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곳을 돌아다녀 봐도 너는 어디에도 없었다. 해가 길어졌다. 늘어나지 않을 것만 같던 하루가 그제야 단추를 채우듯 그 자리에 꼭 맞게 떨어지자, 얼굴에 그림자가 졌다. 너를 기다리는 시간의 반복이었다.
넘치던 오전의 활기는 오후가 되자 잠에 들듯이 수그러들었다. 학생들은 저마다의 길에 서있었고 나는 소리 없이 멈춰있었다. 모든 사물들이 포물선을 그리며 서서히 느려지더니 동작을 멈추자 어느새 교실로 들어서는 너의 모습만이 남아버렸다. 오랜만에 만나는 너였다. 시간이 흘러 모두가 변화를 찾았을 때, 계절이 바뀌어도 너는 변하지 않았다. 단정히 접은 소매 끝과, 턱 아래까지 잠근 와이셔츠는 아직도 그걸 증명하듯 너 자체였고, 나는 그런 너를 관찰하는 습관이 생겼다. 너의 하루 일과 중 가장 쓸모없는 한 가지는 그 동그란 눈을 접어가면서 나를 노려보는 거였다. 내 자리는 항상 너와 같은 반이었던 오래전부터 창가 옆 자리라서 처음엔 네가 나를 보는지 아님 하늘을 보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그 소소한 의문을 시작으로, 내 속에 너는 어느 순간 가장 큰 화제로 번졌다.
봄부터 너는 종종 내게 말을 걸어왔다.
처음엔 그저 선도부 승철이 형의 후배라고만 알고 있었는데, 그런 네가 맨날 배구 때문에 수업에 빠지는 나를 따라다니기 시작했다. '혹시 나랑 친해지고 싶어 하나'라고 생각했다가도, 너의 이상한 태도에 그 생각을 확 지워버렸다. 너는 내가 무시를 하는데도 줄곧 질문을 했다. 그러다 질문거리가 떨어지면 혼잣말을 했다. 다른 사람한테도 그러는지 궁금했지만 교실에서 너를 볼 수 있는 시간이 적었기 때문에 알아내지 못했다. 하지만 시험날 교실에 올라가 보면 너의 목소리가 복도 전체를 시끄럽게 울리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소문은 발화점이 낮아서 쉽게 번진다. 교내에서는 이미 부승관이 최한솔을 좋아한다는 루머가 퍼진 지 오래였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생각했다. 나한테 말을 거는 사람은 우리 반에 너 하나이니까, 당연하게 퍼질 수 있는 소문. 학교란 원래 그런 곳이니까, 그러나 너는 쉽게 무너질 아이가 아니었다. 그걸 증명하듯 너는 나를 따라다니며 질문을 계속했다. 거의 배구에 관한 얘기, 나는 형식적인 대답만 반복했다. 내가 해 줄 수 있는 이야기는 적으니까, 나는 너만큼, 네가 내게 주는 관심에 반의반도 너에게 주지 않았다. 그러나 잠시였다. 너는 스쳐 지나가려고 하지 않고 머무르려고 했다. 그리고 모든 것에서 좀 더 구체적인 것을 원했다. 그 마음이 너무 커져 감당하기 힘든 상태가 돼서야 결국 우리 사이에 큰 스파크가 터졌다.
여름 방학을 앞두고 있던 어느 날 저녁, 마지막 연습을 마친 뒤 더러워진 강당을 청소하기 위해 물이 떨어지는 대걸레를 들고 가는데 네가 따라왔다.
어?
강당 안에 있던 석민이 형이 내 뒤에서 오는 너를 보고 놀랐다. 너는 집에 아직 가지 않았는지 교복을 입은 채로 한 손엔 우유를 들고 서있었다. 대신 가방은 메고 있지 않았다. 배구는 팀워크가 중요해. 너는 우유를 마시면서 내 옆으로 와서 중얼거렸다. 나도 알아. 네가 뭘 알아, 아무것도 모르잖아 넌. 신경이 쓰였다. 너 배구할 거야? 안 할 거잖아. 나 배구 좋아해. 그 말만 수백 번은 들은 것 같았다. 근데 잘해? 좋아한다는 네 말에 울컥한 나는 되물었다. 못하잖아. 너는 반응이 없었다. 청소하는데 방해하지 말고 가. 가만히 서있는 너에게 내리는 명령이었다. 너는 시선을 돌려 석민이 형을 쳐다봤다. 몇 개월 전이었다면 그냥 넘어갈 일인데, 예민한 너에게 나는 날카롭게 대꾸했다. 내가 일방적으로 무시하는 말을 해도 네가 갈 생각이 없어 보이자, 옆에 있던 석민이 형이 우물쭈물하는 너에게 말을 건넸다.
승관이도 할래?
어 진짜?
대신 한솔이랑 사이좋게 지내면.
승철이 형이 바보 같은 웃음을 지으며 열려있는 강당에 들어왔다. 옆에는 정한이 형과 순영이 형도 함께였다.
제가요? 저 얘랑 친해요. 나는 너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러자 순영이 형이 놀리듯이 말했다. 한솔이랑 승관이 친해 보인 적이 없었는데? 됐어요, 나 얘랑 친해지고 싶지 않거든요? 너의 말에 모두가 웃었다. 평소 친분을 쌓고 지내던 형들이 너를 좋아하는 것 같았다. 나는 힘을 주며 말했다.
비키라고.
너는 살며시 나를 보더니 옆으로 한 발짝 움직였다. 그러자 가라앉은 분위기가 신경 쓰이는지 승철이 형이 입을 열었다.
아니야 둘이 원래 친한데 한솔이가 지금 감수성이 예민한 상태라서 그래, 승관이가 이해해주자. 순영이 형이 따라 말했다. 그래 어쩌겠어.
아 그럼요. 제가 이해해줘야죠 뭐. 너는 뻔뻔하게 말한다. 부끄러워서가 아니고? 정한이 형이 새로운 헛소리를 했다. 아냐, 얘가 고등학교 올라오면서 삐딱해져서 그래. 단호하게 말하는 승철이 형과,
에헤이… 삐딱해졌대요, 삐딱해졌대요!
석민이 형을 따라 하며 놀리는 순영이 형까지, 그들의 말에 나는 어이없이 웃음이 나왔다. 아, 진짜 말이 되는 소리를 해요…….
어떡하냐 한솔이.
한솔이 들켰네?
형들이 재밌는지 자꾸 '어떡해, 어떡하지?' 하며 말장난을 늘어놨고 나는 그런 형들의 행동에 웃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내 표정 변화를 알았는지 의기소침해있던 너도 씩 웃었다.
맞다, 시합하면 보러 갈게 형, 대회 언제지?
다음 달 5일.
