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살률 백 퍼센트. 마지막 장에는 네 이름 옆에 그렇게 썼다. 너는 반드시 죽는다. 권호시는 반드시, 남의 손을 빌리지 못하는 경우에 제 손으로 명을 끊을 것이다. 끊어지는 순간에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씨발 바다 보고 싶어. 그런데도 네가 이 막되고 무질서한 악습은 끊어내질 못하는 이유는?
존재가치가 불확실한 너는 자기 자신을 잡견(雜犬)이라 부른다. 혹시 그것이 너의 자존심이었나 하면서도 나는 피 한 방울, 심장에 헛돌지 않았다. 때때로 지나치게 무력해서 살아 있는지조차 의식하지 못했으니까. 그러나 권호시 너는 오히려 재기발랄했다. 너는 손톱마다 듬성히 스민 푸른 핏자국과 박혀있는 인간의 살점을 이쑤시개로 긁어내다가 나를 본다. 자세히 보니 손등에서부터 묻은 피는 검은 피였고 피는 너를 타고 올라 턱 밑까지, 그러니까 목의 반절을 덮는 만큼 얼룩이 져 있다.
너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 거야?
원을 그리며 순환하는 환풍기는 빛을 쪼개 그림자를 만든다. 막 입을 연 권호시의 앞뒤로 어둠이 저물었다. 나는 두 눈을 본다. 속눈썹이 올라갔다 빠르게 떨어져서 처음으로 우리 둘의 순간이 나른하다고 생각되었다. 달가워진 뺨을 한 번 만졌다. 시선이 맞물리면 나는 피부가 달아올라서 잠시 당황한다. 병이었다. 권호시는 의자에서 내려와 진득한 바닥에 앉은 나를 끌어안았다. 피 향이 짙디짙다. 근육이 다 드러난 민소매를 입은 권호시가 한 손가락으로 내 늑골의 개수를 하나씩 센다. 내가 살아있는 기분을 느끼도록 하는 모든 행위는 네가 지향하는 점이었다.
두 달 전
우림성(雨森城). 도시라고 부르기엔 낮도 밤도 없었다. 시간 되면 일어나고 기절할 듯싶으면 자는 삶을 영위한다. 생명이 붙은 것들은 매일같이 탈출을 위해 포효했으나 그 소리는 빈틈없이 막힌 건물들을 빠져나오지 못하고 암울히 벽에 입혀진다. 우림성의 벽은 그래서 헐고 녹이 슬었다. 이름과는 달리 비가 내린 적이 손에 꼽혔다. 그래서 나는 그 자릴 대신 해 혈(血)을 집어넣어야 마땅하다 본다. 혈림성. 권호시와 어울리는 이름이 아닌가.
가두에도, 지하에도 여러 가옥들이 빽빽이 붙어있는 몰골. 이럴 때 숨이 막히는 것은 사람이 아니라 건축물일 것이다. 그러나 건축물보다 배로 쌓인 것이 범죄였다. 살인폭행절도도박강도추행마약. 별별 죄를 별별 사람들이 저질렀다. 무법 도시는 말 그대로의 위세를 쥐어서 우림성은 한 치의 법도 수용하지 않는다. 치외법권은 이 최적한 환경을 만드는 데 기여했고 갇힌 시민들은 죽지 않기 위해 기도한다. 밤보단 낮에 살인이 잦은 것이 이곳의 특성처럼 여겨지듯이 낮에 잠을 청하는 내게 들리는 건 통곡 소리였다. 어딜 가나 그 소리가 있었다. 처음 이곳에 왔을 때만 해도 그렇게 여겼다. 권호시가 손수건으로 칼날을 쓸며 나는 시간을 가려서 죽이지 않아, 라고 말하기 전까지.
너야, 나한테 붙은 애가? 검붉은 머리에 검은 정장을 차려입은 권호시가 그 찢어진 눈매로 나를 위아래로 훑었다. 자연히 떫은 인내가 읽힌다. 애새끼를 데려왔네. 가만히 잠자코 있던 록산나가 분위기를 전환하기 위해 나를 흘깃 쳐다보고 말한다. 너랑 엇비슷해. 록산나는 권호시의 광둥어를 읽는지 아니면 대략 짐작하는지 지속적인 영어로 대꾸했다. 나는 록산나에게 애써 이만하면 됐다는 신호를 보냈다. 가 봐. 그녀는 칼로 자른듯한 금빛 단발머리를 재차 귀 뒤로 넘겼다. 그녀가 민망할 때 마다 하는 버릇이었다. 권호시가 내 발 옆에 둔 가방을 가리킨다. 그거 들고 따라와. 시간이 됐다. 록산나와 나는 헤어져야 한다. 한국에선 잘도 붙어 다녔는데……. 회상에 젖은 록산나는 당장이라도 울 듯이 큰 눈을 깜빡거렸다. 걱정 마. 나 안 죽을 거야. 나는 입 모양으로 그녀에게 말을 출력해 보였다. 우물쭈물하던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 또한 그에 대한 답신으로 고개를 끄덕이곤 마지막으로 웃었다.
나는 권호시를 감시한다. 권호시가 하는 살인의 과정과 결과를 조직에 보고한다. 나는 청부업자의 감시자라는 미명 하에 실존하여 살아가야만 살 수 있었다.
수첩이라 말하기에도 뭐한, 작은 종이들의 집합물을 하릴없이 넘기고 있는 와중에 막 씻고 나온 네가 내 뒤에 서서 달라붙었다. 일종의 벌레와 비스무레하다.
그거 뭐야?
습한 온기가 입김과 함께 스멀거리며 전해지는 행동이 여간 반갑지 않다.
