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생일날 다시 태어나고 싶어. 원우의 문장이 그렇게 시작돼서 나는 일기 첫머리에 그걸 적어놓았다.
원우의 시집을 사기로 한 건 계획된 일은 아니었다. 원우가 떠난 지 오랜 시간이 지나 문득 생각이 났기에. 머릿속 어딘가에 묻혀있을 거라 예상했으나 구태여 꺼내려고 하진 않았다. 살다 보니 전원우 생각이 나게 되는구나 하고, 읊조렸을 뿐이다. 원우가 새 삶을 찾는다고 했을 때 나는 딱 죽고 싶었다. 원우가 살고자 하는 만큼 죽어버리고 싶었다. 그럼에도 원우는 떠났고 나는 남았다.
퇴근 후 쏟아지는 눈바람에 점퍼에 달린 모자를 뒤집어쓰고 종종걸음으로 걸었다. 걷는 길마다 꽁꽁 얼어 있어 찬 기운에 온몸이 시려왔다. 손을 주머니에 찔러넣어 숨겨봐도 붙어오는 차가움은 쉽게 가시지 않아 발까지 숨기고 싶었다. 차라리 발걸음을 빨리해 서둘러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유난히 쨍한 조명이 비추고 있는 베스트셀러 코너를 지나 짧은 문장들이 작은 나라를 이루는 시집코너에서 전원우 세글자를 찾았다. 심장 부근이 뻐근해져 왔다. 고백이라는 단어 밑에 원우의 이름이 쓰여 있다. 하필이면 왜. 제목부터 설레게 해놓고. 나는 또 원우를 원망하지만 두근거림은 멈추지 않아 손끝이 아려왔다. 마음이 급해져서 살펴볼 틈도 없이 책을 집어 결제를 마친 후 소중히 가방에 넣는다. 원우의 일부분이 내게 왔다는 생각에 기분이 들떠서 맥박이 요동쳤다. 찬바람과 함께 집에 들어와선 아무렇게나 겉옷을 벗었다. 바로 시집을 들었다. 얇고 하얬다. 전원우처럼. 책장이 넘어가면서 진한 인쇄물의 덜 마른 잉크 냄새가 끼친다. 원우 몸에서도 났던 냄새. 그야 걔는 책을 달고 살았으니까 그렇다. 나는 혹시라도 내게 해줄 말을 남겨놓았나 싶은 마음에 소파에 앉아 단숨에 마지막 장을 펼쳤다. 애초에 그걸 바랐다. 하지만 아무리 훑어도 작가의 말은 커녕 토막글 따위조차 보이지 않는다.
이게 우리의 끝이다. 원우는 마지막의 마지막까지도 내게 남기는 게 없다.
십칠 년 전, 생모는 나를 버렸고 원우는 생부에게 버려졌다. 보육원에서 처음 만난 우리는 그 이유 하나로 동질감을 느껴 서로를 같은 형질이라 묶었다. 보육원의 총 지배자였던 목사님은 우리를 같은 계절에 태어난 축복이라고 했다. 그래서인지 원우가 좋았다. 원우는 특별했다. 특이했고. 남들보다 약간씩 느려서 느림의 미학이라 정의됐다. 보육원은 원래 소문이 빨리 도는 법이라, 누가 학교에서 뭘 했는지 어떤 표정으로 누구 앞에서 대항했는지 또 어떤 애를 때리고 맞았는지 바람보다 먼저 귀에 들어오는 것이 당연했지만 원우는 바람을 뒤로 한 채 느릿하게 걸었다. 그렇지만 그런 원우도 애정이 뭔지는 알아서, 무신경하고 무관심했어도 무정하진 않았다. 아이들은 원우를 동경했다. 아이 중에 제일 어른 같은 분위기라고 어떤 애가 말하던 걸 들었는데 나는 들으면서 그런 생각 하지 않았다. 원우도 그걸 알고 있었는지 내 앞에서는 해맑은 아이가 됐다. 원우가 긴 손가락으로 내 손목을 잡으며 애처럼 보채 올 때 걔가 내게 영향을 끼쳐 올 것을 알았다.
원우가 특이하다는 건 비단 그 애의 분위기 때문만이 아니다. 재밌는 놀이를 하다가도 얼굴도 모르는 엄마를 걱정하는 게 나의 일이라면 원우는 부모를 원래 없던 사람처럼 여겼다. 누군가에게서 태어난 자식임을 부정했다. 원우는 불필요한 감정 앞에서 자유로웠다. 나는 그런 원우를 부러워했고. 내가 불필요한 감정 때문에 우울해져 앞도 못 보고 슬픔을 주워 먹고 있을 때, 원우는 그런 나를 대신해 글을 썼다. 그게 원우의 일이었다. 귀뚜라미가 우는 밤, 다락방에서 나는 그 울음소리를 자장가처럼 새기며 잠이 들었고 낮에 느렸던 원우는 밤에 바빴다. 옆에서 연필이 사각거리는 소리에 맞춰 눈을 감으면 아침이 되고 아침이 되면 그 밤에 만들어놓은 글을 내게 보여주던 원우는 정말이지 글을 잘 썼다. 마음을 빼앗겼다. 원우한테. 원우는 나의 슬픔을 반쯤 먹고 글로 울어주었다. 그러기 쉽지 않았을 텐데. 전원우가 나 대신 가져가는 것들은 내가 못 죽인 나의 감정이다. 걔는 나를 위해 나보다 많은 일을 한다.
