끊어진 기타 줄은 버리고 새 줄을 가져와야만 했다.
신곡을 올릴 수 있다 하여 고대하던 무대가 가동을 멈춘 사이 낡은 폴리에스테르 커튼이 입구를 가로막는 방 안에서 A와 B와 C는 원우가 기타 줄을 갈 때까지 기다렸다. A는 퀭한 눈으로 원우를 지긋이 본다. 본래 가진 거 하나 없이 태어난 A는 상상으로라도 부유해야만 했다. 작사를 하는 몸이라 사고의 폭을 넓혀야 하는 것이 강박이라면 강박. 회상이 버릇으로 고착된 유물. A는 생각을 카세트테이프처럼 되감기 시작한다. 줄이 끊어졌던 걸 잊고 있었다 한 것은 핑계일 게 뻔하다. 전원우가. 기타를 자기 분신이라 여기는 것 같이 애지중지하는 애가? 오히려 무슨 일이 있어서 공연하기 싫다고 시작하는 소설이 훨씬 있음 직하고 설득력 있다.
샤를. 사실 기타 줄을 끊은 건 시간을 벌려는 속셈이야. 원우는 나름 머리를 썼다. 오늘 샤를 만나기로 했는데. 자기는 앞순서라 끝나고 대기실로 오겠다 지난주에 그랬는데. 마담의 실수 혹은 착각일까? 홀에 도착하고 무대에 올라가기 전에 원우는 무대 주변과 대기실 곳곳과 지하 계단을 둘러보며 샤를을 찾았지만, 그 어디에도 샤를은 그림자조차 없었다. 오겠다 했으니 기다려야 했는데. 무대에 올라갈 순서가 다가오면 올수록 번지는 갈증에 입이 말랐다. 요 며칠간 속 시원히 풀리는 게 없다. 썩다 만 사과가 뒹구는 싱크대를 보다 인상을 찌푸린다. 방치는 이곳의 규율 같은 거였다. 문화라 하기엔 아름답지 않으니 규율이다.
다음 계획이 바짝 섰다. 샤를을 만나러 어디가 됐든 가야 한다고. 빠져나올 적당히 괜찮은 시나리오가 없을까. 돌아가는 회로 속 고민하다 떠오른 것은 원우에게는 어울리지 않았다. 미안. 기타 줄이 끊어졌던 걸 잊고 있었어.
공연을 무산시키기에 가장 쉽고 빠른 방법은 시간을 끄는 것.
멤버들이 소리 없는 아우성으로 입을 모았다. 전원우 왜 줄 끊어진 것도 몰랐어. 바보냐? 공연 직전에 숨겨놓았던 베이스기타를 꺼내자 C가 한 말이었다. 마지막 무대라 바꿀 순서도 없어. A가 툴툴대는 동안 원우는 샤를이 등장하기를 기다렸다. 시간이 없는데. 그러던 그때 원우가 시간을 세며 천천히 줄을 갈던 차에 방에 누군가 들어왔다. 샤를이 아닌 마담이었다. 어딘가에 있던 마담이 성큼성큼 방 안으로 들어온다. 하이힐을 바닥에 딱딱거리며 팔짱을 낀 채 선홍빛 조명에 물든 몸을 끌고 나와 원우의 앞에 선다. 그림자가 머리 위로 지자 원우는 줄을 놓았다. 둔탁한 스트링의 마찰 소리가 소멸하고 줄에 파동이 인다. 마담의 레드색 실크 원피스와 다 풀려 헤진 파마는 저번과 같은 모습이었으나 눈가 짙게 번진 화장이 유독 튀었다.
밖에 공연 중단됐길래 뭐하나 했더니… 원우야 너 머리 좀 쓴다?
마담이 비웃는데도 무덤덤한 원우는 일부러 아는체하지 않았다. 대신 B가 반응을 보였다. B는 마담에게 묻는다.
돈은 끝나고 바로 주는 거 맞죠.
B의 처연함. 마담은 돈 앞에서 간절한 누군가를 볼 때 형이상학적으로 행복해졌다. 실로 코웃음이 나오는 체계는 변하지 않았고 그건 원우도. A도 B도 C도, 알면서도 방치해놓을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당연하지. 내가 거짓말할 사람으로 보이니. 액수는 약속한 대로 줄게. 단, 그때 샤를보다 호응을 내지 못하면 어림없는 줄 알아.
샤를 어딨어.
샤를. 샤를의 이름이 나오자 원우가 재깍 반응했다. 날이 선 목소리는 치켜뜬 눈과 어울리는 꼴. 그런 꼴이 말이 아닌지라 어느새 소파에 기대 메니큐어 칠해진 손톱을 관망하던 마담은 원우의 물음에 허릴 접어가며 웃기 시작한다.
아하하, 어디 숨어있을 걸. 안보이는 곳에.
그 대답에 원우는 피식 웃었다가 고개를 들었다. 시선에 잡히는 마담은 뻔뻔한 얼굴로 나른함을 먹고 있고.
네가 가둬서 도망간 건 아니고?
원우가 마담의 치부를 찌르자 마담은 시선을 회피한다. ABC는 원우와 마담의 얼굴을 번갈아 본다. 원우에 의해 터져 나온 궁금증이 마담과 원우, 둘 사이에 한데 엉켜 고착되자 마담은 난처해진다. 그 양상으로 마담이 입술을 천천히 쓸었다.
너, 네 편인 사람 가두는 게 취미고 특기잖아. 그러는 거 좋아하잖아. 네 말 더 잘 듣게 교육하는 거. 그러면 인생이 더 편하게 굴러가나. 남한테 미끼 던지고. 잡아 물면 낚아채서 네 거로 만들면?
애들 앞에서 못 하는 소리가 없네, 원우야? 너 어쩌다 이렇게 됐니.
길게 난 손톱을 매만지며 한탄하는 마담은 미끈거리는 허물을 뒤집어 쓴 뱀 같다.
어쩐지 요즘에 걔 걱정만 하더라. 걔는 네 걱정 안 하는데. 설마 질투 나니?
오늘 공연 못 해.
원우는 충동적으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니네들 기타 줄 튕겨서 푼 돈 받을 때 걔 주머니에는 몇십이 꽂히니까 질투나?
