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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21. 1. 9. 09:05
작성자
hhh..

 

루이.

또다.

루이 루이.

또 저 벽 뒤에서,

루우이.

정말 끈질기게…….

루이, 어딨어!

수장님, 저 테스트 할 땐 말걸지 말라 했잖아요!

 

또 저기 저 벽의 뒤 거실에서 루이를 부르는 호시. 루이는 그 고질적인 반복에 미간을 찌푸렸다. 그런데 여기서 호시란? 그 유명한 팀 에이치의 수장, 권호시. 덧붙이자면 에이치란 팀명은 본부 놈들이 멋대로 호시의 앞글자 알파벳에서 따왔다. 깐깐한 척하지만 사실 대충 쓱쓱 일처리 해버리는 게 본부의 역할이었고. 때문에 그들을 욕하는 일은 에이치의 일부분이었다. 걔네는 매번 센스가 구려. 호시는 그 말을 달고 산다. 어찌 됐건 본래 이름은 모른다. 나이도 알 수 없다. 허나 나보다는 많다. 생긴 거로 봐선 그렇게는 안 보이나 일단 나한테 반말을 하니까. 루이가 머릿속으로 정의한 호시의 외피는 그랬다. 그걸 벗기면 순수한 표피가 나온다. 본부에 보고했어요? 헉, 미안. 노느라 못했어. 너무 솔직해서 호시는 늘 거짓말을 잘 못 했다. 그런 속살을 가지고 있는데, 믿기 어려우나 놀랍게도 일을 매우 잘해서 아래에서 받드는 애들이 유독 많았다. 그렇지만 일 외의 것을 못했다. 신도 참 공평하지. 너무 공평해서 나만 힘들어! 한번은 루이가 성을 내자 호시는 루이에게 불만 쟁이라는 별명을 붙여줬다. 그래서 김루이의 취약점은 권호시. 그에 상응하도록 호시는 언제나 루이를 부르고 루이를 찾고 또 루이를 필요로 했다. 김루이는 생각해봤다. 수장은 일이 많나? 아니. 따지면 내가 더 많다. 왜? 내가 수장의 일을 다 도와주니까. 그럼 내가 꼭 필요한가? 권수장은 그렇겠지만 나는 아니고. 이건 상호 간에 충분히 해결할 필요가 있는 문제. 꼭 내가 아니어도 사이먼과 카르피도 있는데. 그런데 권수장은 대체 왜…….

 

루이, 나 이거 동영상 찍을 건데 뭐 눌러야 해?

아… 얘는 그냥 좀 몇 퍼센트 부족한 걸지도.

 

한 번 더 자신을 부르기 전에 밖으로 나와보니 소파에 앉은 호시가 노트북 자판을 열나게 두드리고 있다. 아지트로 돌아온 지 한 시간쯤 흐른 듯한데, 유리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커피는 보여야 할 김도 눈에 보이지 않는다. 수장, 커피 다 식어요. 한숨을 내쉰 루이가 호시에게 다가갔다. 저 없음 아무것도 못 하세요? 응. 그럴 예정이야. 호시가 방긋 웃었다. 그러니까 루이 오늘만 도와줘. 그 애절함에 루이는 익숙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다. 그 말, 내일도 하실 거면서. 팔을 걷어붙이고 가까이 다가가서 보니 노트북 화면은 검었다. 뭐야, 아무것도 안 하시네요. 아까 뭐 저장됐나 봐. 전송 완료라고 떠가지고…… 그 뒤로 이렇게 됐어. 본부로 뭐 보냈어요? 호시는 답하지 않았다. 보냈네. 말하지 않는 대신 입술이 벌어진다. 호시의 그 버릇은 무언가에 집중하거나 곰곰이 생각 중일 때 또는 생각을 들켰을 때마다 나왔다. 루이는 노트북을 뒤집으며 이곳저곳을 살피는 호시를 말린다. 그래서 뭐가 돼요. 속으로 생각하던 루이는 잠깐의 고민 끝에 대처 방법으로 인류가 발견한 최대의 해결법을 이용한다. 껐다 켜기. 전원 버튼을 눌렀다. 기다리니 윙 하는 소리와 함께 다시 화면이 켜졌다. 열린 화면에 동영상 하나가 저장되어 있다. 본부전송이란 제목과 옆에 붙어있는 숫자. 숫자는 오늘의 연월일이었다. 그것을 클릭하니 가운데서 창이 띄워지고 영상이 재생됐다. 호시와 루이는 동시에 화면에 얼굴을 들이밀었다.

 

잘못됐다. 잘못되어도 정말 많이. 흘러가는 시간 동안 둘은 점점 물음표가 되었다. 이게 뭐지? 분명 '팀 에이치 수장 호시. 보고드립니다.' 으로 시작해야 할 영상은 아예 다른 곳을 비췄다. 오후의 거실 풍경. 수장과 함께 지원하고 돌아온 후, 아까의 모습들이다. 매우 흥분해서 어쩌고저쩌고 말을 내뱉는 권수장과 한 귀로 흘리는 부하들의 염세적인 얼굴들. 주고받는 쓸데없는 농담. 이유 없이 춤을 추거나 오디션도 아닌데 대본도 없이 과장스러운 연기를 하고. 설상가상으로 본부를 욕하는 것까지. 모든 어이없고 안 좋은 부분들만 녹화된 그 영상에는 팀 에이치의 이면이 낱낱이 남아버리고 말았다.

 

내가 미쳐. 저 하품하는 것도 찍혔잖아요!

아하하, 그걸 본부로 보냈다고?

반쯤 누워 비디오게임에 몰두하던 사이먼이 쾌활하게 웃어댔다.

김루이 일 안 하고 논다고 엄청 뭐라 하겠다. 또.

걱정 마. 넌 본부장 사진, 발로 쓰다듬는 거 다 찍혔어.

아오! 내가 그 자식 싫어한다고 소문 쫙 나겠네.

그리고 커피에 침은 뱉지 말자, 카르피.

 

식탁에 앉아 주스를 마시던 카르피가 입에 담았던 주스를 그대로 주르륵 흘렸다. 주스는 떨어져 유리컵으로 다시 들어갔다. 카르피는 너무 놀라 동그랗게 커진 눈으로 호시를 쳐다봤다. 마침 커피를 마시려던 호시가 멈칫하고는 잔을 내려놓고 입맛을 다신다.

 

켜놓은 걸 내가 몰랐나 봐. 아까 화장실 갈 때 이걸 이쪽으로 돌려놓고 갔었어.

 

그 순간 쏟아지는 자신을 향한 시선. 한순간에 모두의 눈총을 받았다. 눈들에 원망이 서려 있어 호시는 눈치를 봤다. 그리고 겸연스러운지 머쓱히 웃으며 말한다. 올라가는 눈꼬리는 덧없이 순하다.

으음? 이게 왜 전송이 됐을까? 아하하…….

앞으로 보고는 제가 해요. 상부에도 그렇게 말해 둘게요.

루이가 통보하자, 호시는 입술을 쭉 내밀며 고갤 끄덕인다.

 

 

시험이 끝났다. 마지막 학년에서의 첫 시험이. 이 시험 때문에 작년부터 공을 들였다. 원우는 그제야 짓눌렸던 어깨를 폈다. 예상이지만 점수가 꽤 잘 나올 듯했다. 길고 긴 종례를 마치고 가방을 정리하던 차에 돌아간 줄 알았던 친구 한 명이 복도에서 소리쳤다. 야! 전원우. 안가냐? 원래 모든 행동이 느릿한 원우는 뭘 하든 간에 시간이 걸렸다. 그러나 오늘만큼은 아니어야 했다. 가야지. 지퍼를 닫아 재빠르게 가방을 둘러맸다. 마음이 급하다. 시험도 끝났으므로 반드시 해야 할 것이 있었다. 오래전, 한창 주가가 상승하던 히어로 게임. 원우는 온종일 <비거댄유얼스>에 빠져 살았다. 출시 전부터 고대하던 거였다. 걷다가 우연히 본 광고로 한눈에 반했었다. 알록달록한 원색에 눈이 가서. 세련된 그래픽과 액션이 남루했지만 맵 밖에선 작아지는 SD형 캐릭터가 유난히 귀여웠다. 그래서 바로 검색을 했다. 내가 만약 이 시대에 안 태어났으면 무얼하고 살았을까. 원우는 늘 그 주제로 사색하곤 했다. 게임이 출시되던 날에는 입소문을 타고 이용자들이 대거 유입했다. 올라오는 인터넷 기사마다 수많은 댓글이 기사의 하단부를 장식하더니 비거댄유얼스는 단숨에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요주의 화제로 등극했다. 원우는 몇 번의 계절이 바뀌는 동안 로그인 했던 날이 안 했던 날보다 많을 만큼 그 게임 속에 잠겨버렸다.

 

친구들 여럿과 찾은 PC방은 벌써 교복을 입은 무리로 득실거렸다. 원우와 친구들은 빨리 자릴 잡아 빈 의자 옆에 짐들을 내려놓고 나란히 앉았다.

 

전원우. 넌 주로 뭐로 하냐?

얼마 전에 게임을 시작한 친구가 물었다.

묻지 마. 쟤는 정해져 있어.

쟤 호시 아니면 안 하잖아.