그러다 그 어둑했던 밤에 암순응이 시작된 건 우리가 마지막 학년을 다니고 있을 때였다. 몇 달이 지나 여름이 펼쳐지자 차츰 눈에 들어오는 것이 생겼다. 보호자가 서로밖에 없었던 우리에게 뜻하지 않은 일이 벌어졌다. 우리의 위치가 완전히 새로이 작성되었다. 목사님과 그의 남편인 집사님께서 우리를 양자로 들이고 싶다고.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기뻐서 떠들었고 원우는 조용히 있었다. 부모가 생긴다는 건 고마운 일이었다. 가정에 들어갈 수 있게 된 건 행복한 일이었고. 더구나 모르는 사람도 아닌 원우랑 가족으로 살게 된다는 건. 나는 원체 단순히 생각하기를 좋아한다. 누구의 품이든 내 앞에 있기만 하다면 그걸로 만족하고 싶었으니까. 기대감을 안고 원우를 봤다. 아무 말 없던 원우는 나를 보고 웃었다. 좋아요. 원우는 딱 한 마디를 했다.
작은 골방 같은 다락방에는 원우와 나의 취향이 잔뜩 묻어있는 소품들이 늘 즐비했다. 매미가 소리 내 울던 찌는 듯한 그해 한여름에, 목재 바닥에 다리를 붙이고 다큐멘터리를 보면서 우리는 제각각의 공간에 젖은 취향을 이야기했다. 브라운관 안에서 투명한 돌고래가 뛰어노는 푸른 물결이 눈에 스며들어와 아름답다는 건 충격을 동반한다는 것을 나는 그때 깨달았다. 이렇게 푸르러도 되나 싶을 정도로 아름다워서 옆을 봤는데, 원우도 반한 거 같았다. 원우도 나와 같다면 나는 안심했다. 바다에 반해서 나는 원우에게 말했다. 여름이 가기 전에 해변에 가자. 그러자 원우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내 머리를 정수리부터 쓰다듬었다. 등이 뜨거워졌다. 왜 하필이면. 원우를 힐끗 쳐다봤는데 걔는 꿋꿋이 앞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래서 나도 따라 고개를 돌렸다. 출력되는 영상이 바뀌더니 주황빛 들판이 직사각형 화면을 채웠다. 원우가 살며시 내려가 앉아있던 내 다리에 머리를 뉘었다. 내 손을 잡아당겨 턱을 매만지게 했다. 원우의 턱에서부터 목 아래까지. 우리는 자꾸만 그렇게 맞닿아 있었다.
가고 싶다. 갑자기 원우가 말했다. 화면에는 마른 초원을 걷는 짐승들이 한가로운 낮을 즐기고 있었고 푸른 새가 날았다. 느긋한 사바나에서의 일상이 펼쳐지고 있다는 소개 멘트가 나왔다. 너 저기 가고 싶어? 아래의 원우와 눈을 맞추고 물었더니 원우는 예상치 못한 이야길 꺼냈다.
있잖아. 저기는 건기와 우기가 있대.
그게 뭔데?
내내 비가 못 오다가 언젠간 비가 오기 시작하는 거.
나는 그때 그걸 이해하지 못했다.
순영아. 나랑 사바나에 가자.
원우는 사바나의 기후같이 모든 느린 것에 애정을 담았다. 닮았다. 사바나랑. 겉가죽이 건조한 게 딱 전원우는 사바나다. 그러나 원우는 비가 오지 않는 날에 비가 오길 바랐다. 우리 둘이서 비를 맞길 원했다. 내 머리 위에 쨍하게 떠 있는 해. 그 위로 한 번이라도 비구름이 낀다면 원우는 내게만 특별한 존재가 되는 거라고. 나중에야 알았다. 아주 나중에. 비참하게 너무 늦게 알았다. 그건 둘이서만 살자는 뜻이었는데.
