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더라인이 진해졌다. 권순영이 만든 타임머신이 가동해야 할 시간이다. 시간이 역 또는 순 또는 선행하는 프로그램이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를 전체 망가뜨려놨기에 누구도 일자선에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세상을 이분화하여 나누던 경계가 지워져서 서 있을 데가 없었다. 머신의 모니터에 줄줄이 머리 부분이 깨져 깜빡거리는 전구가 프렉탈 노이즈를 일궈내며 유치한 밤을 밝힐 때 그것을 연구의 산물이라 자찬하는 건 인류의 유치함이었다. 그건 권순영의 성과… 보다는 일과였다. 권순영은 무쓸모한 것들에 아름다움을 찾아 넣었다. 낭만이었다. 실패작을 꾸미느라 하루가 다 가도 개의치 않을 정도의 낭만. 그래서 권순영의 총체적 관심사는 남들의 비웃음거리와 부산물로 이용됐고 그럴수록 권순영은 그들과 자신 사이에 선을 그었다. 하지만 권순영이 그어놓은 테두리 안으로 내가 들어갔다. 나는 권순영의 세 번째 멘토였으므로.
화면에 비친 나는 악몽 속에 있는 비현실자처럼 보였다. 그렇다면 비현상을 살았다. 불과 사 년 전만 해도 걸려있던 플래카드와 쏟아 나오던 뉴스 꼭지는 끊겼고 멸망이란 단어는 거짓말처럼 수그러들었다. 블라인드 사이마다 껴있는 햇빛에 자연스레 눈이 감긴다. 나와, 권순영을 보낸 타임머신은 그 꼴이 닮았다. 연구소는 문을 닫았으며 그 덕에 조잡한 플라스틱이 유의미한 멋을 잃은지 수개월 전이라고. 나는 여전히 각주를 달고 산다. 굵직한 전선 더미와 유리가루 파편이 바닥에 즐비해 밟을 때마다 날선 조각이 튕겨져 나왔다. 내가 스테인리스로 하자 했을 때 왜 말 안 듣고. 그러니 이 모양이지. 망가진 타임머신에 들어갔다. 가동을 기다리지만 변화는 오지 않는다. 바닥의 보더라인만이 네온 빛을 냈다. 권순영이 떠난 지 사 년. 오늘 일인 것처럼 선명한 그날 기억만이 머릿속에 남았다. 권순영의 마지막 자취. 체취. 일 년만 사라져있겠다던 까드락지던 목소리. 시간 지나 모두 잃어버린다면 그중 어떤 것도 내가 다시 돌려놓을 수는 없겠지.
우리는 멸망이 종말 할 때까지 서로를 벗어나려 하지 않았던 거지 이별을 기다리고 있었던 게 아니었다.
연구원 권순영은 가운을 입기 싫어했다. 연구에 임하는 자세를 무시한 거잖아. 권순영 뒤로 재잘거리던 팀원들은 열렬히 권순영을 씹어대느라 바빴다. 권순영이 말을 안 듣는다고, 그렇게 변했다고. 말 안 듣기 시작한 건 걔 최초의 발명이 실패로 돌아갔을 때부터라고. 아니다. 나는 그 의미 없는 단어들로 가득한 대화를 듣는 조잡스러운 오후에 누가 사 왔는지 기억에도 없는 햄버거를 씹으며 얘기했다.
원체 걔는 말을 잘 안 들어, 안 들었지. 그냥 그랬어. 오히려 내가 권순영 말을 잘 들었지.
선배. 순영이 형이랑 예전부터 알고 지낸 사이였어요?
아…. 스스럼없이 튀어나온 물음에 되새김질하는 과거 화법. 왜 그렇게 말했지. 마치 오랫동안 잘 아는 사이인 것처럼 보이게…. 저녁을 몰고 온 창문가엔 벌써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구석의 이름 모를 양치식물이 매일 주는 산소만이 연구실의 유일한 생명력이었지만 매일 로직처럼 반복적인 날들에 푸름이 도태된 나는 말할 입을 잃어버렸다. 시선을 돌렸다. 정신을 놓은 모니터가 타들어가는 모습으로 점멸하는 것이 거슬려 손바닥으로 몇 대 갈구니 지직거리던 화면이 모습을 아예 꺼트린다.
