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해.
…내가 뭐라고 했게. 현재의 손끝이 영원에게 가닿는다. 영원은 대답 대신 현재의 입술을 손톱으로 문지른다. 좋아한다고. 영원이 느리게 속삭이자 현재는 입술을 매만지던 영원의 손을 잡아끌어 제 볼에 갖다 댄다. 멈춘 시간이 촘촘히 기록되는 장면. 발설하는 이는 일절 없다. 적막만이 감싸 흐르는 영원과 현재의 시공간 그 틈에 먼저 반응을 보인 건 지금까지의 기록이 담긴 아리플렉스 카메라다. 둘은 35㎜ 필름에 감겨 잠긴다. 잠시 후에 컷 소리가 나면 순영은 달뜬 숨을 내뱉고 주위를 환기한다. 수고하셨습니다. 개운한 얼굴로 분주히 들뜬 모든 이에게 인사를 한다. 세트 장 밖을 나서는 순영에게 감독과 여러 스태프들이 뒤돌아 손을 흔든다……. 현재 잘 가. 순영은 꾸벅 고개를 숙인다. 장영원. 부름에 원우가 몸을 돌린다. 어디가, 같이 가야지. 팔짱을 껴오는 순영이 웃는 것은 사랑스럽다. 원우는 순영과 가까이 몸을 밀착하고 일전에 오늘 촬영이 끝나면 숙소까지 걸어가기로 했던 것을 떠올렸다.
일부러 소리 내 밟지 않아도 뽀드득하는 음률이 순수하다. 밟힌 눈 자국은 햇빛보다 선명히 하얬고 부츠와 스니커즈가 눈을 흡수해 축축해져도 둘은 기찻길을 건너가 수북이 눈 쌓인 길을 열심히 걸었다. 도로 옆으로는 연한 색의 복층 집들이 한가로이 늘어서 있다. 저 멀리 보이는 산등성에도 눈이 가득하다. 하늘을 자른 전기선에 맺힌 이슬이 눈물처럼 떨어져 머리 위가 한겨울에 젖는다. 원우는 빛에 반하고 순영은 빛에 덮인다. 원우는 순영에게도 반했다. 햇살을 머금은 순영이 이 순간 가장 밝아서. 남들이 들으면 우스운 얘기로 들리겠지만 함께하는 이 시간이 초 단위로 소중한 탓이라 어쩔 수 없다. 짙푸르게 무성한 침엽수는 노르웨이의 숲처럼 줄지어 있는데, 그 이상향의 고즈넉함을 순영이 깨운다. 걸으니까 좋다. 원우가 순영을 본다. 숙소 가면 코코아부터 마시자. 몸 좀 녹이고 싶어. 순영이 소곤거려서 원우는 대답하듯 팔을 빼 순영의 손을 잡았다. 손을 들어 보인 순영은 깍지를 낀다.
풍경을 눈에 담으며 도착한 곳은 딱 두 명 정도가 머물 수 있는 언덕에 위치한 료칸. 순영은 피곤하다며 신발을 벗자마자 마루에 대자로 누웠다. 뒤이어 원우가 무거운 코트를 벗어 편한 맨투맨 티셔츠로 갈아입고 주전자를 찾는다. 가득 물을 담아 가스레인지 위에 올린다. 해가 노릇이 익는다. 오후 다섯 시. 구름에 깔리는 시간이었다. 째깍거리는 시계 앞에서 평소 동경하던 작가의 산문집을 꺼내 읽는다. 식탁에 턱을 괴고 책 장을 넘기는 원우를 서서히 감기는 눈으로 응시하던 순영은 완전히 잠에 빠진다. 때마침 순영을 깨우려는 듯이 주전자가 뜨거운 김을 분출한다. 원우는 준비해놨던 두 개의 컵에 물을 담았다. 일어나. 이거 마셔. 누워있는 순영을 발로 툭툭 쳤으나 순영은 일어날 기미가 없다. 대신 앓는 소리를 내며 몸을 웅크린다. 해달라 해서 해줬는데 이러기야? 원우의 말에 반쯤 눈을 뜬 순영이 팔을 뻗었다. 나 손 없는데. 잡아달라는 응석이었으나 원우는 완고하다. 그러지 말고… 좋은 말 할 때 해줘. 순영의 보챔에 할 수 없이 식탁에 컵을 올려놓고 손을 맞잡는다. 벚꽃색 앞머리가 살짝 젖은 순영의 시선이 함초롬하다.
