사람 같아. 알래스카? 스위스? 왜 그런 나라 있잖아. 형도 사시사철 내내 창백하다고. 그런 생각한 적 없어?' 그 말에 우는 아이슬란드를 한번 갔다 왔다고 거짓말했다. 충동적이었지만 발언을 철회하진 않았다. 그 탓에 동료들 사이에서 증폭된 신빙성이 우의 그림자에 마일리지처럼 가득 쌓여버렸지만. 사람들은 우의 무표정을 꺼렸다. 정확한 표현으로 하자면, 어려워했다. 사연이 있겠지, 따지는 건 허술한 지레짐작이고. 굳이 표현하자면 우는 자신의 낯빛과 반비례하는 친절함을 무기로 만들고 싶지 않았을 뿐이다.



그래서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아까부터 책장이 하나도 넘어가질 않네요. 마치 자길 보란 듯 힘껏 몰아붙이니 책 표지를 뒤집은 우가 민규를 본다. 다리를 꼬고 앞에 앉아있는 민규는 자신을 쓱 밀어내며 편한 자세를 취하곤 팔짱을 꼈다. 우는 눈을 가늘게 뜬다.

뭐하러 왔어요.

형 보러요.

일시 정지하는 사고. 급진하던 뇌 활동에 샛노란 지장이 생겼다. 과연 진심인지 쉽게 당당한 척하는 것인지 짐작할 수 없기에 우는 시선을 내렸다. 농담이에요. 할 말 있어서 왔거든요. 민규가 한 손에 들고 있는 플라스틱 컵에선 아메리카노가 출렁이며 얼음이 달그락 소리를 냈다. 우는 반사적으로 인상을 찌푸린다.

표정 좀 풀면 안 돼요? 누가 잡아먹기라도 하나?

우는 다시 한 철의 아이슬란드를 상기한다. 예전 일로 인해 침대에 눕기 전에 들인 습관은 몇 번이고 다큐멘터리와 여행 관련 프로그램을 시청하는 일이었다. 아이슬란드는. 지평 위로 뛰어오르는 혹등고래, 오로라가 뿌리를 내리면 생생해지는 청록. 별이 가득한 밤. 빛에 반하는 우. 상상했다. 빛에 소멸하는 우. 아이슬란드에서는 실명… 될 수도 있나? 우는 상상하고 상상하고 상상해 완전한 세계를 머릿속에 구축했다. 때 되면 가야겠다. 아이슬란드는. 우의 환상에 자극적이었다.

할 말이 뭔데요. 나는 치료를 하지, 얘기만 들어주는 사람 아니라서.

정신과 전문의 원 우씨 찾아온 거 맞아요. 저예요. 김민규.

우의 이름표를 흘깃 본 민규가 우를 향해 씩 웃어 보인다.

알아.

어, 정말 나 알아요?

예약자명이 뜨거든요.

아아. 우는 자신의 앞에 있는 모니터를 눈짓으로 가리켰다. 알아도 그 김민규가 여기까지 올 줄 몰랐지. 둘은 서로의 얼굴과 이름만 알며 어떤 일을 하는 지까지의 범주밖에 알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우가 본 민규는 딱 사진으로 본 젊은 나이에 맞게 활기찼으며 특유의 싱그러움을 뽐냈다. 민규의 벙벙한 얼굴에 놀라움을 감지한 우가 다음 대사를 기다리지만, 우의 안면에는 조그마한 파동조차 일지 않는다. 애쓰는 걸까. 민규는 속으로 자문했다.

반말 쓸까, 존댓말 할까? 아까부터 형이라고 하던데. 반말해도 상관없다는 거지?

우의 판단에 민규는 그제야 아하하. 하고, 해사하게 웃어버린다.

아, 너무 웃기다. 이제 예의 차리겠다고? 마음대로 해요. 어차피 이미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있으면서.

단연 하고픈 대로 하는 사람은 둘 중 민규였다. 우를 만나기 위해 예약을 하고 진료실에 들어와서 멋대로 형이라고 부르는 것은 우의 허락이 아닌 민규의 선택이었으니 우는 그 까닭에 어쩔 수 없는 질문을 했을 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래. 원하는 대로.

좋아요. 오늘 저녁에 일없는 거 알아요. 그러니까 나랑 어디 좀 가요. 밥이나 먹으러 갈까요?

우의 답이 끝나기가 무섭게 민규는 기쁨이 완연한 얼굴로 금방 대적했다. 목적 없는 방문은 아닐 거라는 걸 예감하긴 했지만, 자신의 예상이 생각대로 들어맞아 우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버릇처럼 거절하기 위해 숨을 고르고 입을 열었으나,

아니, 난….

뭐해요, 내 말 들어야죠.

뒤에 붙은 민규의 떳떳함이 우의 헛웃음을 막지 못했다. 일이 이렇게 꼬이네. 우는 곧바로 머릿속 회로를 가동했다. 적당히 뿌리를 내려 줄기를 세운 뒤 가지를 넓힌다. 민규를 이용할 생각으로.

가자. 우는 가운을 벗고 책상 위 차 키를 집어 든다.





상아색 클래식 비틀 앞에서 민규는 경악한다. 유연한 몸체와 매끄러운 굴곡. 옛날의 것이라기엔 지극히 멀쩡했다. 섬광이 도드라지는 헤드램프가 밤의 적요를 밝히자 지나쳐가는 사람들이 한 번씩 이쪽을 봤다. 클래식이 취향인가. 마니아들이 충분히 염원하고도 남을듯한 디자인이었다. 쉽게 구하지는 않았을 텐데. 민규가 가만히 서서 여러 차례 공식을 푸는 사이, 우는 조수석에 앉아 기다란 손으로 허리에 벨트를 채웠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민규는 어이없어 쓴웃음을 짓는다.

내 차도 있는데 굳이.

맘에 안 들어?

아니요. 그건 아니고….

거기 서서 뭐 해. 운전해야지.

네? 제가 해요?

그럼 면허 없는 내가 할까?

네?

앞에서 한번 놀랐던 민규가 이번에는 몇 배로 놀란다. 할 수 없이 우의 말을 따라 운전석에 올라타고는, 운전하는 내내 민규는 우의 행동을 주시하며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 세례를 던진다. '서른 넘도록 면허는 왜 안 딴 건데요.' '그냥. 누구 죽일까 봐.' '앞에 그냥이라고 한 거랑 너무 안 맞는 대답 아니에요?' '나 때문에 누가 피해 보는 거 싫어.' '형. 튀는 거 좋아하죠?' '아니.' '그럼 이런 클래식한 게 취향?' '아니.' '차는 직접 샀어요?' '선물 받았어.' '세상에. 혹시 면허도 선물 받을 예정인 건…….' '그런 몰상식한 짓은 안 해.' '다행이다.' 민규는 안심의 한숨을 내쉰다. 급하게 나온 우의 지성적인 면모에 민규는 안도감을 느꼈다. 재즈풍 음악이 흘러나오는 차가 도로를 질주하고 창문 사이로 바람이 넘실거렸다. 바람에 따라 찬란히 흩날리는 둘의 머리카락. 밤거리의 야경이 우와 민규를 비추었다. 고즈넉한 세상은 우에게 유미적으로 다가왔다.

사실 밥이나 먹자고 만나러 온 거 아니에요. 그렇게 말하면 의심 않고 따라올 것 같아서 한 말이었고.

민규가 차를 주차하고는 급히 내려 우 쪽의 문을 열어주었다. 우는 느릿하게 차에서 내린 후 기대섰다. 민규도 우도 서로를 바라본 채로 멈췄다.

여기서부터는 나 잘 따라와요. 정말 정말 중요한 일이니까.

우가 고개를 끄덕이는 걸 확인한 민규가 먼저 발걸음을 내디뎠다. 오래된 간판이 걸려있는 건물이 있다. 가로등이 없어 간판의 글자마저 보이지 않을 정도로 주변은 어둠에 잠식했다. 민규를 따라 지하실로 내려가니 철문 하나가 나온다. 민규가 능숙하게 철문을 열자, 세로로 투명한 비닐이 길게 늘어진 채 흔들거렸다. 여기에요. 들은 적 있죠?

빙그레 웃은 민규가 우를 한번 쳐다본 뒤 움켜쥔 비닐을 젖혔다. 그 틈 사이 비치는 광경에 우의 두 눈이 휘둥그레진다.





심장에서 꽃이 터져 나오는 시대에 도래했다. 인류는 증명에 앞서서 말한다. 좋아하는 사람을 마주하니 심장에서 꽃이 터져 나옴을. 변질하는 속성에 사람들은 적응하기 어려워했고 그 덕에 세상이 우왕좌왕했다. 병은 바이러스처럼 퍼져나갔고 증명은 하루하루 비일비재하며 꽃은 순차적으로 늘어났다. 민규는 꽃을 산다. 사서 팔았다. 누구도 시키지 않는 일이었지만 민규는 열심이었다. 돈이 됐으니까. 단순히 돈이 된다는 이유로 하는 모든 행위는 아니었으나 구체적인 변명은 하나로 통틀었다. 꽃이 터져 나오기 시작한 뒤로 학자들은 꽃을 섭취하면 도파민이 과잉 생성된다는 사실을 밝혀냈고 심장에서 터져 나온 꽃은 평범히 피어나는 꽃과는 다른, 마약을 흡입한 것과 같은 효과를 높인다는 이론을 내세웠다. 이에 정부도 부랴부랴 견해를 내놓았다. 사랑만 하세요. 꽃은 먹지 마세요. 정돈된 문구가 플래카드처럼 거리마다 사방으로 울려 퍼졌다. 사랑은 불법이 아니라서 다행이네. 민규는 상자 안에 꽃 무더기를 꽉꽉 눌러 담으며 뉴스를 보는 중에 중얼거렸다.

