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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21. 2. 10. 12:02
작성자
hhh..

 

순영아, 나 나갔다 올게. 저녁때쯤 올 거라서 내가 늦으면 먼저 밥 먹구 있어, 거르지 마! 부르는 건 자유다. 철자 사이에 다정함은 토대고. 지킨 적은 손에 꼽아도 꼬박꼬박 목적지와 귀가 시간을 일러주는 것은 어느 모로 보나 분명 선택이지만… 매너라는 테두리 안에 정착한 정한의 버릇에 순영의 시간은 정한이 나서자마자 똑딱거림을 중단한다. 이상하네……. 오늘도 권순영은 고민한다. 동거인이 자꾸 집을 비워둬서인지 언제부턴가 꾹꾹 눌러 담아도 방 안에 꽉 끼어버리는 외로움이, 커져 방 밖으로 삐져나오는 일이 잦아졌다는 것을. 마치 PAUSE 버튼이 눌린 무형 무성의 오디오 속에 들어와 있는 기분을 윤정한은 아는지 모르는지.

같이 살자고 몸을 욱여넣어 입주한 윤정한 씨에게 권순영 씨는 그동안 덧쌓인 궁금증을 되살펴본다. 이것은 무얼까. 산책하러 가자며 사람을 일으켜 세우고. 내 냄새가 좋다면서 목에 얼굴을 부비고. 밤에는 같이 한 침대에 누워서는 안 자는 걸 뻔히 아는데도 자느냐고 자꾸만 묻고. 친구들이랑 실컷 놀다 들어와서는 내내 네가 보고 싶었다 하고. 초여름에는 장미 덩굴이 끝없이 이어지는 벽돌담을 따라 손을 잡고 걷고 또 힘이 든다고 내 어깨에 기대어 잠들고. 그것들은 모두 정한이 순영에게 행하는 불가결의 행태. 순영은 혼란이란 싱크홀에 빠졌음을 며칠 전에 알아채었다. 공공연한 사실로 정한은 유연한 사람이었다. 연속적인 불편에도 능숙하게 아무렇지 않은 척, 사람을 대함에 가감이 없이 자연스럽게 물드는 사람. 몸에는 다정이 베였다. 몸에 서린 그 다정함을 누구나 좋아했으며. 누구나 정한을 사랑했고 달가워했다. 그러나 정한은 모든 걸 포기하고 서울에서 내려왔다. 작년 봄에. 같이 살아달라는 말과 함께 현관 문 앞에서 순영을 기다렸다는 오 월의 첫 장에는 둘의 동거로 시작되는 것이다. 순영이 기숙사에서 나와 자취를 할 때였다. 어떻게 진짜로 왔지? 차가운 문을 열자 보이는 건 노란 머리로 탈색한 윤정한이었고 오고 싶음 와, 한마디에 이렇게 올 줄 몰라 놀란 순영은 눈을 끔뻑거리다가 환하게 웃었다. 뭐 어때. 마침 룸메 구하고 있었으니까. 

정한은 계란 프라이처럼 눌어붙었다. 소파 침대 베개 어디든. 심지어는 순영의 등에도. 순영은 한 몸에 두 명으로 사는 심경이었다. 그래도 정한은 곁에서 숨 쉬었다. 몸 붙였다. 하지만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그렇지. 시간의 흐름이 유대와 친애를 우리 사이에 엉겨 주었다 해도 그렇지. 왜 내 것을 마냥 자기 것처럼 쓰는지. 어떨 때는 자신의 물건과 정한의 물건을 이분법으로 나누어야 하는 게 아닌지까지 고려했다. 정한의 것들과 순영의 것들. 감정과 감성조차도. 그렇다면 둘의 관계도 이분해야 하는가. 자신의 청록색 체크 남방셔츠를 입고 밖으로 나간 정한의 뒤로 큰 소릴 내며 닫힌 현관문을 보며 고민한다. 나를 왜 가만히 내버려 두지 못해 안달인지, 에 대해. 누구보다 열심히.

