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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21. 2. 10. 18:03
작성자
hhh..

 

어떻게 하면 저 형을 내 남친으로 만들 수 있을까, 새내기 권순영은 혼잣말로 뇌까렸다. 숫자 과제는 끝이 났고 순영은 과제물을 제출하러 가는 그 짧은 시간 동안 성스럽고 고결한 감정에 뒤섞인다. 몸속에는 빈곤한 농한기를 겪는 듯하게 다 죽어가던 마음이 새로운 잿불에 피지직 타오르는 것, 그런 것, 어떤 것. 어떤 무수한 충동과 주인 향한 사랑이 피어올랐으나 남들 앞에선 없는 일처럼 일단 숨죽여보는 것이 천성. 엄숙한 수학교육의 질서에 버무려진 냉랭한 낯들이 한가득인 강의실을 얼른 벗어나며 순영은 정한을 앤디 워홀의 아트워크처럼 기억에 도장 찍어 본다. 얼굴의 반쯤을 차지하는 은테 안경 윤정한이 손을 살짝 들어 작게 흔들어줄 때, 냉랭 속에 가까스로 일렁대는 온풍……. 심장을 움켜쥐고픈 심정을 진정시키며 애써 괜찮은 척해보고 옆으로 맨 가방을 끌어당긴다. 천천히 와요, 형. 독서실에서 기다릴게요. 지나치며 어깨에 손을 올리고 입을 벙긋했다. 데시벨은 낮았으나 누군가에겐 높았을. 그런 목소리.

어떻게 해야 저 동생과 사귀는 사이가 될까, 윤정한은 턱을 괴어 고민한다. 눈짓을 하고 나간 순영의 뒷모습을 상기하다 얼굴을 손바닥에 파묻고는 뜨거운 이마를 식혀보지만 이미 열감이 도는 얼굴은 지독한 감기에 걸린 것 같았고 무거운 안경이 짓눌려 콧대가 아파져 왔다. 마지막으로 남은 정한이 퇴실을 하니 바깥에 있던 학생들이 정한을 멈춰 세운다. 선배! 점심 우리랑 같이 먹어요. 학생 한 명이 정한에게 바짝 다가와서 사랑스럽게 군다. 기하학, 위상수학. 연달아 있는 수업 일정은 마침 내일이라서 급하지가 않고. 아…, 나는 정리만 하고 독서실에 가야 해서……. 정한은 큰 눈을 깜빡거리며 양해를 구하는 선량한 눈빛으로 그들을 응망한다. 누구든지 그 모습에 반해 마음이 녹아내리지 않은 사람은 없었다.

순영이 때문에요?

응…. 꿉꿉한 눈두덩이를 누르기 위해 안경을 벗었다가 이목이 쏠린다. 끔뻑이며 눈을 지그시 떠보면 흔들리는 상 속에서 주변을 둘러싸는 실루엣들. 와…. 어떤 애는 탄성까지 내뱉는다.

왜 그래?

형은 왜 여친 안 만들어요?

어?

남자애가 한 손으로 핸드폰을 쥐고 정한을 흘깃 본다. 형 좋아하는 애들 많던데. 일부러 무시해요? 수교과 학생회장 잘생겼다고 신입생 애들한테 소문 많이 났는데. 그러고는 손가락을 누르면서 빠르게 무언가를 전한다. 정한은 순영이 아니라면 구태여 이런 관계를 적립해야 하나 싶은 마음에 변명한다. 내가 잘 어울리지를 못해. 그럼 권순영은? 왼쪽에서 의뭉스러운 물음이 튀어나온다. 걔랑은 잘 놀잖아요. 정한의 낯빛은 금세 어두워지고 몇몇은 시무룩하다. 우리하고도 놀아요, 형. 남자애는 퉁명스러웠고 이하 다수가 동감한다. 맞아요, 맨날 권순영이랑만 얘기하고. 우리랑도 얘기 좀 해요. 정한은 가끔 자신을 추천한 전임 회장을 원망하기도 했다. 학생들 사이에 껴서 소분화되는 정한. 그들은 자신의 일부를 하나씩 뜯어 나눠 가지기를 원하고. 연애 안 하면 죽니. 정한은 유성애 중심 사회에 신물이 난다. 왜 서운해해. 너네랑도 얘기하지, 하는데……. 말을 끌었으나 그 순간 누군가 손을 잡아 온다. 말릴 겨를도 없이 잡힌 손에는 축축한 땀이 전달되고 손을 잡은 애는 문밖을 나선다. 정한은 순식간에 자의가 아닌 데 따라 나갈 수밖에 없다. 아니, 선배 있잖아요. 내가 아는 맛집이 있는데……. 지나치게 희맑게 웃는 걔는 잡은 손을 힘 있게 이끌고 친구들도 따라붙는다. 정한은 무력하다. 그러나 발걸음이 곧 멈춘다. 앞서가던 걔가 뭐라도 마주한 듯 누군가의 이름을 중얼거리자 정한은 고개를 내빼고 앞을 본다. 독서실에서 기다린다던 순영이 계단 밑에서 팔짱을 끼고 서 있다.

