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니까 한낮의 여름이었고, 창 너머 밖에는 굽이친 담쟁이덩굴 사이로 맹렬히 강한 빛이 침투하여 어느 때보다 예쁘고 투명한 날이었고, 에어컨에서 나오는 가공의 바람이 가게 안을 감도는 덕분에 두 팔 엔 소름이 돋아 없던 긴장감마저 생길 정도였는데, 컵에 담긴 차가운 사이다를 탁자 위에 내려놓으며
그때 나의 대사는,
‘생각해보니까, 거의 3년이더라고요. 우리 함께하지 못한 시간이 3년…….’
이었고,
다분히 이어지던 침묵을 멈춘 건 콜라를 마시던 그가 스트로를 놓으며 입을 열었기 때문이었는데…….
‘그거야, 네가 나보다 3년 어리잖아.’
아, 이래서 안 돼. 이지훈은 안 돼. 안된다고!
“안되긴 뭐가 안 되냐?”
진형은 아직 남은 핫도그를 한입 더 베어 먹고선 물었다. 오늘 낮에 있었던 일을 생각하다 헛소리를 뱉어버린 찬의 얼굴이 물건을 훔치다 걸린 어린아이처럼 발개졌다. 찬은 대충 아무것도 아니라며 대답을 얼버무린 후 방금 게임이 끝난 모니터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승리’. 화면의 반을 가리는 커다란 글자가 화려한 그래픽을 자랑하며 눈부시게 떠있다. 이번 판은 의심할 여지없이 진형의 노고였다. 허무하게 이긴 게임은 교과서만큼이나 흥미가 없다. 친한 친구인 진형은 그런 자신의 감정을 알아챘는지 애써 찬의 관심을 돌리기 위해 말을 건넸다. 요새 그 형 소식이 없네. 친근하게 물음을 던진 진형에게 찬은 미간을 구기며 조금의 신경질을 부렸다.
“신경 쓰지 마, 걔 요즘 바빠.”
이야, 이차아안. 이젠 아예 말을 놓는다? 대박. 진형이 말꼬리를 늘이며 재밌다는 듯이 생글거리자 찬은 쓰고 있던 헤드셋을 내려놓으며 우쭐댔다. 이제 형이라고도 안 할 거야. 단호한 그 한마디에 진형은 다소 놀란 눈치로 간파했다. 싸웠네. 그가 멋대로 내버린 결론이었지만 찬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사실, 굳이 얘기해보자면 맞다. 우린 싸웠고 어떻든 간에 상관없었다. 이건 죽도록 많이 해봤으니까. 일어나서 의자에 걸어놨던 하복 상의를 집었다. 얼음장처럼 차가운 면소재의 옷이 손에 닿는 감촉은 생각보다 몹시 불쾌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한여름 땡볕에 축구를 하고, 덥다고 땀에 찌든 채로 청소시간에 장난을 치며 물놀이를 한 결과였다. 다 젖은 교복을 말리기 위해 집에 가기보다 PC방에 온 건 그래도 나름의 좋은 선택이었다. 실로 오랜만에 보내는 자유 시간이었다. 열아홉이 되면서 찬의 시간에 여유는 손에 꼽을 정도로 적었다. 그래도 소위 말하는 좋은 대학교에 가기 위해 정신을 부여잡고 공부에 매진하고 있고, 어차피 잘 못하는 게임, 남는 건 성적뿐이다 라는 마음가짐으로 게임하는 시간도 확 줄였다. 그리고 어제 이지훈이랑 싸운 것도 오늘 정말 오래간만에 하는 게임으로 화를 좀 다스려보려 했건만 그마저도 쉽지 않다. 진형이 한 말 때문인지 자꾸 이지훈이 신경 쓰였다. 옆에서 물건을 정리하는 뒤척임이 느껴지자 다음 게임을 진행하던 진형은 아쉬운지 차마 마우스에 손은 떼지 않은 채로 고개만 돌려 찬을 올려다봤다.
“벌써 가게?”
“어”
“한판만 더하지. 시간 좀 남았는데”
“어제 싸운 사람이랑 마저 싸우러 간다”
농담조의 말을 던진 뒤 찬은 반팔 상의에 팔을 끼워 넣었다. 얇은 교복이 쪼글쪼글해져 입기 불편하고 보기에도 거슬렸지만 서둘러 의자를 밀어 넣었다.
“하아. 끈질긴 새끼. 너 대체 고백은 언제 하냐?”
마지막으로 안경을 가방에 집어넣으려던 찬의 손이 멈췄다. 순간 방심했다. 누구보다 찬의 사정을 꿰뚫고 있는 진형인데. 내 옆에서 이지훈 얘기를 가장 많이 들어주고 나누는 친구. 올해에는 무조건 더 나이 먹기 전에 고백하겠다고 다짐한 찬이었으나, 자신의 인생에서 성공한 고백은 여태껏 단 하나였다. 2년 전 겨울, 곧 고등학생이 된 기념으로 한 커밍아웃. 집에 가기 전에 들린 서점에서 만화를 고르던 진형을 향해 찬이 계산을 마친 수험서를 품에 잔뜩 안고 걸어오면서 한마디를 했다. 나 동성애자야.
