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애하기로 했다. 전원우랑.
전원우는 19쇄까지 발행된 자기 삶을 바둑돌로 수놓았고 나는 그걸 펼쳐보는 관찰자에 불과했다. 그랬으나……, 분명 그랬는데 언젠가부터 전원우는 한여름 뙤약볕 아래서 공명한다. 이건 전원우의 인생에 끼어든 다른 한겹의 페이지. 벤치에 앉은 전원우의 눈동자가 왔다 갔다, 네트를 넘어가는 공을 따라 고개가 돌아가니까 우리의 위치는 뒤바뀐 거다. 이번엔 내가 당했다. 전원우가 나를 관찰하고 있다.
전원우와 내가 상생이 맞지 않는다는 건 공공연한 사실로써 이에 기반하는 근거들은 저기 저기 한 트럭으로 쌓여있다. 예를 들어 내가 양 볼 가득 밥알을 욱여넣을 때 전원우는 깨작거리다가 젓가락을 놓는다는 것. HP 포션을 마시지 않아도 회복되는 나와 다르게 픽 쓰러지고 픽 누워버리는 전원우의 나른한 고상함. 턱을 타고 흘러 생긴 끈적한 땀 자국을 나는 몇번이고 지우려 할 때 저 멀리 풍겨 나오는 전원우의 은테 안경 너머 차갑고 날이 선 시선. 그런 것들. 말하지 않아도 굳이 알 수 있는 것들을 반 아이들도 알고 있었고 우리는 교집합으로 엮일 수 없었다. 동전의 양면인 우리가 어떻게 가까워질 수 있는가. 이 물음은 삼학년이 된 반 안에서 전원우와 내가 짝꿍으로 만난 그때부터 내 머리 한 쪽에 자릴 잡았는데…….
이런데 어떻게 전원우랑 연애를 한다고.
그건 나도 잘 모르겠다는 것이다.
또 권순영이야. 누가 할 소리. 새 봄春 첫날에 사춘春기 제대로 걸린 아이들처럼 싸우기. 그 첫번째 장은 붙어 놓은 책상 두 개를 약간의 틈새를 벌려 띄워놓는 일부터. 전원우는 턱을 괴고 오른쪽으로, 나는 팔을 뻗어 얼굴을 묻고 왼쪽을 본다. 왼쪽만. 이래서 내 시간엔 전원우가 없고 전원우의 시간엔 내가 없다. 우리는 같은 공간에 있지만서도 서로의 영역에 참견하지 않았다. 그거야 먼저 관심 가지는 사람이 지는 거니까. 나는 그렇다. 전원우도 그렇게 생각할 거고. 무신경한 표정 뒤에 숨긴 마음이 훤히 보이는 판국. 전원우도 그렇겠지. 나는 걔가 잘한다는 소릴 들으면 온종일 신경이 쓰이고, 어른들한테 예쁨받으면 질투가 나고 나도 잘할 수 있는데 하는, 오기가 생긴다. 그들이 아닌 척 은근히 나와 전원우를 비교할 때마다 자존심이 깎여 쓸려나가는데 이건 전원우도 같을 것이다. 그렇지만 전원우 걔는 원체 무슨 생각을 하고 다니는 건지 도저히 모르겠다. 내가 뭐라해도 지 인상만큼이나 차가운 투로 관심 없는 척 구니까. 어리숙한 건지, 알면서 일부러 피하는 건지…. 웃긴 놈. 나는 배 아파 죽겠거든.
우린 서로 반작용한다. 전원우는 도 대회에서 두 번이나 금상을 먹었다. 일등이란 얘기다. 나는 손가락 부상 때문에 동메달 하날 목에 걸어보지 못했다. 꼴등도 못 했단 얘기. 그 순간 내 그래프는 바닥을 향해 기울고 전원우의 그래프는 상향을 타고 위로 뻗어 나간다. 손가락이 아물기까지 늦어진 탓이 몇 퍼센트 있기야 하지만 실질적 이유는 전원우 수상 소식에 짜증이 치밀어올라서가 컸다. 대회 불참을 밀어붙이던 코치님 의견을 거절하고 내 마음대로 대회에 참가했다. 전원우보다 잘 해내겠다는 마음에. 그리고 보기 좋게 떨어졌다. 예선에서.
그게 작년이었고 올해는 다르기를 바랐다. 전원우랑 안 붙겠지, 안 붙겠지 수십번 되뇌었지만 그런데도 운명은 우리를 또 붙여놨다. 들어오는 선생님마다 한마디씩 거들었다. 둘이 또 같은 반이네, 라고. 바람을 탄 그 소문의 말풍선은 점점 커져서 심지어는 옆 반 문까지 열고 잠입해 몸집을 불려 나갔다. 어느새 오십명도 안 되는 삼학년 전체가 저마다 앞다투어 놀리기 시작했다. 같은 반…. 같은 반에 같은 앞자리. 나란히 옆에. 같은 반은 진짜 무슨… 징그럽게.
전원우와 내가 공들여 싸워 세운 공든 탑이 한참 전에 머리 위를 넘어섰다. 작은 땅덩어리 섬마을에, 적은 학생 수에, 티끌만 한 특기생은 유일하게 두 명. 지역 내 촉망받는 고등학생 스포츠인 두명. 나는 테니스공을 무기로, 전원우는 바둑돌을 무기로 삼아 버티며 사는데 자연히 비교를 안 할 리야 안 할 수 없는 상황이다. 관심이 우리에게 쏠려있는 것도 당연했다. 공부는 뒷전인 쳇바퀴를 돌려가며 사는 우리 둘은 연필 안 집어도 됐고 남들보다 일찍 하교했으니까. 언젠가 한 번은 전원우가 지나가는 말로 그런 적이 있다. 마치 이곳에 문제없는 문제집을 풀으러 오는 것 같다고. 학교라는 공간에서 보통의 일과를 벗어나 다른 일에 몰두해 사는 게 아이들의 선망을 얻는 작용이 되었던 것도 같다. 그런데 과연 문제집에 문제가 없을까. 권순영은 좋겠다. 만날 일찍 집 가고. 좋기는… 너네가 라켓 들고 개처럼 잔디를 뛰어다녀봐야 알지. 나는 책상에 머리를 파묻은 채 반박했다.
그리고 어느새 칠 월의 허리. 연주황빛 능소화와 자주색 과꽃이 피는 계절. 시간은 꽃송이가 여물기 시작해 설렘이 가득 차오르는 계절로 익어가고 있었다. 그런데 그 무렵에 말도 안 되는 일이 내 앞을 가로막게 되었다. 나는 상상도 못한 전개. 지금부터의 이야기는 전원우가 어떻게 내게 스며들게 되었는지에 대한 기록이다.
여느 때와 다름없는 늦은 주말 오후, 곧 있을 시합을 앞두고 체력단련을 위해 현관에서 신발 끈을 조여 묶고 있었을 때 등 뒤에서 엄마가 나를 불렀다. 순영아! 왜! 이거 원우한테 갖다줘. 뭐, 전원우?
깜짝이야. 그게 그렇게 놀랄 일이니. 놀랄 일이다. 무조건 놀랄 일. 무의식으로 있다가 가끔 그렇게 전원우를 떠올리게 되면 기분이 이상하단 말이야. 짜증 나고 화나고 답답하고. 나도 모르게 어안이 벙벙해선 놀란 얼굴로 뒤를 돌아다봤다. 걔랑 사이도 그닥 안 좋은데 엄만 진짜…. 현관으로 나온 엄마에게서 레몬청을 빼앗으며 중얼거렸더니 등을 맞았다. 그럼 원우랑은 언제 친해지니. 원우 어제 기원에서 소대회를 열었는데 거기서 또 이겼다더라. 너도 원우처럼 다음엔 꼭…, 알았어. 그만해! 전원우 얘기만 하면 비교가 되는 내 인생. 나는 한숨을 쉬곤 현관문을 박차고 나왔다. 아래층으로 내려가야 전원우의 집이다. 집도 붙어있고, 이게 뭔 바보같은 신의 장난인 건지. 복도를 걷는 내내 발밑은 찼다. 신발 밑창이 다 닳았나 보다.
어색하게 초인종을 누르고 잠자코 있는 게 벌써 두 번째. 그런데 아무리 세 번째, 네 번째 벨을 더 울려도 문밖으로는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아무도 없나? 저녁놀이 질 때 부는 서늘한 바람이 반팔 소매를 스치고 지나갔다. 번뜩 소름이 끼쳤다. 야 전원우. 문을 두드리고 이름을 불렀으나 여전히 감감했다. 진짜 아무도 없는 건가? 싶어서 귀를 갖다 댔는데 그 순간 활짝 열리는 문. 문에 귀를 정통으로 맞은 나는 화들짝 놀라 뒷걸음질을 쳤다. 백발의 노인이 등장했고 그는 검지로 자신의 안경테를 올렸다. 아, 안녕하세요. 저, 원우…. 오, 미안해요. 다쳤구나. 아니요, 괜찮아요. 오랜만이네요. 할아버지. 전원우의 할아버지는 그대로의 모습이었다. 어렸을 때 봤던대로 그대로. 오늘 할아버지 오시는 날이었나보네. 할아버지는 가끔 아주 가끔 섬마을에 찾아오시곤했다. 어쩌다 명절에 한번, 가족 생일잔치에 한번, 그런데 오늘은 왜 오신거지. 문득 드는 생각에 곰곰이 고민하던 찰나, 할아버지께서 먼저 말문을 여셨다. 그런디… 누구? 아, 저 순영이요. 윗집사는. 원우랑 같은 반이요, 할아버지. 원우. 원우… 아아. 우리 손주 찾아 왔나보네. 네. 맞아요. 할아버지.
