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e what I have done
카테고리
작성일
2021. 1. 8. 17:28
작성자
hhh..

 

1998년. 정한이 형이 치앙마이에서 돌아오기 전까지 무슨 일이 있었나. 치앙마이라는 곳이 그때는 누구나 가는 흔한 여행지가 아니라서 나는 형이 오기 전날의 어슴푸레한 저녁부터 다음날 이슬이 풀잎에 맺히기까지 뜬눈으로 지새우며 형의 그림자가 나타나길 고대했다. 이번엔 형이 어떤 새로운 세상을 보여줄까, 하고. 마침내 정한이 형이 낡아 으스러질 법한 대문을 열고 내 이름을 불러올 때, 나는 먹일 기다린 아가새처럼 버선발로 현관에 나서서 환호했다. 내 부축을 받으며 돌계단을 걸어 올라 집 안으로 들어서는 형을, 나는 뛰어가 형보다 앞서 걸으며 작다란 날개를 푸드덕거렸다. 뒤를 돌아보고 연신 종알거리어도 일부러 나와 눈을 맞춰 싱긋 웃는 파안의 얼굴. 핑크빛 바람이 불어. 솜사탕 같아. 솜사탕같이 포근한……. 순영아, 앞을 봐. 조심해서 걸어야지. 살갑게 붙어오는 걱정이 시작될 봄의 온도보다 뜨거운 탓이라, 이마까지 후덥지근해져 두 볼에 다홍빛 열상을 뒤집어썼다. 솜사탕 같은 정한이 형의 회귀에 나보다 신난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부엌의 대나무 발을 열고 우리 부모님과 재회한 형의 뒤에서, 그리고 형이 가방에서 꺼내 내 품에 한 움큼 안겨주던 이국의 장신구들은 새로운 신비로움으로 기억된다.

 

이것은 조금 오래전의 이야기이다.

 

아버지는 생물을 가르치셨다. 교무실에서 교우회지를 읽으며 부채를 부치던 모습은 내가 자주 보던 형체였고, 장면이었다. 아버지는 내가 정한이 형과 함께 등교하기 전, 어둠 내몰기를 마친 등대가 잠이 들 때에 밖으로 나가셨다. 나는 잠이 덜 깬 눈으로 현관 앞에 앉아 구두를 신던 아버지 등을 보고 다시 새벽잠에 들곤 했다. 그래서 정한이 형이 날마다 나와 비슷하게 일어나 친형 역을 해주었던 것도 같다. 이불에 감겨있는 나를 일으켜 얼굴을 닦아주고, 교복 단추를 잠가주고, 양말을 신겨주고. 그러나 나의 그 버릇은 중학교에 들어갈 때쯤 격동의 사춘기를 겪으면서 자연스레 소멸하였고 나는 버릇 하나를 없애면서 형에게 하루하루를 툴툴대며 지냈다. 나보다 먼저 일찍 사춘기를 떼어내 훨씬 어른다워 보이는 형에 비해, 나는 형을 질투라도 하듯이 날마다 어리광. 그 증거로 시시때때로 형의 팔을 놓지 않고 있었다. 나의 유일한 자존심. 당시에는 몰랐는데 나는 나의 어른을 소유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지금에서야 회고하자면 그렇다. 형이 나에게만 특별히 다정했으니까. 사랑스럽게 대해줬으니까. 내가 형의 전부인 것처럼 나를 아끼고 소중히 여겨줬으니까. 형의 곰 인형보다.

 

낮이고 밤이고 꿈을 꿨다. 꼭 정한이 형과 같은 학교를 진학했으면 한다고. 나보다 매상 한 계단 먼저 올라가 있던 형을 열심히 따라갈 거라고. 가야만 한다고. 그래야 십 대 후반에 머무는 나이가 될 때에 내 사랑을 고백해야지, 하고 수십 번 다짐하는 꿈. 당시의 나는 몹시도 어렸다. 어린애가 하는 사랑 고백이 과연 하늘만큼 넓은 진실성이 있겠나. 그렇게 믿었다. 내게 어른은 천 마리의 종이학을 접어줘도 넘치는 재력, 혼자 눈을 맞고 있는 애인에게 우산을 씌우러 달려갈 수 있는 결단력, 내가 얼어 죽을 것만 같아도 장갑 두 짝을 다 줄 수 있을 정도의 사랑을 하는 사람이었으므로. 그런데 언제였던가. 아마 가을이었을 것이다. 저녁을 먹던 식탁에서 엄마는 청천벽력과도 같은 말씀을 전하셨다. 우리 순영이가 정한이를 너무 좋아해서 어떻게 해. 형 대학 가려면 서울 올라가야 할 텐데. 그럼 순영이는 혼자잖아. 하셨다. 나는 그때 처음으로 형의 팔을 놓았다. 하지만 형은 아무렇지 않게 희맑은 얼굴로, 순영이도 저랑 같이 가면 좋을 거예요. 웃었다. 아니야, 우리 애는 글러 먹었어. 아빠가 중얼거리셨고 나는 입을 삐죽 내밀었다. 형은 파랗게 웃으며 내 볼살을 꼬집었다. 공부만 좀 더 열심히 해보자, 순영아. 형이 꼬집은 자국은 차에 꽃잎을 띄우듯 퍼졌다. 불그스름하게. 그건 피부를 통해 전해지는 압각 때문이 아니란 것을 나는 알 수 있었다. 내가 형을 많이 좋아했기 때문에. 좋아하니 살갗이 붉어지는 것이다. 붉어지니 부끄러운 것이다. 그러니 나는 형 앞에서 자주 부끄러워했다. 당연히 그 저녁 자리도 내게는 부끄러웠지만, 엄마와 아빠와 정한이 형은 내 부끄러움이 보이지 않도록 화목했다. 그렇게 내 맘도 몰라주는 저녁 식사가 이어졌다. 창밖에 보슬비가 내리는 소리를 들어가며 수저로 밥그릇을 긁다가, 슬금슬금 봐본 눈치. 옆자리의 형은 국을 떠먹으며 조용조용했다. 문득 본 속눈썹이 길었다.

 

담쟁이덩굴이 잎에 떨어진 물방울을 담을 때 나는 다시 형의 팔에 붙지 않았고 자연히 내 사춘기는 마침표를 찍었다. 겨울 방학이 시작되던 겨울 끝물에서. 형의 바다마을 근처 고등학교로의 진학이 결정되던 소리 없던 밤. 피어난 겨울 덕에 봄이 지워지는 이치에 맞춰서 말이다.