좋아해 삿포로에서 손현재 역을 맡게 된 권순영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원우가 순영을 처음 만난 그날은 했던 모든 말소리의 떨림까지 잊지 못할 기억으로 남을 만큼 특별한 기록이다. 대본을 읽는 내내 원우는 눈 앞의 활자와 순영의 숨소리에 신경을 곤두세웠다. 휩쓸렸다. 앞서 상대 역 배우가 순영으로 최종 캐스팅이 됐다는 소식을 들었던 터라 기대되는 자리였으니. 원우는 뛸 듯이 좋았다. 줄곧 관심 가지던 배우였으므로. 처음엔 동경이었다. 인디 필름 계의 아이돌이라는 수식어가 내내 순영의 이름 앞에 있었는데, 순영의 출연작들은 담백한 청춘이나 불완전한 학생의 이야기가 주가 되어 이를 뒷받침했으며 그로인해 원우는 자기도 몰랐던 취향에 스며들어 청춘 영화와 순영에게 빠졌다. 정확히는 순영이 나오는 청춘 영화. 마음엔 잔잔한 작은 불씨가 일렁였다. 그러니 대본을 받기 전부터 로케이션이 삿포로로 잡혀있음을 알 수 있는 제목에 겨울 환상에 관한 낭만을 가졌고 무난히 합격을 받은 오디션과 감독이 문자로 전해준 스케줄 통보는 가족들에게 급히 알린 전언이 되었다. 그리고 첫 미팅 자리에서 꿈에 그리던 순영을 만난 것은…… 행운이었다. 순영도 이 작품을 좋아할 거라 했던 추측이 들어맞은 셈이다. 설마 했는데 이어진 접점이 믿기지 않았다. 기회를 놓치기 싫어서 돌아가려는 길에 마음을 고백했더니 보답으로 전화번호를 얻었다. 휴대폰을 내밀던 손이 떨렸으나 순영은 그 떨림마저 좋아해 주었다. 저도 원우 씨 연기 잘 보고 있어요. 순영이 활짝 웃으며 손을 잡아 오자 원우는 엷게 붉어졌다. 그 후로 자주 만났다. 영화와 관련된 이야기들로 알게 되는 서로의 취향은 점점 서로의 교집합 속에 맞춰졌고 둘은 겹겹이 쌓여 견고해졌다. 가로등 밑에서, 사람 없는 영화관에서, 한적한 길가에서, 한강 변 또는 서로의 공간에서 함께하는 시간이 늘어갈수록 원우는 마음을 주체하지 못했다. 사랑했다. 사랑한다고. 사랑하니까 말했다. 순영이 고백을 들은 날은 진눈깨비가 촘촘히 흩뿌려지던 새벽이었다. 순영은 고스란히 받았다. 쏟아져 나오는 절절함을. 원우의 찬 숨까지. 사랑했다. 결국 순영도 참지 못해 말했다. 사랑한다고.
삿포로에 가기 전날 저녁에 원우는 순영에게 전화를 걸었다.
내일 삿포로 가는 거 준비 다 했어요? 아, 맞다 우리 반말하기로 했지. / 응. / 약속했잖아. / 응…. / 응만 하지 말고. 뭐해 순영아. 설마 자나. 나랑 통화하면서 자는 거야? / 하기 전에도 자고 있었어. / 아, 자고 있었어… 자기 전에 나랑 말하면 안 돼? 나 할 말 많은데. / 내일 얼굴 보고 말하자. / 진짜? 그럼 공항에서 만날까. / 정우 형이 데리러 온다고 했는데. / 매니저 형이 데려다주는 거 말고.
그 이후로는 어떤 소리도 나지 않아 원우는 뜸을 들인 뒤 다시 입을 연다.
순영아. / 응. / 만나서 같은 자리에 앉자, 응? / 알겠어. / 뭐야 아직도 졸려? / 응. / 알았어, 다시 자. / 어. 너도 잘자.
졸린 말투로 뱉는 목소리가 졸음에 수차례 눈을 끔뻑이는 순영을 머릿속에 그린다. 잇새로 터져 나오는 웃음. 아직 잘 시간 아닌데 나는. 그리고 전화를 끊었다.