내가 원우와 가족이 된다는 것을 학교는 빠르게 눈치를 챘다. 원우는 이런 반응을 예측하였는지 무덤덤했다. 아이들은 내가 아니라 원우에게 가서 우리에 관해 물었고 그럴 때마다 원우는 크게 반응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날은 달랐다. 어떤 애가 확신에 찬 목소리로 원우에게 소리쳤다. 너 권순영이랑 가족 된다며. 뒷자리에서 책상에다 낙서하던 나는 팔을 멈췄다. 그게 그래서 뭐. 라고 나도 소리치고 싶었는데 원우가 몸을 돌려 나를 본 다음 그 애한테, 같이 살게 되면 좋은 거지. 라고 했다. 씨발 결혼이라도 해라. 그 애는 화를 내곤 돌아갔다. 뼛속까지 비웃으면서. 그러자 원우를 둘러싼 아이들이 다 같이 웃었다. 겔겔거리는 여럿의 웃음소리가 윙윙 머리를 자꾸 어지럽히는데 원우가 내게 와서 손을 내밀었다. 나가자. 원우의 입 모양을 읽었다. 학교 뒤편으로 나를 데려간 원우는 교복 바지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담뱃갑이었다. 전원우가 왜? 원우는 익숙한 듯 반대쪽 주머니에서 라이터를 꺼내며 담배 하나를 입에 물곤 말했다. 미친놈들. 문 담배에 불을 붙였다. 너도 피울래? 원우가 눈을 내리깔고 물었다. 낯설었다. 원우랑 날마다 붙여 다녀도 어쩌면 내가 모르는 전원우가 어딘가에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원우는 마주 보고 있던 나를 피해 고개를 돌려 연기를 내뿜었다. 하늘 위를 스멀거리며 퍼지는 연기. 그걸 보고 있다가 순간 기침이 나왔다. 캑캑 거리며 끈적한 팔목으로 코와 입을 확 가렸더니 원우가 급하게 담배를 던지고 발로 지진 후 내 어깨를 두 손으로 잡아 왔다. 미안해. 일부러 그런 거 아니었는데. 다정한 목소리로 사과하는 것이, 짜증이 났다. 미안한 걸 알면 내 앞에서 하지 마. 그러자 내 찌푸린 미간을 보던 원우는 금방 당황한 기색이 역력해지더니 손을 놓았다. 나도 그제야 팔을 내려놓고 지그시 원우를 봤다.
애들이 뭐라 하는 거 너는 안 싫냐?
걔네가 우리를 궁금해하는데 전원우도 우릴 궁금해할까 싶어서 물었다. 그런데 원우는 내 말이 뭐가 웃긴건지 잠깐의 고민도 없이 웃음을 참지 못하고 내뱉었다.
가족이 아니더라도 우린 함께 살 수 있잖아.
갑작스레 들은 대답은 예상치 못한 거였다.
그럴 거지?
원우가 손을 잡아 왔다. 여름이라서 다행이었다. 밖이 워낙 뜨거워서 얼굴이 달아올라도 햇볕에 익은 척하면 됐으니까. 무덤덤한 전원우는 둘이서 있을 때만 나를 못살게 군다.
어느 날은 원우와 놀다 저녁이 어스름을 삼킬 때쯤 돌아왔는데 집안 분위기가 이상했다. 착 가라앉은 온도에 부모님은 아무 말 없이 식사를 했다. 우리도 부모님을 마주 보며 앉아 수저를 들었는데 어머니께서 조심스럽게 말문을 트셨다. 너희, 학교에서 어떻게 다니길래 사귄다는 소문이 도는 거니. 원우가 국을 떠먹다가 그대로 멈췄다. 나는 아버지를 봤다. 아버지는 식탁만 내리 쳐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원우는 수저를 내려놓았다. 무슨 말씀이세요, 목사님. 원우가 팔을 뻗어 내 뒷목에 손을 올렸다. 교회에 그런 얘기가 돌던데. 어머니는 날카로운 목소리로 첨예하게 꽂히는 말을 계속했다. 목사님이 생각하시는 그런 거 아니에요. 그건 신을 배반하는 거죠. 원우는 침착했다. 원우가 목덜미를 쓸어내려 맞닿은 살갗이 뜨거워졌다. 거기서부터 등 아래까지 식은땀이 흘렀다. 아버지의 신경이 나와 원우의 접점에 쏠려있는 게 느껴졌다. 얼굴이 확 달아올라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런데도 원우는.
내 뒷목을 자꾸 만졌다. 접촉하는 부근이 뜨겁다.
저녁 시간을 그렇게 마치고 우리는 경쟁하듯 재빨리 다락방으로 뛰어 올라갔다. 티 없는 해맑음이 우리의 세상을 채웠다. 방에 들어온 원우는 보여 줄 것이 있었다며 해묵은 상자를 뒤져 무언갈 꺼냈다. 원우의 원고 모음이었다. 오랜만에 세상 밖을 본 종이 더미는 시간의 흐름을 여실히 보여주는 퀴퀴한 냄새가 났다. 나는 한 장씩 페이지를 넘겼다. 원우가 꺼내온 글은 숨이 멎도록 예뻤다. 그중, 가장 마지막 장에 있던 글의 첫 문장이 나를 녹였다. 네 생일날 다시 태어나고 싶어. 그렇게 시작되는 글은 절절한 사랑을 고백하는 내용이 전부였다. 너 정말 잘 쓴다. 내가 놀라 말하자 원우가 기뻐하며 발그레해졌다. 나중이 되더라도 언젠가는 꼭 출판할 거라고 해서 너 정도면 가능할 것 같다고 대꾸했더니 원우는 헛숨을 뱉으며 웃고는,
그럼 네가 가져. 라고 했다.
네 생일날 다시 태어나고 싶어. 저 문장의 주인은 누구일까. 누구인데 무덤덤한 전원우를 고백하게 했나.
