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랙코미디 그 자체. 태어날 때부터 주어진 이름으로 살아야 한다는 건 코미디다. 나중에서야 바꿀 수 있다 한들 그 이름은 알맞은 이름인지 이름 모를 사람에게 검증을 받아야 한다. 총체적 난국이다. 주변 사람들은 청춘들에게 하는 말로써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살라며 수백 번 설교를 전파했고 그래서 당연히 맘속 깊이 그 말을 새긴 채 살아왔다. 그런데 내 정체성의 확립에 과반을 차지하는 이름 세 글자를 바꾸기 위해선 허락을 받아야 한다니. 물론 나의 이름이 싫어서 이런 생각이나 하고 앉아있는 건 아니다. 외려 반대다. 문제는 보이지 않는 곳에 숨어 있다.
이름이 뭐라고요? 묻는 음성이 확고했다. 눈을 감고 누워있는 순영은 입술을 바짝 탄 입술을 혀로 축인다. 권순수입니다. 마른 목소리가 갈라져 나와 순영은 의자 시트를 쥐어뜯듯이 매만진다. 그리고 두 번째 질문이 튀어나온다. 순수 씨는 정말로 순수한 사람인가요? 최면 실험이라 들었는데 별걸 다 물어보네. 순영이 생각하고 있는 사이 질문이 아닌 대답이 나온다. 순수 씨가 이름처럼 순수하지 않다면 그건 모순이네요.
이상한 사람이다. 어릴 적에 권순수라는 이름 때문에 하루에도 몇 번씩 순수한지 아닌지 질문 같지 않은 질문을 들었고 놀림의 대상이 되었다. 그랬던 과거가 파노라마 필름처럼 기다랗게 감기면서 출력된다. 순영은 반사적으로 미간을 찌푸린다. 내가 지금 최면에 드는 건가……. 이런 식이면 하고 싶지 않다. 순영은 아스러져 조각처럼 찢어지는 현재의 모습에 지지 않으려 했다. 눈을 떠보려 했지만 전혀 떠지지 않았다. 당황스러웠다. 그런데 그 순간, 누군가의 그림자가 다가오는 듯 주위가 거뭇해진다. 불안한 기운이 발끝부터 감돌았다.
잠시만, 내 이름이 권순수라고?
송곳처럼 날카로운 의문이 머리를 찔러오자 번쩍 눈이 떠졌다. 떠진 두 눈을 끔벅거려본다. 먼저 보이는 건 하얀 천장. 그다음엔 침대 옆에 서 있는 원우랑 눈이 마주쳤다.
원우야. 왜, 순영아. 아… 다행이다. 원우에게서 자신의 이름이 나와 안도감이 들었다. 무슨 일 있어? 아니… 이상한 꿈 꿨어. 왜, 어떤 꿈? 몰라. 순영이 칭얼대자 원우는 피식 웃는다. 더 잘 거야? 이제 일어나. 침대로 넘어온 원우가 순영의 옆에 앉는다. 싫어. 나 어제 야근한 거 알잖아. 더 잘래. 순영이 투덜대며 몸을 돌리자 원우는 순영의 어깨를 당겼다. 정확히는 야근이 아니라 회식이었잖아. 너네 팀 거래처 때문에 일찍 퇴근한 거 알아. 야근은 내가 했지. 월말에 죽어 나가는 건 회계부야. 결산하느라 힘 다 썼어. 원우가 반박하며 끈질기게 보채보지만 순영은 끄떡 없다. 더 자지 말고 일어나라니까. 주말에 놀아 준다며. 시무룩한 어투를 뱉고는 순영의 두 손을 잡아끈다. 맞잡은 손에 힘을 실어 끌어당기자 순영은 저절로 몸을 일으켜 앉았다.
순영이 멀뚱히 가만히 있어서 원우도 멀뚱히 순영을 쳐다본다. 조용히 있던 순영이 갑자기 무언가 떠올랐는지 원우쪽을 보고 씩 미소짓는다. 나 양치. 어수룩하게 부탁하는 말에 어이없어 헛웃음이 나온다. 네가 직접 해. 아아 왜 그래, 평소처럼 해주라. 평소에 내가 뭘 해줬는데. 원우가 단언하자 순영이 풀썩 쓰러져 눕는다. 그럼 더 잘래. 예상외로 완고한 반응에 원우는 할 수 없이 다시 순영을 일으켜 세우곤 화장실로 끌고 들어갔다.
부스스한 눈으로 거울 앞에 서 있는 순영에게 칫솔에 치약을 묻혀 건네준다. 그러나 순영은 꼿꼿하다. 꼿꼿이 가만히 있었다. 원우는 졸린 눈을 끔뻑이는 순영의 팔을 들어 손에다 직접 칫솔을 쥐여주었다. 순영이 고개를 절레절레 내젓는다. 아. 원우가 말하자 순영이 입을 벌린다. 원우는 재빨리 칫솔을 순영의 입에 꽂아 넣고는 순영의 손 위로 자신의 손을 포갠다. 야 아파. 칫솔질하고 있긴 한데 위치를 잘못 잡아서인지 자꾸만 잇몸을 긁어대는 원우를 순영이 노려본다. 아파? 순영이 끄덕거리자 원우는 순영의 뒤에 서서 한쪽 팔로 목을 감고는 턱을 붙잡았다. 턱을 들어 올리고 순영의 손을 포갠 다른 손으로 다시 칫솔질을 시작했다. 턱을 붙잡은 손에 힘이 들어가는지 볼살이 구겨지면서 입술이 오므라진다. 이미 칫솔은 치아를 벗어난지라 순영은 웃음을 참지못하고 치약을 뿜었다. 야 왜 자꾸 입술을 닦는데! 순영이 뒤를 돌면서 말과 함께 나온 치약 방울이 원우의 옷에 떨어진다. 야 치약 튀기지 마. 화를 내는 목소리에 순영이 까르륵대며 해사하게 웃었다. 가만히 있어 제발. 알았어. 가만히 있을게.