정한이 형.

싱긋 웃었다.

 

자발적 아웃사이더 윤정한과 타의적 인사이더 권순영 사이에는 상충하는 전류가 흐른다. 재미있는 일과 획기적인 계획 그 중심엔 순영이 늘 자리를 지키고 섰다. 원했든 원치 않았든 사람들을 모으는 매력이 넘쳐흐르는 인물. 사랑과 관심을 감당해내는 사랑스러운 일학년 과 대표 권순영은 유쾌하고, 야무지고, 귀엽고, 순수해서. 정한은 순영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고 정의한다. 회장 타이틀을 달고 있는 정한에게는 언제나 감당하지 못하는 관심이 대량으로 쏟아졌다. 같이 하자고 기를 써 달려드는 머리들이 많아서 한 걸음 뒤로 걷는 게 습관이 된 정한은 벽장문을 방패로! 의심을 무기로! 조심스럽게 살아가지만, 순영은 언제나 한 걸음 앞에 나가 있다. 그러다 보니 둘의 옷깃이 스쳐도 폭발하지도 못하는 전류를 몸에 담고 사는 셈이다.

순영의 손가락이 정한의 손등을 스친다. 가림막을 침범해 온 순영한테서는 무향인 햇살도 향이 나는 듯한 착각을 일으킬 정도로 믿을 수 없는 좋은 향기가 난다. 양팔을 감싸 엎드린 채로 순영의 움직이는 손가락을 주시하면 시간은 느리게 프레임 단위씩으로 흘러가고, 매미들이 치열하게 우는 여름은 꽤나 달궈졌다. 바깥은 하얗다 못해 투명하게 얼룩진 상태. 손가락은 정한의 손등에서 한참을 머물러 있다. 순영이 입을 열 때까지. 걔네들 따라가서 뭐 하려구 했대……. 순영이 반대 손 손가락 사이에 샤프를 낀 채 턱을 괴어 정한을 바라본다. 둘의 시선 끝은 아래와 위를 향해, 서로의 얼굴을 차지한다. 정한은 눈빛에 반한다. 목소리에 반한다. 속눈썹에도 넋을 놓는다. 최근 염색했다던 갈색 머리가, 웃을 때마다 올라가는 두 볼이. 불러주는 이름이. 얽혀오는 관심이, 애정이. 조그마한 손과 무해한 표정이 이렇게 사랑스러워도 되는지에 대해 한참을 머뭇거리다가 쨍한 햇빛이 순영의 얼굴에 닿아올 때 손을 올려 빛을 감싸 쥐었다가 펴본다. 손가락 사이로 침투하는 연 노란빛 물감. 후덥지근하다. 얼굴에는 대번 그림자가 진다. 그리고 그 손을 순영이 겹쳐 쥔다.

동그란 얼굴이 정한에게로.

형, 졸려요?

