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한이 순영을 처음 알았을 때 벤츠는 박살 나 있었다. 고가다리 밑은 사람이 없고 황마처럼 달리는 차들만 즐비했는데 넘실거리는 클랙슨 소리 때문에 먹먹하던 귀가 윙윙대었다. 벌떼 같은 소리가 십자형 도로 어디에서 나는지 구분되지 않는다. 마치 공장에서 출고를 대기하는 차들의 거대 창고 같았다. 울리는 귀에 얼굴을 찡그리며 걸어오던 정한이 마주한 건 노란 머리칼. 정한은 반사적으로 자신의 머리를 헤집는다. 후진하다 세워진 차를 박았어. 흘깃 이쪽을 쳐다보고 문자를 보내는 손은 빠르다. 뭐 박았는데. 외제차? 답장도 빠르게 도착했다. 몰라ㅋㅋ근데 벤츠s클래스 같음 아. 순영은 다가오는 구둣발 소리에 핸드폰을 집어넣고 손톱을 물어뜯는다. 한숨을 내쉬던 정한은 차 앞쪽을 살피고 마침 순영의 주머니 속 핸드폰에는 문자가 또 온다. 모르긴 뭘 몰라. 존나 잘 아네.
운전을 어떻게 했길래. 음주운전이에요?
아니요, 아니에요, 절대. 제가 아직 미숙해서……, 죄송합니다.
조수석 쪽 앞 범퍼 일부가 일그러졌다. 출혈이 크다. 정한은 머리를 쓸어 넘기고 순영을 본다. 앳된 얼굴. 젖살도 안 빠진 볼살 같은 거. 감정해보니 둘 중 하나라고 생각이 든다. 학생이거나 백수거나. 서비스센터 입고시켜야겠다. 이거 수리 꽤 오래 걸릴 텐데. 꺼낸 핸드폰으로 여러 장의 사진을 남긴다. 검은 트레이닝 셔츠에 비니를 쓰고 막 나온 자신에 비해 정장을 차려입은 정한의 모습은 때깔이 좋아 보인다. 긴 손가락과 다리. 손목에는 값 나가는 시계가. 슬랙스 핏과 검은 머리까지 완벽하고 어쩐지 다가가면 향기도 날 것 같다. 순영은 입이 떡 벌어질 뻔한 것을 간신히 참는다. 굽힌 허리를 펴고 응시한 도로는 클랙슨만 윙윙대고 여전히 하나도 여유롭지가 않다.
보험사 연락은 했어요?
이제 통화하려구요.
정한은 핸드폰 통화기록을 찾는다. 남아있는 순영의 열 한 자리 숫자를 보고 저장 버튼을 누른다. 잠시만. 이름이 뭐예요? 그리고 또, 혹시나 해서 묻는다. 명함 있어요? 아니요…. 저, 명함은 없구…. 그럼 면허증. 말을 잘라 쳐다보니 째려보는 듯하다. 바짝 쫄아든 순영은 지갑을 뒤지며 정한의 옆에 다가선다. 권순영이요. 순영의 말에 정한은 자음과 모음을 천천히 쳤다. 수염이요? 아뇨, 순영… 꽃 영자 써요. 아. 예쁜 이름이네. 정한은 순영의 이름을 입력하고 순영에게 손을 내민다. 고개를 살짝 젓는 순영은 모르는 눈치다. 내 번호도 저장해야죠. 아…. 그제야 순영은 주머니에 박혀있던 핸드폰을 꺼내 화면을 켠다. 미처 못 봤던 미확인 문자가 그대로 노출되었다. 잠시만요! 황급히 정한에게서 뺏어 든 핸드폰을 쥐고 진땀을 뺀다. 그리고 최신 통화 기록으로 넘어간 화면을 다시 정한에게 보여준다. 정한은 자신의 번호를 저장했다. 수리하려면 최소 2주 정돈 걸릴걸요. 어떡할래요.
보험처리 하면 렌트비는 지급 되실 거예요.
눈이 있으면 그건 당연한 거고. 근데 뭐.
짜증 낼 줄 알았는데 침착하게 그러지 않는다. 정한은 무조건 열불내는 사람들하고는 달랐다. 곧게 자란 어른의 여유란 이런 것일까. 안심해야 하나 싶으면서도 불안하다. 그래서 정한의 행동 하나하나를 집요하게 살펴볼 수 밖에 없다. 머릿속에는 일 년 등록금보다 훨 많은 금액이 책정된다. 차를 뚫어지게 보던 정한이 기다리다 지쳤는지 순영을 쳐다본다.
보험 처리 기다릴 거예요? 나 바쁜데.
하셔야죠! 제가 감당 못 하는데.
내가 싫다면?
네?