다음 달이면 8월이었고 8월 5일은 방학 기간이었다. 아! 학원 안 가는 날이다. 너는 천장을 보며 손가락을 세더니 희미하게 웃었다. 천장에서 쏟아지는 조명이 너의 눈을 적셨다. 또 올 수 있겠네. 아싸! 그때 내 자리 맡아줘! 알았지? 너는 치밀하게 석민이 형한테 자리까지 맡아놓고, 꼭 가겠다고 여러 번 강조하며 약속했다. 자리를 맡아 놀 필요가 없는데도. 이후로도 너와 형들은 수많은 얘기를 했고, 나는 그 자리가 불편해서 의미 없이 강당을 돌아다녔다. 몇 바퀴쯤 걸었을까 세고 있던 숫자를 잃어버린 그 순간, 승철이 형이 아무것도 안 하는 나를 눈치챘는지 내게 들리게끔 소리쳤다. 배고프다, 밥 먹으러 가자. 나머지 형들이 흔쾌히 동의했고, 모두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솔이는 같이 안 가? 저는 문단속하고 갈게요. 정한이 형이 기다려주겠다고 연신 말했지만 집에 가봐야 한다고 정중히 거절했다. 그러나 왜냐고 계속 물어오는 형들 때문에 할 수 없이 여동생에게 저녁밥을 챙겨줘야 한다는 변명을 늘어놓았다. 그래 먼저 가볼게, 안녕. 몸 관리 잘하고, 월요일 연습 때 봐. 형들이 차례대로 한 마디씩 하고는 강당을 나섰다. 그렇게 다들 돌아가나 싶었는데, 네가 남아있었다. '쟤 때문에 불편해서 빠진 거였는데….' 생각에 빠져있던 나를 눈치챘는지 네가 중얼거렸다.
밥은 무슨. 여동생도 지금 집에 없으면서.
어. 학원 다녀.
나는 농구대 위에 서있던 너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그리고 어떻게 알았는지 따위는 묻지 않았다. 궁금하지도 않아서, 그냥 바닥에 쓰러져있던 대걸레를 다시 잡았다.
잘해라.
갑작스러운 말에 다시 너를 쳐다봤다.
경기 잘하라고, 내가 봐줄 테니까.
내가 아무 말 않자, 너는 다시 말했다. 아 이기라고!
알았어.
네가 대답을 요구하는 것 같아서 어쩔 수 없이 알겠다고 했다. 승관이 지금 집가냐? 그때, 멀리서 승철이 형이 소리쳤다. 어? 네 지금 가요. 너는 그 말을 끝으로 내려왔다. 강당 안의 공기는 더웠지만 왜인지 대걸레를 쥐고 있던 손이 시러웠다. 8시가 가까워진 시간, 소등을 마치고 문을 열었는데 웬일인지 네가 있었다. 야. 내가 부르자 너는 꼼지락 대던 손을 멈추고 나를 봤다. 벽에 기대 있던 등이 서서히 떨어짐과 동시에 너와 나의 시선이 부딪혔다. 그런 네가 다가오더니,
아 맞다 그리고, 등교할 때 체육복 입고 오면 벌점이야.
그 말을 하고 학교 안으로 사라졌다.
주말에는 감독님에게 부탁해서 연습을 하자고 했다. 지친 몸이었지만 움직이지 않으면 죽어 버릴 것 같이 숨이 막혔다. 그런데 그게 화를 불렀는지, 공을 받다 그만 손가락을 다쳤다. 놀란 감독님이 나를 병원에 데려다주셨고, 병원에서는 왼손 약지가 금이갔다고 했다. 생각보다 아프지는 않았다. 그만큼 대회 출전이 흐릿해졌을 뿐, 간단한 조치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니 벌써 밤이었다. 아, 내일 학교 가야 하는데, 파도만 한 걱정이 나를 덮쳤다. 대회가 코앞으로 다가왔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꾸준히 해온 일이라 걱정 없이 시합에 임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팀원들의 기대를 저버린 것 같아 마음이 아팠다. 옷을 갈아입으려 라커룸에 들어가자 한쪽 구석에서 누군가와 통화를 하는 석민이 형이 보였다.
한솔이가 세터니까요.
텅 빈 공간에서 그 음성만이 사방에 부딪혀 흩어졌다. 이어지는 형의 다음 말을 듣고 서둘러 밖으로 나왔다. 바람이 불어오는 창문 너머에는 보라색 하늘이 자리 잡고 있었고 아득히 멀어져 버리는 빛이 보였다. 네. 빼고 갈게요. 세터는 대체하겠습니다.
하루하루가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르겠다. 어떻게 세터를 뺄 수 있냐며 따지는 짓도 일주일이 넘어가니까 그만두게 됐다. 손가락이 아닌 손을 부러뜨려도 배구를 할 나인데, 감독님은 나를 말렸다. 한솔이를 생각해서 하는 거라고, 하지만 나를 모르는 건 감독님이었다. 우리 팀에 나를 대체할 만한 인재가 없으니 도대체 누가 내 자리를 대신한단 말인지. 석민이 형한테 연락해봤더니 세터는 곧 대체된다고, 감독님의 결정이라고 어쩔 수 없다고 했다. 그리고 미안하다고도, 형이 왜 미안해해, 내 잘못인데. 전화를 끊고 침대에 누웠다. 연습에 연습에 연습만 하던 나는 밖으로 나오지 않으니 자연스레 혼자가 되었다. 방 안에 숨 쉬는 어항 안의 물고기들과 눈이 마주쳤다.
반성해.
그들이 말을 걸었다.
응, 하고 있어.
쇠퇴하는 밤처럼 나는 숨소리마저 작아지고 있었다.
다음날은 곧장 체육관으로 가지 않고 오랜만에 등교를 했다. 어쩐 일인지 교문 앞에는 네가 서있었다. 점심시간 아니면 종례시간 말고는 볼 수 없었던 네가 해맑은 얼굴로 교문에 서서, 들어오는 선생님들에게 인사를 하고 있었다. 나는 빠르게 걸었다. 그런데도 너의 시선이 느껴지는 것 같아 고개를 숙였는데,
야, 너!
한발 늦었다. 부정하고 싶었지만 너는 나를 보면서 오라고 손짓했다. 내가 다가가자 너는 수첩 같은 걸 꺼내 들더니 작은 손으로 볼펜을 집었다.
학년, 반, 이름.
나는 어리둥절했다.
왜? 교복 입고 왔잖아.
네가 아무 반응이 없자 나는 확신에 찬 목소리로, 이제 체육복 입고 등교 안 한다고.라고 했다. 그러자 너는 그 볼펜으로 내 왼쪽 가슴을 꾹꾹 치며 말했다.
명찰 말이야.
순간 아차 싶었다. 이제야 내가 명찰을 안 달고 있다는 걸 알았다.
한 번만 봐줘.
학년, 반, 이름.
봐줘라 승관아.
처음으로 네 이름을 불렀다.
야, 나는 특기생이잖아 승철이 형은 봐줬는데…….
내가 볼멘소리로 말하자 네가 웃는다.
아니 나는 안 봐줘. 학년, 반, 이름.
나는 어쩔 수 없이 대답했다.
1학년 6반, 최한솔.
너는 작은 손으로 내 이름을 꾹 눌러 적었다. 백 지위에는 내 이름만이 남았다.
다음부턴 명찰 꼭 달아.
네가 내 이름과 학년 반을 다 알면서 아닌 척하는 게 어이없었다. 일부러 그러는 게 분명해서 분했다. 그래서 다음 날은 더 일찍 등교했는데, 다행히 교문 쪽에 아무도 보이지 않아 마음 놓고 천천히 걸을 수 있었다. 그런데 누군가 내 어깨를 쳤다.
명찰!
너였다. 너는 내게 뭐라도 맡겨놓은 듯 자꾸 나타났다.
그래 적어.
나는 자존심을 내려놓고 말했다. 하지만 너는 계속 고집을 피웠다. 학년, 반, 이름.
최한솔….
너는 애써 웃음을 참으며 말을 이었다.
학년, 반.
아, 1학년 6반…….
너는 손에 쥔 펜으로 내 이름을 또 끄적였다.
1학년 6반 최한솔, 명찰 달아.