긴 혀를 내두르는 뱀. 원우는 신경질적으로 기타를 바닥에 내버려 둔 채 발걸음을 뒤로했다.
어디가.
샤를 찾으러.
샤를 도망 안 갔어.
성큼성큼 걸어 녹이 슨 커튼을 젖히고 나가려다 마담의 말에 발목이 잡힌다. 마담은 원우가 미처 자기 말을 못듣고 사라질까봐 다급히 말로 막아세웠다. 샤를이라는 이름에 잘 길들여져있는 원우의 발목을 잡는 일은 쉽다.
집에있어. 몸이 좀 아파… 뜨겁고. 어제부터 열나는 것 같더라니 몸살 인가봐. 네가 간호 좀 해.
뒤를 돌아 본 원우는 그러나 무감하고 무신경하고 무채색이었다. 단지 손을 떨었다. 마담은 이번엔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멤버들은 멀뚱히 서있기만 했고 그 누구도 차마 원우를 잡지 못해 그날의 공연은 시작도 못하고 끝이 났다.
나 누구 뒤치다꺼리하는 사람아닌데.
마지막까지 반항이었으나 그래도 원우의 발은 마담의 집으로 향한다.
차가운 집 안으로 들어오자 감도는 공기가 서늘하고 벽은 우울함에 채워진 듯 하얗고 쓸쓸해 보이는 오래된 텔레비전은 시끄러운 화면을 송출하다 지지직거리고 어지럽혀진 옷가지들과 술잔은 마담 거가 분명하고… 원우는 익숙하듯 황량한 그림을 스캔하다 그 자리에 멈추어 선다. 볼 때마다 안쓰럽고 안쓰러웠다. 이게 사람 사는 집이야? 설거지조차 안되어있는 집안에 원우는 연민을 끌어온다. 잠시만. 그렇다면 샤를은 또. 방치되어있는 작은 방의 문을 열었다. 엉켜있던 뜨거운 공기가 얼굴에 확 닿는다. 바닥 온도가 너무 높았다. 마지막으로 환기를 한 게 언제일지 모를 정도로 눅눅하고 답답할 뿐이다. 이불 밖으로 나온 붉은 두 발이 처연했다. 문 여는 소릴 들었는지 샤를이 푹 뒤집어쓴 이불을 젖혀 빼꼼 고개를 내민다. 끈적거리는 장판과 한 몸이 된 지 오래라 열이 오른 얼굴은 황당하게도…….
오랜만에 본 거다. 쓸데없이 좋았다.
화장실에서 건져온 수건에 싱크대에서 물을 묻히고 물기를 털었다. 바짝 돌려 짠 수건을 이마 위에 올려놓자 실눈 아래 입꼬리가 올라간다.
왜 왔어. 할 일 없어?
장난기가 잔뜩 묻어있는 음성.
미쳤네. 전원우가 이런 짓도 하고.
샤를은 천천히 눈을 뜬다. 핼쑥한 볼이 낯선 샤를. 샤를의 공간은 폐쇄적인데 샤를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듯했다. 원우는 샤를의 후드집업에 손을 댄다. 턱까지 꽁꽁 감싸고 있는 후드집업의 지퍼를 내리자 발갛고 긴 줄 자국이 남은 목 부근이 눈에 띄었다. 목 아래로 뻗어나오는 깔끔한 쇄골. 그것도 쓸데 없이…….
마담이 얼마 준대?
침묵을 깨고 샤를이 묻는다.
이런 거 한다고 돈 안 받아.
원우는 수건을 들어 흐트러진 샤를의 앞머리에 손가락을 집어넣었다.
식탁 위에 오만원 있어, 가져가.
아픈 건 넌데 왜 내가 돈을 받아.
이해하는 척은. 너 그럴 때마다 난 더 반항하고 싶어져.
원우는 수건을 펼쳐 각 맞춰 접고 샤를의 앞머리를 위로 넘겼다. 이마에 손등을 올렸다. 대략 서른 여 일곱에서 여덟에 가까운 열이었다. 더 차가운 무언가가 필요했다. 바닥에 손을 딛고 몸을 일으켰는데, 느릿하게 두 눈을 깜빡이는 샤를과 시선이 맞닿았다.
나한테 하지 말아야 할 거 열 가지만 만들어 줄래. 다 하고 희열 좀 제대로 느껴보게.
야, 샤를.
야, 전원우.
이불 밖으로 뻗어 나온 샤를의 손이 원우의 발목을 잡는다.
나 너 울리고 싶어.
미친놈….
샤를이 씩 웃는다. 마담의 농간에 이리저리, 하루하루 모습이 바뀌어도 전원우에게만은 풀리지 않는 매듭. 그것이 샤를이었다. 전원우의 연민을 먹고 사는 샤를은 원우의 머리 위에 있다. 어떤 식으로 살면 자기를 불쌍히 여겨주는지 잘 알았다. 마담 앞에서 하지 못할 반항도 원우가 나타나면 그림은 달라진다. 원우의 그림자가 비칠 때부터 샤를은 샤를이 아닌 다른 사람을 연기한다. 레디, 액션 하면 머리가 띵. 전원우의 삶이 씁쓸함을 고증하는 백 분짜리 필름 영화 각본처럼 굴러간다. 그렇다면 주연은 샤를이고. 샤를 옆의 조연 전원우는 연민하고 연민한다. 또 자기도 연민한다. 신파. 이런 류의 신파. 이정도의 신파라면 법적제재가 필요하다고.
<순영>
샤를 태초의 본명은 순영이나 이를 들킨 적은 없다. 오로지 소수의 사람만이 샤를의 내막을 안다 하는 마담에게 알음알음으로 그 본명을 전달받을 수 있었는데 여기에 원우는 끼지 못했다. 낄 수 없었다. 샤를의 세계는 마담이 구축하여 쌓아 올린 세계, 평준화되어야 할 일상을 무시한 채 흘러가는 전개였고 마담은 샤를을 자기가 만들어놓은 둥지 안에서 꿈꾸게 했다. 강제적으로, 그리고 전부 마담의 손으로.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하던 순영은 열아홉의 끝자락에 있었다.