뭐가 됐든 좋았다. 원우의 글은 나를 행복과 이어주는 매개체. 암흑 속에도 굽이치는 바다다. 아름다웠다. 시간 가는 줄 모르는 채 우린 다락방에서 한참을 놀았다. 서로의 손금을 손끝으로 따라가기도 하고 엎드려 책을 읽는 원우의 등에 머릴 기대 선잠에 들기도 했다. 그러다 잠에서 깨 원우랑 만화책을 나눠 읽었다. 놀아도 놀아도 원우랑 있으면 갈증이 났다. 더 자극적인 게 필요했다. 몇 시간이 지났을까 원우가 지루한지 바닥을 툭툭 두드리다 나를 봤다. 다가오는 시선에 고갤 돌려 원우와 마주 봤더니 장난기 가득한 목소리로 나를 주시하며 입을 연다.
우리, 목사님 물건 가져오기 할래?
달콤한 제안이었다. 그 장난은 어릴 적부터 원우랑 나랑 심심할 때 하던 거였는데 오래된 추억이 상기 되자 기분이 들떴다. 나도 마침 지루해져 있던 터라, 원우가 하자는 대로 하고 싶어서 고갤 끄덕였다. 그러자 원우는 희맑게 코를 찡그렸다. 우리는 빠르게 나무 계단을 내려갔고, 뛰는 원우를 뒤따라 달리니 양말을 신은 발이 나무 바닥과 닿아서 쿵쿵거리는 소리가 났다. 부모님이 깰까 봐 가슴이 여러 번 두근거렸다. 원우는 어느새 안방에 들어갔고, 나는 살짝 열린 문으로 원우를 흘깃 지켜봤다. 그리고 원우가 어머니의 가방에서 무언가를 꺼내와 내 손목을 잡았다. 원우와 손을 맞잡고 다시 달렸다. 달리다가 발을 멈췄다. 다락방으로 가는 계단 앞에서. 잠깐 거기서 숨을 골랐다. 나는 원우가 대체 뭘 가져왔는지 궁금해 원우의 쥔 손을 강제로 폈다. 립스틱이었다. 우리는 한참 소릴 내며 실실 웃었다. 그러다 원우가 나를 잡아끌며 계단에 앉았다. 이리 와. 원우와 좁은 계단에 마주 보고 있으려니 자세가 영 이상했다. 립스틱 뚜껑을 열고 바닥을 돌린 원우가 연한 장밋빛 색을 들고 내 입술을 향해 전진해오자 가까워지는 거리에 무릎을 세워야 했다. 결국 나는 원우에게 안겨있는 것처럼 되었다. 턱을 잡고 입술 선을 따라 칠을 하는데 간지러워서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게다가 원우의 뜨거운 숨이 느껴져서 못 참고 웃음을 터트렸더니 원우가 손을 삐끗해 장미색이 내 앞니에 다 묻어버렸다. 그것마저 웃겨서 아등바등했더니 원우가 볼을 잡고 가만히 좀 있어 달라 했다.
이러고 사바나 갈까?
원우를 놀렸다. 원우는 아랫입술을 여러 번 덧바르다 그제야 만족했는지 팔을 뗐다.
그건 안되겠다.
왜?
사바나에서는 립스틱을 발라도 입술이 메말라 갈라져 버리니까.
원우가 흐트러진 내 앞머리를 정리하는 중에 나는 그 말을 듣고 그럴 필요가 있나 생각했다.
다음번엔 더 촉촉한 립스틱을 쓰자. 어때?
그러지 않아도 될 거 같아.
들려오는 대답이 단호해서 묻고 싶었다. 물으려 했다. 했는데 그럴 틈 없이 원우가 내 쪽으로 넘어온다. 계단을 짚고 있던 내 손에 자신의 손을 포개고는 얼굴을 붙여 온다.
키스해도 돼?
원우가 눈을 깜빡거려서 나는 그 애의 속눈썹을 봤다. 또 등이 확 달아올랐다. 간지러워서 고개를 돌리려다 눈과 눈이 마주쳤다. 숨이 멎을 거 같다. 시선을 떨궜는데 다가오는 콧등부터 입술까지가 야릇했다. 금세 귀가 뜨거워지고 머리가 울리고 정신이 몽롱해…… 눈을 감는다. 느릿하게 원우의 입술이 닿는다. 나는 자꾸만 뒤로, 뒤로. 계단 벽에 등이 부딪혀 척추뼈가 아플 만큼 원우에게 지배당하듯이 뒤로. 원우는 혀로 내 입술을 쓸었다. 에스테틱 향이 나는 립스틱이 완전히 벗겨질 때까지. 원우의 입술도 장미색으로 물들 때까지 한참을 그렇게 붙어있었다. 메말라 있던 입술이 축축해졌다.
원우는 모든 느린 것에 애정을 담는다. 그렇다면 나랑 전원우는 무슨 사이지. 형제일까 친구일까. 그것도 아니면 우리는.
그날 밤 우리는 각자의 이불을 덮고 눈을 감았다. 나는 밤새 원우를 생각했다. 원우도 나를 생각 안 했을 리 없다. 그러니 만약 전원우랑 내가 서로를 생각한 시간을 페이스트리로 만든다면 수백 겹의 층으로 쌓아 올려 엄청나게 큰 탄수화물 빵이 탄생할 것이다. 비유가 너무 별론가? 별로여도 할 수 없다. 원체 나는 전원우가 될 수 없다.
