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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1. 16. 11:12
작성자
hhh..

 

선생님. 편의상 전화를 못 하겠기에 기어코 펜을 들어요. 선생님께서는 언젠가 제게 종이에 닿는 펜촉의 감촉은 좋다고 하셨죠. 이제야 그 기분을 알게 되었습니다. 덕분에 감사드려요. 

선생님, 살면서 한 번이라도 무화과나무숲에 가본 적이 있으신가요? 없다면 들어보신 적은요? 얼마 전에 저는 무화과나무로만 울창하게 뻗어있는 숲 속 한가운데에 있었어요. 정말로요. 중앙에서, 어련히 햇빛을 받고 있었어요. 범람하는 댐처럼. 만약 선생님께서도 그곳에 계셨다면 유쾌한 일이라고 얘길 하며 돌아다니셨을걸요. 확실히 흥미와 재미가 접점 하는 곳이긴 했어요. 제가 일부러 찾아가진 않았어도 어쨌거나 저는 그 안에 있었어요. 뭐, 그렇게 보였으니까요. 그런 숲은 처음 본 형태였고 그래서 그런 건지는 몰라도 감정이 막, 모호한 감정이 머리끝까지 순환하며 온몸을 빙빙 도는 게 느껴졌어요. 세상 모든 빛을 독점하는 기분. 내가 소실점이 되는 기분. 그게 이런 건가 싶더라고요. 무언갈 제대로 쳐다보기가 힘들었어요. 너무 눈부셔서요. 정말……. 어느 한 군데도요. 그런데요. 선생님. 혹시 눈치채셨나요? 채셨겠죠. 무화과를 처음 본다면서 무화과 숲인지 어떻게 아느냐고 의문이 드셨을 참이었죠? 맞아요. 사실 전부 꿈이에요. 허무하시죠. 저도 깨어나고서 잠깐은 못 믿었어요. 나는 전원우고 조금 전만 해도 숲 속에 있었는데 눈을 뜨니 침대에 누워 있다는 걸 깨달으니까 어디서부터 인가 다가온 절망감이 씁쓰레함을 남겨서 꿈조차 달갑지 않았어요. 어쩌면 눈을 뜨면 전원우는 전원우 그대로라는 게 가장 절망스러운 건데 제가 모른 척하고 있던 건가 싶기도 하고.

무화과 숲 환상이 현실이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이제 제가 해야 할 생산적인 활동은 기록 아니면 집필인 것 같아요. 그래서 <나무의 환상>이라는 제목으로 기차 안에서 글을 쓰고 있어요. 주제는 없어요. 쓰다보면 무언가 나오겠죠. 앞날이 가리키는 대로 사는 거, 버릇이 변함이 없죠. 그러니 뒤에 찍혀있을 발자국은 흐릿할 수밖에요. 밖을 봐요. 레일 위를 마찰하는 강철 덩어리의 소리는 정해진 규칙을 따르고 분명 햇살은 어제보다 맑아요. 제가 괜한 소릴 하는 걸까요. 편질 읽으시며 당황해하실 선생님의 표정이 벌써 보일 듯해서요. 조금 어색하시죠? 저는 원래 선생님 앞에서 글을 읽는 아이였지, 쓰는 애가 아니었잖아요. 양해해주세요. 그냥 꿈을 꾼 게 실로 오랜만이라 선생님께 먼저 소개해 드리고 싶었어요.