모기도 다 떨어져 나가던 초여름 밤부터였다. 사람은 없었고 외곽인지라 가로등도 드문드문했다. 순영은 아침에 자고 밤엔 땀을 흘렸다. 졸린 얼굴에 식은땀이 흐르면 지갑엔 그나마 적은 돈이 쌓였다. 그렇게 살다가 아버지가 숨을 거뒀다. 그건 여름의 말미였다. 순영은 장례식장에서 아버지의 지인들을 그날 처음 봤다. 아버지가 직장에서 높은 직급이란 건 알았지만 이렇게 많은 사람과 정을 나누며 여럿 거느리고 있는 줄은 몰랐다. 집에서는 워낙 말이 없었고 학생인 자신과 다른 삶을 살았으니. 다가오는 사람들이 한 번씩 순영에게 아는 척을 했다. 순영은 그 이질감에 입술을 깨물었다. 아버지한테 얘기 많이 들었어. 얘기? 무슨 얘기. 편부모 가정에 학교는 대충 다니고 편의점 야간 알바를 해서 돈 긁어모으며 사는 얘기? 순영은 한 발 뒤로 물러섰다. 아버지는 밖에선 다른 사람을 연기했음이 틀림없다.
어느 달이 뜨지 않은 밤에 순영은 머리맡에 노트를 편 채 누웠다. 빈 집에 남아있는 건 이제 순영뿐이다. 생명력 있던 식물들은 곧 죽을 듯한 몰골이고 시계는 초침도 돌아가지 않는다. 그럼 뭘 위해서 살아갈까. 이웃집 사람들은 저마다의 손길로 순영을 어루만졌다. 걱정했다. 다친 마음을 긁어냈다. 순영은 가만히있을 뿐 들뜨지 않았다. 쟤 이제 어떻게 살아. 하는 우려의 음성만이 귀에 남아 순영은 속으로 답했다. 어떻게 살아야할까요. 손길이 떠나 간 곳에는 가시가 돋았다. 알면서도 매일 찔리고 피 흘리는 삶. 나는 공백이 무섭다. 순영은 끄적이다 펜을 놓았다.
그러다 가을의 시작점에서 순영은 아르바이트를 그만뒀다. 친구들은 쳇바퀴에서 빠져나온 것을 축하한다며 순영의 손을 잡아끌었다. 가방끈을 잡고 순영이 그들을 따라간 곳은 예상외였다. 도착해서 보니, 무대 앞이었다. 원래 순영은 돈을 모으기 전엔 춤을 췄다. 유일하게 발 담그고 있을 수 있던 마르지 않던 물가. 친구들과 하교 후 취미로 쏟아부었던 일이었고 하나뿐인 관심사였다. 춤이 순영에게 미친 영향은 그 자리에만 머물지 않아서 물가의 영역은 점점 커져 대회에도 출전하고 상을 거머쥐기도 했었다. 순영은 잠시 잊고 있던 일을, 그저 친구들이 서 있는 무대를 지구에서 멀리 떨어진 별처럼 공허하게 우뚝 서서 지켜봤다. 거기서 마담을 만났다. 쳇바퀴 속 햄스터로 살다가 마담을 만난 것이다. 마담은 새로움에 반한 낯짝인 소년에게 접근했다.
너 세상 사는 거 재미없지. 겉모습만 봐도 알아. 순영은 말을 걸어오는 마담을 쳐다봤다. 무대를 보는 자신이 눈을 빛내고 있는지도 모르는 채. 마담이 한발 앞으로 몸을 밀착해와서 순영은 마담의 눈을 볼 수밖에 없었다. 검붉은 눈화장이 햇빛 때문에 반짝거렸다. 네 영혼말이야. 내가 꺼내 써도 될까? 묻는 마담은 충분히 이상한 사람으로 보였다. 하지만 순영은 말도 안 되는 말을 잘 받아쳤다.
내 영혼 어디다 쓰게요. 다 닳아빠진 거 가져다가.
초가을의 선선한 바람이 팔목을 스치자 하복 반소매 아래가 서늘해진다. 마담은 흥미 돋은 얼굴이었다.
닳았는지 안 닳았는지는 네가 정하는 게 아니지.
그래서 장소가 바뀌고 둘은 시끄러운 카페 안에 자리한 프레임이 된다.
아버지는 뭐하셔. 마담이 물었다. 왜 어른은 아이들의 부모를 궁금해할까. 순영은 빨대를 물고있어 우물거리는 입으로 대답한다. 누워계세요. 화장터에. 그 말에 테이블에 손가락을 딱딱거리던 마담이 행위를 멈춘다. 아, 누워계셨죠. 지금은 뼛가루 되었고. 순영은 마시던 초코라떼를 다시 한입 마신다. 어머니는. 마담에게 새로운 흥미 체계가 수립된다. 몰라요. 나 낳고 돌아가셨나. 기억엔 없는데.
누나가 엄마 좀 찾아줘요…. 십구년째 아무도 안찾아줘서 나타나기 싫은가본데.
마담은 대답이 마음에 들었다. 곧장 죽을 것 같은 얼굴인 애가 눈을 빛내던게 무대 앞에서라니. 연구해보고싶었다. 키워주고 싶었다. 잘 크면 대박이 날 것 같아서. 마담은 순영에게 너 나랑 같이 일 안해볼래, 라고 했고 순영은 마담이 쥐어주는 명함을 받아들고 일어섰다. 이거 진짠가. 명함에 그려진 전화번호 열한개의 숫자. 가만히 시선을 고정하다가 주머니에서 펜을 꺼냈다. 순영은 명함을 뒤집었다. 거기에 자신의 전화번호를 써서 마담에게 내밀었다. 마담은 자기가 줬던 명함을 돌려받았고 순영은 마지막 말을 남기고 자리를 떴다.
사람은 부름이 없으면 죽는 거 알죠.
그리고 샤를의 이야기가 쓰여진다.
겨우내 밤마다 라이브 홀에 갔다. 그곳은 순영에게 제2의 집으로 전락했다. 순영은 주에 열여덟시간을 투자해 춤을 배웠고 그 대가는 눈에 보이는 결과로 다가왔다. 마담이 순영에게 샤를이라는 이름을 붙여줄 때 샤를은 마침내 교복을 벗었다. 무대용 실크 블라우스가 샤를 본연의 것처럼 몸에 꼭 맞았다.