오늘 좋아한다고 했던 거 진심이야. 코코아가 담긴 컵을 얼굴에 가까이 붙이자 얼굴을 감싸 오르는 김이 덥고 습하다. 순영은 원우가 건넨 코코아를 한입 마신다. 대고 있는 입술에 온도가 오른다. 손현재가 하는 말이 아니라? 원우는 읽던 책을 덮고 순영에게 다가간다. 뭐야, 권순영이 하는 말이야. 노랑 퀼트 담요를 몸에 맞춰 덮고 있는 순영이 뾰로통한 얼굴로 원우를 응시한다. 그 모습이 귀여워 원우는 단숨에 앉아 순영과 마주 봤다. 말에는 섭섭한 어투가 묻었다.
야. 영원도 결국 현재를 사랑하게 되는데, 넌….
난?
넌 뭐냐고.
나는 당연히 권순영을 사랑,
…하나? 원우의 장난에 순영이 담요를 뒤집어쓴다. 모르겠으니 그만하자는 뜻이다. 일종의 저항. 어떨 땐 달달하다가도 장난으로 귀결되는 원우에게 당할 힘이 없다. 원우가 얼굴까지 가린 담요를 들쳐 제 몸을 욱여넣는다. 왜 들어와. 순영이 머그컵을 들이민다. 위협하려는 태세였지만 원우는 꿈쩍도 안 한다. 너 보고 싶은데 네가 얼굴 가리니까. 둘의 얼굴 사이로 뜨거운 코코아가 열을 내뱉는 모양새. 모든 게 간지러운 상황에 원우는 순영의 손을 잡는다. 손을 살살 만지자 순영이 힘주던 손에 힘을 푼다. 순영에게 뺏어온 미지근해져 가는 코코아를 마시는 원우는 순영을 지긋이 바라보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순영은 괜히 자신의 볼을 한번 쓸어내린다. 발갛다. 원우가 컵을 밖으로 치우고 순영의 허리를 당겨 안는다. 등에 닿는 원우의 손도, 맞닿는 시선도 뜨거웠다. 이제 두 얼굴 사이엔 아무런 가림막도 없다. 살짝 마주 붙는 코끝에 시선을 내리자 원우가 고개를 꺾어온다. 조금 전까지 마셨던 코코아 때문일까. 무더운 온기에 휘감아지며 입술이 닿는다. 맞닿았다가 떨어지는 소리는 한참을 방안에 소곤대는 잡음이 되고. 얼마 후에 살며시 입술이 떨어진다. 느껴지는 숨이 뜨겁다. 널 사랑 안 하면 이러지도 못하지. 속삭이며 눈을 맞춰오는 원우에게 순영은 눈을 깜빡이다 더워, 라고 대꾸한다. 내 사랑에 대해서 할 말이 그거야? 싱겁게 한번 웃은 원우가 다시 순영을 끌어안는다.
우리 온천 들어갈까.
더 더워지게?
응. 얼마나 더워질 수 있나 궁금해서.
순영이 끄덕거리자 둘은 자리에서 일어난다. 유카타 가운으로 갈아입고 밖으로 나와보니 어느덧 까만 밤이다. 하늘을 가득 메운 촘촘한 별들을 올려다보다 물속으로 들어갔다. 전해지는 뜨거움에 몸이 노곤해져 눈을 감고 골골대는 순영에 원우가 그만 웃음을 터트렸다. 너 몇 살이냐. 뭐가… 따땃하고 좋으니까 그러지. 원우는 순영의 앞머리에 손을 대고 열을 잰다. 이마에 올린 손이 볼을 타고 내려가 쇄골에 닿는다. 저릿해지는 감각에 순영은 몸을 떤다. 뭐하냐. 순영이 묻자, 원우는 말갛게 웃으며 물을 튀긴다. 뜨거운 물줄기에 순영은 이를 악물고 더 세게 물을 튀긴다. 웃음소리가 욕장을 가득 메우며 흩뿌려지더니 잠시 후퇴하듯 물속으로 들어가 버린 원우가 눈만 내밀고 순영을 올려다본다. 올망졸망한 눈망울이 꼭 주인에게 놀아달라고 보채는 고양이 같다. 한참 서로를 보다 결국 몸을 일으킨 순영이 원우를 벽에 밀었다. 우리 내일 키스신있잖아. 원우의 파인 옷깃을 잡고 말문을 연 순영의 눈빛이 심상치 않다. 응. 순영이 혀로 입술을 쓸며 말을 잇는다. 그거 대비해서…. 잠시만 왜 가까이와. 가만히 있어봐, 연기 연습 좀 하게. 연기를 하려는 거야, 나를 갖고 놀려는 거야.