 

 

 

선생님. 요즘 시상이 안 떠올라서 죽겠어요. 선생님은 모르실 얘기지만 사실 저는 지옥 같던 과거들을 시를 쓰면서 버텼어요. 이건 꿈이 아니에요. 그 옛날 보육원에서 저는 꽤 낭만이 있는 아이로 치환되곤 했어요. 자유시간에 쓰던 시를 원장선생님께서 보시곤 재능이 있다며 아이들을 모아 대표로 낭독을 해주셨죠. 기억은 안 나는데, 시는 사랑에 관한 거였어요. 읊조림과 함께 저의 손은 꾸준히 꾸물거렸고, 더 나아가서 볼이 발개질까 봐도 걱정했지만 뛰어들어간 화장실 거울 앞에서 본 제 모습은 걱정과는 전혀 달리 창백한 안색이었어요. 저는 그래서 못 믿어요. 저를. 선생님께서 보육원을 떠나 계시던 일 년 동안 저는 스물이 되었고 그 무렵엔 거의 맹목적으로 살았어요. 눈앞의 돈을 놓칠 수가 없어서요. 생계를 꾸려야 했으니까요. 음. 홀로서기라는 말이 갑작스럽게 찾아온 건 아니었나 봐요. 선생님께서 민희 누나에게 했던 말을 알아요. 제가 자립심이 강하다고, 네. 저는 선생님을 처음 뵀던 열일곱부터 이 지독한 껍데기를 벗고 싶다는 집념뿐이었어요. 저는 저를 키워내야만 안심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어요. 과정이 두려웠어도 저의 재산은 그 마음이 전부였으니까. 

이쯤에서 옛날 얘기를 더 해볼까요. 오늘과 같은 가을이었는데 기억나세요? 선생님께서 떠나시기 전날에 애들하고 이별 파티를 했었잖아요. 아, 두 단어가 너무 이질적이게 붙었죠. 살다보면 이럴 때 있으니까 넘어가요. 어쨌든. 그 당시에 애들이 저한테 문자를 보내줬어요. 크림을 얼굴에 군데군데 묻힌 채로 웃고 계시는 선생님 사진과 함께 파티에 제가 꼭 있어야 하니까 형 어서 빨리 오라는. 세영이랑 도화는 결국 마지막을 못 참고 울었고, 현서가 왜 우냐며 두 아이를 놀렸죠. 상황을 글로만 읽는데도 웃음이 났어요. 저희야 항상 저희스럽죠. 「슬퍼도 잠시뿐」을 구호처럼 쓰곤 했으니까요. 밝은 아이들이잖아요. 다들. 아무튼 그날 야자까지 마치고 집에 가던 길이었고… 파티는 이미 끝났다는 걸 알았어요. 눅눅한 밤이었잖아요. 집에 가기 위해선 큰 도로를 건너야 했는데, 그날은 매일 지나던 신호등이 너무 지루해서 육교를 올랐어요. 그리고 내려갈 계단 위에서 저는 밑을 내려다봤고 거기엔 선생님이 계셨어요. 아니, 선생님과 선생님의 애인. 두 분을요. 자주 보육원으로 봉사를 오시던 웃는 얼굴의 선생님의 애인을요. 선생님 책상 위의 빛바랜 액자 속 그분이요. 육교 아래에서 싸우고 계셨죠. 확신할 수 있었어요. 애인분이 고성을 지르며 선생님을 밀쳤으니 딱 봐도 매우 분노해있다는 걸 알아서 계단을 내려갈 수 없었어요. 선생님은 그분한테 차분한 얼굴로 헤어지자고 하셨죠. 이제 와서 솔직히 말하는 것도 웃기지만… 선생님. 제가, 바로 위에 있었고, 저는 선생님이 발걸음을 옮길 때쯤 반대쪽 계단으로 뛰어 내려가 멀리서 걸어오는 척을 해야 했어요. 그다음 그분이 빠른 걸음으로 자리를 뜨고 나서야 제가 말을 걸었죠. 안녕히 가세요 선생님, 하고. 선생님은 우셨어요. 저는 순간 방금 전에 무심한 목소리로 이별을 권고하던 사람이 선생님이 맞는지 의구심이 들 정도로 헷갈리기 시작했어요. 선생님께서는 볼을 타고 내려가는 눈물이 떨어지기 전에, 웃으며 잘 있으라고. 그리고 원우는 꾸준히 책을 읽었으면 좋겠다고 말씀하셨죠. 근데 그 이유가, 제가 생각을 예쁘게 해서라고요? 거짓말하지 마세요. 저한테 슬퍼도 잠시뿐이란 건 허울 좋은 껍데기. 지나친 허상이에요. 저는 슬퍼서 웃어요. 그래야 살아갔으니까. 예쁜 생각은 다 여유에서 나오는 그런 거라고…… 그런데 선생님은 왜 항상 저를……. 저는 당황스러워 그대로 있었는데 선생님께서 아무 말없이 저를 껴안으셔서 급박해지고야 말았어요. 선생님은 이별의 포옹이라고 생각하셨겠지만, 저에겐 발화점이었으니까요. 제가 선생님을 좋아한다고 하자, 선생님은 저를 더 꽉 안으며 고맙다고 하셨죠. 그래서 고마우면 나랑 만나요.라고 했잖아요, 제가. 그러자 신호를 잃은 텔레비전처럼 선생님의 목소리가 지지직 거리며 떨리던 것이 아직도 귓가에 남아요. 원우는. 소중한. 내 학생이지.라고 말씀하시며 사그라들던 선생님의 어깨가 떨리는 걸 보며 저는 죽고 싶었어요. 하지만 선생님. 그날 밤, 애인과는 헤어지셨지만 저의 고백을 들으신 거잖아요. 그걸로 선생님께 위로가 될 수 있었던 거라면 저는 괜찮아요. 너무 괜찮았어요. 그 뒤로 선생님께서 가끔 제게 밤이면 안부차 전화를 주셨으니까. 하지만 그 횟수는 어느새 줄어들더니 로스앤젤레스로 가시던 날에는 어떠한 연락도 없으셨어요. 대신 원장 선생님께 보내주신 편지를 받았고 주소가 적힌 그 봉투는 제가 갖고 있어요. 아직도. 그 후로 가을이면 자꾸만 떠올라요. 한 철의 편집증처럼. 가로등 불빛에 점멸하던 단풍과 눈물을 흘리던 선생님의 모습. 선생님 코트에서 넘쳐흐르던 벚꽃과 중첩되었던 복숭아 향 이런 거요. 다시는 안 올 날이란 걸 잘 아는데요. 그런데요, 선생님. 전화하실 때마다 왜 제 목소리가 듣고 싶다는 핑계를 대셨어요?

