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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21. 1. 9. 09:14
작성자
hhh..

윤홋원 젠더스왑 리버시블

 

윤정한. 마을 초입 도로를 끼고 있는 <녹원 정육>의 삼 남매 중 장녀, 열아홉 첫째 딸. 설명할 수식어는 이 한 줄이면 끝나는 윤정한은 살면서 둘째 여동생 윤해민과 막내 남동생 윤다빈을 자신과 비교하거나 동떨어진 자기 이름에 불만을 가진 적은 없었다. 정한의 얼굴을 모르고 이름만 들어본 자들은 정한을 남자라고 착각하여 남 화장실에서 찾거나 간혹 성별을 1로 표기해놓고 마는 실수를 저지르곤 했기에 정한은 이왕 남자로 사는 것이 좋겠다, 속으로 생각하곤 했다. 정한의 하루는 볼품없는 수증기와 같이 가늘게 연명한다. 아침부터 오후까지 학교에서 썩는 것이 그 반증. 썩어 물든 몸뚱어릴 끌고 집에 오면 해민다빈은 숙제를 하였고 정한은 머리를 하나로 묶고 고기를 썰었다. 고기를 못 써는 날에는 돈이라도 셌다.

다빈이 태어나기 전까지 두 번이나 딸을 낳고도 남희영은 애 낳는 머신 취급에 딸려오는 씹소리를 추잡스레 들어가며 살다 최근 화병으로 즉사했다 한다. 정한의 표현법으로는 그렇다. 부고를 듣고 눈물 대신에 천한 것은 뒤질 때까지 속을 썩인다고 애미가 그리됐냐며 하늘 보고 고래고래 내지른 할머니는 연순자. 그는 내 아들이 네년 때문에 고생이지 누구 때문에 고생이겠냐 이 썩을 것아! 하며 남희영의 목을 졸랐던 일은 기억 못 하는 듯했다. 그때가 정한이 여덟 살 때다. 여덟 살은 기억했다.

 

장례식장을 가득 채운 상념들은 애도보단 화였고 화보단 웃음이었는데 정한은 세 가지 다 하지 못했다. 정한은 일률적으로 고개를 숙이는 마을 사람들 몇 명 틈에 끼어 빛 한 줄 없이 창밖을 바라봤다. 정한을 제외한 나머지들은 죽음보단 소문에 관심이 가 있었다. 일명 남희영 일대기. 집성촌 사생아로 태어나 친부모가 누군지도 모르고 길러져서 공부는 포기해야 마땅했던 년. 대학에 가고프다 말이라도 꺼낼라치면 그딴 개소리 말라는 이름만 아버지인 사람한테 맞아가며 중학교를 졸업 후 이름만 큰언니가 사는 서울로 도피하듯 쫓겨나 고등생 나이에 매니큐어 칠이 까질 때까지 아득바득 방직공장을 다니며 어찌어찌 남자랑 눈이 맞아 도망 다니는 신세가 얼마 되지도 않았을 무렵, 됐다 마, 남자한테 얹혀서 니도 잘 살아야지. 웃긴 소리 남발하던 잔챙이들 등쌀에 그 틈을 타 가난하지 않게 해주겠다고 프러포즈한 남편 말을 철석같이 믿고 스물아홉까지 정한해민을 낳고도 남아를 늦게 낳아 욕바가지 퍼먹은 년. 팔자 한번 못 펴본 년, 남편 사업이 망한 덕에 사채만 늘었네 그건 다 저 여편네 행실이 여간 좋지 못해서! 응응. 그래……! 웅성거림이 수증기만큼이나 쾌속한다. 단어들이 둥둥 떠다녔다. 정한은 알았다. 역시 한번 죽이는 게 어렵지 두 번 죽이는 건 어렵지가 않구나. 그렇게 남희영은 죽어서도 죽음을 면치 못한다. 아무튼 간 장례식엔 목적을 쥐고 온 사람들뿐이었고 목적 없이 온 단 한 명의 조문객으론 국화 더미에 잠깐 앉았다 날아간 거무스름한 새가 유일무이 피사체. 정한은 새랑 눈을 마주쳤다가 퍼드득거리며 창문 밖으로 날아가는 것을 보았다. 인생을 저 새와 바꿔치고 싶었다.

 

남희영이 죽고 사라진 집에 남은 아버지와 자식 셋. 총합 벌레 넷. 잡충들이 우걱거리는 집은 사람 냄새가 아닌 시체 썩은 내 같은 비린내가 난다. 주말 저녁은 유독 시간이 느리고 정한은 이글거리는 주황빛 바깥을 목적 없이 퀭한 눈으로 주시한다. 도마 옆에는 수학 공식이 나열된 책과 공책을 펼쳐놓은 채.

 

 

라디오 안테나가 꺾일 만큼 찌는 듯한 더위였지. 언 고기도 녹아지는 여름이었고. 아버지는 손님과 대화를 나누던 중이었고.

 

 

아가 손이 빨라서 일을 잘하지요.

목장갑으로 칼을 쓱쓱 닦는 아버지는 어깨 너머 정한을 살짝 보고 고갤 돌린다. 공부는 잘합니까? 손님이 묻는다. 공부요? 하하, 그게 첫째 아는 공부랑은 워낙 거리가 좀 멀어서. 남자 잘 잡아서 얼릉 시집 시켜버려야지. 그게 효도 아니겠으요? 으하하. 손님과 아버지가 웃기는 게걸스럽게 입을 벌려 웃어대서 정한은 샤프를 계속 계속… 계속 누른다. 기다랗게 삐져나온 샤프심이 툭, 노트 위로 떨어질 때. 깨닫는다.

 

역시 아빠는 한 번 죽여봄직한 인간이었다.

 

정한은 손님이 나가는지 안 나가는지 유심히 보고 있다가 흥미 상실로 인해 공책 사이를 굴러다니는 샤프심으로 관심을 돌린다. 몇 분을 더 보고 있었을까 마침 손님은 다음을 기약하며 나가는데 그때 차임벨이 울리고 뜨거운 공기와 함께 여자 두 명이 들어온다. 나가려던 손님은 둘을 흘깃흘깃, 위아래로 훑다가 주춤주춤, 우스꽝스러운 뒷걸음질로 사라지고 아버지는 두 여자에게 뭘 드릴까, 하고 물었다. 그러나 둘은 소리 나는 쪽이 아닌 정한을 봤다. 정한도 그들을 본다. 감청색 긴 머리가 말한다. 오래 산 것처럼 보이지도 않고 촌스럽지도 않은 얼굴이 바짝.

 

여기는 남은 고기를 어떻게 하나요.

 

찾아와서 묻기에 이상한 물음이었으나 정한은 이상한 물음에도 퍽 대답 잘하기를 타고난 천성이라 무시하지 않고 얘기해준다.

 

보통 버리거나 집에 가져가거나 아님. 못사는 사람에게 나눠줍니다.