그리고 갈 줄 알았는데, 너는 한 마디 말을 더 한다. 난 네가 배구하는 거 싫어.
그 후로도 나는 교복을 입고 등교했다. 아침운동은 7시부터 시작이라 그 시간마다 나는 학교에 있었다. 아픈 손 때문에 운동을 하지는 못해도 7시 등교가 버릇이었다. 그리고 너는 그때마다 있었다. 일주일간 우리 둘의 작은 신경전은 마치 습관처럼 이어졌고, 너의 수첩에 나의 이름이 다섯 번 적히자, 방학이었다. 방학이라는 이름의 지옥이 시작되었고 나는 턱밑까지 차오른 두려움을 애써 무시했다. 그리고 너는 대회에 오지 않았다. 나는 관중석에서 가끔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너의 모습을 찾았지만, 약속과는 달리 네가 보이지 않았다. 나는 후반 경기가 남았음에도 그 자리를 나왔다. 시합은 상대팀에게 한 세트 가까이 뒤진 점수로 마무리되었다. 허무한 게임이었다. 집에서 형들에게 그 소식을 접한 나는 아무 감정도,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렇게 2주가 지났다. 방학의 절반이 사라졌고, 우리 팀은 연습을 위해 모였다. 예상대로 우리는 감독님께 꾸중을 들었다. '학교 설립 이래 가장 부끄러운 실수'로 말문을 연 감독님이 마지막으로 나만 따로 불러내셨다. 나는 그의 말대로 교실로 향했다.
한솔이는 잘하잖아.
감독님의 질문인 듯 질문 아닌듯한 말에, 웃음이 나왔다. 네. 응, 본인이 잘하는 것도 잘 알고. 감독님이 웃으면서 머리를 쓰다듬어주시더니 다음 말을 이어갔다. 그래서……. 어떻게 할 거니? 그 말에 머리가 하얘졌다. 어떻게 할 거니. 이 여섯 글자에 들어간 수많은 의미. 그건 앞으로 내가 할 일이 뭔지, 어떻게 살 건지에 대해서가 아니었다. 내가 망쳐놓은 내 인생을 어떻게 할 건지 묻는 거였다. 나는 한솔이가 걱정돼서 그래, 왜냐면 감독님은…. 감독님은 삼십 분가량 나와 대화했다. 아니, 나는 거의 말을 안 했기에 대화라고 하기에도 뻘쭘한, 그 이상한 상황에서 더 어이없는 건 아이러니하게도 네가 떠올랐다는 것이다.
'난 네가 배구하는 거 싫어.'
저 계속할 거예요.
소리가 멈췄다. 웃는 얼굴을 하다 이내 무표정으로 싹 바꾸고 담담하게, 네가 배구하는 게 싫어.라고 말하는 너의 얼굴이 아른거렸다.
해야죠, 어떻게든.
감독님의 말은 나에 의해서 끊어졌다. 나는 묻지도 않은 말을 했다.
어렸을 때부터 해오던 일이잖아요. 할 수 있는 게 그거밖에 없었으니까, 저 지원해주신 것도 감독님이시잖아요.
순간 감독님의 얼굴이 흙빛으로 변하는 것을 봤다.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표정. 그는 자신의 감정에 너무나도 솔직했고, 표정으로 모든 것이 다 드러났다.
'미안한데, 아니야.'
이거나,
혹은.
'난 불쌍해. 네가'라고 말을 하고 싶은 얼굴.
감독님도 제가 배구하는 게 싫으세요? 나의 말에 그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저 키우고 싶지 않으세요? 최고의 세터로 프로 뛰는 거 보고 싶지 않으세요? 적막이 흘렀다. 한솔아, 넌 충분히…. 왜요? 저 잘하잖아요, 누가 봐도 프로 들어갈 텐데 그럼 다 된다고요. 알잖아요, 감독님이 저보다 저를 더 많이 아시잖아요. 이제 곧 가난도 끝이고, 남들 앞에서 자존심 끌어모아 내세우는 짓도 끝이고, 죄책감 속에서 사는 것도 끝이에요. 프로만 들어가면요. 다 끝이에요. 다. 네? 이 지옥 같은 학교만 졸업하면…. 그러나 나는 더 이상 말할 수 없었다. 감독님의 시선은 내가 아닌, 다른 곳을 보고 있었으니까, 활짝 열린 교실 문 앞에 네가 서있었다.
무, 문제집을 어디다 뒀더라….
갑자기 들어온 너는 허겁지겁 책상 속을 뒤졌다. 그러고 보니 그 책상엔 가방이 걸려있었다. 그게 너의 것이 맞는 듯 무언가를 찾는 네 손이 빨라졌다.
한솔아 다음에 얘기하자. 감독님은 그 말을 하곤 밖으로 나갔다. 교실에는 보이지도 않는 문제집을 찾느라 열중하는 너와 그런 널 보는 나만이 남았다. 또다시 적막이 흘렀다. 너는 나를 무시했다. 내가 너를 무시하듯, 다 봤으면서. 내가 얼마나 배구에 갈망하는지를 알면서.
부승관.
왜.
내가 부르는 소리에 너는 한 박자 뒤늦게 반응했다.
나 너한테 할 말 있어.
너의 손목은 단단했다. 한 손에 다 들어오고도 남는 그 손목을 잡고 우린 교실을 빠져나왔다.
그만 놔줘. 그 말에 잡고 있던 손목을 놨다. 붉은 자국이 길게 남아 도드라져 보였다.
너 저번에 했던 말 진심이야?
뭐가.
내가 배구하는 게 싫어?
응.
너는 잠시의 망설임도 없이 말했다. 가로등 빛에 그림자가 진 이마 아래로 동그란 눈만이 날 향해 빛났다.
왜? 왜 싫어?
내가 싫으니까 싫은 거지
어이가 없었다. 그렇다면, 여태까지 날 따라오고 말 걸고 쫓아다닌 건 다 뭔데. 연습하는데 나타나서는 이리저리 기웃거리기 나하고.
그럼 내가 배구하는 게 싫으면 나도 싫어해야지. 싫으면 피해 다녀야지 왜 자꾸 따라다녀?
바보야 그거랑 그거랑 같냐?
그럼 뭐가 뭐랑 같은데?
네가 싫은 건 아니라고.
나랑 친해지고 싶어?
너는 말이 없었다.
그래서 그런 거야? 그럼 말해, 친구 하자고. 너랑 친구 하고 싶다고, 처음부터 그렇게 말하지 그랬어, 다른 애들은 내가 뭘 하든 신경 안 써. 그게 보통이야. 너처럼 아무 목적 없이 따라다니지 않는다고, 알아?
너는 고개를 푹 숙이더니 한숨을 쉬었다. 그 모습이 꼭 버려진 강아지 같아 마음이 아파왔다. 내가 너무 몰아붙였나 하는 생각에 변명하듯 중얼거렸다.
아니 네가 자꾸 말 거니까…….
야 최한솔.
너에게서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낮은 목소리였다.
너 졌다며.
어디서 들었을까, 나는 누구에게도 말한 적이 없는데.
갑자기 왜 그 얘기야.
그 팔은 왜 다친 거야? 누구랑 싸웠어?
그냥 다쳤어, 그래서 시합도 못 나갔고. 그래서 졌어.
하…….
너는 씁쓸하게 비웃었다.
왜. 그게 궁금했어? 그거면 다야?