점심은 간단히 토스트로 해결하기로 했다. 라면 끓일까? 물어오는 순영에게 원우는 엊그제도 먹었으니 토스트를 구워준다고 부엌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라면 냄새는 비비가 안 좋아하잖아. 원우가 냉장고에서 달걀을 꺼내며 덧붙인다. 그 말에 비비가 대답이라도 하는 듯 야옹, 하고 울었다. 비비야아. 순영은 비비를 부르면서 자세를 낮춘다. 손으로 비비의 턱을 매만지니 윤기가 흐르는 진회색 털이 실크처럼 부드러웠다.
마우스를 움직이던 손을 멈춘다. 안경에 비친 화면 아래로 눈에 열기가 서려 있다. 금방이라도 모니터로 빨려 들어갈 기세다. 과자를 입에 물고 지나가던 순영은 노트북 앞에 열중하고 있는 원우를 보고 묻는다. 아직 못 찾았어? 응. 적당한 게 없네. 캣타워 말고도 다른 것들도 사고 싶은데. 순영이 다가와 원우의 어깨 위에 머리를 올린다. 방금 씻고 나온 원우에게서 바디로션 향이 났다. 젖은 머리에 무심코 코를 박는다. 뭐 하는데. 향이 좋아서. 스며 나오는 아쿠아 샴푸 향에 순영은 수족관을 떠올린다. 원우는 바다를 닮았다. 처음 만났던 때부터 그런 생각을 자주 했다. 바다에 관해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어서인가. 원우는 도서관에서 빌려 온 생물 사전을 펼치며 심해 동물을 보여주곤 했다. 옆자리 짝이었던 순영은 원우가 설명하는 세계를 들으며 잠에 빠졌다. 이거 예쁘다. 원우의 말에 순영은 회상을 멈추고 모니터를 본다. 근데 비싸다. 화면에 표시된 숫자에 순영은 헛기침을 했다. 얼마 남았더라. 통장 잔액이……. 원우가 한숨을 내뱉는다. 중고는 어떨까. 둘이 보는 화면에 하염없이 스크롤만 내려간다.
비비를 데려온 지 한 달 가까이 되었다. 원우의 같은 팀 상사 한 명이 외국 파견으로 어쩔 수 없이 거취를 옮겨야 했던 게 이유였다. 키우고 있던 스코티시폴드 고양이를 데리고 갈 수가 없었기에. 평소 원우가 고양이에게 관심이 많다는 걸 알던 상사는 원우에게 돌아올 때까지만 맡아달라는 부탁을 했고 원우는 부담 없이 그 제안을 받았다. 물론 순영도 너무 좋다며 뛸 듯이 기뻐했다. 비비는 우연으로 만난만큼 둘에게 매우 소중한 존재였다. 그런데 요 며칠 사이, 비비에게 적당한 자리가 없다는 걸 깨달았다. 밤에 침대에서 같이 자는 둘 사이에 올라와 슬프게 울거나 침대 밑에 한참 동안 들어가 있어서 종일 찾거나 하는 일의 연속이었던 탓에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이었다. 그동안 회사 일이 바빠 비비를 잘 신경 못 써준 것이 마음에 걸렸다. 그래서 이번에 한꺼번에 고양이 물품을 사기로 하고 며칠 동안 고심해서 고르고 있었는데 마땅히 선택하지 못했다. 한 명이 좋아하면 한 명은 싫어했다. 결국 먼저 순영이 이번 주말에 어떻게든 결단을 내자며 원우를 재촉했다.
닉네임이 순두부면 귀엽잖아. 원우가 웃었다.
저녁에 원우는 한 포털사이트의 고양이 카페에서 드디어 적당한 캣타워를 찾았다. 가입해야만 구매할 수 있는 일대일 거래 사이트라 아이디가 필요했는데 그걸 모르고 무심결에 가입하기를 눌렀더니 닉네임 설정 창이 떴다. 포털 사이트에 자동으로 로그인이 되어있던 터라 카페 가입은 쉬웠다. 뭐로 할까, 순영이 아이디이니까…….
어떻게 됐어? 씻고 돌아온 순영은 수건으로 머리의 물기를 털며 묻는다. 좋은 거 찾았어. 원우가 노트북을 돌려 화면을 보여준다. 한참 스크롤을 내리던 순영의 눈이 빛난다. 장난감도 주신다는데? 원우가 사진을 더블 클릭한다. 스크래쳐도 있어. 안 그래도 비비가 요새 자꾸 소파를 긁더라고. 그럼 이것도 필요하겠다. 둘은 구매를 결정하고 예쁘다, 좋다는 말을 반복하며 글을 읽었다. 본문에 적혀있는 지역도 마침 같아서 다행스러웠다. 만나보자. 순영이 원우의 옆을 비집고 들어와 노트북을 차지했다. 댓글을 남기기 위해서 댓글 창에 커서를 놓는 순간 멈칫한다. 닉네임이 왜 순두부야? 어처구니없어 하는 음성에 원우는 당연하다는 듯이 말한다. 귀여우니까.