할아버지를 따라 열린 문으로 들어섰다. 실례하겠습니다, 하고 고개를 들어 앞을 봤다. 그런데 하필이면… 전원우가 눈앞에 서있었다. 올드한 나무 식탁 위 유리컵에 물을 따라 꿀떡꿀떡 삼키면서 나를 그 특유의 나른한 표정으로 지긋이 노려봤다. 흰 티에 검은 바지를 입은 전원우는 갓 샤워를 하고 나왔는지 피부는 보드라워 보였고 머리는 젖어서 물이 뚝뚝 떨어졌다. 하얀 피부가 형광 불빛을 더해 더욱더 하얬다. 나는 빠른 속도로 식탁에 레몬청을 턱 올려놓고 아직도 느리게 물을 꾸역꾸역 마시는 전원우를 노려봤다. 나무늘보 새끼. 전원우는 모든 일에 무감했다. 나는 발을 떼며 전원우한테 쏘아붙였다. 임무 완수했으니 나간다. 그러자 전원우는 말로 다급히 내 발목을 붙잡았다. 가지 마. 잠시만.
…이거 마시고 가.
얼떨결에 전원우의 방에서 면대면, 일대일, 우리 둘끼리의 시간이 생겼다. 하나 특이한 게 있다면 전원우와 나 사이에는 바둑판이… 그것도 흑돌만 올려놓은 바둑판이 있다는 것. 전원우는 나의 귀가를 막아놓고 지 할 일만 하고 있다. 얄미운 놈. 말 할거라도 있는 줄 알았더니. 전원우는 자신의 손가락과 돌에만 집중했다. 뭐 하자는 거야. 그 자기 딴에만 고상한 얼굴을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꼭꼭 씹어 뱉어내고 싶었다. 내내 노려보는 동안에도 전원우는 아무 말이 없어서 하릴없이 내가 먼저 반응했다.
어떻게 칠 년이나 지났냐. 우리 진짜 쪼끄마할 때 첨 봤잖아.
이제 교복 벗을 때 다됐다, 영원히 학교 안 벗어날 줄 알았는데. 십 이년 어떻게 버티나… 그 생각했는데.
야, 전원우 너 또 이겨서 좋냐. 좋겠지, 기분 째지겠지.
쫑알쫑알. 묵묵부답인 전원우 앞에서 어쩌고저쩌고 순식간에 말을 하려니 갑자기 확, 하고 얼굴에 열이 들떴다. 괜히 말했다는 후회와 함께 밀려오는 창피함. 신경도 안 쓰는 전원우를 신경 쓰면서 나는 괜스레 옆에 놔둔 레몬청을 벌컥벌컥 마셨다.
너 왜 반응 없어.
컵을 탁 내려놓고 툭툭 벌침처럼 따가운 목소리를 내뱉자 전원우는 두던 바둑을 멈추고는 잠시동안 판을 뚫어지게 쳐다보며,
있잖아.
입을 열었다.
어, 그래 뭐.
내가 나이를 년에 한 살씩만 먹을까.
뭐?
여기 이 돌 말야. 이 흑돌… 나 같아. 매 하루하루 내일을 대비해서 포석을 깔면, 눈에 보이는 거야. 판이 다 보여. 사람들은 다 악수를 놓지 않기 위해 살아가는 거 같은데… 근데. 나는 뺄게 너무 많아. 하루종일 열심히 살다가 이거 할 때가 되면 마음을 비워야하니까. 필요없는 수는 다 빼야해. 얘는 사석. 죽었으면 바로 치워야 할 것. 얘는 쓸모없는 폐석. 이것도 버리고… 자충수까지 다 빼. 얘는 실수야. 살면서 하는 흔히 우리가 하는 실수들. 그럼 이렇게 해서 남은 돌은 전부 몇 개.
정갈히 놓여있던 돌들을 전원우가 한손으로 쭉 밀어 떨어트렸다. 바둑돌은 마루 장판을 데굴데굴 굴러가 흩어졌고 전원우는 남은 판 위의 돌들을 세며 일렬로 배열해 놓았다.
다섯 개. 사활을 걸어볼 수는 다섯개밖에 안 남아. 그래서 나는 매년 다섯 살은 먹는다고.
다섯 살씩 매년? 나는 전원우의 계산법에 기함한다. 바둑판에 남은 돌. 저건 전원우의 습성인 걸까. 의식인 걸까. 바둑에 대한 쟤의 생각을 내가 헤아릴 수 있기나 할까. 나는 머리를 긁적였다. 전원우는 메마른 목소리로 사람을 조용하게끔 만드는 데 뭔가 있다.
매해 다섯 살씩 열두 살 때부터 지금까지 칠 년을 이래왔으니까 서른다섯. 서른다섯에… 아니지, 서른다섯이 뭐야. 일 년이 아니라 하루씩을 따져봐야 해. 하루에 최소 두 판 한다 치고 삼백육십오에 두 배씩 칠 년 하면 오천백십 살. 여기에 다섯씩이니까 이만 오천오백오십 살….
전원우는 얼굴을 쓸며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입꼬리를 올린다. 나는 그때 전원우가 웃는 걸 처음 봤다. 웃는 전원우는 적당히 낯설어서 호기심을 자극했다. 남은 바둑돌을 하나씩 주워 통에 넣기에 얼떨결에 나도 전원우를 도왔다. 얘와 이런 얘기를 하는 것도 처음이다. 반에서나 하굣길에서나 언제나 얘의 등과 얘의 무표정한 얼굴만 봐왔는데, 이런 이야길 나랑 하다니. 전원우의 얼굴을 빤히 보던 중에 문득 그게 의식이 됐는지 전원우가 나를 봤다.
질기다. 왜 내 시간은 남들에 비해 몇십 배씩 초속하는 걸까.
갑자기 멍해진 나는 손을 멈췄다. 돌을 집어넣던 내 손에 전원우 손가락이 걸렸다. 나는 순식간에 손을 뺐다.
오래도 사네.
오십 년 산 사람이 나한테 내가 더 훨씬 오십 년은 산 거 같대.
누가 그래?
사범님이.
사범님이라는 말에 어렴풋한 기억이 꺼내진다. 초등학생때 가끔씩 등나무 밑에서 전원우를 기다리던 그사람. 점심에 자주 전원우를 데려가던. 창문가에 앉아있었던 나는 그 광경을 보면서 부럽다는 생각을 했었다. 전원우는 어렸을때부터 전기사 소리를 들으며 나와 다른 삶을 살았구나. 파도처럼 밀려오는 전원우의 과거가 머릿속에 끊임없이 고착되자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얘는 얘의 바둑을 두며 오래토록, 끊임없이… 삶을 상기하는게 습관이 되었나보다.
나보다 한달 늦게 태어났으면서. 그래 너 오래살았다.
바보같은 전원우. 이해하기 어려운 말이나 남발하고. 쟤는 분명 고등학생으로 다시태어난 할아범일거야.
잘 가. 전원우가 방에서 나와 배웅 같지 않은 배웅을 했고 나는 운동화에 발을 넣고 일어섰다. 그리고 마시던 컵을 싱크대에 배열을 맞춰 놓는 전원우의 뒷모습을 보다 말했다. 난 너를 평생 이해하지 못할 거 같다. 전원우는 내 쪽도 보지 않고 방으로 쌩 들어갔다.
마음대로.
문이 쿵 하고 닫혔다. 진짜 바보 같은 전원우.