너도 참 독특하다. 겨울방학 때 기념으로 말해 줄 게 있다는 게 고작 이거?
고작?
생애 처음 해본 커밍아웃이었다. 그래서 중요한 말이 있다고 미리 언질을 줘봤고, 언제 말할지 타이밍만 재고 있었다. 혹시라도 마음은 아프겠지만 이해를 못해준다면 절교까지 생각하고 있었기에 자기 딴엔 나름 신중히 결정하고 진지하게 말한 건데 별로 놀라지 않는 진형에 찬은 기분이 퍽 상해서 인상을 썼다. 너는 뭐 안 놀라냐? 겁나 시시하네. 찬은 애써 떨리는 마음을 진정시키려 가슴을 두드렸고, 진형은 쥐고 있던 책을 다시 제자리에 놓았다.
그럼 네가 하도 지훈이 형 좋아하는 티를 내는데 새삼스럽게 왜 놀라냐.
갑자기 들어오는 현실을 직시한 진형의 묵직한 직구에 찬이 깜짝 놀랐다. 미쳤어? 서점이야! 조용히 해! 찬은 급히 진형의 팔뚝을 잡고 거의 밀다시피 끌었다. 과장된 그 행동에 어이없는 실소를 터트리던 진형이 어쩔 수 없이 질질 이끌려갔다. 혹시 들은 사람이 있을까 나오면서까지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찬이 안전한 골목으로 진형을 데려갔고 끊임없이 그를 다그쳤다. 언제부터 알았냐, 왜 모르는 척했냐. 만약 지훈이 형 있었으면 어쩌려고 그러냐, 흥분해서 막 내뱉는 찬의 말이 사방으로 튀었다. 이에 진형은 별거 아니라는 듯 차분히, 그리고 또박또박 대답했다. 네가 예전부터 하도 좋아 죽을 것처럼 티를 내서 알았고, 그래도 배려한답시고 직접 말해 줄 때까지 기다린 거였으며, 지훈이 형이 지금 이 서점에 왜 있냐.라고, 그리고 굳이 안 해도 될 말까지.
근데 그 형은 너 싫어하는 거 아니냐?
진형이 그렇게 말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지훈의 대학 진학이 확정되기까지 동안, 지훈은 서서히 변했으니까. 격동의 마지막 삼 학년인 ‘고삼 이지훈’의 사이클은 알프스처럼 쌀쌀했다. 공부 공부 공부 공부……. 거의 1년을 공부만 했다. 주말에는 하루의 반 이상을 잠만 자거나, 독서실에 갔다. 지훈은 말버릇처럼 ‘놀 시간 없어’를 달고 살았다. 같이 등하교도 못하고 얼굴도 자주 못 보지만 찬은 이해할 수 있었다. 형이 어른이 되어가는 중이니까. 나도 곧 그래야 했으니까. 그런데 그 해 겨울, 수능이 끝나자마자 지훈이 변했다. 매일같이 놀러 와서 찬을 괴롭혔다. 처음엔 지훈의 해방에 누구보다 기뻐한 찬이었으나, 먼저 시비를 걸어오는 그를 참아주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 화장실에 있는데 불을 끄거나, 먹던 간식을 뺏거나, 말을 걸어도 투명인간 취급을 한다던가. 유치하고 사소한 장난. 우리는 마주치면 으르렁댔다. 지훈은 자기가 졸업한 고등학교를 찬이 입학한다며 ‘선배’ 행세를 했다. 어느 날은 공부를 하던 찬을 다급하게 부르는 바람에 전화를 받고 화들짝 놀란 찬이 걱정되어 지훈의 집에 달려갔고, 그곳엔 편안히 이불을 턱 끝까지 덮고는 불 꺼줘, 하고 배시시 웃는 지훈이 있었다.
그 후로도 지훈의 장난에 찬이 반발심으로 무심코 반말을 하면, 지훈은 그 순간도 놓치지 않았다.
어떤 후배가 선배한테 반말을 하지? / 형 저 장난칠 기분 아니에요 / 난 장난칠 기분인데? / 그건 제 알바 아니잖아요…….
이런 말장난의 연속이었다. 찬은 지훈이 자신을 싫어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형은 대학교에 가야만 하니까, 언제까지 자기 하고만 놀 수 없었다. 자신이 귀찮아지는가 싶었다. 몇 년의 시간을 함께한 자신보다, 곧 닥칠 미래가, 미래의 성공이, 더 중요하니까. 다 써진 일기장을 버리는 것처럼. 사소한 추억보다 그러나 그게 열아홉을 벗어나는 사람의 모습일 것이다. 스물이 되면, 나도 그럴 거라고. 찬은 매번 지훈이 먼저 겪는 성장통을 보고 배우는 것에 만족했다. 그래서 지훈이 있어서 다행이었다. 그리고 우리가 직장을 갖게 되면 더더욱, 얼굴을 볼 일도 잦아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다투는 둘을 멀리서 진형이 재밌게 바라보기만 할 뿐, 이제 곧 봄이 오겠지만 찬의 연애사업은 도저히 나아지지 않았다.