권순영의 오래전 별명은 순두부다. 중학생 때 처음 만난 전원우가 지어줬다. 나 놀리는 게 재밌지? 원우는 고개를 끄덕인다. 순영은 실실 웃는 원우를 노려본다. 그러니까, 권순영이 순두부가 된 건 십삼 년 째 의를 맺고 있는 쟤 때문에. 물론 권순영 별명의 역사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지속적으로 자라난다. 순수 순서 순찰 순식간 순살치킨……. 이 외에도 기타 등등으로 묶어 부를 수 있을 만큼. 순영은 어릴 때부터 다양한 별명으로 불렸다. 일회성이었던 것도 있었고 꾸준히 따라다니던 것도 있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오랫동안 불린 이름은 단연 권순대다. 그때가 고등학생 때였다. 무난히 졸업하면 그와 동시에 별명에서 탈피할 줄 알았건만 순대는 자국처럼 남아 사라지지 않았다. 왜일까. 순영의 고충은 시간의 흐름과 동시에 계속 이어졌다. 대리로 승진하던 날, 순영은 순대리라고 불렸다. 어색한 분위기에서 순대국밥을 먹던 팀장이 농담이라 치고 꺼낸 말이 원인이었다. 순대국밥 먹고 있으니 우리 권순영 사원, 이제 대리됐으니까 순대리라고 불러야겠네, 으하하. 그 더러운 웃음에 입맛이 떨어져 숟가락을 놓았다. 한낱 장난으로 넘어갈 말일 줄 알았다. 그런데 발 없는 말은 멈출 수 없기에 빠르다. 순대리라는 직함은 어느새 부서 전체에 퍼졌고 그때부터 순영은 권 대리가 아닌 순대리로 불리기 시작했다. 순영은 투덜거렸다. 저 권 대리라고 불러주시면 안 돼요? 마음 한 쪽에 쌓였던 서러움이 터져 나오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팀장은 능글맞게 웃었다. 권보미 사원이 권대리 됐잖아. 순영은 팀장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새로운 권 대리인 권보미 씨가 멋쩍게 웃는다. 이에 순영도 멋쩍은 웃음으로 답하고 자리로 돌아갔다. 점심시간이 되자 보미는 나가려는 순영에게 다가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몰래 비밀을 알려주기라도 하는 것처럼. 순영 씨, 옆 부서에도 권 대리가 둘이나 있대요. 보미가 놀리곤 웃으며 지나갔다. 순영은 웃지 못했다. 대신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순할 순에 꽃 영. 이게 뜻이 얼마나 예쁜 이름인데. 절로 한숨이 내쉬어질 만큼 기분이 좋지 않았다. 원우한테 다 말해야지. 순영은 점심에 보기로 한 원우를 만나기 위해 사 층 회계팀 사무실로 올라갔다.
이른 아침부터 집에 쳐들어온 A 때문에. 정한의 운명은 거기서부터 꼬인다. 주말이랍시고 온종일 침대와 붙어먹어야겠다고 다짐해봤자 현실은 그리는 대로 그려지는 것이 아니다. 침대에 누워서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쓴 정한이 A를 향해 쏘아댔다. 네 결혼 준비를 왜 나랑 같이해. 무뚝뚝한 음성이 A의 귓가를 한번 치고 돌아오나 A는 관행처럼 가벼이 무시한다. 친구 좋다는 게 뭐냐. 뻔뻔한 문장에 정한은 어이없어 헛웃음을 친다.
A는 결혼을 앞두고 있다. 결혼이란 목표를 눈앞에 두고 분주하다. 애인과 합치기 위해 집을 옮겨야 한다며 쌓아둔 짐을 처분한다고 이래저래 바쁘다. 정한은 친구의 그런 점을 이해할 수가 없다. 그렇게 버릴 거면 왜 샀냐는 주의다. 정한이 이불 속에 꽁꽁 숨어 있는 동안 A는 계속해서 떠들어댔다. 고양이를 위한 새 보금자리를 새 아파트에 꾸며 놨다고 한다. 그 말을 듣자마자 정한은 A의 집에 가면 항상 발목에 부대껴오던 회색 털빛의 작은 고양이를 떠올렸다.
정한아.
왜 또 뭐.
하루만 우리 망고랑 같이 있어 줄래?
정한이 이불을 치워내자 차가운 바람이 안으로 침투해 살 곁에 푸르르 소름이 돋는다. 사람을 좋아하고 잘 따르는 고양이 망고는 정한을 보면 자석에 이끌리듯 정한의 품에 안기곤 했지만, 정한은 품어주지 못했다. 유난히 긴 수염이 얼굴에 닿을 때 반사적으로 재채기를 했다. 나 고양이 털 알레르기. 고백한다. 그랬어? 어, 그랬어. A는 전혀 몰랐다며 커진 눈에 놀람을 감추지 못했다. 미안… 그랬구나, 몰랐네. A는 점점 작아졌다. 그 모습에 정한은 살포시 웃는다. 친구 좋다는 게 뭐라고?
주말 하루는 쉴 틈 없이 빠르게 변한다. 어느덧 누덕누덕한 오후의 첫머리였다. A가 식탁에서 정한의 노트북 자판을 와다다, 두드리길래 정한은 그 사무적인 소리에 궁금함을 참지 못해 드디어 이불을 박차고 나왔다. 나와서 A의 뒤에 섰다. 뭐 하는데. 아니, 그냥. 새집 이사가는 겸 캣타워랑 이것저것 팔려고. 정한은 고개를 끄덕인다. 그리고 그때 첨예한 생각이 머리를 스친다. 내 아이디로 로그인 되어있을 텐데. 어 맞아. 네 아이디로 카페 가입만 좀 했어. 들려오는 예상치 못한 전개에 몸을 기울여 화면을 본다. 미쳤니. 닉네임이 이거야, 다정한? 내가 진짜 싫어하는 별명인 거 알지? A를 심문한다. 그랬더니 A에게서 익숙한 반박이 튀어나온다. 왜, 너 다정하잖아. A가 퉁명스러운 말투로 설명했으나 정한은 무시하기로 한다. 세상에서 다정하다는 말이 제일 듣기 싫어.