다음날 나는 아침 조회에 참여했다. 원래는 운동장 트랙을 돌고 바로 코트로 들어가야 했으나 그날은 옷만 갈아입고 운동장 한가운데로 걸어갔다. 전원우가 조회 때 상을 받는다고 해서. 궁금했다. 수많은 사람의 박수를 받을 전원우는 어떤 표정을 지을지. 나는 일렬의 긴 줄을 무시하고 맨 뒤에서부터 뚜벅뚜벅 앞줄로 향했다. 이름이 불린 전원우는 조회대에 올라 교장의 말을 경청하고 있다. 한심한 새끼. 저걸 듣는 시간이 아깝다. 교내 대표로 나가서 저러고 있는 모습은 엿 같았다. 주변 아이들은 하나둘씩 웅성거리며 전원우를 찬양하기 바빴고 내 귓가에는 매년 다섯살씩 먹는다는 전원우 목소리가 repeat 되고 repeat 되고…… 나는 냉큼 이만 오천오백오십 살 먹은 전원우한테 소리치고 싶었다. 인생 달관한 새끼야. 네가 바둑 그만뒀으면 좋겠어. 상을 타면 수상자의 권위가 오르는 게 마땅했으나 전원우가 상을 타면 상의 권위가 올라가는 추세였다. 그건 나의 형극이되었다. 내 속에선 열불이 피어오르고 전원우 앞에 선 교장은 이빨을 내보이며 웃는데… 개새끼. 뭐가 좋다고 다들. 진짜 이러는 게 다 뭐가 좋다고. 조회대에 오른 전원우 뒷모습에 울화가 치밀어올랐다. 손만 다치지 않았더라면 저기 설 수 있었을 텐데. 작년 겨울부터 이번 봄의 끝물까지 주야장천 연습만 있었던 내 시간동안에 전원우는 한번의 대회를 더 나갔다. 특별함은 그에 맞는 기대치를 갖기 마련이다. 점점 라켓을 쥐고 있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전원우는 어떤 생각 중 일까. 남이 읽어주는 제 얘기에 어떤 기쁨을 가지려나. 트로피 수여가 끝나자 운동장이 떠나갈 듯 차오르는 박수 소리에 맞춰 전원우가 뒤돌아 꾸벅 인사를 할 때. 나는 입술을 씹었다. 전원우가 고개를 들어 나랑 눈이 마주친다. 신발코를 흙에 퍽퍽 때리면서 맨 앞에서서 씩씩대는 나와. 청정한 눈빛으로 미소짓는 전원우… 엿같아.
꺼져어어어어!
라켓을 바닥에 내리꽂자 튕겨오른 라켓이 둔탁한 소릴 내며 뒹군다. 장내는 일제히 조용해졌고 성난 음성에 이목이 집중되어 한꺼번에 모든 눈길을 받은 나는 옆으로 몸을 돌려 팔을 앞뒤로 휘두르며 성큼성큼 걸었다. 죽 늘어져서있는 아이들의 쏠린 고개들을 지나쳤다. 분이 실린 발길질에 흙이 채여 신발 안으로 자꾸 고여들어갔지만 나는 바짝 탄 입술을 씹으며 갈길이나 갔다.
그동안 너무 궁금했거든? 너 대체 왜 그렇게 그 바둑돌이를 신경 쓰는 거야? 내동댕이친 것을 언제 주워왔는지 테니스 가방 안에서 라켓을 꺼낸 코치 형은 의자에 풀썩 앉은 내게 물었고 나는 푸르죽죽한 이온 음료로 목을 축이며 형한테 흘깃 시선을 돌렸다.
싫어서.
왜 싫은데.
음료를 내려놓고 일갈하자 형은 피식 웃으며 나한테 라켓을 넘겼다. 나는 무릎 위에 안착한 라켓의 손잡이를 잡고 팔을 뻗었다. 누가 봐도 눈에 띄게 틀과 헤드가 살짝 휘어버린 모양이 이제 유용을 다 했음을 말해준다. 그런데 그 교차하는 줄 사이사이마다 전원우 얼굴이 보인다. 화가 솟구쳤다.
다 걔가 잘난 줄 알잖아!
나는 두 다리를 쭉 뻗고 목을 뒤로 젖혔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은 새파랗고 뻗은 발끝엔 공이 채였다.
좋아하잖아요, 다들. 걔가 뭐만 했다 하면 원우야 원우야 하면서 다 전원우찾고. 성적은 또 좋아갖고 이미지가 존나 범생이야. 시발 진짜 조금 전까지 나랑 말하던 애들도 전원우만 나타났다 하면 뒤돌아 서. 쌩하고 바로 뒤돈다니까? 전원우가 이겨갖고 오면 와 전원우 또 이겼대. 상대가 성인이었는데 존나 발라버렸대. 천재다 천재야. 바둑천재. 입이 마르도록 찬양하면서 내가 이기면 아무도, 아무도 신경도 안 쓰고. 질 때만 따지려 든단 말이야. 아 순영이 또 졌어? 하면서, 또 또 또! 이러면서! 그놈의 또… 짜증 나게 진짜. 이젠 져도 다 그러려니 한다고. 꼭 이기라는 응원도 아무도 안 해.
야, 너랑 걔랑 같은 선상에 두면 안 되지. 걔는 바둑이고 너는 테니스고. 게임이라는 것만 같지. 쓰는 도구가 완전히 다르면서 무슨 비교야… 너 그거 열등감인거 알어? 그냥 쟤가 잘하니까 사람들이 좋아하는…,
그러니까! 그러니까 그게 싫다니까요? 나는 그게 싫어 난! 난 전원우가 잘하는게 싫다고!
거지같애… 뭐 하나 되는 게 없어. 왜 좋아하는 것보다 싫어하는 것에 몇 배는 더 신경 쓰이는 거야. 일어나 발밑에 공을 담아 놓은 라켓을 홧김에 차자 쏟아져나온 공들이 데구르르 코트까지 굴러갔다. 팔짱을 낀 채 서 있던 형은 내 정수리를 툭 치며 지나갔다. 분했다. 나는 분해서 그날의 연습을 평소 할당량의 두배는 더 했고 덕분에 몸살에 걸려 사흘이나 학교를 빠졌다. 밤에는 자꾸 생각나는 전원우때문에 이불을 몇번이나 발로 찼으며 감기 기운에 콜록대면서도 매일같이 저녁 운동으로 집 아파트부터 번화가의 고가도로까지 뛰어다니며 헉헉댔다. 그런데도 전원우는 사라지기는커녕 더 선명해졌으며 더 나를 옭아맸고 나를 더 걱정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다시 학교에 나왔을 때는 여전히 우리 책상 사이엔 약간의 틈이 있었으며 전원우는 아이들 속에서 화제로 번지고 있었다. 창가 너머 불어오는 바람과 내리쬐는 햇빛에 나는 녹아내릴 것 같아 눈을 감았다. 매미는 심하게 울었다. 그렇게 울면 목 안 아프냐. 하계 기말고사가 끝나고 방학만 기다리게 되는 나날들. 매미 울음소리는 더 진해졌고 그 속에서 전원우의 소식은 당연한 반의 화두라서 들을 수밖에 없었다. 이번 시험에서 또 상위권 점수랬다. 쟤는 바둑돌 하나에 수학 공식 하날 외우나? 전원우가 나를 흘깃흘깃 쳐다보는 게 느껴졌다. 아이들이 떠들썩대며 전원우와 시험지를 맞춰보던 와중에 종이 쳤다. 이때만 기다렸던 나는 간신히 졸려오는 눈을 뜨고 가방을 메고 뛰쳐나왔다.
체육관에 들어서자 차가운 시멘트벽 냄새가 확 끼쳐왔다. 야외는 너무 더우니까 간단한 연습은 실내에서 하자는 형의 선택이었다. 나는 손목에 보호대를 끼우고 몸을 풀었다. 라켓을 쥔 오른손을 놓고 왼손을 털었다. 허리를 당기고 목도 빙빙 돌리니 뼈마디에서는 뚝뚝 끊기는 소리가 났다. 발목을 돌리다가 문득 하얬던 운동화가 누렇게 물 들은 게 보였다. 아이씨, 때 탔네. 마음 한구석에 거슬리는 운동화를 뒤로하고 목에 걸었던 헤어밴드를 이마 위로 올렸다. 그사이, 라켓을 가져오던 형이 내게 말을 붙였다.
걔 왔다가 갔어.
누구?
누구게.
말에 의문을 품는다. 라켓을 쥐었다 폈다 한 손엔 땀이 흘렀다. 그 탓에 내가 손을 꼼지락거리자 형은 바닥에 있던 타월을 던졌다. 타월은 네트를 건너 날아오는데…….
바둑이.
형 입에선 의외의 이름이 나왔다.
전원우? 걔가 왜?
반동처럼 뻗었던 팔을 내렸고 타월은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리고 그걸 뒤로 한 채로 형은 더 의외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테니스 배워보고싶대. 너 학교 안나왔을때 여기 왔었어. 어른들끼리 연습하는 거 한참 뚫어져라 보더니 그러더라. 얼마나 배우면 잘 칠수있냐고. 자기도 꼭 쳐보고싶다고. 그리고 너 부러워하던데.
나를?
응. 그냥… 너처럼 되고 싶고 너처럼 해 보고 싶대. 자기는 어릴 때부터 워낙 몸이 너무 허약해서 자주 쓰러졌는데 그게 너무 싫었대. 육체를 쓰는 싸움이나 어떤 그런 게임에서 이겨본 적이 한 번도 없다고. 그래서 할아버지가 정신적으로 이길 수 있도록 기원 등록해주신 거고. 내력이 단단해지길 바라시면서. 그래서 그때부터 바둑두기 시작했고.
나는 모르는 전원우 이야기. 지난 칠년간 걔를 관찰자로서 옆에서 봐왔지만 그건 처음 듣는 소리였다.
바둑 둘 때 너 생각한대.
나는 타월을 줍다가 멈출 수밖에 없었다.
내 생각을 걔가 왜 해? 평소에 나 고깝게 보고 유령처럼 취급하는 애가.