둘은 어렸을 때부터 친했다. 그 친함의 정도는 남들이 둘이 어떻게 친해진 거냐고 묻는다면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딱히 이렇다 할 계기가 없었던 것이, 이 동네는 사람이 없는 동네다. 그 대신 찬의 집이 있는 이 골목에는 단 네 가구가 산다. 물론 이지훈이 앞집에 살던 것이 가장 한몫했다. 어릴 적부터 찬은 지훈을 곧잘 따랐다. 외동인 찬에게 지훈은 단순히 앞집에 사는 이웃이 아니었다. 찬이 처음으로 형이라고 불렀던 사람. 당시 초등학생 이찬의 하루 일과는 지훈을 따라다니는 거였다. 같이 학교에 갈 수는 없어서 지훈이 하교하는 시간에 맞춰 그를 기다렸다. 교정에서 시간을 보내고. 분식을 사 먹고, 같이 운동장에서 모래성을 만들고, 그러다 진흙을 온몸에 묻힌 채로 돌아와 각자의 부모님에게 동시에 혼나기도 했던, 그런 날들이 있었다. 그 외에도 지훈과의 추억은 밤하늘의 별만큼이나 많았다. 신발 끈을 묶는 방법도, 계란 프라이를 만드는 것도, 좋은 펜을 고르는 방법 등 사소하고 단순한 것 모두 지훈에게 배운 거였다. 찬은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지훈을 찾았다. 신기하게도 지훈이 관여한 일들은 술술 해결되었으니까. 찬은 속으로 생각했다. 이 형 무지 똑똑해! 더 나아가 찬은 자연스럽게 지훈의 취향마저 습득했다. 지훈이 좋아하는 게임을 가르쳐 줄 때, 즐겨 듣는 음악을 들려줄 때, 밤새서 함께 히어로 만화를 볼 때, 찬은 생각했다. 형이 이런 걸 좋아하는구나. 지훈이 좋아하는 걸 같이 할 때 찬은 행복했다. 그 어떤 것보다 지훈의 웃는 모습이 좋아서, 그 웃음에 찬의 걱정도 눈 녹듯 사라지니까. 지훈이 자신을 찾을 때면 찬은 설렘과 기대로 두근거렸다. 찬은 매번 지훈의 자취가 묻어있는 것들을 한 발짝 늦게 겪고 이용하고, 이용당했다. 그 차례 속에 어느새 찬의 손에는 지훈에게 거쳐진 것들이 남아있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잊을 수 없는 것은 지훈과 함께 별을 봤던 밤. 산속에 있는 외가로 놀러 갔던 갓 중학생이 된 찬의 여름 방학 때의 일이었다. 아침부터 계곡에서 노느라 모든 에너지를 소진한 찬이 피곤에 지쳐 자고 있었는데, 누군가에 의해 몸이 좌우로 흔들렸다.
으응…. 뭐야?
찬아 따라와 봐.
소곤거리는 지훈의 목소리가 찬을 이끌었다. 찬은 겉옷을 대충 어깨에 걸친 후 잠이 덜 깬 눈을 비벼댔다. 지훈이 아무 말 없이 그 모습을 보다 찬의 옷을 제대로 입혀주고는, 손을 내밀었다. 찬은 그 손을 잡았다. 둘은 살며시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손을 잡은 채 걷기 시작했다. 별이었다. 지훈을 따라 걷다 보니 도착한 곳은 넓은 평야가 있는 강가였다. 지훈은 모래바닥에 주저앉아 하늘을 가리켰다.
오늘 별똥별이 떨어지는 날 이래.
그 말에 찬도 지훈의 옆에 앉아 하늘을 우러러보았다. 무수한 별들이 하늘을 수놓았다. 이렇게나 많은 별은 태어나서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그렇다 보니 꼭 지훈에게 선물을 받은 듯한 느낌이 들었다.
방 안에, 플라네타리움을 만들 거야.
그걸 왜 만들어요?
음.... 평생 별이나 보면서 살려고,
지금도 보고 있잖아요.
갖고 싶은 건 손에 넣어야지
별을 어떻게 가져요. 그냥 여기 자주 와서 보면 되잖아요
만들어서 이름 붙여 줄 거야. 별마다.
귀찮은 짓을 왜 하지? 찬은 궁금했다. 너도 할래? 그렇게 묻는 지훈은 자신의 꿈에 찬을 끌어들이고 싶었던 것도 같다. 찬은 잠시 생각하다, 좌우로 고개를 저었다.
그렇지만 형이 뭘 하던 진심으로 응원해요.
그래.
어, 무언가 긴 꼬리가 빠르게 지나간다. 지훈이 말한다. 별똥별이야, 소원 빌어. 찬은 두 눈을 꼭 감고 간절히 빌었다. 음, 우리 가족들 건강하게 해 주시고, 지훈이 형이랑 같은 고등학교 붙게 해 주시고, 성적 잘 나오게 해 주세요. 작은 손으로 간절히 소원을 빈 후, 찬은 눈을 떠 슬그머니 지훈을 쳐다봤다. 지훈도 막 소원을 빌었는지 눈을 떴다. 그렇게 기억에 진하게 물들 여름밤의 나들이를 마친 후 집에 오는 길에 찬은 지훈에게 물었다.