 

내가 형과 하는 놀이 중 가장 좋아했던 건 곤충채집과 동물 관찰이었다. 어느 날의 나는 사슴벌레가 너무나 갖고 싶었다. 가장 친한 친구가 내 딱지를 다 따가서 그랬다. 걔의 딱지가 내 딱지를 먹고 스무 개가 넘어가자 질투가 난 나는 자랑하며 으스댈 수 있는 무언가가 필요했다. 그래서 형의 팔을 잡아끌며 사슴벌레, 사슴벌레 갖고 싶어, 하고 칭얼댔다. 사슴벌레 어디서 봤는데? 형은 동그란 안경을 벗어 영어 단어집 위에 올려놓고 내 손을 잡은 채 학교 앞으로 뚜벅뚜벅 걸어갔다. 오랜만에 잡은 형의 손은 포근했다. 그러나 고등학교 일학년인 형에게 중학교 삼학년짜리였던 나는 살짝 반투명이었는지, 나는 그날 구해온 사슴벌레를 담은 상자를 내밀어 친구에게 실컷 자랑을 늘어놓다가, 근데 얘네는 정확히 뭐 먹는데? 하는 물음에서 멈추었다. 그러게. 사슴벌레 얘네가 뭘 먹지……. 형이라면 다 알려줄 텐데. 나는 바보같이 형을 떠올렸다. 보통의 형이라면 사슴벌레가 뭘 먹는지, 어떤 온도에서 살아야 하는지. 이미 옆에서 하나씩 가르쳐줬을 것이다. 나는 번뜩 사슴벌레에게 미안해졌다. 그래서 부러워하는 얼굴로 있던, 내 사슴벌레를 이리저리 만지던 친구의 품에 상자를 건네주고 돌아갔다. 너 진짜 안 키워? 우려하면서도 기뻐하는 목소리가 일갈했으나 나는 들은 척하지 않고 집에 왔다. 그 이후로는 통 마주치는 일이 적었다. 정한이 형 없이, 학교도 나 혼자 갔다. 내가 중학교를 무사히 마치고 형과 같은 고등학교에 입학한 뒤로부터 더욱 그랬다. 형은 나와 하는 이야기 횟수보다 또래 친구들과 수학 공식을 나누는 횟수가 늘어났다. 쉬는 시간, 이학년 반으로 올라가면 형은 자주 자리에 없거나, 도서관에서 공부를 하거나, 그저 자리에서 잠을 잤다. 순영이 왔니. 정한인 피곤한가 봐. 오늘도 자네……. 하릴없이 나는 선배에게 꾸벅, 인사를 하고 반으로 내려왔다. 형의 혈색이 안 좋아 보이긴 했지만, 걱정은 단숨에 마음에서 사라져버린다. 그깟 학교가 뭐라고. 대학교가 뭐라고 나보다 더 소중해? 

 

옆방에서 형의 사각거리는 연필 소리와 책상 위로 지우갤 벅벅 긁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그 소릴 귀에 담으며 눈을 감으려 애썼다. 그러나 그 밤은 하필이면 잠이 안 왔고, 억지로 자기엔 내 정신이 말짱히 버티고 있었다. 그랬기에, 나는 노트를 펼쳐 형의 이름을 한 자씩 썼다. 그 사이사이는 내 이름으로 메꿨다. 획을 그으며 수를 셌다. 수가 나오면 나올수록 더하고. 더하고, 더하고, 더해……, 다 더했더니 51이 나왔다. 그대로 신경질이나 홧김에 노트를 덮었다. 오십 일이 뭐야. 혹시나 하는 마음에 다음 장에는 친구 이름으로 했다. 88이 나왔다. 그지 같아! 나는 아예 그 장을 찢어버렸다. 이건 서로의 궁합과는 전혀, 전혀 신빙성이 없다. 나는 울 듯한 기분으로 단호한 결실을 맺는다.

 

다음 날. 수학 수업에는 어제 풀었던 수식에 대해 정답을 맞혀보는 시간을 가졌다. 총 열 문제였는데 빗금을 긋다 보니 최종적으로 나는 그중 다섯 개나 틀렸다. 옆에서 짝꿍이 허릴 접어가며 비웃었다. 하지만 나는 오히려 그 비웃음에 어젯밤이 생각나 안도감이 들었다. 혹시 숫자를 잘못 더했을까. 그랬을 수도 있다. 이렇게 틀린 걸 보면 내가 연산에는 젬병임이 확실하니까. 그래서 가방에서 노트를 꺼내 펼쳤더니 옆자리 짝꿍이 몸을 기울여 내 노트를 훔쳐봤다. 너 이름 점 믿냐? 나는 화들짝 놀라 노트를 책상 서랍에 넣었다. 아니야, 아니거든! 노트 위에 손을 올렸다. 몸을 더 붙여오는 짝꿍에게 혹시라도 뺏겨버릴까 봐 전전긍긍하며 침을 꼴깍 삼켰더니, 짝꿍은 눈을 감으며 읊조렸다. 나도 한때는 점을 쳤었지. 내가 짝사랑하던 그녀의 이름으로……. 한풀이가 시작되길래, 나는 무시하며 반쯤 연 노트에 또 형의 이름을 적었다. 그런데도 숫자는 아무리 해도 오십 일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그래서 이번엔 연필을 내팽개쳤다.

 

비가 머리 위로 하나 둘 내려오기 시작하더니 곧이어 폭포처럼 떨어졌다. 우산이 없어 나가지도 못하는데 때마침 정한이 형이 계단을 내려오고 있었다. 형! 하고, 불렀다. 내 목소리는 공기보다 높이 떠올라 수면 위에 펼쳐졌다. 형이 응했다. 순영이 우산 없어? 형이랑 같이 쓰고 가자. 나는 한걸음에 달려가 형의 팔에 내 팔을 꼈다. 형은 작은 검은 우산을 펼쳐 팔짱을 풀고는 내 머리 위로 올렸다. 풀어진 사이가 원망스럽기도 잠시, 빼낸 팔로 형이 내 어깨를 잡아 왔다. 내 심장 소리가 그렇게 커진 건 처음이었다. 외에 아무 소리도 들리지가 않았다. 집에 가는 길 내내 형은 내게 무어라 말을 했으나, 나는 오랜만에 들어 기뻐야 하는 형의 이야기에 전혀 집중할 수 없었다. 두근거림이 멈추지 않아서 차라리 비가 와 다행이었다. 형에게도 들릴까. 나는 심장이 있을 거라 생각한 부분을 꾹꾹 누르며 노심초사하는 마음으로 형과 바닷길을 걸었다. 편서풍 바람은 짭짤했다. 살짝 젖은 춘추복을 벗고 와이셔츠를 마당에 꽉 짜내면 물기가 뚝뚝 떨어졌다. 그리고 저 멀리에서 형이 나를 불렀다. 순영아, 이것 봐. 짠! 형은 화분 하나를 들고 있었다. 꽃 칸나였다. 형은 나를 잡아끌어 내 방으로 들어왔다. 우리는 동시에 앉았고 나는 손끝으로 꽃잎을 살짝 건드려보았다. 형이 싱긋 웃는다. 순영이가 좋아하는 이름으로 지어줘. 내 눈을 맞춰오는 형의 다정함에 반한 나는 입꼬리가 올라갔다. 음… 순정이 할래. 순정이? 귀엽네. 순영이 동생 할 거야? 응. 내 동생 순정이. 난 동생 없으니까……. 했으나 사실 내가 생각하고 있던 것은 형과 나의 이름이었다. 결과가 오십 일이면 어때. 내가 백으로 바꾸고 말 거야. 순영이 옆에는 항상 정한이 형이 있게끔. 귀 끝이 발갛게 물듦과 동시에 칸나꽃에는 순정의 이름표가 달렸다.