그냥 합의 보면 안 돼요? 귀찮아서요. 나 여기서 시간 낭비하는 거 싫은데.
하지만 견적이…… 기백만 원 가까이 나오지 않을까요……. 말하고 나서 화들짝 놀란다. 저 그만한 돈 없어요, 없어요! 순영은 연신 손사래를 치고 다급하게 핸드폰을 다시 본다. 그때 정한이 순영의 손목을 잡는다. 그냥 내 차 내가 알아서 할게요. 어차피 바꿀 때도 됐고……. 중얼거리는 정한에 순영은 머리 위로 물음표를 띄운다. 네, 네? 정한은 무시한 채 기지개를 켰다. 들어가요. 네? 그게… 그게 진짜로요? 네. 정말 말 안 바꾸실 거예요? 네. 정말 정말요? 그럼요. 그럼 저 가봐도 된다고요? ……그렇죠? 왜요, 싫어요? 아니요. 아닙니다. 저 천사 같은 얼굴로 환하게 웃는데 어떻게 거짓말일 수가. 사람을 쉽게 믿고 쉽게 사랑한다. 순영의 고질병이었다. 순영은 연신 감사하다고 머리를 조아렸다. 아무튼 죄송해요. 정말 죄송합니다. 땀을 뻘뻘 흘리며 사과와 감사를 반복하는 메트로놈 같은 순영에 정한의 눈꼬리는 휘어진다. 그럼 조심히 들어가요. 네…, 들어갈게요. 비니를 벗은 순영은 구십 도로 허릴 숙이며 인사하고 정한의 손 인사를 보며 뒤로, 뒤로, 걸어간다. 그런데. 아, 잠시만! 정한이 부른다. 순영은 차 문을 닫으려다 몸을 반쯤 내빼고 뒤를 돈다.
내가 전화하면 나올래요?
네. ……네?
순영은 자신을 거쳐 간 전 애인들 중에 이렇게나 쾌속한 플러팅을 걸었던 인물이 자신의 과거 서사에 있었는가 싶다…….
정한과의 만남 후로 순영은 꽤 바쁘게 살았다. 아빠 차 운전하다 사고 쳤다는 얘기로 이웃집들까지 자자하게 소문났다. 그 탓에 만나는 사람마다 개화하는 그 화두에 하루에도 몇 번씩 순영은 정한을 떠올려야 했다. 얼굴 개 잘생겼던데…. 그런 얼굴이 정말 잘생긴 얼굴이지. 기역부터 히읗까지 나열된 전 애인 목록을 뒤져도 그만한 미모의 소유자는 없었음에 한숨이 나온다. 청초한 얼굴을 생각하니 발동하는 심장. 두근거림 때문에 열이 나는 얼굴을 식히기 바쁘다. 순영을 놀리던 주변 친구 한 명은 세상에 그런 천사가 있냐며 운도 좋으니 한턱내라 했고 순영은 말없이 그에게 가운뎃손가락을 펴 보였다.
그리고 한가로운 오후에 전화가 걸려온다.
수신자는 벤츠 윤정한이었다.
안녕. 잘 지냈어요?
귀에 전달되는 신성한 목소리. 순영은 전화를 받으면서 코트를 걸쳐 입고 현관 밖으로 튀어나간다.
순영 씨… 는. 왜 이렇게 어려 보여요? 저 어려요. 몇 년생인데? 구십 육 년 생이요. 대학생? 순영은 고갤 끄덕인다. 그럼 내가 아저씨인가. 정한은 잔을 입에 갖다 대고 순영은 또 고개를 끄덕인다. ……왜 고개 끄덕여? 열 살까지는 형이고 열 살 이상은 아저씨라 부르는 거래요. 그 말에 웃음이 나온다. 누가 그런 말을. 정한이 빈정대는데 순영은 타박상을 전혀 입지 않는다. 아저씨가 대학교 졸업했을 때 전 중학생이었을 텐데. 순영은 정한을 따라 체리 맛 위스키를 마신다. 첨예하다. 정한은 머리를 쥐어뜯듯이 잡는다. 으아아… 내가 벌써 아저씨 소리나 듣고……! 여섯 시가 지나서야 개장한 바 bar에서 정한과 순영은 나란히 앉아 있다. 화제는 보통 사람들 사는 얘기. 순영은 지금 준비 중인 꿈에 관해서 말했다. 물론 사고 이후의 일들도. 친구들이 그런 천사가 세상에 존재하냐면서 놀라던 일화들을 순식간에 끄집어낸다. 정한은 그런 순영이 귀여웠다. 머리는 탈색해서 노란 물이 들어있고 왼쪽 귀에는 피어싱도 했다. 웃으면 올라가는 눈꼬리와 입술을 내미는 버릇은 조금 야릇해서 생동적이었다. 비유하자면 갓 태어난 핏덩이. 너 엊그제 태어났네? 말을 들을 법한 깜찍함. 흘러가는 시간 속에 순영은 정한에게 때 묻지 않은 순수함으로 그려진다. 바 테이블에 올려둔 위스키 잔에 순영은 얼굴을 가까이 가져가고 홀짝이며 입으로 장난을 친다.