 

 

 

민희 누나와 이별했어요. 누나가 마지막 인사를 마치고 저를 안아주셨는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드는 거예요. 내가 이렇게 착한 사람을 또 만날 수 있을까 하는. 누나의 긴긴 후원 덕분에 빨리 보금자리를 만들 수 있었으니까요. 저는 이 년 전부터 소규모 출판사에서 일해요. 여러 직업을 전전했던 경력이 어디 밉보이지 않았나 봐요. 문단을 편집하는 일은 매우 숭고한 일이에요. 시작(詩作) 하는 일도 마찬가지예요.

 

 

 

친구가 사후세계를 믿어요. 죽으면 가는 나라를 알 수 있는 거, 알고 계세요? '꽃별천지'라고 부르길래 저는 처음에 사자성어인 줄 알았어요. 워낙 박학다식한 친구라 그런 단어들이 간혹 그 애에게서 나오는 경우가 있었거든요. 제법 대단한 줄임말 얘기예요. 차례대로 꽃나라, 별나라, 천국, 지옥이에요. 우주도 중세 시대도 아니고 꽃나라 별나라라니 상상력이 귀엽죠? 단순해요. 이름의 직선 하날 그을 때마다 '꽃별 천지'를 하나씩 대입해보는 거예요. 이응은 원이니까 하나로 치고요. 그 법칙에 따르면 전원우는 꽃나라로 간대요. 친구는 천국이어서 되게 좋아했어요. 종종 그 친구가 맹신하는 불가사의한 신화와 추종하는 잡학들을 들어도 아무렇지 않았는데 저는 정말 꽃나라에 갈 것만 같아요. 온갖 종교 지식과 사후세계를 믿는 해박한 친구가 하는 얘기라서가 아니라요. 사뭇 제 표정이 굳어있었는지 친구가 왜 진지하게 생각하냐며 엄청 웃어대더라고요. 역할이 역전된 거 같죠. 저도 웃었어야 했는데. 진짜 어떡하죠? 꽃나라에 가면. 선생님은 홍지수니까 별나라란 말이에요. 그래서 조슈아 아니면 영어로도 가능한가 해보긴 했었는데요.