 

동창은 얼굴을 일그러트린다. 파하지 않고 이어진 자리는 빈자리의 주인을 애타게 기다리는 중이다. 마침내 자리의 주인인 정한이 나타나자 그제야 동창은 안도의 한숨을 쉰다. 그리고 정한과 함께 들어오는 또 다른 얼굴. 다른 얼굴? 동창은 캐주얼한 차림의 순영을 재빠르게 스캔한다. 어, 그거 어제 정한이가 입었던 옷… 아냐? 흘리듯이 동창이 묻는다. 정한은 흰 캡 모자를 푹 눌러쓴 순영이 고개를 숙이는 것을 본다. 아… 이거? 순영이가 입어보고 싶대서. 순영은 어이가 없었다. 아이, 형. 거짓말하지 마. 그리고 한마디를 덧붙인다. 자기 옷인데 형이 막무가내로 입고 다닌다고. 식사가 끝날 기미가 안 보인다. 정한은 오랜만에 만나는 동창과 쉼 없이 얘길 했다. 은빛 포크로 매쉬 포테이토를 깨작거리며 둘을 본다. 정한은 기분 좋은 웃음을 짓는다. 상대방의 기분을 위해. 그리고 본인을 위해서도. 원체 어색한 상황을 못 견디는 성격이라 그런 상황이 닥치면 외려 말이 많아지는 낯가림 소유자 정한은 순영이 보기에 너무 귀여웠다. 동창은 물었다. 그런데 정한아, 너 왜 그렇게 말도 없이 내려갔냐? 서울에 계속 있지. 당연히 역삼에 있을 줄 알았더니 전화하다 깜짝 놀랐잖아. 너 서울 아니라 해서. 아는 동생 집에서 같이 산다고. 뭐였냐, 우리가 싫어진 거야?

아는 동생. 문장에 온점이 박혔고 순영은 포크 질을 멈춘다. 본능에 이끌려 정한에게로 돌리는 시선. 정한은 방긋 웃는데 순영은 여러 차례 눈을 깜빡거린다. 몸이 찌르르 굳는다. 순영의 몸에 정한이 바짝 기대 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너희가 싫은 게 아니라, 순영이가 좋아서. 나 대학 다니기 시작하면서 순영이는 혼자 지냈으니까. 옆집 사이인데 우리가 그냥 형 동생 우정이니. 엄청 친하지. 그러자 동창은 눈썹을 산 모양으로 만들고 능글맞게 웃었다. 그렇게 친해? 순영아. 너도 그렇게 생각해? 하지만 순영은, 아… 그럼요. 바보같이 웃을 수밖에 없었다.

 

시간이 흘러 밖으로 나간다. 시곗바늘은 어느새 낮에 다가와 위치해 있다. 동창은 손을 흔들며 돌아갔고 정한은 순영의 손을 잡고 걷기 시작했다. 순영은 말없이 정한과 함께 걸었다. 주택가가 가까워지자 손에 땀이 찼다. 순영이 손을 놓으려 했지만, 정한은 놔주질 않았다. 그때 비좁은 통행로에 차 한 대가 들어선다. 나란히 가던 둘은 한 줄로 서서 차를 피했다. 순영은 자신이 입고 있는 청록색 체크 남방과 비슷한 셔츠를 입은 정한의 등을 보다가 목소리를 낸다. 마음 깊은 곳에 담아두던 간지러움을 토해낸다.

형 있잖아.

응.

형은… 내가 정말 좋아?

부름에 신난 음성으로 대답한 것에 비해 진지한 목소리로 묻는 순영. 어? 정한이 뒤를 돈다. 마주한 얼굴은 내리쬐는 햇빛 때문인지 살짝 찌푸린 얼굴이었다. 애가 타는 모양이다.

그래서 그러는 거야?

뭐가?

순영이 살짝 입술을 깨문다. 좁은 골목에는 차가 끊임없이 꼬리를 물고 따라 들어온다. 둘의 배경에 깔리는 굉음의 시퀀스. 순영은 화난 어투였다. 나 좋아한다고 남들한테 말하고 다니잖아. 어리둥절하던 정한은 입술을 삐죽이는 순영이 귀여웠다. 당연하지. 순영이가 너무 귀엽고 좋아서 그러는 거지, 근데 그게 왜?

전깃줄에 새들이 앉아있다. 바람이 둘의 머리 위로 자리한다. 순영은 말을 않는다. 정한은 멀뚱히 순영을 본 채 서 있다. 얼마가 지났을까. 천천히 세상이 한산해지자 순영이 말문을 연다. 그리고 그 후로부터 정한은 커다란 대바늘 몇십 개가 한 번에 심장에 꽂힌 기분이 된다. 그게…… 좋아? 하는 순영의 목소리에.

내가 형만 졸졸 따라다니는 게? 그냥 내가 군소리 안 하니까 편해서 그런 거 아니야? 형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대상이잖아, 나는. 형 입장에서 부담 없잖아. 형 원래 불쌍한 사람 못 지나치니까.