몰라. 걱정이 된다고 그랬나.
말도 안 돼, 무슨 바둑 하면서 내 걱정을 해! 그럴 줄 알았어. 하여간 걔도 나 존나 의식한다니까. 바둑이 지 종교야? 바둑판 앞에 두고 권순영보다 잘되게 해주세요. 기도라도 드려?
그러게 말이다. 왜 그럴까. 바닥에 몇 번 튀기던 공을 잡은 형은 자세를 잡았다. 시작하자. 아, 맞다. 아무튼 다음 주부터 관전하러 온다니까 그렇게 알아. 그 말에 나는 쭈그렸던 몸을 일으키다 삐끗했다. 뭐라고, 다음 주부터? 너무 놀란 나는 네트로 달려가 매달렸다.
코치님!
아! 그래, 왜 그러는지 네가 직접 물어보면 되겠네.
아, 혀엉… 내가 더 열심히 할게. 이번엔 진짜 메달 따올게. 걔는 받지 마, 응? 절대절대 받지마아.
이렇게나 간절히 애원하는데. 그러나 나는 형의 뒤로 물러서라는 제스처에 뒷걸음질 쳤고 형은 무시하고 서브를 넣었다.
저녁에는 형의 집에 초대되어 형이 만들어주는 스파게티를 얻어먹기로 했다. 땀 흘리고 먹는 음식의 맛은 평균보다 달았다. 그걸 평소 좋아했기에 거절할 수 없었다. 그러나 거절해야 했다. 식탁 앞에 앉자마자 나온 다른 누군가를 집에 불렀다는 형의 고백을 듣기 전에. 전원우를 초대했다고 한다. 열린 현관문으로 보이는 전원우의 모습. 나는 컵에 꽂힌 스트로우를 세게 빨았다. 쟤는 뭐 부르면 오나.
권순영 있었네. 무뚝뚝한 목소리를 내뱉은 전원우는 의자를 끌어 앉았다. 어이없어. 번호는 언제 알았대? 짜증을 담은 포크를 접시에 까딱거리면서 꿍얼거리자 형이 눈치를 줬다. 전원우는 여전히 바름직한 모습이었고 말 한마디 안 했다. 대신에 나와 전원우를 번갈아 보던 형이 또 다른 기가 차는 말을 했다.
화해하라고 불렀어.
포크를 놓쳤다. 전원우는 물을 마시면서 내 쪽을 봤다. 싸우지도 않았는데 뭔 화해를 해요. 조용히 해. 자, 스포츠인들답게 스포츠로 풀고 딱 화해해. 네? 나 이런 거 못 본다. 아 진짜 형이 끼어들 일 아닌 거 같은데. 너 자꾸 토 달래? 둘이 다른 걸 하니까 둘 중에 하나 골라서 내기 한번 해보자. 순영이가 바둑으로 원우 이기거나…, 아님 원우가 순영일 테니스로 이기면?
이기면?
앞으론 절대 싸우지 말고 친하게 지내.
아니 싸운 적도 없는데 뭘 화해하고 뭘 친하게 지내. 이 형이… 생각도 안하고 말하지?
나는 다분히 전원우를 노려보며 의식했는데 전원우는 어떠한 일말의 파동도 일지 않았다. 단지 말 없이 포크로 면발을 돌돌 감기만 했다. 슬슬 걱정이 됐다.
야, 너 왜 가만히 있냐.
좋아요.
그제야 입을 연 전원우는 내 신경을 긁는 소리를 했다.
제가 할게요. 저 권순영보면서 예전부터 테니스 쳐보고 싶었어요. 어차피 쟤는 저 싫어하는 만큼 바둑도 싫어하는거같고. 그러니까 테니스가 좋을 거 같아요. 제가 순영이 이기면 되는거죠?
야!
그래. 원우는 하겠다고 하고, 순영이는?
메마른 꿈 속에 들어와있는 것 같은 불길함이 들었다. 전원우는 살짝 미소지으며 왼쪽으로 꺾은 머리를 괴었다. 대답을 기다리는 듯이 웃는다. 이상하게 몰아치는 야릇한 감정. 왜 일까. 그런 기분이 들게 전원우는 왜 웃는걸까.
내가 이기면 너 나 싫어하지마.
마침내 헛웃음이 터졌다. 뻔뻔한 전원우. 목소리에 장난스러움이 가득 묻어있는 게 승부욕을 자극했다. 철판을 깔아도 유분수지.
웃기네. 넌 테니스 모르잖아.
해보면 아는거지.
자존심은 드럽게 세서….
전원우는 피식 웃고는 별 대꾸 없이 감은 면발을 입으로 넣었다. 크림에 묻어 반들거리는 입술. 보고 있자니 지속해서 눈이 가서 안 될 것 같아 일부러 고개를 돌렸다. 돌리니 어둠이었다. 애초에 식탁 위가 조명이 너무 셌다.
그래, 해. 대신에 내가 이기면 내 소원 들어줘.
당황하는 걸 보고 싶었다. 눈 앞의 두 사람은 모두 벙찐 얼굴로 나를 응시했다. 째깍거리던 초침 소리가 페이드아웃 되고 숨소리마저 줄어든 공간 속에서 치열한 눈치 싸움 끝에 전원우는 포크를 놓고 손을 식탁 밑으로 숨겼다.
근데 이거 제가 손해 아니에요? 바둑은 머리싸움이라 조금만 똑똑하면 금방 하는데. 테니스는 체력부터 길러야 하잖아요.
전원우가 빙그레 웃었다. 자존심 세고 잘난 척 오지게 하는 새끼. 쟤가 천재라고. 천재를 이기면 되잖아. 내가 이기면 돼. 쟤를 이기거나 쟤 자존심에 화상을 입힌다면 내 책에 업적 정도로는 새길 수 있을 것이다.
나는 평편한 전원우를 굴절시키고 싶었다.
그 뒤로 전원우는 본격적으로 자세를 잡고 테니스에 집중했다. 방학이 다가오니 전원우에게 남는 건 시간이었다. 여름휴가를 가신 사범님이 자리에 없는 틈에 전원우는 방과 후 코치 형에게 기본기부터 배웠고 연습에 돌입했다. 한편으로 나는 전원우가 내 울타리까지 넘어올까 봐 조바심이 났다. 벤치에 누워있는 전원우한테 다가갔더니 새근새근 숨을 고르며 자고 있었다. 불어오는 바람이 전원우의 검은 머리칼을 흔들고 지나갔다. 얘 꽤 피부가 밝은 편이구나. 곧게 뻗은 목과 아래로 이어지는 직각의 쇄골은 모순처럼 연해 보였다. 잠시만. 나는 숙였던 허릴 폈다. 내가 전원우를 이렇게 가까이서 자세히 본 적이 있었던가?
그 후로는 이상한 일들의 연속이었다. 웬일인지 전원우는 시도 때도 없이 말을 걸었다. 얘네들도 녹겠다. 강한 햇빛에 모두가 열을 올리고 있을 때 네트에 기대서는 나한테 말을 걸었다. 손 그 모양인데 하게? 얼마 전에 날카로운 것에 긁혀 손가락에 붙인 반창고를 보고도 말을 걸었다. 나도 바를래. 내가 선크림을 바르는 중에도 말을 걸었다. 그거 말고 이거 써. 헤어밴드 쓰는 나한테 선캡을 건네면서도 말을 걸었다. 권순영! 머리 다쳐! 포워드 샷으로 넘어온 공이 내 머리를 살짝 스쳤고 옆 코트의 전원우가 말을 걸었다. 말을 건다. 전원우는 따로따로 연습하는 도중에도 간헐적으로 내 코트로 넘어와 나를 주시했고 나를 관찰했고 내게 말을 걸었다. 그 때문에 우리의 시선이 자꾸 맞부딪혔다.
손 줘봐.
연습 중반 무렵에 전원우가 뒤에서 내 팔을 잡아 와 돌려세웠다. 머리에서부터 땀이 줄줄 흐르는 채로.
왜. 내 손 가지고 뭐하게.
엄살 부리지 마. 그냥 보려고… 아직 안 나은거야?
전원우한테 손이 잡혔다. 전원우의 손가락은 몸체를 이루는 뼈마디가 곧고 예뻤다. 열감이 도는 손이 부드러웠는데 자꾸만 매만지고 있으니 얼굴이 달아올랐다. 나는 잡힌 손을 빼냈다.
뭐래. 다 나았어.
그래도 조심히 다뤄. 아껴야 하잖아.
무슨 상관이야.
너 다친 채로 하다가 나한테 한 번에 질까 봐.
재수 없는 새끼.
으 덥다. 가까이 다가온 전원우가 내 어깨에 고개를 묻었다. 뭐해. 그냥, 더워서. 아니 더운데 왜 이러냐고. 말 걸지 마, 힘들어…. 전원우가 두 손으로 내 두 팔을 잡고 있어서 나는 꿈쩍하지 못했다. 내 어깨 위에서 숨을 고르더니 고개를 들었다. 상기되어 잔뜩 붉어진 뺨이 눈에 띈다. 안경 아래로 눈물처럼 흐르는 땀. 인중, 이마, 볼, 턱. 맺힌 땀이 떨어지는 건 나도 똑같을 텐데 전원우는 뭔가 좀…. 반쯤 풀린 눈으로 숨을 고르는 전원우가 자기 몸을 떼어내면서 내 팔꿈치부터 손목까지 손으로 쓱 훑고 지나갔다. 지나친 손이 내 손목을 잡아 나를 얽맸다. 너도 쉬었다 해. 그때의 나는 무방비였다.