 

 

 

형. 홍지수. 지수형이라고 부르면 낯설어요? 사실 예전부터 이렇게 부르고 싶었어요. 이제야 그럴 수 있게 되었네요. 그러니까 그냥 글이고 활자니까 참아주세요. 형은 제 성격 잘 아시죠. 워낙 친구들에게도 먼저 친근하게 다가가질 못했잖아요. 최근 들어 잠이 안 오면 와인을 마시기 시작했어요. 편지를 쓰는 지금도 마시고 있어요. 예전에 선생님께서 줄곧 마시던 아메리카노를 따라 마셨다가 쓴맛에 놀라 그다음부터 음료는 무조건 레모네이드만 고집하던 거 기억나시나요. 그랬던 제가 와인이라니. 날씨가 안 좋아질수록 갈증은 더 심해져요. 그래서 어떨 때는 치즈랑 곁들여 먹고 아니면 졸여놨던 고기를 구워서 간단히 스테이크를 요리하기도 해요. 그럼 어쩌다 보니 와인의 이름과 역사까지 알게 되는 경우가 생기더라고요. 그 의미를 생각하여 레시피도 만들어보고는 해요. 아 재밌다. 아. 선생님. 선생님. 지수형. 요즘 글을 안 쓴 지 오래됐어요. 이제는 손도 굳어가요. 그래서 다 저의 업보겠거니해요.

조슈아라는 이름을 들었을 때 아이들은 정말 의아해했어요. 외국인이라서 영어밖에 못하면 어쩌지. 대화가 안되면 어쩌지. 애들이 제게 그런 고민들을 털어놨거든요. 저도 사실 움찔하긴 했었어요. 인생에 한 번이나 가볼까 말까 한 낯선 환경에서 자란 이방인을 받아들이기란 쉬운 게 아니었으니까. 받아들인다는 말이 교만하지만 저희처럼 고립된 애들이 또 어디 있나요. 저희에게 들어오는 사람들은 나름의 심사를 거쳐 인정을 받아야만 저희가 사랑할 수 있었던걸요. 아이들은 선생님이 왜 홍지수이고 조슈아인지를 이해하지 못했어요. 지수 선생님하고 불리다가도 누군가한테는 조슈아가 되어버리는 선생님을요. 저는 설명해야 할 의무감이 들진 않았어요. 대신 질투가 났어요. 쓸데없이. 그러니 이것 봐요. 끝까지 선생님을 이해한 건 나뿐이잖아요…….

선생님. 저, 궁금한 게 있는데 대답해 주실 수 있으신가요? 사라지는 시간을 세면 셀수록 지나쳐간 일들이 뚜렷이 다가오는 건 왜 그런 거예요? 어렸을 때는 너무나 죽고 싶었는데 이제 와서는 죽기 싫어서, 죽는 게 무서워서 살아요. 이게 과잉반응인 건 아니잖아요. 내가 시발 병이라도 있으면 그러려니 할 텐데. 아니 진짜 뭐라도 할 텐데. 마지막으로 글을 쓴 건 언제였더라. 생각도 안 나요. 나무의 환상은 무슨. 저는 미친. 내가 언제까지 작가 지망생 일지 그 자체가 한스러워요. 이 꿈이 악몽일지 아닐지를 밤새워 생각해요. 매일. 그래 봤자 나아지는 건 일 그램도 없지만. 뭐, 나는 꿈도 못 꾸나. 그런데, 분명 악몽인데, 자꾸 형이 나와요. 죄송해요. 말이 중구난방이죠. 취했나 봐요. 어… 지수형은 기대고 싶은 적이 있어요? 누군가의 어깨를 빌려서라도……. 대체 나는 왜 선생님을 잊는 데 매번 실패하는 걸까요. 아. 저는 정말. 형이 필요해요.

