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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21. 1. 8. 17:16
작성자
hhh..

 

아, 진짜 형, 형! 좀 더 세게 밟아봐요! 더 더 더! 계속 밟아! 밟으라구……, 밟아아아! 이럴 수가. 정한이 순영의 허리에 붙어서 소릴 내지른다. 아, 야… 재촉하지 마아! 간결하고 애교 묻은 목소리로 응답하며 복잡한 머리를 쥐고 싶은 순영은 핸들을 우에서 좌로 꺾으며 다채롭게도 심각한 표정으로 바이크를 몬다. 서늘한 몸체가 기운다. 저 광나는 라이더 자켓이 일그러져도 정한은 허리를 두 팔로 꼭 붙잡아 깍지를 끼고 부닥치는 바람과 맞서는데 그 순간! 그 순…… 간? 깜짝이야! 이게 뭐야, 구석에서 튀어나오는 저 트럭은 뭔데! 정한의 얼굴이 차차 구겨진다. 순간이었다. 눈앞에 보이는 2.5톤 화물 트럭에 양손과 한발을 빠르게 움직여 제자리를 찾으려 하나 삽시간에 두려운 표정을 짓는 순영. 살갗이 달라붙게 입술을 꽉 문다. 이슥한 밤을 고조되는 비트 리듬으로 일구는 종말 라디오는 옆구리에서 주파수를 추적하고. 지직대는 파열음만이 거슬리게 끊겼다가 이어진다. 추측건대 지금쯤 아지트로부터 멀리 떨어졌을 것이다. 돌진하는 트럭이 정면에서 충돌할 기세로 둘을 노려보길래 운전석에 탄 형체로 눈을 돌리니 그의 목에 쇠꼬챙이가 관통해있었다. 으아아, 비켜 비켜 비켜! 저 꼴로 어떻게 운전하겠다는 건데! 정한이 소리치자 트럭이 경적을 울리며 순영과 정한을 아슬아슬하게 비껴간다. 화물칸 위에서 튀어나온 검은 까마귀 무리가 등을 찌를 기세로 바짝 따라붙고 또 화물칸에서 눈이 먼 자들이 질긴 몸을 이끌고 비틀대며 떨어져서는 지나친 속도에 못 이겨 사지가 으스러진다. 그들은 네다리로 기거나 서서 걸어오거나 뒤틀린 짐승의 울음을 내지르며 달리다 둘의 뒤를 바짝 쫓았다. 사람이 아니다. 사람이 아냐! 찰나에 마주한 헤드라이트 빛에 정한은 눈을 감았다 뜬다. 위험천만한 상황. 그러고도 속력은 그대로였다. 순영이 형! 절대 안 떨어져. 정한이 어떤 틈도 없이 순영을 꽉 껴안자, 덕분에 심장 박동에도 가속도가 붙는다는 것을 확실히 느끼게 된다. 곧이어 휘몰아치는 바람이 헬멧으로 막은 뒤통수의 머리칼 사이까지 파고들고, 미쳐버린 순영의 운전실력 덕에 가까스로 트럭을 피한 둘은 주체할 수 없는 속도로 골목을 파고들어 단숨에 부서진 싸구려 네온사인 간판들을 지나친다. 우리 이 기세로 지구 끝까지 가겠네 안녕.

 

좁디좁은 시골 마을에 둘이 바이크를 몰고 쳐들어온 건 계획이긴 했으나 어찌 보면 꿈같았다. 쉽사리 깨지 못하는 꿈. 어떤 렘수면도 이렇게 길다면 그건 변칙이 틀림이 없으나 꿈속 같은 현실에 안주한 지 오래돼서 도통 신경 쓸 겨를은 없다. 순영은 헬멧을 내려놓고 머리를 털었다. 괴이쩍은 풍경은 언제봐도 낯설고 음산하기 짝이 없고 박약한 바람에 푸르죽죽한 이파리들이 죽어가듯 날리기만. 솟대 위에는 빨갛고 흰 천들이 가만가만 흔들리고 있었다. 누가 봐도 정상적인 왕래가 있는 마을은 아니다.

여사님. 부적 받으러 왔어요.

잡것들… 왜 다 뒤져갈 때 오고 그랴.

거대한 풍채로 둘을 압도하는 누군가가 있다. 옥장판 위를 한 바퀴 뒹굴어서, 짠. 나타난 그녀는 열린 얇은 문 뒤에서 정한과 마주할 정도로만 고개를 빼꼼히 내밀고선 밖으로 나오지 않는다.

성황당에 한번 가보던지.

성황당… 요?

응. 내가 거기 부적들로 칭칭 감아놨어, 미리. 이제 여기처럼 웬만해서 죽은 것들은 못 들어와. 아! 근데 글씨, 내가 거길 다시 가 볼 수가 있어야지. 안 봐도 훤하잖어, 가면 뒤지는데. 그 길목 앞에 시체들이 이만큼 쌓여있을 거라고. 너희가 가는 김에 거기 들려보는 게 좋을 것 같은디.

근데 그런 곳을 저흴 보내려고 하시는 거예요?

에구. 쓸만한 부적이 거기 있는 걸 어쩐담……. 그녀가 중얼거리자 정한이 올망졸망한 눈으로 그녀를 원망한다. 여사님! 결국, 그녀는 어이없어하는 정한의 눈빛을 당해낼 수가 없었다. 아니다. 아니야, 아니야. 잠깐만 여 기다려봐. 방 안으로 돌아간 그녀는 방석 밑에 깔린 부적 두 장을 꺼내 나와서는 정한에게 내밀었다.

이게 뭔데요.

있어.

네? 어떤 용도인지는 알려주셔야죠, 장사를 이렇게 하시는 게 어딨어요!

말할 게 뭐 있어? 부적이 산 놈들 지키려고 쓰는 건데. 갖고 다니면 좋아. 나쁠 거 없어. 외우는 주문도 똑같혀.

아니이, 제가 그래도 여사님 하루 이틀 뵙는 것도 아니구. 이런 식으로 하시면 저희두 돈 못 드리거든요? 오늘 막날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거 다 끌어모아서 갖고 왔는데… 이게 뭐야, 완전 실망.

온 나라가 뒤졌는데 돈은 무슨… 필요 없어 이것아!

우리 신뢰 관계가 이렇게 끝이 나요?

정한은 놓치지 않고 반박한다. 그 정한의 서운한 표정에 어쩔 수 없이 그녀는 정한에 귀에 바짝 다가가 입을 열었다. 귓가에 꽂히는 단 몇 초간의 서슬 퍼런 속삭임…. 정한의 동그란 눈이 더욱 커진다.

 

정한과 대화한 이는 라 여사. 라 여사는 순영의 파트너라 할 수 있었다. 중학생 때부터 알던 사이고 권순영 아버지의 절친. 절친. 절친! 순영은 무당인 아버지의 존재를 라 여사 덕분에 잊을 수 있었는데 죽은 아버지 영혼이 귀천을 떠돌 때 가장 큰 도움을 줘서 그렇다. 그러나 아버지가 죽은 건 아니었다. 좀비가 되었을 뿐이었지. 라 여사는 아버지의 성불을 도왔다. 그건 아버지 스스로 못 하는 일이었으니까.

순영의 어머니는 아버지를 끔찍이 사랑했다. 저 정도라면 사랑해주는 값을 내야 한다고 여겨질 만큼 끔찍하게……. 어머니는 세계 곳곳에 호텔을 소유한 그룹사의 최대 주주 이사장인데 우연히 무당 한번 만났다가 아버지의 점괘를 철석같이 믿고 사랑을 퍼부어서 결혼으로 추락했다. 그때 아버지와 어머니는 이런 대화를 했다. <운명의 짝을 곧 만나겄네요. 예? 그게 누군가요. 나요. 뭐라고요? 당신이 나를 사랑하게 될 겁니다> 그렇게 폴인 러브. 어떤 짧은 러브스토리도 이 둘을 못 이길 것이다. 그로써 골 빈 거 아니냐고 욕하던 친정엄마 뒤로하고 이거 횡재라며 발을 동동 구른 시어머니 앞으로 하여 어머니와 아버지는 유럽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아주 생뚱맞게도. 생뚱맞은 어머니의 행보지만 순영은 어머니가 갈고 닦은 다이아몬드 길을 사뿐히 걸을 수 있었기에 옛날 옛적 사랑놀이에 토를 달진 않았다. 자랑처럼 여기지도 않았고. 어머니의 넘치는 돈과 명예가 그릇에 담기지 않는데 아빠에게 소비되는 것이 아까웠을 뿐. 방 안에 틀어박혀 남 인생 고민에 애를 쓰는 아버지는 순영에게 큰 자리를 차지하지 않았다. 끝내 아버지의 몸에 바이러스가 퍼졌을 때에도……. 아버지 눈이 헤까닥 도셨어요. 어머니는 어서 자길 물어달라고 했고요. 후에 순영은 라 여사에게 그날 있던 일들을 털어놓았다. 그날. 도시 전체에 푸른 멍이 들었던 날. 윤정한이라는 애가 있어요. 걔가, 내 총으로 저희 아버지를 사살한 그 뒤, 어머니도 미쳐버렸거든요? 두 분 다 감염된 거예요. 상호관계 안 맞는 두 사람의 자식으로 태어나 차기 이사장 일을 목숨 걸고 배우던 중이었는데 하필……. 그게 죄인가. 걔랑 내 죄도 아니면서.