'꽃을 식용으로 거래하는 거, 불법이잖아요.'라는 질문을 우는 같이 점심을 먹던 동료 의사들에게서 들었다. 선생님은 어떻게 생각해요? 의사 A가 질문하자 우는 모호한 대답으로 일관했다. '글쎄요. 필요충분조건이라는 게 있고 또……, 다들 거기에 기초하며 사는데요. 사랑해서 꽃이 터지고.' 횡설수설. 이런 질문을 받을 때마다 면역이 약해져서 곤란스러웠다. 우는 잠시 뜸을 들인 뒤 말을 이었다. '꽃 때문에 사랑하는 거 아니니까요. 사랑 못 하는 사람들은 꽃이라도 좀 먹어도 되지 않나요?'

수저를 내려놓은 의사 B가 두 눈을 또랑또랑 빛내며 묻는다.

'원 선생님도. 터진 적 있으세요?'

'꽃이요? 아니요.'

'왜요? 좋아하는 사람이 없어요?'

'저는 그런 거 못 해요.'



사랑을 규정하는 거. 감히……, 스러워서.



사랑하는 사람에게만 터져 나오는 꽃이라면 우는 차별이라 치부한다. 병이라면 치료하는 게 우선이어야 하는데 별 대책이 없는 정부와 의료계의 방치와 무시 대중의 자만은 지긋지긋한 답습이었다. 그러다, 지나간 계절이 돌아오는 동안 내내 애써 반발하며 살던 우가 신 실장을 만난 것은 가히 우연이었다. 신 실장은 우가 애정하던 환자로 신수현이라는 이름을 쓰며 자신의 인생에 환멸을 섬기고 있었다. 살아서 죽겠다는 말을 달고 살던 그녀는 정보통처럼 어디서 들어온 얘깃거리로 우에게 다양한 소식을 전하곤 했다. 심장에서 꽃이 터져 나오는 병이 퍼질 거라는 소문도 맨 처음 신 실장에게서 들은 거였다. 신 실장은 전폭적으로 우에게 관심을 두었고 우도 전폭적으로 그녀를 치료했다. 그리고 퇴원 날. '원 선생님.' 신 실장이 진중한 목소리로 한 가지 제안을 건넸다. '선생님, 저와 함께 일하지 않을래요?' 물꼬를 트며 말을 이어나가는 신 실장에 우는 그 제안을 솔깃하게 들었다.

'꽃을 모아요. 엄청. 엄청나게 모아서 다시 되파는 거죠. 급하게 찾는 사람들 있잖아요. 다들 환장해요. 그 맛에. 그런 사람들은 자기가 지급 할 수 있는 최댓값을 불러요. 그럼 어떻게 되게요? 주머니에 돈이 이만큼씩 쌓인다고요.' 신 실장이 눈앞에서 돈뭉치 꺼내 흔들며 과하게 웃자, 우도 따라 미소를 지었다. '선생님. 꽃 먹어본 적 있으세요?' 우는 고개를 내젓는다. '우리 업계에 업자들 아주 많아요. 이런 일 하는 사람들이요. 다들 자기 구역이 하나씩 있고.' 신 실장의 말을 유심히 듣던 우는 문득 떠오른 생각에 입을 열었다. '만약 꽃을 속인다면 어떡하죠?' '일반 꽃으로는 속일 수 없죠. 심장에서 나오는 꽃은 일반 꽃이 아니잖아요. 아, 안 드셔봐서 모르시겠구나. 어떻게 되냐면, 음. 우선 안에서 열이 끓어요. 혈색이 돋고, 세상이 돌고. 마약에 지배당하듯. 아. 선생님은 마약 해보신 적… 없으실 거고.'

며칠 후, 우는 신 실장이 가져온 계약 내용이 적힌 서류에 반듯한 모양으로 서명을 했다.

'선생님은 장부에 기록만 해주시면 돼요.' 신 실장은 벙긋 웃은 뒤 계약서류를 품속에 넣었다. 그리고 우는 문서를 만들어 돈을 벌기 시작했다. 새로 개설한 계좌엔 적지 않은 돈이 쌓였다. 밀거래를 사칙이라 여기는 건 마음 먹기에 따른 쉬운 일이라 우는 그녀를 따라 움직였다. 신 실장이 자료를 보내주면 우는 하루 치 거래된 꽃의 양과 액수를 계산하여 나온 값을 출력해 전송했다. '이제 어떻게 돼요?' 우가 물었다. '확인해서 김 사장님한테 전송해요.' 신 실장이 답했다. '김 사장?' 중얼거리며 우는 출력물을 살폈다. '사장님은 제 구원자세요.' 밝은 목소리. 신 실장의 파안에 우는 낯을 일그러트리지 못하고 부드럽게 웃었다. '언제 한번 자리를 마련할게요. 이분이에요. 원 선생님도, 사장님과 한번 뵈었으면 해요. 좋으신 분이니까.' 신 실장의 지갑에서 사진 한 장이 나왔다. 흑백에 배경도 어둡고 피사체마저 검은 셔츠를 입고 있어서 한눈에 보기엔 어려운 형태였으나 역설로, 얼굴은 구별할 수 있었다. '어리네.' 우의 가는 손이 떨렸다. '성함은 김, 민, 규요.' 신 실장이 음절에 힘을 주며 말함에 우는 신 실장의 진심을 정말로 이해한 척 답했다. '아. 네. 좋을 대로 해요.' 종이의 모서리엔 담당자인 우의 이름이 적혀있었고 그 위로 우의 서명이 그려졌다. 사실 우는 이런 일로 돈을 벌고 싶었다기보다 단순히 앞으로의 구조가 어떻게 굴러갈지가 무척 궁금했다. 궁극적인 호기심. 때가 되면 아이슬란드를 가기로 다짐한 것과 같이. 처음에는 그냥 그렇게 생각하기로 한 게 다였다.





그런데 지금 이 온실에서 우는 뭘 해야 하는가. 한참을 사색하며 방울이 송알송알 맺힌 벽을 쓸던 우가 고개를 돌렸다. 시선 끝에서는 민규가 바닥에 앉아 종이박스를 휴대용 칼로 뜯어내느라 여념이 없다. 콘크리트로 둘러싸인 공간에 비닐로 된 온실 한 채가 설치되어있다. 꽤 넓었다. 그리고 그 안에는 온통 꽃. 꽃이 전부였다. 테이블 위 데이지 한 송이는 꽃잎, 줄기, 이파리별로 삼등분 되어 나누어져 있어서 누군가가 연구목적으로 해체하다 만 흔적이 역력했다. 온실 밖으로는 철제 선반마다 상자가 가득하였고 종류별로 분류되어 하나씩 이름표를 단 꽃들의 천지였다. 때마침 느닷없이 어디선가 온풍이 우를 감싸 안아와, 우는 여름 병을 앓듯 짧게 몸을 떨었다.

이것 봐요.

상자가 뜯어지고 하얀 히아신스가 가득 넘쳐 흩날렸다. 떨어진 히아신스 꽃잎 한 장을 물어뜯어 맛을 본 민규는 지긋이 눈을 감았다 뜬다. 우가 민규를 향해 다가갔다.

심장에서 나온 히아신스는 부드러운 맛이에요. 실크처럼. 이런 맛만 원하는 고객이 있어요. 워낙 까다로운 사람이라. 궁금해요? 누군지 알면 깜짝 놀랄 텐데.

왜?

민규가 실실거리며 키득키득 웃자, 우는 확신했다. 분명히 이 일을 즐기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엄청 유명한 연예인이요. 그런 사람들이 우리 브이아이피니까. 신분이 높을수록 더 귀하고 사는 양도 더 어마어마해요.

신분. 사회적 위치에 따라 혜택과 취급이 달라지는 거. 우의 가정도 그러했다. 우는 어렸을 때부터 이사님 소리를 듣고 자랐다. 아버지는 줄곧 우스갯소리처럼 우를 차기 이사님이라는 애칭으로 불렀다. 그래서 우는 귀를 막았다. 허황이었다. 몸부림치고 싶었다. 꿈에서도 소리가 우를 떠나지 않아 귀는 진물이 날 듯했다. 나중에 안 사실로, 아버지는 회장이었다. 집안과 밖으로 정장을 입은 남자들이 자주 드나들었고 창문을 내다보면 아버지는 그런 남자들과 검은색 세단을 타고 어디론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곤 했다. 아버지가 모 건설회사의 큰 손이라는 걸 안건 아홉 번째 생일이 지나서였고. 그 시절 아버지의 관심은 온통 사업에 쏠려 있었기에 우는 간접적으로 애정을 벗었다. 그랬던 지금의 우가 민규를 바라본다. 이제 막 스물예닐곱 정도 된 앳된 얼굴. 그렇다면 민규가 교복을 탈피할 무렵, 우는 대학 졸업식장에서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읽고 있었을 터다.