 

4월에 접어들면서 우리에게는 특별한 일이 하나 생겼다. 정한이 형이 학교 관악부에 들어갔다는 것이다. 말해준 사람은 우리 아빠. 나는 형이 아니라 아빠에게 앞서 듣게 된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고 또 형에게 섭섭했다. 왜 나한텐 말해주지 않았지? 물론 형이 내게 하나하나, 모든 결정을 통보해 줄 의무는 없었다. 그렇지만 나라면, 나는 내 하루를 형에게 설명해주는 게 당연했고, 그것이 삶의 의미라서 알려줬을 텐데. 집에 올 때 지쳐 보이던 얼굴이 유독 선명히 떠올랐다. 그런데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형이 관악부에 들어갔다는 소식과 함께 다음으로 펼쳐질 이야기가 새로이 방향을 틀었다. 사건이 있었던 그 날의 아침은 유난히도 푸르렀다.

야, 이, 이학년 선배 중에……, 우리 선배 중에, 사람 피 먹는 선배 있어!

가장 시끄러움을 맡고 있던 놈이 계단을 헐레벌떡 뛰어 내려오면서 소리쳤다. 피? 한 명씩 고갤 돌렸다. 걔는 숨을 몰아쉬면서, 대박이야. 사물함에 피를 담은 팩이, 팩이 있었다니까? 자신이 본 건지 모를 얘기를 죽 늘어놓았다. 교실 안은 금방 술렁인다. 무슨 피, 누구의 피. 네가 봤어? 나는 한숨을 쉬고 싶었지만 내쉬지 못하고 굳어버렸다. 피 얘기가 나오면 나는 섬찟하게 굳는다. 설마설마하는 마음이었다. 심장이 쿵쾅대는 것이 귓가를 막 때려, 귀를 막으려 팔을 뻗었으나 근처에도 가지 못하고 떨어진다. 그 아이는 한 명 한 명과 눈을 맞춰가며 대답했다. 본건 아니구… 그, 내가 관악부인 거 다들 알지. 그러자 다급해 보이는 한 아이가 걔의 말을 막아 세웠다. 아니, 그래서 이 학년 선배 누구.

들어봐. 이번에 들어온 선배 한 분 계시는데, 그게 누구냐면…….

난 참지 못하고 일어섰다.

윤정한 선배.

교단 앞에 앉은 아빠에게로 카메라가 슛. 내 머리 위로 핀 조명이 딱, 하고 켜진다. 반 아이들의 시선이 무대 위 주인공인 나를 향해 다가온다. 게네들은 바코드를 인식하듯 위아래로 나를 훑었다. 형의 이름 옆에 붙어오는 내 이름. 이 구조를 잘 아는 아이들은 나를 본다. 그제야 조용해졌다. 역으로 조용해져서 더 잘 들리는 소리만이 남았다. 힘있게 뛰는 내 심장 소리와 합, 하고 숨을 죽이는 소리, 풀벌레 우는소리까지가 다 들렸다. 권순영…….

애들은 내 이름을 불렀다. 알고 있었냐? 너랑 같이 사는 형 아니야? 윤정한, 윤정한, 권순영. 수면 위로 떠오르는 이름들. 나는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최대한 눈을 맞추지 않으려 애를 썼는데, 써봤자 곳곳이 사람 눈이었고. 으레 참다가 간신히 입을 열었다. 정한이 형, 사람 피 먹는 거 아니야. 그러나 내 말에 다시 수군거리는 교실. 사람 피 안 먹어. 그럼 뭔데? 다그쳤다.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거, 그거….

사슴 피야.

동시에 종례를 알리는 종이 울린다.

 

사람이 사슴 피를 왜 먹는가? 아이들은 이상한 눈으로 나를 한 번씩 흘겨봤고 하나둘, 사라졌다. 나는 죄를 짓지도 않았는데 그 일로 인해 죄를 지은 사람이 되었다. 아버지와 단둘이 남은 교실은 볼품이 없고 초라했다. 아버지는 이 상황을 보고 듣지도 못한 척하고 있다가 마침내 돋보기를 벗으시더니 책을 챙겨 일어섰다. 순영아. 그리고 불렀다. 나는 가방 지퍼를 닫다가 아버지를 봤다. 아버지는 한숨을 쉬더니 말문을 연다. 요 앞 골목에 까페 알지. 응. 거기 골목에서 사람들 운동하던데. 무슨 운동? 사슴 보호 운동. 아빠는 장난스러운 말투로 으하하, 웃으며 교실을 나섰다. 나는 울 것만 같았다.

 

순영아.

응.

형한테 뭐 할 말 없어?

여느 때와 다를 일 없이 함께 집에 돌아가는 길에 나는 사고가 정지된 사람처럼 형의 얼굴을 빤히 보다가 형이 물어오는 말에 환상에서 깨어난 사람으로 변해 발을 멈추었다.

우리 반 애가 봤대.

형이 뒤를 돌아봤다.

뭐를.

형 피 먹는 거.

그러나 형은 일말의 요동도 없이 잠시 두 눈을 깜빡거리곤 피식 웃었다.

진짜? 진짜 봤대, 나 피 먹는 거?

형, 장난치지 말고……. 나 엄청 진지해. 진짜로 봤는지 안 봤는지가 지금 중요해?

나는 칭얼거렸고 형의 실실 웃는 웃음소리는 밤하늘을 찌를 듯이 커지더니 형은 결국 길거리에서 푸하하, 웃음을 터트렸다.

나 내일 어떡해.

어떡하냐고? 사슴 피 먹는 게 뭐. 건강 보강하려고 먹는다 해. 

형은 아무 일도 없었던 사람처럼 가방끈을 쥐여잡고 다시 걸었다. 나는 멀어져 가는 형을 멍하니 보다가, 형의 속도에 따라 발걸음을 맞추기 위해 뛰었다.

건강 보강은 무슨…. 형 사람인척하지 마! 