 

 

조슈아 선생님. 저 곧 미국에 가요. 친구들하고 캘리포니아에. 저는 가장 먼저 가서 제일 늦게 나올 거예요. 그때까지의 선생님의 가을은 상서롭기를.

 

 

홍지수의 사랑은 제 함량에 미치지 못하는 만큼의 일을 한다. 신뢰 없는 상대를 보살피거나 적은 기쁨을 위로하는 것과 같은. 홍지수의 사랑은 홍지수의 고상 함이었다. 그 함량은 기막히게도 본인의 감정보다 우선시하는 것들로 가득 채워졌다. 전원우의 홍지수는 그런 색으로 그려진다. 

「제 말 무슨 뜻인지 알아요?」

지수의 뒷모습을 응시하는 원우의 질문에 일소하는 피상이 담긴다. 잔잔히 미소를 짓는 홍지수라는 피사체가 담긴다. 

「친구들보다 늦게 돌아가려는 이유 말이에요.」

그의 물음이 하나의 방해물도 없이 직시했으나 하필 지수는 전원우의 편지를 반도 이해하지 못한 상태였다. 물론 그것 또한 홍지수의 고상 함이다. 

「선생님이 저를 이해 못 한대도 괜찮아요.」

홍지수의 전원우는 꽤 제멋대로였다. 숨어서 말하는 한이 있어도 못할 말은 없었던 전원우로 조립됐다. 문득 시선을 돌리니 확실히 자신이 LA에 있다는 실감이 든다. 원우는 탁자 위의 영어신문을 보았다. 어제 날짜로 인쇄된 신문이 펼쳐져 있다. 서재를 꽉꽉 채운 사회복지 관련 서적들은 호기롭게 원우를 내려다본다. 그다음, 부엌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려오더니 지수가 김 나는 차를 내온다.

「모과 차야.」

쟁반에서 찻잔과 찻주전자를 내려놓는 동안 원우는 그저 지수의 부드러운 목소리를 들었고 그것의 음파를 그려보면 어떨까 하는 상상을 했다.

「편지 고마워. 정말 좋았어. 그런데 네가 한꺼번에 그렇게 많이 보낼 줄은 생각도 못 했어.」

지수는 소파에 앉아 차를 한 모금 마셨다. 

「그거 다 같은 날에 쓴 거예요.」

가만히 원우를 전유하던 지수의 두 눈이 일제히 커진다.

 

어제 썼어요. 원우의 말에 지수는 잔을 내려놓는다. 유리 탁자와 부딪힌 청아한 빛깔의 포슬린이 깨질듯한 짧은 마찰음을 냈다. 선생님께서 제가 꾸민 이야기에 만족하셨으면 해서……. 지수는 두 손을 잡고 매만졌다. 그래서 오늘 선생님 우편함에 넣어 놓은 건데. 원우가 빙그레 웃는다. 편지봉투에 적어놓은 제 번호로 바로 전화를 거실 줄 알았어요. 

모과랑 무화과는 발음이 비슷하지? 원우의 말이 칼날에 스치듯이 잘렸다. 지수는 원우가 썼던 글을 재생산하지 않도록 황급히 말을 이었다. 여기 와서 친구는 사귀어봤어? 찻잔을 쓰다듬던 원우의 입꼬리가 아래로 내려갔다. 

저기, 해변에서 만난 친구들 있어요. 스콧이랑 울프.