<원우>
사실 원우는 베이스를 잡은 지 몇 개월밖에 안 됐다. 밴드 하향곡선은 이름 그대로 하향하고 있다. 네이밍을 했던 C는 '하' 가 '여름 하'라고 우겼으나 얘길 듣는 대부분의 사람들한텐 들어도 관심 없는 얘기라서 상관이 없었다. 그러나 한번 날아본 적 없으니 하향할 이유도 없다는 게 원우의 의견이다.
에이비씨와 원우는 대학교 친구들로, 밴드는 취미로 해보자 하고 시작한 일이었으나 어느새 넷에게 본업이 되었다. 잘되어야만 했다. 무조건 잘돼야만 해서 넷이 함께 사는 집의 평수가 커져야 했다. 그 과정으로 버스킹도 하고 시에서 지원하는 음악회에 신청도 해보고 짧게나마 사이트에 공연 영상도 올려봤다. 그런데도 통장의 숫자는 영 하나도 더 붙지 못했다. 그러다 원우가 우연히 마담을 만났다.
호기심에 이끌려 들어간 라이브 홀에서 처음 본 무대는 샤를의 무대였다. 환호가 컸다. 재즈 음악에 맞춰 보여주는 샤를의 움직임에 넋을 잃었다. 그러던 중, 무대 옆에서 팔짱을 끼고 있던 마담이 원우에게 접근했다. 등에 멘 기타 가방이 눈에 띄어서였지만 사실 그것만은 아니었다. 샤를의 신비로움에 홀려버린 전원우의 얼굴이 하필이면 마담의 취향이었다.
며칠 뒤 하향곡선은 마담과 손을 잡았고
원우는 주말마다 샤를을 만나게 된다.
원우의 간호 덕인지 감기 기운을 말끔히 떨쳐낸 샤를은 평소처럼 무대에 올랐다. 무대 밑에는 늘 그렇듯 원우가 있었고 원우는 한점 전에 공연을 마치고 내려온 상태였다. 샤를의 무대는 대부분 마지막 순서라서 모든 출연진이 볼 수 있는 여건이 되곤 했다. 마담과 원우는 관객들로 가득 찬 공연장 끝에 나란히 서서 대화를 나눴다. 관객들의 환호소리가 저 편으로 멀리 페이드 아웃됐다.
쟤 계속 네 곁에 둘거야?
무대 조명이 비치지 않는 어둠 속에서 원우가 정면을 주시하며 묻자 마담이 입을 연다.
쟤는 너랑 달라. 자기가 해야 할게 뭔지 알거든. 얼마전에 무대 끝나고 집에가자했는데, 그러더라… 무댈 보면서 내 집이 여기잖아라고.
뭣하러 열심히 사나 싶다. 본래 모습을 버려가면서까지 다른 사람이 되어 무대 위에 올라 연기를 왜 하나 싶다. 원우는 내향적인 분노에 기반하여 살았다. 그리고 그 분노는 샤를의 수동성에 기원한다. 머리가 어지럽고 뱃 속에 나비가 가득 들어선 것 같이 오묘한 기분이 들었다. 퍼덕거리는 날개탓에 간지러워 구역질이 난다. 원우는 문득 며칠째 기타의 행방이 묘연한 걸 기억해냈다. 속박은 끊을 수 있을때 끊어야 했다.
나 이제 기타 안치려고.
그러자 마담이 놀란 눈으로 원우를 본다.
너 가고 나서 그날 이상한 꿈을 꿨어. 온갖 행성과 별과 우주 쓰레기들이 쏟아져서 지구가 멸망하는 꿈. 샤를은 목에 묶었던 끈으로 된 초커를 풀어 옆에다 두며 말했다. 무대 위에 뻗어 격한 숨을 고르는 샤를의 옆에 원우가 나란히 누워 천장을 본다.
별 희한한 꿈이네.
그런 것도 나오는데 너는 왜 안 나올까. 나오면 열심히 괴롭혀주려고 했는데.
꿈에서까지 나 괴롭히면 진짜 열심히 사는 거네.
몰랐어? 나 너 괴롭히는 맛으로 살잖아. 너는 나 연민하는 재미로 살고.
샤를.
어, 왜.
나 나갈 거야.
어딜.
그만두게, 밴드.
샤를이 놀라 상체를 일으켰다. 누구 맘대로? 원우는 가만히 누워 있었다. 원우는 생각했다. 자기가 그럴 자격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자기만이라도 구하고 싶었다. 구원. 누구를. 마담이 만든 틀에 박제된 샤를을. 손을 잡고 뛰쳐나가고 싶었다. 꺼진 무대 조명에 알 수 없는 회의감이 든다. 원우는 천장을 보며 물꼬를 텄다. 그러니까 너도 그만해. 야, 전원우. 샤를은 어안이 벙벙한 얼굴이다. 넌 스스로 네가 웃기다고 생각 안 해? 왜 그러고 사는데 대체. 사람들한테서 긁어모은 동정이 재산이 돼? 그게 좋아? 송곳처럼 날카로운 어투다. 샤를은 헛웃음을 쳤다. 너 말 진짜 재수 없게 한다. 그 말에 원우는 샤를과 시선을 맞춰 일어나 앉는다. 내 말이 틀려? 너 그렇게 살잖아. 자존심 없잖아. 남이 뭐라도 준다 하면 강아지처럼 좋다고 꼬리치며 쫄래쫄래 따라가고……,
야.
샤를은 원우의 말을 막으며 머리에 붙인 큐빅장식을 떼냈다.
난 원래 그렇게 살아. 그렇게 살지말래도 그렇게 살아.
그리고 덧붙여 무슨 말을 하려다 삼킨다. 샤를이 떼낸 장식이 바닥에 떨어지자 날카로운 소리가 홀에 울려퍼진다. 샤를. 원우의 수명은 금세 소비된다. 포물선을 그리는 감정의 변화. 연속되는 슬픔은 그림자를 늘려 지어먹었고 그 뒤로 비상하여 수직 낙하하는 감정이 몸을 집어삼킨다. 전원우의 숨은 끝이라 칭하는 선에 달려있고 샤를이 그 선에 서있다. 그러니까 원우가 긴 숨을 뱉고 끝내려면 샤를이 원우에게서 벗어나야하는데.