네가 말하기를 기다렸다. 내가 한 말에 대답하기를 바라면서, 하지만 너는 또 말이 없었다. 나는 허공으로 난사된 내 목소리가 끔찍했다.
너 다른 사람한테도 그렇게 말해?
한참 후에야 네가 반응했다.
아니지, 너 승철이 형한테는 그렇게 안 말하잖아, 석민이 형한테도 그런 식으로 안 하잖아. 순영이 형한테도, 정한이 형한테도, 그렇게 화 안내잖아. 왜 나한테만 그래? 왜 내 앞에선 안 웃어? 왜 내가 다가가면 그런 눈으로 쳐다봐?
할 말이 없었다. 아니, 없는 게 아니라 안 나왔다. 내 입이 아닌 너의 입에서 맞는 말만 나와서, 나는 목소리조차 잃어버린 것 같았다.
내가 동갑인 게 싫어? 아님 같은 반인 게 싫어?
수많은 생각이 머릿속을 스친다.
그냥 내가 싫지?
아, 이건 아닌데.
머릿속에서 이건 아니라는 확신이 들었다.
아니야.
갈라진 목소리가 나왔다.
거짓말.
야.
부르지 마.
부승관.
부르지 마… 내 이름, 듣기 싫어.
너는 작게 읊조리면서 내 손을 내쳤다. 덕분에 나도 모르게 내가 너의 팔을 잡고 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공기에 노출된 손가락 사이사이마다 찬 공기가 들어왔다. 아팠다. 쓰라렸다. 내 손바닥이 차가웠다. 너는 나를 죽일 듯이 노려봤다.
난 네 친구도 뭣도 아니니까.
종례를 알리는 벨이 울렸다. 내 인생에서 가장 길고 더러웠던 최악의 방학은 끝났다. 맨 뒷자리에 앉아있는 나를 아이들은 신경 쓰지 않는다. 단지 지나가는 말로, '최한솔 손 다쳐서 못 나갔대'라는 소리가 간간이 들려올 뿐이었다. 나는 그냥 1학년 6반 최한솔이었고, 변하지 않았다. 내게 이름 같은 거, 반, 번호 같은 거, 큰 의미 없었다. 그냥 '배구하는 애' 중 한 명이었고, 그게 내 자리였다. 나를 알고 싶어 하는 부류 중에서는 낯선 얼굴에 대한 호기심이 절반 이상이었다. 혼혈이라는 특징 아래 그들의 눈빛만 봐도 알 수 있다. 그런데 내가 그들이 원하는 만큼의 값어치를 해줄 리가, 그런 부류는 데게 나를 알고 나면 흥미를 잃고는 다른 곳에 둥지를 튼다. 얘 좀 이상한 거 같아,라고 생각하면서. 그러면 남은 자리는 참혹해진다. 어렸을 때 연애가 그랬고, 주변 어른들이 그랬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내게 관심이 없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최한솔, 너 선생님이 남으래.
가방을 싸들고 얼른 뛰쳐나오려고 했는데 누군가 말했다. 누가 말했는지 알 수도 없는, 신원불명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나는 할 수 없이 가까이 있는 자리에 앉았다. 아이들이 우르르 빠져나가고 교실에는 나 혼자였다. 책상 위로 양 팔을 올리고 눈을 감았다. 어둠에 잠식되는 건 쉽다.
한솔아.
익숙한 목소리가 속삭였다.
한솔아.
몸이 좌우로 흔들렸다. 눈을 뜨고 고개를 들어보니 순영이 형과 승철이 형이 내 앞에 있었다.
너 뭐해? 왜 집에 안 가.
아… 선생님이 남으라고 하셨는데.
뭐? 지금이 몇 신데.
형 왜 여기 있어요?
아아, 승관이가 내 문제집 빌려갔는데 아직 안 돌려줘서 받으러 왔어.
승철이 형이 두 검지 손가락으로 네모를 그리면서 말했다.
문제집이요?
그걸 말하는 건가, 감독님과 내가 단 둘이 있던 교실에서 네가 찾던 그 책. 스며들어오던 바람 사이로 노을빛에 물들인 너의 당황한 얼굴이 떠올랐다.
얘 어디 갔지? 교실에 있겠다고 했는데.
부승관이요?
승관이 자리 어딘지 알아?
순영이 형이 물었다.
아니요.
네 자리는 어디였더라. 이 좁은 교실에서 너는 어디 있었는지 아무런 기억도 나지 않았다.
저 몇 시간 잤어요?
야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 얼른 집에 가, 늦었잖아. 안 늦었어?
괜찮아요. 형은요?
나 윤정한이 기다리고 있어서 가 봐야 돼.
그럼 같이 가요, 저 지금 할 일도 없는데.
어 그럴래?
아니야. 우리 어차피 공부할 거라서, 재미없어.
순영이 형이 기쁜 반응을 보였지만, 승철이 형은 단호했다. 순영이 형이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승철이 형은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들더니 전화를 걸었다.
얘 전화도 안 받는다. 핸드폰 꺼져있네.
제가 오면 연락할게요.
왜? 집에 안 가?
순영이 형이 말했다.
좀 더 있으려고요.
알았어. 우리 먼저 갈게.
야 밖에 춥다, 이따 갈 때 감기 걸리지 말고.
승철이 형이 내 몸까지 걱정하며 돌아갔다. 이미 눈앞에 보이는 세상은 밤이었고 창문 너머로 깜깜한 어둠 사이마다 전구만 한 빛으로 차고 넘쳤다.
여기 내 자리인데.
머리 위로 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 자리야.
누군가 내 어깨를 밀어내고 있었다. 자연스럽게 고개가 같이 들렸다. 아, 내가 또 자고 있었구나. 환한 형광등 불빛이 눈을 자극했다.
나오라고 너.
그제야 네 모습이 보였다. 너는 잔뜩 뾰로통해져서 뭐라고 말했지만, 졸음에 취해있는 내가 그걸 들을 리 없었다.
야, 너 순영이 형하고 승철….
어. 아까 만났어.
네가 내 말을 끊었다. 내가 몽롱한 기분으로 자리에서 일어나자, 너는 기다렸다는 듯이 책상 속에서 몇 권의 책을 꺼내더니 모조리 가방에 넣었다. 무거워진 가방을 낑낑거리며 메는 너는 작은 동물 같았다.
도와줄까.
간신히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참으며 입을 열었다.
아이씨, 이거 왜 안돼!
너는 간신히 가방을 멨지만 왜소한 어깨 때문인지 가방끈이 자꾸 내려왔다. 한쪽을 올리면 반대쪽이 내려와서 곤란한 상태가 되풀이되었다. 이것도 못해. 속으로 중얼거리며 너를 돌려세우고 가방끈을 조였다. 내 손이 너의 어깨와 옆구리를 스치자, 너는 몸을 살짝 비틀었다. 위에서 내려다보니 너는 나보다 한 뼘 이상 작았다.
집에 가?
집에 안 가.
공허한 대답이었다. 그래도 말은 안 할 줄 알았더니, 의외였다.
어디 갈 거야?
왜 나 따라오게?
네가 몸을 돌려 나를 봤다.
나 따라오지 마, 난 누가 따라오는 거 진짜 싫어해. 최한솔.
너는 일부러 내 이름을 나지막이 불렀다. 최한솔. 최한솔. 네가 부르는 최한솔은 내가 아니라는 착각이 들었다. 듣기 싫어졌다. 네 입에서 내 이름이 나오면 안 될 것처럼, 최한솔. 부승관. 세 글자, 딱 그 정도의 관심만 있었는데.