이름을 들은 지수는 피식 웃었다. 따뜻한 미풍이 불어온다.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 고요. 대신에 둘은 바람을 감았다. 자꾸만 열이 들끓어서 탈이었다.

원우야. 

낮은 목소리로 이름을 부른 지수의 눈에는 별빛을 박은 것처럼 찬란함이 존재했다. 그것마저 저의 부모를 닮은 것 같다고 생각하지만 이내 편협으로 덮인 망상에 그쳐버린다. 원우가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부모는 원우의 이름을 부르며 홍지수처럼 눈웃음 지을 수 있을까. 

원우야. 너는 왜 내가 좋아할 일만 하는 거야? 여긴 왜 왔어?

한참 생각에 빠져있던 원우를 지수의 고상함이 깨운다. 스콧이랑 울프는 내가 제일 좋아하는 작가잖아. 이내 들켜버린다. 그 해 가을. 스물여섯이었던 홍지수와 열아홉 자신의 사이에서 발화(花)하는 현재의 전원우는 지수의 앞에서 진공 상태가 되어버리곤 유유히 들뜨기 시작했다. 찻잔을 움켜쥐었다가 다시 풀고 꿉꿉해져 오는 눈두덩이를 양손으로 꾸역꾸역 눌렀다. 현기증이 난다. 지수의 목소리를 수사학적으로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지수와 레몬, 지수와 모과, 지수와 홍지수는 소생하는 모든 것들을 닮은 듯했다. 원우는 할 말은 없었지만 애써 입을 열어 중얼거렸다. 저는 여전히 전화 너머로 들려오는 선생님의 음성을 듣기가 힘들어요.

 

모과차를 훌쩍이는 지수의 위로 아메리카노를 마시며 들려오는 노래에 맞춰 손가락으로 툭툭, 플라스틱 컵을 치는 홍지수의 모습이 겹쳤다. 아메리카노가 아닌 모과차를 마시는 홍지수는 고귀함이 닳아 없어질 때까지 전원우의 뇌 내에 입력된다. 다만 지수의 고귀함이란 쉽사리 소멸하지 않는 것이다. 

선생님하고 손을 잡으면 어떨까요? 

활자 사이를 파도처럼 휘몰아치는 정적. 마침내 지수는 그 틈에 묻은 원우의 소유욕이 자신을 향해 있다는 것을 알았다. 

손과 손은 누구와도 잡을 수 있잖아. 

궁금하지 않으세요? 그냥 어떤 기분이고……. 느낌일지.

손은 온기를 머금어 뜨거워져가고, 발열된 그것을 꼼지락거리며 원우는 고개를 숙였다. 땅으로 꺼질 것만 같았다.

저를 좋아하지 않을 이유가 뭐예요?

그런 거 아냐. 나는 네가 쓴 글도 읽고 싶고,

그럴 일 없을걸요.

네가 작가가 되는 걸 꼭 보고 싶은데.

포기하세요.

내가 원하는데 그렇게 해주면 안 될까? 내가 널 얼마나 좋아하는데.

이번에 그의 두 손은 녹아 없어질 기세였다. 전원우의 상생을 억제시키는 하나의 약이 제 앞에 있는 상황에서, 원우는 그 약을 뚫어지게 쳐다보다가 약의 천진난만한 유약함에 몸을 일으켜 세우며 말할 수밖에 없었다.

미친 박애주의자.

간절함이 등등한 지수의 표정을 다 담지 못한 채 저 밑바닥에서부터 손이 저려옴을 느낀다. 그는 계속 두 손을 꾸물거렸고, 전전했다. 순간에, 볼이 발개질까 걱정하다 (아스피린 하나만 주세요.) 눈을 감고 다시 상체를 눕혔다.

이럴 때만 좋아하잖아요. 형은 저의 성장만을 바라시죠. 그게 삶의 목표인 사람처럼. 그런데 그거 아세요? 형이 나를 생각한 횟수보다도 내가 형을 위해서 쓴 잉크가 더 많을 거라는 거.