몸 안이 가렵다. 혈관에 유리라도 박힌 것처럼. 정한은 무슨 말을 하려다가도 입을 다문다. 되게 아름다운 꽃들이 핀 골목인데. 날씨가 좋아 바로 잠들 수 있는 날인데. 순영은 곧 울 듯한 얼굴이고 정한과 순영의 거리는 한참 멀어져 버린다. 우리 중 누구에게 잘못이 있지? 정한은 두 눈을 감았다 뜬다. 아무도 잘못이 없다. 시간이 덧없이 느릴 뿐이다. 세상이 우리만 남은 것처럼 하얘진 것뿐이다. 순영은 스니커즈로 아스팔트 바닥을 찬다. 물기 어린 음성이 정한에 귀에 꽂힌다. 진짜… 왜 그렇게 다정해서……. 차라리 형이 아무 이유 없이 하는 행태가 나에게도 아무 이유가 아니라면 어떨까. 모든 일에 의미부여를 새로 하는 것도 지치고 혼자만의 사랑도 지쳤다. 지쳐서 녹아 색색이 물이 든다. 순영은 발길질을 멈추었다. 나를 진심으로 좋아한다면 좋아한다고 쉽게 말하지 않아야지. 마침내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을 정도로 사방이 조용해지자 순영이 고갤 들었다. 가까이 다가간 정한은 손을 뻗어 붉어진 순영의 볼을 쓰다듬으려다……

앞으로 내 옷 맘대로 입지 마, 형. 말없이.

온 몸이 서서히 조각났다. 정한은 당황을 감추지 못한 얼굴로 열이 오른다. 우리 순영이 왜 그래. 오늘 기분 안 좋아? 뭐 때문에 그래… 아까 걔가 너한테 뭐라 했었나? 아니면 내가 뭐 실수했어? 응? 아니. 그런 게 아니라. 그럼 왜.

난 그냥 내 옷에 형 향수 냄새가 묻는 게 싫어.

정한의 뒷말이 끊어진다. 순영은 항상 생각했다. 세상은 순리대로 이루어져 있다는 걸. 얼음 틀에 얼음이 떨어지면 새로운 물을 채우는 일 마냥 사랑도 마찬가지다. 사랑이 빠져나가면 새로운 사랑을 갈아 끼워 넣고 자리가 비면 새로운 마음을 집어넣고. 그런데 윤정한은 어떤가. 사랑을 끊임없이 주니까 마음이 비질 않는다. 물이 고이고 넘치셔 마르지 않으니 통 벗어날 수가 없다. 그러니 닮아 버린다. 내 어디를 봐도 윤정한에게서 옮겨붙지 않은 게 없는데. 없는데. 분명 사랑을 이렇게나 많이 받는데도 모자란 이유는 무얼까. 갈증에 허덕대는 원인을 도저히 모르겠다. 방금 한 말도 진심이 아니다. 마음대로 자기 옷을 입는 것과 같이 정한이 자신의 영역에 들어오는 것이 싫은 게 아니다. 그것은 원인이 아님을 순영은 무릇 안다. 그런데 왜 그런 변명을 둘러댔는지 알 수가 없었다.

야, 너 다시 말해봐.

형 냄새가 묻는다고.

그게 싫어?

다정하던 표정이 사라져버렸다.

그럼 내가 나갈까? 말과 함께 정한이 손을 뻗어 순영을 당긴다. 품에 들어올 수 있을 만큼. 너 지금 다른 룸메이트가 필요한 거야? 이제 나랑 못 살겠어? 정한은 감정이 격해진 순영의 얼굴을 차분하게 빤히 본다. 정한의 격양된 목소리. 날 서 있어도 다정하고 달래려는 듯한 말투다. 정한은 순영의 손을 잡고 걸음을 재촉한다. 깊게 숨을 고른다.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며 걷기만 하니까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그렇게 몇 분을 다시금 나란히 걸으니 어느새 순영의 집 앞까지 와버렸다.