그렇다면 버릴 때는 어디로 버립니까?

왜 물어보시는 건가요.

한꺼번에 처리하는지 궁금해서 묻습니다.

 

아버지는 덥다고 나무 부채를 연신 부치면서 셋의 대화… 아니고 옆의 노란색 머리는 입을 꾹 다물고 있었기에 둘의 대화다. 하여튼 둘을 엿보고 있다가 영양가 없는 문장들을 두고 볼 수 없었는지 요즈음은 뒷다릿살이 맛있다며 사가서 국에 끓여 먹으라 강매한다. 그건 감청색 머리의 말을 제지하려는 목적이었는데 정한은 동참하지 않았다. 오히려 정한은 궁금해진다. 뭐랄까 저 둘이 꼭 자기랑 얘길 하고파 하는 것 같았달까.

 

아뇨, 한꺼번에 같이 안 버립니다. 고기는 고기대로. 남는 건…… 애초에 정육점 하루 장사에 고기만 남는 게 아니라서요.

감청색과 노란색이 마주 본다.

그럼 하루 장사 끝엔 무엇무엇이 남나요?

진지한 낯빛이었다. 정한은 진지함에 확연함으로 대응한다.

피랑 뼈랑 고기, 세 가지요.

그것을 한꺼번에 같이 버리는지 궁금합니다.

감청색은 붉은빛 나는 쿰쿰한 진열대 가까이 몸을 부딪쳐오고 정한은 신속히 답한다. 어디론가 빨려 들어가는 기분이 드는 터라 생각할 겨를도 없이.

아니요. 피 뼈 고기는 분리배출 합니다.

그 말이 윤정한 일대기의 시발점이었다.

 

 

 

第 一 章

血骨肉

 

 

 

 

아버지가 집에 돌아갈 때까지 손님 둘은 정한을 기다렸다. 사실 정한은 숙제도 다 하고 공부도 다 하고 돈까지 다 세서 집에 들어가는 일만 남았는데 일이 있는 척했다. 안 버티고 주방을 서성이다가 다시 또 카운터에 앉아서 샤프를 물고 공부하는 척, 연산 풀이를 하는 척, 무슨 척, 어떤 척, 온갖 그런 척을 해도 어쩐지 꼼짝도 안 하는 그녀들은 나가질 않았다. 이에 아버지 입을 여시길, 한아. 오늘은 뒤에 창고도 쓸고 가라. 한숨 쉬고 얼굴에 다닥다닥 붙어 오는 하루살이 떼를 쫓으며, 에잇! 시발. 오늘은 일진도 더럽구 지지리 나빠야.

중얼거리며 돌아간다.

이제 저희가 찾아온 이유를 말해도 되겠군요. 아까부터 문어체를 쓰는 감청색 긴 머리는 사실 푸르다가 만 색이었다. 정한의 표현법으로는 그랬다. 청청한 것도 아니고 검정에 가깝지도 않고 햇빛을 오래 받아 시퍼런 물고기 같은 머리색. 얘는 도회적으로 생겼고 옆에 노란색 짧은 머리는 날카롭게 생겼는데 어딘가 촌스러워서 둘이 어떻게 같이 다니지 싶을 정도의 의아함을 품게 했다. 그러나 더 의아해지는 것은 다음 프레임부터다. 감청색은 정한의 손을 끌어당겨 자기 손에 가두었다. 함께 기도하는 꼴이 되어 정한을 뚫어져라 본다.

 

남희영 씨의 복수를 대신해드리려 합니다.

감청색이 꺼낸 말에 의해 소처럼 큰 눈을 느리게 끔뻑이는 정한. 방금 들은 소리가 사람 입에서 나온 건지 의심스럽다. 그 사람 복수를 왜……. 입만 뻐끔거리는 물고기가 된 정한은 바람에 의해 사부작사부작 흩날리는 옆머리에도 끄떡없이 둘의 얼굴만 쳐다보는 채였다.

그 사람이라니, 어머니람서. 혈육이잖아요.

드디어 말문을 여는 노란색. 그녀도 가까이 정한에게 얼굴을 붙여오는데 상처 몇 군데가 눈에 띄었다. 대신 복수? 이 조잡한 곳에 무슨 호의라고 복수라니. 정한은 텁텁하게 웃지도 못했다.

지나가다 장례식을 보셨나 봐요. 잡상인이 여기까지 따라올 줄은 몰랐거든요. 근데 조문 오셨던 분들이세요? 처음 보는 얼굴이셔서. 내던진 의문에 딸려 돌아오는 것은 그러나 딴소리다.

보험금 얼마 타셨나요?

네? 다 써서 없어요.

그 많은 사망 보험금을요?

사망 보험금이 많아요?

화를 내듯 톡 쏘아붙이자 둘은 말이 없어졌다.

너희 사이비인가요?

노란색과 감청색은 다시 서로를 마주 보고 피식 웃었다.

언니 정말 예쁘세요.

예?

미인이세요. 제가 예쁜 사람 많이 만나봐서 아는데 언니는 특별히 눈이 엄청 엄청 예쁘고 사랑스러우시잖아요. 아, 머리 나처럼 노랗게 빼면 더 예쁘겠다. 천연한 목소리로 얼굴을 가까이 붙여오는 노란색에 정한은 짐짓 뒤로 물러났다가,

제가 언니예요?

물었다. 노란색이 갸우뚱한다.

아 언니 아닌가 동생인가.

그때, 그 순진무구한 얼굴에 빨려 들어가는 동안 감청색이 종이 한 장을 꺼내 불시에 정한의 손에 쥐여준다. 얼떨결에 종이를 받아든 정한은 그걸 노란색의 얼굴을 가리는 데 썼다. 볼이 포동포동한 귀여운 애가 입술 맞부딪힐 정도로 다가오니 살짝쿵 심장이 떨려오는데… 종이에 쓰여 있는 글자가 정한의 이목을 끈다.

박형숙. 남희영의 방직공장 퇴직금 홀랑 빌려 가선 돈 안 갚고 대전으로 튐. 김지원. 남희영이 자주 가는 술집에서 성희롱 일삼음. 강화 인력사무소 소장 강욱헌. 시어머니 연순자. 지속적 언어폭력을 행함. 윤녹원. 남편이고 법정상속인 일 순위이자 연애 때를 포함해 남희영을 이십여 년간 구박 속박 괴롭힘. 가지가지 쓰여있는 것을 읽은 정한은 얼이 빠져 말하지 못했다.

뒤로 갈수록 죄가 더 심한 사람들입니다.

감청색이 말한다.

말했잖아요. 남희영 씨 복수를 우리가 대신해드리겠다고.

노란색도 말한다. 이제야 그들은 진짜 같았다.

어떻게요. 어떻게… 죽이기라도 할 거예요?

정한이 조심스럽게 묻자 노란색은 감청색이 입고 있는 민소매의 아랫단을 반쯤 까 보였다. 감청색의 배가 살짝 드러났는데 배꼽 옆으로 길게 찢어진 칼집이 있다. 정한은 흠칫 놀란다.