행사 때문에 사람들이 우르르 줄지어 들어선 교회 입구 앞에선 늘 문지기처럼 누군가가 지키고 서 있다. 원우와 나는 그 앞에서 멈췄다. 서 있는 분이 물어왔다. 두 분은 친구 사이세요? 묻는 말에 대답할 수 없었다. 그동안 나와 전원우를 향하던 비슷한 질문들에 매일 예민해져 있었는데 별 이유 없이 물어봤을 거란 걸 알았지만 괜히 시선을 돌렸다. 그런데 원우가 뜸을 들이더니 나 대신 말했다.
형제입니다.
되게 안 닮으셨다.
그런 소리 많이 들어요.
질문을 던진 분은 매년 그렇듯 행사용 빵과 요구르트를 손에 쥐여주시곤 좋은 시간 보내라는 인사를 건넸다. 우리는 마지막으로 인사를 들으며 예배당으로 들어섰다. 나는 단숨에 불안해졌다.
친구라 할 수도 있잖아.
물었더니 원우는 주머니에서 손을 꺼내 내 손을 잡았다.
서류상으로 가족이니까.
원우에게서 나오는 가족이라는 말에 바늘에 찔린 것처럼 따끔했다. 원우는 내 손을 잡으면서. 나한테 키스를 했으면서 가족이라고 생각하는 걸까. 잘못됐다. 못됐다, 전원우. 그리고 나도 못됐다. 원우랑 함께 살기를 원한 것이 내 발목을 잡을 줄 미리 알았어야 했는데. 마음 같아선 우리 이름이 함께 쓰여 있는 서류를 전부 갈가리 찢어버리고 싶다. 원우도 같은 마음일까.
같은 마음이면. 지금부터 원우는 내 손을 쳐내지 말아야 한다. 기도가 시작되고 모두 숨죽이는 그 자리에서 나는 원우의 종아리를 내 다리로 감았다. 황토색 의자는 하나로 이어져 있는 기다란 것이 장점이다. 옆으로 닿을 수 있다. 입고 있던 반바지가 올라가 허벅지 살이 드러났다. 원우가 의식되는지 바로 곁눈질해왔다. 그게 좋았다. 만져줬으면. 장로님이 기도문을 외우는 걸 배경음처럼 들으며 전원우는 덫에 걸린다. 원우가 내 허벅지를 손톱으로 긁어 내려갔다. 숨이 터져 나왔다. 맥박도. 피도. 온몸을 빙빙 돈다.
참지 못하고 일어났다. 일어나 원우를 끌고 나왔다. 어디든 아무도 없는 곳으로 들어가야 했다. 화장실로 몸을 숨기고 원우를 마주 봤다. 옷 속으로 차가운 손이 들어온다. 내가 움찔거리자 원우가 입을 맞춰왔다. 입술을 붙였다 뗐다 숨을 뱉고 다시 머금는다. 그러다 안경이 거슬렀는지 세면대에 대충 던져놓고 이번엔 목을 물었다. 목에서 신음이 새어 나왔다. 하아… 전원우. 원우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점점 내려가 쇄골에 얼굴을 묻고 숨을 뱉었다. 뜨거운 것이 뼛속까지 침투한다. 하아. 하아…. 숨을 고를 때마다 몇 배씩 달아올라 터질 거 같았다. 권순영. 쇄골에 한참 키스를 퍼붓던 원우가 소름 끼치게 나의 등을 찬 손으로 매만지며 이름을 부른다.
순영아, 권순영.
원우가 자꾸 나를 부르자 내 사고회로는 거기서 중지한다. 기분이 좋았다. 좋아서 말했다.
왜. 소리 더 내줘?
내리깐 눈으로 원우를 야살스럽게 쳐다봤더니,
그만하자.
원우는 나를 놓았다. 그리고 어느새 바닥에 떨어져 있는 안경을 주워 썼다. 세면대를 뒤로 짚고 있던 나는 그제야 숨을 몰아쉬었다. 원우는 자신의 카라 깃을 고치고 나의 흐트러진 옷매무새를 정리해줬다.
형제라며. 어떤 형제가 화장실에서 이런 짓 하는데.
갈라진 음성이 내 목을 타고 뻗어 나오자 원우는 다시 내게 손을 뻗었다. 옷 속을 파고들어 내 늑골을 쓸었다. 하나하나, 검지로 개수를 세듯이. 여러 번 반복하다가 손을 떨어트렸다. 나는 그때 원우가 손을 떠는 걸 봤다.
화장실을 나가는데 살짝 열려있는 예배당 문틈 사이로 규율이 깨진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죄악입니다. 무엇이. 죄악입니다. 나는 옆에서 걸어가는 원우를 봤다. 머릿속이 소용돌이쳤다. 삐뽀 삐뽀. 수십 개의 비보가 날아왔다. 여기저기서 공포감이 뛰어논다. 예배당은 금세 한가득. …성애는 죄악입니다. 수십 명의 목소리가 삐뽀 삐뽀. 죄악입니다. 사이렌처럼 돌아가는데 우리는 별말 없이 교회를 빠져나왔다.