심장이 달음박질쳐서 숨을 몰아쉴 수밖에 없었다.
왜 이렇게 되는 거지.
전원우와 손을 잡았을 때 전기가 짜릿했던 거 같다.
일단은 무시하기로 했다. 전원우를. 자꾸 이곳저곳이 닿고 시선이 얽히고 땀에 젖은 몸으로 내 옆에서 있으니 좋은 감정이 드는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그 안에서 애증을 느낀 것도 같다. 변화는 코앞에 있었다. 게다가 이렇게 근래 한 대화가 지난 일 년 치 했던 대화보다 확실히 많으니. 그즈음부터 나는 일부러 전원우를 피해 다녔다. 전원우가 아침에 나오는 시간을 알기에 등교 시간을 앞당겼고 교실에서는 입을 다물고 있었다. 전원우도 나를 의식했는지 교실에서는 티를 내지 않았다. 단지 요새는 나를 곁눈질로 쳐다보는 일이 잦아졌다. 그러다 학교에서 나와 테니스장에서 만나면 언제 그랬다는 듯이 먼저 밝은 얼굴로 인사를 했다. 완전 딴 판이 된 전원우를 받아 들이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릴 듯했다. 자꾸만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오늘 걔 안 왔어요?
미련탱이같이 가방을 놓고와서 다시 체육관에 몰래 들어갔다. 그런데 케이지 안에 넣어논 가방을 빼내고 있을 때 안으로 들어오는 전원우의 뒷모습을 목격했다. 본능적으로 빠르게 유리문 밖으로 나와 안보이게끔 기둥쪽으로 숨었다. 기원도 안간건지 아직도 하복 교복 차림에 가방을 멘 전원우는 나를 찾는 듯 했다. 다행히 기둥 옆 낮은 창문너머로 대화소리가 흘러나와 엿들을 수 있었는데.
누구?
그….
누구야? 어머, 뉴페네.
뭐야, 누구 찾는데?
권… 순영, 순영이요. 테니스 치는 귀엽게 생긴애. 어… 오늘 연습하는 날 아닌가요.
아! 그 박정훈 코치님 제자.
순영이? 어떡해. 헛걸음 했다 너. 테니스는 오늘 아침 연습이 끝이었거든.
아…. 전원우의 탄식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바보. 아 진짜 바보야. 이상하게도 희열을 느꼈다. 힘없이 돌아갈 전원우 앞에 짠하고 나타나면 재밌겠다 싶어 타이밍을 쟀다. 마침내 체육관 사람들한테 인사를 하고 문밖을 나서는 전원우 앞에 나와 말을 걸었다. 야! 그러자 내 존재를 마주한 게 실제와 구분이 안 가는지 전원우는 멍한 표정으로 두 눈을 끔뻑거렸다. 왜, 나한테 볼 일 있어? 아, 아니. 급하게 말을 돌린다. 부끄러운지 몸을 돌려 걸어가는 그 모습이 꽤 웃겨서 나는 함박웃음을 지었다. 그러다 전원우가 발길을 멈추고 다시 뒤를 돌았다. 아니. 볼 일 있어. 앞으로도 볼 일 있을 거야. 그러고는 계단을 올라와 가방을 열고 무언가를 꺼냈다. 나, 이거 샀어. 기분이 좋아 보이는 전원우는 해맑았다.
전원우가 꺼낸 것은 한 권의 책이었다. <테니스! 기본부터 쉽게 배우기> 정말 바보 아니야? 나는 쓰여 있는 제목에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야, 운동이 이론으로 돼? 내 비웃음에 전원우는 금방 서운한 얼굴이 되었다. 늘 진지한 얼굴이었던 애가 한번 밝게 웃다가 울상이 되니 왜 그렇게 좋은 건지. 그래도 여기 그립부터 스윙이랑 등등 자세하게 다 나오는데…. 속상한지 중얼거렸다. 몸으로 배워야지. 바둑처럼 머리 쓴다고 되는 게 아니거든! 전원우는 무던히 화가 났는지 입술을 삐죽였다. 나는 그런 전원우의 감정변화에 약했다. 실망한 여력을 감추지 못하는 전원우는 귀여웠으니까. 그래서인지 들떠서 내 이야기를 했다. 과거의 권순영이었다면. 보통의 나였다면. 말할 일도 없었던.
나 훈련 내일 코트에서 다섯 시부터 열 시까지야. 날이 너무 더워서 바꿨어.
아, 응.
너는 기원 갔다가 저녁에 와.
그리고 전원우를 기원까지 바래다주었다. 그렇게 헤어지고 난 그 밤에는 아주 편히 잠에 들었다. 내일 또 전원우를 만난다는 기대와 설렘을 품고 좋은 꿈을 꿨다.
그러나 다음 날 올 줄 알았던 전원우는 연습 내내 나타나지 않았다.
정리하고 들어가겠다고 미리 말해놓았던 터라 라이트만 끄면 아무도 없는 테니스장은 어둠에 잠긴다. 나는 스위치를 내렸고 밖으로 나와 초록색 그물 벽을 따라 터벅터벅 걸었다. 그런데 눈앞 벤치에 누군가가 있었다. 벤치 끝으로 가보니 자연스레 발걸음이 멈췄다.
너 뭐야! 얼굴 왜 이렇게 빨개. 술 마셨어?
어. 축하주….
전원우였다. 가로등에 비친 전원우 얼굴이 붉었다. 늘어지는 발음이 누가 봐도 술 엄청나게 마신 사람의 상태였다. 나는 너무 놀라 전원우의 어깨를 붙잡았다.
하, 참나. 너네는 고등학생한테도 술 먹이고 그래? 와, 제정신 아니네. 아니 어떤 선생이 어떻게 애가 이렇게 될 정도로 술을 먹여.
순영아.
뭐.
얼굴이 가까웠다. 그제야 내가 뻔히 얘의 빨간 얼굴을 들여다보고 있었다는 게 실감이 났다. 연신 손을 꼼지락대던 전원우는 나와 눈을 맞췄고 시선이 민망해진 나는 허리를 폈다.
왜. 뭔데.
너 나 그만 싫어하면 안 돼?
어?
난 너 좋아하는데.
아… 이건 정말 심장을 멈추게 하는 문장이다.
언제, 언제더라. 아마 초등학교 오학년 때였던 거 같아. 그 나이 때 우리가 서로 알았으니까. 너 처음 본 날인데 네가 새로 이사 왔다고 시루떡 준다고 너네 어머니랑 같이 왔을 때. 너 어머님 뒤에 숨어서 나 계속 쳐다보고 있었잖아. 나 기원 가려고 가방 메고 나가려는데 그때 네가 그랬어. 형 어디가?
…그랬어. 모르겠어 그냥. 같이 가자고 따라 나왔는데. 그게 되게 좋았어. 형소리 들어본 게 처음이라. 근데 그것보다 좋았던 건 네가 사실 나랑 동갑이고 운명처럼 같은 학교를 진학하고 윗집 아랫집으로 붙어있고 지금까지 함께 있다는 거야. 난 그때부터 네가 궁금했는데. 그러니까… 너 그냥 나 싫어하지 말고 이젠 좋아해 주면 안돼?
전원우의 문장은 막을 새도 없이 이어졌고 줄줄이 나오는 옛날이야기에 내 입술은 바짝 말랐다.
그런 이유로 좋아하는 건 너무….
그럼 이런 이유는 어때. 사실 내가 너 짝사랑 중인 거라면.
뭐? 그냥 좋아하는 게 아니라 사, 사랑? 어? 너, 너… 그거 말하면 이제 짝사랑 아니잖아!
야, 너는 생각하는 포인트가!
흥분한 전원우가 일어섰다. 나는 주춤거리며 더 뒤로 물러섰고 입을 막았다. 이게 뭐야, 전원우가. 전원우가? 말도 안 돼.
아, 미안… 갑자기 놀라서.
내가 자꾸만 뒤로 가자 전원우는 더욱 가까이 왔다.
놀래켜서 미안. 근데 나 너 좋아해. 미안한데, 나 너 좋아해. 너 안 싫어해. 네가 되게 좋은데, 근데 네 시간엔 내가 낄 수 없으니까. 너랑 가까워지고 싶었는데 마음대로 잘 안되더라. 네가 하는 게 궁금했어. 그래서 이것도 사실 일부러 그런 거야. 내기하자고 한 것도. 다 너랑 친해지고 싶어서. 근데 이제 나 네가 나 싫어하는 거 난 못 도와주겠어. 안 할래. 순영아. 그래도 만약, 네가 좋아하는 걸 정말로 못하겠으면 나 싫어하지만 말아줘. 응?