너 말이야. 네가 하는 일을. 누굴 어디서 어떤 식으로 죽였고, 시체는 어떻게 처리하는지에 대한 모든 과정. 그걸 여기에다 적어서 보고할 거야. 상부에.
수첩을 흔든다. 권호시의 시선이 여기 머문다. 회로가 순환하며 한 음절마다 자동으로 읽히는 국어가 믿기지 않는지 너는 내가 문장을 내뱉을 때 순차적으로 허탈히 조소했다.
뭘 놀래 씨발, 내가 너 따라서 업자 일이라도 할 줄 알았어?
남자의 목에 칼을 꽂는다. 그의 억, 하는 소리와 함께 뒤에 서 있던 권호시가 반대쪽 팔로 남자의 쇄골 부근을 감싸 안아 지탱했다. 수평으로 뚫린 목에서 검붉은 피가 솟구치더니 칼날이 잇달아 빛을 낸다. 혈관이 잘린다. 외마디 신음을 뱉은 남자가 아래로, 아래로 내려갔다. 할 말이 많을 것이다. 너는 그 틈을 놓치지 않는다. 극렬하다 싶은 눈동자가 찬란하여 나의 뇌에 현저히 기억된다. 이번엔 남자의 정면으로 가 목을 또 쑤신다. 상처는 더욱더 깊다. 가운데에 구멍이 생겨 피는 그쪽으로도 역류했다. 너는 탁월히 죽음을 권유한다. 그리고 다른 목표를 발견했는지 심장을 빠르게 찌른다. 고동이 소멸한다. 남자가 무릎을 꿇고 넘어질 듯하다. 순환은 앞서 중지했다. 칼이 계속해서 새로운 곳을 찾아 드나든다. 남자의 복부에 한번, 그 밑에 한 번. 남자는 죽고 싶어 보인다. 권호시도 무릎을 꿇는다. 타인의 피가 조각난 공간에 세차게 흩뿌려졌다. 그것들은 이내 권호시의 얼굴로 선명한 이름처럼 새겨진다. 지켜보던 나는 몸을 뒤로 빼면서도 동시에 쥐고 있던 종이에 단숨히 써넣었다. 내 눈과 손은 순간의 기록이고 기억이었다.
18/07/198X. 원칭리. 남성. 옥상 위. 자상(권호시의 나이프)으로 인한 목의 경동맥 파열, 심장 파열, 장 파열(솔직히 정확한 명칭 알 수 없음), 그 후 밑으로 떨어져서 대퇴부와 두개골 파손(예상)… 수첩에 적어놓은 문장을 수화기 너머로 전달했다. 원한도 모르는 죽음은 사인 따위 결국 지하수면 아래로 가라앉는 찌꺼기에 불과할 것이다. 비좁은 전화부스 안에는 더러운 밤공기가 넘실대어 풀벌레 소리만이 불규칙적으로 들릴 뿐이고 상대는 말이 없다. 혹시 빠진 게 없는지 생각을 되짚는다. 아, 고기. 고기는 우리가 쓰는 은어다. 흔히 조직 내에서 밀거래되는 마약처럼 더럽기 짝이 없다. 진짜 고기들이 이 사실을 알면 시위라도 할 게 뻔하지만, 대체어를 쓸 수가 없는 게 좆같고. 살인이 하루가 멀다 싶게 고착되는 일이어도 살인마는 그 누구도 아니어야 하는 모순만이 가득한 것도 좆같다.
고기는 옥상에서 떨어져서 대략적으로 치워버렸습니다….
잘하네. 우지.
뜸을 들이는가 싶던 그가 기분 나쁘게 이죽댄다. 어서 돌아가고 싶었다.
배신자 색출 작업은 하고 있는 거야?
숨이 경직된다. 배신자. 언제부턴가 조직 내 업자들의 모습이 한둘씩 보이지 않기 시작했다. 나는 그들의 얼굴과 이름조차 모르므로 그들이 남기는 잔향마저 찾기 어려울 지경이었다. 이에 보스는 조직 내에 무조건 배신자가 있을거라 굳게 믿어 나한테 마지막 지시로 배신자를 찾아내어 사살하라는 일을 내렸다. 사실, 다 때려치우고 그를 먼저 죽여버리고 싶었지만, 그가 조건으로 내세운 최후의 약속이 마음에 걸렸기에 명령을 받았다. 자신이 떠나겠다는. 그 망상 속에서 혼자 즐기던 나와의 연애를 끊어주겠다는 약속에 현혹되는 바람에.
하고 있으니까 내 이름 부르지 마.
급하게 수화기를 던지듯 내리꽂고는 집을 향해 달렸다. 들어와 바로 너를 찾으러 다급하게 방문을 열었을 때 너는 시간이 멈춘 사람처럼 보였다. 전등을 향해 손을 뻗은 채 누워있는 너를 다가가 발로 밀었다. 효과가 있는지 너는 바로 응답한다.
보고하고 왔어? 걔가 뭐래?
별말 없었는데.
그래. 너는 상체를 일으켜 얼핏 부엌이라 짐작 가는 곳을 가리키며 말한다. 밥은 저쪽 냉장고에 있어. 전부 록산나가 주고 간 거고……. 먹고 싶으면 마음대로 꺼내 먹어. 나는 신경 안 쓰니까. 나는 알려준 방향대로 걸음을 옮겨 냉장고에 있는 콘샐러드 통조림을 하나 꺼내 식탁에 올렸다. 그러자 네가, 그것만 먹으면 배고파, 라고 덧붙인다. 너는 일어나서 냄비에 들어있는 차갑게 식은 국을 데웠다. 어차피 신경 안 쓰는 사람의 행위는 아닌 듯했다.