항상 재미가 없다.
재미없어서 나왔다. 나와보니 권순영은 두 손에 끌과 톱을 쥐고 타임머신이라 명명한 기계 앞에서 열중하고 있었다. 오른쪽 레버에 쓰여진 글자는 L이었다. 삐친 획을 보니 붓으로 직접 그었을 정성이 감겨있는 모양새라 눈길이갔다. 여기 잘못썼네. 알R인데 왜 엘L로 쓴거야? 왼쪽이랑 오른쪽 구별 못하는 거 아니잖아. 가운 주머니에서 손을 빼 하나씩 짚었다. 권순영이 한창 집중하느라 너트를 끼워 맞춰 넣고 있을 때. 그랬더니 나를 보고 눈을 끔뻑거리던 권순영은. 어, 그거 일부러 그렇게 쓴 건데. 엘은 러브고 알은 레스트야.
사 년 전이었다. 권순영을 알게 된 건. 권순영은 총애 받는 연구원으로 이곳에 들어왔다. 새로운 멸망 가설을 가진 자가 있다며 과반수가 머리를 부닥치고 의견을 모아 권순영을 데려오자 한 결과였다. 나는 본디 권순영의 출처가 어딘지도 몰랐는데 어느새 환대를 받으며 연구소로 들어온 진녹색 코트의 검은 머리 앞에서 웃음이 나오지 않을 수 없었다. 처음 본 권순영의 두 눈에 너무나도 깊게 많은 별이 박혀 있었다.
원래 이곳은 일하기 싫어하는 사람들만 와.
멸망이 화두가 되면서 정부는 극비로 연구 벌레들의 변태를 요구했다. 하나의 공간에 수많은 인원들을 몰아넣고 과학적인 힘으로 멸망을 변질시킬 수 있는가를 찾으라는 청을 내던졌으나 속뜻은 히어로라도 되어서 어떻게든 지구의 상생을 지키라는 명령이었다. 벌레들은 복종했다. 위에서 떨어지는 미끼를 거부할 수 없었기에. 우리는 그게 목숨이었고 벌이라서 나와 권순영은 별안간 꿈에 허덕이는 존재로의 기분으로 살았다. 그럼에도 권순영은 아무래도 좋다고 했다.
권순영은 연구소에 온 다음날에 대략 칠십 센티 정도로 보이는 괘종시계를 들고 출근했다. 그게 뭐야? 시계. 아니 시계인 건 알고. 그니까 왜 갖고 왔냐고. 내 말 한마디 한마디에 팀원들의 이목이 집중되자 권순영은 주변을 휙 돌아보고는 여기 시계가 없잖아. 대꾸했다. 그래서 아무것도 없던 흰 벽에는 뻐꾸기가 붙어 울기 시작했다. 이상했다. 그 시간에 맞춰서 권순영은 자기 할 일을 했다. 그렇게 영역을 불리어나갔다. 그리고 그와 더불어 그 해. 마침내 권순영이 우리의 중심 사상이 되었을 때, 권순영을 주제로 한 풍문이 돌았다. 소문의 내용은 권순영이 자신에게 배정되었던 예전 멘토들과 깊은 관계를 가졌다는 것. 네가 지금 일 안하고 사랑해서 무엇하냐고 제 입맛에 맞게 야단치던 연구소장이 권순영에게 연구 금지처분을 내렸다. 권순영은 반박하진 않았으나 동그래진 눈으로 물었다. 그런 것도 있나요?
연구소에 나오지 못하는 권순영을 화젯거리로 삼은 팀원들은 이때다 싶어 평소보다 많은 말을 했다.
기계치가 어떻게 여길 왔지?
그 형 볼트 끼워 넣을 줄도 모르던데.
에이, 거짓말. 설마….
뭐가 좋다고 실실 웃기만 하고.
나는 권순영이 정한 선배 직속이라는 게 이해 안 가.
일도 우리랑 다른 거 하잖아.
모르겠어. 혼자서 뭘 그렇게 만드는지. 내가 봤는데 그거 만들어서 어디다 쓰나 싶더라. 될 수도 없는 일에 왜 그렇게 열중하던지.
그 형 다 가짜 아냐?
순수한 척 연기라고?