 

사실 이 이야기를 하려면 정한이 형이 치앙마이로 떠나기보다 훨씬 이전으로 돌아가야 한다. 오래전 겨울, 눈 대신 노을이 내리던 오후, 우리 할머니는 물질을 마치고 돌아오고 있었는데, 해면을 둥둥 떠다니는 웬 사람처럼 보이는 형체를 발견했다고한다. 할머니는 깜짝 놀라 다시 잠수하여 단발의 그 아이를 업어 들고 마을로 돌아왔고 서귀포시 작은 마을은 냉큼 할머니를 영웅처럼 모셨다. 내 방에 기절한 그 아이를 눕히고 다섯 시간여가 흘렀을까. 곧 눈을 비비며 거실로 그가 나왔다. 나는 그때 재방송하는 만화 프로그램에 여념이 없었는데 엄마가 옆구리를 찔러서 뒤를 돌아봤다. 놀랐다. 생각보다 멀쩡한 사람이 서 있어서. 멍하니 반반한 얼굴을 빤히 보다가 숨죽이던 그가 먼저 고갤 숙여 인사를 했다. 또래보다 커 보이는 키에, 새초롬한 눈으로. 그리고는 한쪽 손으로 반대쪽 팔을 쓸면서 말했다. 저, 이름… 윤정한인데…. 이것이 우리의 첫 만남이었다. 흔들리던 제주 바다에서 발견된 중학생 나이의 형이 우리 집으로 들어오게 된, 어느 전설보다 몹시 신비로운 이야기.

 

정한이 형은 한 달 전쯤 사고로 부모님을 잃었다고 했다. 친척들하고는 왕래도 없으며 부모님과 제주로 이사 온 것도 최근. 그리고 예전에 살던 곳은 치앙마이. 특이했다. 나는 특이한 형의 이야기에 흥미가 돋았다. 형은 그런 나의 마음을 알아주어, 부모님과 살았던 집에 나를 데려가 주었는데, 처음엔 동경이었고 관심이었다. 그 당시 같은 동네의 또래는 처음이라 급격히 친해지려던 것도 맞다. 그런데 조심스럽게 들어온 형의 집 뒤 베란다에서 어처구니없게도 빨간 피를 마시고 있는 형을 훔쳐보게 될 줄이야.

뭐…, 뭐 먹는 거야? 베란다로 나오지 말고 있으라던 당부를 호기심 때문에 못 참고 어겼다. 바람이 부는 쪽으로 이끌러 가 본 것은, 형이 장독 안에서 사기그릇을 꺼내는 모습. 그리고 거기에 담긴 건 분명 피였다. 나는 순간 잘못 본 거겠지, 했으나 그건 누가 봐도 피였다. 하지만 예외일 수도 있기에 물었다. 대접에 가득 담긴 빨간 액체는 아무리 봐도 식음용은 아니었고 그렇다고 판매용은 더더욱 아닌 듯이 물감을 풀은 것처럼 새빨간 물이었는데, 생물교사를 아버지로 둔 나에게는 확연히 피로 보일 수밖에. 내가 온 것을 보고 형은 금세 처연한 표정으로 빨강이 묻은 입술을 소매로 닦아냈다. 나는 피를 먹고살아. 말하며 형은 아무렇지 않게 사발을 쭉 들이켜더니 단숨에 해치웠다. 그릇을 내려놓은 형의 눈이 잠깐 붉게 변했다가 돌아왔다. 나는 그걸 분명히 봤다.

왜… 피를 먹고살아?

순영이 보는 만화에도 나오지? 큐라라고. 두치랑 같이 나오는 큐라.

…걔가 왜?

형이 큐라야.

형도 그럼 호리병에서 빠져나왔어?

뭐? 누가 그렇게 촌스럽게 살아.

나는 그때 정한이 형이 사람의 외관이었지만 어쨌든 사람이 아니었다는 것을 마음속의 비밀로써 품었다. 심장박동이 거세게 뛰었다. 나는 형이 큐라의 후손. 아니 어쩌면 실제로 존재하는 큐라라는 사실이 내가 떠안게 된 가장 중대한 사실로 치환됐다. 그래서 불안했다. 혹시라도 만약 이런 일로 형한테 누가 뭐라고 하면……. 비밀을 아는 자인 내가 지켜줄 거라고. 그렇게 마음을 먹고 고개를 치켜들었더니 어느샌가 다가온 형은 내게 얼굴을 바짝 붙여, 순영이도오, 피 마셔볼래애? 멜로디를 부르며 흥겨워했다. 나는 무심코 뒷걸음질을 치다가 형에게 볼을 붙잡혔다. 쪽, 하고 떨어지는 입술.

큐라가… 뽀뽀해줬어……!

그때부터였다. 정한이 형 앞에선 부끄러워지는 약이라도 먹은 아이처럼 구는 게. 나는 얼마 후의 자습 시간에 친구들에게 물었다. 야. 큐라가 무슨 괴물이냐. 내 도시락의 쌀밥을 뺏어 먹던 애는 곰곰이 생각지도 않고, 큐라? 걔 드라큘라잖아. 확답을 내놓았다. 드라큐라가 뭔데. 드라큐라 말고 드라-큘라. 드라큘라 몰라? 다른 말로 흡혈귀, 외국식 말로는 뱀파이어. 너 그 만화 맨날 보더니 이제야 거기 관심이 생겼냐. 우리 한때 얘기 엄청 했는데 드라큘라.

친구의 말을 듣고 보니 나만 시대에 뒤떨어지는 것 같았다.

어? 어. 이제 생겼어. 관심…….

나는 형을 떠올리며 얼버무렸고 친구들은 무신경한 표정으로 내 김 반찬을 하나씩 더 가져갔다. 그 이후로부터는 상상에 맡겨도 된다. 형은 세상에 이런 흡혈귀 또 없을 정도로 자유로움을 타고났다. 덕분에 나는 형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며 소리쳐야 했고.

형! 거실에 핏방울 좀 떨어트리지 마!

아, 미안 미안. 이따 치울게.

대화는 반복적이었다.

 

까페 이름은 르네쌍스. 사슴은 순록. 순록은 사슴. 녹용에서 떨어지는 피. 나는 손가락으로 체크무늬 보가 깔린 유리 테이블을 엎드린 채 툭툭, 하고 치다가 하얀 손으로 소설집을 넘겨가며 읽는 형을 쳐다봤다. 눈발이 날리는 밖에는 동물 보호 협회에서 나왔는지 사람들이 마스크를 하나씩 끼고 소리소리 지르는데. 우리는 창문 너머 그 광경에 아무런 타격도 없이 고요했다. 형은 백리향 차를 마시며 책에 집중했다. 내가 느끼는 건 경외심, 모멸감. 저 입으로 차와 피를 마신다, 라……. 무슨 기분일까. 형이 클라리넷을 들고 관악부에 들어간 뒤로 안 맞춰지는 이미지가 형의 위로 겹겹이 쌓였다. 형은 변질된 가곡의 크레센도다. 웅장한 북이 울려 악장의 첫머리가 시작될 때, 클라리넷 하나가 음을 따르고 있어 보이나 사실은 변음을 연주하고 있는 것. 그런데도 아무도 모르는 것. 그러다 형의 속도는 점점 빨라지고 마침내 음악의 종점에 치달으면 결과가 엉망진창. 하지만 사람들은 누가 잘못하고 있는지 밝혀내지 못하겠지. 나는 다 식은 율무차를 마시려다 책으로 시선을 꽂은 형에게 물었다.