몇 번의 살인과 몇 번의 기록은 굴레처럼 계속 행해진다. 나는 여러 번의 기억-기록-출력-보고-다시 기억하는 일련의 경로에 지쳐 쇠했다. 권호시는 이따금 일이 없는 날이면 씨발, 바다 보고싶어. 라고 종종 중얼거렸다. 바다가 왜 보고 싶냐 물으면 애련한 대답을 내놓았다. 한 번도 가본 적이 없거든. 하며 피우던 담배를 지르밟는 너는 불꽃을 품은 필라멘트처럼 타들어 가기 위해 연명한다. 하지만 그것은 다른 행위에 곧잘 묻혔다. 어느 날부터 너는 나에게서 합당한 이유를 찾으려 작위하곤 했다. 내가 살인하는 거 있잖아. 보면 어때? 뭐 감상평이라도 얘기해줘? 나의 말에 권호시는 적당히 손사래를 친다. 아니 아니, 싫으면. 안 따라다녀도 돼……. 여기서 깨닫는 게 하나 있다. 너는 거짓말을 못 한다. 마음이 들키면 곧 부끄러운 듯이 웃고 또 무의식적으로 반복했다. 발개진 볼을 되레 감추지 못해서 순진하다. 권호시는 일에 재미를 붙였는지 그 연유로 내게 과시한다. 죽이는 거 어때? 자랑인 듯했다. 그러나 나는 무덤덤하다. 그럼 권호시는 다시 질문을 바꾼다. 너는 이 짓을 왜 해? 내 대답은 가히 반사적으로 출력된다. 조직에 충성하려고. 그래야 돈을 많이 주거든. 나는 돈 버는 방법을 안다. 청부살인을 하는 권호시는 조직에선 가장 하층 한 계급에 속했다. 근데 우지야…… 너도 살인은 해보지 않았어? 의자에 앉아있던 권호시가 일정히 비소하며 천천히 일어나 가까이 다가온다. 씨발. 낮은 읊조림으로 내가 요동치자 너는 나를 따라 읊조렸다. 씨발, 바다… 보고 싶지? 너도. 따듯한 숨과 말이 얼굴에 닿아 간지러운 것이 씻고 싶었다. 턱을 들어 올린 너는 내 입술을 문다. 미지근하던 열기가 발현하여 온몸을 휘감았다.
그래서 나는 이쯤에서 새로운 인물을 마주하기로 한다. 권호시가 일을 하러 나간 사이에 나는 반대 방향으로 걸었다. 거리는 어딜 가나 찌든 식료품과 썩은 가축 냄새가 진동하는 판이다. 코를 막고 걸었다. 얼굴도 모르는 배신자를 찾아야 했다. 그러려면 조직의 문양이 박힌 반지를 낀 손가락을 찾아내면 된다. 업자들이 서로를 알아보는 표식. 표식이 있는 한 우리는 서로 살해하지 않는다. 생태계에는 암묵적인 규칙이 있다고 언젠가 보스가 했던 말이었다. 지나쳐가는 사람들의 손가락을 주시하며 걷던 중에 저 멀리 불이 꺼질 듯 말 듯 한 콘크리트 가벽의 작은 가게가 눈에 밟혔다. 나는 홀린 듯이 그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붉은 조명이 안 어울릴 정도로 뚜렷하다. 이마에 식은땀을 줄줄 흘리는 남자는 육肉을 두드리다 중얼댄다. 아 지독하다 지독해. 정육점에서 일하는 그의 이름은 강량이었고 나는 고기를 한 근 사가기로 했다.
가죽이 벗겨져 사방으로 뜯어지는 고기의 해체를 지켜보다가 우연히 네 생각이 났다. 너는 고기를 어떤 식으로 죽일까? 물론 진짜 고기 말이야. 핏빛이 영롱한 칼을 쓸던 그가 목장갑을 벗어놓는다. 순간 반짝거리는 반지가 눈에 띄었다. 입을 열었다. 퇴색한 광둥어로 이뤄진 담화가 몇 분간 의미 없이 오간다. 내 이름을 그에게 알려주었더니 그는 고개를 갸웃하며 우지, 어디서 들어본 이름 같아요. 라고 했다. 나는 흔한 이름은 아니죠. 여기서는… 하며 대신 뱉고 싶은 말을 속으로만 참았다. 당신이 섬기는 그 새끼 전 애인, 그 우지가 나거든요.
이번엔 남자가 말한다. 여기마귀가있대요. 그가 다른 칼로 냉동고기를 썰며 색다른 이야기를 꺼낼 때 나는 네 생각이 들었다. 말 없는 나를 무시한 채로 남자의 말은 일방적 직진한다. 사람을죽이는검붉은빛마귀가. 나는 너의 눈동자를 생각한다. 어떻게죽이는지아무도본사람이없대요. 칼을 휘두를 때마다 번뜩이는 눈동자. 사람은자꾸사라지는데……. 너를 생각한다. 우지씨마귀가있을까요? 남자는 내 이름을 강조했다. 근데 우지야 너도 살인을. 아, 권호시 생각을 죽일 수 없다.
록산나가 나 예쁘다고 했었어. 권호시가 일방적으로 나를 안으며 말을 걸어온다. 언젠가 록산나가 네가 일을 잘한다며 볼에 수도 없이 뽀뽀하고 칭찬 세례를 퍼부었다고. 덧없는 웃음이 잇새로 삐져나와 나는 마음에도 없는 말을 했다.
부럽네.
누가, 록산나가?
권호시가 재깍 되묻는다.
아니 네가.