맞다. 아저씨 명함 있으세요?
순영은 체리 꼭지를 물고 어깨를 낮춘 모습 그대로 고개를 돌려 묻는다. 정한은 노루발 박음질하듯 요동치는 심장이 눈앞의 얼굴이 아닌 붉은 조명 때문일 거라는 가정에 혼자 수긍한다. 자켓 안쪽에서 명함 한 장을 내밀었다. 결혼회사에서 일해요. 순영은 금박 된 명함을 뒤집어도 보고 따라서 한 자 한 자 읽다가 감탄사를 내뱉는다. 웨딩플래너라고 수식된 정한의 이름 앞에 눈을 떼지 못한다.
아…. 완벽하네.
응? 어디가?
아니에요. 아무것도. 그냥 혼잣말.
느린 재즈곡이 귓가를 윙윙 울린다. 둘은 서로의 눈을 마주 본 채로 멈춰있다. 정한은 턱을 괴고 옆의 순영에게 조금 더 다가간다. 청초한 눈빛이 진득하게 달라붙는다. 마치 가로등 불을 찾아 머무는 나방들처럼. 취기는 머리 꼭대기부터 뱅뱅 돈다. 순영은 높은 외발 의자에 다소곳이 손을 내린다. 현기증이 쫓아오는데 이게 무엇 때문일까. 윤정한 때문일까? 아니면 여기 조명 때문일까. 순영은 재즈 선율이 가슴을 후벼파고 있기 때문이라 정의한다. 정한은 자신에게 눈을 떼지 않고. 정한은 순영이 섹시하다고 여긴다. 떴다 감기는 눈이 게슴츠레하다. 나 꼬시려는 건가? 속으로 웃었다. 체리보다 붉은 조명에 에로틱해 보이던 서로의 얼굴은 흐릿해지고 순영의 손바닥이 정한의 손바닥과 맞닿는다. 순영 씨…. 정한이 조심스레 부른다. 순영은 겹쳐진 두 손을 보며 깍지를 낀다. 어느새 순영의 손가락 하나가 정한의 입안에 닿는다. 순영은 정한이 그저 그렇게 하는 대로 가만히 두었다. 미끌대는 타액으로 점철된 손가락을 물고 있는 윤정한은……. 빨간 입술이……. 순영이 살짝 입을 벌린다. 우리는 눈으로 섹스하고. 유사 연애를 하고. 이렇게 가까워져 보는 거라면.
아저씨 나랑 잘래요?
네.
순영의 물음에 정한은 대번 답을 하고 손을 놓는다. 재빨리 다음 장소는 근처 모텔이었다. 입실하자마자 문에 기대 서로의 입술을 탐한다. 순영은 후드티를 벗는다. 정한은 자켓을 떼어내고 셔츠 단추를 푼다. 순영이 정한의 목에 얼굴을 파묻고 쇄골을 깨문다. 벌써부터 달아오르는 열기 탓에 자연히 입 밖으로 약한 신음이 나온다. 정한은 순영의 허리 뒤를 매만지다 천천히 올라가며 머리를 감싼다. 고개를 꺾고 입술을 잡아 물다 둘은 침대로 향한다. 하아…. 협탁 위의 콘돔을 집어 든다. 몸을 돌리니까 순영에겐 보였다. 목 뒤에 있는 날개 그림의 타투. 순영은 그 타투를 보다 자신의 귀를 매만졌다. 귓바퀴에 꽂아 넣은 피어싱이 느껴진다. 다음엔 나도 날개 모양으로…. 순영이 생각하는 사이, 정한은 순영을 잡아끈다. 자세를 바꿔 순영의 위로 엎어지고 턱에서부터 아래로 입술을 붙였다 떼며 볼과 눈, 코와 입술 사이마다 쪽 소리 나게 키스를 퍼붓는다. 뜨거운 숨을 뱉으면서 눈을 감았다 뜬 순영은 코에 닿은 정한의 안경이 거슬린다. 안경 빼도 돼요? 어. 괜찮아, 라섹 했어. 정한은 순영을 쓰다듬는다. 그런 것도 완벽하네요……. 순영은 아스러지는 기분을 만끽하며 정한이 제 몸을 탐미하도록 놔두었다.