샤를은 그날 마담의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 ABC에게도 물어봤으나 그들은 못봤다며 고개를 저었다. 번호를 눌러 전화를 하고 또 전화를 했지만 달라지는 건 없었다. 결국 원우는 통화연결음만 들리는 핸드폰을 홧김에 집어던졌다. 튕겨져 침대 밑으로 들어가는 핸드폰을 눈으로 쫓아가다 문득 시야에 잡히는 무언가. 침대 밑에 둔 종이 뭉치가 보였다. 손을 뻗어 핸드폰과 종이를 꺼냈다. 써있는 말을 해독했던 것이 예전일이다. 한장씩 넘겨가며 읽다가, 다시 읽다가 온 몸에 전율이 인다. 어쩌면 무기가 될, 잊고 있었던 오래된 기록을 개봉할 때. 원우는 종이를 들고 일어났다. 새장 밖으로 새를 꺼낼 수 없다면 새장을 부수면 된다.
순영이 계단에 앉아 생각한다. 이상함에 대해. 치부를 들켰는데 수치스럽지가 않는 게 이상하고 기이해서 고민해야했다. 전원우는 나를 모른다. 나에 대해 아는 게 없다. 물론 알려준 적도 없고 알려줄 마음도 없다. 그런데 전원우는 하나도 모르면서 저렇게 당당히 깝치는게. 마담의 손에 의해 쉐도우 색이 결정되고 마담에 의해 그날 먹을 저녁 메뉴가 결정되고 마담에 의해 그날 추는 곡이 결정되고 마담에 의해 손에 잡히는 돈의 액수가 결정되는 판을 시발 다 보고 있는 전원우가 건네는 연민을 나는 잘 주워 받아 먹었는데. 그럼 이쯤 되면 전원우가 지쳐야하는게 맞잖아. 지쳐서 나가떨어질 법도 한데, 거지 같게 이상하리만치 전원우는 갈수록 다정해져서…… 알면 알수록 뭘 위해 사는지가 확고하게 보여서. 그게 문제다. 그래서 내가 걔한테 반항하는 건 걔가 다정한 탓이다. 한없이 다정하니까 존나 놀려먹고 싶은데. 전원우는, 걔는…….
어떤 면에서 나와 닮았다. 꿈을 좇아 따라가지만 다 허상이다. 찾아다닌 꿈이 비어있는 걔도 결핍하고 궁핍했다. 애초에 꿈도 뭣도 없이 사는 나처럼. 순영은 연신 마른세수를 한다. 자기도 결핍하면서 정을 주는 게 바보 같은 짓이다. 네 결핍으로 내 결핍을 채우려다가 이렇게 돼버렸잖아. 네 꿈도 놓치고 있잖아. 전원우의 위악에는 다정이 함의되어있다. 순영은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부재중 전화가 6건. 모두 전원우다. 짜증 나. 이거 치사량 몇 프로지? 신경질적으로 벽에 머리를 기댄다. 죄책과 중압감이 머리를 짓눌렀다. 태어날 때부터 다정한 사람을 어떻게 괴롭혀……. 자책한다. 결국 숨을 내뱉고 통화 버튼을 눌렀다.
어디야.
신호가 몇 번 흐르고 바로 낮은 음성이 흘러들어왔다.
계단.
어디 계단.
순영은 무슨 말을 하려 입술을 달싹이다 고개를 떨군다. 기댄 벽이 차가웠다. 하려던 말을 삼키고 원우의 숨소리에 집중했다. 끓어오르는 불안함을 짓누르기가 어렵다. 적막이 이어지는 동안 원우는 순영의 침묵을 고스란히 전해듣는다. 마침내 뜸을 들이던 순영이 어쩔 수 없다는 마음으로 말문을 열었다.
미안. 다 거짓말이야.
뭐가.
네가 꼭 잘됐으면 좋겠어.
방안을 서성이던 원우는 그 말의 힘에 의해 방 안 한가운데에 멈춰 섰다.
이제 안 놀릴게. 네가 꼭 행복했으면 좋겠어. 그러니까 이제 안 놀릴게.
순영이 담담히 전해주는 예상치 못한 얘기에 온몸이 굳어 버린다.
근데 너 울리고 싶다고 한 거 진심이야. 나 사실 네가 울어주길 바랐어. 네가 내 앞에서 울면… 안아줄 구실이라도 생길 거 아니야. 너는 너무 착하니까, 착해서 한번을 안 우니까. 한 번쯤 울었으면 좋겠다고….
생각지도 못했던 감정을 마주하는 순간. 원우는 순영이 내뱉는 음절 하나하나를 곱씹었다.
그리고, 내가 더 잘해야 너희들한테도 이득이 될 거라 해서… 그래서 열심히 하려 했는데.
맥락 없이 차오르는 감정에 목이 멘다. 눈물이 나올 것 같아 연신 눈만 깜빡이다가 안 들릴 정도로 작게 심호흡을 했다.
미안해.
하지만 터져버린 감정은 볼을 타고 후드득 떨어졌다.
뭐가 미안해야. 너 열심히 했잖아. 열심히 해서 몸살까지 걸렸으면서…. 내가 미안해. 내가 아까 말을 심하게 했어.
붉어진 눈이 촉촉이 젖어 들어가자 순영의 입술이 파르르 떨린다. 대체 왜, 내가 왜 전원우때문에. 왜 이렇게……. 순영이 훌쩍이는 소리가 전화 너머로 들려오자 원우는 답답했다. 순영이 있는 곳으로 가고 싶었다. 이렇게나 진실한 마음을 모르고 있었단 사실이 괴로워서, 순영을 눈으로 직접 보고 껴안고 싶었다.
안아주고 싶다면… 나 위로해주는 거야?
응.
원우는 슬며시 나오는 웃음을 주체하지 못하겠고 자신의 마음을 가둬놓고만 있기엔 안 될 것 같았다. 순영은 눈을 감는다. 눈을 감고 어둠에 잠식해져 갈 때 원우가 짧은 침묵을 깼다.
그럼 만나 줘. 보여 줄 게 있어. 나 너 못 보면 잠도 못 잘 것 같아.