그러자 권호시의 얼굴은 폭발하는 화산보다 빠르게 굳어간다. 나는 그것에 약해졌다. 그래서 권호시의 목에 팔을 둘러 입을 벌렸다. 고개를 꺾으며 입술을 핥았더니 권호시는 애처럼 어리광을 피웠다. 어디 갔었어, 나 감시 안 해? 묻는다. 그래서 나는 밖에서 있었던 일들을 전해주었다. 강량을 만난 얘기, 고깃덩어리가 분해되어 네 생각이 났다는 얘기. 그러자 권호시가 웃었다. 바다 보고 싶다고 말하며 차가운 손을 내 윗옷의 밑에서부터 안으로 집어넣었다. 덕분에 나는 온기를 빼앗기느라 내장까지 차가워진다. 권호시는 내 늑골을 하나씩 센다. 권호시의 몸에선 타인의 피 냄새가 진동하여 짜증이 났다. 네 피 냄새는 한 번도 맡아보질 못했는데. 멈춰있던 필라멘트가 연소 작용을 일으키는 바람에 나는 권호시를 넘어뜨리곤 윗옷을 아예 벗겨냈다. 권호시가 꺄륵거리며 웃는다. 퍽 난도질하는 기분이다. 나는 목을 물었다. 키스 자국을 만든다. 화상을 입은 것처럼 온몸이 맹렬히 달가워져 기억을 잃을 뻔했다. 필라멘트…불꽃…연소…그리고 너. 머릿속에서 단어들이 연쇄되어 우리의 상생 궤도를 빙빙 돈다.
근데 우지야….
어.
록산나도 떠났는데 너도 떠날 거야?
모르지.
떠나지 마.
응.
근데 우지야….
응.
너는 왜 널 사랑하냐고 안 물어봐?
어?
한 번쯤은 물어볼 수 있잖아.
나는 나는 나는. 입도 열지 못하고 입안에서만 단어들을 머금었다. 너의 머릿속에서 부레가 침식한 물고기가 된다. 나는 그저 삶의 단맛을 조금이라도 느끼고 싶었으니까. 그것으로 죽지 않겠구나 간주했으니까. 네가 내 늑골의 개수를 세듯이 나도 습관처럼 내 수명을 따지니까. 하지만 너는 사랑이란 걸 할 사람이 아니라서 나는 생에 아주 적은 단편의 단맛이라도 만족하는 게 다였다.
나는 더 이상 종이에 기입 하지 않는다. 기록은 중단되고 죽었다. 권호시는 자기 일을 계속한다. 원체 그것밖에 없었으나 너는 창조란 옛날부터 으레 싫어하는 일로 여겼다. 나는 이제 너를 따라다니지도 감시하지도 않는다. 대신 직접 소설을 지어내어 보고한다. 언제는 우리 둘이서 종일 섹스밖에 안 했지만 나는 빈민굴 지하에 사는 왕 아무개를 본부대로 죽여 매장했다고 진술하였다. 매 밤 우리가 감수하는 것은 단 하나. 감정을 억누른 채로 마찰하는 서로의 살결이었다. 그 살결은 살殺의 결結. 죄를 짓는다는 뜻이다.
보스로부터 연락이 온 건 반달이 뜬 어느 동요한 저녁쯤이었다. 나는 방 안에서 수화기를 들었고 전화 너머로 그가 던지는 의문을 고스란히 맞이했다. 권 군을 감시하는 것도 좋은데, 배신자 말이야. 내가 널 보낸 이유가 그건데 아직도 왜 소식이 없어? 그의 물음에 나는 자문한다. 맞다, 나는. 그러나 그가 내 대답을 들을 새도 없이 말을 잇는다. 혹시 권 군이랑 연애라도 하는 건 아니지? 그의 입에서 나온 단어들은 조악하여 어처구니가 없다. 아니니까 헛다리 짚지마. 비웃었다. 조직 내 연애는 금지인데. 너랑 나는 빼고. 씨발, 제발 좀 닥쳐! 더부룩한 음성이 막을 틈 없이 흘러나온다. 왜 우리 좋았잖아. 씨발 좆같은 소리하네. 혹여나 거짓 소문이라도 나면……. 헤아릴 앞 날이 없다. 씨발, 너 만나면 네 혀부터 잘라버릴 거야. 내 목소리가 맥 없이 떨린다. 씨발, 우지야. 네 옆에 있는 새끼부터 조사해봐. 내가 뭐 때문에 너를 걔한테 붙인 건데. 응? 제 화에 못 이겨 어설프게 지껄이는 그의 말소리가 꽤 우습다. 아니면 그냥 하는 말이 우스운 걸지도 모르겠다. 오지랖 떨지 마. 권호시가 스파이면 여태 나를 왜 안 죽였겠어. 나는 분격해서 전화를 끊었다.
집에 연락 올 사람이 있어?
밖에있는 전화부스가 아닌 집으로 걸려온 전화가 의아했는지 네가 순진한 얼굴이 되어 방 안으로 들어온다. 혹시라도 통화 내용을 다 들은 건 아닌가 하는 불안함이 검은 안개처럼 엄습하였지만 나는 차마 누구냐고 묻는 너의 말에 답하지 못하고 반문했다.
혹시, 청부업자들 사라지는 거 알고 있었어?
나직하게 말하는 나를 마주 보며 네가 되묻는다.
글쎄, 근데 우지야….
너의 시작은 언제나 내 이름을 부르고 나를 부정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했다. 나는 이럴 때에도 실재함을 감지한다. 하여간 모두 애석하다.
이거 네 거야?
시선을 내려 네가 들어 올린 손에 잡힌 무언가를 본다. 권총이었다. 씨발 이게 왜 너한테. 배신자를 찾으면 즉시 사살하라는 명 때문에 가져온 건데.