뭔지 보여요?

노란색은 자신의 배도 까 보여줬는데 감청색과 다르게 반대쪽 옆구리에 호랑이를 그려 넣은 문신 같은 게 있길래 정한은 속으로 크게 헉…. 했다. 뭐 하는 사람들이야. 잘못 걸렸다 싶다. 노란색이 헤벌쭉 웃었다. 이름난 조폭의 막내딸 아니면 진짜 조폭? 꼭 그렇게 생긴 게. 나 젊은 나이에 장기 팔려나가나. 머리를 스르르 굴려본다. 그런데 노란색이 어느새 카운터 안쪽으로 들어와 정한의 목을 껴안아 버린다.

순진하게 생겨서 할 건 다 한다 싶죠? 원우가 원래 할 건 하고 할 거 알아서 다 잘해요. 그렇지?

그리고는 사뿐히 걸어가 원우라고 불린 감청색에게 입을 맞추는 것이다. 감청색의 손이 노란색의 얇은 반팔 속으로 들어가 가슴을 움켜쥐는 듯 보였다. 하지만 정한은 시선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고민은 하지 않는다. 둘의 질퍽한 입맞춤에 귀가 간지럽고 눈이 벌게지고 정육점 붉은 조명 때문일까 세상이 핑크빛이 되어 숨을 고르게 쉬기 어려워진 정한은 떨리는 목소리로,

 

복수는 둘이서 조용히 하시지. 왜 저한테 와서 이래요.

 

물었고

 

노란색은 얼굴을 떼어내고 답했다.

 

우리 셋이 차피 같이 하게 될 테니까.

 

감청색은 전원우, 노란색은 권순영이라고 자신들을 각각 소개한 뒤 내일 다시 오겠다며 그때까지 결정해 달라는 말을 남긴 채 홀연히 사라졌다. 남은 소리는 차임벨 소리뿐. 가게 내부를 찬찬히 돌던 소리가 점점 멀어지자 정한은 눈을 부릅뜨고는, 정신을 차리자! 바짝 차리자! 꼭 호랑일 닮은 눈으로 응시하던 호랑이 문신 노란색 걔가 감청색이랑 입 맞추는 씬이 꿈에도 나올 듯한 기분을 뒤로하고 우당탕, 집에 올라가 해민다빈 옆에 누워 이불을 말아 새우 꼴로 웅크린 채 내일 진짜로 그들이 또 올까. 또 온다면 나는 고기를 써는 척하고 바쁜 척을 한다. 뛰어가서 공중전화로 경찰에 시 시 신고라도 한다. 다짐하곤 이불 밖으로 삐져나온 발이 시려도 구태여 구태여 잠에 빠져들었다.

 

대박. 정말로 다음 날 다시 왔다.

언니도 우리랑 있으면서 뭔가 하고 싶을 거잖아. 아니야?

순영은 아직도 그 노란 숏컷 머릴 흩날리며 차임벨과 함께 딸랑… 나타났다.

정한. 대체 하고 싶은 게 뭔가요?

원우. 얘는 신경질을 내며 작고 낡은 소파에 철퍼덕 앉았다.

무엇을. 뭐를. 정한은 속으로 따져본다. 복수해서 남는 게 뭘까. 뭘까, 목적을 이루면 당신들에겐 어떤 이득이 남나. 나는 남희영 딸로 태어난 죄라 쳐. 그렇다 해도 너희들은. 정한은 오늘 가게에 혼자였고 오늘도 손님으로 방문한 순영원우는 집 안방인 양 가게를 구석구석 활보하고는 자신의 뒤로 와 정한의 등줄기엔 소름이 오소소 돋아난다. 왼쪽에서 순영이 소리쳤다.

언니가 가장 하고 싶은 걸 해.

내가 가장하고 싶은 거…….

원우는 오른쪽에서 말했다.

하고 싶어 죽겠는 거, ……있어요?

이게 뭘까. 꿈일까. 과연 이게 꿈인가. 근데 꿈이 아니면 좋겠다 싶은 정한은 한참 동안 그 말을 곱씹다가 결국엔,

나 지금….

응응!

반말하고 싶어요, 했다. 뭐? 어이없게 웃는 순영. 살면서 정한이 해본 반말이라곤 급우들을 제외하면 길고양이와 길을 잃은 아이 앞에서가 다였다. 그조차도 여러 번이 아니라서 정한은 버릇없는 것에 대해 일종의 작은 관심과 선망이 마음 구석에 깊이 박혀있었는데 저 둘 앞에서라면 솔직해져도 괜찮을 듯싶어서 조금 꺼내쓰는 것이다.

진심인데. 그리고 욕도 하고 싶어요.

이어오는 말에 피식 웃어버린 원우가 정한의 손을 잡아 온다.

해보면 되잖아요.

순영도 재촉한다.

해봐.

정한은 짐짓 떨렸다.

욕이요?

둘 다 한꺼번에 해보던가.

뭐라고….

이 씨발 여기서 나가.

네?

순영이 문장 하나를 정해주었다.

말만 해보라니까. 그건 괜찮잖아. 아무 이유 없이 말하는 건.

말을 아무 이유 없이 해본 적 없는 정한에게는 어려운 요구. 정한은 숨을 크게 쉬었다. 그리고 말았다. 그 모습이 답답했는지 순영이 어서 빨리 해보라며 지금 이라며 정한의 어깨를 다독이니 정한은 카운터를 뒤로 하고 둘을 보고선 살금살금 입을 벌렸다가,

이….

마침내 소리가 나올 듯한 신호에,

원우가 정한을 돌려세운다.

 

이 씨발 여기서 다 나가!

 

그러자 문을 열고 들어오던 어린 남학생. 놀라 뒷걸음질 치며 저 멀리 나간다. 정한의 어깨 위로 순식간에 죄책감이 한 무더기 쌓였으나 원우와 순영이 꽃잎 터지듯 환하게 웃어대니 울적하다가도 금방 쌓인 무언가를 해치운 상쾌한 기분이 든다. 그제서야 묻고 싶었던 걸 물어 볼 수 있다고 짐작한 정한은 순영원우가 어떤 사이인지 궁금해졌다.

사귀는 사이야?

이에 원우가 말하길.

단순히 정의되는 사이일 뿐이라면 이렇게까지… 열심히 같이 있으려고 안 하잖아요.