형 솔직히 말해. 몇 살이야?

나이는 육백 살까지 세다가 이젠 지쳐서 더 안 세.

밖은 소란스럽게 윙윙댔다. 나는 어떤 안달을 느꼈는지 형에게 화를 냈다.

형! 흡혈귀면 사람 피를 뽑아먹어야지, 왜 사슴 피를 먹어. 지금 저 밖에 안 보여?

사슴 보호에 앞장섭시다! 사슴 보호에 앞장섭시다! 녹용 섭취를 삼가자! 

도대체 왜 여기서 사슴 보호 운동을 하는 거야! 나는 괜스레 얼굴이 발개져 죄책감이 가득 쌓인 어깨를 잔뜩 움츠렸다. 심지어 어떤 남자는 우리를 보고 고함을 치는 듯했다. 그러나 형은 파동 한번 없이 고고히 찻잔을 들어 차분히 들이키며 입을 열었다.

사람은…….

약하잖아. 우리 깽깽이 왜, 나가고 싶어? 형은 기괴한 답변 후 이를 드러내며 웃었고 나는 앞으로 몸을 기울였다. 내가 왜 깽깽이야? 맨날 이렇게 깽깽대니까 깽깽이지. 깽깽거리는 게 뭔데? 깽깽거리는 거? 음…. 나는 형이 할 다음 대사가 궁금해 숨을 죽였는데 형은 배시시 웃으며 말린 꽃을 책에 끼워 넣은 후 덮었다. 어머니가 찾으시겠다. 집에 가자. 형이 내게 손을 내밀었다.

 

그러던 일주일 후였나. 광장의 전나무는 꼬마전구와 눈을 머금었으나 교실 안의 풍경은 아침부터 이상스러웠다. 내가 들어서자마자 반 아이들은 빠르게 가라앉았다. 다들 내 눈치를 보는 게 틀림없었다. 낌새는 느껴졌어도 잠자코 있기로 하고 나는 가방걸이에 가방을 걸고 자리에 앉았다. 그러자 짝꿍이 말을 붙여왔다. 물론 몸도 같이.

그 너랑 같이 산다는 정한이 형 있잖아.

어.

아침부터 교무실로 불러갔다.

어, 뭐? 왜?

매우 놀라 목소리도 크게 나온 게 문제였는지 뒤에서 듣고 있던 웬 놈 하나가 복식 웃음으로 웃더니 내 쪽으로 다가와, 빈정거리는 어투를 쏟아냈다. 저번의 그 가장 시끄러운 애였다.

일 터질 줄 알았어. 야, 너희 집에 빌붙어 사는 그 형 고아라며.

온몸이 굳는다. 게다가 뭐, 사슴 피? 웃기고 있네. 사슴 피가 아니라 사람 피 아니고? 그 형 고아 된 거 아버지가 살인마여서 쫓겨나온 거잖아. 그 말이 터져 나오자 체에 걸러지지도 않은 뒤이은 말들이 쉼 없이 쏟아져 나왔다. 아이들의 눈이 한순간에 돌변했다. 징그러워. 사슴 피에 대해 환상이 있었나? 근데 진짜 형 아니었어? 당연히 친형 아니지. 성이 다르잖아. 아, 그러네. 친형도 아닌데 여태 같이 산 거래? 가벼운 입들이 쉽게 벌어진다. 아, 난 또 배다른 자식인 줄 알았는데. 맞다니까…… 살인마 자식. 피 먹는 거 보니까 딱 알겠던데. 야, 그래도 넌 무슨 말을 그렇게 해, 하하하.

가벼운 입들은 쉴 새 없이.

으… 소름 끼친다.

야.

큰 손이 내 어깨 위로 내려앉았다. 신경이 전부 휘감기는 꼬락서니. 불개미가 혈관을 타고 올라온다. 나는 검지와 엄지로 혈관 속의 불개미를 짓눌러 죽였다.

피 먹는 흡혈귀신이랑 어떻게 같이 사냐. 더럽게. 

지난여름 때 아빠는 사이다에 백년초를 넣었었다. 잘 익은 백년초가 탄산과 합쳐져 녹아들면 빠알간 물이 든다. 형 이건 어때? 나는 물었다. 백년초잖아. 응. 이거 피랑 비슷하지? 빨갛고. 나는 형에게 매달렸다. 비슷한 거는 어때 형? 형, 피… 안 먹으면 안 돼? 그건 내가 처음으로 형에게 한 부탁이었다. 생각해보니 형은 내가 부탁하지 않아도 언제나 내 마음을 알아주곤 했다. 모르는 게 있으면 뭐든 알려주고 뭐든 해줬다. 나는 처음으로 형이 해주지 못할 것을 부탁했다. 안 해줄 거라는 걸 알았는데. 알았는데도 나는.

내가 틀린 문제를 형이 알려주면 나는 꼭 다음엔 백 점을 맞고 왔다. 그럴 때마다 엄마는, 아이고 우리 순영이. 정한이 손때 묻어가지고 이만큼 컸네, 하며 너털웃음을 선보였다. 정한이 형 손때묻은 순영이라니 그거 말이 조금 심한 거 아니냐고. 나는 엄마와 포옹을 하며 뒤에서 문제집을 풀던 형을 향해 입술을 쭉 내밀었다. 형은 필기하던 손을 멈추고 내게 손을 흔들어 보였다. 그 평온한 여름밤은 환상적인 낭만. 나는 낭만 안에서 형과 보금자리를 만들고 싶었다. 싶어서…….

세상에는 환상적인 일들이 얼마나 있을까.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벌써 의자를 걷어찬 뒤였다. 걔를 밀친 후였다. 장면은 슬로모션으로 흐려지면서 배경 따윈 보이지 않았다. 내 앞의 놈. 놈과 나. 단둘뿐이었다. 주먹을 내리꽂으니 놈의 턱이 나가떨어진다. 나는 재빨리 걔 위로 올라타 연신 주먹질을 해댔다. 놈이 힘겹게 입을 벌렸다.

야! 누가 좀…, 야, 권순영 좀 말려! 아, 얘 좀 말리라고!

그리고 정한이 형이 교무실로 불러 간 건, 관악부 부장으로 임명장을 받기 위해서였음을. 내가 그걸 안건 이미 학교가 파하고 한참 늦은 시간이었다. 

 

선택권이 없던 일학년 생활이 저물고 나서야 동아리 입부가 가능했다. 마침 내가 때렸던 걔는 관악부에서 탈퇴하고 나는 어쩌면 정해진 내 대본처럼 관악부에 너무나 들어가고 싶어서 음악실 문을 두드렸다. 하지만 며칠째 선생님은 강건하셨다. 통 나를 봐주지 않으셨다. 나는 날 안 봐주면 문을 부술 기세로 일정하게 노크를 똑똑똑똑똑 다섯 번을 했고 한참만에 안쪽에 계시던 선생님은 치시던 피아노를 멈추곤 교실 문을 열었다.