 

 

 

돌아오는 정한의 동세를 눈치챈 순영이 바이크에 기대 있던 허리를 세운다. 가지고 왔어? 턱 짓과 함께 묻자, 정한은 품에 넣은 노란 부적을 손가락에 끼워 보여준다. 순영은 한쪽 입꼬리를 올린다. 둘은 다시 바이크 위에 올라타, 바람을 끼고 달려 도심으로 돌아왔다. 주차된 차들이 빼곡한 도로와 사람 한 명 보이지 않는 빌딩. 시간이 여전히 크리스마스에 멈춰있어 불 꺼진 트리와 포인세티아 장식이 가득한 가게들을 지나친다. 코너를 돌아 공터로 향한다. 무너진 돌무더기를 지나치면 전신주가 세워져 있는데 통화가 가능한 곳이 현재로선 이곳과 아지트인 집뿐이었다. 정한은 핑크색 폴더폰을 열었다가 닫았다. 새로운 소식은 없다.

 

일주일 전, 버려진 캐딜락 안을 꾸몄다. 누군가가 버리고 간 차 안에 얼마 없는 통조림과 듣지 않는 팝 씨디, 씨디플레이어, 금 간 조리도구, 음료수병, 키치한 장식의 꾸밈 잡화들, 쓸모도 없는 레트로 장난감, 종이 뭉치들과 어디로 전송되는지 모를 무전기, 팝콘 통, 겉옷과 나이프, 쇠 파이프 등을 쟁여 놓았다. 보이는 대로 여러 잡동사니를 모아 놓다 보니 어느새 꽉 차서 자리를 정리하고 누워야 했다. 둘은 물건들을 치우고 차 시트에 기대앉아 눈을 감는다. 차창 너머로 반짝거리는 별과 함께 소리 없는 밤이 찾아왔다. 좀비가 언제 나타날지 모르니 잠은 교대로 잘 수밖에 없었다. 먼저 정한이 눈을 감았다. 순영은 잠든 얼굴을 보면서 정한의 볼을 살살 매만졌다.

 

시간이 지나면 여전한 굴레로 날이 밝는다. 밤이 죽으면 아침이 살아나는 게 당연한 이치. 밤새 목적 없는 걸음으로 도시를 행진하던 좀비들이 보이지 않을 때쯤, 둘은 뻐근한 몸을 이끌고 차에서 내려 서로의 상태를 확인했다. 새벽 아침은 추웠기에 겉옷을 껴입고서 텅텅 빈 패스트푸드점에 들어섰다. 주방을 뒤져 햄버거를 찾았으나 온전한 상태가 아니다. 딱 하나 괜찮은 테이블로 가 자리에 앉아선 볼품없는 포장지를 일부 찢는다. 그 위로 케첩을 짠다. 순영의 까망 앞머리 사이사이를 파고든 블루 브릿지는 헤어 피스다. 두 손으로 턱을 괴어 순영을 뚫어지게 보던 정한은 대충 만든 레모네이드를 잔에 붓고 스트로우를 씹는다. 잘못하여 혀도 같이 깨물었다. 채도 낮은 타일 벽에다 손에 묻은 케첩을 칠하던 순영은 문득 정한과 눈이 마주친다.

내 얼굴이 그렇게 좋아?

머리 진짜 잘 어울리네요.

정한이 웃었다.

 

허기진 배를 채우고 나니 에너지가 생긴다. 오늘은 숲 속에 들어가 보자. 생존자를 찾아보자는 말이었다. 겨울인데도 햇볕이 강해 둘은 가게 밖을 나와 파라솔이 쳐진 야외 테이블이 있는 호숫가로 향했다. 잔잔한 호수 너머에는 안개가 가득하였다. 갑작스레 순영이 고개를 쳐든다. 반사적으로 자켓 안쪽에 꽂았던 루거 권총을 꺼냈다. 호수의 심연으로부터 올라오는 움직임을 포착했다. 바짝 긴장한 채 두 팔을 쭉 뻗어 총구를 겨누어보지만, 빠릿빠릿하게 나오지 않는다. 그렇게 적막이 흐르다 위로 솟구쳐오르는 무언가. 푸드덕거리며 날아오르는 새 한 마리였다. 진짜 지긋지긋해. 속으로 이를 가는 순영과 그 옆을 지나치던 정한이 중얼거린다.

지긋지긋하고 재미도 하나 없네.

정한의 말을 들은 순영이 뒤를 돌아본다. 정한은 눈살을 찌푸린 채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거 갖고 되겠어요?

발밑에 둔 활대를 집어 든다. 정한은 활을 다룬다. 대학 입학을 포기한 열 아홉살 양궁선수가 윤정한의 타이틀. 승률 구십팔 퍼센트가 캐치프레이즈. 순영이 중학생 시절부터 호텔경영을 배워 지금의 위치에 섰다면 정한은 국가대표 양궁 유망선수로 막 고등학교 졸업을 앞두고 있었다. 순영과 정한은 호텔 파티장에서 서로 처음 알았고 순영은 그날 정한에게 반했다. 파티는 호텔의 협력사, 순영의 어머니의 친구가 경영하는 메드포드 사의 신약 개발 성공을 축하하는 자리였고 메드포드는 정한의 후원업체다. 순영은 미디어에서만 보던 양궁선수를 실제로 보게 되어 신기해했다. 지루한 파티장에서 흘깃흘깃 정한을 눈여겨보던 중에 순영과 눈이 마주친 정한이 다가와 먼저 인사했고……. 순영은 그 눈웃음이 그곳에서 제일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휘황찬란한 샹들리에가 머리 위를 지배하고 있어도 저 웃음보다는. 그때까지만 해도 정한은 순영이 누군지 몰랐다. 순영을 모르는 사람은 순영의 인생에서 처음이었다.

그래서 순영은 정한에게 개인 후원을 하기 시작했다. 단순히 좋다는 이유만으로.

으레 재벌 2세들의 학창 시절이 그렇듯이, 순영도 유학을 떠나 외국에서 살았다. 순영은 꽤 인기 있는 학생이었다. 미시간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한국에 와서도 순영에게 보고 싶다며 시도 때도 없이 친구들이 캐치콜을 해댈 정도였으니. 그러나 미시간 대학교 우등생에서 가족 전부를 잃은 외동아들 장남으로. 추락한 순영에게 이제 남은 건 세계대회 우승 트로피를 짊어지고 돌아왔던 사수 윤정한밖에 없다.

 

운명의 첫 만남 얘기는 뒤로하고. 활시위를 잡아당기던 정한이 몸을 튼다. 고요한 바람 소리를 덮는 짐승의 울음소리가 어디선가 들려왔다. 앞에는 고가도로가 뒤에는 차들이 깔린 교차로, 더 뒤로 가면 하이웨이다. 그 순간, 다리 밑에서 좀비들이 우걱우걱 기어 나온다.

나타났어!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다. 정한은 순영에게 달려갔다. 순영도 낌새를 알아채고 정한과 나란히 뛰어가는데, 정한보다 많이 뒤처진다. 인식하는 데 오래 걸리는 탓이었다. 형! 못 뛰어요? 뒤돌아본 정한의 음성이 높아진다. 옷, 옷이 좀 무거워! 순영은 애써 변명했다. 정한이 눈썹을 찡그린다. 이번 연도 알렉산더왕 어쩌고 컬렉션이라서?