너 그거 어디서 찾았어?
내가 먼저 물었잖아.
너의 단호한 어투에 나는 사색이 되어 네 손에 들려 있는 총을 뺏으려다 멈췄다.
왜 갖고 있어? 이건, 청부업자들도 사용 못 하는 거잖아. 너 같은 감시자가 이런 무기가 왜 필요해? 너 혹시 조직에 사살할 사람이라도 있어? 아니면…….
조곤조곤히 따지는 너는 조금의 움직임도 없었다.
처음부터 나 감시하려고 한 이유가, 청부업자들이 일 똑바로 하는지가 아니라 조직에 스파이 있다고 소문난 거… 그거 때문이야?
권호시는 나에게만 침착했다. 이런 류의 친절은 나를 목메게 한다. 그러나 결말을 향해 달려가는 영화의 각본처럼 대답은 틀림없이 정해져 있다.
어. 맞아.
그래.
너는 미묘하게 입꼬리를 올린다.
그럼 나도 알려줄게. 나, 이거 네 가방에서 찾았어. 왜냐면 내가 그 스파이거든.
이럴 때 쓰는 단어를 안다. 경계 혹은 부주의. 혹은 다음과 같이 칭할 수 있다. 지나치게 충성하는 염세주의자와 반란을 행하는 유미주의자. 나는 경계하지 못한다. 경계하지 못해서 즉각적으로 머릿속 회로가 번쩍거리며 돌아가는 탓에 정신이 얼떨떨하여 흐려졌다. 문득 그 과정을 멈추려는 듯 다른 장면이 펼쳐진다. 나를 보던 피사체의 프레임. 왜 널 사 랑 하 냐 고 안 물 어 봐? 나는 내 상념 안에 오롯이 너를 담아 둘 수 없었다. 그렇다면 네가 뭘 할 수 있는데. 너는 사랑을 할 수 있을까, 죽음의 문턱 앞에 서 있는 네가, 하루하루를 피와 어울리며 필라멘트의 속성을 띄는 네가. 네가 사랑을 할까. 너는 과연 사랑을.
보스가 할당해 준 사람들, 나 못 죽였어. 내가 죽인 애들 다 우리 조직 새끼들 죽인 거야. 걔넨 내 얼굴도 모르더라. 너도 걔네 얼굴 모르지? 너는 보스 그 새끼 옆에만 있었잖아.
네가 내 손을 잡아 권총을 쥐여주며 자신의 심장에 갖다 대 경로를 선회하던 내 난잡한 사고가 정지한다. 나는 숨을 죽여 너를 관조할 수밖에 없었다.
너 돌아가려면 나를 죽여서 데려가야 하잖아. 우지야. 차기 보스는 너니까.
권호시는 나를 알고 있다. 감시자라는 임무 안에 배신자 사살이라는 목표를 숨기고 있던 것도, 보스의 전 애인이라는 것도 다 알고 있었음이 틀림없다. 모두 알고 있는 상태에서 연기하느라 개고생 좀 했겠다. 언제부터였을까? 우리가 만나기 전부터 또는 내가 록산나와 한국에 있었을 때였을까? 그것도 아니면 네가 살인조차 몰랐을 때? 그런데 호시야……. 내가 원하는 다음의 각본은 이게 아니란 말이야. 나는 너의 친절을 담지 않을 거라서 서랍에 있는 나이프를 찾아 꺼내 들었다.
야. 네가 죽여. 처음부터 그 새낄 없애버리고 싶었던 거라면 오른팔인 나도 죽이고 싶었겠네. 어떻게 참았냐. 그동안. 자, 대봐. 여기 찔러봐. 여기가 대동맥이야 알아? 그럼 바로 죽어.
칼을 수평으로 목에 들이댔다. 너는 나를 죽일 때 맹렬한 호안으로 나를 응시하며 칼을 꽂을까. 나를 죽일 때 너는 어떤 눈으로 나를 봐줄까. 한참을 사색하다 달뜬 숨이 불규칙하게 내쉬어졌다. 네가 소리 없이 나를 껴안았기 때문이었다.
나 떠나지 말라고 했잖아.
너의 얼굴이 나와 조금의 거리를 두고 말한다. 곧이어 서로의 입술이 맞물려 애틋함이 파도처럼, 이내 내장까지 밀려온다. 네가 나의 목에 대고 있던 칼을 나락으로 떨어트린다. 아… 너는 왜.
사랑을
타살률 백 퍼센트. 마지막 장에는 네 이름 옆에 그렇게 썼다. 앞에서 스무 명 가까이의 목숨을 끊었지만, 다음이 없으므로 이제야 결말을 그린다. 예고는 한참 전에 마쳐서 변할 것이 없다.
살인청부업자 권호시가 스파이임이 판명되어 오늘 사살한 뒤 보고하겠습니다.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보스의 만족스러운 웃음 뒤로 우린 각자의 연장을 챙겼다. 처음 왔을 때 입었던 정장을 입었다. 우리는 더이상 시체의 냄새도 나지 않는 골목을 따라 목적지인 최후의 살해를 향해 발을 내디뎠다.
조사 하는 데만 거의 일 년이 가더라. 계획을 다 짜고 나서 록산나가 너를 데려왔는데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알아? 글쎄. 나는 고개를 내저었다. 얘가 사진으로만 봤던 보스의 오른팔이구나. 이지훈.
뜻밖의 이름을 들었다. 잊고 있었던 나의 존재가치가 꽤나 비릿하다. 나는 내 이름을 버렸던 시간 동안 분개하지 않았던 것이 괴로워서 쓰러질 법하기에 너의 팔을 꽉 잡았다. 빛 한 줌 없이 복도처럼 이어진 골목은 끝이 없어 워낙 답답했다.