다음 날 눈을 떠보니 한낮이었다. 밖에서 떠드는 골목 아이들의 소리에 신경이 집중된다. 순영은 바스락거리는 이불을 치우고 몸을 일으켰다. 어젯밤 정사에 허리가 뻐근하다. 자기야. 어디가… 가지 마. 정한이 순영의 허리를 잡아끈다. 어쩔 수 없이 다시금 누웠다. 숨을 똑같이 쉰다. 들숨과 날숨이 같이 나오고 사그라지는 시간은 조각되어갔다. 정한에게 안긴 채 순영은 문득 든 생각에 입을 연다.
제 어디가 좋아요?
정한은 눈을 떠 순영의 볼을 살짝 건드리고 분홍으로 물든 그 자리에 입술을 맞추었다.
볼.
나중에 순영은 자신의 지갑에 정한의 명함을 넣었다.
순영은 서울의 위성도시 모처의 교육대학을 다닌다 했다. 초등학교 선생님이 꿈이라는 그 말을 듣고 정한은 웃음을 참을 수가 없어서 허파에 바람 빠진 사람처럼 웃어댔다. 아니이…, 너무, 야…! 너무 웃기잖아, 자기야……. 하면서 뾰로통한 순영을 뒤에서 껴안고 얼굴을 목에 파묻었다. 너처럼 조그마한 애가 어린애들 가르친다는 생각하니까……, 미치겠다고. 그러자 순영은 돌아보고 두 팔로 정한의 목을 끌어안는다. 나 안 조그마한데. 우리 그렇게 차이 안 나잖아. 그 말에 정한은 볼에 입술 자국을 여러 번 남긴다. 귀엽다는 뜻이지. 귀여워 진짜. 정한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순영은 애처럼 웃으며 정한의 넥타이를 잡아당긴다.
정한은 수업이 끝마치는 시간마다 순영을 데리러 왔다. 새로 뽑았다는 벤츠의 보닛은 광이 났고 정한은 기대어 서 있었다. 늘 그렇듯 차를 타고 드라이브한다. 데이트라 굳이 칭하지 않아도 데이트였다. 순영이 갖고 싶어 하는 옷과 신발 그 외 필요한 교재까지 정한은 카드를 긁었다. 주말 아침에는 영화를 보고 차를 마시고 산책을 한다. 밤에는 정한의 아파트에서 떡치고 차에서도 떡치고 모텔에서도 떡쳤다. 그래도 갈증이 가시지 않는지 평일에도 무조건 만나 서로의 몸을 탐미했다. 탐욕 하는 마음이 풍선처럼 부풀어갔다.
멀리서 순영은 손을 흔들며 달려와 정한을 꽉 껴안는다. 정한은 순영의 머리를 쓰다듬고 차에 태운다. 순영의 플레이리스트만큼 반복적인 날들이었지만 날마다 달라지는 체위는 언제나 새로웠다. 게다가 어느새 둘은 공동으로 소유하는 것들이 많아졌다. 정한이 맞춰준 수트를 입고 온 날은 친구의 끊임없는 물음에 마땅한 변명으로 이리저리 둘러대야 했다. 어찌 됐든 거의 한 달을. 정한과 순영은 섹파로 지냈다. 데이트는 데이트 나름이고. 우리는 우리의 몸과 섹스 스킬에 반해서 좋아한 거니까. 정한과 순영은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아도 사랑했다. 그게 사랑인지에 대한 정의는 해봤자임을 알아서. 처음에 좋아 죽겠다던 표정들은 기억 저편으로 묻었다. 서로를 부르는 일은 오직 섹스 때문이었다. 덕분에 순영은 수업을 빠지기도 했다. 그리고 그 얄팍하고 멕시코 알카풀코 해변의 수면처럼 잠잠한 사랑도 깨질 수 있다는 걸 순영이 알게 된다. 어느 날의 저녁. 정한이 다른 사람과 모텔에 들어가는 걸 본 순영은 그날 섹스를 하려다 말고 정한의 뺨을 때렸다.
한 대 맞고 시작해.
뭔데. 펠라 해주는 값이야?
시발 그 새끼 어디가 좋아서 물고 빨았냐?
정한은 멍하니 순영을 본다. 너보다 안 좋았어. 졸라 못하던데. 그 말에 순영은 정한의 위로 넘어지며 입술을 세게 빨기 시작한다. 숨을 쉬고 가슴을 뗄 때마다 타액이 흘러나온다. 입술 부근이 미끄러워지고 몸과 몸이 과격하게 부딪혔다. 정한은 떨어지려는 얼굴을 붙잡고 혀를 집어넣는다. 쪽쪽 거리는 소리는 지독하게 방 안을 울렸다. 순영은 벌게진 눈을 똑바로 뜨고 콧잔등을 맞대고 정한은 눈을 내리깔며 벌어진 순영의 입안으로 손가락을 넣는다.