보여줄 거 있어요. 몸을 일으킨 민규가 우의 셔츠 소매를 잡아끌어 어딘가로 이끈다. 그러다 한 곳에 멈춘다. 유독 도드라지게 튀어나온 콘크리트 벽에 나무로 된 작은 문이 있었다. 주머니에서 키를 꺼내 헤실헤실 웃었다. 짜잔. 열린 문 안쪽으로 펼쳐진 이질적인 풍경에 차마 우는 숨을 뱉을 수 없었다. 그림자 가득 낮은 채도의 붉은 네온. 내부는 마치 작은 숲을 구성해 놓은 것 같았다. 해바라기. 베고니아. 플록스…. 수를 헤아려보지만 이루 말할 수 없이 소려한 각양각색의 꽃들이 차례대로 정돈되어 공간을 꾸민 정경에 우는 말을 잃었다. 뭐해요. 들어가요. 우를 깨우듯 속삭인 민규의 도움으로 우는 시각의 장막을 찢어버릴 수 있었다. 천천히 내부를 둘러보다 습기 때문인지 미끄러운 타일 바닥을 밟은 우가 중심을 잃고 넘어질 뻔하자, 민규는 우의 얇은 팔목을 잡았다.

조심해요. 뿌듯한 얼굴이 우를 향한다. 우는 어안이 벙벙했다. 이에 민규는 벽에 긴 가지를 뻗은 장미 넝쿨을 긴 손가락으로 매만지며 관심을 끌었다.

꽃이 터져 나올 때 씨앗도 같이 나오는 거, 알고 있어요? 

화분에 제각기 꽂혀 있는 꽃들은 마젠타색의 붉은 네온에 먹혀들어 싱그러움을 잃은 것처럼 보였다. 민규는 화분에 있던 해바라기를 우에게 건넸다.

받아요. 우리 동업하는 사이잖아요.

뻗은 손을 흔드는 민규의 재촉에 못 이긴 우가 해바라기를 받아 들었다. 확연히. 돈이 될 만했다. 먹기 좋게 탐스러운 꽃. 대번 신비로움에 기인하는 인류의 결정체. 김민규가 발견한 정성. 붙잡을 새도 없이 우의 사고는 새 지평을 열었다.

심장에 씨앗이 잉태되었다가, 한 번의 폭발로 인해서 꽃이랑 같이 터져 나와요. 평생에 단 한 번. 좋아하는 사람 앞에서 그런 꼴이라니 웃기지 않아요? 아무리 사랑한다 해도······.

해도?

그런 식으로 감정을 들키는 게, 좋기만 한 건 아닌 것 같아서.

민규는 자신을 뚫어지게 보는 우를 의식하다 멋쩍은 웃음을 짓는다.

아무튼 그래서. 그런 씨앗들을 모아서 개화시킨 거고요. 대박이죠? 이게 다 돈이잖아요.

너처럼 하는 사람이 너 말고 또 있어?

업자 중에서요? 아뇨, 그중에서는 없어요. 이상하죠? 분명 아는 사람도 있을 텐데. 이런 중요한 사실이 뉴스엔 안 나오더라고요.

자리를 옮긴 민규는 쪼그려 앉아 타일 바닥에 정갈히 놓인 꽃을 하나씩 관찰하기 시작했다.

형, 더 대박인 거 알려줄까요. 내가 키운 꽃들이요, 전부 내 전 애인들 심장에서 나온 거에요.

갑작스러웠다. 갑작스럽게 치고 들어오는 민규의 고백에 우는 모멸감을 느낀다. 터져 나온 꽃 사이로 씨앗을 찾아 심어서 개화시키고 매도해버리는 그 지극한 정성을 누가 기특하다 할 것인가. 김민규는 사랑을 사고파는 중이라 애처롭기 짝이 없었다. 우는 곧장 그 시스템에 반발했다.

징그러워.

우의 반발에 순간 온화했던 얼굴이 삽시간에 굳어진다. 두 눈동자에는 빛이 묻어있지 않다. 허탈함이 터져 나왔다. 민규는 이해 안 된다는 표정으로 우를 응시했다. 불그스레한 색의 조화. 색감부터 판연히 야릇했다. 우가 보는 그 낯에. 발열된 마젠타는 거기에도 있었다. 뭐가요? 꽃 때문에 가짜로 그런 짓 하고 사는 게. 내가 돈 벌려고 가짜 연애한다 생각해요? 응. 그것도 그런데 애인들한테서 나온 씨앗으로 꽃을 키우는 거. 그게 왜요? 너 생각보다…. 생각보다 어떤데요. 문제 될 거 없잖아. 게네도 잘한 건 없지, 돈만 꺼내서 보여주면 자기들이 좋다고 따라오던데. 그러니까 터지던데요. 심장에서. 펑, 하고. 

속물이지, 돈으로 사랑이나 사고. 

아니지, 순서가 잘못됐잖아. 걔들이 먼저 사랑으로 돈을 사려 한 거죠. 

돈으로 살 게 얼마나 많은데 고작. 

우는 말을 더 잇는 대신에 인상을 찡그렸다. 어느새 가까이 다가온 민규는 시선을 내려 우를 노려봤다. 시선 안에 잡히는 날카로운 두 눈. 민규는 쓰디쓴 웃음을 띤 채 입가에 조소를 머금었다.

나 되게 사랑 많이 받는단 말이에요. 형 같은 사람도 수두룩하게 많이 만나봤는데···.

나 연상 잘 꼬셔요. 우의 접힌 셔츠 카라 깃을 펴주면서 우가 이해 못 할 것을 과시하는 김민규. 그렇다면 그건 김민규의 이상일테고. 우는 불현듯 묻고 싶어졌다. 어쩌면 김민규는 단순히 우월감을 느끼고 싶은 건지도 모른다. 하지만 위법에 따라붙는 우월감이란 대가가 크고. 그래서인지 우는 자신의 앞에서 당차고 제멋대로인 명료한 낯이 껄끄러웠다.

너는 그럼 왜 안 터졌는데? 네 애인들은 널 사랑했지만 너는 사랑한 적 없고. 벌써 증명된 거 아니야?

형이 날 어떻게 알고 그딴 말을 해요. 안 터졌다고 한 적 없어요.

터졌다고 한 적도 없잖아.

민규는 눈에 띄게 당황했다.

나는 그런 거 신경 안 써.

꽤 단호한 어투지만 목소리엔 떨림이 묻어있었다. 자기 앞에서 아닌 척을 하는 민규란 흥미를 자극하는 매체다. 우의 손끝에서부터 희열이 닿았다. 이제는 우가 민규를 자극할 차례.

안 겪어본 사람이 겪어본 것처럼 말하는 게 얼마나 짜증이 나는데.

순식간에 민규의 미간이 찌푸려진다. 자극은 우의 호기심에서 비롯한 산물이고 우는 그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갈게. 나랑은 상관없으니까. 앞으로의 일은 네가 알아서 하고.

들고 있던 해바라기 화분을 민규에게 내던지듯 건넨 우가 자리를 벗어나려는 순간, 민규가 그 틈을 놓지 않고 우의 팔을 붙잡아 세운다.

간다고? 일 그만두고 이제 와서 고발이라도 하게? 형. 진짜 어떻게 되는지 몰라서 그래? 나뿐만 아니라 네 의사 인생도 같이 끝장나요···. 형 되게 모순적이다. 내가 하는 일 본적은 있어요? 형이나 겪어본 것처럼 말하지 마요. 신 실장님 믿고 얼굴도 모르는 사람한테 일 맡긴 나는 뭐가 돼.

민규의 논증에도 까딱 않는 우는 잡혀있는 팔을 떨어트리곤 발걸음을 돌리려 했다. 그러자 문득 하나의 의문이 머릿속을 스쳤다.

말 나온 김에, 신수현 씨가 널 구원자라 부르는 이유가 뭐야?

예상치 못한 질문이 튀어나온다. 그러나 민규는 의외로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반문했다.

그럼 그전에. 내가 형 보러 온 진짜 이유 알고 있어요?

해바라기를 탁자에 내려놓고, 민규는 소파에 앉아 다리를 꼬았다. 그리고는·····.

궁금했어요. 의사가 뭣 하러 이런 일에 끼어드나 싶어서.

장난기 어린 얼굴로 우를 주시한다.

그런데 꽤 배짱이 있는 건지 아니면 오기가 센 건지.

질세라 우도 가만히 민규를 본다. 시선이 맞닿자, 꼭 생각이 읽히는 거 같았다.

일부러 모르는 척하는 건지.

우는 잡고 있던 문손잡이를 놓았다.

후자면 나는 형을 더 알아야 하고.

어린 나이에 걸맞도록 민규의 기세는 등등했고.

형이 장부 조작했잖아요.

우의 머릿속에서 부러지는 가지 하나. 톡, 하고 으스러진다. 우는 짐짓 놀랐다. 민규에게는 들리지 않을 소리가 자신에겐 제법 컸기에. 누구한테 들었어? 하고, 입 밖으로 내뱉지 못한 말을 삼켰다. 우는 시선을 어디에다 두어야 할지 고민이었다. 그거 때문에 추궁하러 온 건데. 뭘 원해요? 뭐가 필요해서 그러는데요. 남의 사업에 끼어들어서 일을 망치냐고요. 왜. 얼굴만 봐선 그럴만한 인물은 아닌 거 같고. 이 일도 돈이 목적인 거 아니죠?

어림짐작으로 일하면 망해.

아하하… 아, 무슨. 꼰대 같아.

민규는 한바탕 웃었다.