 

자신이 커스터마이징한 인디고색 정장을 입은 가넷빛 머리의 호시를 선택하자 호시는 양손 검지를 눈 밑으로 가져다 대는, 올라간 눈꼬리를 강조하는 듯한 고유의 제스처를 취했다. 양 볼이 말랑해 보였다. 원우는 키보드에 손가락을 올렸다. 로딩되는 화면부터 설렘이 증폭한다. 들리는 배경음을 따라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로딩이 끝나고 첫 화면이 나오면 원우는 안경을 고쳐 쓰고 게임에 빠져든다.

 

 

보고 올리기 전에 내용 맞는지 들어주세요. 루이는 출력해 온 종이를 살폈다. 그러나 때마침 누군가와 통화를 마친 카르피가 그 시간을 자른다.

수장님, 선배님들.

루이와 사이먼, 호시가 카르피를 주목했다. 본부로부터 연락 왔어요. 카르피는 두려움에 가득한 표정을 지었다. 곧 울 것 같다. 솟아있던 눈썹은 팔자 모양으로 내려갔다. 호시는 금방 감정에 동화돼서 두 팔을 내려 카르피의 쇄골을 끌어안았다. 작은 몸집이 들썩이며 양 갈래로 땋은 머리가 축 늘어졌다. 어떡하죠. 앞으로 주의해서 감시 하겠다는데.

미친놈들, 아예 카메라를 설치하지 그래!

사이먼이 긴 머리를 넘기며 얼굴을 붉혔다.

한 번만 더 불만이나 뒷말 나오면 연구소로 보낸대요.

연구소로 보내서 뭐, 우리 능력 뺏어간대? 어떻게 배워서 익힌 건데 그게.

나 에이 등급 받으려고 새벽에 일어나던 거 알지? 자기 전에 머리맡에 책 전부 챙겨놓고 잤어. 히어로 하려고 그딴 능력을 배워야 한다는 게 말이나 되는…….

호시가 종알대다 한숨을 쉬었다. 에휴, 이게 다 무슨 소용이냐. 그리고 잠시동안 침묵이 흘렀다. 누구도 말이 없자 루이가 헛기침을 하며 그 묵직한 공간을 추슬렀다. 이거나 읽을게요.

사거리에서, 차 두 대 충돌사고 나려던 거 막으셨고. 응. 막기 전에 투명화는요? 물론 했지. 아무도 못 보게. 네, 그럼 됐고, 음……. 루이가 종이 뒷장을 넘긴다. 쓰러지는 가로등 붙잡으셔서 지나가던 학생을 구하셨고, 애가 너무 놀라서 계속 안고 있으셨다고요? 응. 그럼 기억은 지우셨겠죠? 당연하지. 기억 지우는 거 특별히 조심하셔야 돼요. 수장님만 갖고 계신 능력이잖아요. 아시죠? 저희 들키면 안 되는 거. 걱정 마, 히어로잖아. 그렇죠. 저희는 비밀리에 활동하는 히어로들이니까…….

 

그리고 아무도 모를걸. 비거댄유얼스가 우리 이야기로 만든 게임인 거.

이 도시에는 정말로 비거댄유얼스가 실재한다고.

 

 

하루가 흔적 없이 가고 다음 날의 시곗바늘이 바삐 돌아갔다. 루이는 새로 익힌 스킬을 테스트할 겸 본부로 갔고 사이먼은 거실에서 눈을 붙이고 있었다. 그래서 한가로이 책상에 앉아 책을 읽던 카르피만이 수상함을 감지했다. 창문으로 밖을 내다보니 말도 안되게 노을이 어두컴컴히 지고 있었다. 아스팔트 벽이 흔들렸다. 흔들리다가 기울었다가 팽창돼서 주욱 주욱 늘어났다. 내뱉은 입김이 뜨겁다. 호시는 눈을 비볐다. 저거 뭐지? 자신이 이상한 걸까 싶어 한쪽 발을 들었다 내렸다. 발을 들면 공기가 느껴져야 하는데 무게감조차 없었다. 공사장 건물의 난간에 서서 눈앞의 평행선을 바라보니 초점이 가뭇하다. 왜곡되는 형상. 이번에는 주먹을 쥐었다 폈다. 뒤집었다. 손끝부터 천천히 사라져야 할 몸이 그대로였다. 투명해져야 하는데. 능력이 둔해졌다 하기엔 손금이 뚜렷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한발짝 뛰었더니 예상한 거리를 훨씬 넘어 반대편 건물 옥상을 밟았다. 왜 이러지? 밟자마자 몸이 직선으로 튕겨져 나간다. 호시는 불안한 느낌에 두 무릎을 굽혔다. 그러나 앞에 있는 창문으로 돌진한 건 순식간이었다. 충동적으로 자켓 안쪽의 총을 꺼냈다. 쏘면 일직선으로 뻗어 나가는 총알이 역행하고 천천히 부서진다. 그렇게 하여 시간을 멈출 수 있는 시스템인데 예상치 못하게 총알이 그대로 나갔다. 거대한 유리창이 갈라지는 소리를 내며 금이 갔고 호시는 그쪽으로 찰나에 곤두박질쳤다. 베란다 난간에 발이 닿자마자 몸이 주르륵 쓸려 나가떨어진다. 수장님. 들리세요? 말을 걸었지만 카르피의 귓가에는 호시의 목소리가 아닌 지직거리는 잡음만이 들렸다. 어디세요? 몇 번이고 불러도 들리는 건 시스템 종료음뿐이었다. 그렇게 호시와의 연결이 끊겨버렸다. 이에 카르피는 재빨리 호출을 시도했다.

 

그러니까, 수장님 말로는 갑자기 움직이는 게 불편해서…….

응.

착지하려는데 방향을 잃으셨고…….

응.

총을 쐈는데 총알이 그대로 나가버렸다는 거죠? 그래서 어떤 집의 베란다 유리창을 깨부수셨고.

맞아, 맞아. 하지만 그러려고 한 건 아니었어.

아무튼. 창문 와장창 깨트리며 집안에 들이닥치셨고.

어. 아주 와장창 잘 깨지더라. 내 몸이 그렇게 단단했나?

그리고 거기 있던 어떤 사람을 깔아뭉개셨고…….

그렇지. 아 근데 걱정 마, 맥박은 살아있어. 다행이야.

아. 네. 어쨌든 그 뭉개진 사람이 기절해버리는 바람에 여기로 데려오셨다는 얘기죠.

응. 정확해. 역시 똑똑하다. 우리 막내.

그런데 하필이면 저분이 수장님 팬이라고요…….

카르피는 침대에 곤히 누워있는 남자를 가리켰다.

 

진짜 진짜 대박이야. 나진짜 처음봤어 그런거, 책장에 막 내 피규어랑 내 얼굴 붙여져 있는 컵도 있고, 바닥에 우리 이벤트 기간에 나왔던 한정판 담요있잖아. 그거랑 책상에 우리 스티커. 와씨, 진짜 장난아니야. 엄청나다니까? 본부 애들 언제부터 우릴 이렇게나 상품화했냐. 무슨 말도 없이……. 용케도 아지트로 돌아온 호시는 누구보다 밝은 얼굴로 떠들어댔다. 특별히, 돌아올 땐 혼자가 아닌 둘이었지만. 카르피는 그 사실을 바로 루이에게 보고했다. 방어하라고 준 총으로 남의 집 방어 장치를 부수셨어요. 민간인 재산인데 이거 본부에 보고하면 걸립니까?

 

말도 없이 말야, 우리 인기 진짜 많구나!

 

귀에 장착한 이어폰 너머로 루이의 짧은 비명이 들리는지도 모르고 호시는 뛸듯이 기뻐했다. 그 단순함에 카르피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내젓는다.

 

 

히익, 뭐야. 누구야. 누군데 내 침대에 있어! 방안으로 들어온 사이먼이 소스라치게 놀란다. 침대에 비스듬히 앉아 남자를 지그시 바라보던 호시가 대꾸했다. 다친 고등학생. 옆에 있던 카르피도 한마디 거든다. 주워오셨답니다. 아이고오. 큰일 하셨네, 큰일 하셨어. 우리 수장님. 사이먼이 비꼬며 놀리는 통에 루이는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책망했다. 민간인한테 손대기 금지, 모르면 외우시라고요, 좀.

모르는 척 좀 해줘라. 그냥 우리가 보고 안 하면 되지 않아?

수장님 센서 있는 거 잊으셨어요?

괜찮아. 뽑았어.

주머니에서 네모난 모양의 작은 칩과 선으로 연결된 장치를 꺼내 들었다. 이것봐. 의기양양한 표정이 칭찬을 요구하는 듯했다. 그 당돌함이 어처구니가 없어 루이는 어떻게 설명할지를 고심하다 입을 열었다.

저기요. 그거 뽑는 순간 어차피 GPS 잡혀서 바로 들켜요. 센서에 이상 감지돼서 바로 위치 보고된다고요, 자동으로. 어떡하실 거에요. 나 방금 본부 갔다 왔는데 또 가게 생겼잖아.

그럼 내가 연구소 끌려갔다 나오면 되지.

이어지는 질책에 호시가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리자 호시를 제외한 세 명이 서로 눈길을 주고받는다.아무도. 어떤 말도, 안 하는 상황이 낯설다. 갑자기 싸늘해진 분위기에 호시는 의문이 들었다.

뭐야. 분위기 왜 이러는데…….