둘 다.
목덜미에 두 팔을 감아 맞붙은 얼굴. 가까워진 둘은 서로의 시선을 읽으며 숨을 죽인다. 난 내일 마지막 촬영인데 너는. 한참이 지나 먼저 입을 연 건 순영이다. 나는 내일 모레 끝나. 어디서? 저기 산에서. 하나 남았어, 인서트 회상 씬. 아 그럼 보고 싶어서 어떡하지. 보면 되잖아, 끝나면 연락해. 알았어. 어디 가서 추위 타고 있지 말고 따듯한 곳에 있어. 따듯한 곳 네 품 말고는 없는데. 야 너 뜬금없이 그런 소리하지 마. 왜, 부끄럽냐? 부끄럽긴. 그냥 아직 면역이 안 돼서. 무슨 아직도 면역이 안 돼. 지금쯤이면 하고도 남아야지. 일갈하는 순영에 원우는 바짝 웃는다. 그 말 후회 안 해? 순영이 대적한다. 내가 왜. 그러자 원우가 순영을 떼어놓고 몸을 돌려 순영의 옷자락에 손을 집어넣는다. 야, 여기선 잠깐만. 급작스럽게 벌어진 일에 당황한 순영의 만류를 들은체하지 않는 원우는 순영의 옆구리를 야릇한 손길로 매만진다. 덕분에 원우의 목덜미를 감싼 옷자락을 쥔 순영의 손에 힘이 들어간다. 야, 물속에서는…. 순영의 쇄골에 키스 마크를 남기던 원우가 이번엔 귓바퀴를 핥는다. 원우야……. 힘겨워하는 순영의 목소리가 신음처럼 들려오는 탓에 원우는 순영의 앞섶을 풀어 이곳저곳에 손길을 남긴다. 달가워진 열에 누그러진 순영은 눈이 반쯤 풀린다. 전원우 진짜 내 말 안 듣지. 순영이 제재하려 원우의 손을 잡자 그제야 순영의 귀를 깨물던 원우가 동작을 멈춘다.
가루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콧잔등에 눈꽃이 떨어진다. 느닷없이 찾아온 손님에 순영이 눈을 깜빡거린다. 그 새에 원우는 순영의 귓가에 숨을 불어넣었다. 난 물속이 더 좋아. 비밀스럽고 더 야하잖아.
헤집어진 머리를 하곤 마주 보고 앉아있는 다음 날 아침. 정갈한 소반에 젓가락을 올려놓고 멍하니 있는 둘의 모습에 조감독이 손뼉을 치며 지나간다. 야 진짜 현실적이다. 우리 헤어랑 코디 분 상 받아야겠네. 우스갯소리가 촬영장에 울려 퍼져 몇몇 사람들이 까르륵댔으나 둘은 잠자코 가만가만하다. 현재는 진짜 졸린 거 아니지? 아니에요, 저 지금 연기하는 거예요. 어제 뭐 했길래 둘 다 골골 대. 그 말에 황급히 회피하는 시선. 어제 뭘 좀 하기는 했는데…. 현재와 영원의 눈이 마주쳤다가 빠르게 떨어진다. 영원이 웃음을 참지 못한다. 현재는 복화술을 썼다. 웃지마 전원우. 뭘 잘했다고.
슛 들어갈게요. 씬 하나가 끝나자 바로 현재의 단독 씬으로 이어진다. 한편 세트장 한쪽에선 주전자가 맹렬히 물을 끓이고 있다. 그리고 옆에는 코코아 티백이 배치되어있다. 항상. 영원은 촬영 내내 코코아를 달고 살았다. 다른 장소에서 촬영하다가도 쉬는 시간엔 세트장으로 돌아와 컵에 코코아를 따라 마시던 게 습관이었다. 이를 보던 조연출은 영원이를 코코아 공장 아들 역할로 했어야하나봐, 하고 농담을 뱉곤 했다.