형 혹시 지금 삶에 무슨 문제 있어요? 아니면 학생 때 못해본 일탈을 이제 와서? 하긴 칼잡이 짓도 하루 이틀이어야지. 몇십 년을 거지 같은 영단어들과 씨름하면서……, 으. 나 같으면 지루해 죽었어요. 그렇게 해서 버는 돈은 어때요? 특별해요? 그런데요. 단순히 그거 때문에 나랑 계약한 거면. 그럼 너무 유치해. 알아요?

우가 발끈하여 앉아있는 민규의 멱살을 쥐어 잡아 일으켰다. 찰나에 벌어진 일이었다. 민규는 턱밑까지 따라붙은 우의 손을 잡았다. 두 사람의 힘이 마주 닿다가 결국 한쪽 벽으로 밀어붙이는 우에 의해 민규는 벽에 등이 부딪히고야 만다.

입 다물어. 나는 치료해야 할 환자들이 병동에 수두룩해. 그 사람들은 하루하루를 간절함으로 버티며 살아. 너처럼 남들을 어떻게 속일지 머리 쥐어짜고 시발 그런 건 생각하지도 않는다고. 아니 못하지, 왜? 사는 게 너무 간절해서 자기 자신도 못 속이거든. 너는 그렇게 살아봤냐고.

마침내 겉으로 무장하고 살았던, 지금껏 숨겨놓은 처절함이 비로소 터져 나오는 순간.

와. 처음 본 사람한테 이런 말 들으니까 기분 진짜 뭣 같다. 어디로 빼돌렸어요? 솔직하게 말하면 여태까지 우리 거래했던 거 다 없는 일로 칠게요. 그런데 만약 하나라도 거짓이었다, 그럼 좋게는 안 끝나요. 

우는 민규의 두눈을 응망하다 잡고 있던 손을 털었다. 티 안 날 줄 알았나 봐. 민규는 구겨진 셔츠를 피며 말한다.

너 잘못 짚었어.

정말요? 정말 믿어도 돼요?

나는 아니고. 배후가 있다고 생각이 드는데.

아까 어림짐작으로 일하면 망한다고….

그럼 네가 본격적으로 조사해봐.

제안을 한다. 우가 계속 꼿꼿이 민규를 보고 있어, 민규는 자연스레 우의 얼굴에 시선을 떨어트렸다. 분명, 흐릿한데 쨍한 인상이었다. 의사와 불법 밀매상 사이. 주변인 중 그 누구도 앞과 그 뒷면을 모를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니 민규는 비교적 즐거웠다. 어쨌든 우가 숨기는 모습이 자신에 의해 비롯된 것이라는 걸 알았으니.

만나죠. 그럼 나 다음 주로 예약 잡아주세요. 조사해 올게.

민규가 제안을 수락했다. 그러자 우는 손바닥을 내민다. 그럴 필요 없어. 민규는 눈을 깜빡였다.

뭐해. 그 모습을 보던 우가 재촉한다. 핸드폰. 그러자 아, 하고 작은 탄성을 내뱉은 민규가 핸드폰을 꺼내 우에게 건넸다.

내 번호야. 우선 나부터 털어보라고.

좋아요. 잘 쓸게요.

민규는 발걸음을 옮겼다.

아. 그리고, 다음엔 진짜로 밥같이 먹어주죠? 어디서 어떻게 보게 될지는 모르지만.

민규가 손을 좌우로 흔들며 퇴장한다. 그 모습에 어이없어 헛웃음이 나왔다. 성격은 안 변했네. 슬슬 부는 바람이 차다. 우는 주머니 속에 있던 차 키를 테이블 위 뜯어진 데이지 옆에 나란히 놓고 문을 닫았다.





병동으로 돌아온 우는 제일 먼저 의무기록실에 들러 책 한 권을 대출했다. 환자 이름과 번호. 그리고 병명. 우는 눈으로 글자를 훑었다. 생각해보니 거의 몇 개월이나 지났다. 다 지난 일이었지만 우에게는 어제보다 뚜렷한 기억으로 기록된다. 그 기억에 뭉쳐 짓눌린 얘기들로만 엮인 진료기록을 하나씩 살펴보다 떠오르는 생각에 눈을 감았다.



'어떡하죠. 환자분이 선생님 보고 싶다고 하는데.'

'내가 그쪽으로 갈게요.'

'아니요. 선생님, 오실 필요 없어요. 김민규 환자분 이미 사라지셔서…….'



겨울의 일이었다. 발끝이 시리던 겨울의 일. 십이월이었고 겨우살이가 가득하던 밖이었다. 병원 입구에 눈이 산처럼 쌓여 쉴 새 없이 비질을 해야 했던. 밤이 소려하던 그해의 말미에 우는 감기를 달고 살았는데.

전화를 끊은 우가 복도 끝에서부터 빠른 걸음으로 병실을 찾았다. 402호 김민규. 402호 김민규. 중얼거리면서. 하지만 계단을 올라 도착한 402호에는 아무도 없었다. 침착해야 했다. 더는 침착할 수 없었지만 찾아야 했다. 찾아서 김민규가 했던 그 말을 다시 들어야 했다. 우는 필사적으로 주위를 살폈지만, 사람들은 저마다의 바쁜 걸음으로 우를 그냥 지나쳐갔다. 그래서 아래로 내려갔다. 그때, 우가 서 있는 곳으로 분홍빛 무언가가 우수수 떨어진다. 떨어져서 정확히 시야를 가렸다. 우는 그대로 멈춰 섰다. 사뿐히 콧등에 앉은 것을 떼어보니, 작은 꽃잎이었다. 우는 계단에 서서 본능적으로 위를 올려다봤다. 위층 다리에서 우를 내려다보는 상기된 얼굴의 민규와 눈이 마주쳤다. 휘날리는 꽃잎들에 안절부절못하는 두 뺨이 붉었다. 민규는 가쁜 숨을 몰아쉬곤 철로 된 봉을 지지대 삼아 힘겹게 몸을 일으킨다. 그리고 입을 막았다. 민규의 쇄골. 아니 쇄골보다 아래, 저 아래 갑자기 터져 나오는…….

그 상이 둘의 눈동자에 맺힐 때, 우는 위에서 쏟아져 내리는 그것을 가만히 맞다가 재채기를 했다.






나의 생애를 인류봉사에 바칠 것을 엄숙히 서약하노라 했던 게 딱히 오래전이 아닌데. 옛날 옛적 이야기가 아닌데. 우는 민규를 보다가 턱을 괸다. 스물 중반 김민규의 담당의였던 기억에 다시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되짚어가며 민규의 손끝으로 시선을 고정한다. 열심히 상자를 감싼 포장지 리본을 풀고 있었다. 우가 건네준 것이다. 민규는 느껴지는 시선에 우를 흘깃 봤다. 웃는다. 왜요? 뭐가. 웃었잖아요. 내가? 아닌데. 아니긴 뭐가 아니야, 아까부터 나 쳐다보고 있었으면서.

같이 밥 먹자고 약속 한 사람이랑 정말로 밥을 먹게 된 것은 우의 일대기에서도 독특하다고 치환할 수 있는 일 중 하나. 나랑 밥 약속한 사람들은 그 뒤로 나를 찾지 않던데 얘는 여전히 질기잖아. 특성처럼. 수트 차림의 팔을 따라가 보면 보석이 박힌 시계가 반짝인다. 꼬박꼬박 정장도 차려입고. 애처럼 구는 건 이제 포기한 건가. 우의 입꼬리에서 차분한 웃음이 새어 나오자 민규는 따라 웃었다. 걱정이 없어 보이는 이면에 궁금증이 생긴 우가 묻는다. 그리고 쉬이 튀어나오는 대답.

이다음에 뭐할 거야.

형 뒷조사 더 열심히 해야죠.

나 따라다니게?

아니, 그건 상황상 좀 어려우니까.

딱히 이렇다 할 계획도 없지? 털어도 안 나와서.

날 선 발언에 민규는 행동을 멈추고는 생각하는 척, 우가 준 상자를 막 열어보려던 것을 중단하고 눈을 데구루루 굴렸다. 그 상태로 입을 열었는데 필시 다른 화제로 넘어가려는 투의 말이 나온다.

형은 그런데 왜 이름이 외자에요?

굳이 찾은 질문이 이름에 대한 거라니. 우는 실소를 터트렸다.

태어날 때 한 글자 죽이고 태어났어.

참나,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

참나? 그건 우가 하고픈 말. 어이없는 우의 대답에 민규도 어이없었으나 우를 모른 채 사는 김민규는 더 어이없고 의아하다. 여기서 가장 말이 안 되는 건 외려 김민규 본인. 이상하지. 마치 나를 처음 본 사람처럼 대하면서 한 번 더 태어난 새사람처럼 구는 것이. 우가 절망을 안았던 그 날과 전혀 반대의 상황에서 우는 다시금 떠오르는 예전 기억을 애써 지워야 했다. 관조한다. 무슨 말도 안 되는 김민규. 내가 좋다고 졸졸 따라다니다가 날 찾아와 끝내 꽃을 터트린 김민규. 발간 볼을 한 채 활짝 웃던 너. 나를 좋아하던 너. 내가 좋다던 그 김민규랑 지금의 네가 같은 너라는 게. 우는 심장이 꽃잎처럼 한 잎씩 뜯어지는 기분이었다. 숨기고 있어 봐도 쓰라리고 저렸다. 다시 만난 처음이었으니까. '다시'와 '처음'이 한 문장 안에 동시에 오는 건 패러독스다. 김민규를 다시 만났는데 처음으로 돌아가야 하는 게. 우는 입술을 깨문다. 고생한 결과가 이거야. 고작 이거라고. 결국 이따위인데. 그래도 난 너의 재등장에 안심이나 해야 하니. 날 잊어버린 너라도? 우가 가슴속에서 슬픔을 난사하고 있는 동안 민규는 밝은 모습을 유지한 채 발걸음을 옮겼다.