헤어져.
순영은 그리고 정말로 연락을 두절했다.
순영이 새로운 애인을 사귀는데 소요된 시간은 0.5년하고도 17일. 그 애인과 해외로 이민을 해 결혼하겠다는 계획은 사귀고 1년하고도 2주째에 세웠다. 정한은 화해할 자신이 있었다. 화해는 섹스로! 이별은 웃으면서. (실제론 웃지 못했지만) 사랑은. 사랑……. 사랑은 어떻게 하지? 정한은 그동안 웃고 떠들었던 시간이 가짜 같았다. 걔는 정말 내 몸을 좋아했고. 음. 내 몸이 다른 사람에게 쓰이는 건 용납하지 않을 정도의 질투가 많았고……. 여기까지 생각하다가 헤어진 이유가 뭐였는지 되짚어봐야 했다.
정한과 순영이 헤어진 이유는 간단하다. 정한이 다른 애랑 떡쳐서. 그리고 순영에게 새로운 사람이 생겨서. 그렇담 여기서 한가지 미끄러지는 의문점. 순영에게 정한은 새롭지가 않았나? 새로운 사람에게 지배당한 권순영은 지금 평범한 권순영의 삶을 살고 있을 것이다. 카페에서 그런 생각을 하니 정한은 갑자기 웃음이 터져 나왔다. 앞에 앉은 친구가 왜 웃느냐며 정한을 의아하게 바라본다. 가끔 정한은 순영이 때렸던 제 뺨을 그리워했다. 얼얼한 게 너무 좋았어. 살아있는 기분이 들었는데. (친구 : 너 정말 고약하구나) 어쩌겠어. 걔가 내 취향인 게 죄지……. 걔가 무슨 죄를 지었겠어. 죄라면 다 내 죄지. 근데 걔는 나를 참 싫어하면서 내가 찾으면 반응하던데. 사귄 적도 없는데 헤어지자 했던 나의 큐티 스위트한 애인. 정한과 헤어지고 순영은 연락 한번 스스로 한 적 없었으나 정한은 순영을 찾곤 했다. 그럴 때마다 순영은 여러 가지 이유를 둘러대며 전화를 끊곤 했는데 번호를 차단하진 않았다. 정한에겐 딱히 상관할 바가 아니었다. 그저 순영에게 부재중 전화를 남긴 것으로도 만족했다. 그렇게 하고 난 뒤에 순영의 상태 메시지나 프로필이 바뀌어있었으니 정한은 순영에게 존재를 알리는 것이 재미있을 뿐이었다.
그런데 며칠 후, 정한은 순영의 결혼 계획을 다 망쳐버린다. 이게 재밌다고 여겨서 그런 건 아닌데. 상황이 형편없어졌네. 그건 정한의 자의적인 선택이 아니었다. 정한은 방금 끊은 전화를 곱씹어본다. 끔찍하다. 권순영의 새 남자친구 이름이 윤정연이다. 삼류로맨스가 되어 흘러가는 이야기는 저속할 줄을 모르는 듯이 군다. 윤정연은 순영의 지갑 속에 있는 정한의 명함을 보고 연락했고.
웨딩 플랜 의뢰를 맡기고 싶어서요.
정한은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네가 원하던 시계와 그 신발. 전부 내 손 내 발에 차 있어. 그런데 네가 나를 찼으니 좀 손해잖아. 전처럼 나랑 똑같은 거 갖고 싶지? 커플템 어때? 우리 같이 산 옷 나 아직도 입고 다니는데… 아이…, 물론 네가 속물이란 얘기 아니지. 너는 내 돈보다 나를 사랑했구. 그건 나도 알잖아. 근데 왜 날 사랑하다 마는 거야, 자기야? 자기의 알량한 자존심?