형 뭐 빌었어요? 나는 가족들 건강하게 해 주시고, 나중에 형이랑 같은 고등학교 가게 해달라고, 또…….
야 그거 말하면 안 이뤄지는 거야, 바보야. 그리고 너 입학하면 난 졸업하거든?
지훈이 말도 안 된다며 맑은 웃음을 터트렸다. 아, 그러네. 골똘히 생각하던 찬이 깨달았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청명한 하늘에 둘의 웃음소리가 가득했다. 후덥 지도 않던 그 밤, 열네 살의 이찬과 열일곱의 이지훈은 같은 하늘 아래, 두 손을 포개어 잡고 걸었다.
계절은 봄으로 바뀌었지만 지훈은 옆에 없었다. 열일곱 찬이, 지훈과 똑같은 교복을 입었다. 이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는데. 없다. 그렇게 자신을 한동안 괴롭히더니, 지훈은 도망치듯 타지로 이사를 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자취를 시작했다. 찬이 그걸 안 것도 지훈이 떠나기 전날 밤, 지훈의 부모님께 얘기를 들어서였다. 기숙사도 있지 않느냐고 따져봐도, 지훈은 오래전부터 계획해놓은 거라 어쩔 수 없다고 했다. 그날 밤은 지훈이 단 한 번도 장난을 걸지 않았다. 대신 같이 자자고 했다. 방안은 초침이 째깍대는 소리와 창밖의 바람소리만이 요란했다. 조금만 틀어져도 부서질 것만 같은 공간 속에서 찬은 자신이 이 세상에서 제일 쓸모없는 사람이라 생각했다. 형, 자요? 기나긴 침묵을 깨고 오는 건 묵묵부답이었다. 뒤돌아있는 지훈의 등을 보고 찬도 조용히 눈을 감았다. 찬은 잠도 덜 깬 아침에 트럭에 올라타는 지훈을 향해 지훈이 손에 쥐어준 크림빵을 흔들며 연신 부운 눈으로 인사를 했다. 그게 서로의 얼굴을 본 마지막이었다. 창문을 내려 빼꼼 고개를 내뺀 지훈이, 울지는 마라,라고. 과분한 걱정을 해주었다. 찬은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후, 몇 번 놀러 간다고 전활 해도 지훈이 주소를 알려주지 않아서 갈 수 없었다. 어렸을 적에는 잘도 자신을 데려가 살 거라는 약속도 해줬는데……. 혼자 있는 밤이 되면 그리운 지훈의 생각과 함께 찬의 열망은 더욱 커졌다. 그러나 찬이 할 수 있는 건 지훈을 원망하며 남몰래 우는 것 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 날. 짝사랑이 떠나고, 가장 친한 친구에게 생애 첫 비밀을 말해버린 날. 찬은 오랫동안 알고 지낸 지훈에 대해 제대로 생각해보았다. 덕분에 밤늦게까지 쉬이 잠을 잘 수 없었다. 틀린 시험문제도 이렇게까지 되새겨 본 적이 없는데, 찬은 조금 억울해서 울컥했다. 형에게 나는 어렸을 때부터 알고 지낸 동생이겠지만 나는 달랐다. 나는 사랑이다. 형이 예쁘고 사랑스럽고 멋있고, 아, 외모는 물론이고 어느새 자신이 훌쩍 커져서 지훈이 자신을 올려다보는 것도 찬에게는 무척이나 귀여웠다. 계속 같이 있고, 보고 싶고, 또 놀고 싶었다. 전화를 하면 귀찮다고 말해도 자신이 하는 얘기에 다 대답해 주는 것도. 그러다 말이 잘 통하면 지훈이 그렇게나 좋아해 주는 것도. 그 밝은 웃음과 어린아이처럼 신나서 높아진 목소리도.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이 중학생에서 벗어날 무렵, 사춘기가 지나고 열병이란 형태로 찾아왔었다. 찬은 지훈을 좋아하는 마음이 점점 커질수록 두려웠다. 내가 혹시라도 미쳐서 고백을 한다면. 형의 경멸마저도 사랑할 수 있을까. 그 고민이 머리를 짓눌러서 가루가 될 것 같았다.