또래보다 조숙한 미를 풍기던 정한은 친구들 사이에서 결정권을 가진 자로서 치부되곤 했다. 여기서 윤정한의 의사는 고려되지 않았다. 내가 조숙해 보여? 물으니 대답이 바로 나온다. 너는 그렇잖아. 뭐든 잘하고 모범생이고. 수려한 외모에…… 그러니까 애들이 다 너 좋아해. 정한은 쉽사리 나온 답을 믿지 않기로 했다. 헛짓거리야. 고마운데, 너무 쉽게 따지잖아. 그들이 갇혀있는 곳은 자신을 보는 맹목적인 시선. 정한은 타의로 인해 쓰인 이미지를 구석으로 처넣는다. 구석에서 누군가 물었다. 정한아 너는 어떻게 생각해? 정한은 관심 없었다. 다들 본심을 숨기고 사나 봐. 자신이 좋다면 따라 좋다고 하는 게. 왜 자기들 결정을 나한테 물어보는 것인지. 고찰하지만 도출되는 해답이 없었다.
새것 같은 중고가 뭐야. 누가 중고로 사, 차라리 새것을 사겠다. 정한이 A를 타박한다. 설명이라 치고 써놓은 캐치프레이즈가 난잡하다. 한껏 키워 강조한 폰트는 멋을 잃었다. 마케팅의 마를 모르면서 매도를 하려 그래. 정한에게서 우스갯소리가 나오자 A는 신경질을 낸다. 아이, 잔소리 좀 진짜. 너는 중고의 매력을 몰라. 값도 싸고 얼마나 좋은데. 몰라도 돼. 그런 거. 정한이 일부러 A의 말을 막자 A는 노트북 화면을 닫더니 옷을 챙겨 일어난다.
아무튼 연락 오면 말해줘라.
연락이 왜 나한테 와.
네 핸드폰 번호 올렸는데?
그로 인해 윤정한은 앞으로 일어날 사건의 주인이 되어 그곳에 발을 빼지 못하고 아주 깊이 빠져버린다.
어수룩한 저녁에 알림이 왔다. 그러나 무시했다. 구매 의사가 있다며 거래하실 거면 답글 남겨달라는 조심스러운 말에 남길 말이 없어서. 인터넷 창을 끄려다가 문득 다시 본 화면에 기겁한다. 닉네임이 순두부라니. 아기들도 안 지을 이름이잖아. 하마터면 마시던 코코아를 뱉을 뻔했다. 정한은 못 본 척하고 노트북 화면을 덮는다.
안녕하세요. 댓글 남긴 순두부라고 합니다.
라고 문자가 온 건 자려고 누운 밤이었다. 머리맡에 둔 핸드폰을 더듬거리며 찾았다. 어두컴컴한 이불 속에서 액정을 들여다본다. 이대로 두다가 전화라도 오겠네. 골머리를 앓기 전에 해결해야 한다는 생각에 문자가 온 번호를 A에게 전달했다. 네 캣타워 사고 싶대. 연락해 봐. 텍스트를 전송하고 정한은 까무룩 잠이 든다.
정한아 한 번만 부탁하자. 내가 일당 챙겨줄게. 핸드폰 너머로 A가 구구절절 매달리는 통에 밖으로 나왔다. 애인이 아프기 때문에 집에서 꼼짝 못 할 거 같다는 말을 무시할 수 없었다. 마시던 아메리카노가 다 떨어져 스트로우에서 바람 빠지는 소리가 귀를 자극한다. 입맛을 다시던 정한은 플라스틱 컵을 컵홀더에 꽂고는 무신경한 얼굴로 운전대를 잡았다. 매일 집에만 있어서 운전하는 법도 다 까먹은 거 같은데. 정한이 밖에 나가는 일은 원체 자주 없었다. 광고주와의 미팅이 잡힌 날이 아니면 보통은 집에서 문장을 뜯어고치거나 만드는 게 대부분이니까. 쌓아둔 가안과 구상해둔 컨셉이 한 켠을 차지하고 있는 노트가 집에서 자신을 기다렸다. 마감이 얼마 남지 않아서 글을 더 써야 해야 하는 판에 현실은 중고 물품을 거래하러 가야 하는 꼴이라니. 인생에 다신 없을 일이라 생각하니 지금의 모습이 지속적으로 상기되어 괜히 소름이 돋았다. 그래도 부탁은 부탁이니까. 정한은 목적지를 뇌 내에 입력하기 위해 핸드폰을 집었다. A한테 어디로 가면 되냐고 물으니 바로 주소와 함께 카페 안으로 들어가 있으라는 문자를 받았다. 정한은 핸드폰을 옆좌석에 던져놓고 시동을 걸었다.
숫자가 다른 두 번호를 보고 고민하던 중에 화면이 검게 변한다. 규칙적인 진동에 부르르 떨리는 핸드폰. 문자 기록이 한 번 있다고 뜨는 번호가 낯설지 않다. 어수선한 카페 안은 벌써 다가온 연말을 기념하듯 캐롤을 잔잔하게 틀어놓았다. 일인용 소파에 앉아 노래 가사를 따라 흥얼거리던 순영은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발신된 전화를 받는다. 받자마자 인사도 없이 퉁명스러운 말투가 순영을 맞이했다.
지금 어디세요.
다정한 님?
뭐에 놀라기라도 한 듯 방긋 기뻐하는 목소리에 정한은 일단 의구심부터 가진다. 어려 보였다. 목소리만 들어도 눈에 선하다. 평일 낮에 만나자고 했으니 예상 영역은 방학을 맞은 대학생 아니면 그래도 최소 중학생까지라고 본다. 저는 안에 있는데, 다정한 님은 어디세요? 말할 때마다 나오는 적응 안 되는 별명이 귀를 간지럽힌다. 밖으로 나와요. 주차해 놨는데. 알겠어요, 잠시만요! 뭐가 좋은지 밝음이 묻어있다. 운동화 앞코로 바닥을 차며 기다리기를 몇 초. 저 멀리 복슬복슬한 아우터에 파묻힌 검은 머리 남자가 높이 손을 들어 인사를 한다. 마주 오는 눈앞의 햇살에 정한은 눈을 가늘게 접었다. 저 사람이 순두부인가 보다. 정한이 고개를 까딱이며 인사를 하자 남자는 발을 멈추고 허리를 숙인다. 나를 보고 자기가 어리다는 걸 알았을까. 그런 식으로 예의를 표하는 모습에 웃음이 났다.