한마디로 정의한다. 정한은, 그렇구나. 그런 거구나. 고갤 끄덕인다. 문득 생생한 기억이 머리를 스쳐 지나간다. 살아생전, 매일 나를 불행하게 만들어주는 애인과 내가 죽이고 싶은 사람 다 죽여주는 사람. 이 둘이 있다면 어느 걸 가질래. 묻던 남희영의 농담이 농이 아니었던 것을. 덕분에 약간의 설렘이 마음속에 더해진다. 그래서일까 둘에게 팔짱을 낀다. 차임벨, 딸랑. 영롱하게 울렸다. 셋은 어느새 뜨거운 햇빛에 쐬며 느릿하게 걷던 걸음을 빨리했고 어느새 뜀박질을 하기 시작해 땀에 절어 끈적거리는 팔을 풀고는 헉헉대면서 서로의 손을 잡고 담을 넘어 벽을 피해 돌아 돌아 어딘지도 모를 곳으로 계속 계속 달려 나갔다.

 

 

 

第 二

榮 과 圓

 

 

 

 

그래도 열다섯 번째로 들어온 걔는 머리라도 컸다. 머리라도 커서 하나를 말하면 두 개로 번식 시켜 잘 알아먹는 애였으니 전원우의 계획이 통하겠다고 판단했다. 권순영이. 둘이 있을 때 판단은 오로지 순영의 일이었는데 그건 원우도 동의한다. 순영은 원우가 도피하고프다― 존나, 라 했을 때 얘가 뭔 일내겠구나 싶었다. 물론 혼자 말고 같이. 우리는 뭔 일내는 걸 좋아하잖아. 안 그래? 그러자마자 둘은 곧바로 제대로 완성될 계획일지 어떻게 될지 모를 것을 세우고 밤에 나갈 준비를 마쳤다. 약간의 그리움과 함께. 전원우 권순영. 오래된 사이였다. 계획은 단숨이었지만. 영원히 젊을 이 둘은 아직 닮지 않은 가족으로 사는데 열다섯 번째 걔는 머리가 진짜 크긴 하다. 하지만 정신 상태는 애라서 몸이 서른에 가까운 나이였어도 생각이 다섯 살이 안 되었다.

 

누나 나나 나가면 주주주 죽어요.

원우와 순영이 반지하 나오는 문을 열었을 때였다. 뒤에서 언제 깼는지 열다섯째가 따라 나왔다. 순영은 캔버스화에 발을 맞춰 넣으면서 대답했다.

나랑 원우는 안 죽어.

원우는 무표정이었으나 분명 걱정 서린 얼굴의 열다섯째에게 현관 앞에 서서 웃어주었다.

누나들 없어도 잘 지낼 수 있어 최 경?

응응.

너, 우리 내뺀다고 이르면 안 돼 알아?

순영이 신신당부하자 경이 방긋 웃었다.

안 일러. 안 이른다. ……경 경이는 누나 말 잘잘 잘 들으니까.

그래.

그럼 안녕. 말을 끝으로 더운 숨과 함께 밖으로 나간다. 반지하 철문이 쾅, 닫힌다.

 

이제 우린 자유다! 같은 자리만 맴도는 러닝머신이 아니라 똑같이 굴러가는 쳇바퀴가 아니라 이번은 진짜 진짜, 진짜 들판을 달려 나가는 거야. 우리가 죽일 애들 피 묻힌 돈 들고 오라던 명령 따위는 원래 없었던 듯이 말이야! 순영과 원우는 두 팔을 뻗은 채로 비탈길을 급히 내려가며 보이는 아무것에 아무렇게나 인사를 한다. 반지하 수 마담! 목욕탕 주인 할멈! 바늘로 옷 떠주던 금화! 우리 가짜 인생 살게 해준 리앙! 모든 살아있는 것들을 잘라대던 인구와 아빠인 척하는 그 개새끼 그리고 하나둘 셋 넷 다섯 여섯 어쩌고저쩌고 열다섯째 막내 경이까지 굿바이! 모두 굿바이야! 잘 살아! 우린 유토피아 찾으러 갈게!

뜀박질은 두 사람의 전부였다. 별이 촘촘히 박혀 있던 밤하늘 아래 비탈길을 성큼성큼 내달려 마찰하는 발바닥이 아스팔트에 달라붙어 살가죽 타올라 뜯어져 버려도 오로지 둘의 세상에는 괴팍한 여름밤 낭만만이 오롯이 전부.

 

그러고 나서 정신 차려보니 웬걸. <녹원 정육>이었다. 오고 싶어서 온 게 아닌데 마지막 임무 마지막 떠나는 길 우리끼리 해 처먹고 가자는 마음이 기어들었나보다. 맞다. 우린 궁핍하니까 돈 좀 뜯어내야 하지 않겠냐고. 원우와 순영은 가쁜 숨을 들판에서 좀 고르다가 해 뜨는 새벽녘쯤 기상했다. 유리문에 눈 붙여서 살펴보니 <녹원 정육>은 사람이 없었다. 고기도 없었고. 문 앞에 붙여진 상중이라고 쓰여 있는 안내판에 둘은 꿀 먹은 벙어리 되어 꼈던 팔짱을 풀었다. 누구의 장례식일까? 물어물어 누구의 상이냐, 아무나 붙잡고 여쭤보니 남희영의 상이랜다. 남희영이 죽었다는데 이거 우리가 빚 준 건 어떻게 돌려받아야 하는지도 모르겠고. 그럼 첫째 딸을 보증 삼아 장기라도 갖다 팔아야 하는 거 아닌가 싶어 이틀 내리 고민했으나 그 결과는 남희영 첫째 딸도 인생이 그리 평탄치 못하다는 거다. 호주머니에 있던 쌈짓돈 모아서 조의금으로 낼까 하다 조문은 사치라 치부하고 어쩌다 마을 가득 불어나는 소문을 듣게 되었다. 남희영 인생 때문에 첫째 딸 인생도 그런 거라고 했다. 그때 순영과 원우는 옳다 싶어 도서관에서 훔친 책을 반 찢고 소문 속 등장인물들을 사건과 함께 적어놓았다.

 

며칠 후에야 <녹원 정육>이 장사를 개시했다. 원우와 순영은 처음으로 첫째 딸의 생김새를 볼 수 있었다. 검정 긴 머리가 살랑이는 소문의 윤정한. 소문의 첫째 딸. 어처구니없게도 둘은 동시에 사랑에 빠진다. 닮지 않은 가족에서 닮은 가족이 되어버린 순영과 원우. 멀리서 정한을 보다가 바다 내음이 나는 듯한 착각에 빠져 먼저 입을 연 건 순영이었다.

 

원우야.

응.

못 꺼내 올 거 같지 저러면?

 

여기서 꺼내온다는 것은 장기를 말한다.

 

응.

 

그래서 둘이 합쳐 생각한 게, 남희영 죽인 연놈들을 다 죽이면 저 여자애 얼굴이 인생이 피지 않겠냐였다. 복수해준다고 다가가면 관심 가질 것 아니냐였다. 유토피아를 찾아 떠나온 계획은 잠시 접어 주머니에 넣어두고 남희영이 우리한테 진 빚 따윈 그 연놈들 몸에서 나온 거로 팔아 갚고 우린 그 돈을 가져 저 검은 머리 청초한 여자애랑. 그렇담 여자애를 저기서 어떻게 꺼낼 수 있는지가 관건인데 우리 계획에 여자애를 함께 들여야 하는 거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자마자 일단 우리는 해체 법을 배운 적이 없고 저 애는 장기와 살을 잘 분리하니까 돼지나 소 닭 말고 사람에게도 칼 쓸 수 있는지가 궁금해진 원우는… 깨닫는다. 아, 보통은 그럴 일 없지. 그런 일 안 하지. 우리 같은 일 안 하지. 하다가도, 아니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귀결시킨다. 그래서 순영이 결정하기를,

 

고기 말고 사람도 썰어봤냐고 물어보자.