왜 이러지……. 왜 나는 열이 나지. 정한은 고스란히 온도를 먹고서 현기증을 앓는다. 또 이상하게 얘는 왜 이렇게 눈이 부시지. 인상을 찌푸려본다. 지금 여름이라서? 밖이 너무 더워서? 갑작스레 순영은 정한의 부드러운 얼굴을 쓰다듬는다. 형, 피곤한가 봐. 어서 자요. 그러나 정한은 끊임없이 나타나는 물음표를 내리지 못한다. 얘는 왜 이렇게 정말…… 혼자 청명하고 아름답지……. 세상이 녹고 있으니까? 그래서 나는 여름 환청과 환각에 씌는 걸까. 그것도 아니면 여름에 피는 능소화가 예쁘기 때문이라서? 몇 번을 질문해도 해답이 도출되지 않는 문제. 쟤를 내 상식으로는 이해하지 못하겠어. 목소리의 높낮이가 귀를 간질이는데 이유가 뭔지 도저히 모르겠다고. 할 수 없다. 엎드린 채 쏟아지는 잠을 맞이한다. 정한은 순영이 매만져주는 앞머리가 살랑이는 걸 느끼며 눈을 감고 꿈속 여름 세계에 빠져든다.

불편해 보이네…. 행복한 얼굴로 잠깐 정한의 낯을 뚫어져라 보던 순영이 정한의 안경을 벗긴다. 심장이 튀어 나갈 것 같은 상황은 손끝 떨림까지 일으켜 말랑한 기분을 만들었다. 그리고 정한이 감긴 눈을 반쯤 뜰 때, 나른하게 깜빡거리는 그 두 눈은 순영을 일시 정지시킨다. 위험한 얼굴이다! 위험한 얼굴! 놀라서 입을 틀어막을 뻔한 순영은 속으로 이멀전씨를 여러 번 외친다.

응… 순영아…. 정한은 조용히 속삭인다.

세상이 뱅글뱅글. 난 모르겠어. 눈앞에 현실은 비현실스럽고 꿈만 같아서 내가 실존하는지 갑자기 분간이 안 가. 아니다, 심장이 뛰고 있으니까 나는 살아있는 거야. 살아 있어서 미치겠어. 맥박이 손목에서 떨어져 나갈 것 같은 거. 그런 거. 그런 기분이야. 순영은 정한이 자신을 바라보는 눈빛에 침을 꼴깍 삼킨다. 그리곤 렉 걸린 파란 창의 컴퓨터처럼 가만히 정한을 지켜봤다. 정한은 순영의 이름을 부르고서 결국 졸음에 못 이겨 다시 눈을 감고. 순영은 생각한다. 천사 같은 정한의 얼굴을 보고 있자면 시간 가는 줄 모른다고. 그런데 형은 왜 이런 안경을 써서 미모를 가리지? 한 편으론 의구심을 갖지만 한 편으론 더는 생각하지 않기로 한다. 나는 다른 애들과 달라. 형한테 난 특별하니까. 그래서 다행이야. 나만 알아서.

하지만 순영 씨. 그건 당신만 아는 게 아니랍니다. 귀여운 착각에 빠진 순영이 실실 웃는다. 책상 밑에서 순영의 손을 잡아 오는 정한의 손은 부드럽고 뜨거웠는데 이는 순영을 떨리게 했다. 여름이라서. 여름이지만, 여름이어도 난 이제부터 뜨거운 걸 좋아할 거야. 더워도 참을 거야. 형이라서 참는 거야. 좋아하는 거야. 형이 좋아하는 건 무조건 좋아할 거니까, 난 아마 전심전력을 다 해 사랑하고 말 텐데.

미안해, 순영아……, 나 조금만 더 잘게. 너 다하면 깨워줘…….

알겠다는 말이 아닌 사랑해가 튀어 나갈 뻔했다.

 

 

미적분학 교재를 덮고 기지개를 켠다. 뻐근한 목을 돌린다. 전공 시험은 내일이라 오늘 밤을 새워야 했다. 자연히 옆자리를 보니 정한은 아직도 새근새근 잘 자고 있다. 정한은 독서실에만 오면 기절한다. 학생회 일도 바쁜데 평소에도 버릇처럼 하는 공부에 그 양이 많아서 산등성처럼 쌓아놓은 교재를 보면 순영이 대신 들어주고 싶다. 오 월 초부터, 순영과 정한이 같이 공부를 하고 서로를 기다려주는 일이 루트처럼 진행됐다. 한눈에 반했다. 순영은. 농담처럼 만들었던 스터디그룹에서 운명의 짝을 만나 휩쓸려버린 것이다. 그러다가 이렇게……. 스터디는 끝이 났지만 둘의 간질간질한 관계는 현재 진행형이었다. 순영은 정한을 말없이 보다가 얼굴을 바투 붙여 속삭인다. 형, 우리 나가요. 으응…. 살짝 어깨를 흔드니 정한이 앓는 소리를 내며 깨어난다. 다 했어…, 순영아? 순영이 피식 웃는다. 네. 다했어요.