연구소라 하셨죠. 연구소에 갔다가 나온 히어로가 몇이나 되는지 아세요?

사이먼이 날 선 질문을 던지자 호시가 못 참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너네는 왜 그렇게 걱정이 많아, 항상. 생각해봐, 왜 우리가 걔들한테 다 맞춰줘야 해? 우리는 일 무지 잘해. 그러니까 걔들이 우리한테 맞춰야지. 안 그래? 어?

 

그 말에 나머지 셋은 고개를 끄덕인다. 호시는 다 잘될 거라며 팀원들의 어깨를 토닥였다. 서로를 다독이며 공존하는 것은 팀 에이치가 잘하는 일 중 하나였다. 팀원들은 바보 같아도 듬직한 호시를 믿었다. 수장이니까, 라는 말은 대외적으로 쓰는 거고. 호시는 넷 중 수장의 자리에 가장 어울리는 히어로다. 맡은 일에는 열성적이고 자주적이었다. 그래서 다른 팀 히어로들이 호시를 무시하는 발언을 하면 팀원들은 이렇게 말했다. 너희들이 우리 팀 와 봐. 확실히 직접 겪어보지 않으면 모르는 일이다. 반대로 말하면 그만큼 알기 힘든 일이라는 것. 그나저나 수장은 자기가 무시당하고 있다는 걸 모른다. 팀원들은 저런 일 처리 능력이 있다면 그 부분은 모르는 게 낫다며 의견을 모았다.

사이먼과 루이가 밖으로 나갔다. 호시는 숨을 들이마시고 내뱉다가 다친 남자가 누워있는 침대 옆에 몸을 기대앉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남아있던 카르피가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똘망똘망한 두 눈망울을 빛내면서. 카르피는 눈에 닿을 듯한 검은 앞머리를 부스스해질 정도로 흩트리고는 입을 열었다.

 

저 분, 일어나면 꼭 기억 지우셔야 해요. 아셨죠?

 

호시는 고개를 끄덕였다. 카르피도 자리를 떠나고, 남은 호시는 남자의 머리맡에서 턱을 괸 채 남자를 바라봤다. 그러다 속눈썹을 만졌다. 손가락으로 속눈썹을 몇 번 쓸었다. 까끌거렸다. 민간인을 이렇게 오래 지켜볼 수 있는 건 정말 오랜만이었다. 그것도 나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니. 그럼 팬이란 소리잖아. 그런 행복한 생각에 미치던 중, 거짓말처럼 남자가 살며시 눈을 떴다. 차마 돌리지 못한 시선이 그대로 마주했다. 그래서 호시는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눈이 분명 자신을 보고 있다. 선이 날카로운 얼굴에 나른한 표정. 남자한테서 건조한 목소리가 나왔다.

누구예요.

아. 너무 뚫어지라 쳐다봤나. 호시는 괜스레 뒷머리를 긁으며 일어났다. 뒷머리를 긁적이며 할 말을 찾았다. 저기, 그쪽이 기절하셔서요. 그러자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남자가 손목을 잡아끌었다. 덕분에 중심을 잃고 남자의 위로 쓰러졌다. 간신히 한쪽 팔로 상체를 버티고 있으나 얼굴이 너무 가깝다.

호시.

네?

호시랑 똑같이 생겼다.

일순간 숨을 죽인 호시는 사고를 멈춘다.

호시 아니에요? 이 점퍼. 처음에 얻는 기본템인데. 헤어스타일도 똑같고. 생긴 것도 똑같고. 볼도……, 설마. 몸 안에 권총 지녔죠?

훑으며 따지는 남자의 말에 반박할 수가 없었다. 남자는 호시의 점퍼를 벗겨 몸을 더듬었다. 달라붙는 재질의 폴라 티셔츠 위로 부착한 리볼버 홀스터가 눈에 띄었다.

어우, 가슴은 왜 만져요.

아, 맞네.

저 정말 팬이에요……. 남자는 자신의 몸을 일으켜 자세를 고쳐 앉았다. 머리 위로 쏟아지는 형광등 빛 때문인지는 몰라도 남자는 생기가 넘쳐 흘렀다. 다친 사람 맞아? 속으로 의문을 가지면서도 호시는 남자의 빛나는 깨끗한 피부와 단정한 생김새에 눈길을 두었다.

호시 맞죠? 베란다에서 뭐가 날아온다 했는데, 진짜 사람이었구나. 몇 살이에요? 예전부터 궁금했어요. 스킨 중에는 교복도 있어서. 캐릭터 소개에는 학생이라고만 나오길래.

막을 새 없이 질문이 쏟아졌다. 호시는 미간을 찌푸렸다. 슬며시 입이 또 삐죽 나온다. 열심히 상황을 피하려고 머리를 쥐어짜 보지만 피해갈 답은 쉽게 도출되지 않았다.

아. 저 그게, 지금 제정신 아니신 거 같은데. 일단 저는 호시가 아니고요. 왜 제가 호시가 아니냐면, 아니지. 호시가 아니니까 아니라고 하는 건데. 그러니까. 어쨌든. 원래 제가 평소에도 호시랑 닮았다는 말을 듣고 그러긴하거든요. 음…….

빨리요.

횡설수설하는 말에 남자는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으로 호시가 내뱉는 말을 싹둑 잘랐다.

열아홉.

호시는 실토해버린 것을 후회하며 결국 인상을 찡그렸다.

와, 나랑 똑같네.

남자가 다시 누우면서 호시를 잡아당긴다. 넘어지면서 또 남자를 덮치게 될 순간이었다. 호시가 다급히 소리친다.

잠시만, 잠시만. 나도 하나만 물어볼게요.

반말해도 돼. 동갑이잖아.

호감을 사기 위해서인지 남자는 친절한 미소를 짓는다. 저기 그건 상호 간에 정하는 건데……. 우물쭈물하던 호시는 속으로 중얼거리다 금방 포기해버린다.

아, 응. 그… 별건 아니고. 너 있잖아, 이름이 뭐야?

전원우.

원우는 왼쪽에 붙은 자신의 명찰을 짚었다. 아하하, 그러네. 거기 명찰이 있었구나.

이거 진짜 꿈 아니지?

원우가 끌어당겼고 호시는 이번엔 주저하지 않았다. 자연스레 끌려가 원우의 위로 쓰러졌다. 둘은 어정쩡하게 껴안고 있는 자세가 되었다. 원우는 두 팔로 호시를 꽉 안았다. 어깨를 쓰다듬는 원우의 손은 부드럽고 약간의 미열이 돌았다. 어쩌다 보니 엎드린 채로 원우의 가슴에 귀를 대고 있자니 두근거리는 소리가 규칙적이어서 듣기 좋았다. 호시는 들리는 소리를 하나씩 셌다.

수, 수장님.

문을 연 카르피와 사이먼이 동그래진 눈으로 호시를 부른다. 경악한 얼굴의 사이먼은 재빨리 한 손으로 카르피의 두 눈을 가렸다.

아, 어… 아무것도 안하고있었어.

그 말이 무언가 하고 있었다는 걸 반증하는 거 아시죠?

호시가 일어나 옷매무새를 추스르는 동안 사이먼이 능글맞게 웃는다.

여기요. 일어나시면 드시라고.

카르피가 뜨거운 유자차를 건넸다. 원우는 컵을 받아든다. 방긋 웃은 카르피는 재킷에 손을 닦고선 손을 내밀었다.

반갑습니다. 카르피라고 합니다.

원우는 설렘을 주체하지 못해 기쁜 목소리를 내었다.

알아요. 카르피. 우와 신기하다. 사이먼도 있고. 진짜 말도 안 된다. 아, 루이는요? 루이는 어딨어요?

뭐야. 이 사람도 수장처럼 루이를 찾잖아. 하여튼 인기쟁이야. 김루이……. 사이먼은 자신의 길고 푸른 머리를 손가락으로 비비 꼬면서 생각했다. 먼젓번 온라인상에서 진행한 캐릭터 인기투표에서 루이에게 밀렸던 적이 있다. 그래서인지 사이먼이 심통이 나 있는 차에 카르피가 대신 대답을 이어갔다.

루이 선배는 아마 원우님 집으로 가셨을 거에요. 뒷처리하러.

맞다. 우리 집 베란다 망가졌지. 

말이 원우의 입에서 나오자마자 호시는 알레르기 반응처럼 헛기침을 했다.

아, 저 예전부터 궁금한 게 있는데.

네. 말씀하세요.

카르피는 카타스트로피 줄임말이에요?

예?

사이먼은 사이보그 먼치킨?

왜 저래요? 카르피가 사이먼에게 눈짓한다. 뜨거운 유자차가 내뿜는 김 사이로 원우는 그저 해맑게 웃기만 했다. 사이먼은 몸을 숙여 카르피에게 다가가 입가를 가린 채 속삭였다. 학생이잖아. 공부를 하도 많이 해서 머리가 어떻게 됐나 봐. 그렇지, 수장?

오. 야, 말이 되긴 된다.

사이먼이 공감해주길 바라면서 호시를 쳐다봤으나 이미 수장은 이상한 말장난에 심취해버렸다. 그에 카르피와 사이먼은 동시에 고갤 내젓는다.

 

 

눈 감아봐. 호시는 원우의 이마에 손을 갖다 댔다. 앞머리가 손등에 닿자 간지럽다. 열나? 눈을 감은 원우는 천연덕스럽게 순진무구했다.