저, 관악부에…….

안된다.

말을 다 하기도 전에 선생님은 문을 닫았다. 말했지, 정학 기록 있는 학생은 안돼. 뒷말을 덧붙이면서. 그래서 나는 발걸음을 돌렸다. 겨울에 있었던 싸움 때문이다. 그 일 이후로 나는 일주일의 정학과 일주일의 교무실 청소를 벌로 받았다. 내 인생 가장 큰 오점이었다. 나는 야자를 마칠 때까지 기다렸다가 형이 나오는 시간에 맞춰 골목으로 나갔다. 코트 주머니에 넣었던 손을 빼 비비면서 다가오는 형을 발견한 나는 형에게 푹 달려와 안겼다. 중얼중얼. 내내 짊어지고 있던 서러움을 토해내자 형은 내 뒷머리를 쓰다듬고는 나를 떼어내 눈을 맞췄다.

안 되겠다. 순영아.

어?

복수하자.

형이 말하는 복수는 간단했다. 우리는 음악 선생님을 칵테일이라고 부르기로 했다. 음악 선생님이 칵테일을 즐겨 마신다는 평소 발언에서 따온 그건 우리만의 암호이자 신호가 되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우리의 복수는 쉬웠다. 내가 쓴 입부서를 몰래 선생님이 모아놓은 입부서 서류 더미 안에 넣는 것. 이게 우리가 생각한 간단하고도 확실한 복수였다. 이러면 다른 동아리와 섞이면서 자연스럽게 나는 관악부에 입부하게 될 테니.

 

1004. 삐삐에 번호가 찍혔다. 체육 시간이었고 운동장에 있던 나는 잠깐 밖으로 나갈 수 있었다. 재빨리 가까운 공중전화로 달려가 수화기를 들었다. 오후 2시. 칵테일은 문제없음. 점심에 병원 간다는 얘기를 보건 선생님께 전해 들음. 이상. 나는 형의 음성을 듣고 체육 선생님의 눈을 피해 살금살금 교무실로 올라갔다. 주머니에 있던 입부서를 책상 위에 있던 다른 입부서의 뒷장에 넣어놓고 유유히 자리를 빠져나왔다. 남은 일은 더 쉬웠다. 삐삐로 승전보를 고했다.

아이, 볼수록 햄스터랑 똑 닮았다 너!

콜라만 마셨는데 형 취했어?

우리는 성공에 달콤해져서 집에서 간단한 파티를 열었다. 형은 자꾸 자기가 치앙마이에서 본 햄스터랑 내가 똑같이 생겼다며 양손에 내 볼살을 가득 담고는 실실 웃었다. 뭐 하는 건데. 우리 깽깽이 귀여워서 그러지. 형은 치킨 다리를 뜯은 기름 묻은 손으로 나를 자꾸 건드렸고 나는 말리는 척 넘어갈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형에게 귀여움받는 일은 꽤 기분이 좋았으니까. 그날 밤에 우리는 성공을 축하하며 기분 좋게 잠들었다.

그러나 몰래 입부서를 냈던 게 결국 걸렸다. 형이 입부서를 정리하다가 내 것이 없어서 음악 선생님 쓰레기통을 뒤졌는데, 내 입부서가 갈기갈기 찢긴 채 있었다는 것이다. 할 수 없이 우리는 다른 방법을 택해야 했다. 정한이 형은 자기가 부장이라는 것이 확고한 메리트가 있다며 내게 이거면 아주 백 퍼센트 성공할 좋은 방법을 귀띔해줬는데.

'산의고 관악부에서 인원 모집합니다'

그것은 공식 공고를 내거는 것. 그리고,

'단, 아래 동물을 닮은 사람만 입부 희망 가능'

아예 못을 박아 버리는 것이었다.

아래 동물 사진은 햄스터 사진이었다. 형이 고르고 골라 나랑 똑 닮았다며 이거는 빼지도 더하지도 못하니 나밖에 없다고 주장하는 탓에 무심결로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이게 될까? 고갤 내저었다. 그러나 형의 목표대로 햄스터를 처음 보는 아이들은 갸우뚱하며 벽보를 지나쳤고, 당장의 인원이 필요했던 관악부는 끝내 최악의 최악이었던 유일한 공식 지원자인 나를 들이고야 만다. 아침, 나는 학교를 날아갈 듯이 종종걸음으로 뛰어갔다. 손에는 하모니카를 꼭 쥐고. 

 

치앙마이에 햄스터 무지 많아. 거짓말하지 마. 진짜야, 봐봐. 내가 데려가 줄게. 카세트 플레이어를 틀어놓고 이부자리에 핀 다음에 형이랑 나란히 누웠다. 아무것도 안 보이는 천장이 눈앞에 있었는데도 주변은 꼭 별이 비치고 있는 듯이 환했다. 형은 몸을 돌려 나를 봤다.

순영이는 하모니카가 왜 좋은 거야?

좋아서 하는 줄 알아?

좋아하는 거 아니었어?

형도 피 안 좋아하면서 피 먹어야 사는 거처럼 나도 하기 싫은데 하는 거야. 형 때문에 관악부…….

하는 거라고. 나는 그렇게 말하며 이불을 뒤집어썼다. 부끄러움의 미학. 적어도 나에게만큼은 그랬다. 그런데 정한이 형은 내 이불을 들어 얼굴을 집어넣었다. 간지러워, 하지 마. 내가 몸부림쳐도 형은 내 배에 팔을 올리곤 어깨에는 코를 박았다. 그럼 나도 순영이 때문에 해야지. 바보 같은 정한이 형. 바보 정한이 형에게는 섬유 유연제 향이 났다. 나는 눈을 감고 싶었는데 눈을 감으면 형이 사라질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럴 일 없는데도…. 바보 같은 형. 내가 나이 들어 모습이 변해도 형은 그대로일 텐데.

 

해녀들의 숨비소리. 바람이 해수면에 부딪히는 소리. 파도가 돌을 감싸 씻어 내리는 소리. 정한이 형의 꿈은 꿈에도 바다를 보는 거였다. 예전에 바다를 걸으면서 형이 전해준 말이었다. 살아도 여기 나보다 더 오래 살았을 텐데. 살면서 바다가 지겹지도 않은가. 그렇게 속으로 생각했는데 형은 내 생각을 읽었는지 생각에 답을 해주었다. 오래 살면서 바다를 쭉 봤는데, 다른 거 다 변해도 바다는 변하지 않더라. 마치 나처럼……. 바람이 휘날리면서 형의 머리는 자꾸 뒤로 넘어갔다. 어느덧 형의 머리는 단발에서 어깨를 넘을 만큼 길었고 나는 손가락 사이로 그 머리칼을 만져보고 싶었다.

앞서 걷던 형이 뒤를 돌아보며 웃었다.

나를 닮았어. 바다가.

