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테로 원홋 gs 홋
지수를 따라가서 본 으리으리한 대궐은 겉으로는 여느 부잣집과 다르지 않은 평범한 모양새였다. 일전에 지수는 학보사 후배들을 불러 모아 주말에 시간을 내달라 간곡히 부탁하였고 결과적으로 이에 응해준 후배 둘을 데리고 영등포의 자기 집으로 향했다. 봄이 흔적 없이 지나간 무렵이었다. 그 축에는 전원우도 끼어있었다. 시가지를 뒤로하고 담쟁이덩굴이 휘황하게 늘어져 있는 담벼락이 지키고 서 있는 홍지수의 집. 가세가 등등한 대궐집으로 들어서는 지수의 뒤를 따라 들어온 거실은 흰 레이스 덮개에 덮인 피아노와 책장에 가지런히 꽂혀있는 고서들로 하여금 이국적인 모습을 자아내 탄성이 터져 나왔다. 계단을 올라, 지수가 자신의 방문을 열기 전까지는.
문이 열렸다.
여기야. 굵다란 글자가 박혀있는 현수막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난잡한 방이다. 불을 켜지 않아도 밝았던 거실과 달리, 방안은 갑갑하고 채도가 낮았다. 열려있는 창문을 통해 불어온 바람에 의하여 책상 위의 각종 종이 전단들이 흐트러져 쏟아져 내린다. 지수는 유유히 걸어가 창문을 닫았다. 원우가 떨어진 종이 뭉치를 주우려 허릴 숙이려는데, 그전에 민규가 선수를 쳤다. 지수 형…. 의아하게 들어 보인 것은 만들다 만 어떤 대자보의 초안처럼 보였다.
아직 정리가 안 돼서. 지수가 책상을 정리하는 동안 민규와 원우는 각자 여러 인쇄형태로 찍어낸 종이 전단을 읽어 내려갔다. 잠자리 안경 너머 보이는 활자들은 낯섦과 익숙함. 어중간에 멈춰있는 단어들이다. 원우는 물었다. 형. 이게 뭐예요? 민규가 중얼거렸다. 집회의 필수 개회를 위한 정리… 청년 단체의 집단적 저항의… 의미. 민규가 지수를 본다. 지수는 점퍼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어 담뱃갑을 꺼냈다. 미안, 나 잠시만 담배 좀 피울게. 손을 가린 채 불을 붙인다. 내뿜은 탁한 연기가 위로 올라가던 것을 따라 올려보던 원우는 그만하고 다른 종이를 집어 들었다. 혼란스러웠다. 편집실에 있을 때 어떤 얘기도 없으셨잖아요. 원우가 묻자, 지수는 그저 양팔로 책상을 짚으며 대답 대신 되물었다.
나랑 일 좀 할래?
원우는 어림짐작했고 민규는 어리둥절했다. 무슨 일인데요. 원우가 물었으나 지수는 말을 않았다. 바꿔 물었다. 무슨 일을 할 건데요? 원우는 약간의 눈치를 채서 지수에게 자신이 필요함을 알았다. 민규가 전원우는 어떻게 뭘 아는 거냐며 딴지를 걸었지만 원우는 의식하지 않았다. 살짝 열린 문틈으론 이 층 거실 천장의 샹들리에가 빙빙 돌아간다. 지수가 가는 손가락으로 라디오를 틀었다. 오래된 클래식의 떨리는 음이 터져 나온다. 여유 속의 떨림 그 안에서 지수는 이야기의 포문을 열었다.
그래서 소개해줄 사람이 있어. 곧 올 거야.
말을 전부 들은 민규와 원우는 숨을 죽였다. 그러려던 건 아니었는데 그래야만 되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고. 지수는 아까부터 계속 같은 곡만 반복적으로 재생되는 라디오를 껐다. 동시에, 나무 계단을 오르는 소리가 점점 가까이서 들려왔다. 진폭이 커져만 갔다.
지수 선배 집이 이래서 좋다니까. 털릴 게 없잖아. 으리으리하니 조사해봤자 나올 건덕지도 없고. 선배 방이 좀 문제지만.