무슨 소리. 그건 아닐걸. 여기서 제일 무해한 게 권순영 하난데… 근데 볼트 못 끼우는 건 진짜야?
권순영이 사라졌지만 권순영이 남겼던 멸망 가설은 확정적인 진리가 되어갔다. 나는 팀원들에게 연구 방향을 지시하면서도 눈에 차게 비어있는 자리가 다시금 필요했다. 이따금 권순영 생각이 났다. 자극제였다.
바람이 유독 많이 불던 어느 날의 일이다. 야간 업무를 하던 중에 연구원 한 명이 밖에서 부리나케 달려왔다. 그 애는 땀을 뻘뻘 흘리면서 이마에 붙은 앞머리를 떼어내지도 못한 채 숨을 골랐다. 이름은 김민규였다. 김은 우리한테 가장 중요한 소식 제공자임과 동시에 봉쇄된 연구소를 세상과 이어주는 매개체였다. 우리는 김의 말을 절대적으로 믿어야 했다. 김이 전해 줄 얘기를 기다리며 김을 주시하던 차, 끝내 김이 입을 열었다.
순영이 형이 마지막으로 만들던 게 뭐더라?
타임머신.
그래서 그거 다 만들었대?
왜?
나사NASA에서 공식 발표 났어…….
맞춘 게 아닌데 우리는 한꺼번에 기립했다. 팀원들은 나에게 권순영한테 연락 좀 해달라고 입을 모아 말했다. 어디 있냐고. 권순영 뭐 하냐고. 나는 해줄 말이 없었다. 그저 멸망을 주장하던 권순영이 필요하다고 안절부절인 팀원들을 뒤로하고 가방을 들었다. 나는 다급해졌다. 일주일 외출서를 제출했다. 공식 발표와 함께 권순영은 모두에게 필요 불가결이 되었지만 누구보다 가장 권순영이 필요한 건 나였다. 사실 권순영은 우리 집에 있었다.
나랑 뭐든 할래? 목소리가 타일 벽에 부딪혔다가 나가떨어지는데 권순영은 쓰고 있던 보안경을 벗지 않았다. 퇴출되던 날, 두 평 남짓한 방안에 틀어박혀 마지막 연구를 하던 것이 궁금해 꼬박 하루를 같이 갇혀있으면서 물었다. 작은 손 사이로 스파크가 튀었다. 너만 괜찮으면 우리 집에서 살아도 되는데. 권순영은 소파에 누워 있는 내게 다가왔다. 그리고 보안경을 벗고 나와 눈높이를 맞췄다. 나는 권순영의 얼굴을 세세히 뜯어볼 수 있었다.
응. 나 형이랑 계속 연구하고 싶어.
나는 그 대답이 무어라 설명하지 못할 만큼 기뻤다.
권순영의 일에 대한 집착은 나보다 강했다. 하루고 닷새고 열흘이고 틀어박혀 무언갈 만들고 창조하고 찍어내고 부수고 재정비했다. 연구소와 달리 내 방 연구실은 하루하루 평온하게 돌아갔고 권순영은 안식에 만족하는 듯 보였다. 그리고 권순영의 전 멘토들, 그러니까 애인들이 하루걸러 한 번씩 집에 찾아왔다. 그들이 권순영에게 보내던 눈빛을 아직도 기억한다. 나는 망가트리고 싶었다. 집에 있을 권순영 때문에 일에 집중 못 하고 일찍 돌아가는 날이면 언제 왔는지 그들이 권순영의 허리를 끌어안고 있었다. 싫증이 났다. 권순영의 기계들도, 사랑들도. 그것들 앞에서 안주 못하는 나에게도 싫증이. 거지 같게도 권순영은 한 번도 나를 의식하지 않았다. 나는 입술을 씹었다. 내게만 권순영이 필요했으면 좋겠다고 숨죽여 생각했다. 그 결과로 참지 않고 물었다. 왜 안 헤어지느냐고 물었다. 권순영은 놀란 기색이었으나 섣불리는 답하지 않았다… 다만 하루 뒤에 나를 찾아와서 말했다. 내말 뜻이 지금 당장 헤어지라는 요구라면 그렇게 하겠다 했다. 벽에 붙은 뻐꾸기 괘종시계처럼. 권순영은 이상했다.