캐딜락이 있는 공터로 돌아왔다. 찌그러진 코카콜라 캔이 데구루루 굴러 정한의 발끝에 멈춘다. 옆구리에 구멍이 난 캔에서 탄산이 뿜어져 나왔다. 자연스럽게 발로 캔을 우그러트린다. 겨울이야. 겨울이라고. 입김이 새어 나와 시린 손을 비빈다. 입고 있는 교복 자켓을 털고 니트를 잡아당기고 기름통을 열었다. 하루하루를 오늘을 위해 살기로 했다. 무조건. 무슨 일이 있어도 오늘은 결판을 내야 해. 그런 오늘이 매일 반복되는 게 문제일 뿐. 라이터를 켜는 정한의 손이 자꾸만 떨렸다.

우당탕 끼익 끽 쿵 덜컹덜컹. 온갖 의성어들이 남발하기 시작하고 도로로 나선 정한은 활대를 들어 올린다. 순영은 놈들의 동태를 살피며 권총을 꺼내 쏘기 시작했다. 탕! 탕! 한 발에 한 마리씩 뇌를 맞아 죽어나갔다. 좀비들이 도로 끝에서부터 점령하며 다가오자 어느새 정한이 순영의 옆에 섰다.

 

그림자 때문에 어두워지기 시작했죠. 저 테이블엔 찌질이들 한 트럭 모여있고.

 

정한이 가리킨 가게 옆 테이블 위에 사지가 기괴하게 꺾여가는 좀비들이 둘을 노리고 있다.

 

하나둘 셋! 하면 쟤네 대가리가 날라가. 봐봐요, 하나둘 셋, 푸슝.

 

기름과 라이터로 불붙인 화살이 제대로 명중한다. 목에 꽂힌 불이 그새 온몸으로 번지고 찌걱거리는 신체 일부가 불에 타 떨어져 사그라진다. 그렇게 다섯 마리를 사살하여 잠시 사태가 일단락되는 듯했다. 정한은 활대를 내려놓고 머리를 돌려 긴장을 풀었다.

 

뭐 근데 굳이 카운트다운하지 않아도 가능킨 해요. 근데 잠깐만. 부적 챙겼어요? 그 말에 전방을 향해 사격을 멈춘 순영이 정한을 바라본다. 정한이가 가져오기로 한 거 아닌가. 내가요? 응. 부적 나한테 없는데? 나한테도 없는데? 내가 형한테 줬잖아. 차에다 놔둔 거 아니에요? 그럴 리가…. 아! 잃어버렸나 봐. 순영은 바이크를 끌고 돌아오던 때를 떠올린다. 그러고 나서 아마도 차에……. 정한도 같은 장면을 생각하고 울상이 된다. 설마! 아! 그럼 우리 저거 어떻게 물리치는데!

화살촉에 독을 바를까?

쟤네 몸에 독이 먹혀요?

아니, 아니구나.

진짜 형. 바보같구 귀엽다.

 

좀비를 척살하는 일을 한 지, 극 초기 무렵에 라 여사는 순영에게 부적을 적어줬다. 그건 상대의 눈을 가리는 용도라고 했다. 주문을 외우고 지니고 있으면 감염된 좀비들이 알아채지 못한다고. 산 사람의 냄새를 못 맡는다고. 

틀렸어, 이미 우리 봤어요. 부적이 있었으면 쉬웠을 텐데. 불도 한계가 있는 거 같아. 아쉬워하는 정한에게 순영은 총집을 새로 끼우며 말했다. 나는 이렇게 좀비들이 많을 줄 몰랐어. 부적이 있었으면 좀비랑 춤추는 정신 나간 또라이라고 아홉 시 뉴스에 대문짝만 하게 나올걸.

그거 개그야?

정한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순영은 멋쩍게 웃고 다시 사격에 집중했다. 그때, 먼 곳 철제 쓰레기통이 뒤집어진다. 손 쓸 틈도 없이 나타난 얼굴들이 기를 쓰며 대각으로 가두를 달려온다. 여러 마리가 줄줄이 뛰쳐나오며 양쪽 모퉁이로 제각기 갈라졌다. 서성이는 좀비들이 많아졌다. 시발 뭣 같네. 좀비들이 정한을 쫓아 가로등에 올라탄다. 순식간에 가로등이 기울어지자 정한은 재빨리 차 뒤로 숨었다. 가로등은 자동차의 보닛에 타격을 입히고 멈췄다. 정한은 눈에 안 띄게 기어서 건물 틈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고 순영은 사격을 계속했지만, 총알이 빨리 닳았다. 안 되겠다, 몸을 써야겠다. 총소리에 좀비들이 몰려오는 것이 분명하다. 순영은 캐딜락으로 되돌아간다. 그러나 그랬으면 안되었다. 정한이 혼자 남게 된다. 가죽 활집에서 빼낼 활이 없어진 정한은 이리저리 주변을 살폈다. 그때 눈에 들어온 것은 가까운 거리에 떨어져 있는 야구 배트. 정한이 다시 밖으로 나온다.

그러나 튀어나온 좀비 한 마리가 빠르게 정한을 덮쳤다. 둔탁한 그 소리에 순영이 정한 쪽을 봤다. 정한은 필사적으로 좀비의 대가리를 깽깽 부쉈다. 죽으라고! 죽어! 쇠로 된 배트는 물컹거리는 좀비의 머리에 큰 타격을 주었고 그 사이, 순영이 돌아왔다. 쇠 파이프와 총알을 만땅 채워 넣은 총을 챙겨서. 순영은 그립을 감싸 쥐고 좀비의 다리를 쐈는데 다른 좀비가 순영의 옷을 물고 늘어진다. 아악! 총기의 하단으로 머리를 퍽퍽, 내리친다. 좀비는 끈질기게 순영의 양팔을 잡아 왔다. 왼쪽 손으로 쥐고 있던 쇠 파이프로 목을 뎅겅 자른다. 이런 게 바로… 넥슬라이스인가? 하지만 고민할 새가 없다. 일 분이 일 초 같은 시간이다. 다른 좀비 무리가 둘에게 각각 달려가고 있었다. 정한은 가까스로 배트의 밑부분을 휘둘러 몇 마리를 처치하느라 바빴다. 그 덕에 니트 아래 나온 와이셔츠가 구겨지고 단추가 튕겨 나간다.

순영의 손목, 깨진 롤렉스에서 다이아몬드 파편이 가루처럼 떨어진다. 순영은 달려오는 좀비들의 어깨에 총알을 박아넣어 간신히 그들을 떼어놓았다. 그리고 쇠파이프로 머리를 날렸다. 정한이 위험했다.

정한아!

정한의 다리엔 피가 새어 나오고 있었다. 공격을 피하려다 스친 총알이 정한의 다리에 박힌 듯했다. 눈에 흩뿌려지는 피. 눈발에 흩날리는 머리카락. 순영은 울고 싶은 기분으로 이를 꽉 물곤 총구를 겨눈다. 붙어있던 좀비들이 우수수 머리를 맞고 떨어져 나갔고 순영은 정한에게 달려갔다. 손을 뒤로 뻗어 지탱한 정한의 몸이 바닥으로 쓰러지는 사이. 굴러가던 배트를 주워 꿀떡 거리며 피를 토하는 좀비들의 머리를 강하게 쳤다. 끊어진 머리가 아스팔트 위를 데굴데굴 구른다.

순영은 차에서 찾은 붕대로 정한의 다리를 칭칭 감으며 말했다.

정한아. 집에 가자, 어?

정한이 고개를 끄덕인다.

 

 

 

집은 나무로 둘러싸여 있다. 저택 명의는 권순영 이름. 열여섯 살에 개인 소유가 된 저택이 멸망한 도시의 아지트로 쓰일 줄은 예측도 안 했다. 정한을 조수석에 태우고 십 여분을 운전해 이곳에 도착했다. 달려오는 내내 좀비들이 머리를 박고 고꾸라지면 험악한 운전으로 차체를 흔들어 떼어내기도 했다. 정원 한가운데에 캐딜락을 주차한다. 대문을 열고 들어서자 차가운 바람이 온몸을 휘감는다. 오랫동안 비었던 집안도 여전히 추웠다. 좀비의 출입을 막기 위해 모든 문에 쇠 판자를 뜯어와 만든 잠금장치를 덧대 놨었다. 최고급 저택답게 버튼으로 밖의 조명을 조절할 수 있단 점이 유일하게 좋은 점인, 며칠 동안 계속 머물기에는 힘든 집이다. 순영은 1층 홀의 모든 커튼을 쳐 빛을 차단하곤 온전히 걷기엔 힘이 드는 정한을 부축해 홀을 가로질러 끝에 있는 방문을 열었다. 정한이 내부를 살피는데…….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권순영과 호랑이 한 마리.