이건 진짜 반칙이다. 이렇게 나오면 나는 전원우를 다시 풀어야 한다. 이론이 필요한 건 나다. 나는 십오 미터 구렁텅이에 빠진다. 예상했던 계획했던 모든 일이 물거품이 되어버릴 만한 절체절명의 위기의 구렁텅이…….
못해.
어?
전원우는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못한다고.
왜?
나는 뭐라 말할 것이 없어 입술을 달싹거리다 말았다. 전원우는 정말 궁금하다는 눈빛으로,
혹시 어려워서 못하는 거야?
착각했다.
아니거든! 내가 무슨 어려워서 못, 야! 난 다 잘해, 어? 내가 못하는 게 어딨다고.
다행이다. 다 잘해서.
그리고는 뭐가 급한지 우왕좌왕하다가 돌아갔다. 나는 가만히 서서 머리를 긁적였고 그렇게 전원우와 멀어졌다. 술 취해서야. 취해서 저러는 거야. 우리의 애증은 그렇게 사랑으로 쉽게 옮겨붙지 않아.
하지만 망했다. 그 밤의 사건을 겪고 집에 돌아와 잠을 잤는데 모처럼 꿈을 꿨다. 꿨으나… 존나 큰일이다. 전원우랑 키스하는 꿈을 꿨다. 꿈에서는 전원우가 나를 안더니 허리를 꺾어 샤방한 미소를 지으며 내 입술에 입을 맞췄다. 실제처럼 생생했고 부드러웠다. 그 따듯함이 뭐라고. 꿈속에서 나는 그게 너무 좋은 나머지 후반부에 가서는 내가 리드를 했다. 대체 왜 키스하는 꿈이야. 왜 이런 꿈을 꾼 건데. 입을 맞추는… 입을 맞… 입을, 전원우랑 입을…… 권순영, 서브 넣어.
엥? 그 순간 조각조각 깨져버리는 환상. 눈을 깜빡거려보니 시선 끝에는 전원우가 있었다. 그리고 발밑으로 데구루루 굴러오는 연두색 공.
너 왜 자꾸 원우만 봐.
형이 소리쳐서 소리의 근원지인 형을 쳐다봤다.
나 자꾸 원우만 봤어요?
어라, 이제는 성도 떼고 말하네. 둘이 친해졌지?
무슨! 아니, 아니요!
친해졌잖아. 그렇지, 너희 친해진 거지! 맞지 맞지?
아니 아니 아니! 쟤랑 나랑 하나도 안 친하거든요!
됐어. 연습은 거기까지만 하고…. 형이 손을 털며 코트 밖으로 나오고 대신 구석에 앉아있던 전원우가 일어섰다. 나는 위아래 다 하얀 반팔 반바지를 입었는데 거짓말처럼 전원우는 올 블랙이었다. 도저히 바둑을 벗어날 수가 없어…. 코트로 들어서는 전원우는 쭉 나랑 시선을 마주쳤다. 나는 목둘레를 매만졌다. 귀가 달아올랐다. 전원우는 손가락에 낀 공을 손에서 몇 번 튀겼다. 그 손가락 뼈대는 옳고 곧고 길었다. 자세를 잡은 전원우의 높은 서브. 경기가 시작됐다. 나의 소원이 걸린 내기. 그러나 나는 당일 경기를 제대로 올인할 수 없었다. 전원우때문에. 이게 다 전원우 탓이다.
타액으로 젖어 번들거리는 입술. 턱에 맺혀 목덜미까지 흘러내리는 땀. 전원우 허벅지. 쟤 종아리. 다리. 발목. 짜증 나. 심지어 저 새끼 쇼트 삭스 신었어. 저건 반칙이야. 복사뼈가 다 보이잖아. 전원우는… 반반한 얼굴. 흰자위가 발개진 눈. 긴 눈매와 속쌍꺼풀. 상기된 볼. 빨간 뺨. 네 홍조. 찌푸린 미간. 하악대는 저 숨소리. 공을 받아칠 때마다 퉁 하고 울리는 나일론의 소리. 으억 윽, 악, 아악, 흐억. 기합 소리. 신음. 기합 소리. 신음. 신음. 네 신음. 전원우 신음소리에 밖으로 나올 기세로 쿵쾅거리는 심장과 둥둥거리는 맥박. 부정맥. 몸 안에서 끓는 피. 찌는 듯한 더위. 불규칙하게 상승기류를 탄 공. 조여오는 목. 막히는 숨. 찐득한 공기와 헐떡거리는 전원우. 이마에 짓눌러 땀으로 난잡해진 머리카락. 뒤엉킨 머리카락. 투명하게 익은 청량한 풍경과 영영 우는 매미 소리. 전원우의 찰랑거리는 머리카락. 죽일 듯이 내리꽂히는 열기 밑에서 타오르는 내 팔다리. 전원우의 하얀 팔다리. 팔근육. 손가락 뼈마디. 허벅지. 땀에 젖은 전원우. 전원우 등. 전원우 뼈대. 쇄골. 팔꿈치. 골격. 까만 티셔츠가 달라붙어 보이는 가슴선. 배 근육. 목과 쇄골에 맺힌 땀방울은 티셔츠 안쪽 가슴 밑에까지 쭉 땀 자국으로 이어져 있을 것이며. 땀에 젖어 미끄러운 복숭아색 입술을 핥는 혀에 나도 따라 입술을 핥았고. 다리에 흘러내리는 땀. 짧은 바지가 무릎 위를 훨씬 넘어서서 드러난 허벅지. 가볍고 날렵한 하얀 발목. 길게 뻗은 손가락.
전원우 몸.
하아…. 지친 숨이 탄식처럼 길게 나왔다. 보이는 것과 안보이는 것만 해도 이 정도인데. 공과 함께 던지고 받는 숨소리는 거칠어져만 갔고 끊임없이 전원우를 의식했다. 나는 팔목으로 눈가를 쓸었다. 절여진 소금 같은 땀이 씻겨나올때까지.
포티 러브! 코치님의 카랑한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경기가 끝났다.
이겼는데 왜 이리 기분이 진 것 같지. 승리의 기쁨보다도 먼저 든 생각은 바보 같게도 전원우한테 쇄골이 훤히 보이는 옷과 짧은 반바지는 당분간, 아니 여름내내 금지해야 하지 않느냐는 거였다. 전원우가 저렇게 무감각해서 나는 숨을 적당히 고를 수가 없었지만 그래도 간신히 무릎을 세웠다. 전원우는 라켓을 손바닥에 치고 있었고 그걸 보고 있자니 열망이 차올랐다.
전원우가 불렀다. 네가 이겼네. 우리는 한참 서로를 봤다. 바람이 불어와 얇은 옷가지가 펄럭거렸고 머리카락이 휘날렸다. 전원우는 말했다. 소원이 뭔데.
소원. 화가 났다. 내 소원은 네가 제일 못하는거. 너도 나처럼 매 순간 신경 쓰이게끔 나한테 얽매일 수밖에 없는 거. 네가 당황해서 어쩔 줄 몰라야 하는 거. 어쩌면 네 인생에 여태 해보지 못한 거. 그러니까 그건…….
뭐냐니까?
나랑!
어!
상에 맺힌 전원우는 유독 명도를 한층 높인 것처럼 밝았고 발그스레했다. 청량한 기운이 감도는 코트는 금방 녹아 사라질 것 같이 눈부셨고……,
한 달! 한 달 연애해!
여름 더위에 미쳐버린 나는 고백했다. 전원우는 라켓을 쥐고 있던 손을 축 늘어트렸다. 거꾸로 뒤집은 라켓 헤드로 바닥을 툭툭 치는 전원우를 흘겨보다 눈을 감았다. 눈물인지 땀인지 모를 액으로 얼굴은 뒤범벅된 지 오래. 나도 내가 왜 이러는지 몰라. 모르겠어. 답답해 죽을 것 같다. 거친 숨이 자꾸 터져 나와 공기에 질식되는 기분. 나는 힘 빠진 다리로 서 있을 수가 없어 쓰러지듯 무릎을 꿇었다.
나랑, 하… 한 달만, 연애. 하아…
하자고, 하…
…너 나 좋다매. 차오르는 숨. 목에서 피가 뿜어져 나올 것만 같은 일보 직전, 전원우가 네트를 넘어 내 앞에 쭈그려 앉았다. 한 달. 한 달이면 되겠지. 한 달만 연애하면 혼자 신경 쓸 일도 없겠지. 사랑하는 척도 그만큼만 바짝 하고 말겠지. 그리고 끝나겠지. 필사적으로 합리를 시켰다. 내가 거칠게 숨을 뱉는 새에 전원우는 자기 타월을 내 머리에 뒤집어씌웠다. 전원우의 땀 냄새. 결국 둘 중에 망가진 게 나라니. 문득 울고 싶어졌다. 고개를 숙이고 있으니 땀이 후드득 떨어지는데 그게 꼭 눈물 같았다. 반쯤 가로막힌 시야엔 전원우의 다리가 보였다. 전원우는 나를 한참이나 보고 있다가 일어섰다.