순영은 정한의 전화를 끊었다. 교재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정연과 만나는 정한을 생각한다. 왜 하필. 왜. 온 몸 가득 번져오는 열불을 잠재우기 위해 괜히 같은 자리를 빙빙 돈다. 그렇게 순영이 점멸해 갈 때 그 시간에 정한과 정연은 형광등 빛 아래서 미팅을 하고 있었다. 신혼여행은 어디로 갈 거예요? 글쎄요. 생각해놓은 건 없는데. 정한은 종이 위에 펜을 까딱거린다. 남자친구분께서는요. 정연은 오랫동안 고민했다. 음… 모르겠어요. 걔가 어느 나라를 좋아할지. 근데 아무 나라나 좋아할걸요……. 사실 전 보라카이 생각하고 있긴 한데. 정한은 물을 한 입 마신다. 유럽은 어떠세요. 남자친구분이 한 번도 안 가봤을 거 같은 데. 정연은 살짝 놀란다. 아니, 어떻게 아셨어요? 정한은 시간을 끌다 대답했다. 정연씨는……, 애인분을 잘 모르시나 봐요. 정한은 희맑았다. 네? 정연이 또 놀라자 정한은 속삭였다. 아, 저는 직업이 직업인지라 한 사람에 대해서 오랫동안 알아봐야 하거든요. 해맑은 정한에 구겨지는 정연의 입술. 농담이에요. 정한은 펜을 똑딱거리고 정연은 건성으로 대답했다. 정한은 정연을 빤히 바라보다가 웃었다. 정연 씨 이름만 듣고는 여자인 줄 알았어요./그런 얘기 많이 들어요./아./남자한테는 흔하지 않은 이름인가 봐요. 제 이름이./죄송해요. 그런 거 다 편견이에요./괜찮아요. 익숙해서. 그런 점에서 순영이는 저랑 닮았어요. 그래서 좋아요. 걔도 이름만 들으면 여자인 줄 알거든요, 사람들이./그래요.
그렇다고 합시다. 정한은 앞에 펼쳐놓은 서류를 이리저리 살피다 눈웃음을 지었다. 비슷한 이름이고 나보단 어린 윤정연. 근데 하필 권순영과 닮았다고……. 하지만 나를 마냥 강아지같이 따라오던 권순영을 윤정연은 알까. 그것마저 닮았을까. 정한은 정연에게 묻는다. 개인적인 질문해도 돼요? 아, 네. 순영 씨랑은 어떻게 만났어요? 어……. 정연은 침묵하다가 답한다. 사랑하고 싶어서 사람을 찾았대요. 아, 그럼…. 맞아요, 소개로 만났어요. 근데 사실 며칠 전에 들은 얘긴데. 전에 사귀던 사람 뺨을 때렸대요. 홧김에. 그게 미안해서… 그게 정말 미안해서 헤어졌다고 하더라구요. 그래서 저를 만나게 된게 어쩌면.
다행이니. 정한은 위가 뒤집어진다. 윤정연은 죄가 있다. 속이 훤히 보이는 비커처럼 터무니없이 솔직한 게 죄다. 여기서 정한은 순영의 좋다는 의미를 새로 수립하고 싶었다. 정한은 뜸을 들이다 묻는다. 정연 씨는… 과거 애인을 때린 사람과 사귀어도 상관이 없어요? 그러자 정연의 얼굴은 곧장 불편해졌다. 반대로 정한은 내심 기분이 평안했다. 아니, 제가 순영 씨를 욕하는 게 아니라……. 말꼬리를 늘이다가 웃음을 머금은 목소리가 나온다.
근데 걔가 그래요?
네?
권순영 걔가 정말 그랬냐고요. 아. 걔 아직 정신 못 차린거 봐.
저기, 저기요……, 지금 말 심하게 하시는 거 아니에요?
걔가 내 뺨 때린 게 미안해서 나랑 헤어진 거래요?
정한은 하고 싶은 말을 하는 것 뿐이지만 정연은 메두사를 만난 것처럼 돌이 된다.
아니… 정연 씨. 나한테 정말로 미안한지 물어보진 않았어요? 왜요?
이어지는 정한의 추궁에 입을 굳게 다물고 있던 정연은 손에 땀이 찼다. 눈앞이 뱅그르르 도는 걸 극복할 순 없었지만 그래도 용기를 내어 가까스로 한마디를 해본다.
순영이랑…… 사귀신 거예요? ……왜?
그렇게 물어오는데 정한은 마땅한 답을 찾지 못했다.
그 주의 주말. 정한의 바람이 이루어졌다. 고대하고 기다리던 권순영이 찾아왔다. 유미적이다. 덕분에 구미가 당긴다. 정연이한테 전화 받았었어. 시발 진짜 왜 그래? 정연은 마침 수트를 입어보기 위해 피팅룸에 들어가 있고 드레스 샵에는 순영과 정한, 직원뿐이었다. 직원이 다른 일을 하는 찰나에 순영은 정한에게 따졌다. 정한은 바짝 대거리한다. 나야말로 할 말 있어. 너 나한테 미안해서 헤어진 거 맞니. 동그랗게 눈을 뜨고 물어온다. 순영은 그걸 보면 당해낼 기력이 없다. 그런데도 정한은 로드롤러처럼 거기서 멈추지 않는다. 순영아, 자기야. 보고 싶었어. 또 뺨 때려도 좋아. 네 맘대로 해. 나 너 보는 게 꿈이었으니까. 손잡고 산책하러 가자. 응? 너 나랑 손잡는 거 좋아하잖아. 환장했잖아. 울먹이는 목소리로 얼굴을 들이민다. 아, 그리고. 정한은 순영의 귓가에 다가간다. 수트는 저거보다 내가 전에 사준 거, 그게 더 잘 어울려……. 뻔뻔스러움. 순영은 정한의 천덕꾸러기 같은 얼굴에 얽매인다. 결혼이 얼마 남지 않았잖아. 야, 기회 한 번뿐이야. 자기 나랑 한 번만 더 사귀고 싶지 않아? 나랑 사귀면 네 결혼식 갈게. 말하며 다가온다. 순영은 뒤로 살짝 밀려난다.