그만 불러 내 이름.
내가 말하자 너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뭐?
네가 네 이름 부르지 말라며, 그럼 너도 내 이름 부르지 마.
어떻게 한 번을 안져?
어이없다는 얼굴로 나를 흘겨보는 너, 우리는 비탈길을 내려갔고 나는 네 옆을 벗어나지 않았다.
독서실 안은 보일러가 고장 났다고 해도 믿을 만큼 추웠다. 너는 이 독서실에 자주 오는지 주인아저씨와 친근히 인사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아무도 없는 공간이 나왔다. 그곳에 너와 나, 단 둘만이 존재했다. 가만히 서있는 나와는 다르게 너는 바로 구석에 자리를 잡더니 필기구, 공책, 교과서, 수험서를 한 아름 꺼내놓았다.
그거 다 공부할 거야?
오른쪽에 쌓인 책들이 적어도 열 권은 넘어 보였다.
나는 한 번에 그렇게 많이 못하는데.
나는 옆 자리에 앉아 책상 위에 엎드린 채로 너를 올려다봤다. 신경도 안 쓰이는지, 너는 능숙하게 각기 다른 색깔의 펜을 집었다.
설마 이거 오늘 다 하고 갈 거야?
너는 대답 대신 이어폰을 꼈다. 핸드폰에서 음악이 재생되자, 책도 펼쳐졌다. 너의 손이 빠르게 책장을 넘기는 모습을 보다가 네 귀에 꽂혀 있는 이어폰을 잡아당겼다.
이만큼 공부하면 몸 상하겠다.
내 손에 있던 이어폰이 스르륵 빠져나갔다. 나를 한번 노려본 네가 신경질적으로 선을 잡아당겼고, 핸드폰과 이어폰을 분리했다. 그와 동시에 전화가 울렸다. 네 핸드폰에서 나는 소리였다. 우리는 동시에 핸드폰을 봤다. 발신인 이름은 '미친개', 간결했다.
자판기에서 음료수 캔이 나뒹구며 떨어지는데 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멀리서 들리는 쿵, 소리에 네가 내 쪽을 돌아봤다. 아, 들켰다. 나는 손을 뻗어 출입구에 떨어진 차가운 콜라캔을 집었다.
아니요, 네. 네. 이제 거의 늦게 와요. 아니요, 중간고사요.
내 신경이 온통 네 쪽으로 쏠렸다.
싫으세요?
네 손의 전화기 너머로 낯선 남자가 소리를 지른다. 너는 한쪽 귀를 막았다. 너의 옆모습만 봐도 얼굴이 찌푸려지는 게 보였다.
올렸어요, 저번에 모의고사 점수 말씀드렸잖아요. 엄마는요? 반대쪽 손이 거칠게 얼굴을 쓸어내렸다.
이번 주말에 시간 없어요.
너는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저는 진짜… 아저씨가 싫어요.
너는 전화를 끊고 나한테 왔다. 붉어진 눈이 뚫어지게 나를 쳐다보다 사라진다. 네가 내게 죄책감을 주었다. 몇 시간쯤 지났을까, 어느새 새벽이었다. 점점 졸음이 쏟아졌다. 옆에서는 서걱서걱 거리는 연필 소리만이 반복적으로 들려올 뿐, 전혀 생산성 없는 상황이었다. 지겨워진 나는 읽고 있던 소설책을 덮었다.
'나 당분간 배구 안 해. 점심 같이 먹자.'
네 책에 침범하여 글씨를 남기자 너는 즉각적으로 반응했다.
이제 너 안 따라다녀, 공부해야 돼. 너도 알지? 나 여기서 망하면 우리 집도 망하는 거.
'모르는데'
너는 내가 쓴 글자를 읽더니 한숨을 쉬었다.
방금 다 봤잖아. 미친개 지랄하는 거. 눈치 없어? 그니까 너도 이제 네 거나 해. 나도 미쳤지, 배구만 하는 놈이 뭐가 좋다고.
'너는 공부만 하잖아' 그리고 밑으로 한마디를 더 썼다. '재미없어'
너는 흘깃 보더니 무반응으로 일관했다.
'미친개가 누구야?'
그 질문을 쓰자마자 네가 날 똑바로 쳐다봤다.
야, 너 내가 목적 없이 널 따라다닌다고 했지, 하나만 묻자, 이 세상에 목적 없이 하는 일이 있다고 생각해?
네가 내 말에 대답 안 해주니까 나도 말 안 해.
나의 말에 너는 입술을 꽉 다물었다. 이걸 어떻게 말할까, 고민하는 네 모습이 보였다. 그러나 너는 의외로 쉽게 털어놨다.
우리 새아빠. 내가 세상에서 제일 싫어하는 사람이야.
그 사람이 너 괴롭혀?
응. 아니, 우리 가족. 우리 집안을 건드렸어. 그래서 공부하는 거야. 그런 사람한테 지지 않으려고, 이게 내 목적이야. 됐지? 나 이러려고 태어났어. 성공해서 미친개 짓밟고 나오는 거, 그 집에서 우리 가족 손잡고 도망쳐 나오는 거, 그거 이루려고 태어났다고. 나는 아무 말 없이 네 이야기를 들었다. 짧은 시간이었음에도 너의 얼굴은 금방 발갛게 달아올라있었다
말도 안 되냐? 그래 내가 말하면서도 어이없다. 자랑스러워해. 나만 아는 비밀 너한테 말했잖아. 이제 너도 아는 비밀이잖아.
이제야 깨달았다. 나는 네가 너무 여린 게 싫다. 너는 누구도 알 수 없게끔 어느새 다가와서는 어느새 상처를 받을 만큼 여렸다. 나는 그런 너를 무시했다. 내가 여기 있다고 구원해 달라는 너를 내가 일방적으로 밀어내고 있었다. 결국 너는 나의 상처였다. 네가 필통을 열고 지우개를 꺼냈다.
그니까… 너는 그냥 나한테 신경 끄고 네 할 일이나 하면 된다고. 괜히 나 때문에,
어떻게 자랑스러워해? 너의 말을 끊었다.
내가 어떻게 자랑스러워해야 하는데?
너는 책장을 넘기려던 것을 멈추었다. 네 손에 잡힌 한 장의 종이가 갈 곳을 잃고 작게 떨린다.
넌 그런 얘길 하면서 신경 쓰지 말라는 말이 잘도 나온다.
너는 입술을 핥았다. 감정을 담은 작은 말에도 크게 휘둘리는 네가 애처로웠다. 아, 너는 한 번도 사랑을 받아본 적이 없구나. 이게 내가 내린 결론.
부승관.
너는 아무 말도 안 했다.
나 아직도 네 이름 부르지 마?
힘없이 종이가 넘어간다.
아니.
승관아.
너는 책을 덮었다.
대답해줘.
응.
너는 고개를 들고 나를 봤다.
네가 아까 물어본 거, 이 세상에 목적 없이 하는 일이 있냐고? 아니, 없어. 그래서 나 네 얘기 더 듣고 싶어. 아무 얘기든 좋아 넌 무슨 말이든 해. 들어줄게. 여태 내가 무시했던 것보다 더 많은 관심을 줄게. 내 귀가 닳아 없어질 때까지 계속 말해 네가 하고 싶은 말 다.
너에게서 눈물이 한 방울씩 떨어지는 건 순식간이었다. 너는 고개를 숙이고 울음을 참았다. 옆에서 보는 네 얼굴은 여전히 불그스름해서 어린아이 같았다.