꿈꾸던 스무 살부터 시작된 삶은 들인 노력보다 건조했다. 고등학생 때의 목표였던 대학 진학을 이루어냈어도 부담은 이상하게 늘어만 갔다. 낯선 사람을 만나는 것도 잠시 스쳐 지나가는 인연들이었다. 만남이란 게 자신을 닳게 하는 것도 아닌데, 어느새 자꾸 새로운 무언가를 기피하게 되었다. 사실 안정을 찾고 싶었다. 자신을 키워내기가 혼자의 힘으로는 꼬인 문제에서 답을 찾는 것보다 어려웠다. 온기가 필요한데 선뜻 다가설 마음이 없었다. 오히려 준 것보다 받은 것들이 손에 차고 넘쳐서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 자신도 누군가에게 호의를 베풀었으나, 예상된 결말처럼 기억이 나지 않았다. 사람들은 나를 왜 만나고 싶어 할까. 주머니에 내팽개쳐 놓은 핸드폰을 꺼내 메신저를 확인해보니 역시나 안 읽은 문자가 꽤 있었다. 그중 하나를 읽어보니 내키지 않던 약속이 새로 잡혀있었다. 삶을 필요로 사는 사람들은 나비가 되었겠지, 나는 여전히 애벌레, 유충이고. 대신 요즘의 지훈은 따뜻함에 목이 멘 사람처럼 변태 했다. 찬바람이 들어오는 현관을 닫고, 방 안의 전등을 켜야만 쌓였던 안도의 한숨이 나온다. 아침에 봤던 모습 그대로의 집이었다. 미처 보지 못한 몇 개의 문자 중에는 찬이 보낸 것 들도 있었다.
- 형 아직도 조별과제 때문에 힘들어요? - 오늘은 야자 안 했지요 – 다음 주에 가족 외식 있다! 레스토랑! 너무 오랜만이죠? >< 형도 왔으면 좋겠다ㅜㅜ
여전히 귀엽네. 나이의 뒷자리 수가 바뀌어도 찬은 밝은 성격 그대로였다. 뭐 하나 달라진 게 있다면, 통화할 때마다 스며오는 이질감. 그것은 지훈의 어, 잘 지냈냐로 시작하는 흔한 안부를 묻는 과정에서부터였다. 어. 잘 지냈냐? 아니 그냥 궁금해서……. 이 말만 하면 찬은 자신의 하루 일과를 쭉 말한다. 지훈은 그런 얘기를 듣고 있다. 뭘 했고, 뭘 느꼈고 하루가 얼마나 다채로웠는가를. 음성 너머 찬의 감정을 지훈에게 공유한다. 지훈은 그 순간이 엘리베이터를 타는 것만큼이나 어색했다. 찬이 지훈과 가까워진다는 기분에 취해있다면 지훈은 나이를 먹어가는 찬이, 자신과 닮아가는 찬이, 자기를 제외한 세상이 찬의 중심에서 회전하는 것이 싫었다. 일단은 안정이라도 찾기 위해 휴학을 했다. 섣불리 한 결정은 아니다. 지훈이 찬을 불러낸 것도 섣불리는 아니었다. 두 줄의 평행선이 만나는 방법은 둘 중 하나가 꺾는 것 밖에 없으니까, 만나지 못하는 평행선 두 줄은 딱 자신과 찬의 위치였다.
천문학 재밌어요? 찬이 사이다를 내려놓으며 고갯짓을 한다. 응 정말로. 지훈도 까딱, 스트로를 집던 손가락을 펴 보인다.
학교는 잘 다녀요?
가기 싫어 죽겠다. 상응하는 지훈의 대답에 찬은 피식 웃을 수밖에 없었다.
자퇴했어. 그래서.
꾸밈과 과시로 이뤄진 바와 같은 말에 찬이 적잖이 놀라 의문을 던진다. 왜요. 지훈은 일일이 반응하지 않는다. 찬의 감정 변화가, 왜냐고 물으며 시무룩해지는 표정이 유일하게 이 레스토랑에서 유한한 재미였다.
농담이고, 휴학했어.
찬은 사실 그럴 줄 알았다며 애써 내색했다. 여러 번 손사래를 치는 손바닥 아래로 떨어지는 그림자 사이의 찬의 얼굴, 어린 티를 벗어낸 얼굴이……. 빛이 이래저래 유영했다. 안경은 언제부터 쓴 거야. 아, 아무것도 안 했는데 왜 어지럽지? 지훈은 눈을 감으며 사색한다. 예전에 유심히 봤던 해양 다큐멘터리가 떠오른다. 마치 심해로 끝없이 잠수하여 숨이 먹혀오는 듯하였다.
“생각해보니까, 거의 3년이더라고요. 우리 함께하지 못한 시간이 3년…….”
기어가는 찬의 목소리에 음률이 붙는다. 우리/함께/하지……. 아, 3년. 응 뭐가? 우리 나이 차이가? 지훈은 야광 해파리에 쏘인 것처럼 신체에 전율이 흘렀다. 동맥과 정맥이 달음박질함을 과시한다. 그러나 심장만큼은 태연하고 유연했다.
“그거야 네가 나보다 3년 어리잖아.”
찬의 미간이 순식간에 구겨진다.
“단어 선택을 잘 못 했어?”
찬이 자신보다 어린것에 불만은 없었다. 지훈은 삼 년이라는 시간을 체감한 적도, 할 세도 없었다. 둘 사이에 벽처럼 세워진 그만큼의 거리가 중요하다면 자신에게 그 중요도는 원체 0에 수렴했다.
“세 살도 아니고 3년? 형은 우리를 나이 말고 시간으로 따져요?”
지훈의 순진한 물음을 단박에 자른다. 냉혹히 동강 난 말들은 다시 붙거나 재생도 어쩔 수 없다.