트렁크를 열어 물품을 확인하던 순영이 뒤에 서 있는 정한을 본다. 허공에서 주춤하는 순영의 손이 조그마해서 문득 귀엽다는 생각을 했다. 형, 이거 조립은 어떻게 해요? 순수함이 묻은 목소리에 정한은 머뭇거린다. 내가 고양이랑 같이 살아봤어야 알지. 발을 옮겨 트렁크로 다가가 분리되어있는 목재들을 만진다. 몰라. 모르겠다. 돌아보니 순영이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기대하고 있다. 그때 왜 솔직하게 말하지 않았을까. 자신은 고양이랑 관련 없다고. 이런 거 하나도 모르고 관심도 없는데. 그렇게 말하면 바로 실망할 것 같아서였는지, 이렇게 만난 인연이 거기서 끝날 것 같다고 느꼈던 건지. 둘 중에 뭐가 됐든 어렴풋이 확신할 수 있는 건 하나였다. 그냥… 쟤한테 단순한 엑스트라로 남기 아쉬워서. 정한은 의도로 장식된 말을 뱉는다.
해보고 못 하겠으면 전화해요.
한번 보고 말 사이로 남기 아쉬워서. 왜 그런 생각을 했을까. 정한은 자신에게 의아했다. 순두부라는 별 뜻 없어 보이는 닉네임을 달고 순두부처럼 말랑한 사람이 실제로 나타나서? 혹은 귀여운 외모에 어린 말투가 애교 있어서? 카피라이터 일을 하며 여러 위치에 있던 사람을 만나봤으나 특정 누군가에게 호기심을 가진 일은 처음이었고 곁에 있어 보고 싶다고 느낀 것 또한 처음이라 혼란스러웠다.
형… 번호 이거 맞아요? 순영이 휴대폰을 보여주며 붙어 온다. 아. 그건 내 친구 번호고 이게 내 번호. 그렇구나. 통화기록에 남아있는 자신의 번호를 알려주니 순영이 방긋 웃었다. 어제 문자 보냈는데 답장 안 해주셨던데. 궁금해서 물어오는 순영의 말에 정한이 답한다. 잤어요. 졸려서. 뭐가 좋은지 순영은 실소를 터트렸다. 형. 초면에 이런 말 하기 그렇지만 진짜 잘생기셨어요. 이렇게 잘생긴 사람이 올 줄은 몰랐는데…… 이럴 줄 알았으면 뭐라도 하고 나올걸. 저는 자다가 바로 나와서. 괜찮은데 뭐. 나도 자다 나왔거든. 형은 어땠어요, 저 예상했어요? 두눈을 반짝이며 묻는 표정에 생기가 돈다. 정한은 점점 무력해지는 것을 느낀다. 예상은 굳이 안 했고…… 그냥 궁금했어. 어떤 거가요? 궁금하잖아. 사람일지, 진짜 순두부일지. 뭐야. 그렇게 따지면 저도 형이 다정한지 안 다정한지 궁금해요. 순영이 자신의 말을 따라 한다. 내가 다정한이 아니라 내 친구가 다정……. 반박하려다가 멈춘다. 다정하다고 알아줬으면 하는 마음에서. 정한은 자신이 왜 자꾸 순영의 앞에서 뜻대로 못하는지 의문이었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순영은 낚싯대를 던진다. 커피 사드릴게요. 마시고 가요.
카페에 들어온 둘은 구석에 자리를 잡았다. 불그스름한 조명이 머리 위로 내려와 분위기가 나른했다. 정한은 궁금했다. 자신이 순영에게 넘어가는 이유를. 원래 처음 본 사람이랑 이렇게 말 많이 하고 그래요? 물었더니 복잡한 답변이 돌아온다.
아니요, 그건 아니에요. 그런데 형은 좀 특별한 거 같아요.
정한은 거기서 가슴 한 부분이 뻐근해졌다. 말 편하게 해요. 순영이 한 술 더 뜬다. 너부터 편하게 하면. 응. 부끄러운듯 입꼬리를 올려 베시시 웃음짓는 순영에 정한은 넋을 놓을 뻔한다. 다행히도 그순간 벨이 진동하여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정한은 주문한 체리에이드와 고구마라떼를 가져왔다. 학교는 안 갔나 봐, 방학이라서? 대강 맞다는 답을 예상하고 물었다. 그러나 순영의 답은 정한을 향해 있다. 연차 썼어. 오늘 이거 때문에 형 만나려고.
거래는 거기서 끝났다. 순영은 물품들을 자신의 차로 옮기고 정한이 알려준 A의 계좌로 입금을 마쳤다. 원우가 채워준 통장 잔고에 마음속으로 고마워하면서. 둘은 그렇게 헤어졌다. 순영이 집에 돌아온 건 노을이 지는 때였다. 정한과 카페에서 많은 대화를 나눈 탓이다. 같이 사는 원우 얘기, 회사 일, 고양이 얘기. 정한에게는 해당하지 않는 이야기들. 일은 집에서 하고, 고양이는 안 좋아하고, 같이 사는 친구가 누군지도 관심 없고. 정한은 그저 머릿속으로 열심히 순영의 조각을 모을 뿐이었다. 그런 만남을 끝내고 돌아온 순영은 양손 가득 물건을 품고 복도에서부터 발소리를 냈다. 소파에 앉아있던 원우가 들려오는 소리에 재깍 반응한다. 곧이어 원우를 부르는 소리에 원우는 바로 문을 열고 현관 앞에서 순영을 껴안았다. 주차장에서 나 부르지. 내려가면 되잖아. 으아… 원우야 나 무너져. 순영이 뒤로 밀려나자 원우는 비켜섰다. 그리고 낑낑대며 목재 더미를 메다시피 들고 온 순영에게서 물품을 넘겨받는다. 순영이 빙그레 웃는다. 괜찮아, 별로 안 무거웠어. 원우도 빙그레 웃는다. 거짓말하네. 원우는 졸래졸래 따라오는 비비를 피하면서 목재를 거실로 옮겼다. 나 샤워할게. 화장실로 들어간 순영이 문을 닫기 전, 원우가 순영을 부른다. 순영아. 응. 수건을 든 순영이 거실로 빼꼼 얼굴을 내민다. 먹고 싶은 거 있어? 시켜 먹자. 어…. 시선이 위를 향한다. 치킨. 치킨? 평소에 잘 안 먹잖아. 그냥. 오늘 기분 좋아서. 그사이 언제 다가왔는지 비비가 화장실 문 앞 주변을 방황한다. 비비 잘 있었어? 순영이 쭈그려 앉아 비비의 얼굴을 매만지고 있자, 원우가 다가와 비비를 가로챘다. 얼른 샤워해. 그동안 나는 저거 설치하고 있을게.