왜냐면 내 목적이, 앞으로 너랑 친해지는 거야.
너는 그대로 책상에 엎어졌다. 아마도 우는 듯했다. 너를 달래줘야 할 것 같아 나는 너의 떨리는 어깨를 한 손으로 토닥거렸다. 부승관. 사랑받길 원하는 부승관. 나의 관심을 바라는 부승관. 너의 이름을 속으로 되뇌면서. 조금의 시간이 지나자 진정이 된 듯 울음이 멈췄다. 너는 엎드린 채로 고갤 돌려 나를 봤다. 눈 밑으로 반 이상 가려진 얼굴이었지만 터질 것 같이 빨갰다. 네가 상체를 일으켜 펜을 손에 쥔 채로 포스트잇 한 장을 뜯었다. 그 네모난 종이에 뭔가를 적더니 여러 번 접어서 내 손에 쥐어주었다. 내가 그것을 열어보려고 하자, 네가 내 손을 잡아 저지했다. 그 후 너는 빠르게 짐을 챙겨 일어났다.
같이 가.
내 말에 너는 도리도리, 고개를 저었다.
나 간 다음에 나와.
알았어.
너는 잠시 머뭇거리면서 눈치를 보다 말했다.
안녕.
응. 안녕.
네가 잠긴 목소리로 인사를 했다. 나는 그렇게 돌아가는 너를 끝까지 지켜보다가 주머니 속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깜깜한 암흑 속에서 불빛이 비친 포스트잇에 적힌 말은 한 줄이었다.
'다정하게 굴지 마 나 망가져'
먼저 망가진건 내 쪽이었다. 나는 쉬는 시간마다 네 자리로 갔다. 네가 받아들여 줄 때까지 다정하게 굴고 싶었다. 그러나 너는 내가 다가오면 당황스러워했다. 그 모습이 예전의 너답지 않아서 낯설었다.
승관아 뭐해?
나는 네 앞자리에 앉았다.
너 연습 안 해?
응. 안 하는데
왜 안 하는데?
네가 쓰던 펜을 뺏었다. 하지만 네 책은 여전히 쓸 공간 없이 너의 글씨로 가득해서 빈 공간을 찾기 어려웠다. 나는 몇 장이나 넘겨서 너의 몸 근처 가까이에 있는 조그만 여백을 발견하고 그곳에 글씨를 썼다.
'그냥'
네가 신경질을 내며 펜을 뺏었다.
지금만 안 하는 거야, 앞으로도 안 하는 거야? 너네 부모님이 걱정도 안 하셔? 선생님이 화 안내?
다시 화 잘 내는 너로 돌아온 것 같아 기뻤다.
지금만 안 할 거야.
지금은 뭐할 건데
너랑 대화?
내가 빙그레 웃으면 너는 짜증을 냈다.
진짜 신경 쓰이게 하지 말라고
어떡하지, 앞으로 계속 신경 쓰이게 할 건데.
너 진짜 미쳤어? 왜 자꾸…!
네가 급하게 주변을 돌아봤다. 나는 몸을 일으켜 네 귀에 속삭였다.
끝나고 같이 갈 거지?
그날은 하굣길에 너와 발을 맞춰 걸었다. 너와 이렇게 많이 대화한 적은 처음이었다. 나는 친구란 게 없어서, 누군가와 반말을 하며 깊은 대화를 하는 내 모습이 어색하게 느껴졌다. 너는 너의 가족에 대해 얘기했다. 어렸을 때부터 엄마와 아빠 사이가 워낙 안 좋았다고, 커가면서 이러다 정말 혼자 남겨지는 거 아닐까 하는 생각에 매일 밤을 울었다고 했다. 새아버지가 나타났을 때 다시 행복할 거라는 희망만 있었는데 희망을 품을수록 절망과 가까워진다고, '태어날 때부터 가난한 자는 죽을 때까지 가난 속에 살아'라고 말하는 네 얼굴이 처연했다. 어머니와의 연애 초, 늘 어머니를 다정하게 대해줘서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그 새아버지라는 사람은 가족들의 기대를 저버렸다고, 그렇게 표현했다. 나는 아직도 새아버지랑 같이 사냐고 물었고, 너는 그 사람은 아예 집에도 잘 안 들어와서 뭘 하고 다니는 지조차 모르겠다고 했다. 다른 여자랑 같이 다니는 모습을 수도 없이 많이 봤다고. 학교 앞에서, 집 앞에서, 공원에서, 너의 기억 속에 그는 늘 네 주변에 있었고 너는 가까이 있는 그 그림자에 질식해 버릴 것 같다고 했다. 그래서 상처를 받은 어머니를 기쁘게 해 줄 방법은 더 열심히 공부하는 것밖에 없다고.
너 기억나?
네가 물었다.
나 애기 때부터 너 알고 있었다.
뭐?
나는 그 말에 기억을 더듬으려고 했으나 기억해낼 새도 없이 네가 계속 말했다.
이럴 줄 알았어. 너 어렸을 때부터 기억력 무지 안 좋았다고.
언제? 어디서?
기억 안 나냐?
어. 하나도 안나.
내가 하나도 모르겠다고 하자 너는 술술 얘기해주었다. 자기가 몇 살인지조차 모르는 나이었을 때 1층인 피아노 학원 위 2층에 살았었고, 나는 그 학원 수강생이었다고. 그 말을 들으니 기억의 조각이 얼핏 맞추어졌다.
너 형인 줄 알았어, 항상 혼자 와서 조용히 피아노만 치고 갔으니까.
원래 나는 피아노가 싫었다. 남들 다 피아노 학원을 다녀서 나는 절대 안 다니겠다고 혼자 다짐했는데, 아빠가 억지로 시켜서 할 수 없이 다녔다. 그런데 다니다 보니 흥미가 생겨서 계속 쳤다.
너 진짜 잘 쳐서 맨날 가르쳐 달라고 했었는데…….
기억이 났다. 나는 몸을 돌려 너를 마주 봤다. 너의 얼굴은 그때 그 피아노 학원에서 항상 봤던 그 아이랑 닮아있었다.
'형 피아니스트예요?'
'나도 가르쳐주면 안 돼요?'
'와 형 진짜 잘생겼다.'
선생님한테 물었어, 저 형은 뭐하는 사람이냐고 피아니스트냐고, 선생님이 그러시더라 '형이 아니라, 승관이랑 나이 같아. 둘이 친해졌으면 좋겠다. 가서 인사해볼래? 안녕 한솔 아라고' 그때 알았어. 너는 최한솔이고 같은 나이라는 거.
너는 오래전부터 나를 알고 있었다. 네 시간 속에 항상 내가 있었는데 나는 바보같이 그걸 눈치채지 못했다.
그러다가 얼마 안돼서 너 이사 갔잖아. 한 3개월인가? 아씨, 그때 나 진짜 너한테 하고 싶은 말 있었는데.
뭔데?
네가 말을 하려다 멈칫한다.
멍청아. 그게 기억이 나냐? 엄청 어렸을 때거든.
너는 도리어 화를 냈고 몸을 돌려 가던 길을 갔다. 유년의 기억이 떠올랐다. 너는 학원을 다니는 것도 아니면서 항상 내려와서는 학원 내부를 쏘다녔다. 그에 비해 나는 좁은 레슨실에서 피아노만 치고 있었고 친구를 만드는 데에는 당연히 흥미 없었다. 그 외로움이란 벽을 부수고 내 방에 들어온 건 네가 처음이었다.