밤의 그림은 불완전하고 볼품없었다. 창가로 떨어지는 달빛에 그림자마다 사물에 녹아든다. 스탠드 노랑 불빛만이 마담의 얼굴과 방 안 곳곳에 번져있다. 그때 원우가 들어온다. 소파에 앉아 책을 읽던 마담은 원우를 눈으로 쫓다가 곧바로 책에 시선을 떨어트린다. 원우는 피아노 앞 의자에 앉았다. 잠긴 목소리가 적막을 깨고 튀어나온다.
샤를 집에 보내.
마담이 긴 손가락으로 책장을 넘긴다.
무슨 소리. 집에 안 들어오고 있는 건 샤를이야.
내 말 이해 못하나 봐. 집에 보내라고.
걔 집이 우리 집이지. 걔가 집이 없는 것도 아니고.
없어. 그러니까 이제 놓지.
아… 뭐야, 그 뜻이야?
책을 덮은 마담이 일어나 원우를 마주 보고 농염한 웃음을 짓는다.
얘 좀 봐? 싸가지가 없네. 왜, 네가 샤를한테 뭐라도 돼?
걔한테 뭔 짓이라도 해봐.
원우에게 가까이 다가간 마담이 허리를 숙여 원우와 시선을 맞춘다.
집 나간 애 뒤따라가서 해코지 할까 봐 그러니.
걔 건드리면 너 가만 안 둬.
마담은 피아노에 허리를 붙이고 기대어 섰다. 옆의 원우를 흘겨보며 비웃는다.
웃기다. 넌 이제 나와는 상관없는 사람인데. 그럼 샤를한테도 넌 상관없는 애 아닌가. 영웅 놀이는 더 큰 다음에 해. 네가 관여해봤자야 원우야.
둘 사이에 번쩍거리는 서늘함이 위성처럼 빙빙 돌며 공존하는 순간. 원우는 한숨을 쉬듯이 차가운 웃음을 내뱉었다.
그래. 그럼 내가 이건 관여해도 될까.
가지고 들어왔던 종이 뭉치들을 꺼내 마담 앞에 들이밀자, 마담은 엑스 자로 엮었던 팔짱을 풀고 빠른 손으로 그 문서를 낚아챘다.
그동안의 수익 일부를 빼돌리고 있다는 통장거래내역이야. 유령회사를 세워서, 대표 통장인 척 만든 계좌로 몇백씩 보내는 거. 너무 유치하지 않아? 누가 아직도 구시대적인 방법을 써, 쪽팔리게. 그러니까 처음부터 잘 숨기지 그랬어.
전원우, 왜 네가…!
내가 여기 그냥 들어왔을까. 아무리 돈이 급해도 모르는 사람한테 빌붙겠어? 조사하는 거 그렇게 어려운 거 아닌데.
충격에 휩싸인 얼굴이 된 마담은 부득부득 떨리는 손을 제지하며 이마를 짚었다. 원하는 대로 돌아가다 멈춘 룰렛 판이 환영으로 농후하게 그려진다.
어디다 보낼까. 본사? 경찰서? 골라 봐. 그쪽으로 제출하게.
흐트러진 웃음이 잇새로 새어 나오는 마담은 몸을 바짝 당겨 원우의 앞에 가까이 다가선다. 원우는 뒤로 물러나지 않았다. 마담은 원우의 귓가에 대고 속삭인다.
원우야. 샤를 원래 이름이 뭔지 궁금하지 않니.
이상하게 흘러가는 전개. 분명 타격을 입었을 마담은 아무렇지도 않은 목소리다.
순영이. 권순영. 예쁘지? 너는 평생 몰랐을 이름이야. 네가 나랑 같다고 착각하지 마. 샤를을 온전히 다 아는 건 나뿐이야. 샤를이 온전히 기댈 수 있는 사람도 나뿐이야. 걔는 나 없음 안돼. 왜? 걔 하늘 아래 내가 있으니까. 나만큼 샤를 사랑해봤어? 아니, 너 사랑의 ‘사’ 자는 아니? 모르지. 그럼 네가 아는 건 뭐야. 생활이 변변치 않아 불쌍한 애. 무대 위에 올라 춤추는 걸로 밥 벌어먹고 사는 아류 인생. 다 퍼주면 앞뒤 분간 못하고 좋다고 따라다니는 애. 이게 네가 아는 전부 아니야? 그래……. 어디 네가 원하는 대로 해봐. 그럼 샤를은. 일도 잃고 집도 잃고. 또 거지 같은 날들, 버러지 같은 삶이야. 그렇게 되면 샤를이 과연 너한테 기대기나 할까?
네가 사랑받는다고 착각하지 마. 너 그거 악습이다. 마담이 물러나자 원우는 바닥을 보며 안심하는 듯 미소를 지었다. 그 얼굴을 빠르게 읽어내린 마담의 속이 뒤끓었다.
웃어? 뭐가 좋다고.
마담이 다시 한 걸음 원우에게 다가가고, 원우는 고갤 들었다. 잔뜩 날이 선 눈. 그 눈에는 어떤 너그러움도 담겨 있지 않았다.
샤를이 나를 더 사랑하면 네가 너무 불쌍하잖아.
뭐?
앞뒤 분간 못하고 사는 애. 열심히 키워서 이제야 네 소유로 만들었는데 걔가 날 사랑하면, 넌 진짜 어떡하려고.
마담이 원우의 멱살을 잡았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힘의 반동에 의해 서 있던 원우가 뒤로 살짝 물러난다. 마담은 이글거리는 눈으로 원우를 읽어내나 원우는 동요하지 않았다.
닥쳐! 야…, 상황파악이 안되나 본데. 너 이대로 샤를 꾀어내서 무슨 짓 꾸며봐, 네 손가락이고 뭐고 다신 연주도 못 하게 다 찢어놓을 거야!
원우는 잠잠히 공명한다. 마담의 협박은 원우를 일절 타격입히지 못한다. 원우는 피아노 위에 올려두었던 핸드폰을 들어 귀에 가져다댔다.
됐어, 들어와.
문이 열린다. 열린 문틈 사이로 단 하나의 비치는 물체. 그건 그림자도, 빛도 아닌 샤를이었다. 샤를이 전화를 들고 서있다. 샤를이 안으로 들어오고 원우는 밖으로 나갔다. 나가서 문 앞에 기대어 섰다. 공기를 가득 머금은 뒤 심호흡을 한다. 너는 괜찮을까. 원우는 두손을 비볐다. 내 걱정이 위안이 되어 너에게 전해졌으면.