웃음기 가득한 목소리였다. 둘은 소리에 집중했다. 발은 두 발이 아닌 듯했다. 그 이상의 움직임이 느껴져서. 지수가 책상에 기댄 몸을 일으켜 앞으로 가서 문을 활짝 연다. 두 여자의 얼굴이 보였다. 아니, 정확히는 앞서 들어온 여자는 밝은 얼굴. 뒤의 여자는 침울해 보였다.
반갑다. 영화 여대 87학번 사학과 최은미.
만날 줄 알고 있었는지 단발머리 최은미가 매크로처럼 짜인 인사를 건넨다. 민규는, 안, 안녕하세요…. 어, 저는 성원대 87학번 회화과 김민규. 하며 숙였던 고개를 들면서, 잠시만. 그럼 우리 동갑 아니에요? 화들짝 놀란다. 튀어나온 큰 목소리에 원우는 깜짝 놀라 심장을 움켜쥘 뻔 해, 민규의 어깨를 때렸다. 민규는 일절 무시하고 은미와 가뿐히 악수했다. 원우가 마음을 추스르고 은미를 봤다.
저도요. 저도 팔칠.
원우가 손을 건네는데,
팔칠 뭐.
은미가 뾰로통하게 물었다.
예?
금방 당황하는 원우에 은미는 웃음을 흘리며 앞뒤로 몸을 흔들거렸다.
누구냐고. 왜 이름을 말 안 해. 네 이름이 팔칠이야?
아, 아니, 전원우… 요. 지수 선배 후배예요, 선배랑 같은 과.
아하… 같은 과면 너도 글 써?
네?
은미는 팔짱을 끼고 여유롭게 질문을 던졌다. 이때, 대화를 엿보고 있던 지수가 원우가 답하기 전에 입을 열었다.
응. 원우 되게 잘 써. 언제지, 옛날엔 늪에 사는 절지동물에 대한 자료집 같은 거 만들어서 발표했었는데 상도 받았어.
형, 나 그거 국민학교 때 얘긴데….
그래?
하여튼, 자.
은미가 오른쪽 손을 건넸다.
반말해. 팔칠이면 신입생, 우리 동갑이잖아. 은미가 손을 내밀자, 나도, 나도. 민규가 끼어들었다. 반말하라 하니 기회를 놓치지 않는다. 원우는 옷에다 손에 난 땀을 닦고 다시 한번 은미와 손을 잡아 위아래로 흔들었다. 몇 번이고 인사를 더 했더니, 은미가 두리번거린다. 근데 언니는 어디 갔지. 은미가 중얼거리자, 지수가 한숨을 내뱉었다. 그러게. 민규는 번잡해진 둘을 따라 주변을 살피어 본다. 뭐가요? 천진했다. 그때 원우는 은미를 따라 들어왔던 작은 키의 여자를 떠올렸다. 검은 긴 머리에 청재킷과 청바지 차림이었는데……. 원우는 혹시 헛것을 봤나 싶어 안경을 벗어 자신의 하얀 반팔 카라티에다 닦았다. 야, 전원우 넌 안경닦이를 갖고 다녀라. 민규가 쫑알대며 바지 주머니에서 안경닦이를 꺼내 원우에게 건넨다. 원우가 받아 드는 동안 지수는 구시렁댄다. 얘 또 숨었네…, 하고.
순영아.
불렀다. 원우는 그 찰나에 들은 이름이 예쁘다고 생각한다. 불러도 몇 초 응답이 없어, 지수는 아예 밖으로 나가 거실에서 한 번 더 소리쳤다.
순영아!
어?
높은 음성이 반응했다. 거기서 뭐 해. 순영은 주먹을 쥐고 전신거울 앞에 서 있었다. 지수가 다가가 순영의 어깨를 잡아끌었다. 네가 나한테 부탁한 일이잖아, 왜 숨어있어. 지수에게 끌려온 순영이 방 안으로 들어오니 은미가 친화력을 뿜으며 다가와 순영의 손에 깍지를 꼈다. 지수는 순영을 원우와 민규에게 소개했다.
은미랑 마찬가지로 영대 사학과. 근데 얜 86학번이라 나랑 아는 사이고, 동갑이고. 겉으론 여리여리해 보여도 그렇게 보지 마. 우리에게는 선봉장이야.
