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순영의 고양이는 내 발목을 좋아한다. 누워있는 나를 의식하곤 내 발목에다 머리를 비비적거리는데 그 포근한 털의 촉감이……. 야옹, 하고 울길래 따라서 야옹으로 답했더니 얼굴 쪽으로 달려오는 코리아 숏헤어. 온통 까만 털에 노랑과 연옥의 중간색으로 빛나는 눈은 권순영만큼이나 심장에 해롭다. 나는 짧고 통통한 두 다리 밑에 손을 넣었다. 그르렁거리는 소릴 낸다. 팔을 들어 몸체를 들어 올리자 멀뚱히 놀라는 표정은 주인을 닮아 귀여워 난리도 아닌데 주인 권순영은 지금.
뭐 하냐. 다가와서 고양이를 뺏어가는 폼이 퉁명스럽다. 그리고는 다시 말투를 바꿔서, 콜라는 내가 좋대. 이응을 붙여 일부러 귀여운 목소리를 낸다. 평소 나를 대하는 권순영과 오백 킬로미터 정도 거리가 멀다. 내 앞에서는 곧잘 애교도 안 하면서. 까만 고양이 콜라를 다리 위에 올려놓고 털을 쓰다듬는 모습에 신경질이 난다. 권순영의 맨발을 때렸다. 원우도 네가 좋대. 권순영은 뭐라도 말할 듯 흘깃 나를 노려보더니 다시 콜라를 본다. 참나, 어이가 없다. 그렇지, 콜라야? 신난 아이처럼 배시시 웃는 얼굴이 밉다.
웃지 마.
지가 말 꺼내놓고.
도대체가 한 번을 안 지려 한다. 내 하루는 바쁘다. 나는 온종일을 권순영 때문에 지구본 굴리듯 머릴 굴려야 한다. 권순영은 다분히 양극의 색이 짙었다. 밤에 같이 잠이 들 때 나를 꽉 껴안거나 얼마큼 자길 좋아하냐고 묻다가도 가끔은 일체의 사랑 표현 없이 하루를 보낸다. 기분 탓이겠거니 생각해서 컨디션이 안 좋냐고 스리슬쩍 물으면 별일 없다고 대수롭지 않게 행동한다. 내가 욕심내는 걸까. 나는 틈틈이 벌어진 틈 사이로도 애정을 받고 싶은데. 안경을 벗어 옆에 두고 몸을 돌렸다. 콜라와 놀아주는 권순영은 해맑다. 그에 비해 나는. 순영아, 오늘 술 먹을래. 무력하다. 무력한 표정으로 아마 보였을 거다. 다시 눈이 마주쳤고 권순영은 콜라에게 쏟던 관심을 거두어 나에게 내밀었다.
너 무슨 일 있냐?
아니. 아무 일 없는데.
나의 반박에는 권순영의 처연함이 따른다. 어찌할지 고민하는 게 뻔한 모양새다. 나는 어차피 거절할 거면 왜 안쓰러운 얼굴로 날 애처롭게 보는 걸까 상상해야만 했다.
원우야. 미안한데 오늘 나 새벽에 들어와. 그러니까 먼저 자 알았지, 기다리지 말고.
권순영은 저온 쪽으로 농후해진다. 어쩌면 나는 저 고양이와 다를 바 없다. 나도 모르게 서서히 너한테 길들여진 것 같다…… 고. 충분히 떼를 써 뻔뻔하게 굴어도 됐으나 당최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증후군이라도 걸린 사람처럼 나는 권순영한테 약하다. 세월은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명목으로 세를 내도록 만드는 듯하다. 내가 지불하는 건 무력감이고 미적지근함이고 불안감이며 권순영은 그걸 조합하고 배합해 자기의 지주로 쓴다. 나는 거기서 사랑과는 일끝 다른 유대를 느낀다. 사랑한다면 내게 확실히 집착해줬으면 좋겠어. 입 밖으로 못 뱉어낼 언어를 삼켰더니 몸 내벽에 열상을 입었다. 뜨거워진 나는 내가 아닌 권순영의 그림자로 머문다. 권순영이야말로 뜨거워져야 할 때. 내 표면에 대적점을 남겨야 할 사람. 그러나 권순영의 애집은 내 온도가 한없이 낮아서 차가워져야만 발현한다.