아니. 이상하다, 왜…….

왜? 기억이 안 지워져?

더 말을 잇지 않는 호시에 원우가 대번 질문한다.

너 나에 대해 많이 아는구나.

당연하지, 팬이라 했잖아. 그거 쿨타임 십칠초인 것도 알아.

그리고는 장난기 가득한 말투로 덧붙여 말했다.

십오초라면서. 실제로는 십칠초 걸리던데.

호시의 기억제거 스킬은 여러 변수에 따라 쿨타임이 십칠초에서 이십초까지 그 변동 폭이 자유로운 편인데 게임에서의 호시는 캐릭터 설정상 십오초로 뭉뚱그려 정해져 있다. 하지만 게임사에서 짜둔 설정을 무시하고 실제 호시의 특성이 업그레이드될 때마다 게임에도 욱여넣다 보니 약간의 오차가 났다. 이건 정말로 시간을 재지 않았다면 대부분의 유저들은 모르는 사실인데. 어떻게 알았지. 호시가 생각에 집중하는 사이, 원우는 호시를 재촉한다.

지워졌어?

아니. 말 걸지 말아봐.

집중도 안 돼?

아, 진짜.

아무 변화도 없는데?

이상하네. 왜 이러지…….

애초에 기절했을 때 지우지 그랬어. 그럼 편하잖아.

의식이 없는 상태에서 기억을 지우면 그게 양아치고 도둑질이지.

그렇구나. 원우는 천천히 눈을 떴다. 호시의 손 아래에서 깜빡이는 두 눈.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 거야? 그 물음에 호시는 그제야 손을 뗐다.

있잖아……. 입을 연 원우는 말하기 전에 뜸을 들였다.

안 되면 안 하면 안 돼? 난 기억 지우기 좀.

어?

싫어서.

내가 왜 널 잊어야 해. 그 말에 호시는 기억을 못 지웠다. 실은 못 지운 게 아니라 안 지웠다. 몇 번을 시도해봤지만 안 돼서. 가끔씩 자신이 오류가 나면 본부에 요청해서 대체 인력을 부르면 된다. 하지만 그러면 얘를 이제야 만난 게 너무 아쉬워지고. 이마에 손만 갖다 대면 되는데. 쉬운 일이다. 그러나 자신을 알아봐 준 사람이 처음이라. 태어나보니 그게 처음이라서. 호시는 기억보다 넘쳐흐르는 애정을 지우기 어려웠다.

 

 

걔는 어떻게 됐어요? 돌려보냈어. 어느 오후가 다 된 시간. 팀 에이치는 늦은 점심을 차려 식탁에 옹기종기 모여 앉았다. 과자가게에서 사 온 마들렌을 접시에 담으며 루이는 접힌 레이스 식탁보를 정리했다. 제가 창문 깨진 거 복구하느라 얼마나 힘썼는지 알아요? 알지, 알지. 호시가 마들렌을 한입 가득 물어버리는 탓에 잔해물이 부서지며 밑으로 떨어진다. 넓은 각자의 자리에 저마다 가루가 흩뿌려져 쌓여갔다. 원우가 그러더라, 번호 알려달라고. 그래서 번호를 주셨어요? 응. 왜요? 알아야 내가 널 부르지, 라고 했어. 원우가. 하아…… 수장님, 그렇다고 수장님 마음대로 개인정보를 알려주면 어떡해요. 미디어에 뿌리거나 협박이라도 하면……. 걔는 그런 거 못 해. 그걸 어떻게 알아요. 그냥…… 그래 보여. 애들아, 이제 쉬어. 손을 털며 일어난 호시는 기분 좋은 얼굴로 콧노래를 불렀다. 호시가 자리를 떠나자 팀원들은 자기들끼리 어깨를 마주하고 담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수장 무슨 좋은 일 있나? 내버려 둬, 자기 좋아하는 팬 생겼다잖아. 그 안경잡이 때문에? 혹시 몰라, 우리한테 뭐라도 떨어질지. 하긴 저렇게 일도 열심히 하는데요…… 맞다. 원우님 기억 지운 거 맞나요? 수장님께서 말씀하신 적 없으셔서. 그 순간 루이와 사이먼은 동그랗게 뜬 눈으로 카르피를 바라봤다. 오묘한 분위기가 정적을 타고 흐른다. 카르피는 마들렌을 먹으려고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하고 큰 눈으로 두 선배를 쳐다봤다.

 

오전부터 집은 놀러 온 친구들로 꽉 찼다. 야, 전원우 거기서 뭐 해. 한 친구의 궁금증이 방까지 따라 들어왔지만 원우는 아무 말 못 한다. 침대에 가만히 누워 핸드폰에 저장한 호시의 전화번호를 계속 보기만 했다. 하도 많이 봐서 숫자까지 이미 다 외웠다. 엄지손가락이 화면 위만 왔다 갔다 하다 멈춘다. 누를까 말까. 전화를 걸어야 하나. 아니다. 전화는 부담스러울 거 같고. 카톡이라도 남겨야겠지. 혹시 너무 민폐인가. 만약 그랬다가 차단당하면 어떡해.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이어지기만 여러 번이었다. 꿈이라 생각했는데. 아니면 그냥 닮은 사람이거나. 아니면 코스프레를 한 사람이거나. 아니면. 원우는 생각을 멈췄다. 더는 쓸만한 남은 가정법이 없다. 그냥 닮았다 하기엔, 분장이라 하기엔. 베란다 창문까지 깨트리면서 등장할 필요는 없잖아. 그날 만난 호시는 정말, 정말 모든 면에서 호시 자체라서 대입할 말이 없다. 대체할 것이 이 세상에 어디 있겠나 싶다. 누워서 보이는 대로, 깜빡이며 바스러져 가는 형광등같이 원우의 세상도 비상이었다. 필요충분조건에 씐 원우는 고질적인 프레임에 찍힌다. 게임이 현실이라면 내 현실은 게임인 게 아닐까. 그렇다면 나는…….

나는 뭘 하면 좋을까. 꺼진 핸드폰 화면에 호시의 얼굴이 떠올라 괜스레 얼굴이 뜨거워진다. 원우는 사랑하면서 메말라가는 듯했다. 현실의 전원우와 게임 속의 전원우로 배척되는 이분 법칙. 심장이 빠르게 달음박질해서 저쪽으로 사라진 기분이었다. 아무한테도 호시와 만난 것을 말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이 기분 좋은 경험을 내가 말해야 할 필요가 있는지.

불안해진 마음에 거실로 나왔다. 친구들은 어느새 원우를 잊었는지 자기들만의 세상에 몰두한 채로 무언가를 보며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둥그렇게 모여 떠들고 있는 자리에 원우는 제 발로 걸어서 틈에 끼인다.

 

어? 얘 걔 아냐? 우리 일학년 학기 초에 딱 한 명 자퇴했던.

진짜.

맞아, 맞아.

어, 진짜.

맞네, 권순영. 워낙 이유 없이 자퇴해서 다들 궁금해했잖아.

응. 유학 간다는 얘기도 있었고.

 

그들이 손바닥에 놓고 관찰하던 것은 학생증이었다. 단순히 흘겨보고 지나치려는데 눈에 들어온 사진에 시선을 고정했다. 앳된 티가 나지만 확신이 섰다. 확연히 호시의 얼굴이다. 액세서리와 메이크업이 없지만 호시였다. 헤어스타일도 다르고 가넷빛 머리도 아니었지만 원우는 한눈에 알아챘다.

출처를 고증한다. 아주 예전에 복도를 걷다 누군가와 어깨를 부딪쳤던 적이 있다. 잠깐 뒤를 보고 다시 앞을 걸어가는데, 문득 지나가시던 문학 선생님이 자신을 불러세웠다. 네가 떨어트렸니? 하고 쥐여준 것을 확인하기 위해 손을 펼쳤다. 원우는 약간씩 한 발짝 늦기 때문에 얼떨결에 받아버린 학생증을 뒤늦게 살펴봤다. 이거 제 것 아닌데. 돋움체로 쓰여 있는 이름을 읽었다. 권순영……. 너희 반에 권순영 있어? 지나가는 애한테 물었더니 성급한 고갯짓을 받았다. 결국 한 명씩 붙잡고 묻다가 쉬는 시간을 다 써먹었다. 어쩔 수 없이 주인 없는 학생증을 바지 주머니에 넣어놓았고 말끔히 잊어버렸다. 집에 돌아와서는 내일 꼭 돌려줘야겠다고 다짐했으나 책상에 있던 학생증은 곧 무관심에 묻혀버릴 어딘가로 들어갔다. 그래서 권순영은 전원우에게 미문으로 남았다.

이걸 왜 네가 갖고 있냐. 한 친구가 물었다. 몰라 주웠나 봐. 원우는 가치를 관념했다. 그사이 다른 하나가 말을 붙여 온다. 나중에 동창회 할 때 만나면 전해줘라. 그러자 항상 비관을 품는 친구 한 명이 말에 살을 덧붙였다. 만날 수나 있냐, 얘.

왜?

얘네 집안이 말이야……, 너희 그 소문 몰라?