순영이 움찔했다. 앞머리에 가려져 안 보이던 눈썹이 움직임으로 인해 반쯤 보였다. 꿈틀거리더니 서운한 얼굴이 된 순영이 지수의 손을 쳐냈다.
홍지수. 말했잖아, 여리다는 표현은 나와 안 어울린다고.
그 말에 지수가 멋쩍게 웃는다.
아, 미안. 순영이는, 음…. 강건하지. 근데 저번에 그 남자애들이 하도 너를 평가해가지구… 겨우 한번 본 자리였는데 말야. 뭐랬더라, 너한테 상식 문제 맞혀보라고 막 거들먹거리면서 문제 내다가 네가 사학개론 꺼내면서 이걸로 너네 머리 맞추기 전에 입 닥치라 했잖아. 그랬더니 걔네가 너 여리여리하고 착한 줄 알았는데 어떻게 그런 말을 하냐며 완전 들짐승이라고 막. 오산이었다고 막… 짜증 나게. 혹시 또 그렇게 생각할까 봐 미리 말해두는 거야.
그때 그 삼 대 삼 미팅?
은미가 순영의 허리를 두 팔로 껴안고는 어깨에 얼굴을 비비며 말했다.
그거 결국에 언니가 언니 지식으로 다 발라놨잖아, 걔들 철학과였는데.
어. 내가 다 발랐지.
그러자 단숨에 지수와 은미, 순영이 저마다 밝게 웃었다. 민규도 아무것도 모르지만 일단 그들을 따라 웃었다. 원우는 자기도 웃어야 하나 고민하고 있었는데 순영이 그 틈을 파고들어 원우에게 손을 건넸다.
권순영이야. 네가 원우?
순영이 내민 손을 머뭇거리던 원우가 맞잡았다.
안녕하세요, 누나. 저는 김, 민규라고 합니다. 민규도 예의 바르게 고개를 까딱하고 악수를 청했다. 그러다 보니 얼떨결에 엑스자로 팔을 꼬아 인사를 하게 되어서, 순영은 살갑게 웃었다. 그래서 그냥 원우도 웃어봤다. 어색하기 짝이 없어도.
오후 햇살이 어깨 위에 앉은 지 꽤 되었다. 인사를 마치고 최종적으로 만나게 된 다섯의 흐름은 이 시점으로부터 출발을 알린다. 지수가 순영의 옆에 섰다. 머릿속에서 생각을 꺼내 진지한 어투로 잔잔하게 읊었다. 앞서 내가 말한 거 있잖아, 우린 그대로 해야 해. 순영이는 행동으로 선두로서 나설 거고. 원우랑 내가 글을 쓸 거야. 밤마다 편집실에서 작업하면 유월이 끝나기 전까지 어쨌건 대략 백 부이상 찍어낼 수 있을 거야. 그리고 민규는 은미랑 함께 움직여. 은미가 영대 동기들이나 다리 건너 신촌에 대학 다니는 애들도 소개해 줄 거야. 걔들도 우리랑 같은 목적이고, 목표고, 그리고.
지수는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목이 멘 탓에 더는 말할 수 없었다. 혀로 입술을 축여봐도 말이 이어지지가 않았다. 아래에서 올라온 소식을 학보사 학생기자들을 통해 들을 때도 이런 기분이었다. 지수가 고개를 떨구자 순영이 머뭇거리는 지수를 대신해 둘 앞으로 한 발짝 내디뎠다. 미안하지만 나는 너네 믿는다 이런 말 거창하게 하고 싶지 않아. 그래서 일부러 기대도 높이 안 할 거야. 그렇지만. 각자가 할 수 있는 만큼을 우리와 함께 해줬으면 좋겠어. 그렇게 만들 거고. 그렇게 되면 더 바랄 것 없을 거 같다.