죄악. 전원우와 내게 죄악이 있는가.
이제 학교에서는 우리가 아예 섹스까지 했다는 소문이 파리 날듯 빙빙 돌아다녔다. 원우는 뒤따라오는 내 이름에 쫓기듯 살아갔고 그 시절 나는 안 어울리게 사랑니가 돋아났다. 어서 뽑아야 한다고 하길래 그 자리에서 치료를 받고 집에 돌아왔다. 사랑니는 예고 없이 나서 단숨에 빠졌다. 아픈 볼살을 어루만지며 원우에게 다가갔더니 원우가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순진무구하게 다가왔다. 사랑니 뺐어. 원우 앞에서 입을 벌렸다. 아파. 원우가 손가락을 집어넣었다. 나는 벌어진 입을 살짝 다물었다. 원우야. 원우는 놀라지도 않는다. 순영아. 응. 늦었어, 자자. 때 묻은 여름이 지나고 가을이 끝나가는지도 한참이었는데 전원우는 여전히 건조했으며 말라버려 여름 앞에 박제되었다.
그 뒤로 원우의 글은 생산이 중단됐다. 파리 떼들이 원우를 집어삼켰기 때문이다.
지옥 같던 일 년의 삼 분의 일이었다. 그 시간 동안 나와 원우는 다시는 어떠한 접촉도 하지 않게 되었고.
원우는 대학 진학을 하지 않았다.
트렁크에 짐을 담은 원우는 떠날 준비를 마쳤다.
어디로? 사바나로.
건조한 원우가 돌아갈 사바나.
고등학교를 자퇴 하기 전에 원우는 마지막으로 다시금 글을 썼다.
그리고 그 마지막 글 중 하나가 내 사물함 안에서 발견된다.
권순영. 네가 내 글을 읽었으면 좋겠어. 내 안을 파고들어 나를 읽었으면 좋겠어. 문장 하나하나를 나라고 생각해주길 원해. 너는 나를 봤으면 좋겠어. 네가 나를 어떻게 해줬으면 하니까. 차라리 네가 취한다면 어떨까 해. 네가 나한테 취해서 너의 시선이 넘치다 못해 내 주위에 흐르는 걸 보고 싶어. 만끽하고 싶어. 그렇지만 너는 몰라야 해. 내가 너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 수 없어서 네가 나를 찾아야 해. 하지만 나는 좀 숨고 싶어. 순영아. 사라지고 싶어. 나는 없어지고 싶어. 그럼 너는 어떡해야 해. 어떡할 거야. 아무런 까닭 없이도 너는 권순영 그대로일 거야?
내게 원우는 병이다. 원우는 수많은 것들을 고작 하나로 비유한다. 사랑. 사랑이라 하지않되 말하는 건 사랑이다. 어찌되었든 사랑이다. 여태까지의 원우의 글이 그랬고 원우의 생각이 그랬고 원우의 낭만이 그렇다. 사랑을 모순처럼 이용하니까, 나는 원우가 사랑이란 단어를 입 밖으로 꺼내는 상상을 한다. 언제쯤 나한테 사랑을 말할까. 이질적이지. 사랑이라고 말 못 하면서 사랑만을 외치는. 하지만 원우는 원래 이질적이다. 비치는 성질부터가 남들과 다르다. 여름에 태어났는데 낮은 기온에서 머무르는 것만 봐도 아이러니하잖아.
전원우가 사물함에 넣어놓은 편지 한 장 때문에 큰 파문이 일었다. 몸 안에서 수십 마리의 벌레 떼들이 이글이글 끓는 거 같았다. 원우가 자퇴하고 나만 남겨두고 떠난 날. 그날 나는 원우를 찾기 위해 집으로 돌아왔다. 안방, 거실, 화장실 아무 데도 원우의 흔적이 없다. 눈물이 볼을 타고 흘렀다. 그래도 참고 원우를 찾는데 문득 생각이 났다. 다락방. 전원우가 가장 큰 꿈을 품고 글을 쓰던 그 방. 계단을 두 칸씩 뛰어올라 문을 열려는데 때마침 문고리를 열고 나가려는 원우와 정면으로 마주쳤다. 원우는 나를 봐도 놀라지 않았다. 내가 그렇게 울고 있었는데도.
원우는 떠나는 사람 같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무언가 힘들었던 긴 과정을 끝내고 돌아온 사람처럼 평온했다. 원우는 달달 떠는 나를 바닥에 앉혔다. 그리고 눈물 자국을 소매로 씻어주더니 물 한 컵을 떠와 내게 먹였다.
부족한 게 있으면 말해.
원우가 앉았던 몸을 일으키려는 찰나, 이렇게 끝이 날까 한없이 서러워서 원우를 붙잡았다. 그리고 힘을 줘서 넘어뜨렸다. 바닥에 등을 붙이고 누운 모습이 된 원우가 의아한지 눈을 마주쳐 온다. 원우의 위로 올라탄 내가 말했다.
부족한 게 있어.
뭔데.
사랑.
원우는 그때 한번 놀랐다. 내게서 사랑이란 단어가 나옴에 대해 적응하지 못하는 듯했다. 나는 거짓말을 했다.