옳지.

정한은 순영이 호랑이를 기르고 있다는 사실을, 이 집에 초대받았을 적에 알았다. 순영이 정한의 후원자가 되고 서로 연락을 주고받으며 친해질 무렵에 정한은 떼를 써 순영의 개인 소유 저택에 놀러 갔다. 그런데 거기서 맹수를 만날 줄은……. 호랑이를 키워요? 불법이잖아요. 야, 한아. 너는 말이 넘 많아. 참나, 형도거든요. 근데 저걸 왜 키우는데 도대체?

돈이 넘쳐서.

말이 끝나자마자 집 안을 울리는 포효소리. 정한의 놀란 목소리가 한 톤 높아졌다.

깜짝이야! 나한테 오게 하지 마요.

아하하… 괜찮아, 안 물어.

 

……그랬었다. 순영은 침대 옆에 기댄 호랑이의 턱을 만지며 몸뚱어리의 털을 쓰다듬는다. 살이 점점 빠지고 있어. 털이 수북이 뽑힌다. 근처에 정육점이 군데군데 있어 그동안 다행이었으나 이제는 먹이를 구하기 어려운 처지가 됐다. 둘의 양식도 거의 동이 났고. 호랑이는 자기 털을 핥다가 순영에게 머리를 비빈다. 정한은 기지개를 켜고 침대에 풀썩 주저앉았다. 온몸의 긴장이 서서히 풀려 노곤해진다. 그런 정한에게 다가간 순영이 정한의 교복 바지를 걷었다. 바닥에 앉아 다리에 난 상처를 살피고 침대 밑에 놨던 응급키트를 꺼낸다. 목소리에 물기가 묻어있다.

너 활 쏘지 마.

눈을 감고 있던 정한이 천천히 눈을 뜬다.

활 쏘는 애한테 말이 그렇다.

다칠까 봐 그러지.

정한은 어이없다는 듯이 웃었다.

이 순간이 단 한 번뿐이라는 생각이 드니까, 널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모르겠어.

순영의 걱정이 정한의 뇌 속을 파고든다. 화살에 맞은 것처럼 정통으로 꽂힌 애정에 무슨 색을 입힐까. 무슨 말이라도 해보려 입술을 달싹여보지만 아무 말도 나오지 않음을 깨닫고 눈을 이리저리 굴릴 뿐. 어느새 순영은 피를 닦고 총알을 빼내 새로운 붕대로 감아주고 정한의 눈치를 보며 일어섰다. 

내가 먹을 거랑 이것저것 찾아와 볼게. 운 좋으면 생존자 기지도 발견할지 몰라.

정한이 깜짝 놀라 순영을 올려다본다.

나 두고 어디 가요.

여기 있어. 넌 아프잖아.

무슨 개소리야. 밖에 좀비들 피해서 여기 왔는데 또 나간다고요?

정한아 이 집 아무것도 없어. 알잖아. 당장 배고프면 뭘 먹으려고. 우리 여기 오래 있을 수가 없어.

그래도 싫어.

그렇지만 그래야 해.

그럼 나 앞으로 형이랑 안 다녀요.

왜 그래, 너 다쳤잖아. 쉬어야지.

아, 됐어! 꺼져! 나 두고 갈 바엔 돌아오지 마요! 형 가버리면 쟤 죽이고 나 자살할 거니까.

정한아….

순영은 자세를 낮춰 아까부터 눈을 맞춘다. 진심이 담긴 그 눈빛에 정한은 피하려 괜스레 고갤 돌린다. 그러나 구석에 있던 호랑이가 천천히 다가와 정한의 팔에서부터 턱까지 혀로 핥아 올렸다. 으…. 별수 없이 다시 고개를 순영에게 돌린다. 미소를 지어 보이는 순영 때문에 정한의 눈이 흔들렸다.

미안해. 너 살리고 싶어서 그래. 너랑 오래 살고 싶어서.

하필이면 손을 잡고 조곤조곤 말하는 탓.

아이… 일찍 올게, 진짜. 주변만 살피고 바로 올게. 응? 정한아아. 정한아….

 

미치겠네. 짜증 나게 귀여울 건 뭐야.

 

스웨이드 자켓을 벗은 순영이 레더 자켓을 걸친다. 휘몰아치던 눈발이 어느덧 비로 바뀌었다. 겨울인데 비가 오네. 비는 갈수록 세차게 도시를 씻어내고 있었다.

 

마트는 쥐죽은 듯 조용했다. 유리문을 열고 조심스레 들어가 본다. 정한의 배트를 챙겨서. 가게 안은 크리스마스를 기념하는 천사 아이들 장식이 마트 내부를 빙 두르고 있다. 얼마 전만 해도 캐롤이 흘러나오고 북적대던 곳이었는데…. 그런 생각을 하다 고개를 좌우로 젓는다. 고기 코너의 선홍색 조명은 끊겼다 이어지기를 반복하고 순영은 타일바닥을 천천히 내디뎠다. 쓸모 있어 보이는 과자 몇 봉지가 먼저 눈에 띄었다. 매대에 흐트러져 있는 봉지 더미를 집었는데 갑자기 문이 열린 창고 앞 구석에서 부스럭대는 소리가 들렸다. 숨을 죽이며 다가가는 동안 바깥의 빗소리는 가게 천장을 타악기처럼 강하게 내리친다. 움찔거리는 어깨. 배트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가고. 발밑으로 흘러오는 피. 굴러 온 머리카락 뭉치. 매대를 앞에 두고 확실하게 보인다. 사람의 뒷모습 형태가.

발 옆의 박스를 발로 찬다.

소리에 짐승이 뒤를 돈다. 한 마리? 눈짓으로 마트 전체를 살피니 일단 한 마리다. 눈알이 희뿌옇게 번진 좀비가 순영을 향해 기괴한 울음을 내지르며 달려왔다. 순영도 놓칠세라 배트를 휘두른다. 어깨를 정확히 친 배트가 철제 매대를 깡, 내리쳤다. 순식간에 함몰됐던 근육이 금방 꺾였다가 되살아난다. 동공이 없는 눈알인데도 빛을 내뿜는 모양새였다. 끼이이엑. 울부짖는 소리에 뒷걸음질치는 순영. 양 사이드로 매대가 있고 좀비와의 대거리는 그사이 공간에서 펼쳐졌다. 빠르게 양쪽 매대를 쓰러트린다. 그러자 장애물에 갇힌 좀비가 꿈틀대며 팔을 뻗어오고 순영이 곧장 머리를 가격한다. 좀비가 잠시 휘청대다가 물건을 뒤엎으며 일어섰다. 그 사이에 순영은 뒤로 쭉 나갔다가 반동을 이용해 벽을 찍고 날아 다리를 뻗었다. 킥을 날린다. 복부를 맞고 쓰러진 좀비가 바닥을 긴다. 그 움직임을 기다린 순영이 골골대는 좀비가 일어서자마자 배트를 배에다 쑤셔 박고 끝까지 밀었다. 열려있던 창고 안으로 괴성을 내지르며 빨려 들어가는 좀비. 재빠르게 창고 문을 닫아 잠갔다. 긴박했던 상황. 가슴께를 쓸어내리다가 문득 깨닫는다. 더 빨리 움직여야 한다. 소리를 듣고 좀비들이 찾아올 것이다.

uh-oh.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고. 예닐곱 마리가 마트 유리 벽에 붙어 안을 보고 있다. 제기랄. 한 두 마리는 벽에 머리를 쾅쾅 찧고 다른 놈들은 문을 두드리다가 열린 문 안으로 들어오고야 말았다. 바닥엔 좀비가 먹다 남은 시체에서 흘러나온 피가 흥건했다. 순영은 마음을 가다듬은 후, 셋을 셌다. 토마토 절임 통조림 캔을 공중으로 던져 배트로 후려쳤다. 캔이 첫 번째 놈의 머리를 강타했다.