일말의 움직임으로 일각을 변화시켜라. 딱 일주일 전, 순영이 <영화 학보>에 발표했던 글월의 첫 구절이었다. 지수는 원우와 민규에게 그 전문을 읽어주며 함의를 고취하게 했다. 듣는 내내 원우는 순영의 얼굴을 뚫어지게 봤다. 경외감이 들었다. 순영의 작은 손, 수수한 머리 모양, 편한 나팔 모양의 청바지 차림은 원우의 마음을 요동치게 이끌었다. 내가 따라야 하는 사람. 나를 이끌어줄 사람. 그러니 순영에게 반한다. 그건 사람과 사람 간의 도리에서 나오는 당연한 이끌림이었다. 다섯은 소파에 앉아서 긴요한 담화를 오갔다. 아직은 매미도 울지 않는 초여름의 문턱에서 순영은 긴장보다는 평온했으며 단단함이 있었다.
할 거지?
원우의 시선을 느꼈는지 순영이 적막한 공기를 깼다.
할게요.
민규가 조용히 끄덕이고 원우가 말했다. 순영은 섣불리 나온 그 대답이, 굳어버린 그 표정이 마음에 들었다. 혹여나 그 말이 선의에 의해 홧김으로 지껄이는 발언이 아니라면. 만약 오래 머금고 있을 다짐이라면. 여름 결정같이 투명한 얼굴을 빤히 바라본 탓인가. 순영은 먹먹하고 굳센 그 얼굴에 설은 기분이 들었다. 순영. 필요해? 지수가 주머니에서 꺼낸 담뱃갑을 순영의 시야에 들어오게 들었다. 순영이 손을 뻗는다. 땡큐. 담뱃갑을 던진 지수는 민규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옆에서 보고 있던 원우가 벽에 기대고 있던 몸을 돌려 순영을 본다. 지수와 겹쳐 보였다. 누나도 원래 담배 피워요? 아니. 여기 와서 피웠어. 왜, 너도 배울래? 신발 끈을 조여 맨 순영이 쭈그려 앉았던 몸을 일으켜 원우를 마주 본다. 손가락 사이에 연초 하나를 끼우고 입에 물었다. 살며시 고개를 끄덕이는 전원우. 순영이 미소 지었다. 확 들이마셔. 이를 드러내며 웃는 순영에 원우는, 어떻게 그렇게 말해요….라고 하고팠는데 참았다. 기대에 찬 눈이 앞에 있어서였다.
으…. 안 좋아요. 숨을 마셔 연초 끝을 빨았다가 목이 막혀왔다. 순영이 손을 올려 캑캑거리는 원우의 등을 두드렸다. 이 안 좋은 걸 왜 해요. 눈시울이 붉어진 채로 울먹이는 그 모습은 고작 한 살 차이였어도 어린 티가 났다.
참견이 심하다.
순영이 낄낄대며 대적하자 원우가 순영을 얄미운 얼굴로 노려봤다. 순영은 머리를 하나로 높이 올려 묶으며 담배를 태웠다. 드러나는 목덜미는 땀으로 흥건했다.
누나 더우세요?
응.
하늘은 투명하고 푸르러, 올려다볼만했다. 원우도 순영을 따라 하늘을 봤다. 지붕 아래, 응달에 있었는데도 시야만큼은 밝고 찬란히 빛났다. 눈이 시릴 정도로. 별안간 선선한 바람이 머리 위를 휩쓸고 지나갔다. 머리카락이 흩날려 눈앞을 가로막아서, 순영은 갈구 치는 머리를 귀로 넘겼다. 시선 끝, 상공에는 비행기 한 대가 직선으로 지나가고 있었다.
어떡하지. 더 더워질 텐데 앞으로.
밑에 두었던 가방을 멘 순영이 바닥에 재를 떨어트렸다.