'안녕 한솔아.'
'나는 승관이야 부승관.'
'성이 좀 특이하지?'
'우리 친구로 지낼래?'
'내 이름 뭐야.'
'몰라'
'지난번에 알려줬잖아'
'승관이라고. 부승관.'
너랑 했던 대화들이 필름을 되감는 것처럼 시간을 거슬러 밀려왔다. 부승관이라는 존재가 이렇게나 가까이 있었는데, 너는 이 기억이 사무치도록 그리웠나 보다. 우리가 함께했던 시간들을. 눈 앞에 너는 한참이나 멀리 있었다. 나는 뛰어가서 멀어져 가는 너의 어깨를 붙잡았다. 그날 나는 처음으로 너를 집까지 데려다주었다. 우리는 가는 동안 더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그냥 소소한 이야기였다. 친구끼리 누구나 할 수 있는 대화였고 그동안 어떻게 살았는지에 대한 회상이었다. 그렇지만 이대로 친구로 지내기는 싫었다. 너와 있으면 다른 분위기가 마음을 간지럽혔다. 나는 이미 달라진 그 감정으로 너를 안았다.
따듯하다.
내 말에 밝게 웃는 너의 웃음소리에 기분이 좋았다. 나는 따뜻한 네 품을 더 파고들었다. 너는 약간 당황해하면서도 내 등에 손을 올렸다. 그리고 열심히 토닥거렸다. 영원히 너랑 있고 싶다. 너와 있으면 이렇게 좋은데 어쩌지라는 고민이 생길 정도였으니까, 그날의 문제가 있다면 나는 나답지 않게 너무 행복했던 것이고 행복에 취해 나 자신을 잃어버렸다는 것이다.
나는 우리 엄마가 행복해졌으면 좋겠어.
누워있다 말고 일어난 네가 말했다. 날씨가 변한 탓에 텅 빈 체육관 안은 쌀쌀했다.
근데 그게 이루어질 거 같아, 곧 이혼하거든. 아싸, 동네 사람들 우리 엄마 아빠 이혼해요!
아하하. 내 웃음소리와 너의 목소리가 온 공간에 울려 퍼졌다. 이걸로 미친개를 아빠라 부르는 것도 처음이자 끝이겠지, 너는 돌아서며 웃었다. 내가 몸을 일으켜 앉자 네가 가까이 다가왔다. 너는 양손으로 내 어깨를 잡고 엉거주춤 앉아서는 나와 눈을 맞췄다.
놀러 갈래?
네가 기대하는 눈빛을 지었다. 하지만 이따가 연습이 있는데. 내가 망설이자 너는 내 팔을 잡아당겼다
야 최한솔. 내가 놀고 싶다는데….
너의 한마디에 충동적으로 네 손을 잡았다. 우리는 깍지를 꼈다. 내 빈틈 사이마다 너로 채워졌다.
나 너한테 보여주고 싶은 거 있어.
우리는 밖으로 달려 나갔다. 답답한 이 곳을 떠나 신선한 공기를 마시기 위해서. 있지. 너한테 꼭 보여주고 싶은 거 그건 바로….
보라색 하늘. 계절과 맞지 않게 하늘은 보라색이었다. 고즈넉한 저녁 분위기와 건물마다 켜진 조명과 엷게 올라오는 노을이 그 신비감을 더했다. 옆에서는 너의 감탄사가 들려왔다.
예쁘다.
연습하다가 답답해서 바람 좀 쐬려고 밖에 나가면 가끔 이런 하늘이 있어. 그럴 때마다 기분이 이상해.
왜?
너무 좋아서.
우리는 동시에 서로를 바라봤다. 그리고 밤이 될 때까지 같이 있었다. 버스를 타고 옛날에 살던 동네에 가서 둘이 영화도 보고 맛있는 음식도 먹었다. 평범한 학생들처럼 그렇게, 그날 하루를 온통 너와 함께 보냈다. 내 인생에서 가장 밝은 밤이었다.
휴대폰에 찍힌 부재중 전화가 다섯 통. 모두 감독님으로부터였다. 한 밤중에 감독님한테 연락이 온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말도 없이 연습에 빠져서라고 하기엔 감독님 답지 않은 너무 과장된 행동이다.
늦었구나.
집에 들어서자 거실에 있던 아빠가 밖으로 나왔다.
감독님이 그러시더라, 너 보낸다고.
처음 듣는 얘기였다.
네?
몰랐니? D대학 배구단에 스카우트되었다며.
그 순간 내 귀를 의심했다.
훈련, 미국으로 간단다. 준비해야겠던데?
우리 학교 배구단은 원래 좀 형편없었다. 실력이 아닌 다른 쪽으로, 인원도 적어서 시합 참가는 물론 국가에서 지원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있었다. 감독님은 내가 중학생 때 처음 만났는데, 나보고 끈기가 있으니 잘할 거라면서 지원을 아낌없이 해주셨다. 그 덕에 나는 감독님의 결정을 전적으로 따랐다. 그렇지만 미국에서 훈련을 한다니, 너무나도 급작스러웠다. 불안한 마음에 얼른 감독님께 전화를 걸었다. 몇 번의 신호음이 울리더니 감독님의 목소리가 들렸다. 대화는 미국행을 막을 수는 없었다. 전지훈련을 조건으로 스카우트 제의가 온 거니까, 대신 감독님은 얼빠진 나를 달래주기라도 하듯 침착하게 말하셨다.
'기말고사 준비할 필요 없어, 연습만 하자.'
'이 상황에 스카우트이면 엄청 대단한 거야. 너 진짜 잘한 거라고.'
그러나 그중 가장 뇌리에 남은 말은 이거였다.
'한솔아, 나도 너 성공했으면 좋겠어.'
정말 연습만 했다. 집에서 체육관, 그리고 다시 집. 매일 반복되는 하루를 살았다. 내가 널 볼 수 있는 시간은 오직 종례시간뿐이었는데, 그마저도 우리의 타이밍은 운명처럼 어긋났다. 체육관은 학교를 지나쳐야만 갈 수 있기 때문에 나는 매일 아침 교문을 지나치면서 네가 있나 확인했다. 그런데 어느 날은 승철이 형이 교문 앞에 서있어서 형한테 말을 건넸다. 나는 네 얘기를 했다. 형에게서 되돌아온 답변은 승관이는 요즘 공부만 한다는 것이었다. 그럴 것 같았다. 너는 항상 그래 왔으니까, 나는 한편으로 안심이 되었다. 형과 대화를 하다 여름방학 전에 너한테 이름을 적혔던 얘기가 나왔다. 그러자 형은 뜻밖의 말을 전했다. 선도부 활동시간은 아침 여덟 시부터라고.
도망치고 싶었다. 현실로부터 도망가는 게 내가 찾은 하나의 답이었다. 너를 보고 싶다는 충동이 나를 막지 못했다. 나는 일어나자마자 너의 집으로 달렸다. 주말이 너를 만날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기 때문에.
승관아.
너의 집에 도착한 나는 문 앞에서 네 이름을 불렀다. 마음은 조급했는데 문은 천천히 열렸다. 문틈 사이로 보이는 네 모습에 눈물이 나올 것 같아 억지로 숨을 삼켰다. 너는 아무 말 없이 문을 열어주고 돌아섰다. 나는 급하게 너의 뒷모습을 안았다.
나 미국가, 가서 훈련받아.