“난 그냥 거의 3년 동안 같이 못 있었으니까 그게 아쉬워서, 인데. 형은 별거 아니라고 생각했나 봐요? 아, 못 느꼈구나. 애초에 세보지도 않았던 거네. 아예,”
화났어. 목소리가 날 서있다. 특이하게도 허구한 날 자신이 거는 장난에 화를 내던 목소리가 아니었다.
“벌써 그렇게 됐냐. 미안. 그동안 힘들어서”
이렇게 말하면 찬은 또 궁금해할 것이다. 지훈은 그가 입을 열기 전에 바로 덧붙인다. 끼어들 자리 없이, 배려라는 껍데기를 쓰고 자기 방어를 하는 일련의 과정을.
“그러니까, 얼마나 힘들었다면 힘든지도 몰랐어. 아 내가 힘들다는 걸 다 끝내고서야 안거야 근데 다 끝났는데 내가 이제 와서 그걸 알아봤자 뭐해”
뭐하겠어 내가,
지훈의 한숨과 동시에 직원이 다가와 어깨너머로 그릇을 내민다. 주문한 <썸머타임 스페셜 코스>가 보기 좋게 차려졌다. 썸머타임 스페셜. 지훈은 메뉴판을 입모양으로 읽는다. 지훈의 열아홉 살과 스무 살은 어땠지? 고등학생 때 봤던 한여름밤의 유성은? 이 악물고 공부해서 홀가분하게 진학했는데, 이게 뭐야. 보고 싶은 사람만 늘어나는 거 그걸 참고 있었던 거.
“너는 아니잖아. 이제 삼 학년이고, 많이 변했고, 변할 거고. 그러니까 나처럼 되지는 말아야지.”
의외로 찬은 숨죽인 듯 조용하다. 심연의 식사시간이 끝나가고 아무 말 없던 찬의 포크 소리가 차분히 사그라졌다.
“왜 자꾸 밀어내려고 해?”
지훈이 모든 행동을 멈추고 찬을 바라본다. 혼자 무얼 열심히 생각했는지 상기된 얼굴이 다분히 발개져있다.
“형 얼마나 달라졌는지 말할 수 있어요? 하나도 말 못 하면서……. 내가 변한 만큼 형도 변했어요? 스스로 그렇게 생각해요? 그래서 내가 싫어요? 나는 한 번도 달라진 적 없어 형이 이제야 나를…… 발견한 거지.”
말 한마디가 화살이 되어 꽂히기 쉽다. 내가 행한 침묵이 누군가에겐 상처였으니 온전히 나의 잘못이다. 너는 피우기 전에 이파리가 떨어지는 꽃처럼 보인다. 덤불 속에서 가장 약한 모습으로 제일 늦게 발화했다. 자신의 침묵으로 인해서.
“없던 일로 할까요? 그게 우리 둘한테 필요해 보이는데.”
찬은 여기서 울 수도 있었지만 최악의 썸머타임은 끝났다.
지훈은 단지 찬이 좋아하는 일을 자신과 먼저 겪었음 했다. 마지막 연락을 받고 그 길로 레스토랑을 예약했다. 생각해보니 지훈은 살면서 자기가 한 선택이라곤 전혀 없었다. 고른 일들은 남들에게 보이지 않는 선택이 되어야만 했다. 지훈은 보기 좋은 사람이 되어갔다. 찬은 간혹, 형이 이 게임 좋아하니까, 라고하며 신나게 떠들었지만 지훈은 그 게임을 좋아한 적이 없다. 지훈은 그 게임을 같이 해주는 찬을 좋아했다. 그게 다였다. 사실상 천문학이 가장 흥미 없었다. 식당에서의 싸움 그 후로 찬은 주말마다 진형을 만나거나, 파트타임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지훈이 어디에 가서 뭘 하든 찬은 일절 신경 쓰지 않았다. 진형이 고백을 종용했지만 찬은 끄떡없었다. 그저 이지훈이 좀 더 쉬었음 했다. 자신에게도 시간이 필요했다. 그러니 몇 달이 지나도 둘의 사이는 어색한 채로 시간이 갔다. 그러나 그런 나날들의 균열이 깨져버린 건 지훈도 찬도 아닌 오랜만에 연락 온 지훈의 친구로부터였다. 지훈이가 취해서 네가 좀 와봐야 될 것 같아. 찬이, 찬이지? 오랜만이야. 나 원우 형인데. 그니까, 지훈이 주소록에 동생이라고 되어있어서. 지훈이가 동생도 있었나? 했는데 아무튼 여기 어디냐면……. 이렇게 둔하고 바보 같은 사람이 제일 가까이 있다니 어쩔 거야. 찬은 옷걸이에 걸려있던 코트를 걸치고 빠른 걸음으로 나섰다.