 

고개를 뒤로 꺾으면 보랏빛 하늘이 눈앞에. 하… 씨바알. 꺾은 머리를 천천히 원상복구 한다. 순영은 버려진 공터에 잠깐 캐딜락을 주차하고 바람을 쐬었다. 어찌 됐든 상황은 끝났다. 마트에는 신선하게 죽은 몸들이 쌓였고 피비린내가 잔뜩 일었다. 좀전의 격투로 손등에 생채기가 났다. 비가 언제 그쳤는지 가늠 안 되는 날이다. 밤이 되면 바람이 심하게 불 것 같았다. 순영은 가게 유리문에 찍힌 피 손자국을 바라보다 루프에서 내려온다. 파라솔 테이블에 올려놓은 핸드폰에 진동이 울렸다. 깜짝이야, 정한이? 발신자 표시에는 당연히. 정한의 이름이 둥둥 떠 있다.

여보세요.

형. 순영이 형.

응, 왜.

보고 싶어요.

보… 보고 싶, …어요. 통화 품질은 아주 불량이었다. 말소리가 뚝뚝 끊긴다. 그렇게 해서 배가 된 간절함이 와 닿아 몸 안에서 말랑한 게 생산되는데 이게 뭘까. 정한이 있어 줘서. 정한이 자신을 보고 싶어 해서 그 마음에 울고 싶어도 웃게 되는 것이다. 수줍게 미소 짓던 얼굴이 머릿속을 떠나가지 않는다. 짓궂은 표정이, 다정함이, 눈웃음이 그립다. 아 왜 이러지. 돌아가면 볼 텐데. 어제도 엊그제도 이 사달이 나기 전부터도 계속 붙어있었는데 왜 자꾸 보고 싶다고 그럴까. 문자로도 말하구. 저장함에 쌓여있는 정한의 문자들을 살핀다. 처음 주고받았던 때부터 하나도 지우지 않았다. 순영은 말라비틀어진 입술을 혀로 쓴다. 물기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나도 얘가 왜 이렇게 보고 싶을까.

보고 싶은데 어쩔 거예요. 빨리 와요.

시간이 없다. 저 목소리 때문에 움직일 수밖에.

 

 

 

흰색 플로랄 무늬가 연속적인 검은색 셔츠로 갈아입고 나왔다. 거실로 오는 순영을 본 정한이 묻는다. 춥지 않아요? 벽난로 피웠어. 의도는 그 옷이 얇아서 춥지 않느냐는 뜻이었는데 추우니까 뭔가 해달라 하는 식으로 알아들은 것 같다. 정한은 그런 순영의 엉뚱함에 잠시 말을 잃었다가, 그래도 뭐. 귀여우니 됐지. 얼버무린다. 보고 싶다니까 바로 달려오는 스물넷 형아가 대책 없이 귀여우면 된 거지.

정한은 순영이 가져온 식료품 중, 핫초코를 만들었다. 무릎에 담요를 덮고 노곤한 몸을 녹이는 동안 순영이 정한의 옆에 앉는다. 핫초코를 홀짝대다 뒤를 쳐다본 정한이 순영에게 묻는다. 형 근데 쟤 이름은 있어요? 어… 응. 어렸을 때 지어줬는데……. 뭔데. 티야. 티? 이름이 티예요? 응. 타이거의 앞 자를 따서. 둘이 기대있는 소파 뒤로 이 집의 주인인 양, 편한 자세를 취한 채 생닭을 찢어먹는 호랑이가 있다. 갑자기 정한이 아이같이 소릴 내며 웃는다. 그거 형 애칭으로도 쓰자. 어? 정한은 순영의 의아한 표정을 무시하고 폴더폰에 순영의 이름을 새로 입력했다. 'T'. 옆에 투명 하트를 붙인다.

됐다.

왜 바꾸는데?

내 비밀 히어로 같잖아요.

정말 궁금해서 묻는 순영과 달리 정한은 희맑았다. 그러나 이름 수정을 하고 작동이 멈춘 건지, 핸드폰이 먹통이다. 플립을 닫았다가 열었는데도 그 상태로 바뀌지 않는 화면에 정한이 신경질을 낸다. 답답해서 결국 던져버렸다. 핑크색 폴더폰이 러그 위로 나뒹군다. 뭐해. 끝났어, 고장 났어. 그러게 내가 나 쓰는 스마트폰으로 바꿔준다 그랬잖아. 됐어요. 어차피 전에도 연락할 데 없었는데 뭘.

그리고서 모닥불을 주시하는 순영에게 바짝 붙는 것이다. 그러나 순영은 타오르는 불을 무슨 생각을 하는지 미동 없이 바라보기만 할 뿐. 그런 순영의 옆선을 지그시 쳐다보던 정한이 순영의 허벅지에 손을 올린다.

무슨 생각해?

우리가 여름에 같이 먹었던 체리 파르페.

아. 그거 맛있었는데. 데이트하는 거 같았어. 형이 나 꼬셨잖아요. 정한아앙, 오늘 너희 집 비어? 나 너희 집에서 자구 가면 안 돼? 익살스러운 얼굴로 순영의 볼에 제 볼을 붙여오는 정한에 순영은 뺨을 내어주면서도 기억을 찾으려 머릴 굴렸다. 오, 내가 그랬었나? 그리고 정한의 손이 순영의 손을 파고든다. 아아, 여기 아파. 순영에게서 앓는 소리가 나왔다. 귀를 쫑긋 세운다. 다친 거야?

응.

아…. 손을 떼고 일그러지는 순영의 얼굴에 정한은 피식 댄다. 손등이 상처투성이다. 으이구… 아팠엉? 우리 순영이 형 아팠어요? 정한이 한껏 놀리자 순영은 눈을 흘겼다. 정한은 그 반응이 좋았다.

다치지 마.

애정이 어린 말 한마디에 정한의 어깨로 머릴 기대는 순영. 그 순간 정한은 심박 수를 체크할 수 있었다.

 

사랑이다. 정한이 눈을 게슴츠레하게 떴다.

 

형.

응.

형 혹시 연하는 별로예요?

어? 왜, 왜 갑자기 그런 걸 물어?

그냥 궁금해서.

순영이 두 눈을 깜빡인다. 정한의 맑은 눈동자를 보며 저절로 벌어지는 입은 신경 쓰지 못한 채. 위아래로 올랐다 내려갔다 하는 속눈썹.

어… 글쎄, 나는 잘….

정한의 두 눈이 커졌다.

연하가 별로예요? 형, 제가 별로예요? 

아니, 아니. 그런 게 아니구.

뭐가 아니야, 내가 싫죠? 아 역시 그럴 것 같았어. 나랑 있는 게 힘들었지. 내가 형을 사랑하는 만큼 형은 날 사랑하지 않으니까.

아, 뭐야 정한아아… 그런 말 하지 않기로 했잖아.

무슨 말. 사랑한다는 말? 하지만 나한텐 남은 게 형밖에 없는데 나 어떡하라고? 우리 가족도 다 감염되구 형까지 그렇게 될 뻔했는데 나 어쩌라고 그런 막말을 해요. 그때 그날 내가 형네 집에 안 갔다면 형은 이 세상에 없었을 거잖아요. 아니면 좀비가 돼서 밤새 울고 있거나 그러겠지. 고마워해야 해, 형은 진짜……, 나한테 안 고마워요?

그리고 정적이었다. 모닥불 타오르는 소리가 이렇게 컸던가. 식어가는 핫초코를 새로 데워야 할 때가 틀림없다. 정한의 앞에 있으면 모든 생각이 읽히는 기분이다. 정한은 순영을 잘 알았다. 가끔 이렇게 정한의 새로운 면을 알면 알게 될수록 순영은 정한에게 매달리고 싶었다.

난 진짜 형이 다인데.

그래 저런 거. 저런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하는 거. 순영은 뭔가에 홀린 듯이 손을 뻗어 정한의 품에 들어갔다. 분명 귀가 새빨개졌을 것이다. 그렇지만 차라리 얼굴을 가리는 게 낫다고 판단한다. 얼굴은 지금 완전 홍당무거든. 그러나 당황하는 건 정한도 마찬가지. 정한은 품속에서 색색 숨을 내쉬는 순영에게 심장 소리가 들릴까 봐 쩔쩔맸다.

나도야.

그렇게 순영은 정한에게 오래도록 안겨있었다.