온종일 지지고 볶고 기어코 살림을 차려 도피할 것만 같던 애인들과 헤어진 권순영은 골방에서 죽어가던 나와 내 연구실을 소생시키고 싶어 했다. 형하고만 살게, 하며 몸을 욱여넣던 것을 나는 말리지 않았다. 권순영이 그랬다. 보세요. 일의 시초가 권순영이지 않은가요. 내 한마디에 이전 사랑들을 죽였으니까. 그러니 잘못된 연애 사슬인지 뭔지 먹이 구조 천문계가 뒤엉킨 건 다 권순영 탓이라고. 무해해서. 무해한 게 유해할 정도로 무해한 권순영…. 너는 바다를 섬기며 하늘을 머리맡에 두고 싶어 했다. 매일 꿈을 꾸었고 우주에서 살 거라 했다.
형, 우리 만나기 전에 사랑한 적 있었나?
무슨 소리야.
처음 봤을 때부터 형이 낯설지가 않아가지고.
무릎을 베고 있던 권순영의 볼을 간지럽히다가 손을 멈췄다. 그런 나 대신 권순영이 손을 뻗어 내 얼굴을 쓰다듬는다. 닿은 손이 부드러웠다.
그랬을지도 몰라, 전생이라던가. 전생이 아니더라도 어디선가 우리와 똑같은 우리가 사랑하고 있을 거야. 나는 그렇게 믿어.
권순영은 매상 모든 신을 섬기었다. 신과 초인적 인류를 사랑했다. 어느 날의 아침을 먹기 전에는 비슈누와 하농에게 감사해했다. 어느 날은 싯다르타. 어느 날은 마리아. 어느 날은 아누비스와 알라. 어느 날은 예수. 어느 날은…… 어느 날은 나를 너무 사랑했다. 영화를 틀어놓고 함께 보자며 손을 잡고 어깨에 기대어 있기만 해도 그것이 사랑의 증표임을 나는 알 수 있었다. 느끼고 있었으니까. 깍지를 꼈다. 손가락 사이마다 권순영의 손가락이 들어왔다.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감정을 묘사하기 위해서인지 단어들이 눈앞에 나타났다. 유柔한 시간, 따듯함, 노을 진 초가을의 오후, 숨 쉬는 모든 생명들의 한적한 하루. 보이는 모든 것들은 우리 둘의 감각이고 행복이었다. 평안함에 눈이 감겨오자 어느덧 영화는 중반까지 흘러있었다. 주인공의 내레이션에 졸음이 쏟아져 그 자세로 눈을 꿈뻑거리는 것을 권순영은 계속 보고 있었는지 말했다. 형, 편하게 쉬어. 그리고는 담요를 가지고 와 내게 덮여주고는 자리를 떴다. 어디 가. 내가 손목을 잡았고 권순영은 잡힌 손목과 내 손을 매만지며 웃었다. 마지막이야. 마지막만 남았어. 권순영은 다시 기계 앞에 섰다. 기계를 만들면서도 귀로는 영화를 듣고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확실히 듣고 있었는지 못 들었는지 알 수 없다. 그렇지만 때때로 삽입곡을 따라 흥얼거렸으니 전자라 할 수 있겠다. 나는 권순영의 흥얼거리는 노랫소리를 자장가처럼 들으며 잠에 취했다.
크레디트가 올라가고 나서야 권순영은 환호를 질렀다. 내가 해냈어. 소리에 깨어난 나는 달려오는 권순영이 품에 안기도록 가만히 있었다.
형 사랑해… 진짜 사랑해. 난 정말 우주에 갈 수 있을 거야.
그건 처음 듣는 사랑고백이었다. 나를 사랑해서 사랑한다 한 건지, 연구를 끝내서 사랑한다 한 건지는 정확하지 않지만 나는 권순영의 말을 모두 들었다. 우리는 한참이나 서로의 뜨거운 몸을 껴안고 있었는데 하필이면 그때 왜 옛날 기억이 선명히 펼쳐졌는지 모르겠다. 일곱 살의 내가 보였다. 야외 수영장에서 수영복을 입은 나는 물 앞에 발을 멈추고 있었다. 그 순간에 아빠가 다가왔고. 아빠는 씩 웃고는 나를 들어 수영장으로 들어갔다. 물 표면에 닿은 발이 본능적으로 움츠러들었다. 아빠는 말했다. 진짜 무서운 건 물이 아니라 공포심이야. 나는 아빠와 함께 물속에 들어가서야 안정감을 가졌다. 권순영을 안으면서 그 생각이 난건 지금도 왜인지 모르겠다.