어? 형 이런 거 좋아해요?

응…, 뭐가?

전시회. 그림 같은 거 보는 거, 이런 거 좋아하냐고요.

아…. 정한이 펼쳐놓은 교재 안에는 티켓 두 장이 끼워져 있고 순영은 매우 관심 있어 보이는 말투로 묻는다. 티켓을 들어 확인한다. 그 티켓은 정한이 자의적으로 구매한 것이 아니다. 친구가 남았다며 주고 간 무료 티켓. 순영은 이것이 정한과 자신을 엮을 수 있을 거라고 확신한다. 순영 본인의 관심사가 아니었는데도. 아, 좋아해요, 안 좋아해요! 재촉하는 순영은. 네? 빛나는 눈이 너무나도 귀여웠다. 정한에게 그런 취미는 없지만, 순영이 이 순간 매우 기뻐 보이는 탓에 순영과의 교집합 안으로 들어가고 싶다는 결론을 맺은 정한은, 어……, 좋아해. 섣불리 대답한다. ……너를. 그러나 뒷말은 달게 삼켰다.

그러자 순영은 기다렸다는 듯이 활짝.

그럼 같이 갈래요, 형? 또다시 싱긋 웃었다.

 

둘은 이해 못 하는 그림 앞에서 멍하니 바라본다. 정한이 형이 좋아해서. 순영이가 좋아하니까. 사실과 다른 까닭들은 서두에 깔아놓고 옆에 붙은 설명을 읽는 데에 집중! 또 집중! 해봐도 실상은 서로에게 신경이 온전히 빼앗기고 있지만……. 정한은 옆으로 붙어오는 순영의 발소리에 심장이 두근대어 일부러 그림에 코를 박을 듯 다가가 본다. 초현실주의 벨기에 화가의 그림엔 꽃으로 얼굴이 가려진 여자가 양산을 쓰고 정면을 바라보고 있다. 순영은 팔짱을 낀다. 대전쟁이라는 제목은 그림과 전혀 상관없어 보였다. 순영은 머릿속으로 계산식을 열거한다. 이런 걸 좋아했으면 미술교육과를 갔지, 왜 수학교육과를 왔겠어……. 그러나 옆에는 미간을 찌푸리며 그림에 열중하고 있는 안경 너드가 있고. 장내에는 듣기 좋은 피아노 선율이 흘렀다. 정한과 순영은 발을 맞춰서 걸으며 서로를 의식하고 손끝을 스쳤다가 떨어트린다.

밖은 열이 올라 아스팔트 틈에서 피어나는 아지랑이가 한 편의 예술 영화를 찍어낸다. 아직 초여름인데도 불구하고 시멘트 건물들은 피부가 타올라 단단하고 매섭게 서 있다. 머리 위로 해가 폭포처럼 쏟아져 내린다. 아이스크림을 판매하는 트레일러 주위로 신난 아이들이 모여있다. 분수대는 시원한 물줄기를, 물줄기는 무지개를 뿜어내고, 오후 세 시 반. 순영은 이 근처에 수영장이 있다는 걸 생각해낸다. 형이랑 같이 가면 무지 무지 좋을 텐데.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힌다……. 순영아, 무슨 생각 해? 아까부터 불렀잖아. 바짝 다가온 정한이 아이스크림을 손에 들고 있다. 너 무슨 맛? 정한은 아이스크림 두 개를 내민다. 망설이던 순영이 되려 묻는다. 형, 혹시 딸기 좋아해요? 정한은 잠시 놀란 표정이 된다. 어떻게 알았어? 그리고 순영은 쿠키 앤 크림을 가져간다. 저도 좋아해요, 하면서. 이로써 공통분모는 어디에나.