 

콘샐러드와 와인을 저녁으로 했다. 정한은 냉장고에서 유리병에 담긴 레드와인을 꺼내면서 생각했다. 역시 재벌은 특이하네. 밥이 없어도 와인은 있고. 순영은 이미 몇 번이나 본 녹화해둔 뉴스 비디오가 한창 틀어져 있는 TV 앞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와인이 들어가서 기분 좋게 알딸딸하다. 정한과 순영은 식탁을 놔두고 굳이 옆에 붙어서 멍하니 TV를 시청한다. 바이러스가 보도되던 그 난리 통에 순영을 집으로 불렀던 건, 순영의 집에 가 있었던 정한이었다. 정한이 순영의 왼쪽 어깨에 기대어 우물거리는 동안 순영은 젓가락질을 멈췄다. 정한의 볼이 붉다. 정한은 순영의 팔을 꿈지럭대며 주무른다. 얘 왜 이럴까. 순영이 정한을 바라보고 있자 정한이 눈을 치켜뜨고 순영을 본다. 내리깐 시선이 정한과 맞닿는다. 그렇게 한참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한참을. 정한의 손이 순영의 팔에서 천천히 미끄러져 깍지를 껴온다.

지압 좋아해요?

응.

해줄까요?

그러면서 손바닥을 두 엄지손가락으로 꾹꾹 누른다. 순영이 배시시 웃었다. 정한은 아직도 어깨에서 고개를 떼지 않고 순영을 올려보고 있다. 눈길이 낯설다. 또 한 번 정한에게 스캔 당하는 중. 끈질기도록 시선이 떨어지지 않자 순영은 아까보다 더 밝게 웃었다.

왜 이래애.

소유욕 때문에.

쉽게 나온 말이었다. 정한은 고개를 들고 순영의 입술을 나른하게 바라본다. 정한의 말에 입술을 깨물던 순영은 등부터 머리까지 올라오는 열기를 무시할 수 없다. 뭐에 홀린 듯 정한의 발갛고 촉촉해 보이는 입술로 향하는 얼굴. 정한이 순영의 눈을 본다. 콩깍지 제대로 꼈네. 고개를 꺾자 입술이 맞닿는다. 정한은 순영의 목을 한 손으로 감았다. 질척거리는 소리가 이어지다가 순영이 정한의 어깨를 당겨 숨이 새어나왔다. 하…. 윗입술을 머금고 거세게 빨았다. 정한의 손이 가슴팍을 쓰다듬다가 단추 사이 벌어져 있는 틈으로 들어간다. 순영은 아예 정한의 목을 두 팔로 감고 매달려 순영을 껴안은 정한의 몸이 뜨거워졌다. 순영이 정한의 교복 속으로 손을 넣어 등을 쓰다듬는다. 축축한 셔츠 안의 속살이 부드럽다. 키스는 더욱 거칠어지고 주체하지 못하는 순영은 정한에게 몸을 맡긴다. 천천히 뒤로 밀려나고 있다. 나 첫 키스인데…. 순영은 테크닉이 좋았다. 어느새 순영이 정한의 셔츠 단추를 풀고 쇄골을 빨았다. 혀로 핥다가 목으로 올라오면서 다시 입술을 물었다. 정한은 순영의 셔츠를 파헤치고 살살 눈을 떴다. 때마침 파바박. 그제야 정신을 차렸는지 정한의 목을 물던 순영이 눈을 뜬다. 둘의 눈이 마주치자 순영은 부끄러움에 순식간에 얼굴이 새빨개져 버렸다.

정, 정한아. 옷부터 갈아입자.

몸을 일으킨 순영이 괜히 젖은 셔츠와 교복 니트 탓을 하며 머리를 헝클어트린다. 애한테 뭔 짓을 하는 거야. 생각하며 얼굴을 두 손으로 가렸다. 누워있던 정한이 씩 웃는다. 귀여웠다. 사랑스럽다. 일어나 자세를 낮추고 순영을 쳐다보는데 잠깐 아무 반응 없는 정한에 순영이 정한을 본다. 

잠시만. 내 교복 입어줘.

뭐?

정한이 남아있던 순영의 셔츠 단추를 다 풀었다. 얇은 원단 사이로 추운 바람이 몸을 훑고 지나가더니 뜨거웠던 열기가 살살 가시는 듯하다. 정한이 자기 교복을 벗더니 순영에게 건네준다. 정한은 반팔 티 차림이었다. 아 빨리. 장난기 가득한 얼굴이 눈앞에.  맨몸인 순영은 교복을 받아들고 머뭇거렸다.  왜, 왜 바꿔 입는 거야? 정한은 그냥, 이라고 했다.

불 다 꺼.

 

잔이 쓰러지고 레드와인이 흘러나와 바닥을 뒹군다. 피처럼. 정한은 순영의 옆구리를 살살 쓸었다. 달아오른 얼굴이 빨갛다. 순영이 열에 취해 정한을 올려다보고 있다. 하씨, 꼴리네. 빛이 없으니까. 서로의 표정은 보이지 않아도 분위기에 녹아가는 눈동자는 빛이 났다. 온몸에는 번드르르한 식은땀이. 순영의 신음이 방 안을 울린다. 아흑, 정, 한아 그만.

하아… 진짜 그만해요? 허리가 이렇게 들리는데. 앞이 다 풀린 셔츠를 걸친 순영의 것을 애무하던 정한이 순영의 위로 올라온다. 으응…. 순영은 다가온 정한의 목에 팔을 두르고는 입술로 정한의 얼굴을 더듬는다. 순영의 볼을 잡고 버드키스를 했다가 떨어지는 정한. 순영은 떨어지는 정한을 끌어당긴다.

학생 때… 형이랑 하자는 애들 없었어요?

속삭이는 정한이 순영의 얼굴 구석구석 입을 맞춘다.

난 많았거든.

정한아.

네.

반말할래?

순영이 정한의 말을 막는다. 정한이 씩 웃었다.

당연하죠. 나 반말 잘해.

 

어둑한 밤이 되었다. 깊어가는 어둠을 배경으로 둘은 침대 위로 스러진다. 너 나 사랑하니. 적막 속에서 물음을 던졌다. 그러나 정한이 말이 없다. 자는걸까. 순영이 다시 한번 묻는다. 정한아 나 사랑해? 넓고 빈방 안을 두 사람의 체온이 채운다. 밖에는 그르릉 거리는 짐승의 울음소리 천지인데. 순영은 문득 울고 싶어졌다. 하지만 물기 있는 사람이 되고싶다가도 울면 안 될 것 같았다. 정한이 있어서. 어둠에 익숙하기 싫었는데 익숙해진 인생이라니. 어디선가 겨울 밤에 절인 화약품 냄새가 났다. 순영은 지난날의 삶이 전부 거짓 같았다. 그런데도 내 파트너는 나만 믿고 주구장창 나만 생각하는데. 순영은 두려웠다. 정한이 떠날까봐. 언제든 사라져버릴까 봐. 순영이 정한 쪽으로 몸을 돌린다. 정한은 자는 게 아니라 천장을 보고 있었다. 순영이 한 번 더 묻는다. 정한아. 나 사랑,

그런 말 하지 말자며.

정한이 순영 쪽으로 고갤 돌린다. 다정하게 웃으며. 마주 보게 된 얼굴 사이 거리가 가깝다. 순영은 그 대답에 아무 말 못하고 정한의 얼굴을 뚫어지라 본다. 정한은 순영이 그런 말을 하는 게 미웠다.

형은 어떤데.

사랑해.

놀랐다. 처음이었다. 사랑한다고 하면 그런 말 하지 말라던 사람이 고백하면 반칙 아냐? 정한은 눈만 깜빡거리며 할 말을 찾았으나 머릿속 회로가 꼬여 무슨 말도 안 나왔다. 순영의 진지한 목소리에 꽂혀서는. 

먼저 말 못하면 지는 거래 정한아. 네가 졌어.

저 입에서 저런 말이 나올 줄은. 순영이 방그레 웃었다. 

그리고 네가 나한테 길들어졌고.

뭐래. 그건 형이지. 입어 달라 하면 내 교복도 입어주면서. 

그날 밤은 둘다 간단히 샤워를 하고 순영이 먼저 잠에 들었다. 정한이 보초를 서고, 해가 막 떠오르기 전까지 순영의 머리를 정돈해주다가 까무룩 쏟아지는 졸음을 참지 못했다.