내가 형 조사한 거를 읊어줄게, 귀 열고 잘 들어 봐봐. 신난 음성과 밝은 얼굴로 민규는 소파에 앉아있는 우의 옆에 다가가 밀착했다. 생긴 거 답게… 트위터 안 해. 당연히 페이스북도 안 해, 어떤 SNS 계정도 없어. 친구들과 소통 안 해. 그렇게 오라고 했던 친구들 동창회도 건너뛰었지. 카톡 프사, 상태 메시지에 아무것도 없어. 졸업앨범은 한 줄 글 하나 안남겼고, 근데 성적이 또 좋아. 공부 존나 열심히 해서 의대 갔어. 의대 가려고 학생 때 발 좀 동동 구르면서 애가 탔어야 하는데 그런 적 전혀 없어 보이고. 그냥 순리대로 쭉쭉 잘됐어. 그러니까 털어서 나오는 게 없네, 씨발. 형은 대체 문제가 뭐야. 왜 이렇게 원하는 대로 잘 살아? 핸드폰을 들이밀며 하나씩 따지기 바쁘다. 우는 마음속으로 꼬투리를 잡는다. 내가 잘 산다고. 난 한 번도 심장에서 꽃이 터져 나온 적이 없다. 그런데 뭐가 잘사는 건데. 사랑해야 사람 취급받는, 아이슬란드가 아닌 이곳에서 말이야. 우는 뚫어지게 쳐다보는 시선을 무시한 채 일어나 식탁으로 간다. 음식물이 남은 그릇들 사이에 민규가 열다 만 상자가 있었다.

내 조사는 그게 다야?

우가 물었다.

맞다, 신 실장이 형 환자였다는 거. 그거까지. 신 실장한테 잘해준거는 고마워요. 형 덕분에……, 그래? 그런데 지금 네가 신수현 씨 걱정할 때인가. 이번엔 우가 으쓱대는 표정의 민규에게 되돌아온다. 민규는 말을 끊어낸 우를 빛을 내며 올려다봤다. 우가 상자 안에서 접힌 종이를 내밀고 민규는 의아한 얼굴로 손을 뻗어 그걸 펼친다.

이게 뭐야?

나열된 활자를 따라 읽어내려가면서 찌푸려지는 미간.

널 만나야 했어, 나는.

…….

야, 진짜 궁금했거든. 네가 기억을 못 하는 건지, 못하는 척을 하는 건지.

아니. 내 말은 이게 뭔데 왜 형이 가지고 있냐고.

음성이 높아진다. 손에는 힘이 들어가 종이가 금방 구겨진다. 우는 옆에 앉아 민규를 바라봤다. 민규는 우와 종이를 번갈아 보고, 손끝에서 주황색 피를 흘린다. 능소화꽃이 녹는 듯이 물드는 빛깔.

뒷조사는 내가 해야지. 네 뒷조사를. 미안. 내가 선수 쳤네 너보다 먼저.

민규는 실명이라도 당한 것 마냥 종이 안에 빼곡히 기록된 자신의 과거를 제대로 쳐다볼 수 없고.

형… 도대체 누구예요?

마침내 우가 원하던 질문이 발현되는 순간. 우는 숨을 삼키고 마른 입술을 핥는다.



'자기 몸에서 터진 꽃을 자기가 섭취하면 기억을 잃어. 상대방에 대한 기억을 모두 전부 죄다 잃어버려. 내가 좋아한 사람, 내 꽃 터트리게 만든 사람 기억을 못 한다고. 그래서 내가 너를 얼마나, 네가 다시 여기로 오기를 얼마나….'

이어지는 우의 말은 민규가 이해하기 어려웠다. 사실이라고? 내가 어떻게 믿어. 반발한다. 우는 일어나 섰다. 너 집 들어올 때 비밀번호 뭐 치고 들어왔어. 공칠일칠. 그거 내 생일이잖아. 뭐? 한 번도 의구심 같은 거 안 가져봤어? 너의 집 비밀번호가 어떤 의미인지. 네가 누굴 사랑했는지. 연달아 쏟아지는 바늘 조각이 민규의 텅 빈 심장에 꽂히자, 민규는 그새 한 움큼의 당황을 먹는다. 잠, 잠시만…. 갑자기 나한테 왜 이러는데? 사이시옷처럼 눈썹이 내려간다. 곧 울 것만 같은 눈이다. 우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고 상황은 뒤바뀐다. 둘의 가운데에서 팽팽했던 깃발은 우쪽으로 조금 더 기울고, 민규는.

넌 한 번도 꽃이 터져 나온 적 없는 줄 알았지. 어쩌지. 난 그 순간을 봤는데. 계단에서, 내 앞에서. 내 앞에서 터트렸잖아, 너. 나 때문에….

민규는.

함부로 사랑했다 주장하지 마요…… 말하고픈 것을 참는다. 내가 사랑이랑 어울리는 사람이 아닌데. 그럴 리가 없다고. 자연히 손을 심장에 갖다 대본다. 답답하고 숨이 막히니 불편함이 밀려온다. 재같이 남은 건 마음뿐이었다. 혼란의 잔해를 끌어안고 타버리는 마음.

야.

민규가 우를 부르는 목소리는 투명한 물이다. 물은 작은 떨림에도 큰 파동이 이는데 이처럼 민규 또한 물처럼 흔들리며 축축해진 눈망울을 깜빡거린다. 문서를 뒤적이고 다시 봐도 붙어있는 자신의 사진과 기록이 민규를 어지럽히고 뒤죽박죽 섞었다. 조금의 현기증을 얻는다.

그래서. 그래서 어쩌라고? 그래서 나보고 어떡하라고요. 이렇게 정성 들여 포장까지 하고 나한테 주는 이유가 뭐야? 내가 기억상실증 걸린 정신병동 환자였다는 거, 형이 내 담당의였다는 거. 나한테 억지로 입력시켜서, 어? 야. 나한테 원하는 게 뭔데? 아… 형 지금, 형 진짜.

씨발. 뒤통수치고 재밌냐? 민규는 자조적인 웃음이 새어 나오는 걸 막지 않았지만 우는 민규의 당황한 숨소리를 듣고도 안온했다.

내가 너 뒤통수 칠 일이 어디 있어. 넌 나한테 약점 잡힌 것도 없잖아. 어디서 배신당한 척인데. 

이게 시발! 배신이 아니면 뭔데?

'주기적으로 섭취한 꽃잎에서 소코폴라민 양성반응. 기억손상 의심. 해리성 기억상실 성향을 보임. 담당의의 얼굴을 인식하지 못함…….' 낙서처럼 끄적인 것 외에도 몇 줄이나 더 쓰인 비릿한 종이 문서를 보며 민규는 온몸을 감싸 도는 불안감에 주변을 두리번거린다. 아오, 저 새끼! 바닥에 펼쳐져 있던 상자를 쳤다. 분홍색 꽃잎이 나풀거리며 떨어진다. 그러고 보니 여기 전부 버리지도 못하는 꽃이다. 식탁 위에도 꽃, 창문가에도 꽃, 이제 보니 집이 꽃 천지였네. 어디를 봐도 눈 앞에는 꽃무덤. 민규는 순식간에 느껴져 오는 꽃 향을 맡고 어지러운 머리를 헝클어트린다.

이딴 거 일기처럼 하루하루 적으면서 무슨 기분 들었어? 좋았어? 내가 기억까지 잃어버리니까 이때다 싶어서 접근하면서 좋았겠지. 신 실장이 소개시켜줘서 일 좀 잘하나 싶었는데 그게 존나 아니었네. 장부는 왜 조작했어요. 그 많은 꽃 다 어디로 훔쳐 갔는데, 어? 그리고 나한테는 누가 먹였어? 형이야? 내가 스스로 먹은 건 아닐 거잖아. 그렇죠, 어? 말을 해, 좀! 왜 안 해!

신수현.

…뭐?

나 사랑했으면 나한테나 친절하게 굴어. 모두한테 착하게 꼬리치고 다니지 말고. 그러니까 그렇게 다치잖아.



과거 신 실장은 민규가 우를 좋아하는 것을 알고 있었다. 누군가에게 지시받은 내용을 듣고는 민규에게 접근해서 물었다. 원 선생님 좋아하죠? 민규는 이불을 끌어안고 발그레 웃는다. 꾸며진 가짜 감정이 아니었다. 뭐예요! 말하지 마요…. 하던 김민규. 신 실장과 민규는 꽤 안 어울릴 것같이 친했다. 그러니 민규가 퇴원 후에 신 실장에게 일을 맡긴 거니까. 하지만 신 실장은 그렇게 여기지 않았다. 신 실장은 민규를 목표로만 잡았으니까. 대신에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어 보고했다. 표적이 준비됐다고. 허나 신 실장이 하나 놓친 게 있다면 그녀는 우가 민규를 모른다고 생각했다. 접점이 없었다는 이유로. 그녀의 병실은 복도 끝이었는데 거기까지 우가 담당하게 될 줄 알았느냐고. 그저 민규가 그녀의 병실에 우를 보러 자주 놀러 왔으니 그래서 모를 줄 알았지. 원 선생은 민규를 모를 줄 알았지. 그런데 그건 본인만 몰랐던 거고. 사실 김민규가 우를 너무 좋아한단 건 병동 사람들끼리의 암묵적인 비밀이었다. 그러니 김민규처럼. 바보처럼 신수현도. 꽃이 우의 앞에서 터져 나온 줄도 모르고, 나올 줄도 모르고 그냥. 사람들이 사라진 계단에서 누군가의 급한 지시대로 따라 행했을 뿐. 바닥에 뿌려진 민규의 꽃잎을 자신의 환자복 바지 주머니에 고이 넣어 가져갔던 것뿐. 잘게 부셔 김민규에게 몰래 먹였을 뿐. 누가 시킨 대로만 했던 짓이었는데.