조립식 캣타워 부품을 이리저리 맞추다가 식탁에 올려 둔 순영의 핸드폰이 울린다. 원우가 걸어가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모르는 번호였다. 받아도 될지 잠깐 망설이다 결국 수화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어. 순두부님 아닌가요. 아, 순영이요? 의외였다. 이름이 순영. 그래서 닉네임을 순두부로 지은건가, 깨달음을 얻는다. 이름도 순하네. 생긴 거처럼. 정한의 잇새로는 웃음이 새어 나온다. 전화를 받은 원우는 단번에 발신인이 누군지 알아챘다. 자신 외에 순영을 순두부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은 오늘 순영을 만난 사람.
바꿔줄래요?
순영이 지금 샤워하는데.
순두부 씨 친구분이신가요?
네, 네.
둘이 같이 살죠?
저 그런데 이런 거 왜 물어보세요?
순두부 씨가 아무 말 안 하나요. 또 만나자고 약속했는데 아무래도 날짜를 잡아야 만나니까. 그렇잖아요.
네?
이따가 다시 전화할게요. 그때는 순두부 씨가 받았으면 좋겠네요.
하고 전화가 끊어졌다. 뭐야 이 사람. 원우는 고개를 갸우뚱거린다. 이상한 사람이 순영을 찾는 게 기분이 좋지 않았다. 어릴 때부터 워낙 자주 붙어있었기에 순영의 친구는 곧 자신의 친구였고 함께 다닌 대학에서도 보통 순영을 좋아하면 자신에게도 호감을 느끼는 일이 대부분이었던 터라, 이렇게 대놓고 순영만을 찾는 전화에 원우는 의아함을 품는다. 대화라 하기에도 몇 번 오가지 않았지만, 자신을 매우 싫어하고 있는 것이 확연했다. 바늘 같은 말투로 콕콕 찌르면서 짜증을 내잖아.
그냥. 캣타워 사준 것도 고맙고 해서. 그게 내 것은 아니지만……. 순영과의 통화에서 정한은 두서없는 말을 내뱉었다. 집에 잘 들어갔는지, 지금 뭐 하는지, 캣타워는 어떻게 됐는지 등의 질문으로 시간만 끌다가 본론으로 들어가기에 앞서 서두를 열었다. 롯데월드 티켓이 있는데…… 어쩌고저쩌고. 말을 듣는 내내 순영의 눈이 커진다.
정말? 우와 고마워 형. 원우야, 다정한 형이 고맙다고 우리 롯데월드 티켓 주신대! 들려오는 순영의 외침에 정한은 순간 잘못 들었나 싶다. 아니, 그게 아니라 나랑 가자고. 순영의 생각을 정정하자 순영이 그제야 알아들었는지 감탄사를 내뱉고는, 아하. 그럼 그렇게 말하지 형. 원우야! 다정한 형이 너랑 같이 가고 싶대! 확신한다. 원우는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밖으로 나와 있다가 놀랐다. 그 사람이 나를? 정한은 머리를 짚는다. 수화기 너머에서 무슨 일이 잘못되어가고 있는가. 아니야, 아니라니까. 너한테 주는 거야. 두 번째 정정이었다. 하지만 순영은 이해되지 않는다. 구매한 게 고마워서라면 실질적으로 구매한 사람은 원우니까 원우한테 줘야 하는 거 아닌가. 입금한 돈이 원우 돈인데. 원우의 소비니까 당연한 거 아닌가하고 순영이 사고의 지평을 넓히는 사이, 대답 없는 순영에 정한은 직감한다. 이렇게 눈치가 없어서야, 고생 좀 하겠다고.
난 너랑 가고 싶은데.
나랑 형이랑요?
그래요.
나랑 형이랑 롯데월드를요?
그렇다니까요.
왜요?
놀이공원으로 순영을 낚으려던 건 단순한 이유다. 음식교환 쿠폰이라던가 게임머니라던가. 영화표라던가. 성의를 표할 것들은 세상에 넘쳐나지만, 그중에 놀이공원이란 무려 같이 간다는 점에서 크나큰 메리트다. 둘이서 오래 있을 수 있다는 구실을 만들어준다. 그리고 무엇보다 데이트 같으니까. 여기까지 생각하다 정한은 데이트라는 단어에 스스로 놀랐다. 내가 얘랑 데이트가 하고 싶은…… 아니 뭐 웃는 게 보고 싶고 그래서 일뿐인데. 정한이 아무 말 없자, 순영이 목소리를 냈다. 좋아요. 가요. 그래서 정한의 마음은 그때 사르르 무너진다.