 

 

 

날이 밝아왔다. 지체할 시간이 없다. 이 도시는 희망이 없으니 다른 곳으로 이동해야 한다. 생존자들을 찾아서. 보이지 않지만, 분명히 어딘가에 있을 사람들. 왠지 그들이, 사건이 터진 후 통제된 메드포드 사 연구실에 갇혀 있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순영과 정한은 잠시 그들의 평안을 기원하고는 나갈 채비를 한다. 순영은 옷장을 뒤져 군청색 후드티로 갈아입고 정한은 트레이닝복을 받아 입었다. 우선 얇은 옷을 겹겹이 껴입고 밖으로 나오니 전깃줄에 새들이 지저귀고 있었다. 새벽부터 내내 눈이 내렸고 지금은 약한 눈발이 사근사근, 바람에 의해 춤을 추며 날린다. 정한은 차에서 활을 꺼내려다가 그냥 내려놓았다. 다치지 말라던 순영의 말이 떠올라서. 그 대신 쇠 파이프를 집었다. 그리고 순영은 나이프와 칼집을 꺼낸다. 칼집을 허리에 차려는 순영이 못하고 낑낑대자 정한이 순영에게 다가온다.

묶어줄까.

응. 뒤에서 좀 해줘.

뒤에서 뭘 해줘?

정한은 능글맞게 웃으며 순영을 껴안는다. 깜짝 놀란 순영이 뒤를 돌았다. 아 뭐야…. 정한을 툭, 밀어버리는 순영. 정한이 킥킥, 키득거린다.

형은 나를 싸이코로 만드는 거 같아. 근데 난 그게 좋아.

친절한 악마란 저런 것일까. 나를 나락으로 떠밀어도 일생을 내가 좋아할 사람. 부끄러움에 몸 둘 바를 모르던 순영은 정한의 볼에 뽀뽀를 쪽, 하고 떨어졌다.

 

도심은 너무나 밝다. 긴박하게 탈출한 흔적이 남아있는 차들이 도로에 즐비했고 아직도 눈발이 흩날렸다. 세상이 멈추었던 크리스마스날의 반복. 그렇게 춥진 않았지만, 날이 쌀쌀했다. 차 안에도 숨을 뱉으니 입김이 났다. 정한은 작동 안 되는 무전기를 두드리다가 말았다. 순영이 그걸 보다가 애써 웃으며 나가자고 했다. 둘은 밖으로 나와 공터로 향했다. 공터에는 바이크가 그대로 세워져 있다. 그런데 무언가 이상하다. 정한이 먼저 눈치챘다. 바퀴와 앞부분에 피가 묻어있는 것을. 형. 순영이 정한이 가리키는 곳을 본다. 그건 확실히 피였다. 살아있던 사람이 있었던 걸까? 그러고보니 마트에서도. 순영이 중얼거리자 바이크 앞을 살피던 정한이 말했다. 형 이거 사람 피가 아닌 거 같아. 정한이 뒤를 돈다. 멀리 누워있는 시체와 그 밑에 고여있는 피가 보였다. 그리고 누군가가 시체를 뜯어먹고……. 우악스럽게 살점을 뜯어 씹어먹는 좀비가 두 사람의 앞에 있다. 저 멀리 그늘막에 좀비들이 우왕좌왕 거리며 모여있다. 동족 상쟁. 좀비가 좀비를 뜯어먹기 시작했다.

텅 빈 야외 수영장에서는 락스 냄새가 난다. 코끝이 찡했다. 말라 비틀어진 타일에는 물기가 한 방울도 없고 수영장 바깥에는 죽은 풀이 타일 틈새마다 자라나 있었다. 정한과 순영은 공터를 지나 수영장이 있는 건물 뒤편으로 몰래 이동했다. 좀비들은 눈이 보이지 않고 소리에만 민감해 숨을 죽여 움직여야 했다. 뒤편에는 메드포드 본사가 있다. 불이 꺼진 건물에 부분부분 유리가 깨져있고 발길 닿는 곳에는 시체들이 흩어져 있는. 괴상망측하게 죽은 몸들에 저절로 인상이 찌푸려진다.

엘리베이터 말고 계단을 이용해서 숨죽여 올라갔다. 계단 위에 닫혀있는 하얀 철문이 있다. 뒤를 살피고 아무도 없음을 확인한 둘은 각자의 무기를 꾹 쥐었다. 그런데 그때 쿵,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쿵. 쿵쿵. 문 뒤에서 나는 소리였다. 둘의 표정이 비장해진다. 연구실 배치도를 보면 실험실이 이쪽이라 저 관문을 통과해야만 했고 되돌아갈 순 없었다. 앞서 있던 정한이 순영에게 문을 열겠다고 했으나 순영은 고개를 젓고 자신이 나선다고 했다. 

정한이 말릴 새도 없이 순영이 뛰어올라 문을 열었다.

순식간에 좀비들이 우르르 쏟아졌다. 순영은 차례대로 대략 나이프를 목에 쿡 찔러넣었다. 놀란 정한이 주춤거리다가 쇠파이프를 휘둘렀다. 각자의 방면에 두 세 마리의 좀비들을 대치한 채로 혈투를 벌인다. 좀비들은 차례대로 쓰러지고 문 안쪽에는 또 다른 통로가 보였다. 십분 여가 지나니 머리가 잘린 좀비들이 그득했고 둘은 통로로 뛰어들어갔다. 드디어 연구실이다. 통제되어 있던 공간은 휩쓸려져 엉망진창이다. 깨진 유리조각 파편과 기계들 안에 들어가 있는 시체가 보인다. 정말 시체일까? 그들의 몸 구석구석에 긴 호스가 연결되어 있고 옆에는 시험관이 늘어져 있었다. 순간 뭐라도 찾자는 생각이 머리를 스친다.

하지만 그때. 유리가 깨지고 순영의 얼굴에 피가 튀었다. 짐승의 포효를 들은 정한이 순영 쪽을 뒤돌아봤을 때, 이미 순영은 어디서 튀어나온 좀비에게 타격을 가하는 중이었다. 순영이 좀비 다리를 꺾고 목에 나이프를 꽂아 넣었다. 그러다 정한은 알게 되었다. 그것이, 어디에서 숨어 있던 게 아닌. 지금 막 이곳에서 만들어지고 뛰쳐나왔다는 것을. 형체가 서서히 쓰러진다. 순영이 손을 털고 주저앉았다. 정한은 무기를 꽉 쥐고 빠르게 걸어왔다. 그리고 쇠파이프를 그 짐승의 눈에 찔렀다.

둘은 순식간에 계단을 내려가 바깥으로 향한다. 헥, 헥헥. 땀이 차고 숨이 막혀왔다.

 

사람들이 다 죽었어 정한아. 

순영이 피가 묻은 채로 울먹인다.

너. 거짓말하지 마. 내가 살아있잖아.

근데 너도 죽으면 어떡해?

나 안죽어. 나는, 난……. 중얼거리던 정한이 입술을 한번 쓸고 순영에게 다가간다. 난 앞으로도 이렇게 살고 싶지 않아. 근데 이렇게 살아지니까 이렇게 살 수밖에 없는 걸 어떡하느냐고. 그래서 형이 나랑 같이 가기로 한 거잖아, 어디든 나랑! 죽어도 같이 죽고, 살아도…… 살아도 같이 살자고. 

정한이 순영을 잡아끌었다. 어떻게 다른 인생을 살던 우리가 만나서 함께 살게 된 건지. 없이 못 살게 된 건지. 자신을 쓰다듬는 손길에 순영은 조금 더 골골대다가 울먹임을 멈추고 정한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숨을 고른다. 그것이 차가운 건물 계단에서 유일하게 따듯한 곳이었다. 그렇게 진정될 때까지 가만히 있던 순영이 고개를 든다. 

 

키스해줘 정한아.

안돼.

으응… 해줘.

 

반짝거리는 눈에 가득 차오른 물이 그렁그렁했다.

 

제발.

 

정한아 제발.

 

너 없으면 내가 어떻게 살아.

 

하나 둘 셋. 컷마다 찍히는 순영의 얼굴이 젖어있다. 발개진 낯에 바깥의 빛과 그림자가 떠돌았다. 우리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요. 정한은 결국 순영을 품 안에 가두고 고개를 꺾었다. 차가운 입술에 따듯한 열기가 피어오른다. 형은 꼭 울려줬다가도 웃겨줘야 한다니까. 정한의 잇새로 웃음이 새어나왔다.

 

 

 

지워졌다. 수영장 락스 냄새가. 대신 약품 같은 딸기 맛 풍선껌 냄새가 코끝을 찌른다. 질척한 스트로베리 향. 그리고 윤정한 몸에서 나는 샤워 코롱 향. 어디서 누가 죽었는지 모를 시체 냄새도 사라졌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던 듯이. 뭐든 없는 것처럼. 좀비를 척살하고, 뒤져본 연구실에는 백신이 없었다. 아직 건물의 모든 장소를 찾아본 건 아니지만 새로운 좀비가 나타났다는 것은 빠르게 결말을 향해 내딛고 있다는 증거였다.