나 사랑해? 순영이 물었다. 마담은 곧 울 듯한 눈망울이다. 순영아…. 부르지만 순영은 답하지 않는다. 대신 손을 내밀었다. 왜? 마담이 의아해하자 대꾸한다.
지갑.
어?
돈 달라고. 내놔. 여기저기 다 신고해버리기 전에. 여태까지 쟤네가 벌어들인 돈, 내가 벌어들인 돈, 그리고 그 스쳐 지나갔던 수많은 사람들. 그 사람들 거까지 다 포함해서 빠짐없이 전부 원금으로 내놔. 아, 그리고 나 덕분에 여기 명성 팔린 것도 계산해서 더 얹어주고.
마담은 떨리는 손을 입에 가져다 대고 손톱을 물어뜯었다.
샤를, 너….
어. 나 나갈 거야. 이제 나한테 쓸 돈 없고 좋지.
한숨을 쉬고 얼굴을 쓸었다. 기어코 꾐에 넘어가다니. 마담은 결말까지 단숨에 뒤틀려버린 이야기를 어떻게 메꿔야 할지 빠르게 생각을 전환했다.
네 맘대로 나갈 수 있을 거 같니.
전원우도 나가는 판에 나라고 못 나갈까.
내가 너 도와준 거 잊었어? 은혜를 이렇게 갚는 새끼가 어디 있어, 어? 너도 나 좋다고 계속 붙어먹었잖아.
마담이 이를 갈며 내뱉는 목소리가 사시나무처럼 떨렸다. 순영은 눈앞의 마담을 무시하며 테이블을 향해 걸어갔다. 테이블 위에 마담의 지갑이 올려져 있다.
이 누나 찌질하네 진짜. 엄마 찾아 달랬지, 엄마 흉내 내달라 했어? 내가 누나 좋아하는 줄 알았구나. 제대로 오해했네. 난 누나 권력 좋아했지.
그래서, 너가 나 신고하면 어떻게 될 거 같애? 여태까지 누구덕분에 네가 여기 있는데…!
덕분에? 그 입에서 그런말 나오니까 재밌네.
내 모든 걸 죽여놓고. 순영은 지갑에서 지폐를 몇 장 꺼냈다. 이건 전원우한테 뭐라 한 값이야. 빼낸 돈을 쥐고 마담을 지나쳐가자, 마담이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허탈하게 물었다.
너 설마 전원우 좋아하니.
문 앞에 도달한 순영은 마담을 본다.
어, 해.
걔가 내 유일함이라. 순영이 문을 열어 밖으로 나간다. 어두운 공간에 빛을 쏟아내던 달은 어느새 흔적도 없이 숨어버렸다. 빛도 그림자도. 더 이상 마담에게 남은 것이 없다.
못 받아. 원우가 눈을 돌린다. 그 모습에 순영은 아까 전의 자신을 떠올린다. 어, 해. 좋아해. 내가 전원우를…. 좋아해. 좋아한다는 거 들키기 싫었는데. 모순적이게도 내가 먼저 말했어. 순영은 다시 입을 열었다.
내 자존심 판 값이야.
건네주는 지폐 몇장을 빤히 보다 어이없이 웃음이 나온다. 이게 뭐야. 돈을 뺏어오면 어떡해. 참을 수 없이 웃겨서 원우는 얼굴을 감싸며 실실 웃었다. 옆에 앉는 순영을 밀쳤다. 순영이 살포시 웃는다. 화가 나니까 그렇지……, 그게 뭐. 대꾸하는 순영의 뻔뻔함이 원우를 미소 짓게 했다. 내가 너를 진짜 어쩌면 좋아. 원우는 쓰러지는 듯이 침대에 누웠고 원우를 따라 순영도 옆에 누웠다. 은은한 조명 아래에서 둘은 천장을 바라보며 공상에 접어든다. 몇 분이 지났을까, 잠시 후에 원우가 말문을 열었다.
너는 뭐가 제일 무서워?
묻는 원우는 이런 질문을 수없이 자답하고 수없이 고민해 본 사람 같았다. 순영은 원우의 인생을 떠올려본다. 물론 떠오르는 게 없다. 전원우가 나를 모르듯이 나도 전원우를 모르는데 우리는 잘 모르면서 서로에게 의지한다. 마치 처음부터 몰라도 되는 것처럼. 서로의 배경과 출처 따윈 상관없고 오로지 현재의 감정만을 공유하며 공생하는 사이. 그게 우리라면, 나는 우리를. 전원우와 나를 놓아버릴 수가 없다. 나는 그런데. 전원우도 나와 같은 마음일까. 순영은 말하기까지의 여백을 만들다가 대답했다.
아무것도 아닌 거.
원우가 고개를 돌려 순영을 본다.
아무것도 아닌 거로 태어나서 아무것도 아닌 사람으로 살다가 아무도 모르게 죽는 거. 그래서 내 인생에 공백 남는거.
왜 너는 세상 혼자 살아. 원우는 권순영과 샤를의 상관관계를 고찰했다. 샤를의 인생에는 권순영이 낄 자리가 없다. 그럼 어디서부터 너를 채워야 할까. 뚫려있는 권순영의 빈 공간 다 채워서 공백 따위 남아있지 않게 하고 싶다. 숨이 막혀 오는 듯 했고 머리는 혼란스러워졌다. 그러다 문에 기대서 들었던 대화가 떠올랐다. 너 전원우 좋아하니. 딱 거기까지만 듣고 계단 밑으로 내려갔는데. 권순영에게 나는 무얼까. 원우는 발목이 잡혔다. 그래서 그다음을 알아야 했다.
마담이 나 좋아한다 물어봤어?
어.
너 뭐라고 대답했어.
순영은 뜸을 들였다. 원우는 물어보고도 재촉하는 말이 없다. 어이없어. 여기서 거짓말하면 내가 지는 건가. 잠시 뒤에 순영은 여운이 남아있는 적적한 목소리를 냈다.
한다고.
왜 그랬어.
…그냥.
나 살리려는 짓 하지 마. 그게 어떤 방식이 됐든. 너만 아파, 순영아.
누가 맘대로 내 이름 부르래?
권순영.
왜, 전원우.