 

 

자려고 누워 천장을 보던 호시는 호출을 받았다. 귀에 꽂은 이어폰에서 삑, 하는 기계음이 들려와 단숨에 청각을 곤두세우고 원인을 쫓았다. 누구야, 카르피야? 버튼을 누르고 작은 목소리로 묻자, 잠에 취한 목소리가 얕게 흘러나온다. 아니요. 수장님 저 자고 있어요. 수장님도 자고 있을 때 이어폰 끼지 마세요……. 카르피는 대번 연결을 끊어버렸다. 멋쩍어진 호시는 자세를 고쳐 정면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또 호출이 들어온다. 아이씨, 진짜. 신경질을 내며 이어폰을 빼려 했다. 그러나 그 순간, 낯설고 차가운 음성이 흘러나와 호시는 몸을 일으켜야 했다.

 

눈을 떴을 때는 깜깜한 천장이 머리 위를 덮고 있었다. 주변은 살짝 밝은 감이 있었는데 이는 투명한 아크릴 박스에 붙은 조명이 강하게 빛을 쏘고 있었기 때문이다. 박스 안의 사라진 역대 히어로들의 유품들을 향해. 호시는 실험대 같은 대리석에 누워 발끝을 본다. 저 멀리 서있는 눈들과 마주쳤다. 가운을 입은 사람들이 다가와 호시를 에워싸더니 두 손을 잡아채 호시를 일으켰다.

호시씨가 가진 기억을 지우려고요.

한 명이 단숨에 털어놓았다. 얼떠름했다. 입에서는 메마른 목소리가 나온다.

무슨 기억.

아실 텐데요. 호시씨 능력의 팔 할을 아버지한테서 받으셨잖아요. 그 대단하신 일 세대 히어로가 눈물 나는 희생으로 호시씨를 살리셨고. 모든 능력치를 호시씨에게 주입하는 대신에 아버지께서는…… 슬픔을 감출 수 없는 일이었죠.

말이 끝나기도 전 호시는 순식간에 재킷 안에서 총을 꺼내 자세를 잡았다. 눈앞의 대상을 향해 총구를 겨누는데, 그에게서 조소가 담겨있는 높은 톤의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뭐 하시려고요? 그거 작동 안 되는데.

그 말에 방아쇠를 당겼으나 총알은 일직선으로 뻗어 나가다 가루가 되면서 소멸했다. 

너희 나 조종해?

호시는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자신에게 의구심을 품으며 신경질적으로 총을 던졌다. 바닥에 튕긴 총은 부품이 갈라져 조각되어 곳곳으로 뿌려졌다.

마음만 먹으면요. 뭐든지 가능한 시대니까요.

남자는 어깨를 으쓱하며 웃었다.

호시씨가 팀원들과 달리 아직도 과거의 기억을 갖고 계신 건. 카르피, 사이먼, 루이. 이 세 사람의 기억을 뺏어서 능력으로 전환해 쓰시기 때문이라는 거. 모르는 척하시는 건가요? 그러기도 쉽지 않은데…… 남들 기억을 한두 번 지워보셨나요. 호시씨가.

떨리는 손을 진정하기 위해 이마를 짚었다. 실험대 위에 앉은 채 고개를 숙이며. 유독 유념했던 팀원들과의 추억이 회고되어 머리가 아파졌다. 호시는 자신의 과거를 안다. 그러나 자신과 달리 팀원들은 과거를 기억하지 못한다. 그들은 히어로가 되어서 새로이 태어났다. 새 삶을 살았다. 그들의 기억을 능력으로 전환해 호시에게 주입했기 때문이었다. 호시는 그 사실을 최근에야 알았다. 처음 본부에 갔을 때 획기적인 실험이란 문장을 늘어놓던 연구원이 자신에게 한 짓이 뭐였는지, 좀 더 빨리 알았어야 했는데. 호시는 너무 늦은 자신을 질책하는 데에 혼자만의 시간을 소비해왔다.

전에 아버지께서 왜 희생되셨나 물으셨죠. 그건.

잠깐 뜸을 들이고 남자가 말을 이었다.

다음을 위해서예요. 히어로들은 다음 히어로를 위해 희생해요. 원래 히어로, 아니 정확히 말하면. 히어로들의 수장. 그 위치가 그래요. 다음 그다음. 그다음의 다음 미래를 위해서 과거를 희생하는 포지션이거든요. 그것이 바로 발전이고. 히어로는 점점 더 강해져야 하니까요.

그래서 아빠를 죽인 거야?

호시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음. 글쎄요. 돌아가셨을까요, 잠드셨을까요. 아버지께서 워낙 공이 크셨죠. 업계의 발전에…… 이바지하신 것만 봐도. 그래도 좋게 생각하세요. 결국 이렇게 호시씨가 만들어졌잖아요.

어린 날의 호시는 아빠와 함께 수많은 히어로들이 사라지던 걸 보면서 곧 아빠도 흔적없이 사라질 거라 생각했다. 어린애가 꾸는 꿈. 그건 실제가 되었다. 처음엔 병이라 했다. 히어로가 걸리는 병이 있고 그 때문에 모든 능력을 잃고 영면에 든다고. 호시는 그 말을 믿었다. 히어로가 영원하지 못할 것을 알았으나 예상치 못하게 아빠의 죽음은 너무나 일찍 자신을 찾아와서 호시는 아빠가 죽어가던 매일, 연구소 지하를 찾아가 그를 살려달라고 빌었다. 아빠를 대신할 테니까 자신에게 수장의 삶을 달라 애원했다. 그때의 연구원들은 호시를 유의 깊게 여겨 실험 대상에 이름을 올렸다. 그러나 병이 있던 건 호시였다. 실험 중간에 그 사실이 밝혀져 연구원들은 상대적으로 더 미래가 뚜렷한 호시에게 강제적으로 아빠의 모든 능력을 옮겼다. 이틀에 걸친 긴 실험이 다행히 끝났지만 아빠는 다시는 숨을 뱉지 못했다.

그래서. 내 기억을 지우는 이유가.

드디어 본질을 찾는 듯한 물음에 남자가 미소를 짓더니 술술 본심을 드러냈다.

히어로의 자식은 탐나는 원석이에요. 호시씨가 자연적으로 갖고 있는 능력. 우리는 그게 필요했어요.

탁자에 올려져 있던 서류 몇 장을 호시에게 건넨다. 호시가 받은 그 문서에는 자신의 상세 정보와 함께 능력치가 낱낱이 기록되어 있었다. 어릴 때의 사진들도. 애초에 계획이었던 것이다. 히어로의 자식으로서 초능력을 갖고 태어난 호시의 모든 능력을 뺏기 위해서. 남자는 야망을 품은 눈으로 키를 낮춰 호시와 시선을 맞추고 입을 열었다.

호시씨의 기억으로 더 비열하고, 더 강한 히어로를 창조할 겁니다.

 

 

호시가 벌떡 일어나 바닥을 딛고 서자, 남자는 호시의 어깨를 밀쳐 다시 앉혔다. 표정이 굳는다. 머릿속이 비비 꼬인다. 어떻게든 탈출구를 찾아야 했다.

처음엔 그저 수면에 들게 하려 했어요. 뒤쪽에 보관실이 있거든요. 호시씨는 언제든 해체해서 연구할 가치가 있으시니까 거기다 넣어놓으려고 했어요. 영원히. 사후에도 박수를 받는 게 좋으시잖아요?

비소를 지으며 다가온 얼굴을 향해 침을 뱉고 싶다. 그러나 속속들이 밝혀지는 이면에 호시는 뻣뻣한 나무처럼 굳어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남자는 호시가 더 저릿한 감각을 느끼도록 자극적으로 수위를 높였다.

그런데 호시씨가 저희와의 계약을 어기셨죠. 원우씨 기억은 왜 안 지우셨나요. 민간인이 알면 안 된다 했잖아요…….

전원우. 처음으로 자신의 존재를 인지해준 사람. 그래서 특별한데. 구린 입에서 나온 이름을 듣자마자 반작용처럼 분노가 치밀어 오른다. 호시는 남자를 노려봤다.

도저히 못 들어주겠네. 야. 기억 지우는 거, 너희가 능력 주입할 때 생긴 거 아니야. 내가 터득한 거야. 너네가 수백 번 테스트하면서 읽으라고 준 책에 다 나와. 뭘 말할 거면 알고 씨불여. 히어로를 만드는 놈들이 이렇게 히어로를 몰라서야 돼? 뭐? 아빠가 나 때문에 희생한 거라고? 거짓말 좀 그럴 듯하게 해. 그냥 아빠도 나도 너네 딴엔 폐기처분 하고 싶었던 거잖아. 퇴화될 걸 알았으니까 버리려는 거잖아.

그리고, 들고 있던 문서를 갈가리 찢었다. 남자가 당황한 듯 흩날리는 종잇조각에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유희에 미친놈들. 퇴화된 히어로는 살아갈 가치도 없어?

이렇게 나오실 줄 알았어요.

남자가 전시된 아크릴 박스에서 작은 리모컨을 꺼내더니 벽에 붙어있는 커다란 화면으로 몸을 돌렸다. 리모컨을 누르자 화면이 켜지고 속속히 폐쇄회로 영상이 틀어졌다. 몇 등분으로 나누어진 영상은 대각으로 각각의 방을 비추고 있었다.

보이세요?