네 글엔 사랑이 없잖아.
원우가 천천히 입을 연다.
난 너만 봐.
야, 전원우.
순영아.
원우야. 이제 좀 말해.
나는 사바나가 좋아.
나는 싫어.
나는 네 생일이 좋아.
나는 내 생일도 싫어.
내가 다시 태어나면 꼭 네 생일에 태어나서 너를 더 기쁘게 할 거야.
정신이 아득해진다. 전원우가 왜 그런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 나를 어쩔 셈인지, 무슨 작정인지. 여러 번 뻐끔거렸는데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너만 좋다고 하면 나는 뭐든지 좋다고 할 텐데. 그런데 여기서 그 문장이 왜 나오는 건데? 나 힘들게.
그 말도 싫다고! 싫어… 싫다니까.
연신 고개를 저으며 소리쳤다. 눈물에 젖은 목소리가 목을 타고 내려와 원우의 얼굴에 가라앉는다.
가지 마. 원우야, 가지 마.
좋아해. 네 여름을 좋아해. 목사님이 우리가 같은 계절에 태어난 것이 축복이라고 했잖아.
거짓말 마. 우리 관계는 왜 사랑 아닌 것들로만 결합되어 있어? 너는 왜 사랑 빼고 다 가지고 있는데? 원우야.
이름을 불렀다. 응. 원우가 답한다.
네가 날 붙잡았으면 좋겠어. 사라지지 마. 가려고 하지 마. 네가 뭐라도 했으면 좋겠어. 네가 나한테 소리치고 욕했으면 좋겠어. 옆에 붙어있어 달라 한마디면 되는데 그게 그렇게 어려우면 차라리 그냥 욕해. 아니다. 나를 때리는 건 어때. 날 때리면 네 속이 시원하겠어?
내가 사막에 살아도 너는 물에서 살아야 해. 너는 바다같이 아름다우니까.
네가 없으면 아무리 바다여도 내겐 사막이야. 물에 잠기지 않아 나는. 아마 말라죽을 거야. 모래 속에 갇혀 죽고 말 거야. 지금 죽고 싶으니까 나는 그렇게 죽을 거야.
원우는 말이 없었다.
그래도 좋아?
말 없는 원우가 말할 때까지. 끝없이 재촉하고 싶었다. 그러나 원우의 얼굴을 한참 읽으며 서서히 힘이 빠진 나는 결국 쓰러져 원우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순영이 너는 내가 되지 않았으면 좋겠어.
원우가 남긴 최후의 고백. 나는 그게 유서라도 되는 듯 지켜야 한다는 사명감에 빠졌다.
알았어. 끝까지 권순영 할게. 그러니까 너도 끝까지 전원우 해.
내가 원우 품에서 울자, 원우는 연신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알았어. 그럴게 순영아.
따듯했다.
그런데 원우야. 너는 전원우 못 해.
왜인지 알아?
네가 죽을 때까지 전원우로 살려면.
부모님 앞에서 내 뒷목을 만지지 말았어야지. 내 옷 안에 손을 넣고 내 늑골을 세지 말았어야지. 내 쇄골에 얼굴을 묻고 숨을 뱉지 말았어야지. 내 눈을 보고 있지 말았어야지. 너의 그 사랑해줄 거 같은 눈빛으로 나를 녹이질 말았어야, 그랬어야 했는데.
그렇지만 만약 네가 그랬다 하더라도.
네가 주는 거짓말에 나는 금방 잘 속아서.
속아서 네 거짓말도 사랑하게 됐어.
그리고 전원우는 사바나로 돌아갔다. 나중에 밝혀진 사실인데, 가기 전에 원우는 한 출판사와 계약을 마쳤다. 원우의 글이 세상 밖에 나온다니. 시간이 지나고 한참 후에 나는 그동안 원우가 쌓아둔 글을 읽고 싶어 상자를 꺼내 열었다. 원우가 끊임없이 글을 써 그 안에 넣어 둔 수많은 글. 어디서부터 읽지 않았을까. 손에 잡히는 대로 집어 원우의 글을 읽었다. 한참이고 읽다가 서서히 반했다. 걔가 남긴 마지막 원고의 마지막 문장에. 그것은 한 줄이었다.
문제가 많았던 그해 여름, 나는 다큐멘터리를 보다가 바다에 빠졌다. 나는 바다를 본다. 바다도 내게 빠졌을까.
여기까지가 전원우가 남긴 기록이다. 나는 원우의 시집을 식탁 위에 올려놓았다. 도저히 읽을 염두가 안 날 정도로 어려워서. 덮어 둔 책을 한참이고 보다 시선을 돌렸다. 그런데 식탁 모퉁이에 웬 누르스름한 편지가 하나 있다. 어머니나 아버지가 놓고 간 걸까싶어 편지를 집어서 확인했는데 낯선 영어 단어들이 줄지어 쓰여 있다. 설마. 반쯤 확신을 하며 편지를 뜯는다. 익숙한 글씨체가 눈에 먼저 들어온다. 맞았다. 이 년 전에 떠난 전원우. 사바나에 간 전원우가 편지를 보내온 것이다.