그 사람이 그럴 리가 없는데. 민규는 손톱을 깨물었다. 미친 거야. 너는 미친 날 좋아한 거고. 우는 낮게 속삭인다. 쟤는 겉으로는 센 척, 세상 다 산 척, 멋대로 할 줄 아는 척하는데 속으로 앓아서 문제다. 너 진짜 어떻게 살래? 낮은 목소리로 다시 묻는다. 민규는 그냥…. 우를 빤히 보다가 울먹였다.

……나가요.

생각 정리가 필요하니까 당분간 찾지 말라는 말을 마지막으로 문을 닫은 민규는 제법 돌아올 마음이 없어 보였다. 우에게 어떤 연락도 한번 없었고 우의 부재중 전화를 일절 무시했다. 자연스레 우의 일도 마무리되는 듯했다. 아무한테도 들려오는 소식이 없으니 우가 신경 쓸 바가 아니었다. 신 실장은 사라졌는지 생사를 알 길이 없었고 그들의 부재는 하릴없이 시간만 재도록 만들었다.



어떤 저녁에는 푸르스름한 배경이 깔렸고, 우는 평소와 다름없이 하루를 지냈다. 진찰을 끝내고 가방을 정리하려는데 갑자기 울리는 소리에 핸드폰을 들었다. 띄워진 이름은 거절하기엔 가까웠고 받기엔 특별하지 않았다. 발신자 전민희, 우의 모.

텔레비전 속 전민희가 소멸한 지가 언젠데. 우는 핸드폰 속 전화번호부에 남아있는 그 이름으로 아직은 그가 살아있음을 알았다. 전민희는 이따금 우에게 전화를 걸어 회포를 늘어놓았다. '너희 아버지 좀 빨리 죽여줘.' 내용은 매번 같았다. 전민희는 우가 아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배신을 당한 사람 중 가장 심한 후유증을 앓고 있는 사람. 우의 부, 원상혁은 왜 그랬을까. 정답은 일차원이었다. 전민희를 사랑하지 않아서. 사랑은 전민희가 했지. 원상혁은 전민희 사랑 안 했대. 그래서 먹였대. 전민희 심장에서 터져 나온 꽃을 전민희에게. 원상혁은 전민희를 서서히 죽였고. 전민희는 원하는 대로 죽었고. 구태여 열심히 손 쓰지 않아도 서서히 죽어갔고……. 원상혁은 전민희가 자길 잊길 바랐을 뿐. 이유는 우가 알아봤자다. 원래 사이 안 좋았잖아. 사랑한다고 부대끼는 척 살았으니까. 연로 배우 전민희가 브라운관에 더는 보이지 않는 것을 대중은 인식하지 않았다. 꽃으로 증명되는 사랑에, 이 세상에서 흥미성 연예 기사는 사랑보다 중요하지 않게 된 지가 오래. 전민희와 원상혁이 이혼을 합의하고 법원에서 나올 때, 원상혁은 주머니 속에 손을 넣고 비벼 지폐의 감촉을 느끼고 있었기도 했고.

원상혁은 전민희를 사랑으로 죽인 사람. 김민규를 실험체로 이용한 사람. 신수현의 그 누군가. 우가 그 사실을 알아낸 건 민규가 병원을 퇴원하던 날, 자신을 기억 못 한다는 것을 기록으로써 확증했을 때, 신 실장이 원상혁과 하던 통화를 우연히 엿들었던 날이었다. 실험이 성공했다고. 우는 잔잔히 분노했다. 어떻게 사람이 사람 사랑하는 마음마저 죽일 수가 있어. 설마설마 의중만 갖고 있던 것이 확실해지자, 우는 병원을 나오면서도 자신만 기억 못 하는 민규가 말할 수 없이 측은했다. 사랑을 빼앗긴 줄도 모른 채 돈을 받고 특별한 꽃들을 납품하고 있는 꼴이라니. 원상혁의 많은 가지중에 김민규가 포함되어 있다는 것에 우는 참을 수가 없었다. 신 실장과 원상혁이 한패라는 것과 좋아하는 사람을 망가트린 것에 대해 참지 않아야 했다. 우는 비형식적인 사랑. 괄호 열고, 이용당하는 사랑에 신물이 나니까.





민규는 이른 새벽에 눈을 떴다. 새벽 새들의 지저귐이 머리 위로 들려온다. 침대 옆으로 푸른 창문을 보다가 팔로 두 눈을 가리고선 아직 해가 보이지도 않는 방 안에서 여러 번, 답이 붙지 않을 질문을 던진다. 내가 사랑을 팔았나. 내가 사랑을 팔았어? 내가 구원을 팔았나? 사람들한테 단지 중독되는 맛을 판 거였는데. 생각은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집합체. 굳어서 구球가 된다. 

탁자 위로 뻗은 손에 인화지 여려 장이 잡힌다. '사진 현상 못했던 거야. 네가 나한테 버리고 간 거.'  마지막으로 우를 봤던 그 날. 민규가 우를 보낼 때, 우에게서 받은 결정적 단서다. 우가 건네준 카메라 현상을 며칠 전에 맡겨서 어제 찾아온 사진을 다시 본다. 사진 속의 민규는 즐거워보였다. 환자복을 입고 있는 낯선 자신이, 병원의 경치가, 마지막으로 가운을 입은 의사 우도. 찍었던 것들이 증거로 남았으니 반대 의견을 피력할 수도 없는 위치가 됐다. 정말로 내가 사랑한…. 사랑한 사람?

그렇다면 결핍이다.

내가.

어?

사랑했으면 친절하게 굴라고? 민규는 옆에 두었던 핸드폰을 들었다. 켜진 불빛으로 방 안의 삼 분의 일이 다 채워지고 번뜩이는 화면에 눈이 따갑다. 민규는 익숙한 번호로 머뭇거리지도 않고 수화 버튼을 눌렀다. 신호는 끊어지지 않고 쭉 이어지다가 툭, 하고 걸렸다. 전화를 받았으나 받은 상대는 말이 없었다. 민규는 그 틈을 깨부순다. 결핍을 제친다. 뭐라고.

'도저히 못 참겠으니까. 같이 밥 한 번만 더 먹어줘요.'라고.



안 먹는다, 먹는다, 안 먹는다, 먹는다…. 식탁에 엎드린 채 구절초 꽃잎을 하나씩 떼고 있는 민규는 우의 집에 있다. 밥 좀 먹게 만나자 하니 집으로 오라며 주소를 남겨준 탓에 왔다. 우는 편안히 팔을 걷은 맨투맨 차림으로 하의는 따듯해보이는 바지를 입고 있었다. 잠옷인가? 그렇다면 안 어울린다. 잠잘 때도 저걸 입나? 그건 좀. 좀 웃길 것 같다. 민규가 보통의 궁금증을 가지는 사이에 우는 차려놓은 샐러드를 그릇에 옮겨, 젓가락을 들었다.

안 먹는다, 먹는다, 먹었다. 꽃이 점쳐준 대로 우는 양배추 조각들을 입에 넣었고, 들어맞았다. 민규는 성취감에 취해 샐쭉 웃는다. 그렇다면 주제를 바꾼다. 이번엔… 말을 건다, 걸지 않는다, 건다, 안 건다, 건다….

민규야, 산책 갈까?

물어보는 목소리는 웬일로 다정했다. 하마터면 순간적으로 다정의 잔류에 쓸려나갈 뻔했다. 그렇다면 확실히 갈피를 잡아야 할 차례다. 안 좋아해, 안 좋아해, 안 좋아해.

하나 남은 꽃잎은 의아하게 색이 다르다.

좋아하나.

우는 샐러드 그릇을 민규의 앞에 놓고 마주 보고 앉는다. 민규는 엎드렸던 몸을 일으켰다. 민규의 손에 젓가락을 쥐여주고는 소매를 걷어주는 행위는 민규의 머리 위로 물음표를 띄우게 했다. 왜 아무렇지 않게 친절을 베푸냐고.

설마 좋아하나 내가?

우는 말문을 다시 연다. 어서 먹어. 배고플 텐데. 너 병원식에서도 샐러드 식 제일 좋아했어. 샐러드랑 고기. 안에 치킨 들어가 있으니까 남기지 말고 먹고.

이로써 기억도 안 나는 상대와의 사랑을 추억하게 된 김민규.

설마 좋아할지도….

민규는 식탁을 어지럽힌 꽃을 치웠다. 우는 덤덤히 젓가락질을 했고 민규는 먹는 대신에 말을 건다.