차가운 맛이 입안을 맴돌아 싱그럽다가 사라지는 크림에는 마법이 깃들어 있다. 이 시간을 소중하게 만들어주는 효과적인 마법. 둘은 분수대와 조금 떨어진 대리석 의자에 앉았고 정한운 순영의 어깨에 붙어오며 머리를 기댄다. 흠칫 놀랐지만 아닌 척해본다. 그러나 정한의 고개가 점점 더 파고들면 순영은 참지 못해 말을 꺼낸다. 형. 안경은 언제부터 쓴 거예요? 물음은 정한을 움직이게 했다. 떨어져 보면 심장 박동을 들키지 않을 거라 안심한다. 아, 그게 사실… 안 쓰고 다니면… 피곤해져서 그래. 정한은 순영의 얼굴을 빤히 보다가 눈을 피한다. 왜 피곤해지는데? 피곤해 질 게 뭐가 있……, 단순한 결론에 외려 문득 뇌리를 스치는 정답. 정한은 부끄럽다는 듯이 미소짓고, 순영은 이제야 이해가 간다. 어……, 그런 거였어?

응. 나 원래 시력 안 나빠.

불어오는 핑크빛 바람에 일궈지는 파안. 형 잘생긴 거 본인이 잘 아네. 그 말에 정한은 실소를 터트리며 웃었다. 따라 웃은 순영이 이번엔 정한에게 기댄다. 분수대는 기다란 물줄기를 하늘로 자꾸 솟구치게 하고 정한의 마음도 위를 향해 부푼다. 하늘 끝까지 차오른 감정. 시간이 녹을 수 있다면 혹시 이런 느낌일지도 몰라. 정한이 햇살을 맞으며 눈을 감을 때, 순영은 마음속으로 연신 다짐한다. 사랑할 거야. 난 내 사랑은 반드시 쟁취할 거니까. 그게 나의 신념이니까. 반드시……, 형을 계속해서 사랑할 거야.

 

광장의 시계탑이 정각을 가리킨다. 여름의 시간은 덧없이 짧고 담벼락 장미 넝쿨의 장미는 한 철이다. 그리고 곧 있으면 방학이 소리 없이 시작될 것이다.

 

집에 데려다줄까? / 괜찮아요. / 그래도. / 아니에요. 정말 괜찮다니까요. 택시 놓치겠다. 형, 빨리 타요.

차 문을 열고 시트에 앉는 순간까지 정한은 손 인사를 하는 순영을 주시한다. 순영은 그렇게 시무룩해지는 정한의 얼굴 때문에 다시금 웃음이 터진다. 정한의 눈썹이 내려간다.

떠나보내기 싫어서 그래. / 무슨……. 내가 어디 가나. 내일도 연락할 거면서. / 공부하다가 모르는 거 있으면 전화하고. 꼭. / 알았어요. 할게요, 할게.

정한이 집으로 돌아가면 남은 순영의 시간은 다시 독서실에서 소모된다. 정한은 그사이 순영을 그리워하며 가정법을 세우고 있다. 만약에. 정말 만에 하나. 설마 너도 나를 좋아하고 있다면. 그런 제목의 가정. 그래서 정한은 순영이 교재를 펴고 집중하려는 순간을 막아 세운다. 막 한 권을 읽고 다음 권을 펼치려는 순간. 진동이 울리는 핸드폰으로 시선을 돌린다. 화면에는 정한의 이름이 떠 있다.

……잘 들어갔어? / 아니요 아직. / 왜에. / 아직 풀 게 더 남았어요. / 그래? 그럼 아까 물어봤을 때 나 붙잡지 그랬어. 오래 있을 거면 나도 같이 있자고 하지. 덜 외롭게. / 형도 일이 있는데 내가 어떻게 그래. / 지금이라도 나 거기 다시 갈까? 형이랑 같이 할래? / 아니야, 됐어요. 얼른 하고 들어갈 거예요. / 하지만…… 내가 워낙 걱정되잖아. 걱정되니까 그렇지. 괜히 나 때문에 시간 뺏긴 거 아니야? / 뭐야, 괜찮아요. 형도 내 시간 뺏었으니까 똑같아요. / 그래두…. / 정말 괜찮은데. / 그래? 알았어…. / 네. 이제 됐죠? / 응. / 걱정하지 말고. / 알겠어…. / 혹시 서운해요? / 아니! 아니야, 절대. 서운하지 않아. / 그럼 다행이구. / 응. 순영아, 너무 늦지 않게 들어가. / 네에. / 안 풀린다고 스트레스 받지도 말구. / 알겠다니까. / 들어가면 연락해. / 알겠습니다. / 진짜… 잘… 들어가야 해. 알았어? / 아! 형이 끊어야 내가 잘 들어가지! / 아, 그렇구나. 미안해…….