감독님 현재 또 자요. 늘 그렇듯 원우가 종이컵을 입에 물고 중얼거리자 현재는 눈을 거들뜨며 원우를 노려본다. 현재 눈떠라, 얼마 안 남았잖아. 저 안 자고 있었습니다. 눈뜨고 있었어요. 거짓말. 현재가 자신의 머리를 흐트러트리며 지나가는 원우의 발목을 치자 원우가 반응으로 재깍 다리를 들어 올린다. 감독님 현재 폭력 써요. 아, 장영원이 자꾸 놀리잖아요.
잠시 끊었다 가겠습니다. 장비 가져올게요… 다음 씬 준비해주세요. 여기선 달리(dolly shot)로 찍고…. 다음 촬영을 준비하는 현장이 분주해졌다. 수군거리는 스태프들을 뒤로한 원우는 쭈그려 앉아 순영과 눈높이를 맞춘다.
이따 데리러 올 거니까. 끝나고 어디 가지 마.
그러던가.
전에 약속했잖아. 까먹었어? 끝나면 같이 가기로 한 거. 항상 그랬잖아.
안 까먹었거든.
근데 왜 또 투덜대.
네가 자꾸 놀리니까 그렇지.
어떡해 그럼, 너만 보면 자꾸 놀려먹고 싶은데.
진짜. 그런 너를 나야말로 어떡하냐.
순간 너는 나를 이기지 못한다던 원우의 말이 떠오른다. 전원우 뭘 믿고 그렇게 자신감 넘치는 거야. 나한테. 순영이 삐죽거리며 노려보자 원우가 순영의 이마를 살짝 때린다.
귀 좀 대봐.
나왔다. 전원우 전매특허. 원우는 가끔 순영의 어깨나 귀를 깨물었다. 애정표현이란 수식어를 앞세우지만 누가 봐도 장난치고싶어 하는 일이지. 반응이 웃겨서 좋다나 뭐라나. 다른 곳도 많은데 쟤는 왜 유독 내 귀를 좋아하는 거야. 순영이 원우의 얼굴 곳곳을 살핀다. 응? 순영아. 보채는 전원우. 옷깃을 잡으며 애절하게 구는데 당해낼 수 없다. 짜증 나 그 표정. 결국 내가 또 이렇게 봐주잖아.
너 내 귀 깨무는 거 그거 안 좋은 버릇이야.
그래서 싫어?
나직하게 묻는 목소리에 얼굴이 달아오른다. 시선을 둘 곳이 없어 곧바로 정면을 봤다.
안 싫어.
그 말에 원우는 남들이 못 보게끔 입가를 가린 채 순영의 귓가에 다가간다. 반사적으로 움츠러드는 어깨. 아픔을 감지하려던 찰나에 의아하게 물컹한 것이 닿는다. 입술이 붙었다 떨어진다.
사랑해.
원우를 돌아봤다. 깨물 줄 알았는데. 토끼 눈이 된 순영이 일부러 원우와 눈을 맞춘다. 볼이 발그레해진 원우가 배시시 웃고는 순영의 앞머리에 손을 뻗는다.
앞머리 너무 갈라졌다.
전원우때문에 달이 뜬다. 아침인데도. 너는 정말 내가 못 당하겠어. 부드럽게 넘어가는 앞머리의 감촉과 이마에 닿는 네 손가락을 사랑해서. 순영은 마음을 먹는다. 달뜨는 이 기분을 감추지 않기로.
다음 주에는 모든 촬영이 종료되었다. 삼 개월간의 삿포로에서의 여정. 모든 스태프와 출연진들이 모여 왁자지껄한 선술집의 풍경은 오후 시간을 넘어 저녁이 된다. 현재랑 영원이 고생했어. 한꺼번에 우르르 쏟아지는 격려와 위로를 고스란히 맞는다. 순영은 자리에서 가게 안을 둘러보다 뭉클해져 눈가에 눈물이 어렸다. 좋아하는 사람들과 함께하는 순간이 얼마나 소중한지, 그 감동에 먹먹한 가슴 한구석에 꺼낸 말을 전한다. 정말 고생 많으셨습니다. 다 같이 기분 좋게 건배를 하고 잔을 부딪친다. 이제 한국 돌아갈 일만 남았다. 한 명이 내뱉은 말에 다들 안도의 한숨을 뱉는다. 뿌듯하고 보람 가득했던 날들이었다. 그 기록을 되새김질 하듯 곧이어 저마다의 이야기들로 회포를 풀기 시작한다. 그 틈에 순영이 몸을 숙여 원우에게 속삭였다. 나가자.