바다야 안녕 잘 지내? 나는 그럭저럭 지내. 너 졸업하고 바로 취직했다고 목사님한테 전해 들었어. 일은 어때. 많이 힘들까? 그래도 지금은 잘 다니고 있을 거라 믿어. 너는 원래 적응을 잘하잖아. 혹시라도 힘들면 힘들다고 해. 그리고 앞의 일을 일부러 걱정하지는 말자. 나는 너 걱정 안 해. 이러면 너도 안심되지?
야. 권순영. 아니지. 그러면 권사원이라고 불리는 거겠지. 축하해. 너는 하고픈 건 뭐든지 하니까 잘될 줄 알았어. 그런데 인사가 늦었네. 미안해.
맞다. 작년 생일은 어떻게 보냈어? 회사에서도 챙겨줬어? 친구들한테도 축하 많이 받았겠다. 목사님한테 전해 들었는데 가족들 다 같이 제주도로 여행 갔다 왔다며. 재밌었겠네. 너 좋아하는 고기도 많이 먹었어? 너 여행 가면 고기랑 김치부터 찾잖아. 그리고 누가 잘라줘야 먹잖아. 고기도 못 구우면서 목사님이랑 집사님 고생시키지 말고 네가 직접 해. 그거 정도는 할 수 있어야 하니까.
바보야.
내 편지 많이 기다렸지. 네 생일 못 챙겨줘서 미안해. 같이 있었으면 케이크라도 전해주고 싶은데 내가 너무 멀리 와있네. 올해 여름엔 갖고 싶은 거 없어 순영아? 너 필요하다면 내가 어떻게든 여기서 구해볼게. 나는 지금 라오스에 있어. 내일모레엔 인도에 갈 거야. 내가 말하던 사바나야. 건기 때 와서 춥지도 않아. 한국은 겨울이겠구나. 여기는 건조해. 네가 항상 나한테 건조한 사람 같다고 그랬잖아. 딱 그거 같아. 햇볕이 강해서 익을 거 같아.
순영아. 있잖아 나 실은 무서웠어. 내가 바보같이 굴어서 네가 나 안 볼까 봐 무서웠어. 너는 아무 신경 안 쓰는데 그게 맞는 건데 내가 속앓이하다 널 놓친 거 같아서……. 나 사실 그럭저럭 지내는 게 아니라 그냥 못 지내. 너 없어서 못 지내고 있어. 그러니까 내가 돌아갈 때까지만 조금 더 기다려줄래. 보고 싶어. 너한테 제일 어울리는 걸 찾아서 돌아갈게. 네가 마음에 들어 했으면 좋겠다. 순영아. 나는 네가 죽지 않을 때까지 나도 죽지 않을 거야. 그러니까 무서워하지 마. 너한테 하는 나의 모든 말이 너에게 한가지 감정으로 느껴지길 바라. 왜냐하면…… 이제 깨달았는데 나 생각보다 너를 정말 많이 마음속에 품고 있는 거 같아.
순영아. 너는 내 친구이자 가족이자 내가 매 순간 그리워하는 사람이야.
황급히 시집을 다시 집어 든다. 원우가 나를 두드리고 있어서 나는 원우의 부름에 답해야 한다. 한장 한장 차례부터 읽어나가는 중에 한 문단에서 멈췄다. 소제목은 각각 봄, 바다, 가을, 겨울이었다. 이렇게 네 가지로 나누어져 있었다. 사계절이 아니라 여름 자리에 여름 대신 바다가 껴있다. 원우가 내게서 바다를 갈망하던 것이 이유였을까.
사진 속의 춤추는 그대
랑데부
해는 어둠을 남기고
순진한 수기
영원은 오지 않는다
아침의 역사
바다에는 여섯 편의 시가 수록되어 있었다. 제목을 차례대로 보다가 그만 깨닫는다. 불투명하고 피상적인 낱말로 어울려진 제목들에 유연한 규칙이 숨어있다. 거기서 모순을 발견했다. 문장 하나하나 자기 자신이라 생각해 달라고 했었지. 생각이 나서 손을 뻗었다. 앞에 한 글자씩만 남기고 제목을 가리니 손에 다 가려지기에 한눈에 보인다. 원우가 남긴 흔적이. 원우는 이런 식으로 내게 흔적을 남기고자 한 것이다. 아주 깊은 흔적. 그래서 나는 필히 원우의 글을 좋아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전원우는 반드시 돌아온다. 편지가 그렇게 말하고 있다. 지금, 사바나가 전해 준 편지 안에서 원우는 도약을 준비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기 위해 내게 돌아올 시간이 필요한 것이고. 준비가 끝나면 원우는 내게 올 것이라고. 그러나 혹시라도 원우가 형체조차 보이지 않게 된다면. 말도 안 되지만 만약 그때가 되면.
내가 사바나를 찾으러 떠날 것이라고. 유유히 흐르는 밤하늘을 보며 별에게 들리길 염원한다. 원우는 알 수 있을 것이다. 걔도 같은 하늘을 보고 있을까. 보고 있겠지. 다정한 전원우……. 그 뒤늦은 고백에 마침내 나는 답할 수 있다.
네 글이 좋다는 건 나도 너를 사랑한다는 뜻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