학교 내에 벽보가 붙여지기 시작했다. 군중에게 올리는 선서다. 우리들의 외침이라는 제목으로 올려진 벽보는 시도 글도 노래도 뭐라 딱 꼬집어 얘기할 수 없는 이야기나 짧은 대목으로 줄줄이 써 내려진 긴 타래를 이었다. 신문방송학과 주체로 벌이는 일이 아닌, 성원대 홍지수와 영화 여대 권순영의 자체적인 합작이었다. 전원우는 기삿감을 찾았다. 본교뿐만 아니라, 호외 식으로 만들어 권내 학교의 모든 학생에게 뿌리는 게 목표였다. 집회는 집회의 날짜가 정해지면 우선 싣고, 알리는 식이었으며 청년들의 참여를 종용했다. 민규는 지수의 방에서 흰 천 위에 문구를 적었다. 그 탓에 책장 아래엔 매상 신문지가 산더미처럼 쌓여있었고 중첩된 화학 냄새가 났다. 시위하고 돌아오면 찢어진 것들을 다시 합치느라 바빴다. 새로 갈고, 메꾸고, 만들었다. 세 명은 그 방에 자주 들락날락거렸고, 셋이 바쁘게 뛰어다닐 때, 지수와 원우는 학교 편집실에 붙어있었다. 가끔 경비에게 걸릴까 싶은 날에는 집으로 와서 방에 촛불을 켜놓고 작업했다. 열 시, 순찰대가 동네를 순회하기 전에 움직여야 했으니 졸음보다 앞서 뛰어야 했다. 눈꺼풀이 내려와 자꾸만 눈이 감길 땐 얼굴을 강하게 때려 잠을 깨웠다.
가두집회가 열리는 날은 은미가 주먹밥을 가져왔다. 광장 계단에 앉아 있는 순영 옆에 앉아 은미는 가방 속에 있던 것을 꺼내 들이밀었다. 모르겠다. 엄마가 데모할 때 먹지말구 시험 치기 전에 먹으라 했는데. 어쩔 수 없지 뭐. 앞 약국에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천막이 버티고 있는 슈퍼마켓에도. 교문 앞에도 끼리끼리 모여있었다. 비장한 머리들이 많았다. 다들 무기를 쟁여오려는 것이다.
이게 뭐야, 며칠째 제대로 밥도 못 먹고. 언니야 저번에 청량리 가는 버스 탈 뻔했다며. 애들이랑 지수 선배가 얼마나 걱정하던지. 은미는 한탄을 하며 가만히 있는 순영에게 주먹밥을 물렸다. 순영이 우적우적 주먹밥을 입에 넣었다. 양 볼이 부풀었다. 괜찮아?
은미야…. 언니 미니스커트 좀 빌려주라.
은미는 잠깐 뜸을 들이다 의아한 표정으로 왜냐고 물었고, 순영은 은미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원우가 할 수 있는 일은 한정적이었다. 야학 시간에 편집실에서 수기를 집필하고 쪽잠을 자는 일. 가끔 부모님에게 안부 전화를 거는 일. 멀리 떨어져 있는 이복동생 찬을 생각하는 일. 지수와 민규와 은미, 그리고 순영의 안위를 걱정하는 일. 일은 많았다. 많은데 한정적이었다. 궁금했다. 왜 하필 나였을까. 원우는 빙빙 돌아가는 환풍기를 보고 문득 궁금증을 가졌다. 지수가 자신과 민규를 데려온 일에 대해서 원우는 모르긴 했다. 그러나 사실, 지수가 원우를 택한 건 이유가 있었다. 지금으로부터 얼마 전, 순영이 다급하게 지수를 찾아온 밤이었다. 우리 학교 벽보가 다 떼어졌어. 신방과 애들이 학교가 막는다고 손을 쓸 수 없대. 게시판 글을 다 검열한대. 학보사는 아예 발간도 못 하고. 계단을 빠르게 내려가면서 지수와 순영은 둥둥 크게 뛰는 소리가 발소리인지 저들의 심장 소리인지 분간하기 어려웠다. 학교 당국의 편집권 침해라고, 말이 돼? 순영은 재킷을 고쳐 입었다.
우리 쪽은 인원이 아예 없어. 우리 과실에서 도시락도 못 시켜 먹어. 배달원이 꼰지를까 봐. 걸릴까 봐. 순영은 머리를 하나로 높이 올려 묶고 앞머리를 손으로 털었다. 그리고 지수를 마주 보고 단호한 부탁을 했다.
그러니까 너희 쪽에서 한 명 붙여줘. 글 잘 쓰는 애로.
지수가 주변을 돌아봤다. 때마침 운동장 한가운데서, 공을 모는 남자애 한 명을 발견했다. 지수는 희미하게 웃었다. 전원우라고. 우리 과 후배야. 지수의 시선이 향한 곳을 순영도 바라봤다. 희멀건 막대 같은 남자애는 흰색 면티와 면바지가 아주 잘 맞아 보였다. 순영은 낯설지 않은 이름을 곱씹었다. 원우… 전원우.