여기저기 배웅을 받으며 먼저 나온 둘은 손을 맞잡고 걷는다. 원우의 마지막 촬영을 끝으로 모든 일정이 끝나면 삿포로 시내를 데이트하자 했던 약속때문이었다. 설레는 발걸음으로 아스팔트 길을 올라가면 비밀스러운 곳이 하나 나오는데, 거의 사람이 찾지 않는 산이라 운치 있는 장소였다. 처음 이 동네에 왔을 때 순영이 발견했던 곳이다. 눈이 녹지 않고 쌓여있는 산에는 눈을 입은 나무들이 즐비해 있다. 한 발짝 내디딜 때마다 눈이 밟히는 소리가 귓가를 자극했다. 와, 여긴 정말 아무도 없구나. 아무 소리도 안 들려. 그래? 난 눈 밟히는 소리와 네 심장 소리 들리는데. 너 자꾸 그런 말 하지 마.
왜.
붕 뜨잖아.
그래서?
구름 위를 걷는 기분이야.
아하하. 구름 위를 걷는 기분이야? 잘됐다. 나도 그렇거든.
그때 바람을 따라 눈이 내린다. 볼에도 머리에도 눈송이가 붙었다. 더 세게 손을 잡아 오는 원우에 순영은 바짝 붙어 팔짱을 끼고 얼굴을 기댔다.
다행이네. 나만 그런 게 아니라서.
푸른 산속을 여행하고 내려온 곳은 늦은 저녁의 번화가다. 고딕 양식으로 건축된 시계탑과 성당을 지나면 성탄절이 가까워진 시기에 거리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선물을 사가는 사람, 코트 깃을 휘날리며 발걸음을 빨리하는 사람. 외식을 마치고 나오는 가족들. 다정한 주말의 광경이 느리게 흘러간다. 지나가는 가게마다 걸린 꼬마전구와 입구에 비치한 눈사람 인형과 쌓여있는 선물더미는 설레는 마음을 증폭시켰다. 그러다 걸음을 멈추어 선다. 소중한 추억을 남겨보세요. 쓰여 있는 문구에 둘은 동시에 서로를 봤다. 어떤 말이 좋을까. 편지를 적어 인형과 함께 트리에 걸어놓는 이벤트였다. 이것 좀 봐 이거 너 닮았다. 순영이 쌓여있는 인형들 틈에 꺼낸 여우인형을 원우의 얼굴 옆에 대보고 킥킥 웃는다. 질세라 원우가 햄스터 인형을 찾아 꺼낸다. 색이 좀 별론데. 툴툴대는 순영에 원우는 순영의 어깨를 친다. 난 조금 촌스러운 것도 좋아.
천천히 흘러 흘러 돌아가는 대관람차 안에서 나란히 앉았다. 투명한 유리창 아래로 눈에 훤히 담겨오는 도시의 야경은 빛을 낸다. 둘은 빛에 반한다. 카메라가 있지 않아도 현재와 영원은 함께하는 순간을 사랑한다. 그건 당연한 일이었다. 관람차가 둘을 땅에 내려줄 때까지 둘은 하늘의 별과 서로의 속삭임을 공유했다.
밤이 지나고 푸르스름한 아침에 떠날 채비를 한다. 돌아갈 때는 둘이 같이 가겠다고 전해놓았던 터라 빠르게 움직이지 않아도 괜찮았다. 거기다 순영의 매니저는 원우가 순영에게 어떤 존재인지 이미 눈치챈 상태고. 그러니 둘의 시간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순영은 속으로 고마워 했다. 둘은 스태프들과 한국에서 보자는 인사를 한 뒤 그들을 떠나보낸다. 원우는 옷을 갈아입고 순영은 양말을 올려 신었다. 가기 전까지 코코아를 마시던 원우는 그 모습을 보다 니트 소매를 걷어붙여 순영에게 베레모를 씌운다. 이게 더 잘 어울려. 귀엽고. 털모자를 들었다 놓은 순영은 고분고분 가만히 있는다. 원우가 흰 목도리를 감겨주고 회색 체크무늬의 코트 단추를 여며줄 때까지.