 

순영의 눈치는 다 뒤졌다.

 

그건 직접적이잖아.

그런가? 직접적이야? 그럼 어떻게 해야 해?

일단 몸에서 꺼내려면 분리를 잘하는지가 중요하지.

 

그러나 원우는 입이 안 떨어져 칼질 잘하냐고를 못 묻고 빙빙 돌려 이상한 말만 늘어놓다가 결국엔 피 뼈 살 배출 방법으로 넘어가 버린 단발적 대화에 동공이 지진처럼 콰르르 떨린다. 떨려도 마음을 잡으려 애써 침착한 척. 괜찮은 척. 원래 대사였던 것처럼 다음 대사를 쳐보지만 복수해준다고 꺼낸 이야기는 산으로 가서 사망 보험금 얘기까지 나와버렸고. 이러려던 게 아닌데. 결국 머리가 핑 돌아버린 원우가 멈춰서 아무렇지 않은 척 파동조차 없자 참다못한 순영이, 언니 정말 예쁘세요. 화제 전환에 성공. 그다음 대사를 줄줄이 말하고 나갔다. 이상한 원우와 순영이 사라지자 정한은 문을 잠그고 뛰쳐나가 집으로 올라갔다.

 

그런데 큰일 생겼다. 불이 꺼진 <녹원 정육>이 보이는 풀숲에서 선잠이 들려던 순영과 원우의 앞에 열다섯 번째 경이 나타난 것이다. 정한이 집에 올라간 것을 확인 후 진을 치고 누워있을 예정이었던 둘에게 경이 뒤에서 인기척을 냈다.

여기 어떻게 왔어?

누나들 여기 와서 머머 뭐 하는지 감시 가 감시하래 누나……. 경은 손을 떨었다. 덜덜. 멍하게 있던 원우는 순영에게 말을 건넨다. 이게 가족이랑 식구가 다른 이유야. 순영은 응당 고갤 끄덕인다.

밥을 같이 먹는 사이는 상호 간에 책임이 생긴다는 거지?

응. 존나 불편한 책임이네. 원우는 얼굴을 쓸고 순영은 입술을 핥았다. 어떡하지.

돌아가자.

그래 돌아가자.

그 남자 오기 전에.

순영과 원우는 등가 교환으로 주고받은 눈짓에 해답을 도출한다. 순영이 고갤 쳐들고 경에게 말한다. 내일 해 뜨면 돌아가는 거야, 경이도. 알았어?

아 아닌데. 지금 누나 잡아 오랬는데.

경은 사슴보다 슬픈 눈망울이었다.

응 알아. 아빠가 누나들 잡아 오래?

응. 경이한테 시 시켰어.

알았어. 가자, 같이 갈 거니까 경이 여기서 잠깐 앉아있어.

눈 좀 붙이자. 순영과 원우는 불면을 안다. 그래서 경이 빨리 잠이 들 수 있는 루틴을 안다. 일정히 숨 쉬는 가슴에 손을 대고 토닥이면 경은 그날 밤과 새벽을 지나 아침까지도 눈을 뜨지 않는다. 멍청한 최 경. 바보 같은 최 경. 원우와 순영이 자신을 버릴 줄은 모르고. 정한과 함께 손을 잡고 벽을 피해 돌아돌아 달려 나가는 것을 보지도 못하고 경은 꼬박 다음 날 오후가 지나도 깨지 않았다.

 

<녹원 정육>은 붉은 조명 아래 아직 영업한다. 잠깐의 외출 때문에 정한은 혈색 도는 얼굴로 오만 가지 향기마저 사랑할 것 같은 얼굴로 가게에 돌아왔다. 아버지는 자리를 비워놨던 정한의 앞에 우쭐대며 섰다. 눈에는 지랄맞은 살기가 어렸다. 정한은 가게 밖을 서성이는 둘에게 눈빛을 보낸다. 원우와 순영이 보기에 가지 말아 달라는 표정이었다. 둘은 발목이 잡혀 촘촘히 얽혀오는 시선을 떼어내지 못한다. 그때. 구원자처럼 손님 한 명 들어온다.

손님 아니었다. 구원자도 아니었다. 지금으로부터 이 년 전에 밤마다 가끔 해민을 찾아와 허벅지를 만지면서 소리 내면 죽인다던 그놈이 얼굴을 들이밀었다. 그놈 어깻죽지 위로는 깊은 상처가 있는데 그건 정한이 가위를 꽂아 넣어서 생긴 자국으로 아버지는 이를 알았으나 모른척했으므로 윤녹원도 이름만 아버지 영역에 속한다고 생각하는 정한은 그때도 저 때도 어느 때도 단 한 순간도 그놈을 죽이지 않고 싶었던 적이 없었다. 죽일 수도 있었는데. 그런 무심한 정한의 큰 관심을 받는 저놈은 정한에게 머리를 조아리며 감사해야 마땅했다.

물론 원우순영은 한눈에 그가 친절치 못한 사람인 걸 간파했다. 술 취한 아버지는 뒤뚱거리며 주방에 들어가고 정한과 그놈만 남은 공간에서 정한은 카운터에 가만히 있었다. 땀이 이마를 주룩 타고 내려왔다. 그놈이 정한의 볼을 손가락으로 건드렸다. 예쁜 것… 니 엄마는 죽었지만 니 미모는 살아있구나.

이에 정한은,

시발 것… 네가 나 쳐다도 못 보게 눈깔도 도려냈어야 하는 건데.

했다.

그놈이 나갈 것 같지가 않은 광경에 순영은 원우의 옆구리를 잡아당겼다. 원우가 쓱 밀려오고 순영은 원우에게 귓속말로 속삭인다. 저 뒤에 기름통이 있는데. 순영의 말이 더 이어지기도 전에 원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판단은 순영의 몫이니.

 

언제부터였을까. 그놈이 정한의 목을 조르고 있고 원우순영은 살금살금 들어온다. 차임벨 소리가 나는데도 그놈은 살의에 정신 팔려 아무 소리도 듣지 못하고 정한은 숨이 막히면서도 뒤로 시선을 꽂는다. 타일 바닥에 기름이 줄줄 부어졌다. 정한이 웃었다. 그놈은 정한의 웃음에도 분노가 가득 찼다. 정한은 중얼거렸다. 왜 화를 내니 네가. 그때였다. 억, 윽, 악. 앞으로 쓰러지며 그놈이 머리를 부여잡았다. 뒤를 돌아본다. 원우가 빈 양철 기름통을 그놈의 뒤통수를 향해 내던진 것이다.