자고있는 팀원들이었다. 호시는 신경을 기울인다. 입술이 바짝 말랐다. 남자는 몸에 붙은 센서를 보라며 화면을 확대했다. 남자가 리모컨의 버튼을 누르자 팀원들의 옷에 달린 센서에 레드라이트가 켜졌다. 그리고 남자는 구석에 있는 정사각형 모양의 아크릴 박스를 가리켰다. 그 안에도 똑같은 센서가 들어 있었다. 센서를 보관해둔 아크릴 박스가 터진다. 하나둘 차례대로 펑펑. 급하게 울리는 레드라이트가 위험 신호를 알리면서 산산조각 된다. 후드득 소리를 내며 마치 불씨를 입은 탄가루처럼 눈앞에 떨어졌다.

제가 이걸 누르면 저것도 터질까요, 안 터질까요.

불안한 눈으로 곤히 잠든 팀원들의 모습을 순식간에 눈에 담았다. 말도 안 되는 일도 많고 싸움도 잦았지만 호시는 그들을 사랑했다. 사랑해서 문제였다. 자신을 믿고 따르는 일이 족쇄가 되어 그들의 발목을 붙잡고 있는 것은.

내가 어떻게 하면 돼.

원하는 대로만 해주시면요…….

남자는 작은 철제 상자에 리모컨을 넣어 자물쇠로 잠갔다. 그리고 빼낸 열쇠를 호시에게 흔들어 보인다.

드릴게요.

원하는 대로 할게.

드디어 말이 통하시네요.

닥쳐. 닥치고 내가 가진 우리 애들 기억들. 전부 걔네한테 다 돌려줘. 걔들한텐 이 일 안 맞아. 그러니까 다 해고해. 너희 우리가 보고 올릴 때마다 꼬투리 잡았지. 우리가 쓸모없는 놈들이라고 까던 거 누가 몰라. 루이가 본부 갔다가 들었대. 히어로는 무슨…… 야, 너 개소리 왈왈한다, 진짜. 처음에 뭐라 했어, 국가의 안보를 위해 히어로를 만들었다고. 그게 너희 평생의 이념이라고? 근데 너넨 최소한의 히어로 안보도 지켜준 적 없잖아. 이 중에 능력 가진 놈들 있어? 없지. 남들한테 다 없는 초능력 그거 없어야 마땅할 거. 그걸 갖고 태어난 기분이 어떤 기분인지 생각해본 적도 없는 새끼들이 입만 살아서.

남자는 굳은 표정으로 호시를 응망한다. 그 뒤에서 진을 치고 있던 나머지 연구원들이 둘에게 다가왔다. 

입이라도 살아야 목숨을 유지할 수 있는 겁니다.

남자가 주머니에서 파란 끈을 꺼내 호시의 손목을 잡았다. 호시는 이에 반항한다. 무딘 신음을 내며 손목을 당겼다.

비거댄유얼스는 변하지 않아요. 호시씨는 앞으로도 게임 안에서 영웅으로 남을 거예요. 그게 저희의 애도 방식이고요.

끈이 다 묶여갈 때쯤 호시는 직감적으로 주변을 살폈다. 어둡고 푸르렀다. 깨진 아크릴 박스의 조명이 영글어 망막에 맺힌다. 남자가 호시의 손목을 내려놓으며 뒷사람에게 명령했다.

전원우. 걔가 호시 정체 아는 애야. 걔도 데려와.

야.

손목에 묶인 파란 끈은 차갑고 고요하다. 끊어지기만을 기다리는 것처럼. 호시는 손목을 주시하던 시선을 거둬 남자를 봤다.

말귀 못 알아 처먹어? 내가 뒤지겠다 했잖아. 그러니까 살아야 하는 사람들은 다 살리라고. 나만 죽으면 아무 상관 없는 사람들이잖아. 나만 죽으면 되잖아. 수장으로서 마지막으로 지시하는 거니까 들어.

범처럼 날 선 시선에는 질긴 단호함이 담겨있다.

 

 

얘네 집안 완전히 망한 거 몰라? 어머니는 이혼했다고 하고, 아버지는 어느 날 실종되었다는데. 친척들은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지. 자퇴한 이유도 전 학교에서 이상한 소문 퍼져서 그렇다더라. 그런데 정확하진 않아. 아는 사람이 없는 거 같던데. 선생님들도 쉬쉬하고.

그래도 권순영이랑 친한 애 있지 않았냐. 너 앞반이라 알 거 아냐.

김지우? 걔는 그래도 일 학년 때까지 잘 살았어. 그러다 이 학년 되자마자 전학 갔지, 아마? 와. 야, 왠지 무섭다.

무섭긴 뭐가.

조용히 잠자코 있던 원우가 끝내 다물고 있던 입을 열었다.

내꺼야.

묻지도 않은 질문을 반박하며 친구가 들고 있는 학생증을 뺏었다. 그 탓에 일제히 모이는 시선. 원우는 반反하지 않고 발걸음을 옮겨, 일부러 그들에게 눈을 맞추지 않았다.

 

 

밤이 되자 적막에 잠긴다. 방안 곳곳에 즐비한 비거댄유얼스의 로고가 박힌 물건들과 캐릭터 인형들. 좋아한 시간만 쌓여갔다. 이제는 게임을 넘어서 살아 움직이는 호시가 눈앞에 자꾸 떠올랐다. 자기와 같은 학교 학생이었다는 사실과 함께. 권순영. 원우는 혀끝으로 이름을 발음했다. 실제 권순영을 만나고 나니 그제야 어떻게 지나갔는지도 몰랐던 그날의 모든 기억이 표피를 자극해왔다. 침대에 누운 채 권순영을 당겼을 때 안겨 오면서 나던 향기. 픽셀로 그려지던 그래픽이 아닌 사람의 말랑한 피부. 쨍하게 붉었던 머리카락. 말도 안 되는 일이잖아. 원우는 주머니에서 호시의 학생증을 꺼냈다. 다시 봤다. 직접 묻고 싶었다. 히어로가 된 이유를 듣고 싶었다. 그리고 말하고 싶었다. 내가 왜 당신을 좋아하는지. 눈앞을 찌르는 형광등 빛에 빨려 들어갈 것만 같아서 눈을 감았다. 그러나 그때, 베란다 쪽에서 무언가 소리가 들렸다. 똑똑. 노크 소리. 원우는 몸을 일으켜 베란다를 잇는 창문을 열었다.

있었네.

그곳에 호시가 서 있었다. 베란다 난간에 붙어서. 호시는 활짝 웃더니 난간을 넘어 방안으로 들어왔다.

할 일도 없고 해서.

낮에 문자 보냈는데.

아…….

원우의 말에 호시는 머뭇거렸다. 그 모습에 원우는 살포시 웃음이 났다. 실실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답장 보내는 걸 까먹었나 보더라. 원우는 구태여 덧붙인다. 혹시 내가 뭐 잘못한 게 있을까? 호시는 아무 말 없이 원우를 봤다. 처연한 표정에 원우는 대번 걱정이 서렸다. 그래서 호시를 달랬다. 걱정하지 마. 나 약속한 거 지켜. 아무한테도 너 봤다고 얘기 안 했어. 앞으로도 안 할 거고. 그제야 적당한 변명을 찾은 호시가 반응했다.

히어로는 바빠.

그래. 그런데 조금 전에 할 일 없다며.

원우의 말은 호시를 황당하게 만들었다. 멋쩍어진 호시는 입술을 쓸며 말을 이어갔다.

문자나 전화하지 마. 어차피 연락 와도 답 못해. 그리고 나 이제 기억 못 지워. 시간도 못 멈춰. 투명해지지도 않아.

왜?

잃어버렸어. 방법을.

그럼 호시가 아니잖아.

그래도 나는 나거든.

신경질을 낸 호시가 원우의 침대에 앉았다. 실리는 무게에 침대가 푹신하게 꺼졌다. 원우도 따라 옆에 붙어 옆자리를 차지했다. 그리고 살며시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었다. 직사각형의 학생증이 손에 잡혔다. 할 말이 있는 걸 눈치챈 호시가 원우를 쳐다봤다. 원우는 머뭇거리다가 결국 학생증을 꺼내 호시에게 건네 보였다. 호시가 그 학생증을 받아들었다.

이거 어디서 났어?

복도에서 주웠어. 돌려주려 했는데…… 미안.

학생증을 이리저리 살폈다. 자신의 예전 모습에 옛 기억이 소환된다.

있잖아. 이거 자퇴하는 날 내가 버리고 간 거야.

그러자 원우의 눈이 커진다. 숨 막히는 고요 속에서 서로를 본채 서로를 공유하고. 온전히 이해하는 형태가 되고 싶었다. 그래서 원우는 호시의 슬픔에 물들어갔다.

우리 아빠가 그날 돌아가셨어. 내가 아빠를 대신해서 살게 된 걸 알았다면 거기 가지도 않았을 텐데. 나 때문에 아빠가 연구소로 끌려가서…… 나 살리려고. 나 대신 아빠가. 뭣 같다. 내가 이 짓을 왜 한다고 했을까, 원우야.

괜찮아 나한테 다 말해도?

나 다 말한 거 아니야.

호시가 원우의 어깨에 기대어 오자 원우는 천천히 호시의 반대편 어깨에 손을 올렸다.

힘들지.

힘든데도 말이 없다. 외려 말하지 않는 것은 호시의 신조일까, 권순영의 신조일까. 원우는 본연의 모습을 알고 싶었다. 그게 어떤 방향에 있든 간에.