걸어서 도착한 역에는 사람이 몇 없었다. 여기봐봐. 순영이 고개를 돌리자 찰칵하는 셔터 소리가 난다. 뭐야, 갑자기 찍냐. 말도 없이. 왜 생동감 넘치고 좋잖아. 폴라로이드 사진이 바로 출력되자 나온 사진을 흔들어 보던 원우가 허리를 접어가며 웃었다. 아 진짜 웃긴다. 왜 어떻게 나왔어? 궁금증을 못 이기고 붙어선 순영이 사진을 확인했다. 고즈넉하던 역 안이 해사한 웃음소리로 가득 메워진다. 뭐야. 전원우 제대로 찍지도 못하네. 알았어, 다시 찍어줄게. 이번엔 포즈 잡아봐. 군데군데 쏟아진 눈은 빛을 반사해 일렁이는 아지랑이를 피워낸다. 녹이 슨 선로와 활짝 갠 맑은 하늘. 느리게 흐르는 시간. 둘은 그 차가운 풍경을 유심히 보다 틈새를 파고드는 찬바람에 열을 내기 위해 몸을 움직이기로 한다. 역 안의 우동가게에서 주문을 하고 나란히 서서 뜨듯한 국물을 마셨다. 얼었던 코끝과 손가락이 노곤히 풀어진다. 신칸센 열차가 들어올 때까지 원우와 순영은 둘의 우주 안에서 새벽 공기를 마셨다. 영화 속의 영원과 현재처럼.
감독의 실험적인 작품이라는 말로 좋은 평가를 받은 <좋아해, 삿포로>는 개봉과 동시에 화제를 끌었다. 환상적인 이국의 낯선 풍경 속에서 찾아가는 청춘 군상이라 내건 타이틀이 사람들 사이에서 입소문을 타더니 실시간 검색어에도 이름을 남겼다. 둘의 간질거리는 연애를 기대하며 모인 사람들은 어느새 자리를 꽉 메웠다.
시사회 인사를 하러 가기 전, 대기실은 현재와 영원 둘뿐이다.
2005년의 늦겨울. 신촌에서 잡화점을 운영하는 부모님을 도와준 대가로 휴가를 얻은 사진학과 대학생 '영원'(전원우)은 '현재'(권순영)와 함께 각각 필름카메라와 폴라로이드를 들고 오래된 꿈의 안식처인 설국을 담으러 떠나기로 한다. 그런데 떠나기 전 영원은 신문사 면접을 앞두고 자료를 찾기 위해 들린 옛날 스튜디오에서 우연히 칠 년 전의 어린 현재와 만나게 되고. 얼떨결에 현재의 숨겨진 학창시절 비밀을 알게 된 영원은 앞으로 함께할 삿포로 여행에서 무슨 일이 생길지 초조해지는데……. 과연 삿포로는 둘에게 해피엔딩인 안식처가 될 수 있을까?
뒷면의 서문은 군더더기 없이 담담하다. 서로가 마주 보고 있는 포스터 가운데엔 제목이 흘림체로 적혀져있다. 잘 나왔다, 예쁘게. 그러게. 그런데 너 언제까지 나 안고 있을 거야. 우리 이따 바로 나가야 하는데. 원우가 뒤에서 순영을 안으며 등에 얼굴을 비빈다. 으음… 따듯해질때까지. 웅얼대는 목소리가 아이같이 순수한 탓에 순영이 피식 웃는다.
추워?
응. 살짝.
저거 온도 더 높여야겠다.
순영은 원우를 떼어내 난로 앞으로 움직였다.
순영아.
어.
좋아해.
그 말에 멈춰 서서 원우를 본다. 난로 앞에서 쬐던 손에 열기가 전해진다. 원우는 덤덤히, 그러나 쑥스럽게 웃었다.
내가 뭐라고 했게.
이 순간은 하룻 밤의 꿈이 아니기를. 영원한 현재는 앞으로도 영원할 거니까. 그러니 시간을 가로질러 우리는 보이지 않아도 설국이었다. 설국에서부터 가져온 마음이 풍선처럼 부풀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