내가 사랑했다면서. 야, 이거 치사하다. 안 그래? 난 형 사랑했는지 몰랐잖아. 그러니까 나한테 알려주면 안 돼요? 내가 형 얼마나 사랑했는지 나는 존나 궁금하거든. 그리고 형은 그런 나를 나와 똑같이 사랑했는지…. 아, 생각하니까 개 같네 진짜.

민규가 턱을 괴고, 우는 그런 민규를 쳐다보지도 않은 채로 반박했다.

옛날 일을 지금 들춰내서 뭐 해.

뭐 하자니. 할 건 다 하고, 따질 건 따져서 정산해야지. 애초에 내 기억 찾아주려고 이렇게 알려준 거 아닌가? 내가 싫었으면 이런 짓도 안 하지. 그냥 모르는 채 살게 했어야지. 말해. 죄다 실토해. 나 병원에는 어떻게 왔어요, 뭐 때문에? 어디가 아파서. 어? 어디가 아파서 형이 날 치료해준 건데. 나는 왜 형을 좋아한 건데.

그게 왜 궁금해, 알아서 뭐 하게. 네가 과거에 어떻게 살았는지 넌 알아야겠어?

알고 싶으니까 알려달라는 거 아니야! 억울하잖아. 내 기억 속에 형만 없다는 게. 형 좋아했던 시간들이 다 사라진 게 억울하니까! 내 사랑이 정당했는지. 과거의 나를 내가 용서할 수 있는지… 알아보자고요, 좀.

순식간에 격해진 감정으로 인해 침울과 적막과 우울이 한 뼘 넘게 묻은 식사 자리가 삭막하다. 민규는 분에 못 이겨 자리에서 일어났고 우는 아무 말 없이 고고하게 찻잔에 차를 따랐다. 그리고,

그럼 벗어. 너 내 몸 좋아했어.

이어지는 말은 아무래도 그 고고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우리 매일 떡쳤어. 너 일인실에서. 네가 나 사랑한다 그래서.

그렇다면 김민규의 머릿속은 가뿐히 사진 몇 장으로 가득 찬다. 우와 찍었던 우의 진찰실, 김민규 병실 402호, 402호 김민규 김민규 김민규 담당의 원우 김민규 원우 시발 이 두 이름이 나란히 놓인 게 뭣같이 안 어울리는데 뭐라고? 왜, 거짓말 같아? 우는 순간순간 떨리는 동공과 갈 곳 잃은 두 손을 쥐었다 펴는 민규를 올려다본다. 내가 형이랑 단지 그런 관계였어요? 난 그런 형을 개같이 사랑했고? 몸도 마음도 다 준 거네. 야, 그럼 형은 나 사랑했어요? 아니지, 사랑도 안 했지. 꽃 한번 터진 적이 없잖아. 그런데 사랑 안 하는데 왜 또 나한테 왔는데? 뭐 하고 싶은데요. 나 찾아내서 뭐 하고 싶었는데? 내 기억이라도 돌려주고 싶었어? 그래서 나 이용했나? 내 일에 참견해서 나랑 가까워져서 '짠' 하고 나타나서, 사실 네가 나 좋아했다. 너는 당한 거다. 꽃을 먹었으면 안 됐다. 신 실장이 널 이용했다. 넌 그것도 모르고 막…. 

드러나는 과거를 온전히 이해한 민규는 헛웃음을 쳤다.

뭐야, 형. 교훈 주려고 했네. 아, 다 이유가 있었구나. 신 실장이 형 소개시켜준 것도……. 이제야 본색이 드러나네. 형은 진짜.

입술을 누른다.

개새끼였네.

불안정한 그 목소리는 마치 순한 어린 양을 보는 것 같아서 우의 기호에 자극적이었다. 우는 조각난 웃음을 지었다.

내가 네 개야?

찻잔을 내려놓은 우가 천천히 일어나 민규에게 다가갈 때.

그럼 주인님 나한테 잘못했다고 빌어봐.

민규는 뒷걸음질 쳤고.

빌어.

죽어도 안 하지.

하면서도 절대 눈을 내리깔지 않았다.

죽어도 안 해? 왜 안해. 내가 네 개면 너는 내 장단에 다 맞춰줘야 해. 개는 주인과 노는 거 되게 좋아하잖아.

한 번도 터진 적 없으면서. 나 안 좋아하면서… 내가 형 어디가 좋아서. 어디가 좋다고 그래야 하는데.

말은 그렇게 했으나 죽은 씨앗을 심장에 박아넣은 것같이 아팠다. 그러나 텅 빈 심장엔 남은 것이 없어서 섣불리 믿기가 어렵다. 판막이 뜯어지고 재생산되면 믿어보기라도 할 텐데 그럴 일은 영영 없을 듯하고. 그저 우가, '이거, 네 심장. 내가 잠깐 꺼냈었어.' 하며 김민규의 숨 쉬는 심장을 어디선가 꺼내 들이밀어 보여준다면 그때서야 믿을 수 있을 텐데. 그래도 민규는 카라 깃을 잡아 오는 우를 말리지는 않는다. 눈을 아래로 내리깐 우의 얼굴이 좋아서. 손에 힘이 들어가고 벽에 등을 부딪쳤으나 마음을 깊이 읽어버리는 눈에 시간이 멈춘 사람처럼 아무것도 못 하였다. 우는 이 틈을 파고들어 민규의 입술 가까이 자신의 입술을 붙여온 채 고개를 틀어 민규와 눈을 마주한다.

키스한다?

그 말에 못 참고 고갤 돌린다. 민규는 창문을 봤다. 밤이지만 여름이라 후덥지근한 바깥을. 반짝거리는 별을 본다. 망가진 도시에 별이라니. 이질적이다. 그리고 또 이질적인 것, 한눈에 훑어봐도 이 집엔 꽃이 보이지 않는 것. 하지만 그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당연하겠지. 꽃과 상관없는 사람이니까. 이 사람의 인생은…. 민규가 망설이자, 우는 손으로 민규의 볼을 감싸 자신을 보게 하고는 바짝 붙어 물었다.

사랑했잖아. 아직도 모르겠어?

…잘못했어, 형. 내가 잘못했어요.

우의 손은 아주 천천히 떨어져 나갔다.



넌 네가 과거에 옛날에 무슨 짓을 했는지 몰라서 그래서 무섭지. 네가 만에 하나 생각했던 것보다 안 좋은 사람이었을까 봐.

선생님 내 과거를 다 알아요?

선생님이라 하지 마. 형이라고 불러.

침대에 누워서 대화를 주고받았다. 민규는 격해진 감정을 다스리느라 흘러내린 식은땀을 애써 피하고 있었다. 열 나네. 우가 민규의 이마에 손을 댄다. 물기가 손에 아로새겨진다.

나 이제 어떡해야할까?

생각해 둔게 있어.

우는 민규의 넥타이 끝을 잡아왔다.

네 고객, 네 브이아이피들. 신 실장. 우리 아빠까지 다 짜고 치고 너 속인 거니까 나는 열외. 자기 몸에서 나온 꽃 섭취하면 사랑에 빠트린 사람을 기억 못 한다는 연구, 네 지금 인생에서 제일 중요한 설정. 그거 알아낸 사람 나니까 나는 열외. 결국 이 지경에 와서 마지막으로 남는 건 단 하나, 네가 사랑한 한 사람. 그거 나. 그래서 나 또 열외. 이러면 네 제거 대상에 나는 없지.

형 말은 그럼, 날 이렇게 만든 사람들을…….

우는 말 없이 몸을 돌려 천장을 봤다. 옆에서 들리는 민규의 숨소리가 파장을 일으키고 우의 심장박동은 마루와 골의 형태를 취해 심전도로 그려진다. 민규라면 가능할 것도 같았다. 이제 뭘 해야할지 각이 섰다. 알았으니까 김민규도. 결심을 한 우가 민규를 보자, 민규는 아직도 우를 보며 두 눈을 깜빡거리고 있었다.

있잖아. 나 기억 잃어버린 거는 왜 모른 척했어요? 빨리 말해줬으면, 나 퇴원 시키지말고 옆에 뒀으면 난 형 모른 채 몇 달이고 더 살지 않았을 텐데.

때가 오길 기다렸으니까. 줄곧 계속. 어떡하면 너를 다시 아무런 슬픔 없이 원상태로 돌려놓을 수 있을까, 하고. 

물음의 물음의 물음으로. 몇 번이고 거듭한 물음에 답하여. 답이 해답이 되지 못하고 고통이 합병증처럼 몸에 남는다 해도 우는 김민규를 어떻게든 찾았을 것이다. 형은 현실에서 비현실을 사네요…. 민규는 우 쪽으로 조금 더 가까이 몸을 밀착하고는 우의 안경을 벗겨 입 맞춘다.

김민규 인생은 어차피 꽃에 파묻힐 인생이고. 두 번째 실험대상 전민희와 첫 번째 실험대상 김민규. 전민희는 아직도 모르고있지만 김민규는 이제 알았으니까. 그렇다는 건 전민희도 서서히 알게 될 것이라는 것. 이후로 민규는 우가 시킨 대로 신수현을 찾아갔다. 우를 만나주지 않았던 신수현은 민규의 연락에 안절부절못했다. 설마 본인이 다 알고 올 줄은 그녀도 몰랐으니까. 민규는 대강 사과받고 우선 고백부터 들었다. '원 사장 그 사람이 시켜서….'로 시작되는 말을 십여 분간 다 듣고, 녹취했다. 신수현은 두려워하면서도 거짓을 말하진 않았다. 오히려 이게 맞는 일이라며 민규에게 털어놓았다. 그녀는 사과를 거듭했다. 그래도 민규가 자신의 구원자였으니. 아름다운 맛을 알려준 삶의 구원자. 그녀는 원상혁과 자기가 숨겨놓은 백여가지의 주인 이름이 적힌 꽃 상자가 어디에 있는지를 알려주었고 그 주인들이 사랑하는 사람들 기록 또한 넘겨주었다. 사랑을 원래 있던 자리에 돌려달라는 부탁과 함께. 