니들 뭐야!

우리 잡아보세요.

그놈은 분노가 머리 꼭대기까지 올라 둘을 잡으려 뛰려는데 바닥에 발을 디디는 순간 춤을 추듯이 빨빨거리며 쓰러졌다. 뒤집어진다.

괜찮으세요? 오랜만에 바닥에 기름을 뿌렸더니. 그러게 조심하시지 그러셨어요.

머리 위에서 원우가 물었다.

원우야 라이터 있니. 불 좀 붙이자.

순영은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냈다. 원우는 라이터를 꺼내려다가 물었다. 근데 여기에? 아니면 저놈한테? 쓰러진 그놈은 해까닥 눈깔이 뒤집어져 손을 벌벌 떠는 채로 이, 이, 이 미친년들! 하며 뛰쳐나갔다. 원우순영도 열린 문으로 가게를 나간다. 정한은 부스스한 머리에 손가락을 끼워 넣으며 앓았다. 이해는 안 되지만…….

너희 왜 그런 거야?

언니가 싫어하니까.

순영이 불붙은 담배를 지져 끄고 안으로 들어온다.

아니야? 싫어하잖아, 저 사람.

원우는 정한의 긴 머리에 코를 박았다. 정한은 입꼬리를 올리고 소리 없이 웃는다.

지랄… 청소 거리만 늘었네.

 

 

그리하여 영원榮圓한 일대기에 윤정한 일대기가 교차해 섞여 들어가게 된다.

 

 

이때 우리 막내 경은 뭘 하고 있는가. 경은 노래를 부르며 돌아다녔다. 밝혀지지 않으면 합법, 밝혀지면 범법. 신나게 부르다보니 어느새 경은 <녹원 정육>에 다다랐다. 빡빡머리 최 경의 그림자가 컨테이너 앞으로 나타났다. 순영이 가게 안까지 들어온 그림자를 본다.

 

누나아… 한참 찾았어.

 

가난이 대물림되는 집안은 폭력이 대물림되고 폭력이 대물림되면 정서가 대물림되고 그렇게 물리고 물리고 물려서 사는 것이 인생.

 

열다섯 번째 경이랑 반지하에 돌아온 순영원우는 뺨을 처맞고 이름만 아빠는 파란 머리 이 년이 개년이라며 순영한테 우락부락 화를 냈다. 원우는 색이 빠진 지가 한참 지났는데 파란 머리는 이제 아니라며 언짢아하고 순영은 원우가 무슨 죄가 있냐며 말을 가로막았다. 아빠인 척하는 이 새끼는 우릴 거둬 먹였지만 그건 사랑이라 총칭하는 것에서 비롯되지 않는다. 경을 안전한 곳에 돌려보내야 한다는 판단은 순영뿐만 아니라 원우도 동의한 것으로, 그래서 경의 손을 잡고 얘만 방 안에 넣어주려 한 거였다. 그런데 일없다고 집에 돌아오기는.

그러나 우리의 원우순영이 구속을 따르고 자유를 포기할 친구들인가. 둘은 또 최 경이 자는 사이에 빠져나왔다. 경아, 죽기 싫으면 누나 지시에 무릎 꿇고 가만있어.

 

정한과 원우와 순영의 외출은 어쩌다에서 매일이 되었다. 카페도 가고 극장도 가고 놀이공원도 갔다. 정한은 처음 느껴보는 자몽에이드의 맛에 떫은 혀가 신기했다. 그렇게 아침이 가고 정오가 되고. 순영은 담벼락에 기대어 앉아 돌멩이를 주워 공기놀이를 한다. 광활한 하늘을 올려다보면 햇볕에 눈을 뜨지 못하는 온 세상은 수족관처럼 물기가 서렸고 셋은 땀을 흘리며 버스를 기다렸다.

원우는 순영이 많이 사랑하니?

정한이 쭈그려 앉은 원우에게 다가가 아이스크림을 건넨다. 원우는 소다 맛 아이스크림을 받아들고 옆에 앉는 정한과 시선을 맞대어온다.

정한. 사랑한다는 말은 함부로 하면 안 돼요. 그 말 뒤에 따라오는 게 많아지니까. 나도 모르게 책임자가 되는 거거든요. 세상에 공짜가 어딨어요. 헌신이 어딨어요.

그러자 정한은 원우를 끌어안았다. 어딨게. 여기 있을 수도 있지. 딱딱한 쇄골뼈에 얼굴을 기댄다. 심장이 쿵쿵쾅쾅 뛰는 게 귓가에 선명히 그려졌다. 돌아보면 코 닿을 거리에 있는 저 입술을 빨아 먹어보고 싶었다. 소다 맛이 날까. 원우는 그걸 눈치챘는지 정한의 상의 뒤로 손을 집어넣고 척추뼈를 매만졌다. 그리고 입술을 머금으니 녹아버리는 것이었다. 정한은. 정한의 검은 머리가 햇살 아래 어느덧 푸석해졌다.

 

비가 많이 쏟아지는 날. 원우와 순영은 정한의 집 다락방에서 일자로 누워있다. 순영아. 부른다. 으응…. 순영은 원우를 보지 않고 답한다. 원우는 언덕에 누워 별 보듯 아무것도 없는 천장을 감상하는 채로 공존한다. 오래 쓰지 않아 짓물러진 언어를 혀에 바르면서. 우리 이거 아무 문제 없는 거잖아. 원우는 온점인 척하는 물음표를 달았고 순영은 또 똑같이 답한다. 으응….

그러나 무언가 마음에 걸리는 게 있었다.

야, 전원우.

어?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네 이름 하난 잘 만든 거 같아. 나 때문에 원래 네 이름 너도 안 쓰잖아…….

맞는 말이었다. 원우는 순영의 말에 무조건 동의한다.

우리 성은 달라도 발음 똑같은 거 그거 하나 우리 운명이지?

응. 존나 같은 운명이지. 와, 원우 씨 손도 예쁘네.

네가 더 예쁜데 나한텐.

순영은 화사하게 웃었다. 원우는 옆으로 몸을 돌려 순영과 깍지를 낀 손에 입을 맞추고 순영과 눈을 맞추었다. 순영은 원우의 얼굴을 빤히 보다가 빨간 입술을 만져본다.

너도 정한 언니 좋아?

어.

너랑 나랑 공동 책임자야. 그럼.

그럼 가지 마.

어딜.

중경重慶.

안 가. 내가 너랑 언니 두고 어떻게 거길 돌아가. 너도 가지 마.

근데 순영아. 국적 취득할 때까지만이야. 두 달만 버티면 리앙이 신고해 준댔잖아.