고백 좀 멋있게 해봐. 어떻게 나보다 멋없게 말할 수 있지.
그 말에 고개를 들었다. 전원우는 어느새 뒤돌아 휘적휘적 걸어가고 있었다. 라켓을 돌리면서. 진짜 존나 재수 없다. 분노는 바닥부터 끓어올랐고 끓는점에 이르자 공처럼 뭉친 울분으로 터져 나왔다. 급한 마음에 튈 듯이 일어나 옆에 떨어진 공을 주워 전원우를 향해 내던졌다. 닥쳐! 네가 뭘 알아!
네가 진짜 뭘 안다고. 나는 연신 흘러내리는 땀을 닦았다. 세상에서 가장 더운 여름에 와있었다.
그날 밤에는 이불을 뒤집어쓰고 밤의 소리를 듣고 있었다. 아래층 전원우는 아까부터 감감무소식이다. 바닥을 쿵쿵 울리고 싶었다. 대답 좀 해. 대답 좀. 그런데 때마침 띠링 울리는 핸드폰. 액정에 뜬 알림이 뭔지는 확인이 필요했다.
어머님 통해서 네 번호 받았어. 연애하자며. 사귀는 사이에 번호는 왜 안 주고 가. 한 달 동안은 네 번호 알고 있어야 할 거 아니야. 너, 네가 나보다 둔한 건 알지? 모르면 바보고. 나 내일 몇 시까지 너 데리러 가?
전원우의 문자였다.
그렇게 해서 우리의 한 달 연애가 시작되었고 우리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다. 일단 띄워져 있던 두 책상이 붙었고 수업 시간엔 아무도 몰래 손잡을 수 있는 스킬을 연마했다. 그러나 그런 연애는 거짓말처럼 동시에 시합을 몰고 왔다. 하계대회를 앞두고 나는 긴장감을 놓치면 안 되었다. 놓치면 안 되는 기회라 당연히 예민해져 있었다. 물론 전원우도 자기 일을 했다. 또다시 바둑판 19줄 앞에 있었다. 그리고 나는 또 스트링 19줄을 손에 쥐었다.
연애는 연애답게 굴러갔다. 대회 날 새벽까지 우리는 전화를 했다. 들뜬 마음을 주체하지 못해서 방 안 사방으로 심장이 뛰어다녔다. 전원우가 대회 끝나면 데리러 온다고 해서. 나는 방바닥에 귀를 대고 반대쪽 귀로는 전원우 목소리를 들었다. 세대로 구분할 수 있는 우리 거리는 그만큼이나 가까웠기에 소중했다. 전원우한테도 물어봤었는데 이사 안 가줘서 고맙다고 했다.
그리고서 대회는 속전속결이었다. 우선 결과가 어떻게 됐느냐면, 이겼다. 상대가 일 포인트도 얻지 못한 러브게임으로 나는 36강의 문턱을 넘었다. 그러나 승리의 기쁨을 즐기기도 잠시였다. 불통인 휴대폰에 눈길이 갔다. 오겠다던 전원우가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다. 그 많던 관중들이 빠져나갈 때까지. 축하 인사를 다 받고 나와서 체육관 앞에서 기다렸다. 사귀어도 아무런 진전이 없는데 날 좋아하는 게 맞아?
꺼져있는 핸드폰과 보이지 않는 전원우. 주위를 두리번거려도 풀벌레 소리뿐, 나는 밤하늘 아래서 실망만 가득 안은 채 그림자로 물들어갔다. 그런데 그때 문득 시선 끝에 잡히는 무언가.
검은 옷의 사내. 마른 다리와 길쭉한 체구. 작은 얼굴 직각 어깨… 는, 설마.
야! 너 일로 와!
전원우가 맞았다. 아무리 봐도 전원우다. 나는 단걸음에 뛰어갔다. 전원우는 숨거나 도망치지도 않고 가만히 있었다. 다가가서 보니 무슨 일인지 마스크와 모자로 얼굴을 가린 채였고 그 모습에 샘이 났다. 내가 대회에서 이겼는데 넌…! 짜증이 난 나는 전원우의 마스크를 잡아당겼고 그대로 입술을 물어뜯듯이 키스했다. 단숨에 당황한 전원우는 내 허리 근처에서 손을 어쩌지 못했고 나는 더 깊게 혀까지 집어넣었다. 그리고,
남친 새끼가 해주는 게 없어!
신경질적으로 밀쳤다. 누가 뭐래도 샌님으로 영원히 살 팔자 전원우. 번들거리는 입술을 소매로 닦았다. 전원우는 복숭아가 된 것처럼 불그스레해져 있었다. 나는 붉어진 전원우를 끝까지 노려보며 뒤를 돌았다. 눈앞에 보이는 마침 시동을 걸고 출발하려는 차. 대회 감독님이 나를 알아채고 차 안에서 손짓했다. 순식간에 달려가 차에 올라탔다. 메롱이다, 전원우. 차 창밖으로 가만히 서 있는 전원우는 따라오지도 않는다. 나는 휴대폰의 전원 버튼을 눌렀다.
화났어? 변명처럼 들릴지 모르겠는데 몸이 너무 아파서 그랬어. 아침에 눈 뜨니까 몸살이더라. 어떻게든 너 보고 싶어서 가려고 나오긴 했는데 시간이 너무 늦었었나 봐. 끝나니까 도착이더라. 이거 보면 전화 줘.
왜 그러고 있냐.
책상에 머리를 박고 있었는데 성큼성큼 들려오는 발소리. 전원우가 내 머리 위에서 말을 걸어왔다.
감기 걸렸어. 너한테 옮아서.
멍청한 전원우. 전원우 자체가 바둑이다. 상대방 애타게 기다리게 하는 것이 바둑을 꼭 닮았다. 아픈 줄도 모르고 난. 책상에 코를 박고 말하니 전원우의 표정이 어떤지 몰라 답답했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테니스도 마찬가지다. 상대방 기다리게 하는 건. 어쩌면 우리는 닮은 것 같다. 네모나고 조그마한 책상에서 나만의 우주를 그리니 소리에 민감해진다. 나는 귀를 기울였다. 의자를 끄는 소리가 났다.
생각해보니 바둑이랑 테니스랑 비슷한 거 같아.
어떤 점이?
전원우가 가까이 있었다. 아마 자리에 앉았나 보다.
일단 동그란 걸 이용한다는 점에서 비슷하긴 한데.
정확히는 아니지. 굳이 따지자면 바둑돌은 납작한 원형에 가깝고 테니스공은 완벽한 구형에 가까우…,
입 좀 닫아.
그렇게 말하고 고개를 돌려 오른쪽을 보니 전원우는 나와 똑같이 옆으로 기대서 나를 보고 있었다. 십오 센티미터만 더 가면 부딪힐 가까운 거리. 접히는 눈이 좋았다. 웃는 얼굴에 안달이 난다.
상대방 엄청 기다리게 만드는 거. 그게 비슷해.
전원우는 속눈썹이 예쁘다. 자기도 그걸 아는지 눈을 여러 번 깜빡이는데 그게 뭐라고 설렜다. 나는 몸을 일으켜 전원우의 앞머리를 넘겼다. 이마가 보이니 눈썹이 드러났고 전원우는 사르르 눈을 감으며 손길을 거부하지 않았다. 미안. 바로 답장 안 해서. 아픈 줄 몰랐어. 지금은 괜찮아? 묻자, 전원우는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앞으로 아프면 빨리빨리 보고해. 그래야 내가 너 안부르잖아. 대신 병문안 가겠지.
참을 수 없었는지 전원우는 입술을 터뜨리며 맑은 웃음을 내뱉었고 내 뒷목을 잡고 다시 나와 함께 누웠다.
드디어 너나 할 거 없이 기다렸던 방학이다. 그리고 역시나 방학에도 큰일이 다가왔다. 세계선수권대회 예선을 치러야 하는 몸인 전원우는 서울로 올라가야 했다. 헤어지는 선착장에서 전원우는 나를 껴안고 꼭 전화한다는 말을 다섯번이나 강조했다. 그리고 약속은 잘 지켰다. 나중에는 하루에 몇번이나 하는 거야! 할 정도로 정도가 심해지긴 했지만. 어쨌거나 떨어져 있어도 목소리를 들을 수 있어서 좋았다. 우리는 온종일 있었던 시시콜콜한 일상을 공유했다.
그리고 닷새 후에 전원우가 본선 진출 타이틀을 달고 돌아왔다.
방학은 여러모로 모두에게 좋았다. 옛날부터 짓던 마을 영화관은 마침내 완공되어 영업을 개시했다. 밀려 나오는 사람들 속에서 우리는 설레는 마음으로 입구로 들어섰다. 가장 가까운 시간에 하는 영화를 찾다가 하필 남은 게 포스터만 딱 봐도 무서운 영화 하나였다. 지난번에 안 사실인데 전원우는 무서운 걸 잘 못 본다. 무서워서 나한테 기댈 전원우. 상상하니 그건 그거대로 좋았다. 전원우의 표정이 벌써부터 안 좋았다.
