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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21. 1. 16. 11:21
작성자
hhh..

 

원우는 헌 옷 수거함에 누군가 붙여놓은 예수그리스도 그림을 한참이나 들여다보다가 고개를 갸우뚱 젓는다. 계략은 태산보다 높고 구원은 거기 있으랴. 누가 지었는지 더러운 문구였다. 구린 말에는 구린 악취가 나니까. 구원? 구원의 수요가 없는 곳에 무슨 구원. 사람이 없어지지도 않고 생기지도 않는 무無형태의 마을에는 죽음밖에 남은 게 없어서 다 죽어가는 곳의 유일한 생명인 낡은 햇빛만이 마을의 머릴 덮었는데 무슨 구원……. 원우는 드넓게 펼쳐진 밭을 본다. 완연한 가을이다. 벼가 고개를 숙였고 원우는 고개를 들었다. 태양열에 실명하듯 초점이 멀어져 곧 열사병을 앓을 듯하다. 그때, 멀리서 흙길을 파헤치는 엔진 소리가 들려왔다. 반사적으로 시선을 빼앗기니 어느새 주변은 굉음으로 둘러싸이고, 먼지를 일궈내며 지프차 한 대가 달려오고 있었다. 원우는 쥐고 있던 폴리에스테르 비닐을 다급히 헌 옷 수거함에 집어 처넣었다. 운전하는 얼굴을 봤다. 윤정한이 돌아왔다. 므두셀라의 집으로.

 

"깽판 치고 사라지더니 깽값도 안 물고 그냥 나갔잖아." 원우는 물을 들이켜는 순영을 보며 말했다. 순영은 이마에 난 땀을 연신 닦아내려 애썼지만 쉽사리 지워지지가 않아 목을 늘였다. 바람이라도 쐴까 싶어서. 빛이 블라인드 모양으로 들어오는 헛간에서 원우와 순영은 포대자루 더미에 기대어 앉았고 순영은 젖은 몸인 채 계속 물을 들이켰다. 오전에 일을 좀 한 모양이다.

"원장 수녀님한테 말할래."

원우는 자루 위에 올라가앉았다.

"뭐라고."

"정한이 형, 마을 밖으로 돌려보내라고."

그러자 순영은 순간적으로 혀를 깨물었다.

"그래, 난…." 원우 뒤로 비추는 후광에 순영은 눈을 찌푸렸고 야트막한 시선이 사선으로 맞닿았다. 원우는 자루에서 내려와 순영을 마주 본다.

"정한이 형이 다시 와서 좋은데?"

미소를 멈춘다. 심장도 뜀박질을 포기하고 관둔다. 원우는 순영의 후드티의 두 끈을 두 손으로 동시에 당겼다. 순영이 헉, 하고 숨을 참는다. 자연히 목이 뒤로 눕혀졌다. 

"그럼 우리 놀이에 정한이 형도 끼워줄까?"

원우는 순영의 목을 받치고 입술을 물어 키스한다. 손에 힘이 들어가니까 순영의 목이 서서히 조여들어갔다. 순영은 원우의 목덜미로 두 팔을 감는다. "미친놈…." 이번엔 순영이 원우를 대신해 미소했다.

 

정한은 원장 수녀와 인사를 하고 원내를 돌아봤다. 므두셀라의 집이라 적혀있는 입구 간판은 글자 획이 세월에 낡아 닳아없어질 기세다. 수녀를 뒤따라가며 가볍게 주변을 살피다가 창문가에서 발을 멈춘다. 원우와 순영이 얼굴을 내밀었다. 눈이 마주치자 정한은 손을 들어 작게 흔들어보았다. 그러자 둘은 웃음으로 화답하고 시야에서 사라진다. 보육원을 뛰쳐나온 정한은 우수한 새 인생을 살았다. 형의 후원자가 엔터테인먼트의 캐스팅 관계자였다니 어쩜 인생이 저렇게 짜인 채 대본대로 굴러갈까? 정한이 나가고 나서 순영은 원우한테 물어봤다. 원우는 순영을 안으며 어깨에 턱을 올렸다. 우리도 같은 인생을 살잖아. 말했다. 순영이 물음표를 달았다.

정한이 형?

아니 우리… 너랑 나, 우리.

 

"제가 나오는 드라마는 매주 챙겨 보시는 거죠?"

퐁당! 떨어진 각설탕은 기포가 붙어 서서히 깎여나가는 고체. 정한은 하얀 손가락을 이용해 티스푼으로 차를 휘휘, 저었다. 설탕이 소용돌이치며 저 아래로 빨려 들어간다.