나는 언젠간 꼭 너를 죽이려고 했어, 지훈아. 보스가 너를 죽이라고 했거든. 그 새끼, 어느 정도 눈치는 있더라. 걔는 나를 시험하려고 했던 거야. 내가 만약 그 명령을 안 듣겠다 하면 다른 놈한테 그랬겠지, 권호시를 죽이라고. 내가 반란을 일으킬 것을 아니까.
미처 생각지도 못한 부분이었다. 마지막 의뢰의 살인 대상이 나라니. 룰렛처럼 돌아가는 판이 가소로이 읽힌다.
그래서 그냥 너랑 보스를 죽이고 다음에 나도 죽으려고 했어. 숨을 끊고 싶었거든. 그래야 좀 편할 것 같아서. 그랬는데, 네가 나보다 더 죽고 싶은 얼굴로 그랬잖아. 조직에 충성해야 한다고… 실은 너한테 묻고 싶었어. 왜 자꾸 죽을 것처럼 구는지. 그래서 내가 너는 살려야겠더라.
집실이라 칭하는 조직의 소굴은 지하에 갖춰져 있다. 보스는 좁혀오는 수사망에 부하들과 함께 황급히 몸을 우림성으로 옮겼고, 그 선택은 오로지 그의 결단이었다. 인구밀도가 비상식적으로 높은 도시의 특성을 이용한 합리적 선택이라고 보지만 그는 한 가지를 놓쳤다. 도시를 거치는 사람이 많은 만큼 져야 할 책임과 변명이 수백여 가지가 넘는 것. 멍청한 부하들만이 무지의 상태로 그를 따른다.
하나, 둘. 몇십 개의 계단을 내려오면 보이는 철문을 발로 힘껏 찼다. 절제하며 안으로 들어가는 틈에 반동으로 인하여 문이 쾅 하고 다시 닫힌다. 다소곳이 자리에 앉아있던 보스가 큰 소리에 놀랐는지 감고 있던 눈을 떠, 우리의 시선이 마주쳤다. 나는 다리를 뻗어가며 한걸음 씩 내부를 전진한다. 동시에 눈으론 그를 쫓았다. 그가 당황한 얼굴로 거구의 몸집을 일으키는 순간, 보란 듯이 총구를 겨눈다. 애써 상황을 이해하려고 구겨지는 그의 표정이 승리를 예감한 마작 패처럼 재미있었다. 한발, 두 발. 총알이 총구를 통해 뻗어 나가 그의 심장 부근에 정확히 안착하여 그만 몸뚱이가 중심을 잃고 미끄러진다. 그 사이 권호시는 부하들을 처리하고 있었다. 한 놈의 목을 뒤에서 잡고 비틀어 꺾어 버린 후 팔꿈치로 명치를 가격하여 놈은 너를 놓친다. 나는 재빨리 쓰러지는 놈의 몸에 두 발, 다리와 몸통에 총알구멍을 만들었다. 다른 한 놈이 달려드는 탓에 권호시가 주머니 속의 나이프를 꺼낸다. 반짝거리는 나이프가 여러 차례 놈의 목에 흠집을 냈다.
지훈아, 총!
내가 총을 던지자 잽싸게 한 손으로 받은 너의 손에서 총이 한 바퀴 회전했다. 너는 웃으며 나이프를 바닥으로 밀어 전달한다. 받아. 내가 급하게 나이프를 줍는 동안 권호시는 문 옆에 서서 상대를 기다리고 있었다. 문 틈새로 찌든 기름 냄새가 스며들어와 바로 주위를 돌아보며 환기한다. 위층 기름창고가 있는 곳에서 누군가 내려오는지 발소리가 더욱 커진다. 한 명 두 명 세 명……. 씨발, 대체. 그때, 막 권호시가 고개를 돌려 뭐라고 말하는 탓에 그의 입 모양을 읽었다. 몇 명이나 있어? 나는 머리를 굴린다. 덧셈에 덧셈. 아무리 머리를 쥐어짜서 연산해보지만 송출되는 건 계산오류뿐이다. 보스는 단지 소수의 부하를 데리고 온 것이 아니라 아예 본 거처를 우림성으로 잡은 모양이었다. 우지, 우지, 보스. 부하들이 섞일 수 없는 이름을 수군거리며 계단을 내려온다.
너의 손을 잡아끌어 책상 밑으로 숨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우리는 도피했다. 보스의 시체를 옆에 두고 쭈그려 앉아서. 더러운 시멘트 바닥과 함께 그의 피가 줄줄 새어 흐른다.
권호시 미안.
나는 한 손으로 너의 옆 어깨를, 다른 손으론 네 입을 가렸다. 조금의 숨소리라도 나면 들키는 건 금방이었다.
이렇게 될 줄은 몰랐는데.
이렇게 됐네.
내 조용한 속삭임을 관전하던 너는 말꼬리를 잡으며 나직하게 읊조린다. 그리곤 입을 덮은 내 손을 떼어내어 손바닥에 무언가를 그렸다. 때마침 닫혀있던 철문이 격파되어 부하들이 쏟아져 들어온다.
영永?
써진 한자의 마지막 글자를 기억하나 앞의 두 글자가 상쇄되었다. 혹시라도 잘못 본건가 싶은 생각이 들어 나는 또 손바닥을 내밀었다. 그러나 너는 대신, 나의 뒷목을 당겨 귓가에 속삭였다.
권순영, 내 이름 권순영이야.