혹여 내가 진짜 무서웠던 건 지구의 죽음이 아닌 권순영이 나를 버릴까봐였던가?
보라색 달이 지던 밤에 권순영은 다시 연구소로 복귀했다. 반 계절만의 일이었다. 가을 내내 만들어 낸 연구 성과를 가지고 들어왔다. 권순영은 레버에 써넣은 글자를 해석해주었다. 사랑과 휴식은 내가 동시에 갖고 싶은 거야. 권순영에게 알파벳 엘과 알은 방향이 아니라 가치관이었다. 나는 듣고만 있었고 팀원들은 실패작에게 눈길 주지 않았다.
지구는 멸망하지 않습니다! 지구는 멸망하지 않습니다! 종말은 유언비어에 불과합니다! 지구는 멸망하지… 직지지직. 절대 사라지지… 지지직. 지직. 종말은 없다고. 인류의 마지막은 진정한 마지막이 아니라고. 한 노인이 지속적으로 동어를 반복하며 울부짖었다. 소리가 창문 너머로 들려왔다. 이천이십구 년 십이월 이십사일. 성탄절 이브라는 이유로 밖으로 나가지 않았던 우리는 로맨틱에 잼처럼 절여있었을 뿐 바깥세상은 안중에도 없었다. 아, 형…. 내뱉는 신음만이 방안에 쌓였다가 사라졌다. 권순영과의 섹스는 비릿한 정서였다. 옛날 애인들이 권순영에게 연락을 해 왔다. 나와 산다는 걸 알았음에도 그들은 벌레처럼 떨어지지 않았다. 벌레가 연구원들이긴 했으나 나는 그중에서도 나비 애벌레이고 그 새끼들은 지네 유충이었다. 내가 비꼬자 권순영은 핸드폰을 뒤집어 놓고 웃었다. 구차스러운 게 역하지 않아? 피비린내가 안 나서 다행이지. 응당 동의한 권순영은 내 머리카락에 손을 집어넣으며 코를 맞대왔다. 한 번만 더 사랑하니까 만나자 하면 죽일지도 몰라.
우리는 알지 않아도 알았다. 권순영이 만든 결과물은 어차피 실패에 불과했다. 성공이라는 답이 절대 이루어질 수 없는 결과물. 그러나 권순영은 작동이 가당키나 하겠냐는 연구소장의 비웃음을 무시하고 처음처럼 내 집에 눌어붙었다. 나는 토스트를 입에 넣으며 타임머신을 어디에 쓸 거냐고 물었다. 권순영은 한참 고민하는 기색 없이 답을 줬다. 정말로 우주에 갈 거야, 형. 형도 우주가 있지? 그때도 권순영의 눈에는 아직 오색 별이 찬란했다.
멸망 이틀 전날에 권순영은 타로점을 보고 왔다. 그것도 네가 신을 믿는 영역에 포함되는 거야? 권순영의 입술을 깨물었더니 권순영은 잇새로 바람 빠지는 웃음소리를 내었다. 신이 아니라 사람을 믿는 거지. 나는 그 말에 안도감이 들었다. 권순영의 윗옷에 손을 넣었다가 내 열보다 더한 뜨거운 살갗이 느껴졌다. 손으로 전해오는 열기가 좋았는데 권순영은 내 목에 팔을 두르면서 이마를 부딪혀왔다.
일 년만 딱 사라져있을게.
나는 그 얘기를 우주궤도에 처박혀 있겠다는 뜻으로 번역해들었다.
권순영이 연구소로 간 저녁에 나는 일어나지 않았다. 계획에 따라 그날은 권순영이 사라지는 날이었다. 침대 옆자리에 권순영의 흔적이 녹아있어서 쳐다볼 수가 없었다. 나는 가만히 방안을 둥둥 떠다녔다. 공기가 가득했지만 숨을 쉬기가 까다로운 어항 속같이. 나는 일곱 살 때와 다르지 않게 물에서 사는 법을 아직 알아내지 못했다. 타임머신에 오르기 전에 권순영은 전화를 걸 거라 했다. 싫었다. 차라리 전화가 안 온다면, 어떻게 됐든 권순영이 제풀에 꺾여서 그냥 집에 돌아와서 안기기나 했으면 하고 권순영이 섬기던 신들에게 빌었다. 몇 명 이름이 기억 안 났지만 온 힘을 다해 기억나는 대로 기도했다. 그러나 몇 시간이 채 되지 않아 전화는 걸려왔다.