힘들면. 나 안고 있을래?

갑작스레 나온 달콤한 제안에 호시는 원우와 눈을 맞췄다. 원우를 잡아당겨서 품에 안았다. 원우는 맞닿아오는 호시의 두 볼을 감싸 쥐곤 두 엄지손가락으로 메마른 눈가를 쓰다듬었다.

나 안 우는데.

우는 척이라도 해.

그 말이 기폭제가 되었는지 눈을 깜빡이자 눈물이 흘러내렸다. 원우는 그걸 지워냈다. 그래도 물은 자꾸만 내려와서 길처럼 자국이 생겼다. 그 위로 입술을 붙였다가 뗐다. 원우는 자국을 지웠다. 아래로, 아래로. 그런데도 계속 계속 흘러서. 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려서, 턱 아래까지 입술을 맞대야 했다. 잡고 있던 목에서 손을 뗀 다음에 옷 안으로 손을 넣었다. 맨들맨들한 살갗이 손바닥에 쓸린다. 열을 옮기면서 원우가 호시의 입술을 물었다. 닿았다 떨어지는 소리가 여러번 반복했다. 원우는 호시에게서 별을 본다. 별과 우주를. 우주 안에서 통합체로 살아가는 성운을. 호시는 천제를 구성하는 빛을 닮았다. 그건 생명력이자 존재를 부각시키는 힘이었다. 원우는 호시와의 공존을 염원한다. 간지러운 원우의 손길에 열이 올랐다. 뜨거워지는 몸에 희열을 느끼면서 호시는 자기 쪽으로 원우를, 두 눈을 똑바로 본 채 그 얼굴을 눈에 담았다. 초콜릿색의 눈동자를 깊게 봤다. 원우를 자기의 영역에 놓고 싶었다. 원우의 영향을 받아 무엇이라도 되고 싶었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호시는 원우를 하염없이 끌어당겼고 원우는 기꺼이 효용한다.

 

다음 날 아지트로 돌아온 호시는 밝은 팀원들의 모습을 한참을 지켜봤다. 평화로운 주말의 당연한 풍경 속에서. 너무 오래 지켜봤는지 까르륵 거리며 대화를 쌓던 팀원들이 호시를 의식하고는 대화를 멈춘다. 루이가 호시에게 물었다. 수장님은 원우씨 어디가 좋아요? 갑작스러운 질문에 호시는 자기 앞의 노트북으로 시선을 돌린 뒤 대꾸했다. 일단 몸매가 진짜 섹시해. 못 들은 걸로 할게요. 오케이. 둘의 단호한 대화를 듣고 있던 사이먼이 실실 웃었다. 사이먼은 소파에 거꾸로 누워서 초콜릿 빵을 한입 물었다. 수장, 오늘 어디 가세요? 연구소. 아침부터 일찍 가시네요. 응. 그전에 원우 보러 갈 거야. 호시는 노트북을 닫고 코트를 걸쳐 입은 뒤 아지트를 나섰다. 

 

루이와 사이먼이 거실에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꼬물거리던 차에 카르피가 황급히 방에서 나왔다. 연구소에서 오라고 연락 왔어요. 사이먼과 루이는 얼굴을 마주 봤다. 우리를?

 

또 왔네. 베란다 창문을 열자 호시가 노크하던 손을 멈췄다. 응. 뭐해? 가볍게 버드키스를 나누고 떨어지니 원우의 뒤로 보이는 모니터 화면이 반짝였다. 아, 나 막 지금……. 원우는 호시의 눈길을 따라갔다. 학생이 공부는 안 하고. 어? 호시는 가까이 다가가 모니터를 본다. 인디고 색 빛에 둘러싸인 캐릭터 호시의 머리 위로 금색의 타이틀이 반짝거렸다. 와, 대박. 너 레벨 장난 아니다. 

 

비거댄유얼스의 세계 안에서 원우는 높은 위치에 있었고 그건 열혈팬임을 입증하는 자료이다. 어느새 자리를 잡은 호시는 원우에게 게임 설명을 요구했다. 나 실제로는 처음 해봐. 순진무구한 호시에 원우는 가까이 붙어서 마우스를 잡은 손을 포갰다. 이것도 알려 줘. 이것도. 아, 그거는 어떻게 해? 호시가 던지는 여러 질문에 원우는 하나하나 답을 놓치지 않았다. 원우가 가르쳐주는 대로 호시는 처음으로 자신 캐릭터를 컨트롤했다.

근데 너는 나를 왜 좋아해?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묻는 호시에 원우는 되묻는다. 

내가?

응. 너 나만 하잖아. 내 것만 레벨이 이렇게 높은데? 

캐릭터가 귀여워서.

내가 귀여워? 어깨 위로 얼굴을 가까이 붙이고 있던 원우의 목을 손가락으로 어루만지자 원우는 고개를 꺾고 살이 닿을 듯 말 듯한 거리에서 속삭인다.

너말고 캐릭터가.

호시는 원우의 뺨을 밀었다.

 

 

늦은 오후가 다 돼서 눈을 떴다. 연구소에서, 천천히 기억과 역량을 죽여가며 살았다. 무능력이 병처럼 자신을 좀먹어서 결국에 나는 법까지 잊어버렸다. 남은 건 지금까지도 붙어있는 숨. 하나 뿐이었다. 곧 호시는 아지트로 발걸음을 옮긴다. 마지막 만남이 될 것을 예감했다.

분위기 왜 이러냐.

문을 열자마자 보이는 팀원들의 착잡한 표정이 그 무거운 분위기를 읽게 했다. 숨 막혀오는 공간에서 마침내 먼저 입을 연 건 루이였다.

너 왜 말 안 했어.

뭐가.

우리 이제 이런 짓 하지 말자.

힐책하는 사이먼은 활기가 없다.

저희 다 들었어요. 오늘 연구소 갔다 왔거든요.

눈치를 보던 카르피가 상황을 정리하자 호시는 그제야 눈치를 챘다. 우려했던 문제가 벌써 일어나고 있었다. 설마 했지만. 이렇게 빨리 진행될 줄은 몰랐는데. 호시는 애써 웃는다.

나 죽을 때 기억 돌아오게끔 해달라 했는데 벌써 돌아온 거야? 본부 놈들이나 연구소 놈들이나 매번 자기들 멋대로고, 어째 아닌 애들이 없어.

네가 권순영인 거 왜 말 안했어.

야, 불만쟁이.

그냥 덮어두려고 했지만 그럴 수 없다. 기억이 돌아온 루이의 두 눈이 발갛게 붉어져 있었기에. 호시는 몸을 떠는 루이를 껴안았다. 면직물 밑으로 단단한 뼈가 느껴졌다. 지금이라도 돌아와서 다행이다. 우리 학교 다닐 때 진짜 재밌었지, 김지우. 어때? 난 그랬는데. 미안해. 나 때문에 여태까지 김루이로 살게 한 거. 그 자리에서 김지우는 끅끅거리며 울음을 참는다. 노란빛 머리가 검게 물들어 변해갔다. 아무리 울어도 좋은 지금이었다. 한적한 교실에 남은 둘. 어린 나이의 두 사람이 교실을 떠돌며 유영한다. 어지러움을 겪고 난 미래 그 안에서. 교복을 입은 권순영과 김지우가.

 

 

아빠는 날 살리려다 돌아가셨어, 그러니까 이번엔 내가 살릴 차례야. 원우야, 너를.

나를?

이른 아침부터 팀 에이치는 원우의 집에 모여있다. 원우는 호시의 말에 이해가 안 된 순박한 얼굴로 의문을 가진다. 사이먼이 능글맞게 웃으며 옆구리를 찌른다. 수장님. 지금 고백하는 거예요? 놀란 호시가 손사래를 쳤다. 고백은 무슨……. 그러나 말과 다르게 얼굴이 붉어진다. 원우는 부끄러워져 당황한 호시의 뺨을 어루만졌다. 루이가 두 손을 모으며 말을 꺼냈다. 걱정할 거 없어. 별일 아니야. 호시 능력이 퇴화됐잖아. 그거 업그레이드 하러 가는 거야. 원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카르피는 생각한다. 어찌 보면 도박이고 어떻게 보면 계략이지만 이는 사실 과거를 환기할 목적이다. 새파란 잡음이 묻어있는 연구소 지하에서 죽어가던 영웅을 살리려던 소년이 바라던. 회귀의 갈래에 서서 시작점을 바라보는 꼴이었다.

 

이게 좀 길어질 수 있어.

난 너 올 때까지 기다리면 되고? 

응. 할 수 있어? 

어. 잘할 수 있어.

 

원우의 인사는 호시가 들은 마지막 음성이자 위안의 목소리로 남았다.