"그래. 얼마나 기분이 좋은지. 네가 그렇게 잘 돼서 너무나 기쁘단다."

원장인 마리아 수녀는 뺨에 손을 대며 빙그레 웃었다. 밖 복도에는 뛰어다니는 발소리가 점점 가까이 들렸다. 발이 문 앞에 멈추는가 싶더니 그대로 나무 문이 열렸다. "순영아, 원우야." 순영과 원우가 차례대로 정한에게 다가와 안긴다. "형을 다시 봐서 좋아." 순영은 정한의 긴 머리칼에 얼굴을 파묻었다. 곧이어 원우가 정한과 순영을 함께 껴안는다. 정한은 원우의 등을 두드리다가, "형, 머리 자를 때 안됐어?" 질문에 멈춘다. 묻는 원우의 점퍼 주머니에는 나이프가 들어 있었다. 마리아는 셋을 흐뭇하게 보며 늘어진 안경 줄이 달린 안경을 치켜올려 웃었다.

"얘들아, 들어가서 기다리고 있자. 정한이도 왔으니 오늘 밤에는 맛있는 걸 먹어야지 않겠니?"

 

아이들이 돌아가고 남은 단둘의 방은 갑작스레 빛이 꺼진다. 마리아의 손에 의해. 마리아는 방의 불을 소등했다. 어둠 속에 묻힌 정한은 금세 당황을 머금은 표정으로 변했고 창문까지 완벽하게 닫은 마리아는, "왜 여길 다시 온 거니?" 물으며 정한에게 다가갔다. 정한이 뒷걸음질 친다. 푸른 바깥처럼 원장실 내부가 푸름에 잠길 때 정한은 한기를 느꼈다."수녀님?" "쉿." 전등을 들어 정한에게 내민다. 마리아는 손가락을 제 입술에 갖다 댔다. "듣고 있어." 예민했다. 신경이 어딘가에 얽매어 서려있었다. 정한은 조용히 입을 다물고 있다가 "누가요?" 물었다. 그래서 마리아는 전등을 책상 위에 올려놓는다.

"지금부터 하는 얘기는 네가 모를 수도 있고 알 수도 있는 얘기야."

마리아는 전등을 들어 한 사진을 비췄다. 원우의 어릴적 사진이었다.

"원우가."

"……."

"어제는 비닐을 얼굴에 씌우고 목을… 이렇게 하려 했어."

마리아는 자신의 목을 조르는 시늉을 했다. 굽힌 팔과 떨리는 손, 힘줄이 손가락까지 돋아난 가는 손등. 떨리는 어깨와 꿀떡이며 넘어가는 신음을, 정한은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한번 보고 알아챘다. 잠시 후에 마리아가 손을 떼고 입을 연다. 

"원우가 매일 밤 잠자지도 않고 한다는 거."

자살기도?

"자기 자신을요? 설마요. 걔가 얼마나 긍정적이고, 밝고 잘 웃는 애인데."

"……"

"아시잖아요. 저 여기 도망치듯 나왔던 그 밤에, 원우만 마중 나와서 인사해줬다고. 원우가 말 안 하던가요. 그때 제가, 수녀님도 아시다시피 악령에 씌어 미쳐가지고……. 사람들 모두가 제 말 믿지 않고 절 피했잖아요. 우물 안에서 괴물을 봤다고. 포효하는 목소리가 매일 밤 들린다고. 귀가 찢어질 거 같다고. 매일이고 난리란 난리는 다 쳤는데 그때 유일하게 저를 믿어준 단 한 명이 있었다고요. 그게 원우였는데요…."

정한의 회한에 마리아는 울 것 같은 얼굴로 설움에 잠겨 연신 고갤 끄덕였다.

"수녀님. 지금에 와서 그때 악마 어쩌고 하던 제 말을 믿어달라는 말이 아니라 저… 아니, 원우는."

"원우는. 네가 몰래 도망친다는 걸 어떻게 알고 네 앞에 나타났을까?"

"네?"

"정한아. 내가 아직 다 말 안 했잖니. 비닐을 뒤집어쓰고 목을 조른 건 원우 자신이 아니라," 

마리아는 울음을 멈추고 어깨를 들썩이며 키득댔다.

"순영이. 순영이야…."