전원우. 이름 세 글자에 순영의 눈이 번뜩였다. 쟤가 우리의 축이 될 수 있을 거 같아. 무슨 소리야, 어떻게? 나 쟤 알아. 쟤가 쓴 글 봤어, 예전에. 쟤 글의 서사라면 아무도 쟤 못 이길 거야, 아마. 순영이 급하게 가방을 열었다. 어렸을 때는 옆집이었어, 아주 잠깐. 아침마다 대문 앞에 나와서 자기가 쓴 시 읽으면서 등교하던데. 그때가 중학생 때였고……. 순영이 꺼낸 것은 대학 소식지였다. 동네마다 있는 대학들의 월별 발간지를 하나씩 모았던 것이다. 순영은 성원대학의 것을 꺼내 메모지로 표시한 쪽을 열었다. 원우의 단문이 실려있는 페이지였다. 순영이 건네준 글을 읽어가던 지수는 흥미가 돋았다. 특이하지.
응. 잘할 수 있을 것도 같고. 순영이 지수의 말에 동의했다.
갈수록 시위는 격해졌고 자주 있었다. 순영은 반팔티와 면바지에서 블라우스와 미니스커트로 갈아입었다. 일종의 변장이었다. 그리고 어디 숨어있다가 나올 땐 화염병을 들고 나타났다. 가방에서 꺼낸 술병을 저 멀리 던졌다. 던지고 튀었는데, 쫓아오면 하이힐을 벗고 달렸다. 속도가 빨라졌으니까. 그렇지만 발이 아스팔트 길과 마찰할 때마다 발바닥에 열상을 입는 듯했다. 교문에서부터 아래로, 계속 내달렸다. 은미와, 민규, 그리고 지수와 함께. 그 모습을 원우가 편집실 창문으로 내다봤다. 돌아가는 인쇄기를 뒤로하고 창문에 붙었다. 순영은 보통 입던 차림새와는 생판 달랐다. 올려 묶던 머리를 풀어헤치고 꼬아냈다. 전심전력으로 달리는 중이라 파마머리가 뒤로 자꾸 넘어갔다. 거리에 핀 화염 때문에 아슬아슬하다. 원우는 점퍼를 걸치고 밖으로 나갔다. 출력한 전단을 품에 안고 뛰었다. 내디딜 때마다 종이가 펄럭거렸고 다리는 후들거렸다. 바람이 칼같이 볼을 때렸다.
누나! 원우가 부르자 순영이 돌아봤다. 원우는 헐떡거리며 순영에게 다가갔다. 편집실은 어떡하고 왜 왔어.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누나 머리랑… 왜, 왜 그래요? 순영은 불을 붙인 화염병을 든 손을 내렸다. 아스팔트에서 올라오는 열기에 손이 뜨거웠다. 순영이 머리를 콩콩, 쳤다.
골 빈 년처럼 보여야 안 잡혀가.
네?
저 새끼들은 오질 나게 머리가 안 굴러가는 놈들이라 생각하는 게 딱 거기까지 거 든.
화염병을 하나 더 내리꽂았다. 불길이 확, 하고 타올라서 도로로 번졌다. 순영은 그걸 바라볼 새도 없이 내려놨던 하이힐을 한 손에 들고 다시 달렸다. 맨발로 아스팔트 길을 달음박질쳤다. 자유자재로 뛰는 발이 너무나도 위험했다. 누나! 발 들어요. 발, 발에서 피나요! 원우의 부르짖음에 순영이 발을 봤다. 하필이면 유리 파편을 밟았다. 잘그락거리며 유릿가루가 발바닥에 달라붙었다. 사선에 서있던 원우가 달려온다. 원우는 어디선가 손수건을 가져와 순영의 피 묻은 뒤꿈치를 닦아주었다. 크림색 손수건에 붉은 피가 묻어 나왔다. 시위가 끝나갈 무렵이었다.