네가 내 얼굴 쪽으로 고개를 돌리려고 해서 나는 너의 어깨에 깊이 얼굴을 파묻었다.
언제 돌아올지 몰라.
너는 반응이 없었다. 너의 무반응이 내가 죽어가는 과정인데.
아무 말이나 해봐, 제발.
애원하는 내 목소리가 그 공간의 잡음이 되었다.
무슨 사이야, 우리?
네 입에서 나온 말은 얼음처럼 차가웠다. 나는 알았다. 네가 이미 내가 떠난 다는 걸 다 알고 있듯이, 우리에겐 관계의 정의가 필요하다고. 우린 친구가 아니었다.
잠깐만 이러고 있게 해 줘.
네 입으로 말해, 우리 무슨 사인데.
칼날 같은 얼음조각이 심장을 후벼 파는 기분이었다. 그래도 좋았다.
나는 네가 원할 때마다 기대는 사람이야?
네가 그런 말을 해도 좋았다. 너라서 좋았다. 네가 말을 할 때마다 너를 더 세게 껴안았다. 쇄골이 부서지도록. 한참 동안 내가 말이 없자 너는 몸을 돌려 나를 마주 봤다.
네가 기억해줄 거라고 믿었어. 내가 네 앞에 짠하고 나타나면 너는 오랜만이다 승관아 하면서 내 이름 부를 줄 알았다고! 너 진짜 싫어. 알아? 넌 피아노도 잘 치고, 얼굴도 겁나 잘생겼고, 키도 크고, 공부도 잘하고, 배구도 잘하고…… 근데 어떻게 내 이름 하날 기억 못 해!
너는 떨리는 손으로 나를 밀어냈다. 밀어내고, 밀어내고. 어느새 나는 저 멀리 밀려났다. 그럴수록 너는 더 다가왔다.
그리고 너 그거 알아? 내가 새아버지 얘기한 뒤로 너 태도 변한 거? 야 그거 동정심이야. 헷갈려하지 말라고, 그렇게 사랑에 빠진 눈으로 쳐다보지 마! 왜 그래 도대체…… 어? 나한테 원하는 게 뭔데!
너는 울먹거리는 목소리로 흐느꼈다. 흐느끼고 소리쳤다. 나는 할 수 있는 게 없어 네 이름을 계속 불렀다.
나 아파. 네가 내 이름 부를 때마다 아파 죽을 것 같다고!
너의 울음에 나는 너를 다시 껴안았다. 처음부터 잘못되었다. 우린 이런 식으로 만나선 안됐는데, 결국 네가 망가진건 나 때문이었다. 내가 널 망가뜨렸다.
미안해. 다정하게 굴어서.
나는 널 떼어낸 후, 네 손을 잡았다. 눈에 보이는 너의 몸 어느 한 군데도 붉지 않은 곳이 없었다.
내 청춘 너한테 줄게. 거기에 오롯이 너만 남겨 놓을게.
나는 네 볼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닦아주었다. 그리고 네 손등에 키스했다. 너는 다시 무너졌다. 하염없이.
3년 만에 돌아온 교정은 빛바랜 모래밭이었다. 나는 앞으로, 졸업식이 끝나고도 한참이나 지나 너의 흔적을 찾을 수 없는 시간 속에서 살아야 했다. 건물 주위를 둘러싼 플라타너스 숲이 검은 그림자를 집어삼켜 불빛 하나가 남질 않았다. 나는 아팠다. 어느새 무거운 머리 위로 산들바람이 불어와 내 상처를 쓰다듬어 주는 듯하더니, 자연스레 두 눈을 감겨버렸다. 정면에 보이는 학교 건물은 볼품없이 벽이 갈라져 늙어가고 있는데 나는 그대로다. 나의 시간이 저곳에 다 쓰였다면 어떤 기록으로 남았을까, 너의 기억에 나는 어떤 학생이었을까, 너는 아팠을까. 아마도 영원히 답을 얻지 못할 것 같아 눈을 뜨고 환상에서 깨어났다. 그리고 뒤를 돌아 학교를 등지고 느리게 걸었다. 나는 가만히, 또 조용히 내 청춘을 떠올렸다. 우리는 깨끗하지 못한 교정에서 커야 했다. 사회가 학생에게 주는 숙제. 필사적으로 자라야 했고 성장통 따위는 참아야 했다. 그게 학생이 살아남는 길이라고, 누군가 그랬다. 왜 살아남아야 하는지조차도 의문이지만, 무엇보다 고역인 것은 어른의 말을 잘 듣는 어른이 되어야 하는 것, 그것을 아무렇지 않은 척하는 것이다. 대신 어른처럼 행동하면 그들의 눈에 거슬리기에 어린 티를 내야 했다. 그런 어른으로 자랐다. 하지만 나의 성장은 주변 사람들에겐 민폐였다. 나는 그런 척하지 않는 학생이었으니 이런 말을 들었다. '한솔이는 학생답지 않아. 애가 왜 이렇게 비관적인지, 곧 죽을 것처럼 말이야.' 나는 속으로 묻는다. 우리의 청춘은 그렇게 소비되어야 하나요. 당신들도 그런 척을 했나요.
당신들도, 사랑을 하나요.
발걸음을 옮겼다. 이번에는 빨리 걸었다. 번화가는 사람들이 많아서 눈에 띄기 쉬우니 일부러 골목으로 향했다. 골목에는 너의 집이 있다. 모퉁이를 돌아가려는데 가게 속 텔레비전에서 내 모습이 나오고 있었다. 귀국해 공항에 들어서는 나에게 기자들이 개미떼처럼 줄줄이 붙어서 묻는다. '고등학생 최초로 대학 배구단에 스카우트', 자막이 화면 하단을 가렸다. 큰 글자로 적힌 이 수식어는 나를 3년 내내 따라다녔다. 그 사이 틈을 타 하나의 질문이 들어왔다. '돌아온 기분이 어떠세요.' 나는. 내 기분 따위가 당신에게 뭐가 중요한가요, 왜 그런 질문을 하는 거예요라고 반박하지 못한 채 억지로 웃었다. 발이 멈춘 곳은 너의 집이었다. 계속 문을 두드려봐도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벗겨진 대문의 페인트 칠이 오랫동안 아무도 살지 않은 집처럼 보였다. 나는 무너졌다. 무너져서 눈에서부터 무언갈 흘려보냈다. 외로움과 괴로움이 뭉쳐져 물이 되었다. 그러나 나는 물에 잠겨 죽지도 못하는 물고기였다. 죽기 위해서는 지느러미를 힘차게 움직여 수면 위로 올라가야 하는 물고기. 안타깝지만 내게는 지느러미가 없다. 나는 기억 속 환히 웃는 너에게 물었다.
내 청춘은 네 것인데, 너는 온전히 다 가졌니. 내가 그렇듯, 너는 나를 필요로 했니.
우리는 어른인 척하는 나이다. 알 수 없는 감정에 어떻게 하지를 못하고 갖고만 있는 채로 성장하는 어린아이. 나는 모든 곳을 돌아다녔다. 어릴 때 살던 동네, 우리가 갔던 영화관, 체육관, 강당, 그리고 독서실. 네가 사는 시간에 갇혀 버린 채 호흡했다. 하지만 나는 아가미가 없어 숨 쉴 수 없다. 아가미도, 지느러미도 없는 나는 애처럼 운다. 곳곳에 베인 너의 흔적을, 지워버리지 못하는 나를 용서해줘. 머리 위로 마지막 그림자가 진다. 너를 기다리는 시간의 반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