미쳤어, 진짜. 나 아저씨 초대 안 해. 미쳤다고 내가.
뭐야. 그래두 청첩장은 줘야지. 그래야 아저씨가 축하해주지.
야.
이젠 야라고 부르네. 야, 내가 절제의 미덕을 아는 사람은 아니거든. 자기 내 몸 좋아하잖아. 얼굴도 좋아하고.
진짜? 왜. 아저씨 아직도 나 좋아하나. 나 못 잊어? 내가 딴 놈이랑 결혼하는 게 질투 나고, 막…….
모르겠어. 이젠 상관없어. 나랑 물고 빨고 했는데 네가 정말로 누굴 사랑하겠어? 그렇지? 순영아. 우리가 헤어진 이유가 있긴 하니. 사귀어야 할 이유밖에 없었잖아. 혹시 정말 너…! 파혼을 위한 결혼을 하고 싶어서 그래?
연이어 정한은 말도 안 되는 말을 물어온다. 하, 진짜. 그런 정한에 순영은 자신의 머리를 헤집는다. 얼굴 찌푸리지 마. 넌 웃는 게 예쁜데. 물론 찌푸려도 귀엽지만. 어느새 소파에 앉은 정한이 다리를 꼰다. 파안은 여유롭고 전신에는 기품이 있었다. 순영은 입술을 깨문다. 애인이라 치부하기도 뭣 같은 사이를 두고 무어라 설명해야 할까. 오랫동안 고심하다가 결국 안 들리다시피 낮게 읊조렸다. 내가 너한테 가나 봐라. 차라리 뒤지고 말지……. 그리고 때마침 피팅룸 문이 열린다.
정한은 순영의 결혼식을 가지 않았다. 물론 그뿐만 아니라 청첩장은 구경도 하지 않았고 순영의 네 번째 손가락 반지도 신경 쓰지 않았다. 요 몇 주 째 피곤하게 지냈다. 엊그제 아버지의 3주기 제사를 치르니 힘이 빠져있는 상태다. 게다가 그동안은 순영과 정연의 신혼여행 계획과 호텔 예약과 식장을 고르는데 애를 많이 썼다. 전반적인 순영의 취향을 잘 알아서 어렵지는 않았는데 그것도 웃긴 경험이라서 뭘 하든 입술 밖으로 실실 웃음이 새었다. 정연은 내내 찜찜한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이 요상한 관계를 구태여 뭐라 묻지 않았다. 오랜만에 여유로운 한 낮이다. 정한은 손목에 붙은 시간을 확인한다. 오후 열 두시. 그렇다면 막 식이 시작하고 있을 테다. 기지개를 켜고 팔을 쭉 뻗는다. 지금쯤 권순영은 웃고 있을까? 정한은 머릿속으로 생각을 재정비한다.
아직도 변하지 않는 정한의 신념.
화해는 섹스로!
이별은 웃으면서!
사랑은! ……그래 뭐. 어디 한번 마음 저리게……. 해보자는 거다. 불개미가 기어 오는 듯 손가락이 근질거린다. 후사경을 통해 헤어 스타일을 점검하고 기어를 올린다. 시동을 걸고 깜깜한 주차장을 나서려는데, 꽈당. 갑자기 무언가 튀어나와서 브레이크를 밟았다. 검은 실루엣이 눈앞에 있다. 그 몸을 타고 올라가면 보이는 동그란 얼굴. 날카로운 눈매. 검은 머리칼. 이럴 줄은 몰랐는데 정한은 아버지의 기일인 엊그제에 오늘 자로 귀신을 만날 거라고 아버지로부터 예고 받은 적이 없다. 그러니까 어디 가서 비명횡사할 것만 같던 나의 크리피한 구 섹스 파트너 권순영이, 차라리 뒤지겠다더니 목숨부지하고 돌아와 다신 본 적 없는 정장 차림으로 차 앞에 뻗대고 서 있는 꼴을 예상할 수 없었다는 뜻이다. 노려보는 눈은 탈색한 노랑머리를 검은색으로 물들였어도 영혼이 적출된 귀신같은 몰골. 정한은 머뭇거리며 다시 차를 주차한다.