 

원우가 순영이를 죽이려 했어. 두 눈으로 내가 봤단다, 정한아. 정한은 침대에 앉아 생각했다. 이 시발! 전원우가 눈치챘다. 정한은 엄지손가락을 깨물며 대책을 고안하기 위해 머릴 싸맸다. 그런데 문득 뇌리를 강타하는 질문이 하나 남는다. 혹시 전원우가 내가 도망치려는 걸 알게 된 경위가. 정한은 빠른 걸음으로 마리아 수녀의 방에 섰다. 문을 두 번 노크하자 방 안에서 마리아가 소리친다.

"늦었는데 돌아가! 여기는 사람도 없고…."

"괜찮아요. 애들은 그대로잖아요."

"제발, 정한아!"

마리아가 활짝 문을 열고 뛰쳐나온다. 나와서 정한의 손을 잡는다. "밤마다 우리가 뭣에 시달리는지, 그래 너, 네가, 네가 감히 아니…." 떨리는 손엔 이질적으로 따듯한 온기가 남아있었다.

"수녀님 저녁 드실 시간이에요."

어느새 정한의 뒤로 다가온 젊은 수녀가 마리아를 불렀다.

 

기도합시다.

스테이크를 써는 나이프가 포슬린에 부딪히는 소리만이 거실에 넘실댔다. "고기가 맛있네요." 원우가 말하고 난 뒤 순영은 정한에게 이것저것을 물었다. 식사 시간이 늘어진다. 정한이 순영과 담화를 나누다 정신을 차려보니 원우는 사라져 있었다. 정한은 낌새를 눈치채고 충동적으로 밖으로 나갔다. 비가 세차게 내리치고 있었다. 정한은 억수로 퍼붓는 비를 맞으며 사방을 뒤졌다. 사지가 휘청거렸다. 아까까지만 해도 하얗던 세상이었는데. 해변가도 아닌데 세상이 하얗게 뜨듯이 눈이 부신 이 마을의 날씨는 워낙에 장난을 잘 쳤다. 순영과 원우는 그동안 변온하는 환경에 잘 적응했고 그렇게 십몇 년을 살았다. 정한은 그동안 없었던 자신의 빈자리를 후회했다. 떠났던 윤정한은 너무 멀리 빙빙 돌아온 것이다. 아무리 찾아도 원우가 보이지 않았다.

 

"나쁜 것이 나쁜 짓을 하는덴 이유가 없지. 용이 먹은 거야, 용이. 용이 이 마을을, 이 마을 전부를 점령했어. 이제 우리에게는 악만 남았어! 그것만이… 그것만이 여기 남았어! 결국에 용은 범을 삼키고야 말 거고. 거기에는 최후로 최대의 악이, 숨어있던 악이 마침내 남아…." 정한은 마리아의 기분을 맞춰주기 힘들었다. 마리아는 말을 끝내 맺지 못하고,

"그게 무슨 소리예요. 괜찮으세요 수녀님?"

집에 다시 돌아온 정한이 바닥으로 쓰러지는 마리아를 부축해 들어 올렸다. 그리고 정한마저 퓨즈가 나갔다. 

다음 날 아침에 정한이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차 안이었다. 정한은 감기는 눈을 억지로 들어 올리려 했으나 무언가 가슴을 짓누르는 것같이 답답하여 힘겹게 눈을 떴다. 옆에는 순영이 누워 있었다. "일어났어?" 순영은 뒤통수를 팔로 기댄 채 정한의 앞머리를 쓸어넘겼다. 뿜어져 나오는 후광에 정한은 눈이 아팠다. 그러나 그게 해답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전원우랑 사시사철 붙어있는 권순영이, 해답.

"용이 범을 삼킨다는 얘기 들어봤어?"

정한이 물으나 순영은 천연한 얼굴로 고갤 저었다. 정한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순영아. 형이랑 나가자. 네가 이 마을에 계속 있을 이유가 어디 있어. 너는 곧, 어차피 너도 곧 나가게 되잖아, 응?"

재촉하는 정한에게 순영은 아무 말 없이 정한을 뚫어지게 봤다.

"설마 너, 마리아 수녀님을 포함해서 아무한테도 말 안 했지?"

"뭐를?"

"우리가 이불속에서 하던 짓." 정한의 입술은 메말랐다. "우리가……." 순영은 일부러 느리게 되물었다. "이불 속에서, 옥상에서, 헛간에서 하던 짓?" 순영이 정한의 손을 잡아끌어 자기 옷 속에 넣는다. 이런 거? 뜨거운 살갗의 촉감이 전해졌다. 순영은 정한에게로 바투 몸을 붙여왔고 서로의 얼굴이 금세 가까워지자마자 정한의 얼굴에 키스를 퍼부었다.