이거 보자. 그리고 무서움 티 내는 사람한테 벌칙, 어때.
벌칙 뭐 할 건데.
자기라고 부르기.
갑자기?
갑자기 말고, 샌님아. 벌칙이잖아. 이 정도는 해야지. 왜? 설마 못해? 너 이런 거에 안 익숙해지면 어떻게 나랑 사겨? 연인들은 달달한 애칭부터 정하는 게 룰이야. 드라마에서 안 배웠어?
그러자 전원우는 고개를 도리도리 내저었다.
너… 내기 중독이야.
영화를 다 보고 나오는 길. 예상했던 대로 전원우가 졌다. 무서워하진 않았는데 깜짝 놀라서 팝콘을 떨어트린 게 감점 요인이었다. 나는 뭐. 별로 무섭지 않았다. 외려 내가 무서워하는 전원우 손을 잡아줬다. 영화 내내 그러고 봐서 손에 땀이 찼지만 전원우는 싫다는 내색하지 않았다. 그리고 전원우에게 플러스 요인도 있는데, 전원우는… 영화관에서 찔끔 눈물 흘리는 나를 달래줬다.
무서웠어?
전원우가 옆구리를 팔로 꾹꾹 찌른다. 거슬린다. 킥킥 웃으며 놀려대길래 한번 째려봤다.
무섭긴… 다음부턴 다른 거 보자.
로맨스 보자, 자기야.
오케이.
거짓말처럼 바람처럼 지나간 시간. 어느새 방학은 시작점에서 이십 일이나 떨어져 있었다. 그중에서 전원우를 못 봤던 게 닷새고. 나는 다시 테니스장에 나왔다. 오랜만에 몸을 풀고 라켓을 쥐었다. 불어오는 바람이 시원했고 매미는 여전히 시끄럽게 울었다. 다들 휴가였다. 놀러 온 테니스 동호회 사람들은 휴가를 만끽했다. 나는 그들과 몇 세트를 쳤다.
왜 이렇게 땀을 많이 흘려. 흰 카라티를 입은 전원우가 어디서 튀어나왔는지 손부채질을 해준다. 야, 네가 해봐. 땀이 안 날 수 있나.
이거.
어? 어. 고마워.
나는 전원우가 건네주는 이온 음료를 받았다. 마침 타오른 갈증에 무언가 마실 게 필요했었는데. 뚜껑을 따고 차가운 물을 몸에 주입하고 있는 차에 나를 빤히 보던 전원우가.
아.
내 헤어밴드를 눈까지 내렸다. 아이씨… 야, 너도 벗어. 손을 뻗어 전원우의 안경에 손을 올렸다. 그러나 필사적으로 피해서 놓치고 말았다. 기력이 다한 나는 헤어밴드를 벗고 뒤에 그늘진 곳을 찾아 기대앉았다. 전원우도 나를 따라서 철퍼덕 앉았다. 그리곤 무릎에 턱을 괴었다. 씩 웃는다.
자기야. 나 안 보고 싶었어?
어우, 미쳤나 봐. 왜 이래?
자기가 자기 하자며.
일회성이었지. 내기 이미 끝났잖아. 그리고 이렇게 대낮에… 어?
대낮에 하면 뭐가 어때서. 그럼 밤에만 부를까?
하마터면 나는 마시던 음료를 뱉을 뻔했다.
야, 왜이래. 기한있어. 앞으로 우리 연애 며칠 남았지.
앞으로 평생.
누구 맘대로.
내 맘대로.
네 맘은 무슨 난 허락한 적 없는…! 내 말꼬리를 잘라먹은 전원우가 나를 밀어뜨렸고 나는 보기 좋게 넘어갔다. 맞대오는 얼굴에 시선을 어디다 두어야 할지 모르겠다. 새로운 답이 필요한 시점이다. 샌님인 줄 알았던 내 한 달 남자친구는 샌님이 아니었던 것에 대하여. 전원우는 양손으로 내 볼살을 갖고 논다. 이리 만지고 저리 만지고. 뭐가 좋다고 실실 웃는지 웃는 얼굴에 뭐라 하지도 못한다.
나 너 한 달만 사랑 못 해. 네가 나 이렇게 만들어놓고 치사한 거 아니야?
야. 네 사랑은 빵점이야. 무거워, 빨리 내려와.
나 광저우로 가.
갑작스러웠다. 갑자기 말을 뱉어놓은 전원우는 내 품에 머리를 파묻었다. 온 세상이 조용해졌다. 빛나는 사물들과 풀들이, 움직이는 모든 것이 느릿하게 소용돌이친다. 나는 전원우에게만 집중했다. 세게 울던 매미 소리도 작아질 만큼.
예선에서 이기면 다음 출전지 광저우였어. 그래서 나 다음 달부터 현지로 가. 그러니까 이학기에는 너랑 있지 못할 거 같아. 일부러 지려고 했는데….
헐. 세계선수권대회가 세계 일주하는 거였어?
아, 너는! 그 부분이 신경 쓰이냐?
장난이지.
나는 씩 웃은 다음, 전원우 얼굴을 살피다 눈을 감았다.
뭐해. 갑자기 눈은 왜 감아?
해주면 아까 너 빵점이라 한 거 취소.
뭘 해…. 전원우가 바람 빠지는 소리를 냈고 나는 진짜 모르냐는 식의 순수한 표정을 지었다. 능글맞게 씨익 미소를 짓자 단번에 내 의도를 파악한 전원우는 대답처럼 빙그레 웃었다.
싫어. 안 할 건데.
너 이거 다시 안 오는 기회야. 마지막이라 생각하고 해.
알겠어. 감아봐.
눈을 감으니 볼에 말캉한 입술이 붙었다 떨어진다. 누가 볼이랬냐. 미간을 찌푸리며 삐죽대자 전원우는 내 귀에 가까이 다가와서 속삭였다.
또 감아봐.
이번엔 이마와 콧잔등. 두 번을 스쳤다. 에헤이, 너 자꾸. 안 되겠다 싶어 감았던 눈을 떴는데 전원우가 말렸다. 이미 귀까지 발개졌으면서.
아니야. 아직 눈뜨지 마.
내 손에 무언가가 쥐어졌다. 그 촉감에 눈을 뜬 나는 전원우와 함께 몸을 일으켰다.
뭐야?
선물.
손을 펴보니 나오는 건 테니스 라켓 모형이 달린 핸드폰 폰케이스 였다. 내가 가만히 보고 있자 전원우는 나를 툭툭 쳤다. 아니. 갑자기? 케이스를 이리저리 살펴보자니 멈췄던 사고회로가 재가동했다. 나한테 어울릴 것 같다는 생각에 여러 번 고심했을 전원우에 웃음이 새어 나온다.
내가 테니스 친다고 이런걸 가져야 하는 거야?
기념이잖아. 그냥… 내 생각하라고.
나도 그럼 너 모나미 볼펜 사줄래.
내가 바둑둔다고 생각한 게 그거야?
나는 대답 대신에 전원우의 뒷목을 끌어당겨 안았고 전원우는 어정쩡한 자세로 내 등에 손을 올렸다.
야, 세게 안 지마. 넌 남들보다 몸 온도가 조금 높아서 뜨겁, 뜨겁단 말이야.
싫어… 그런 넌 남들보다 낮잖아. 그니까 이러고 있으면 딱 적절해지겠네. 근데 너 내가 몸 온도 높은 건 어떻게 알았냐?
그… 지난번에 처음 테니스 칠 때 그때 너한테 잠깐 기대봐서 알았어.
잘 말해 놓고 부끄러워한다. 전원우는 괜히 내 어깨를 치더니 그 긴 두 팔로 나를 꽉 안았다. 우리 둘의 심장이 맞닿았다. 왜 이렇게 뜨거워. 너 핫팩붙였냐. 분위기 깨지마. 흐흐, 전원우랑 동시에 웃었다. 목에는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우리 여기서 키스하면 쪄 죽겠지?
어… 나는 상관없어.
달아오르는 열기에 팔을 뒤로 주춤했다. 아, 얘는 이런 것도 잘해. 전원우가 고개를 꺾어 내 입술을 핥아 내렸다. 자극적일 만큼 맞붙었다 떨어지는 입술소리가 야살스러웠다. 저 멀리에는 왔다 갔다 하는 공이 라켓에 부딪히는 소리. 신이 난 사람들의 말소리. 바람 소리.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하늘을 바닷속처럼 유영하는 기분에 이 공간에 있는 모든 것들이 지극히 사랑스러웠다. 나는 눈을 감아 들리지 않는 소리까지 귀에 담았다. 전원우는 뜨거운 곳을 찾아내 품을 더 파고들었다.
팔 월이다. 나는 비행 중이고 연애를 한다. 전원우랑. 소실점 없는 투명한 하늘이 머리 위에 있다.
너 가서도 잘 살아라.
잘 살기는… 안 속아. 알았어. 저녁마다 전화할게.
참나, 전화만?
전화로도 못 참고 보고 싶어지면… 글쎄. 어쩔까. 보고 싶을 때마다 보러 올까.
그러던가.
그러다 매일 비행기 타면 어떡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