거기서 왜 그러고 서 있어.
그러는 너는.
순영이 운전석으로 다가온다.
타.
바빠. 결혼식 중간에 왜 뛰쳐나왔는지 해명 전화해야 해.
순영은 머리를 헝클어트리며 핸드폰을 꺼낸다. 길게 전원 버튼을 누른다. 어이가 없어도 너무 없지. 정한은 순영이 하는 짓거리를 보란 듯이 주시했는데 뛰어왔는지 숨은 가빴고 옷은 풀어 헤쳐져 있고 눈에는 땀이 서려 있는 게 야릇하다. 그렇게 순영을 훑어보던 정한에게 문득 한가지 내리꽂히는 관점.
너 정말…, 나 때문이구나? 보고 싶어서 그랬어? 버진로드 걷다가 도저히 못 참아서 뛰쳐나온 거야?
그런 이유 갖다 붙이지 말고요. 유치해. 순영은 단지 정한의 넥타이를 자기 쪽으로 당긴다. 입술이 부딪힐 때쯤 정한은 순영의 손을 떼어내고 순영의 목덜미를 잡는다.
그런 넌 유치한 나를 너무 사랑하고.
그대로 순영의 목덜미를 잡아 키스한다. 목구멍부터 내장까지 간지러워 미친다. 파혼하고 싶어서 결혼에 안달 났던 거야? 그럴 줄 알았어. 너도 나랑 똑같네……. 나도 너 파혼시키고 싶어서 안달 났었거든. 천천히 입술을 떼면 풀린 눈이 앞에 있다. 기가 차다.
그러니까 죽어도 결혼하지 마. 내 뺨 더 때리고 싶으면 때려도 되니까 결혼만 하지 마.
속삭이는 정한은 순영을 끌어 시트로 밀쳤다. 순영은 조수석으로 옮겨가고 정한은 차 문을 닫는다. 스쳐 지나간 목 뒤에는 여전히 타투가 있다. 순영은 자신의 귓바퀴를 만진다. 내 귀에는 이제 아무것도 없는데.
윤정연 인생을 망친 권순영 인생을 망친 윤정한의 다정다감한 애인 권순영. 이게 무슨 수식어일까. 관계는 뒤얽혀 덩굴보다 더 심하게 거무죽죽하고 순영의 인생은 되돌아 되돌아 원점이다. 순영은 정한이 느긋하게 풀어주는 셔츠를 급하게 벗는다. 벗으면서 생각한다. 아저씨 근데 모르는 거 하나 있다. 나 사실 정연이랑 고등학생 때부터 사귀다 말고 사귀다 말고 한 사이거든. 그러니까 아저씨랑 몸 섞을 때 걔랑은 훨씬 전에 물고 빨고 다 했다고……. 순영은 신음과 함께 밖으로 소리 내 웃었으나 정한은 그 속마음을 알아채지 못한다. 대신 손가락에서 빛나는 링을 뺀다. 바닥으로 내팽개쳐진 반지는 어디서 빛이 날지 알 턱이 없을 거고 정한은 순영의 바지 안으로 손을 넣는다. 너 이제 걔 어떻게 봐? 순진한 척하는 물음이었다. 순영은 입술을 깨문다. 몰라. 이럴… 줄, 알았으면… 하… 휴학하는 건데. 하읏….
휴학하지 마….
왜.
그럼 너 데리러 오는 재미가 없어지잖아.
순영은 팔목으로 눈을 가린다. 무방비한 입꼬리가 올라간다. 등을 댄 시트는 땀에 절어 진득하고 익어가는 몸에 분위기는 후더웠다.
복잡하게 왜 그래. 그 시간에 나랑 비슷한 사람 찾아서 만나면 되지.
순영의 배를 쓸던 정한은 순영의 얼굴에 자신의 얼굴을 맞댄다. 웃기네. 그 말에 순영은 팔을 내렸다. 뭐가 웃겨? 순영은 정한을 안달 나게 바라봤다. 정한은 순영의 입술을 혀로 핥는다. 웃긴 소리잖아. 너는 오직 하나인데. 그러자 순영이 피식 웃는다. 무슨 소리야…. 허스키한 목소리가 갈라져 나온다. 이번엔 정한이 두 손으로 순영의 양 볼을 잡는다. 그리고 뜸을 들이다 입을 연다. 뿜어나오는 숨이, 순영에게 닿았다가 연기처럼 차가운 배경을 타고 밖으로 나간다.
세상에 네가 두 명이었어도 나는 너만 사랑할 텐데……, 라는 소리야.
그 순간 순영은 밝은 이 세상을 감싸고 있는 모든 게 어처구니없어 보였다. 그러나 그중에 제일 어이없는 건 순영 본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