모두 흩어지는 길에는 원우가 순영을 업고 걸었다. 그 옆을 민규와 은미가 지켰다. 셋씩 지쳐가고 한 명씩 돌아오지 않았다. 누구는 어디로 갔다더라, 하는 말이 뒤에서 돌았다. 다섯은 초조해졌다. 인력은 많아야 했으나 부상은 최소로 없어야 했는데. 순영은 걱정했다. 걱정이 머리를 짓누르는데 머리 위로는 발개진 노을만이 지키고 있을 뿐이었다. 지수와 순영은 학교 안으로 들어가 담배를 태웠다. 교문 옆 화단에서. 민규가 쭈그려 앉아 밖에서 망을 보고, 원우는 약국에서 손이 까진 은미를 도와줬다. 은미의 손에 반창고를 붙였다. 순영은 지수에게 원우는 글을 써야 한다 했다. 원우가 할 일은 그거라고 했다. 원우가 내는 목소리가 글로 퍼지는 것이 얼마나 중대한 일인지 알아야 한다 했다. 지수는 그렇게 하자며 고개를 끄덕였고 순영은 땀에 젖은 앞머리를 떼어내며 숨을 골랐다. 나머지 셋은 둘이 있는 곳으로 갔다. 다시 모인 다섯 명은 편집실로 들어갔다. 아직 문이 잠겨지지 않았다. 조사관이 오지 않은 것이다. 원우가 안도의 한숨을 뱉는 새에, 넷은 내일의 계획을 세웠다. 내일은 신촌의 대학생들과 연합하는 날이었다. 점점 시끄러워지고 목소리가 오갔다. 저는 무얼 하면 될까요. 원우는 기침을 하며 일어난 자리에서 반팔 셔츠를 걸쳐 입었다. 순영이 원우를 빤히 올려다본다. 웅성거리던 분위기가 일순간에 조용해졌다.
너는 여기서 글을 더 써.
그러자 원우는 한순간에 굳어버렸다. 싫어요. 원우가 대적하더니 문을 열어 밖으로 나가버린다. 당황한 순영이 원우를 따라 나왔다. 야, 원우야. 불렀다. 어둠이 살짝 내린 복도에서 둘은 마주 봤다. 원우는 벽에 기댄 순영에게 붙어 속살거렸다. 서러운 눈이었다. 누나는 왜 자꾸 내가 글만 쓰길 원해요? 순영의 소매를 잡았다. 원우에 의해 팔이 들어 올려진 순영은 당황스럽게 원우를 바라봤다. 나랑 같이 있으면 되잖아요. 원우는 딱 부러지게 말했다. 끼고 싶다고. 빠질 수 없었다. 끼어야만 했다. 머릿수를 늘리는 일만큼 중요한 건 없었으니까 중요했다. 원우한테는 민규도, 은미도, 지수와 순영이가 모두 중요했다. 어쩌면 자신보다 더. 하지만 순영은.
언젠가는 우리가 하는 일을 누군가 알아줄 날이 오겠지. 그걸 기록하는 사람이 난 너였으면 좋겠어.
순영은 원우가 본인의 일을 했으면 했다.
누난 정말 큰 사람이에요…… 제 눈엔 그렇게 보여요.
감히 내가 따라가지도 못할. 원우는 순영의 말에 대꾸할 여력을 잃어버렸다. 자신은 기록해야 할 사람이 맞았다. 편집실에는 아직 펜이 남아있고 타자기가 있고 해야 할 말이 있으니까. 담요를 뒤집어쓰고, 촛불을 켜고 아무도 모르는 일을 아무에게나 알리기 위해서. 모르는 일이 되지 않기 위해서. 원우가 잡았던 소매를 놓자, 순영은 원우에게 고맙다는 말을 끝으로 밖으로 나갔다. 그날은 그렇게 밤이 되었다.