지훈이 들은 말들은 참혹했다. 원우는 스러져가는 지훈이 쥐고 있는 술잔을 억지로 부딪혔다. 쨍하고 유리가 맞닿으며 파동이 일었다. 찬이 너를 좋아하더라. 파동이 더 크게 발현한다. 원우는 곁에서 봐온 지훈의 청춘 대시절(大時節)로 일컫는 가장 반발심이 뚜렷했던 고등학생 때, 찬이로부터 순정을 들었다. 무척이나 지훈을 잘 아는 아이가 뭣하러 자신에게 지훈을 묻는가. 그로 인해 찬이 한 질문에는 대답을 하지 못했다. 지훈의 소려한 한 때는 구름처럼 지나가버렸다. 원우는 과거를 회상하며 다시 변론했다. 찬이가 널 좋아하는 일을 좋아하더라. 그래? 그럼 조소한다. 그게 뭐더라도 지훈은 증명할 자부심이 없다. 걔는 아직 열아홉이야. 사이클처럼 돌던 피는 차가워지고 망상 속의 유릿조각이 머리를 찌르는 듯했다. 분명 남의 입에서 나온 거지 같은 고백 때문이리라 그거 아니면 빌어먹을 알코올이 문제였다. 아 너 거짓말 좀 하지 마. 마구잡이로 앞머리를 헤집으며 탁상에 팔꿈치를 올려 턱을 괴었다. 싸늘하게 변조한 공기의 존재감에 어깨가 짓눌린다. 야야, 나 쓰러질 테니까 걔 불러, 불러서 얘기 하자. 아님 뒤질 것 같거든?
찬은 지훈의 주사를 처음 본다. 꺼질 듯 말 듯 깜빡거리는 네온사인 간판 밑에서 다릴 비틀비틀 눈동자를 데굴데굴 두 손으로 이리저리 원우를 끌고 다녔다. 그러다 자신이 무슨 왕이라도 된 듯 호탕하게 웃어대었다. 찬은 처음 보는 이지훈의 모습에 실소를 터트리지 않을 수 없었다. 붙잡혀 시달리는 원우에게 인사를 하고 지훈을 넘겨받아 택시에 태웠다. 조심히 들어가 라는 말을 마지막으로 원우가 몸을 돌리는 것까지 본 후, 택시는 집을 향해 출발하였다. 골목에 진입하여 지훈을 부축하며 걷던 찬이 집 앞에 다다라 대문을 열기 위해 팔을 뻗을 때, 뒤에서 온 두 팔이 말도 안 되게 찬을 꽉 껴안았다.
너는 나를 싫어해야 해.
문을 열려던 손이 갈피를 못 잡고 헛손질을 했다. 온 신경이 곤두섰다. 여차하다간 숨이 막힌다.
내가 좋다고 해도 싫어해야 돼. 나 밀어내야 돼. 알겠지?
다시 담을 수 없는 지훈의 말은 색색거리며 작아졌다. 하지만 그 어떤 것보다 거대하게 울렸다.
뭐라고 했어요, 형?
지훈은 찬의 등에 얼굴을 파묻었다.
네가 나 좋다고 하면 나도 금방 좋다고 말할게 뻔해. 아… 그러니까, 너는 나 싫어해.
찬은 지훈을 떼어내 마주 섰다. 지훈의 얼굴을 천천히 뜯었다. 귀 끝이 붉은 채로, 이성보다 감성에 앞서 내뱉는 지훈이 미웠다. 왜 이런 부탁을 해요? 취하면 진심이 나온다더니, 이럴 거였으면 원우 형 전활 받지 말걸.
형은 나보다 먼저 다 해봤잖아 대학교도 가고, 자취도 하고. 맞다, 과 대표? 그거라며 예전에 다 들었어. 형 친구들 한 테. 그런데 왜 날 사랑하는 건 안 해? 이미 눈치채고 있었으면서 왜 내 짝사랑 안 도와줘요?
사랑해.
라고 형이 할 때까지 내가 계속 말할 거야.
작은 풀잎 하나 소곤거림 없이 밤은 광활한 우주가 되었다. 이지훈은 끝내 고요했다.
지난밤의 일로 찬은 대담해졌다. 주말에 있던 파트타임 아르바이트를 빼고 지훈과 영화를 보러 가자는 약속을 잡았다. 장르는 밑도 끝도 없이 로맨스로, 온전히 찬의 선택이었다. 액션 영활 보자며 짹짹대는 지훈의 의견은 정말 가볍게 묵살되었다. 너 이런 거 좋아했냐……. 지훈이 말릴 새도 없이, 찬은 티켓을 끊어버리곤 한숨을 쉬며 고개를 휘젓는 지훈의 손을 끌며 입관했다. 상영 내내 지훈이 스크린에만 집중하자 찬은 흘깃 쳐다보고는 팔걸이에 올려져 있는 지훈의 손에 손깍지를 꼈다. 지훈이 바로 뭐하는 거냐는 듯이 노려보며 손을 풀었다. 알겠어요. 그럼 이러고 봐요. 찬은 시무룩해진 상태로 최대한 지훈의 반대방향으로 몸을 기대었다. 애초에 로맨스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게 문제인지 지훈은 얼마 있다 곯아떨어졌다. 찬은 졸려 보이는 지훈을 위해 어깨를 내주었다. 천천히 내려가는 지훈의 머리가 찬의 어깨에 닿자 지훈이 화들짝 깨어났다. 찬의 귀는 달아올라 빨개져있었다.