동시에 웃음이 터진다. 이 귀여운 사람을 어떡하면 좋지. 같은 생각을 똑같이 하는 둘. 그러던 순영이 실실 웃다가 다른 이야기를 꺼낸다.

형, 있잖아요. 다음에 나랑 또 갈래요?

덕분에 정한의 마음속에는 복사꽃 무더기가 겹겹이 쌓이는 중.

……어디를?

형이 좋아하는 전시회 그런 거. 보고 싶은데 만약 볼 사람 없으면 나랑……. 그러나 순영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정한은 다급해진다. 순영아, 사실은 있잖아…, 나. 그런 거 나 별로 안 좋아해. 그림에 관심 없어. 그냥 나는 네가 좋아해서……, 그래서 가고 싶었어. 네가 좋아하니까. 가자고 한 거야. 고백해버린다. 정한은 사랑 앞에서 솔직해지는 타입. 그러나 그건 정한만 그랬던 게 아니었다. 순영도 마찬가지였다.

엥? 나는 형이 좋아하니까 가자 한 건데?

삽시에 조용해지는 둘은 또 같이 같은 생각을.

그렇담 우린 누구의 취향을 맞춰주고 있었던 거지?

키들키들. 순영이 먼저 웃었고 그 뒤를 정한이 따라 웃는다. 아무의 취향도 아닌데 우린 서로를 위해 맞춰주고 있었어. 정말이지. 우리는 진하게 사랑하나 봐. 사랑할 거라는 확신도 사랑해서 끝내 양방향으로 이끌린 론도. 다른 얘기들이 우리 사이에 엮어 들어와도 항상 서로를 찾게 되겠지. 서로를 따라 하고, 생각하고 웃겠지. 봐봐, 내가 웃으면 형도 웃으니까……. 다가갈수록 나는 너의 취향이 되고 너는 어느새 나의 취향이 돼서 어느새 연인이 되어 있을 생각을 하고 있으니까. 웃음이 멈춘 정한은 턱 아래까지 차오른 꽃 무더기에 의해 몸속이 진득하게 간지러웠다. 어쩐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렇게 몇십 초를 아무런 말도 하지 않다가 조금 뒤에, 물기 가득한 음성이 수화기 속에서 마지막 물음을 내뱉는다.

형…. 나 사랑해요?

하고. 기대하게 만든다. 정한은 눈앞이 핑그르르 돌았다. 복사꽃 향기를 따라 어디라도 갈 수 있을 것만 같다. 후더운 바람도 질투를 할 우리의 썸머 희극. 한낮의 대로변에도 짙은 밤의 풀숲에도 어디에 있든지 느낄 수 있는 너와 나의 사랑. 내려놓지 못한 전화와 전달되는 목소리에 안달이 나는 이 순간이 처연하여도 좋았다. 한 방향의 감정이 아니라서. 정한은 가정법 따위는 무너트리고 답을 풀기 위한 공식을 구하기 시작한다. 상충하던 각자의 전류가 피지직 마찰하여 마침내 불꽃을 일게 할. 몇 번이고 썼다 지웠다 했던 물음에 대한 답. 그 답을…….

다시 달려가서 안아주고 싶어. 너한테 키스하고 싶어. 너의 눈에 입 맞추고 싶어. 네 손을 깍지 끼고 싶어. 네 눈을 보고 속삭이고 싶어. 나는 정말로 너를…… 너는 진짜 어떻게 이름도 순영이어서…….

응…. 사랑해.

정한은 몇 번이나 되풀이하여……

그러니까 순영아, 내일도 우리 함께 그곳에 있을까……. 해답을 도출해 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