그 말을 끝으로 너는 총을 집어 들곤 일어나 앞 쪽에 있던 부하 넷을 차례대로 연사 하며 쓰러트렸다. 네 시선에 닿지 않은 몇 놈들은 그 사이 내가 있는 쪽으로 달려들어, 나는 단숨에 바닥에 놓아둔 칼을 집었다. 권순영의 칼. 수십 어쩌면 수백여 명의 목숨을 앗아간. 나는 태연하게 몇 놈의 급소를 찾아 찌른다. 찌르고 쏘고 후벼 팠던 총격전이 끝나고 남아있는 놈들을 빠르게 쫒아 센다. 이 과정에서 몇 명이 도망가는 바람에 결과적으로 마지막 남아있는 한 명에게 네가 총구를 들이밀었다.
다, 다시 올 거야. 너네 스파이짓 한 거, 다! 보스한테 일러바칠 거야. 또라이같은 놈들… 이, 일도 아니지 씨발.
말을 남긴 부하는 뒷걸음질 치며 사라진다. 무의식적으로 다리를 옮기니 흥건한 핏물이 발에 차였다. 권순영과 눈이 마주쳤다. 구워지듯 온 몸에 소름이, 거듭 폐가 역동하기 시작한다. 너는 나를 응망 하다 지나쳐 죽은 보스의 시체를 확인했다.
얘가 아니야.
헐렁한 실리콘 가죽을 벗겨 올린 권순영의 손 아래로 의문이 남성이 눈을 부릅뜬 채 죽어있다.
확실히 해야 한다. 암흑뿐인 이 지역에 몇 놈이 부하로 있는 건지, 얼마나 더 죽임을 당해야 갑갑한 클리셰가 끝날 건지. 나는 고민 끝에 밖으로 달려나갔다. 뒤에서 내 이름을 부르는 권순영을 무시한 채 계단 옆으로 몸을 틀었더니 예상과 다르게 보스가 튀어나온다. 황급히 뒷걸음질을 쳐보나 금세 따라 잡혔다. 그는 내 관자놀이에 총을 갖다 대고 등을 밀며 입장했다. 의지와 상관없이 머리가 어지러워 앞이 흐려진다. 결국 함정에 걸렸다.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이질적인, 함정. 보스를 따라 부하 몇 명이 더 쳐들어오는 바람에 너는 금방 경계태세를 취한다.
똑같은 것들끼리 하는 짓이 가관이네, 보스가 소리친다. 어. 우리 똑같아서 좋아. 권순영은 이에 금방 대척한다. 얘 죽이면 어쩔 거야? 보스가 실실거리며 묻는다. 나는 곧 죽을 듯이 그의 팔 안쪽으로 목이 조인다…… 너 걔 사랑하기나 했어? 라고, 네가 질문한다. 질문을 들은 직후에 반문하여 부정하는 것이 너의 특기인 것처럼 너는 과거의 의문을 송두리째 뱉어내 버린다. 심장이 터무니없이 조여들었다. 나는 가라앉을 수 없다. 두 무기의 대립이 벌어지는 형세에 관중은 턱없이 적었다.
그 순간, 눈 깜빡할 사이 보스의 양옆에 진을 치고 있던 부하들이 끔뻑 쓰러졌다. 내 비워진 시야에 들어온 금발 머리가 눈에 띄게 윤이 났다. 뒤에서 나타난 록산나가 그들의 팔을 꺾고는 발로 힘껏 몸을 차 버리니 한 명씩 대거리하지도 못하고 픽픽 쓰러졌다. 뒤이어 권순영이 총알을 분사한다. 나를 살짝 빗겨나가게. 보스를 향해 쏜 총알이 그의 허벅다리를 스쳐 지났다. 이에 놀란 그가 팔을 내저으며 떨어지는 틈에 빠져나올 수 있었다. 후들거리는 다리를 지탱하며 네게로 뛰어들어 너를 안아버리고 싶었지만 너는 총을 놓지 않았다. 록산나는 오랜만이라는 인사를 허공에 날린 후 나이프를 꺼내 달려드는 부하들의 목에 꽂았다. 꿈틀대며 영위하는 꼴이 볼품이 없다. 나는 잠시 그 자리에서 정신을 뺏겼다. 순간 보스를 떠올린다. 어디로 갔지. 사라져 버린 그를 찾으러 방황하다 시선이 닿은 곳은 소파 위의 총. 소파 뒤로 몸을 숨긴 보스가 권순영을 향해 그것을 들어 겨눈다. 걷잡을 수 없는 일대일 상황이다. 권순영이 간신히 뒤를 돌아 피했으나 동시에 손에 들려있던 권총을 그의 총알이 직구 하여 통과해버린다. 따라서 네가 총을 놓쳐 데구루루 날아간 총이 갈기갈기 찢어졌다. 보스는 승전을 예감하는 미소를 짓는다. 그러나 곧 네가 우다닥하는 구둣발 소리를 내며 소파를 짚고 거의 날다시피 뛰어올라 보스의 머리를 발로 찬다. 그는 그 힘에 밀려 나가떨어졌다. 몰려오는 부하들을 저격하는 록산나. 록산나의 사냥은 불을 내뿜는 화약과도 같았다. 뭐든지 한 번에 처리한다. 그녀는 총을 재정비하여 재킷 주머니에 넣었다. 아니, 넣으려다 다시 뺀다. 호시, 도와줄까? 묻는 록산나는 걱정하는 얼굴이 아니다. 이 상황에 권순영은 총을 놓쳐서 기어가는 보스의 멱살을 잡아 내동댕이쳤다. 척추가 뒤틀렸을 것이다. 시멘트 바닥의 마찰음이 공명한다. 총을 잃은 너는 무장하지 않은 알맹이의 원형이었다. 그의 손가락에서 반지가 떨어져 나와 바닥을 사정없이 뒹굴었다.