야, 너 걔 믿어? 왜 믿냐, 난 리앙 못 믿어. 싫어. 우리 거기 나오면서 걔랑도 헤어진 거야. 걔가 아무리 우리 편이라 하지만…… 원우야 넌 걔 말 믿지 마. 내 말만 믿어, 어?

순영이 속삭였다. 원우는 브래지어를 벗어 옷 위로도 느껴지는 순영의 살결을 만진다. 순영은 게슴츠레하게 원우의 볼을 잡아당겼다.

우리 둘이 언니랑 앞으로 이렇게 살자……. 못 할 게 뭐 있어. 난 너랑 정말 남남 같거든. 봐봐, 새로 태어나니까 재밌잖아. ……내가 재밌을 거라 그랬잖아. 원우야.

그러게. 남남 같다. 누가 알까, 우리가 동시에 같이 태어난걸.

 

시간이 지나고 잠이 든 원우와 달리 순영은 말똥히 깨어있었다. 습기로 진득해진 욕실에서 순영은 몸을 씻어내리며 멜로디를 흥얼거리다 물이 가득한 구닥다리 욕조 안에 들어가 누웠다. 물이 목까지 올라온다. 정한은 노랫소리에 깨어났고 눈떠보니 욕실 앞이었다. 인기척을 들은 순영은 곧장 정한인 걸 알았다.

언니도 같이 목욕할래?

순영은 뒤로 있다가 정한 쪽으로 돈다. 순영의 등을 보고 있던 정한은 눈이 마주치자 부끄러워졌다. 온실의 온도 때문일까 뜨거운 물온도 때문일까. 손가락이 불어터지고 정한은 자연적으로 무릎을 세웠다.

언니 그거 알아? 순영이 꿇어앉아 정한에게 다가온다. 입술 닿을 거리만큼.

……뭘.

정한이 조심스러운 눈으로 보자 순영은 꺄르르 웃었다.

원우 배에 있는 그거. 배 옆에, 옆구리에 그 흉터 자국 사실 칼집 아니고 내 신장이야. 내 신장이 걔 몸에 들어간 거라고.

그리고는 몸을 일으켜 배를 보여준다. 그 배에 그려진 범 문신의 이유. 마침내 알게 되었다. 순영이 다시 물속으로 들어와 철벅이는 소리가 타일 벽에 부딪힌다.

언니. 그냥 사귀는 사이는 이런 거 못 해. 안 하지. 어떤 연인들이 자기 애인 몸에 자기 장기 이식을 해주는데. 그게 가당키는 할까. 있잖아… 원우는 이십 오퍼 확률에서 살았어. 애새끼들은 깨어날 줄 몰랐대. 그래서 기적이래. 근데 우린 절대 그걸 기적이라 안 봐. 왜인지 알아? 모르겠지. 근데 알걸? 언니도. 우린 하나니까 처음부터. 내가 원우고 원우가 나니까. 그래서 살아난 거야. 알겠지? 원우랑 나는 하나.

언니, 언니는 안 잊을 거지? 내가 원우든 원우가 나든 우리가 어떻게 살아도 어떻게 죽어도 언닌 우릴 안 떠날

 

 

 

Last chapter

비행

 

 

 

 

……거지?

모르겠다. 정한은 바로 대답 대신 순영의 입술을 물었다.

손을 잡고 달렸던 그 날 그때부터 내 마음은 너희한테 가 있었나 봐. 그러니까 다는 아니고…… 한 명만 해주면 돼. 그게 된다면 나는 내 평생을 너희에게 목숨 바쳐 살고 싶어.

순영은 정한의 말이 끝나자마자 목덜미에 팔을 감아 키스했다. 물살이 출렁이며 살을 파고든다.

 

다음 날 꼭두새벽. 차 키를 훔쳤다. 순영의 손에 있다. 윤녹원이 운전하는 흰 냉동 트럭이다. 정한의 고백을 잃는 것은 크나큰 손실이었으니 순영은 이 기회를 소중히 마음에 품고는 오랜만의 나들이라 들뜬 원우와 손을 잡고 시너를 사 왔다. 윤녹원은 내일로 넘어가는 새벽 두 시, 노름판에서 나온다. 원우는 자꾸만 라이터를 껐다 켰다.

 

매장은 어디다 해.

언니네 냉동창고.

정말? 아무 죄가 없는데 죄인 된 사람이 윤정한인데?

…….

살을 잘라 오븐에 구우면 맛이 날까…. 돼지고기 같은 맛이?

순영이 중얼거리자 원우는 라이터 불을 순영의 눈앞에 보여준다.

 

방학이 끝나간다. 정한은 화장실 거울을 보며 풀어 해쳐진 긴 머리를 묶었다. 창문 밖으로 매미가 연신 울어 시끄러운 아침이었다. 정한에게선 빗으로 쓸지 않아도 머리카락 한 움큼이 빠져나왔다.

오늘 새벽… 정한은 세찬 빗소리에 온 동네가 씻겨나갔으면 했다.

 

옷, 옷이 더러워졌잖아. 어뜩, 어떡해……. 어떡해, 순영아. 원우야.

괜찮아 언니. 비닐이라 괜찮아.

 

가게로 돌아온 순영과 원우는 피 묻은 우비를 털었다. 피인지 비인지. 둘이 한데 섞여 솔직히 알아보기도 어려웠다. 비가 끊임없이 퍼붓는 하루가 길었던 탓이라.

 

괜찮아. 걱정마 걱정마. 걱정하지 마. 불타서 다 사라졌으니깐.

정한… 원래 더럽다 생각 들 때에 깨끗해지는 법을 알게 되는 거예요.

 

이건 쓰지도 못했다며 원우는 정한에게 식도를 돌려줬다. 정한은 깨끗하게 빛나는 칼을 싱크대 밑으로 던져놓고 나가려는 순영의 손을 잡았다. 그럼 너희에게 묻은 피는 무엇일까.

얘들아… 어떻게 된거야?

순영은 피식 웃었다.

언니는 금방 알게 될 거야.

말을 끝으로 가게 밖을 나간다. 마지막으로 차임벨이 딸랑. 노려보던 정한은 저걸 떼어내야겠다고 생각했다.

 

보도되는 뉴스 속보에 오후 노을 지는 경찰서 안의 사람들과 정한은 티브이로 이목이 끌린다. 냉동 트럭이 다 타서 발견되었는데 최초 목격자는 지나가던 산불 경비. 그날 새벽에 같이 있던 주변인의 말에 의하면 윤녹원은 노름판에서 돈을 잃고 씩씩대며 나갔다 하고 자긴 그것밖엔 모르며 그 뒤로 저렇게 발견될 줄은 어떻게 알았냐 했다. 산불 경비는 불탄 시체에 유서라도 있는지 확인 좀 해보라 했으나 수사반장은 차가 전부 불탔는데 종이 쪼가리가 어떻게 있냐 대들었다. 삶을 비관해서 분신한 건지 자연발화인 건지 타살인 건지 감식 의뢰를 해야 한다며 이마를 짚었다.