그래서 형에게는 바다가 필수 불가결한 신념과도 같다고. 꼭 지켜야 하는 것. 형이 두 팔을 벌린 채 다가와 내 귀에 뭐라 속삭이는데, 그때 머리 위를 낮게 날아온 갈매기 한 마리가 그 말을 훔쳐 달아났다. 갈매기 떼가 무섭다고 형은 내 뒤로 숨었고 나는 더 무서워서 형의 뒤를 쫓았다. 바다보다 파란 웃음을 짓는 형. 그 웃음은 감기지 않을 수 없을 만큼 예뻐서 나는 속으로 일기를 썼다. 형이 지켜야 하는 것은 나도 반드시 지킬 것이라고. 

 

빙떡을 하나 입에 물고 야자수 나무 아래에서 형을 기다리는데 햇빛에 녹아 흐물거려질듯 싶었다. 관악부 입부에 성공하고 정상적으로 동아리 활동에 출석하면서 음악 선생님은 내가 왜 여기 있는지 이해가 안 되는 눈빛을 보내왔지만 얼마 못 가 관두셨고 오히려 시간이 지날수록 나의 말 안 듣는 하모니카 연주에 힘을 보태주셨다. 그게 쌓이고 쌓여 선생님의 가르침이 득이 되어 그해 연말, 마침내 우리 관악부는 전국 대회에 나가게 되었다.

그리고 벌써 세 번째다.

형. 학교는 왜 안 나오는데. 안 나올 사람은 나거든? 나 연습 밀려있어서.

어디야. 지금 내가 가? 어?

아, 형…. 나, 형이랑 같이 가려고 맨날 기다리잖아. 그것도 모르냐? 알면서.

형에게 삐삐 메시지를 세 번이나 남겼다. 보통 이렇게 메시지가 쌓이면 형은 자투리 시간에라도 들어서 답을 해주는데 눈발 서리는 밤까지 형은 집에 통 들어오지를 않았다. 나는 붙이고 있던 엉덩이를 떼고 밖으로 나갔다. 목도리를 걸쳐 입고 골목 어귀에 서서. 한참이 지났을까, 맨발에 슬리퍼 차림이라 찬 바람을 쐰 발끝이 발갛게 물드는 걸 보고 있자니 걱정과 서러움이 밀려왔다. 몇 분 더 서 있기로 하다가 뒤를 돌았다.

우산을 든 정한이 형이 보였다.

형은 골목 끝에서 나를 발견하고 빠른 걸음으로 성큼성큼 다가왔다. 형의 손에는 평소에 피 2리터씩을 매 끼니에 먹어야 하므로 매일 가지고 다니는 큰 보온병이 있었다. 별안간 뇌리를 스치며 피를 구하러 가야겠다고 지나가며 했던 말이 떠올랐다. 백록이 내려와 물을 마신다는 백록담에서 얻은 순록의 피. 바보야. 그게 오늘이었으면 말을 해주고 가야지. 안도의 마음은 잠시, 갑자기 치밀어 오르는 짜증에 단전부터 피가 끓었다. 그랬지만.

독서실에서 깜빡 잠들어서 삐삐를 늦게 봤어. 숫자가 뜬 건 봤는데, 공중전화를 찾을 시간이 없어서… 내려와 보니 다른 데는 사람들이 백화점까지 줄지어 서 있고. 다른 데는 선이 끊어져 있고. 어디는 술 취한 사람이 막고 있어서 못 들어가가지구… 하, 제, 제대로… 전화할 데가 없어서. 나 많이 기다렸…,

형을 껴안았다. 형을 껴안으면 나에게까지 향긋한 향이 난다. 나는 그게 좋아서 얼굴을 더 파묻고. 두 손으로 형의 허리를 감쌌다.

어디 가버린 줄 알았잖아….

나는 서럽게 울음을 터트렸다. 형은 아무 말 없이 내 뒷머리를 쓰다듬었다. 쓰던 우산을 내게 씌워준 채로.

 

순영아, 나 전국 대회 끝나면 치앙마이로 가. 가서 엄마 만나고 돌아올 거야. 젖은 양말을 벗어 놓은 형이 내 옆에 붙어 앉았다. 부모님 두 분 다 돌아가셨다는 거 거짓말이야. 사실 한 분만 돌아가셨어. 아빠만. 우리 엄마가 한국인이고 아빠가 흡혈귀. 형은 팔을 괴곤 나를 봤다. 나는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몰라 가만히 있었는데 형이 웃으며 나를 끌어안았다. 형의 머리카락이 어깨에 닿았다.

어디서, …어떻게?

치앙마이에서. 모르겠어, 사람이랑 사는 게 불편했나 봐. 다른 흡혈귀들이.

그럼… 형 거기 가는 이유가.

응. 엄마 만나러.

형. 근데 흡혈귀도 죽어?

순영아, 모든 생물은 고장 나면 죽어.

아…. 형, 근데 흡혈귀랑 인간이랑 결혼할 수가 있어?

왜 못해. 같이 살면 그게 결혼이지.

형이 내 등을 토닥였다. 나는 그대로 있는 것이 좋았다. 여기서 형이 날 보면 내 볼은 아마 아주 빨갛게 자두보다 더 빨갛게 물들어 있을 테고 나는 또 형 앞에서 부끄러워질 것이니.

흡혈귀랑 결혼. 흡혈귀…, 형 나도 흡혈귀랑 결혼.

응?

…할 수 있을까?

뭐야, 좋아하는 흡혈귀라도 있어?

나는 형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볼살이 짓눌려졌다. 아냐. 아니야 아무것도……. 내가 중얼대자 형은 바람 빠지는 소릴 내며 웃었다. 그렇게 오래 서로를 안고 있다가 내가 황급히 형을 떼어냈다. 형이 의아한 표정으로 묻는다. 왜?

형. 이제부턴 사람 물어.

그러자 순식간에 형은 충격을 받은 표정으로 변하더니 고개를 도리도리 젓는다.

아, 왜.

사람들 다치는 거 싫어.

사슴은 괜찮고?

그건. 사슴은 그…, 남는 피 받아오는 거니까…….

형이 낮게 읊조리는데 나는 순간 머리가 띵했다.

남는 피를 받아오는 거였어?

응. 나 말고 흡혈귀는 더 있으니까.

여기에 흡혈귀가 형 말고 더 있다고?

응….

뭐야. 사슴도 직접 죽이는 줄 알았는데? 

그분이 건강원 하셔서…….

건강원 하시는 흡혈귀가 있어? 나는 잇새로 실실 삐져나오는 웃음을 주체하기 어려웠다. 뭐야, 직접 추출해오는 게 아니라 받아오는 거였다고 돈 주고?

어, 왜 자꾸 물어봐….

그래도 안 돼.

아, 울 아빠도 죽기 전까지 뭐라 안 했는데 순영이가 왜 그래.

내 목 물어봐.