네 이름 너무 예뻐서 부르기 아까워.
순영은 거기서 한번 심장을 움켜쥔다.
놀라서 몸을 일으켰다. 원우는 그대로 누워 순영을 관조한다. 순영의 멈춘 사고는 제 가동을 하지 않는다. 한 번도 내이름을 예쁘다고 생각한 적 없었는데. 오랫동안 맞추고 있는 시선에 순영은 나약해졌다. 그런 말을 잘도 하면서, 그런 사랑을 주고 나를 어루만져주면 너한텐 뭐가 남아. 전원우는 숨기는 게 많아 보인다. 내 감정의 평온함을 위해 자기감정을 숨기는 애. 지금 전원우는 나보다 더 약해 보였다. 너 그렇게 날 보면 내가 어떻게 해야 해. 한참 뒤에야 순영이 힘겹게 입을 연다.
그렇게 보지 마. 안아줘야 할 것 같으니까.
그러자 원우가 순영의 손을 잡아 온다. 너는 네 기분만도 못하지. 안아주고 싶으면 그냥 안…! 갑작스러웠다. 원우의 말이 끝나기 전에 순영이 원우를 껴안았다. 참지 않은 순영 덕분에 원우는 미적거리다 결국 설움을 터트린다.
진짜 싫어….
뭐가.
네 꿈으로 장사를 하잖아, 사람들이.
울 것 같아서 안아버렸는데 진짜 울 줄이야. 네가 그렇게 약하면 나는 더 약해져. 왜 이렇게 살아 넌. 쓸데없이 나 때문에 왜 이렇게……. 순영은 마음속으로나마 말을 걸며 원우의 등을 두드렸다.
울 걸 그랬어.
어?
네가 날 울리고 싶다 했을 때 울 걸 그랬어. 못 울면 차라리 우는 척이라도 했어야 했어. 울었어야 했어. 진짜 울었어야 했는데…! 그래야 했는데… 그때 다 울었으면 지금 이렇게 울 게 남아있지 않을 텐데…….
순영아.
불리는 자신의 이름이 간지러웠다. 뱃속이 나비로 가득 차는 느낌. 꽃을 먹지도 않았는데 왜 나비가 찾아와. 난 이런 거에 익숙지 않은데. 순영은 껴안고 있던 손을 풀어 몸을 일으켰다. 달아오른 감정에 원우는 이미 녹초가 되어있었다. 붉어진 눈시울이 이제 더는 작위하고 싶지 않다고 말하는 것 같다. 순영이 메여오는 목을 가다듬으며 숨을 내쉬자 원우가 일어났다. 그리고 순영을 안았다. 순영의 등 뒤로 두손을 깍지낀 채 불규칙적으로 뛰는 심장 소리를 듣는다.
순영아, 너는 나 놀려도 돼. 나 괴롭혀도 돼. 나 이용해 먹어도 되고 맘대로 도움받아도 돼. 얼마든지 도와달라 해 제발… 제발 살고 싶다 해줘. 살 거라고 해줘. 너는 나한테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니란 말이야.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니면 아무것도 아니어도 괜찮아. 그래도 상관없어. 너는 원래 특별해. 아니, 특별함을 넘어섰어. 특별한 네 존재가 나한테 위안이 되니까, 그래서 내가 사니까. 너라면….
너는 얼마든지 나 이용해도 돼. 그래도 돼, 순영아. 내가 너와 함께 있게만, 그렇게만 해줘 제발…….
전원우가 베이스를 잡지 않은 지 한 달이었다.
손을 잡고 밖으로 나온 날. 떠날 채비를 단단히 마친 둘은 모퉁이를 돌아 버스 정류장에 멈추어 섰다. 순영은 새 숨을 뱉었다. 샤를이 아닌 순영이 내뱉는 숨. 나른해진 해가 머리 위로 녹아들고 있었다. 인위적이지 않은 자연적인 그런 것. 잡은 손에 느껴지는 자연적인 온기는 심장이 뛰는 원동력이었다. 순영은 원우의 옆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사람들은 저마다의 말 못 하는 아픔이 있는데 그걸 이해하게 되는 순간 작은 나는 세상에서 가장 무겁고 가장 단단한 사람이 된다. 나와 같이 아픔을 공유하는 것만으로도. 이유와 사정이 달라도 서로를 다독이기 위해 내미는 손길이라면 그 손은 연민이 아니다. 사랑. 우리는 서로가 주는 사랑을 품고 있고 그걸 알아야 한다. 순영은 하늘을 보며 숨을 골랐다. 덕분에 살아갈 수 있다. 서로의 안위에 감사하고 오늘도 살아줘서 고맙다고. 아무 말하지 않아도 존재만으로 힘이 되어주는 그런… 사람 덕분에.
순영이 깊은 상념에 빠져있는 사이 어느새 도착한 버스가 둘 앞에 멈춘다. 버스에 먼저 올라타던 원우가 발을 멈췄다. 넋 놓고 옆을 보고 있는 순영을 본다. 순영은 다시 태어날 것 같다. 순영의 두 눈이 영롱하게 빛났다. 다시 태어나도록 할 것이다. 어떻게든. 원우가 낮게 순영의 이름을 부른다.
순영아, 뭐해. 집에 가자.
찰나의 생각을 깨고 원우를 마주하자 봄의 아지랑이가 시야에 들어왔다. 순영은 그대로 팔을 뻗어 원우의 손을 잡는다. 순영이 하지 못하고 삼킨 말은 이제 없다. 샤를의 이야기는 짧았으나 순영으로 남겨질 이야기는 무한할 것이다. 원우는 앞으로 자신의 삶을 살고 그건 순영과 함께일 것이다. 이후로 어떻게 될지 아무도 예측하지 못하는건 당연하다. 그러나 역겁의 세월이 흘러 언젠가 별이 멸망하는 그때, 무수히 떨어지는 별 가루를 맞아가며 사라지는 그 순간에도 마땅히 원우는 순영의 입술에, 손가락에, 두 눈에, 폐 안에, 혈관 속에, 그리고 둘에게 새겨질 최후의 기억 속에 마지막 전언을 불어 넣을 것이다.
나는 네가 될게. 네 인생을 살게. 그러니까 순영아, 너는 사랑만 받아.
그리하여 연민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