원우가 완성된 캣타워의 사진을 찍던 찰나, 순영이 치킨을 뜯으며 말한다. 너랑 같이 살기 잘한 거 같아. 갑자기 왜. 월세 반반씩 내고 좋잖아. 뭐야, 내가 다 해주니까 좋은 거지. 순영이 푸흐흐 웃는다. 나는 너 좋아하니까. 그건 당연한 거고. 원우가 옆으로 몸을 돌려 순영을 찍었다. 캣타워에 흥미가 생겼는지 비비가 냉큼 안으로 들어간다. 자리에서 일어나 원우 옆으로 다가간 순영이 강아지풀을 닮은 장난감으로 비비를 유인하는 사이에, 원우는 폴라로이드 카메라에서 출력된 사진을 흔들어 말렸다. 사진은 점점 순영을 그려냈고 원우는 완성된 사진을 지갑에 넣는다.
크리스마스이브에 비가 오는 게 있을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해? 그러게, 형. 원우도 잔뜩 기대한 거 같은데. 걔는 왜. 원우도 티켓 사놨거든. 그로 인해 정한은 거기서 삑. 멈춘 카세트마냥 일시중지 된다. 전원우라는 애는 대체 뭔가. 처음엔 관심 없었는데 자꾸 순영의 옆에 꼭 붙어있으니까 신경이 쓰인다. 한두 번도 아니다. 평일에는 연락이 잘 안 되니 순영이 퇴근한 후에나 메신저로 대화를 나누는데 대부분 이런 패턴이다.
원우가 이제 자래. 이거나,
형. 나 자야겠다 원우 지금 옆에서 잔다. 이거나,
원우 혼자 자러 갔어. 이만하고 내일 또 얘기해. 이거다.
그럼 전원우한테 권순영은 무엇인가 하는 의문이 드는 건 당연스러운 일 아니냐고. 게다가 붙어있기만 하는 게 아니라 꼭 차지하려는 거 같잖아. 순영과 소소한 이야기꽃을 피우다 보면 나오는 전원우 얘기에 꽃이 다 져버린다. 통화를 마친 정한은 황급히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고 복도를 걸었다. 맨 끝에 있는 문 앞에 다다라 초인종을 누른다. 제발 전원우만 없기를. 간절히 바라면 이루어져야 하는데 정한의 간절함은 몇 프로 부족하다. 문이 열리자마자 보이는 얼굴이 낯설었다. 전원우였다.
다정한 님? 전원우가 윤정한을 보고 맨 처음 하는 말. 이름도 서로 다 아는 사이에 언젯적 별명을 부르는지. 정한이 애써 웃으며 가볍게 눈짓으로 인사하자 원우는 고개를 숙인다. 안녕하세요. 순영이 아직 화장실에 있는데. 원우가 긴 팔로 문을 막고 있어서 정한은 안을 기웃거린다. 들어가도 되나요. 아, 예. 들어오세요. 사무적인 말투는 정한의 앞에 가벽을 쳤다.
순영아 이것도 먹어. 정한이 순영의 앞으로 프렌치프라이를 밀어준다. 햄버거 세 개에 프렌치프라이도 세 개다. 마지막 남은 케첩까지 눌러 짜서 그득한 탑을 이룬다. 너무 많아 형. 순영은 원우가 먹다 남긴 햄버거 포장지에 하나씩 빼서 올려 둔다. 원우가 의아하게 쳐다본다. 너도 먹어. 순영이 요구하지만 원우는 거절한다. 사이다 다 먹었네. 내가 따라줄게. 원우가 빈 순영의 컵에 사이다를 채우는 동안 정한은 손가락으로 식탁을 두드리다 멈춘다. 순영이 아쉬움을 토로했기 때문이다. 놀이공원 못 가서 되게 허탈하다. 못 가면 어때. 이렇게 놀 수 있는데. 정한은 프렌치프라이 하나에 케첩을 덧발라 순영의 입에 넣어준다. 형이 좋다면 다행이고. 순영이 웃는다. 원우가 그 모습을 보다 천천히 순영의 쪽으로 기운다. 방에서 영화 볼까? 우리 저번에 보다 만 거. 순영은 원우를 본다. 응? 둘은 하고 싶은 거 없어? 되물었다. 이에 정한이 원우를 본다. 날카로운 선을 가진 눈매는 A가 키우는 망고를 떠올리게 한다.
식탁 밑에 부비트랩이라도 있나 봐. 앉아 웃으며 대화해도 밑으로는 발길질하고 난리 치고 있는데.
원우와 정한은 나란히 앉아 둘 사이에서 가로막힌 분위기를 단숨에 읽어 나갔고 순영은 그 가운데에 있다. 원우가 묻는다. 형 무서운 거 좋아하세요? 어. 나는 좋아해. 그럼 우리 지난번에 보던 거 말고 이거를 보자. 원우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자 순영도 따라 몸을 일으켰다. 원우가 비디오테이프를 TV 탁자 서랍 안에서 꺼낸다. 원래 보던 건 뭐였는데? 정한이 뒤에서 묻자 순영이 냉큼 웃으며 대답한다. 원우가 로맨스 좋아하거든. 안 그래 보여도. 원우는 고개를 돌리려다 순영의 말에 머뭇거리고 다시 앞을 본다. 정한은 원우가 미소짓는 걸 봤다.
야. 원우야 재미없냐? 후반부가 루즈해 진 걸 알았을까 순영이 걱정하는 투로 물어온다. 응. 원우는 멀뚱히 앉아 부정하지 않았다. 형은? 순영이 침대 위에 앉은 정한을 본다. 나는 괜찮은데. 주인공이 꽤 연기를 잘하네. 강조하는 정한에 순영은 대번 안심했다. 그렇지? 역시 정한이 형……. 싱글벙글 웃는 순영을 보던 원우가 정한의 판단을 받아친다. 주인공보다는 서브가 더 잘하던데. 아무래도 경력이 있으니까. 원우는 이런 쪽으로 해박한가 봐. 정한의 음성이 위에서 떨어졌다. 순영이가 저 배우를 좋아해서요. 그래서 알고 있어요.