순영아, 너는… 너는…. 내가 네가 없어도 살 것 같다고 너 그렇게 생각해? 정한이 발을 멈추고 순영을 본다. 순영도 정한을 마주 봤는데 순간 숨을 들이마실 수 밖에 없다. 정한의 눈 밑 가에 고인 눈물. 금방이라도 아래로 떨어질 것 같다. 턱 끝까지 차오른 왜 우냐는 말을 간신히 속으로 삼킨 순영은 붉게 변한 정한의 눈에 어쩔 줄을 모르고 정한은 축축한 서러움을 내뱉는다. 일부러 그래? 너 알면서 그래? 너는 내가…… 여기 온 뒤로 의지할 데는 너 하나밖에 없는 내가… 너 없이 못 사는 게 보고 싶어? 도대체 모든 말이 이해되지 않는 탓에 순영은 말했다. 나 없이 왜 못사느냐고. 형처럼 열심히 사는 사람이 내가 없다고 못 살 것 같냐고 그게 말이 되는지에 대해. 정한은 반론했다. 내가 열심히 사는 것처럼 보이는 건 착각이야. 외려 억울함을 먹는 것은 정한이다. 바보야. 왜 그렇게 무심해? 형 안달 나게 하지 마. 난 네가 내 거 같다가도 아닌 거 같을 때가 제일 힘들어. 나는 산책도 혼자 못해. 외로워. 기운도 안나. 너 없는 게 너무 싫어 죽겠어…… 순영아. 내가 널 길들였다고 그렇게 믿고 있지. 근데 아니야, 제대로 생각해 봐. 날 길들인 건 너잖아. 난 너 없으면 못 산단 말이야…… 어떡할 거야. 물이 고여 흘러넘친다. 순영의 마음과 정한의 눈에. 정한의 눈물이 볼을 타고 바닥으로 뚝뚝 떨어지는 동안 순영은 정한을 어설프게 껴안고 천천히 등을 두드린다. 숨을 색색 고르는 정한은 순영의 어깨에 얼굴을 파묻는다.

그러니까 나를 사랑해. 너 할 수 있잖아. 할 수 있으면서, 나 좋아하면서.

어? 형이 좋으면서. 어깨가 차가워진 순영은 한껏 누그러져서는 정한을 살며시 떼어놓는다. 성이 났지만, 자신의 행동에 그대로 흔들리는 정한에 순영은 웃음이 나면서 안도한다. 깨닫는다. 정한의 불가결한 행태를 당연시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바보 같아, 진짜 너 바보야. 이해가 안 가. 왜 네 목에 얼굴을 비비면 기분이 좋아지는지. 넌 왜 자꾸 군말 없이 어깨를 내주는지. 어디든 가자고 하면 일어나 졸졸 따라오는 것도 그렇고, 내가 잠들고 나서야 잠을 자는 것도 그래. 너는 내가 시끄러운 거 싫어하니까 일부러 내가 먼저 자기를 기다리는 거잖아. 나 다 알아. 알고 있었어. 게다가 또 뭐야. 내가 집에 없으면 맨날 전활 하고 문자 보내고 올 때까지 기다리는 것도 그래. 같이 걸을 때 아무 말 없이 내 손을 잡는 것도……. 짜증 나. 반칙이야. 이게 사랑이 아니면 뭐야. 네가 날 좋아하는 게 아니면 뭐야? 바보 같애. 정한은 같은 말을 반복하면서 구시렁거린다. 사랑한다고 말만 하면 되는데. 순영이 정한의 볼 위로 자국된 눈물을 손으로 살살 닦아내자 정한이 순영을 한 품에 껴안아 코를 맞댄다. 말해줘 봐. 사랑한다고. 깜빡이는 순영의 속눈썹을 바라만 보던 정한이 슬슬 눈을 감으니 순영도 따라온다. 심장은 정한의 품에 깊이 박혀 새 숨을 쉰다. 끝내 살포시 맞닿은 입술. 입술에선 딸기 솜사탕 향이 났다. 순영이 지금 입고 있는 청록색 셔츠에도 나는 같은 향이다. 옷도 짧아져서 이제는 봄도 아닌데 봄처럼 물이 든다. 투명하게 적셔오는 장미 덩굴 담벼락을 따라 함께 걷던 날의 기억. 순영은 앞으로 숨기지 않을 것이다. 사실은 처음부터 못 하는 것이다. 서로를 안고, 흘러가는 시간처럼 두둥실 떠가는 구름을 보다가 서서히 떨어지는 둘. 얼굴이 가까워 눈이 마주치는 그때, 콘페티 풍선이 머리 위에서 펑, 터졌다. 

아무튼 간 오 월의 한낮이다. 하늘을 수놓는 금색의 별 가루를 맞으며 우리는….

사랑을 해. 청명하고 푸른 하늘에는 함께 길을 걷고 싶은 까닭이 생성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