 

팀 에이치는 철장 밖에서 연구소를 바라봤다. 노을이 져가는 초가을에는 차갑지도 후덥지도 않은 바람이 분다. 밟히는 땅을 발로 쓸 때마다 흙이 채였다. 붉은 하늘에 까만 새들이 줄지어 날아간다. 여기까지 됐으니 이제 반전. 센서 다 뺐지? 루이의 말에 나머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걔네들이 바로 우리 찾으러 올 거야. 지피에스가 빠를까 우리가 빠를까. 사이먼은 긴 파란 머리를 포니테일로 올려 묶었다. 루이가 두 팔을 걷으며 사이먼의 물음을 반박한다. 당연한 질문을 해. 능력 있는 사람들은 다 여기 있는데. 카르피가 루이를 올려다본다. 씩 웃는다. 셋을 셌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바로 뛰어가서 지하로 잠입하는 철칙. 몸의 반동 때문에 바람이 얼굴에 닿는 게, 간지러웠다. 입구에 들어온 루이와 사이먼이 첫번째 실험실에서 숨이 멎어가는 호시를 찾았다. 곧 붉은 머리가 눈에 띈다. 실험대 위에 정자세로 누워있는 형색이라니. 사이먼이 혀를 찬다. 우리 작전이랑 딱 들어맞아. 루이가 실타래처럼 엉켜있는 선을 쫓아 코드를 뽑았다. 그 순간 빨간 불이 켜지더니 벽에 붙은 폐쇄회로가 그들을 감지하고는 일제히 한 방향으로 그들을 비춰 주시한다. 코드 에러, 침입자 발생. 연신 울리는 사이렌이 공간을 삼키자 수많은 발이 계단을 내려오는 소리가 점점 커졌다.

 

기억을 거슬러 올라간다. 지금을 대비하기 위해 마련해 놓은 장치를 풀 시간이다. 사실은 어제. 피곤에 지쳐 카르피가 곤히 잠든 사이, 기억을 되찾은 자리에서 호시는 숨겨 놨던 계획을 공개했다. 있잖아. 나 안 죽을거야. 거래는 깨라고 있는 거잖아. 호시가 당연하듯 읊조리자 사이먼이 반색을 하며 동시에 박수를 쳤다. 한껏 여유를 찾은 분위기에 루이도 안심하여 둘을 봤다. 사이먼과 루이는 파안하며 머리를 맞댔다. 내가 죽을 때 아무도 지키고 있지 않을거야. 우리아빠가 죽을 때도 그랬거든. 그러니까 만약 변하지 않는다면. 호시는 돌돌 말린 지도를 펼쳤다. 여기 실험대의 코드를 뽑으면 영면은 멈춰. 까만 선으로 그어진 직선. 그 위에 손가락을 댔다. 근데 아마 난 이미 반쯤 죽어있는 상태일 테니까 깨울 시도도 하지마. 바로 못 깨어나거든. 그리고 칠 초 뒤면 사이렌이 울리기 시작할거야. 그럼 연구원들이 내려오겠지. 계단에서 벽 쪽으로 손가락이 지도 위를 왔다갔다 흔적을 남긴다. 필요하다면 아크릴 박스에 있는 히어로들의 무기를 꺼내 써. 가장 왼쪽 끝에 있는게 내 총이야. 거기에 화약을 돌돌 말아 탄피처럼 만들어서 넣어놨어. 반납 할 때 아무도 확인 안하더라.

 

실험실을 뒤져서 찾은 망치로 사이먼이 박스를 하나씩 깨부쉈다. 카르피는 부숴진 아크릴 조각을 치우곤 수장이 두고 간 총 두자루를 손에 쥐었다. 그 안에 화약탄피가 들어있다. 카르피가 계단 앞을 막아서자, 그 뒤를 사이먼이 따른다. 루이는 계단이 막힌 그 틈을 타 발전실을 찾아 아래로 내려갔다.

 

 발전실에 도착한 루이는 재빨리 주위를 둘러봤다. 발전실에는 폭탄 제어장치가 있어. 구석에서 발견된 글자 WANNING. 빨간 알파벳에 노란색 띠를 두른 벽에 붙은 문이 수상해보인다. 루이는 벽 중간에 붙은 문을 열었다. '지상층의 모든 폭탄을 한꺼번에 컨트롤 하는 버튼이 여기 발전실에 있으니까.' 내부는 혈관처럼 얽혀있는 고압 전선의 천지였다. 중간에는 시간표시등이 있었다. 루이는 전선을 헤쳐 벌레처럼 다닥다닥 붙어있는 버튼을 찾아냈다. 전부 눌렀다. 시간이 얼마 없다. 표시등에 시간대신 픽셀화된 글자가 나타났다. B2 00:10. 남은 시간이 십초밖에 안돼? 인상이 절로 찌푸려진다. 지하 이층은 십초 안에 폭발할 것이다. 그 순간 문 밖에서 크게 터지는 소리와 함께 회색 연기가 뻗어 나왔다. 불길이 치솟아 오르고 있었다. '폭탄은 지하실 복도 양 쪽에 두개씩.' 일층과 이층에 총 네개. 루이는 밖으로 나와 위층으로 올라가기 위해 복도 끝으로 뛰었다.

'지상 일, 이, 삼층은 각 실험실 안에 작은 방이 하나씩 있어.' 화약이 짙게 실험실 안을 에워싸더니 시야가 완전히 차단된다. 카르피의 무기가 효과가 있다. 뛰쳐내려오던 연구원들이 가려진 시야를 붙잡고 괴로워하는 그때에 사이먼은 밖으로 나가 지상층으로 올라갔다. 첫번째로 보이는 실험실 안으로 들어가니 벽 끝에 굳게 닫힌 까만 문을 발견했다. '방 안에는 자폭용 폭탄이 하나씩 설치되어 있을거야. 잊지 말고 확인 해.' 사이먼이 문을 열자 경고음이 삐빅거리며 울기 시작했다. 빈 공간에 폭탄이 덩그러니 놓여져있었다. 1F 00:50… 49, 48, 47 한 단위씩 카운트가 되자 사이먼은 초조해졌다. 삼층도 가봐야 하는데. 주위를 살피다 자연히 창문 밖으로 시선이 옮겨졌다. 맞아. 나는 날 수 있는데. 왜 뛰어다니고 있는 거야. 창문을 연 사이먼이 단숨에 창틀을 딛고 올라선다. 

 

지하에서부터 시작된 폭발이 금방 연구소 내부를 휩쓴다. 카르피가 염력으로 잠들어 있는 히어로들을 밖으로 옮기고 나서, 연구소는 마침내 몸에서 머리 끝까지 불이 붙어 타올랐다. 자폭용 폭탄이 설치되어 있다는 거 어떻게 아셨어요? 카르피가 궁금한 얼굴로 물어온다. 수장이 알려줬어. 연구소 지도를 훔쳐 왔더라고. 사이먼은 묶었던 머리를 풀었다. 어이 없어. 권호시가 마지막 인사라고 나한테 했던 말이 뭔지 알아? 루이는 어깨를 들썩거리며 웃었다.

 

내가 죽을 일은 없어, 라고…….

 

마지막 실험실 안쪽에 들어가면 연결 된 방이 있어. 여기. 잠들어 있는 히어로들이 여깄으니까 나만 구하지말고 다 구해. 

지도를 짚던 손가락을 떼고 팀 에이치를 의기 양양하게 바라본다. 팀원들의 모습이 비친 수장의 두 눈 안에는 스스로 빛을 내는 별이 서려 있다.

너희들이 해내야 해. 해줄거지. 내 마지막 지시야.

 

 

겨울 넘어 봄이다. 가까운 대학에 입학해 서너달 동안 아르바이트를 전전하고 있다. 두꺼운 책에 무거워진 가방을 메고 사람들로 북적이는 캠퍼스를 나선다. 도서관에서 너무 많은 시간을 지체했다. 책이 다 대출중인 상태라 대체할 것을 찾느라 오래도록 책장 앞에 서있었던 탓이다. 벚꽃잎이 떨어진 길을 밟으며 뛰어갔다. 발에 채이는 꽃잎들이 한번 튀어오르고 다시 흩날리더니 공기를 타고 내려왔다. 함께 불어온 온화한 바람이 얼굴을 감쌌다. 덕분에 땀이 주르륵 흐른 채로 카페에 도착했다. 개시를 앞두고 있어 바로 유니폼을 갈아입었다. 그때, 접힌 카라깃을 정돈하고 있는데 문이 열렸다. 달려있는 작은 종이 처음 카랑하게 울려서 신경을 놓칠 수 없었다.

주문 해도 될까요?

네. 주문 받겠습니다.

다가온 목소리에 뒤를 돌아본 원우는 갑작스럽게 스며드는 봄기운에 재채기를 했다. 붉은 머리가 그새 색이 빠졌는지 분홍빛으로 변해있었다. 싱그러운 웃음이 원우를 마주하고 있다. 원우는 자기도 모르게 입꼬리를 올렸다. 주체하지 못할 정도로 완전히 봄이다. 가버린 뒤에 아무 소식도 없더니. 만남을 계획한 게 아니어서 그동안 힘들게 참았다. 보고싶어서. 메마른 그리움만 먹던 날들이 죽고 눈보라를 버틴 겨우살이가 꽃피는 순간. 하얀색 니트는 꽤나 잘 어울려 보인다. 베시시 짓는 웃음이 안개꽃을 닮은, 눈 앞의 피사체에 원우는 반한다. 비로소 사랑스러움이 다시 찾아왔다. 얼어 붙어 있던 계절 하나가 지나서야.

너 진짜 잘 기다렸네.

네가 인디고 색이면 나도 인디고로 물들어. 네가 가넷이면 나도 가넷빛으로 물들어. 모든 성운이 너에게서 뿜어져 나왔듯이 죽기 전까지 나는 네 색으로 물들어 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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