나 없는 동안 잘 지내 아프지 말고. 형 아프면 누가 챙겨줄 거야. 형밖에 없지.
뱉은 문장은 권순영에게 어색했다. 권순영도 그걸 깨달았는지 평소보다 길게 침묵했다.
너는 아직도 우주가 네 정의인 줄 알지.
원하는 답이 아닌 건조하게 건넨 말에 권순영은 처연히 웃었다.
그러게 형은 나를 왜 거두어들어선.
그리고 통화는 끊어졌다. 나는 밖으로 나갔다. 문을 열었더니 방안에 가득 차있던 물들이 쏟아져 나와서 코를 쥐어 막아야 했다. 거의 날듯이 붕 떠서 계단을 내려갔다. 어둠에 잠식한 하늘. 내가 볼 수 있는 유일한 빛은 휘청거리는 가로등 빛뿐이었다. 그날 멸망은 종말 했고 나는 지구에 남았다.
반응 없는 타임머신은 당연히 죽은 게 분명하다. 오늘도 저번 주와 동일했다. 오늘의 역사는 일 년 전, 이 년 전, 그전의 전날들처럼 되풀이돼 기록으로 남을 것이다. 나는 권순영이 볼지 안 볼지도 모르는 언어들을 입력해 우주로 전송했다. 그리고 종이에 편지를 썼다. 기계 옆에 쌓여가는 편지는 셀 수가 없다. 멸망 안 했어. 지구는 아직도 살아가. 내가 보여주면 너는 믿을 거잖아. 만약 권순영이 살아 있다면. 내가 이렇게 말하면 너는…….
응. 나는 형 말이면 믿잖아.
라고 해줬을까. 내가 뭐라 해도 너는 나 믿을 테니까 순영아. 내가 그럴 수 있게 해줘.
보낸 신호에 그러나 답신은 없다.
그리고 나는 잠을 잤다. 얼마나 숨을 쉬었을지 감도 안 오는 시간이 지났음을 깨달은 건 김이 들어왔기 때문에서였다. 오랜만에 본 김은 머리를 갈빛으로 염색했고 키는 더 커진 것 같았다. 그리고 올해 스물여덞으로 사 년 전의 권순영과 같은 나이가 되었다.
눈을 비비고 있는 내 앞에 섰다. 무슨 일이야 오랜만이네. 나는 웃어 보였다. 그런데 김은 오히려 울상이었다.
순영이 형 때문에요.
단호했다.
순영이 형이 말하지 말라 했는데…… 우주는 자기한테 이 순위래요. 그리고 일 순위가…….
알기 힘든 말을 하는 김의 눈썹이 자꾸만 내려갔다. 나는 그런 김의 애처로움에 두 손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팔을 짚어 누웠던 몸을 일으켰더니 김은 강아지처럼 안절부절 어쩔 줄 몰라 했다.
선배한테 말하지 말라 했는데.
순영이가 말하지 말라 했으면 하지 말아야지. 왜 말하는데?
그러기엔 선배가 아직도 너무 모르잖아요.
김은 상기된 목소리로 나를 원망했다.
선밴 아무것도 모르고, 하나도 모르는데 매일같이 여기 와서 순영이 형 기다리는 게 나는 진짜….
그리고 줄줄이 줄줄이, 쏟아져 나오는 김의 말들은 다소 상식 바깥의 이야기라 해독이 긴요했다.