결국 그날 밤 셋은 영화를 포기하고 잠자리에 들기로 한다. 순영은 원우와 정한 사이에서 눈을 감았다. 하나뿐인 침대를 두고 실랑이를 벌이다 거실에 이불을 편 결과다. 야 권순영 붙지 마. 원우가 다가오는 순영을 떼어놓는다. 아이, 왜 그래. 순영이 무시하며 원우를 가두려고 팔을 쭉 뻗어 원우에게 올린다. 너 감기 걸렸잖아. 나한테 옮기지 마. 싫어, 옮길 건데. 원우가 한 번 더 밀어내지만 순영은 끄떡없다. 순영이 원우의 쪽으로 더 바짝 붙어오자 정한이 순영을 부른다. 이불 내려가. 추워. 뒤를 돌아본 순영이 정한 쪽으로 돌아눕는다. 정한은 그래서 순영과 눈을 마주했다. 순영이 정한의 얼굴을 빤히 보다가 입을 연다. 형은 정말 피부가 좋구나. 정한의 웃음은 그때 한번 터진다. 정한이 손을 뻗어 순영의 볼을 잡았다.
왜.
귀여워서.
뭐야. 순영이 정한을 살짝 민다.
그날 후로 정한은 날이 갈수록 기억 속에서 짙어지는 권순영 때문에 골치를 앓았다. 이어지는 계단을 성큼성큼 밟으며 올라간다. 내가 뭐가 좋다고 너랑. 대체 왜 너랑. 귀엽기만 하고 별 메리트 없는 너한테 내가 왜 자꾸. 생각하는 머리와 발에 힘이 실렸다. 아무래도 함정에 걸린 것 같다. 그런데 문제가 있지. 함정을 판 애는 자기가 판 건지 자신도 모른다는 게. 사무실에 들어서서 지나가는 아무나에게 말을 걸었다. 권 대리님 찾으러 왔는데요. 아무나가 정한을 스캔하듯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뒤를 돌아 보미 씨, 하고 부른다. 책상에 앉아 서류를 정리하고 있던 보미가 이쪽을 돌아본다. 아니요. 저분 말고…… 쟤요. 정한이 가리키는 손끝에는 기지개를 피던 순영이 있다. 정한과 눈이 마주친 순영이 일어서 자리를 벗어나려는 순간 앞자리 직원이 순영에게 속삭인다. 순영 씨, 누구야? 되게 잘생기셨다. 연예인 같아. 순영이 정한을 보며 뿌듯한 얼굴로 손을 흔든다.
뒤늦게 깨달은 게 바보 같은 짓이다. 함정은 오래전에 빠졌다. 권순영. 그리고 그 함정 곁을 지키고 있는……. 정한은 스트로우를 아작아작 씹어댄다. 원우랑 연애해? 갑작스러운 말에 순영이 깜짝 놀란 얼굴로 두 손을 휘휘 저었다.
아니야, 무슨 소리야.
그런데 왜 같이 사냐고.
바람이 불자 화단의 꽃들이 흩날리는 머리카락처럼 좌우로 흔들렸다. 회사 앞 벤치에서 커피를 마시다 정한이 던진 질문에 순영도 갈피를 못 잡고 흔들린다.
어? 어… 뭐. 취업도 같은 곳에 됐고 부모님들끼리도 친하시고 원우가 방 계약했을 때 나도 껴 왔어. 모르는 사람이랑 룸메이트 하는 것보다 낫잖아. 다행히 그게 원우라서 더 좋은 거고.
그건 알겠어. 근데 원우도 그 생각만 할까.
정한이 순영의 손을 잡았다. 손가락을 만지다 손등을 쓸다가 손바닥을 붙여 온다. 그리고 둘은 서로의 손가락이 얽히는 걸 본다. 순영은 금세 볼이 발개져 어쩔 줄 몰라 했다. 그때 어색해진 분위기를 깨려는 듯 벨이 울렸다. 화면에 원우의 이름 세글자가 띄워져 있다. 맞다, 형 나 원우한테 말 못 했는데. 받아 봐. 정한은 말하면서도 순영의 손을 놓지 않았다. 응 원우야. 정한이 형 왔는데 셋이서 같이 밥 먹는 거 어때? 이어지는 침묵 속, 스피커 안에서 어떤 감정을 머금고 있는 음성이 들리는지는 순영만 알 수 있다.
형. 원우랑 밥 먹으러 가자. 순영은 귀에 대던 핸드폰을 떼고 원우를 언급했으나 이번 만큼 정한은 양보하고 싶지 않다. 싫어. 난 너랑 먹으러 온건데. 내가 먼저 너 보러 왔잖아, 전원우보다.
있잖아. 원우야, 오늘은 같이 못 먹을 거 같아. 나중에 먹자. 다정한 목소리로 몇 번 이야기를 더 잇다가 전화는 끊어졌다. 전화를 끊은 순영이 정한에게 묻는다. 형 혹시 원우 싫어해? 그 한마디에 정한은 순식간에 무언가 말하고 싶은 듯 입술을 달싹거린다.
나 고양이 알레르기 있어.
정한이 잡고 있던 순영의 손바닥을 손가락으로 툭툭 친다.
형. 나는…… 원우가 나 좋아하는 거 알아.
그래서 전원우한테 기회라도 주고 싶어?
정한이 시선을 내리자 순영의 고개가 살짝 들린다. 한참 동안 얼굴을 마주했다. 정한이 거리를 좁혀오자 둘의 코가 부딪혔다. 숨의 온도가 느껴지는 것은 둘 사이가 가까워졌다는 뜻이다. 정한은 순영의 입술 틈이 벌어지는 걸 보고 턱을 부여잡는다. 입술이 맞닿을 때까지 순영은 피하지 않았다. 그대신 눈을 감는다. 때마침 원우가 자신을 향해 걸어오는 것을 봤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