정권을 타도하자! 악에 받친 얼굴들이 기를 쓰며 대각으로 가두를 달려온다. 새 아침이다. 뒤따라 여러 명이 줄줄이 뛰쳐나오며 양쪽 모퉁이로 제각기 갈라졌다. 우리는 우리의 국가가 필요하다고 붓으로 휘갈겨 쓴 현수막 반만 한 천 조각을 든 청년들은 달려오더니 주차된 차에 색깔 라커를 뿌려대기 시작했다. 널찍한 짙푸른 색 보닛이 엉망진창이 된다. 금방 여럿이 위로 올라가 섰다. 원우는 못 참고 밖으로 나왔다. 자신만 안에서 안주할 수 없었기에. 시위대가 물결처럼 밀려들어 왔고 경찰대도 직진했다. 그 순간, 모퉁이를 돈 원우의 앞에 최루탄이 날아들어 와서 떨어졌다. 코앞에서 터져 올라오는 매캐한 가스에 눈이 따가웠다. 주춤거리며 눈을 비빈다. 혼란스럽다. 전파가 나간 텔레비전처럼 시야가 깜깜해져만 갔다. 그런데 그때, 갑작스레 무언가에 의해 손이 잡혔다. 나야. 순영이었다. 순영은 원우를 빈 건물 사이의 골목으로 끌고 들어갔다. 후끈한 열기에 두 사람 다 피부가 타들어 가는 듯했다. 순영은 치마 뒷주머니를 뒤졌다. 꺼내 보인 것은 담배. 라이터를 꺼내 불을 붙였다.
저한테 뭐 하는 거예요, 누나….
이래야 해. 그래야 안 따가워.
원우의 안경을 벗긴 순영은 담배연기를 원우의 얼굴에 내뱉었다. 원우는 콜록거리면서 간신히 눈 한쪽을 떴다. 순영이 들고 있는 안경엔 더운 김이 서렸다. 역한 탄내와 담배 향이 섞여 건물 사이 골목이 금세 뜨거워졌다. 눈이 발개지고 서러웠다. 나오지 말라 했는데 어겼으니 순영이 어떤 말을 하던 받을 준비가 되었다. 그런데 순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담배 연기를 얼굴로 받으면서, 울먹이던 원우가 서서히 감고 있던 반대쪽 눈도 뜨고 가늘게 숨을 고르자 순영은 피우던 담배를 발로 짓이겨 껐다. 그리고 자신의 피가 묻은 손수건을, 원우가 일전에 줬던 손수건의 반대쪽 면을 원우에게 쥐여주고 그 손으로 입을 가리게 했다. 원우는 순영의 눈을 주시하며 콜록거렸다.
바로 나가지 말아요.
아니야, 가야 해.
그럼 정하고 가요, 어디로 갈 건지.
목소리가 손수건에 묻혀 웅얼거렸다. 순영은 잠시 생각하다가 원우에게 안경을 돌려주었다.
영등포 로터리.
알겠어요. 거기서 만나요.
원우가 돌아섰다. 돌아서자마자 멀어지려는 원우에 순영은 조바심이 났다. 그쪽으로 가면 너무 멀다.
야! 너 지름길로 가.
순영이 자신의 뒤쪽으로 보이는 도로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 손가락이 알려주는 길을 본 원우는 유연한 태도로 자신이 가려는 쪽을 가리키며 반박했다.
지름길 거기 아니에요! 이쪽이 맞아요.
원우가 정정하자 순영은 조금 안심이 들었다. 원우는 지름길을 따라 자기 길을 걸었고, 점점 멀어지더니 얼마쯤 가다가 뒤돌아 순영을 향해 입을 한쪽 가린 채 소리 질렀다.
먼저 가 있을게요. 우리 또 봐요. 또 봐요, 우리!
손차양을 만들어 햇빛을 가린 순영은 원우에게로 빨리 가라고 손짓을 보냈다. 그래, 또 보자. 못 뱉은 약속을 속으로 삼키고, 순영은 뒤를 돌았다.
투쟁은 계속될 것이다. 계속되지만 끝은 보일 것이다. 그 과정을 모두 감내하고 싸워야만 막판엔 승전보를 올리게 될 것이다. 원우가 가는 방향을 등지고 사거리를 걸어가는 순영은 먼지처럼 시야에서 멀어지고 있었다. 원우는 걷다가 마침내 달리는 순영의 뒷모습을 지켜보다 앞을 향해 뒤돈다. 실은 반대였다. 순영을 지름길로 보내고 큰 길가로 나온 것이다. 원우는 마른 피와 땀으로 젖은 크림색 손수건을 움켜쥔다. 그리고….
받지 말걸. 받지 말고 누나에게 내 흔적으로 남겨야 했는데. 생각하며 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