싫어. 싫다고. 형은 자꾸 뒤에 뻗은 팔로 뒷걸음을 치며 내게서 멀어졌고 나는 니트 목 부근을 늘이며 쇄골을 보였다.

아, 빨리!

기어가 형에게 팔을 뻗자 형이 중심을 잃고 뒤로 나뒹굴었다. 순간적으로 우리는 바닥에 누운 자세가 되었다. 나는 형을 간지럽혔다. 형이 옆구리를 접어가며 웃는다. 웃는 형은 비유하기도 어려울 만큼 아름다운 메타포였다. 내가 눈을 좋아한다면, 그건 형이 눈꽃과도 같기에. 내가 뜨거운 여름을 좋아한다면, 그건 형이 햇살과도 같기에. 그런 이유가 있을 것이다. 형을 만나 형을 좋아하는 건 당연한 일이라고. 이 바다가 아름다운 제주에서. 나 하필 빛과 만나서.

나는 살며시 오래전 기억을 꺼냈다.

형을 위해서 빛이 태어난 거 같다고 생각했어.

형이 몸을 돌려 나를 봤다. 우리의 시선이 닿는다.

호수를 보고 있는데 물결이 내 쪽으로 일렁거리면서 밀려오는 거야. 그 물결마다 설탕 가루가 뿌려지듯 수도 없이 반짝거리는 게…… 여기 반짝거리면 저기도 반짝거리고 또 여기 반짝이면 저기도 반짝거려. 그래서 저어기, 멀리 수평선이 사라질 때까지 쉼 없이 계속 반짝거리는데. 그걸 보고 있는데 형 생각이 났어.

왜?

나한테는 반짝거리는 사람이 형이라서.

고갤 돌렸다. 눈과 눈이 마주친다. 눈과 눈뿐만 아니라 시선도, 마음도. 어쩌면 다음 대사도 암묵적으로 공개가 되어버리는 순간에. 내게 반짝이는 건 늘 가까이에 있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 형 생각이 났어.

형이 내 목을 끌어당겼다. 나는 형이랑 함께 마주 보고 옆으로 누운 상태가 되었다.

순영이는 형이랑 오래오래 살 거야?

음… 형은.

형은 뭐.

육백 살 먹은 꼬부랑 할아버지잖아.

육백 살 먹은 꼬부랑 할아버지? 야, 육백 살 먹으면 할아버지라 안 쳐. 옥황상제랑 친구 해도 무방하지. 근데 넌 한 번이라도 나한테 옥황상제급 취급해준 적이나 있어?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이번엔 형이 나를 간지럽혔고 나는 형의 손을 떼어내고 발로 밀어내느라 바빴다. 형은 이에 대항하듯이 손가락으로 내 배를 긁으면서 재촉했다. 빨리 말해. 순영이, 형한테 뭐 해줄 거야.

알았어, 알았어. 나는….

일순간 행동을 멈춘 형이 다시 나를 보고 누웠다.

나는 형 대신 울어주는 사람.

 

방학이 시작되자 형은 내게 의사를 물어봤다. 자기가 치앙마이에 갔다 와도 되냐고. 아니, 다시 말을 바꿔 자기랑 같이 가자고. 그러나 부모님만 두고 제주를 떠나기엔 나는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다. 완곡히 거절했다. 내가 형의 부탁을 들어주는 일은 처음이라 신중을 가했다. 형은 아쉬워했지만 내가 다독여줘서 금방 괜찮아졌다. 그러나 한가지 이제 남은 건 내가 형을 이대로 순순히 보내줄까, 인데……. 결국 고심에 고심을 더한 끝에 나온 결론은, 형에게 하나의 제안을 주기로 했다.

생각해 봤어?

너, 목 무는 거….

뭐.

나 진짜 모르겠어.

아, 모르겠어 말고. 할 거야, 안 할 거야?

치앙마이로 가기 전까지 부디 내 목을 물어달라는 부탁. 처음에 형은 내가 어떻게 하냐며 강하게 내빼다가 나의 간곡한 부탁에 마음이 녹아서는 금방 꼬리를 내렸다.

할, 할게.

이가 목을 콱 박았다. 기분이 오묘했다. 몸속 무언가가 빠져나가는 느낌은 딱히 안 들었고 그냥……. 형이 이를 더 세워서 왼쪽 목덜미에서 앞 사이를 꽉 물었고 입술이 닿자마자 짜릿함에 몸을 떨었다. 아! 내가 진저리를 치며 떨어지자 형은 빨갛게 물든 입술로 처연한 눈을 하고 있었다. 거봐, 아프다니까. 아픈데 아닌 척하고…. 곧이어 형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다.

형 울어?

아니야! 바보야….

나 안 아파. 울지마 형, 울지마. 왜 울어 흡혈귀가 멋없게.

내가 형을 껴안으려 다가갔지만, 형은 나를 떼어놓고는 화를 냈다.

흡혈귀는 멋있어야 돼?

아니, 내 말은 그게 아니라… 아, 형. 기다려봐. 

나는 뜨거운 땀이 흐르는 손을 옷에 문질러 닦아 내고 형 앞에 가까이 다가가 붙어 앉았다. 시간이 지나고 주변이 어둠에 잠식해 창밖으로 하얀 달빛이 들어왔고 밖은 함박눈이 소리 없이 내리는 광경. 칸나 순정이는 내 책상 위에서 가만히 우리를 지켜보고 있었다.

환상을 보여줄게. 손 줘봐.

그 광경을 뒤로하고 손과 손이 맞닿는다. 두 사람의 다섯 손가락이 각각의 자리를 찾아 붙었다. 형의 손은 나보다 조금 더 컸고 포근했다. 그리고 형은 손을 왼쪽으로 옮겼다. 자연스레 손깍지가 끼워진다.

순영아.

형이 내 이름을 부른다.

내 바다가 되어줄래.

그리하여 나는 거기서 일정량의 기시감을 느낀다. 이건 어쩌면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해주는 내가 좋아하는 답. 심장이 빠르게 요동쳤다. 눈은 아직도 폭포처럼 쏟아질 듯 내리는데. 내게로 바짝 다가온 형은 내 볼을 쓰다듬으며 얼굴을 붙여 왔다.

저번에 바다에 갔을 때 너한테 물었는데 네가 답 안 해줬어.

나는 아무 말 하지 못했다. 형이 입을 맞춰와서 고개를 꺾는 일 밖에는. 하지 못했다. 그러고 나서는 꼬박 반나절을 형의 품에 안겨 잠들어있었다. 그게 내 대답이었다. 형이 있는 곳이 곧 바다가 될 것이다. 겨울 햇빛을 받은 바다는 시원한 바람을 남기고. 유월은 지났으나 청포도가 익어가는 계절이 뒤늦게 방 안에 푸릇함을 남기고. 그렇게 우리의 비밀秘密은 비밀非謐이 된다.

이 다음의 이야기는 1999년, 정한이 형이 치앙마이에서 돌아온 후의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