저도 노력하는 거예요. 그냥 봐요.
지훈은 문득 그런 말을 하는 찬이 내심 귀여웠다. 그래서 졸지 않고 영화에 집중했다. 결국은 둘 다 그날 본 영화 속 주인공의 이름조차 기억하지 못했지만.
어느 날 지훈은 방 안에 플라네타리움을 만들자고 선언했다. 어릴 적 별똥별에게 보낸 소원이 이뤄지지 않은 것은 감히 죽어가는 별에게 내 방에 별을 만들어 달라고 빌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지훈은 커다란 피켓을 두 손으로 들고 들어왔다. 피켓에는 'LET'S MAKE IT! JUST DO IT!'라는 문구가 빨간 물감으로 얼룩져서 거의 없어진 위엄을 뽐낸다. 자신이 고등학생 때 동아리에서 쓰던 철저한 과시용 작품이었다. 현존하는 최고의 아티스트 이지훈! 지훈은 역시 적당한 과시를 좋아한다. 찬은 소리치는 지훈의 작은 체구에서 어떻게 저런 큰 힘이 나오는지 대체 알 수 없다고 생각하다가 지훈의 주사를 떠올리며 작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근데 왜 하필 내 방이에요…….
찬이 지쳐 잠든 사이에 최고의 아티스트가 플라네타리움을 다 완성했는지, 다급하게 찬을 부르는 소리가 방 전체에 스몄다. 방 안에는 대충 이어 붙인 꼬마전구가 벽마다 칭칭 감겨 설치되어있었다. 밖에서 볼 때는 단순히 이불 안에 기둥을 세워 마치 작은 움집을 만들었나 싶었는데 그래도 모양은 얼추 그럴싸했다. 지훈이 찬을 이불 안으로 끌어당겨 둘만의 공간의 문을 열었다. 처음 본 이불 안은 완전히 우주였다. 지훈이 둘 사이에 있는 플라네타리움의 전원을 켰다. 흐트러진 찬의 앞머리를 정리해주던 지훈은 생글 대다 입을 연다.
째깍, 시침 소리가 반복적으로 재생했다. 넓은 거실에서 진형과 찬은 같이 공부를 하며 얘기를 나누었다. 찬은 여기까지의 일을 진형에게 털어놓았다.
근데 오늘 별똥별 떨어지는 날 이래. 연필을 턱에 갖다 대며 찬이 진형에게 몸을 돌렸다.
그래서 형이 뭐라 그랬는데?
어?
왜 얘길 하다 말아. 지훈이 형이 뭐라 했냐고.
어… 정말 말도 안 되게 예뻤어. 그러니까, 형은 웃고 있었고, 이불 안까지 벽에 설치해놓은 꼬마전구빛이 스며 들어왔고, 그 좁은 이불 안은 우주였고 별이 빛났는데 그때 형의…….
야, 이찬!
멀리서 지훈의 찬을 부르는 소리에 진형과 찬 둘 다 소리가 나는 쪽을 응시했다. 가봐, 라는 뜻으로 고갯짓을 하는 진형과 눈을 마주친 찬이 지훈의 방 문을 열었다.
불 꺼줘.
턱까지 이불을 뒤집어쓴 지훈이 눈만 내놓은 채로 눈짓했다.
그러니까, 그때 형의 대사는…….
이찬. 너도 알다시피 내가 표현 잘 못해. 알지? 고맙다거나, 미안하다거나. 그러니까 네가 원하는 만큼 해주는 방법을 모를 거야. 그래서 내가 싫어질지도 몰라….
너무 늦게 알아서 미안. 내 플라네타리움이 이렇게 가까이 있었는데.
사귀자.
'나랑 사귀는 게 두렵지 않아요?'
내가 너를 사랑해서,
그래서 두렵지 않아.
지훈의 동공에 스며든 전구의 빛이, 온기가, 그 보석같이 황홀한 눈동자 안에는 찬의 플라네타리움이 있었다.
찬은 불을 끄고 문을 닫았다. 거실에 있는 진형이 곧 의아해하며 물었다.
형이 뭐라냐?
불 꺼달래.
그 형 진짜 변한 게 없네.
찬은 씩 웃으며 다시 지훈의 방으로 한걸음에 달려가 이불속으로 들어갔다. 앗 차거 차거. 지훈이 갑자기 느껴진 온도의 변화와 무거운 물체에 실눈을 떴다.
뽀뽀해달라는 뜻이죠?
아니, 불만 끄고 나가라고! 누가 뽀뽀해달래! 지훈의 위에 올라탄 찬이 지훈의 볼을 이리저리 비비며 이마와 눈, 코, 입술의 차례대로 뽀뽀를 퍼부으며 숨을 들이마셨다. 스무 살이 되면 짠! 하고 뭐가 달라질 줄 알았던 이지훈의 십구와 이십, 그 시간은 일 년보다 짧았지만 일 년보다 무거웠다. 일 년이 지나도 지훈은 열아홉이라는 선에 서있었다. 이제는 스물둘 인 지금도, 아마 내일도, 언제나 열아홉에 머물러 살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