그러니까 순영이 형 일 순위는 선배예요. 순영이 형 과거로 간 거 지구 멸망이든 인구 종말이든 그딴 거 막으려고 타임머신 만든 거 아니라고요. 그 형 영웅놀이 같은 거 못해요. 아니 안 해요. 형은 멸망이 가까워온다는 걸 다 알고 이렇게 될 줄도 전부 예전부터 알았어요. 선배는 순영이 형이 여기 이곳에 왜 왔는지 모르죠? 선배가 그랬잖아요. 기계치인 순영이 형을 저희가 우스개 취급한다고요. 아니요. 인간이 못하는 것을 하기 위해 기계가 만들어지죠. 근데 그 형은… 한참을 기계보다 앞서나갔어요. 누가 봐도. 그런데 선배는 알았어요? 저흰 순영이 형이 전혀 우습지 않았단 말이에요. 애초에 말도 안 되는 가설이니까. 그 형은 멸망 어쩌고 그게 다 거짓이라는 거 알고 가설을 꾸며냈어요. 타임머신을 만들거니까. 멸망은 순영이 형에게 단지 구실이었다고요. 타임머신을 만들기 위한 구실.
그럼 나는 이쯤에서야 새로운 정의가 필요했다. 권순영처럼 가설을 지어야 했다. 권순영이 찾아 떠난 건 우주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가설.
이게 다 선배 때문이에요. 정한 선배 때문에 순영이 형은 자기 시간을 이곳에…….
두 손으로 얼굴을 쓸어낸 김의 눈망울에 어느새 눈물이 어린다.
선배 왜 아직도 기억 못 해요? 선배 순영이 형이랑 고등학생 때 연인 사이였잖아요.
그리하여 태초의 시간이 꼬인다. 김의 말은 사실일 테다. 원래 거짓말을 잘 못하기에. 김이 하는 말은 언제나 명확했기에. 그러니 권순영은 나를 몰랐던 척하느라 꽤 고생했겠다, 나는 울음보단 웃음이 났다. 김은 울었다. 김은 떨어지는 눈물을 닦지도 않았다. 나는 김이 대신 울어주어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눈물이 나지도 않았고 울어야 할 줄도 몰랐다. 수분이 눈 밑까지 차올랐어도 뱉어내는 방법을 잊어버린 지 오래라 그렇다. 권순영은 타임머신 안에서 울었을까. 신을 믿던 권순영은 왜 나를 믿은 것일까.
아직도 기억 안 돌아온거죠? 그럼 이것도 알아줘요.
코를 훌쩍이며 김은 다음 말을 이어갔다.
순영이 형, 선배 만나러 과거로 갈 거래요. 가서 자기가 먼저 고백하겠대요. 그럼 선배 미래가 달라질 거 아니냐고 열심히 사랑해줬어야 하는 건데 못한 게 내내 후회였다고 선밸 보는 내내 괴로웠다고 선배한테 상처를 줬던 게 죄 같아서 무조건 선배 만나서 하고 싶었던 말 꼭 하고 올 거라고.
나는 그제야 떠올랐다. 십이월 이십칠일 그날. 수화기 너머 권순영이 마지막으로 전해 준 말 하나가.
형 있잖아. 형은 믿고 싶은 걸 믿으면 돼.
선배 몰랐잖아요. 알려고 하지도 않았잖아요. 갑자기 찾아와서 이런 말 해서 웃기죠. 저도 알아요. 그런데, 그렇지만 선배도 내 입장 생각해봐요. 도저히 안 말할 수가 없잖아요… 나는 순영이 형이 왜 떠나려고 했는지 선배는 속으로 순영이 형을 왜 그렇게 보내기 싫어했는지 내가 다 안단 말이에요. 아니까, 내가 아니까… 답답하고 괴로워요 지금까지. 대체 나는 어떡하라는 건데요! ……바보 같은 권순영.
양치식물이 있던 자리에는 화분테 찌꺼기만이 남고 식물은 보이지 않는다. 이십 칠일 그날 나는 작별 인사를 할 시간조차 없었다. 그냥. 깨닫고 나니 권순영이 없었다. 잃어버린 것이다. 과거의 나와 현재의 권순영을. 이로써 나는 떠날 준비가 간절해졌다. 세상은 변하지 않았다. 사 년 전과 다름이 없는 저녁이었고 괘종시계 시침이 째각거리는 소리만이 흐르기에. 울음을 멈춘 김은 대신 불규칙적으로 숨을 내쉬며 훌쩍였다. 턱 밑으로 물이 뚝뚝 떨어지는데도 김은 제법 화를 낸다.
바보 같아. 대체 언제로 돌아갈 줄 알고. 그것도 모르면서 어떻게 운을 걸었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