지수는 원우의 말에 곧바로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조금의 시간을 가진 후 지수는 일어나 찬장에서 파란 포장에 쌓인 쿠키 박스를 꺼냈다. 원우가 좋아하던 눅눅한 버터쿠키. 지수는 원우 쪽을 돌아보지 않은 채로 입을 열었다. 

그런데 원우야. 너는 내가 좋아하는 것들 안에 너도 있었으면 하는 거잖아, 그래서 필사적으로 너를 엮으려고…….

원우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둔탁한 소리를 내며 찰나에 탁자가 흔들린다. 소리에 놀란 지수는 곧바로 원우를 응시했다. 철문을 박차고 나왔다. 드러났다. 그러나 사실은 이미 수년 전에 들킨 본성이었음을, 원우는 알았다. 더 이상 지수의 말을 듣지 않았지만 그의 음절 하나하나들이 공명하며 위성처럼 머리 위를 돌고 돈다. 고맙다고나 하질 말지. 사랑에 대상이 없어 본질의 사랑을 사랑하는 지수의 범애적 양상은 다수가 누리는 권리로써 지당했다. 차라리 내가 홍지수로 태어났더라면. 나오는 길에 원우는 할 것이 없어 다분히 원망을 했다. 세상 어딘가에는 버려질 몸이 있음을. 홍지수가 있음을.

수만 가지 환상으로 점철된 밖에서 다시금 마주한 지수의 저택은 사방이 무화과나무로 둘러싸여 있었고, 원우를 범람했다. 과분히 넘치는 빛은 공간을 물들여 그 안에서 소실되어가는 그를 품은 채로 사라졌다.

 

 

형. 무화과는 꽃이 여물지 않아서 무화과래요. 하지만 꽃이 피지 않는 나무였던 그도 사실은 꽃이 펴요. 눈에 띄진 않게, 겉으로 드러나지 않을 정도로. 그러면 이름을 새로 지어줘야 하지 않나요. 알고 보니 꽃이 피는 나무. 그런데 이건 너무 맥락도, 매력도 없어서 슬프니까, 뜻이랑 발음까지 완전히 다른 새로운 이름으로요. 제가 걱정되는 건요. 이런 말들이 도대체 어떤 가치가 있나요? 바뀌지 않는 영원을 두고 저들끼리 따져본들 뭘 어떡해요. 꽃이 핀다는 걸 알아주기 전까지 무화과로 살았던 그의 시간은 어떻게 되나요…….

 

 

여기까지 쓰다만 채 펜을 던졌다. 그것은 데굴데굴 굴러가 침대 아래, 빛 한 점이 없는 곳으로 처박힌다. 소설을 더 잇기엔 다음 장이 없었다.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굳은 몸을 일으킨다. 얼마나 많은 홍지수가 그의 종이에 그려졌다 사라졌는가. 구석에는 주인을 잃은 편지 뭉치들이 굴러가는 데에 애를 쓰느라 바쁘다. 전원우는 가을바람이 부는 베란다 밖으로 향했다. 그무러진 하늘에 유독 빨갛게 번쩍이는 하나의 빛이 있다. 독점. 하늘로 떨어트린 시선에 잡히는 베네싱 포인트. 그 안으로 비상하는 비행기. 저 비행기는 캘리포니아행이었다. 결국 전원우는 마지막의 마지막까지도 놓치고야 만다. 전원우는 고상했다. 홍지수가 전원우를 다 이해하지 못하는 일을 이해할 뿐이었고 그렇게 기록된다. 다 써버린 종이는 전원우의, 원우가, 원우는으로 시작할 문장을 담지 못하고, 지수의 형체는 전원우의 글에 등장하는 종말로 남겨진다. 이제는 전원우라는 주어가 부족했다. 전원우는……. 

나는 홍지수가 돌아오지 않을 것을 안다.

 

전원우 단편집 <나무의 환상>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