발치까지 굴러온 반지를 주워 새끼손가락에 끼우니 알맞게 위치한다. 잇새로 딱 적당한 크기의 웃음과 허망함이 새어 나온다. 나는 무릎을 굽힌 채로 기침을 토하는 그에게 잘 들릴 수 있도록 몸을 숙였다.
우리가 서로 죽이는 그림을 그렸지? 재밌지, 그런 생각 하니까. 그런데 어떡하냐. 권순영은 나를 살리고 싶다는데. 그리고 너는 갈기갈기 찢어 죽여버리고 싶대.
잔혹히 핏대가 선 얼굴이 흥분한 여력을 감추지 못한다. 나는 맹랑스레 응시한다. 애꿎다. 그가 추후에 어떠한 표정을 짓는다 하여도 관용되지 않을 역사만이 귀납될 것이다.
야, 권순영. 내가 너를 고용할 건데, 네가 바로 맡아야 할 임무가 하나 있거든.
권순영에게 다가간 나는 뺨과 입꼬리에 선형으로 묻어있던 핏자국을 손바닥의 가장자리 부근으로 닦으며,
저 새낄 죽여서 나한테 데려와 지금.
명령했다.
나의 반지를 응시하던 네가 눈을 감았다 뜬다. 유연하게 직항할 피사체에 별다른 미사여구를 붙이는 건 소모적인 짓이지만……,
네. 보스.
맞다. 너는 눈에 불이 있지.
너는 회답한 후 피식 웃었다. 나는 나이프를 네게 쥐여주었다. 쓰러진 자의 형태를 살피는 눈. 불을 뿜는 눈이 손에 쥔 칼날에 시선을 흘기다 찬란한 경계를 그린다. 비로소 그 눈앞의 복부를 가격하더니, 꼿꼿이 세우던 상체가 앞으로 고꾸라지려 할 때, 부하 사냥을 마친 록산나가 그의 목과 머리를 향해 두어 번 총을 난사했다. 뒤편의 깨진 창문 사이로 말도 안 되게 노을빛이 스며와 너의 얼굴에 그림자가 진다. 눈부시도록 아름다운 형상이 속절없었다. 어쩌면 유미주의자는… 나다.
네 그 잘난 망상 속에 사는 나를 제발 죽여.
피를 전부 토해낸 얼굴을 구둣발로 짓이기니 마지막으로 입만 벌린 채 아무 말 못 하는 그가 벌레처럼 사그라든다. 즈려 밟힌 얼굴은 일절의 희원도 없이 자멸했다.
록산나, 바다! 바다 쪽으로 밟아, 가자! 덜컹거리는 구연식의 오픈카를 록산나가 몰며 빙그르 한 바퀴 도는 새에 언제 나타났는지 너는 뒷좌석에 뛰어 올라탄다. 나는 반대쪽 차 문을 열고 몸을 집어넣으며 물었다. 너는 왜 그렇게 바다를 좋아하냐.
봐. 시원하고 탁 트이는 느낌. 좋지 않아? 예전부터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보려고 마음먹었던 게 바다였어.
낭만이네.
응. 그리고… 네가 옆에 있어서 좋아. 너랑 같이 바다를 볼 수 있어서.
죽었으면 어쩔 뻔했어.
그치. 내가 왜 죽어? 내가 왜? 난 못 죽어. 지금 기분으로는 나 아마 영원히 살 건가 봐. 와! 이게 당연한 건데.
기세가 아주 등등해진 권순영이 하늘을 향해 두 팔을 높이 뻗어 노을을 껴안는 시늉을 한다. 바람이 헝클어진 머리를 헤집자 싱그럽게 웃어 보이는 너는 제자리를 찾았다. 너는 비로소 달관한다.
사랑도 쌍방향인 사랑만 해야지. 혼자 하는 사랑은 내 체질이 아니야.
권순영이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려 시선이 마주쳤다. 쉽사리 뱉어낼 말이 막혀 나오지 않는다.
그럼 나를 왜.
나는 재깍 반응했다. 나는 이제껏 너한테 일방적인 사랑만 받았는데. 이것은 추측성 물음. 혹시나 하는 의구심에 눈을 이리저리 굴렸더니 너는 나를 계속 보고 있다.
너는 영원하잖아.
생각하기 전에 말하는 행위는 너의 오랜 때묻은 습관인 듯했다. 자신을 가리키며 눈웃음을 짓는 너. 덕분에 나는 인공 상태가 된 거처럼 달떴다. 달뜨고 기뻤다. 이어질 독백을 주체할 수 없는 건 과장된 행동이 전혀 아니다. 말의 의미를 간파하는 일 정도는 유년기에 익힌 재능이라 곰곰이 반추하여보니 네 말이 맞으니까. 나는 단지 너와 선명한 경계선같이 떨어지지 않고 흐릿하게 겹쳐지고 싶다. 그래. 네 말대로 나는 영원할 거라서. 맞아, 그래야 하니까. 입 밖으로 내뱉지 못하는 언어들이 유유히 머리 안을 헤엄치며 자적했다. 이제야 우림성을 벗어난다. 록산나는 허공에 손 키스를 날려 인사를 보냈다. 굿바이, 다크니스 시티. 덜컹대며 전진하는 고물 차량에 실은 몸이 기분 좋게 흔들리며 스치는 바람에 앞머리가 좌우로 휘날렸다. 끈적한 바람이 처음으로 시원했다.
네 웃음은 진한 파랑으로 뒤덮힌 어떤 해양보다도 아름다워. 그래서 나는 너와 있으면 매 순간 바다를 봐. 권순영 너도 그래? 내가 네 바다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