 

학생. 여기 얘네 진짜 몰라요?

몰라요.

취안 위엔요, 취안 순롱. 얘들 알잖아. 정말 몰라?

모르는데요.

아이, 여기 씨씨티비에 잡혔잖아. 전원우 권순영. 이 사이코들 이거 얘네 한국인이던데. 응, 스물하나. 원래는 한국인 맞는데 어렸을 때 중국 가 살다 중경에서 넘어왔다 그러더구먼. 본명이 있는데 일부러 새로 이름 지어서 바꿔쓰고 그랬다허고. 손님으로 몇 번 왔으면 얼굴은 기억할 거 아니요?

 

정한은 사진을 보고도 몇백 번 마주하던 얼굴을 수천 번 지웠다.

 

아니요. 기억이 없다고요.

 

사람은 어릴 때부터 사람에게 해를 끼치면 안 된다고 배웁니다. 그러나 나의 도덕적 양심은 가난으로, 분노로 죄다 무너지고. 무너진 사람들은 무너진 것을 숨기려 하는 본능이 있답니다. 하지만요. 물론 우등한 것들은 숨기는 것도 성공하는 인생을 살지만요, 열등한 것들은 숨겨봤자 들켜버리기 일쑤거든요. 그런데 열등하단 것이 정말 나쁜 것일까요.

 

머리카락이 얼굴을 끈적하게 붙었다 떨어진다. 정한은 뜀박질했다. 경찰은 오늘은 여기까지 하고 방학 끝나기 전에 또 협조해달란다. 내가 협조해야 할 이유는 아버지 이름 달고 아버지 가게에서 아버지랑 일했던 자식이라서 일 것이다. 진짜 나와 그 사이에 있었던 일들을 경찰이 어떻게 알까. 나를 한 번이라도 들여다보려고 했던 사람은 이 세상 단 두 명인데.

시발 진짜. 하필이면 단화를 신었을 게 뭐람. 마찰하는 아스팔트 길이 험난했다. 숨이 턱 끝까지 찬다. 정한은 종일 보이지 않는 두 여자를 떠올렸다. 그리고 눈물이 막.

이게 뭐야. 감겨놨으면 남겨놓지를 말아야지! 끌어들였으면 혼자 두지를 말아야지! 길들였으면 버리지를 말아야……!

막 눈물이. 막 눈물을. 쏟아내고 싶었다. 클랙슨 울리는 차들은 도로에 막혀서 오도 가도 못하고. 정한은 오르던 다리를 멈추어 서서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다시 쉬었다. 그리고 산길을 냅다 가로질러 내달렸다.

나는 간도 쓸개도 너희처럼 신장도 다 빼줄 수 있어. 까진 발이 아렸다. 아마 오늘부터 퉁퉁 부을 것이다. 정한은 주먹을 꽉 쥐고 두 눈을 꼭 감고 있는 힘껏 달렸다. 그러다 눈 떠보니 웬걸. 집이었다. 방 안에 있었다. 언제 들어왔는지 가늠도 안 되지만 다 저물어가는 노을과 마지막 햇빛이 엎드려있는 정한의 머리 위에 있었다. 정한은 울 것 같았다. 울어야 했다. 학교에 간 해민다빈은 비보를 듣고 울며 곧 돌아올 것이니 정한은 덩그러니 방에 혼자 남아 혼자 울어야 했다.

그런데 그때였다. 쾅쾅쾅.

이것이 정한의 심장 소리일까? 쾅쾅쾅쾅쾅.

언니! 나야! 나랑 원우야!

아니었다. 머리 아래 들려오는 그건 문을 두드리는 소리. 정한에게 영광을 가져다주는 소리.

쾅쾅!

천사들의 방문.

문 좀 열어줘!

쾅쾅!

열어줘! 언니 제발!

웃음이 나오기 전에 숨이 차오른다. 돌계단을 내려오며 내쉬고 들이마시는 숨은 불규칙했고 심장 혼자 튀어 나갈 것 같았다. 그래도 참고 끝끝내 다급한 손으로 대문을 열면.

 

경 경찰이 뭐래?

 

바람이 휘잉 하고 분다. 떨리는 목소리의 순영과 원우는 불온해 보였다. 누군가에게 쫓겼던 게 확실하다. 하필 더운 여름날에 땀 범벅이 된 둘은 곧 울 듯한 얼굴……. 그러나 정한은 불온한 것을 사랑으로 감쌀 줄 아는 아이. 갈망을 향한 결단이 단호했던 사람.

나는 새로 태어나야만 될 것 같아. 어쩔 수 없이 막 눈물이 튀어나와. 막. 오래 물로 살다가 이때야 기화하나 싶어. 이제 또 존재 없이 사나 싶어. 어쩌면 나는 곧 죽을지도 몰라. 하지만 있잖아, 그런데. 그런데 말이야. 그래도… 그래도 나는 말이야.

 

씨발. 너희들이랑 놀지 말래.

 

나는 또다시 수증기가 되지 않겠어.

 

복수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게 최고의 복수였다. 윤정한이 하지 않는 복수가 복수. 윤정한이 윤정한으로 사는 것이 우리들이 기를 쓰고 만들어 낸 걸작품. 정한이 남긴 건 볼에 남은 눈물 자국이 다다. 정말로. 그 덕분에 결말은 단 하나.

윤정한은 전원우에 의해 죽고 전원우는 권순영에 의해 죽고 권순영은 윤정한에 의해 죽고. 상호 간 죽이고 죽고 죽고 최종적으로는 푸르죽죽하게 다시 태어나 모두 달린다. 아하하 꺄르르 웃으며 조각난 웃음을 달고 떠오르는 조각달 아래서 서로를 따라 멀리멀리……

도망치는 것.

시네마 클리셰다.

안아줬으면 이름을 불러줘야지. 볼에 입을 맞췄으면 눈을 바라봐 줘야지. 눈물을 닦아줬으면… 손을 잡아주어야지. 원우야, 순영아 사랑하잖아. 내가.

기차가 철로를 빠르게 내달리는 소리를 들으며 셋도 전심전력을 다해 내리막길을 달린다. 튕겨 나갈 것 같은 무릎을 참아가며 꽉 맞잡은 손과 손에 힘을 주니 뚫릴 법한 손을 서로 하나씩 끼고 마을 끝으로 끝도 없이 날개 없이 달려 나간다. 하지만 곧 날 것 같았다. 비행 시작되었다. 발이 바닥을 밟을 때마다 붕붕 떠올라서 두 팔을 쫙 뻗으니 새로이 태어날 기미가 보였다.

그러니까 한 번 날면. 한 번만 날 수 있다면 태초의 날갯짓으로 높이 떴다가 지각 지나 맨틀 있는 데까지 날개에 불이 붙어 불타올라 추락한대도 마지막 느끼는 기분은 상쾌하지 않을까. 그러니 우리 가는 곳에 유토피아가 없을까 내 사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