그리고 또한 이렇게 말했다.

더 이상 꽃이 터지지 않아도 될 세상이네요. 앞으로는 돼도, 안돼도. 누구도 신경 쓰지 않을 거예요. 사랑이란 감정은 조작되지 않는다는 것을 이렇게 늦게 알았어요. 우리가. 하려 했는데 실패했으니까. 눈앞에 결과가… 있네요. 원 선생님 아직도 좋아하죠?

민규는 꿈인지 현실인지 모를 환경 속을 벗어나 문을 닫고 손에 쥔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은 다음, 우의 병동으로 돌아갔다.



개인적으로 바라는 거 있어요? 수조 속의 물고기들을 보며 민규가 물었다. 우는 반대편에서 일렁이는 물과 민규의 얼굴에 빤히 시선을 빼앗긴 채로 말문을 연다. 터지는 거…. 터지는 거요? 응. 욕조에서 한번 그래봤으면 좋겠다. 물속과 물 위를 둥둥 떠다니는 꽃… 들. 얼마나 예쁠까. 그 속에 파묻혀서 녹아지고. 설탕가루처럼 물에 녹아지고. 네 사랑에 녹아 물이 되어 나는 흘러가고. 녹아지는 것. 사랑하는 것. 마음에 씨앗이 자라는 것은 어쩌면 터져 나오지 않아도 언제나 사랑을 품고 있다는 증명. 민규는 물고기 떼를 보던 시야를 우에게 둔다. 눈이 마주쳤다.

샌님인 줄 알았는데 꽤 로맨틱하네.

로맨틱은 의사의 기본 성향이라서.

민규는 미소 짓는다. 그리고 고심 끝에 말을 꺼냈다.

혹시라도. 내가 기억도 못 찾고 그냥. 내가 이대로 살면요. 내가 그냥 이대로 살면은, 만약에 형은.

너한테 맞춰서 살게.

정말?

응. 지금의 너한테 맞출게 내가. 그러니까 앞으론 어디 가지 말고 보이는 곳에 있어주라. 연락도 자주 해. 보고 싶잖아.

그 말에 민규는 대번 우한테 다가갔다. 몸을 웅크리고선 우를 올려다본다. 우는 아래로 몸을 숙여 민규를 껴안고 민규가 머리를 품에 비벼오자 볼을 감싸 콧등에 입을 맞췄다. 민규는 사랑에 빠진 눈이었다.

더 해줘요. 다 해줘요. 

그 재촉에 우는 입꼬리를 올려 웃으며 볼에 한번 더 자국을 남겼다.

다른 곳도 해줘.

바로바로 좋아서 붉어지는 두 볼은 우의 전부를 어지럽히는 객체다. 우는 민규의 앞머리를 정리하다가 이마를 맞대었다. 비로소 확신이 생겼다.

민규야. 사랑한다고 말해볼래? 내가 바로 입 맞출게.

사랑해요.

김민규는 절대 사랑을 하지 않을 사람이 아니라고.

형도 나 사랑해요?

우는 민규의 목덜미를 감싸 안으며 고개를 꺾는다. 물은 입술이 차가웠다가 맞닿은 온도로 인해 금세 따스해졌다. 피가 돌고 열이 발생하는 당연한 이치. 붙은 두 심장이 빠르게 요동치며 존재를 과시한다. 믿을 수 없겠지만 그래도 이게 사랑이 아닐 수 없잖아. 형은 내 혈관 속에 있고, 내 빈 심장 안에 있고, 내 모든 피 속에 묻어 있고. 그러니까 어딜 가도 꽃을 피울 거예요. 민규의 두 눈이 그렇게 말하는 듯했다. 그래서 우는 사랑을 민규의 앞에서 증명해 보이고 싶었다.


결국 언론은 발 빠르게 소식을 퍼 날랐다. 시간이 지나며 정해진 계획처럼 순순히 이어져갔다. 원 사장의 회사에서 비밀리에 진행된 기억 제거 사업에 대해 모든 게 밝혀짐으로써 그는 즉시 사임 되었고, 심장에서 터져 나온 꽃은 특정 누군가에게는 독성물질로 구별되었다. 바로, 자기 자신들. 자신들한테는 독인 꽃들. 그리고 우의 예측대로 특별할 것 없이, 특별한 꽃을 섭취하는 행위는 금지되었다. 요새 누가 자기 심장에서 나온 꽃을 먹는대요. 불길하게.


'나 어디 보고 좋아해요.' '네 돈.' '거짓말.' '거짓말 아니야, 그래서 너한테 기생하잖아.' '농담하지 말고요.' '알았어.' '내 전부를 좋아하죠?' '그 대답을 듣고 싶었어? 그래, 그럼… 그렇다고 하자.' '아, 맞다. 나 궁금한 게 있어요. 형은 앞으로 뭐 할 거예요, 이제?' '개명.' '왜?' '엄마 성 따라가게. 그리고 이름도 바꾸려고. 성을 옮겨서 이름을 원우로 할까 생각하고 있어. 전 우는 이상하잖아.' '왜? 난 우 형이라고 부르는 거 좋은데. 우 형, 우 형.' '싫어. 마치 우리 형이라고 부르는 거 같아. 나는. 난 너랑 형 동생 하기 싫어.' '정말요? 그러기 싫어요?' '응. 형 동생은 재미없고 연인 사이가 재밌지.' '아… 뭐야 그게. 바보 같아.' '근데 왜 웃어.' '그래도 좋으니까 웃지.' '그게 더 바보 같은데.' '조용히 해요. 내가 데리러 안 왔으면 고생했을 거면서. 나 안 올 줄 알았지, 형. 그렇죠? 그래서 집에 어떻게 가야 하나 생각했지? 걱정 마. 아무 걱정 마요. 일단 형 면허 딸 때까지는 내가 운전해줄게.'

어느 날의 오후. 학회 일정을 마치고 돌아온 우를 마중 나온 민규는 우를 조수석에 태웠다. 그리고 도로로 진입하기 전, 우는 민규의 목덜미에 팔을 감고는 돌아가는 고개에 바짝 얼굴을 끌어당겼다.

하지마. 열나요….

민규의 간지러운 음성 때문일까. 우는 갑작스레 저려오는 심장에 불안정함을 느꼈다. 두근거림이 평소보다 심하다. 왼쪽 가슴에 손을 올려 진정하려 했으나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어디 아파요? 걱정스러운 표정의 김민규. 얼굴을 붙어오는데 얘는 그게 얼마나 위험한 행동인지 아나? 우는 잠깐 주춤거렸다. 아, 아니. 아프기보단…. 어느새 차는 출발하여 라일락 나무숲을 지난다. 달짝지근한 라일락 향이 퍼지자 민규는 차창을 열어 향기를 만끽한다. 형 괜찮아? 묻지만 우는 아직도 안색이 파리했다. 그런데 그 순간 터지는 듯한 폭발음이 들렸다. 오른쪽이었다.

흩날린다. 꽃들이. 보랏빛 소국이 우에게서 터져 나와 하늘을 향해 치솟았다가 바람 타고 내려와 민규와 우를 덮는다. 민규는 믿을 수 없는 얼굴로 놀람을 감추지 못하고, 그건 우도 마찬가지였다. 우의 안경에 내려앉은 작은 꽃잎들. 사분히 섞이는 소국 조각. 민규는 말간 웃음으로 꽃들을 환영한다. 그리고 생각했다.

형은 나를 사랑해.

민규가 빙그레 웃고 나니, 우도 그제야 웃음을 터트렸다. 이런 기분, 이런 감정이구나. 압축되었던 감정이 원래 크기대로 돌아와 마침내 폭발한다는 건 짜릿하면서도 가벼웠고 또 새로웠다. 새로워서 자극적인 데다가 주체가 안될 것 같았다. 그렇지만 평정심 유지가 특기인 우가 마음을 진정시키며 처음으로 한 생각은,

'요란하네.'

핸들을 오른쪽으로 꺾고 나서 조수석으로 시선을 흘리니 꽃이 잔뜩 묻은 우가 이쪽을 본다. 민규는 눈이 마주한 때를 놓치지 않으려 웃었다. 자신이 우에게 얼마나 미칠 수 있는가는 판단하기 어려운 문제가 아니었다. 독단적이고 치밀한 질서 안에서부터 터져 나오며 상앗빛 명찰이 찢어질 때. 그 찰나에 반하는 일…. 당연한 거였다. 당연히 사랑했다. 민규는 당연한 사랑을 했다. 사랑을 가져가 잘 보관해주었던 이와 함께, 오후 네 시의 도로의 한적함 안에서. 지금 내 옆에서 얼굴에 꽃잎을 가득 뒤집어쓰고 웃어가며.

형. 그럼 나, 내가 제일 먼저 전원우라고 불러도 돼요?

그리하여 지금 시간부터 비로소 우는 전원우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