둘은 텅 빈 수영장 안에 누워있었다. 주변이 기이할 정도로 조용한…… 풍경이었다. 숨이 붙어 있는 건 둘 뿐인 듯 하다.

 

형. 나 비싸고 맛있는 게 먹고 싶어.

정한의 볼을 쓰다듬던 순영이 손을 멈춘다.

난 진짜 착하게 살았잖아. 공부도 잘하고…… 우승도 많이 했으니까.

누워있는 몸에 눈이 쌓여갔다. 차가운 게 기분이 좋아졌다. 순영은 정한의 말을 듣다 비밀스러운 얘기를 꺼낸다.

나 사실 저 호랑이한테 물려서 죽을까 생각하고 데려온 거거든. 돈이 많으니까 별걸 다 생각하지?

바람에 흩날리는 순영의 앞머리. 아주 천천히, 느리게 흘러가는 시간 속에 갇힌 것처럼. 싸늘한 바람이 둘의 사이를 비집고 들어와 속삭이는 탓에 뜨거운 이마의 열이 내려가는 기분이었다. 그 고즈넉한 프레임 속에서 정한이 말을 꺼냈다.

왜 나랑 다녀, 형.

내가 묻고 싶은 말이야.

내가 먼저 물었잖아.

 

난 좋아하는 게 너밖에 없어서.

 

어쩌다. 어쩌다 이렇게 된 거지. 죽은 몸들은 미쳐있고 생물들은 무력한 게 세상이 도태되어만 가는 게 다군요. 우리 꼭 죽겠군요. 내 몸은 더 살아서 뭐에 쓰이나요. 지구 쓰레기. 살아있던 폐품. 산산이 조각나 땅에 흩뿌려지는 근 이십 년짜리 피조물의 덧없이 꺾여나가는 사랑은 대체 어디에 쓰일 수 있나요. 애초에 종착지는 정해져 있어. 안간힘을 쓰고 싸우고 싸워서 답 없는 우주 먼지가 되어버리는 것. 성운이 되고 죽어 없어지고 가루가 되고. 유성이 되어 떨어질 것. 찬란하던 별이 죽어서 중력을 따라 춤추는 것처럼 우리도 우리의 무덤 위에서 춤을 추는 일. 계속 걸어야 나올지도 모르는 길을 걷는 일. 죽지 않으려 발버둥치다가도 죽고 싶어서 환장해보기. 그런 일들. 그게 다야. 간절하게 빛을 쫓는 대도, 너무 오래 걸어서 지구 한 바퀴를 다 돈대도 아마 그렇겠지. 바뀌는 건 없겠지. 다만 우리는 이대로 이렇게 살다가

 

살아도 산 것 같지 않은 채로 살다가

 

우리…… 서로…… 목 조를래?

정한에게서 나온 메마른 음성.

야, 난 너 못 죽여.

그렇구나. 나는 형 손에 죽고 싶었는데.

정한이 피식 웃는다.

근데 나도 그래. 나도 형 못 죽여.

선선한 바람이 불고 떨어지는 눈을 그대로 맞으며 두 눈을 감는다. 순영은 옆에 놔둔 나이프를 들었다. 피가 뚝뚝 떨어지는 나이프. 문득 그런 생각이 뇌에 내리꽂혔다. 지독하게 긴 날들이 여기서 끝나는 건 어떨까. 이게 우리의 종막이면 어떨까. 순영은 아주 자연스럽게 손목에 나이프를 가져다 댄다.

아니면 이것도 나쁘지 않아. 손목을 이렇게…

나이프로…….

 

사랑해.

 

 

순영의 머리가 핑핑 돈다.

 

 

형. 사랑해.

 

 

왜 이러지. 입안에 요상한 딸기 맛이 느껴져.

 

 

사랑한다고 권순영.

 

 

나 취했나?

 

 

야! 권순영!

 

 

챙그랑!

나이프를 손에서 놓친다. 순영이 황급히 정한을 본다. 하지 마. 순영의 손을 내친 정한이 시무룩해져 있다. 떨어진 나이프는 옆으로 굴러갔고 순간 이 수영장 가득 물이 차오르면 좋겠다는 생각이 꽂히자 순영은 머리가 테이프라도 된 줄 알았다. 펑펑 터지고 부품이 떨어져 나가는. 테잎이 풀려서 뇌 속을 장악한 느낌이었다. 왜 이러지. 감을 줄 알았는데 감겨버린 거 같아. 희망이 털끝 하나 없는 이 망한 도시에서. 순영이 정한의 얼굴을 쓰다듬는다.

 

어떡할래. 세상은 이미 뒤지고 말았는데 우리……, 정한아, 정한아. 나랑 함께…… 멸망할까? 그냥 그러고 말래? 우리는 우리로서 서로 의지만 하다가……

 

그게 원칙이고 순리인 것처럼.

 

그러나 정한은 단호했다.

싫어. 

정말?

나는 우리를 이 지구에다 박제하기 싫어.

정말루…… 싫어?

응 싫어.

그래. 그래그래, 그럼.

그러자 갑작스럽게 들어 올려진 손. 정한은 순영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가 눈이 커진다. 순영이 깍지를 끼고 만족해 웃는 것이다.

 

새로 태어나자. 할 수 있어? 단순해, 일차원적으로 그냥. 네 눈에 우주가 빠진 거지. 그리고 내가 다이빙한 거야. 핫초코에 마시멜로 담그듯이 퐁당. 그리될 수밖에 없는 일이었어. 네가 너무 좋으니까. 네가 너무 좋아서 나는 어디서 어떻게 힘을 빼야 하는지를 알게 되고 어디로 항해해야 하는지 알게 돼. 새로 태어나자. 느껴져? 우리에겐 우리밖에 없다는 게. 지구가 산산조각이 나고 우주로 떠밀려진대도 우리는 우리를 부둥켜안고 나사가 빠진 동물이 되어 행성이 되어 인공위성이 되어 영속된 시간 안에 서로를 개처럼 부르짖어…….

 

정한의 손길을 받으며. 순영은 정한의 얼굴을 감상하다 깨달았다. 그저 이렇게 정한을 바라만 보고 살고 싶다고. 그 생각을 읽은 건지 정한은 진지한 어투였다.

앞으로도 어디 가지마, 나랑 있어. 절대 나를 벗어나지 마.

해가 완전히 머리 위에 있다. 정한은 순영의 품속을 파고들었다. 실명될 것같이 눈부신 날이었다. 정한은 순영을 껴안고 오래도록 숨을 내쉬었다. 규칙적인 둘의 심장박동이 세상의 소음보다 크게 들리고. 색색거리던 정한이 입을 연다.

형. 그 부적 뭐였는지 알아? 중력을 거부하는 부적이래. 아 진짜? 응. 여사님 그날이 자기 마지막 한다구 마을에 남겠다 했어. 좀비 무리에 뛰어들 거라고. 그래서 우리한테 준거야, 그 부적을. 우리도 죽으라고. 우주로 간대. 그걸 갖고 있으면 우주로 날아간대. 가서 평화롭게 죽으라고 우리.

순영은 곰곰이 생각하다가 정한의 말을 다 듣고 살짝 웃었다.

 

하지만 안녕히 계세요. 저희는 싫어요. 가짜 구원에 목매달기가.

 

정한의 어깨 위로 두 팔을 감싼다. 입술을 핥고 살짝 깨물었다. 서로의 얼굴을 더듬으며 탐하다가 코를 맞댄 상태로 눈을 뜬다. 집에 가서 호랑이도 데리고 나오자. 정한의 눈동자에 순영이 감긴다. 재차 입술을 누르는 입술의 온도. 순영의 손을 맞잡는 정한. 둘은 깍지 낀 손을 보며 실실 웃음을 흘렸다. 수영장 안을 감도는 스트로베리향이 다가와 코끝을 맴돌다 사라지면 둘은 향기에 취해서 아무 말이나 뱉었다. 너와 나를 빈 수영장에 담갔다가 백 년 후에 깨어나자. 우린 서로의 중력이 필요하니까 우주까지 가지 말자.

 

그렇게 마침내 정한과 순영의 첫 번째 문장이 써졌다.

 

세상이 망해도, 그럼에도 너랑 난 사랑이 하고 싶잖아.

 

서막에는 남은 영장류 두 마리가 다리를 세워 몸을 일으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