 

네가 그런 일로 원우를 책임지지 않아도 된다고. 그런 죄책감 가질 필요 없어. 다 지난 일이야. 그러니까 순영아. 이 집에서 나와. 

 

정한의 그 한마디에 순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순영은 당장 정한이 시키는 대로 짐을 쌌다. 

"너 뭐해?" 원우가 방 안에 들어올 때까지도. 

"정한이 형 따라서 나가려고."

급작스러운 대답에 얼떨떨한 원우는 한동안 멈춰 그대로 서있었다. 순영이 비웃는다. "왜, 할 말 있어?" 그게 기폭제였는지 원우는 순영을 밀치고 멱살을 잡았다.

"네가 왜 나가, 여길 네가 왜!" 원우는 악을 썼다. "왜 나가…." 내가 어떻게 버텼는데! 원우는 순영의 어깰 잡고 흔들었다. "보여? 저길 봐봐. 밖은 위험해, 순영아. 밖에는 내가 없잖아. 그 대신에 괴물이 있고, 시발! 괴물들이, 수천, 수백 마리의 괴물들이 수억 마리 악마들과 함께 있어. 좆같이. 그리고 윤정한도 있고. 윤정한이 있고… 순영아, 정한이 형한테 붙지 마. 너 분명 잡아먹힐 거야. 정한이 형도 괴물한테 잡아먹혔어. 너 정말 몰라? 그래서 정한이 형이 괴물이 된 거야. 괴물이 돼서 돌아온 거라고! 그거 알지? 우리, 밤에만 들려오던 그 소리. 그 소름 끼치는 그거! 형 나가고서부터 우리한테도 들린 거잖아. 그랬잖아, 순영아, 너도 알잖아…."

너는 절대 못 나가. 나랑 못 떨어져. 원우가 순영을 끌어안는다. 순영은 원우에게 잡힌 채로 내내 아무 말이 없었다. 그저 순영은 크게 숨을 한번 내쉬고는,

"원우야. 너 왜 그래?"

천천히 웃었다.

왜 이제 와서,

다 알면서 나한테까지 모르는 척해?

 

뭐?

원우는 순영에게서 떨어져 나왔다. 손이 덜덜 떨린다. 순영의 동공이 하얗게 변질되어간다. 원우는 설움을 잔뜩 묻힌 목소리로, "미안해. 무서워서 그래, 내가 무서워서." 울먹이며 줄줄, 고백한다. 그러자 순영이 원우의 손을 잡았다. "나 절대 두고 가지 마." 잡힌 손을 보던 원우는 진심을 담아 말했다. 순영은 그 말에 응하듯이 원우를 잡아끌어 껴안았다. 그때, 지나가던 정한이 열려있는 문틈으로 샛노란 달빛이 들이닥친 방안을 몰래 엿본다. 원우가 순영의 품에 안겨서 중얼거리고 있었다.

 

입이 열린다. 입이 말한다. '1996년, 비늘과 가죽이 함께 태어난 날로부터 그 둘이 성자가 되는 이십 년 후에 바다가 표호하고 벼가 목이 잘리고 심장이 구백육십 구개의 길로 갈라질 것이다. 그리하여 천지도 심장과 똑같은 모양으로 갈라져 그 틈으로 태초의 악령이 목숨을 구걸하러 올 것이니 그때에 비늘과 가죽은 살아도 산 것 같지가 않으므로 죽으매 같이 죽게 되니라.'

곧이어 맑은 하늘에 천둥이 쳤다.

범을 껴안은 용의 눈은,

금빛이 되어….

번개가 번쩍! 마을을 밝히자 표호가 사방을 울린다. 그것은 개벽. 천지가 쩍쩍, 구백육십구 갈래로 갈라진다. 비로소 용호상박이었다. 그러나 용은 범을 먹지 못한다. 오히려 역이었다. 범이 용을 먹어치울 것이다. 꼬리까지 씹어 삼킬 것이다. 무심히 정한을 보던 노란 눈의 원우가 반대로 몸을 틀었다. 순영이 고개를 들어, 정한에게 웃어 보인다. 정한은 스스로에게 물었다.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 나는 어느 쪽일까 하고. 어느 쪽이어야 하느냐고. 그런데 그 순간 정한의 나오지 않는 목소리를 순영은 들었다. 질문에 대한 유일한 답을 순영이 가져갔다. 순영이 입을 열어 정한에게 말한다. 정한이 형, 형은 개과천선해야지.

 

그리하여 순영의 길고 흰 두 눈을 마주한 정한은 마침내,

마리아가 말한 악이 어디에 숨어 있었는지를 알아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