원우 씨는 카메라 뭐 쓰세요. 저 소니요. 오, 진짜요? 저는 라이카 쓰는데. 그럼 필카 쓰세요? 아니요, 저 폴라로이드. 아… 라이카가 필카가 좋다고 해서요. 맞아요, 진짜 예쁘게 나와요. 제 친구가 갖고 있거든요. 한번 써봤는데 꽤 괜찮은 거 같아서. 아날로그적인 느낌도 되게 예쁘죠. 사진 찍은 거 보여드릴까요? 핸드폰에 몇 개 있는데. 좋아요. 쉬어가는 시간에 비슷한 활동 시기를 겪고 있는 다미 씨와 접점이 생겨 대화를 나눴다. 출연진들 개개인의 취미 생활에 초점을 맞춘 프로그램은 나와 권순영을 해시태그 단짝으로 묶고선 캐스팅했고 얼마 전에 나간 예고편은 의외성을 탔는지 대중들은 우리가 동창이라는 것에 주목했다. 녹화는 평범히 진행됐다. 앞서 개인별 소개를 하다 평소 사진에 무궁한 관심을 갖고 있다는 다미 씨의 이야기에 나도 카메라를 들고 다니는 습관이 있어 자연스레 끼게 되었다. 진행자분들은 우리 둘의 이야기를 자세히 고찰했다. 대신 비례하듯 시작부터 쾌활하게 웃던 권순영의 말수가 적어졌다. 녹화를 중단하고 나서도 다미 씨와의 대화는 끊길 듯 안 끊길 듯 이어졌고 이야기가 점점 무르익어가던 중에 왼편에서부터 시선이 느껴졌다. 코디네이터의 손길을 받으며 물을 마시는 권순영이 무표정으로 내 쪽을 주시한다.
이런 거는 필름 뭐 쓰세요, 후지? 네. 맞아요. 이건 그거고…. 어, 이거는 색감이 되게…. 아, 네. 이거는 감도 좀 높은 걸 써서 이렇게 세게 나왔어요. 팔백 정도 쓰시나 봐요. 맞아요. 잘 아시네요. 사진 공부도 하시나 봐요. 아니요. 딱히 하려고 마음잡고 해 본 적은 없고… 그냥 가끔 찍고 싶은 게 생길 때 있잖아요. 어떤 거를요? 예를 들어… 쟤 저러고 있는 거 귀엽지 않나요. 권순영이 정체 모를 동물 모자를 쓰곤 작가님이 찍어주는 셔터 소리에 맞춰 포즈를 취하고 있었다. 아! 호시 씨 언제 저런 걸 쓰셨지? 그녀는 호탕하게 웃었다. 호시 씨랑은 진짜 친하신가 봐요. 아까도…. 묻는 그녀는 죄가 없다. 다만 웬일인지 나는 친하다는 그 의미가 손가락 까닥 움직이지 못하도록 굳어지게 한다는 걸 꽤 오래전부터 알았다. 온몸에 개미 떼가 기어 다니듯이 가려웠다. 아닌데… 아닌데. 아닌데. 머릿속으로 되뇌면서 바라본 권순영은 옆 사람한테 몸을 기울면서까지 되바라지게 웃어댔다. 나는 다미 씨한테 밀착한다. 십 년 지기예요. 중학생 때부터 봤으니까.
너 뭐야.
뭐가.
둘이 귓속말하고 있던데.
별말 안 했어.
근데 귓속말을 왜 해.
별말 아니니까 귓속말로 하지.
마이크를 떼고 온 권순영은 첨리한 말투로 내 신경을 긁었다. 다른 사람들은 퇴근 시간이라 분주한데 세트장 구석에 눈길도 잘 안 가는 곳에서 나를 돌려세운 권순영은 서운한 표정을 지었다.
이상해 너.
나는 그 수백 번이고 본 두 눈에, 지난밤에도 내 아래에 있던 얼굴에, 천장 조명 빛으로 인해 활기를 띠는 권순영의 피부에도 목이 죄어오는 듯했다. 입고 있던 목 부근의 니트 면직을 늘렸다. 소금물을 마신 듯이 위가 쓰라리고 죄다 가려워서 손목을 긁고 시곗줄을 잡았다.
너 자의식 과잉이야.
시계를 풀며 말하다가 앞을 봤다. 권순영은 눈을 크게 뜨곤 헛숨을 뱉는다.
자의식 과잉이랑 왜 친구 해?
권순영이 열이 올랐다. 속으로는 이를 바득바득 갈 테다. 진심으로 궁금해서 묻는 척을 하고 있으나 숨기지 못한 일방적 태도가 겉으로 드러난다. 온몸에 스며든 미열이 남긴 얼룩이 아직 덕지덕지 묻어있는 꼴. 훤히 다 보이는 꼴. 그 비열한 꼴을 나는,
친구 안 하고 애인 하거든.
나는 좋아해. 좋아한다. 좋아해서, 네가 온 힘을 다해서 죽을 듯이 나한테 목메었으면 좋겠다고 매일 허공에 일기를 쓴다. 살아있음을 환기해주는 미친 피그말리온 질환. 나는 나와 맞는 궤도 하나 없는 그리스 조각가에게 자아를 투영해버려도 아무렇지 않아 이질감을 느끼지 못한다. 뭐라 하던 그 추악한 사고방식 하나에 사로잡혀 버텨 살아가는 꼴이라, 권순영은 내 추한 꼴을 잘 알아 나를 속되게 떠보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변함없이 권순영을 저주한다.
같이 데뷔할 수 있었는데 안 한 건 오로지 내 탓이었다. 권순영 탓하기 싫었다. 내가 자진하여 포기했으므로. 함께 있으면 못 버틸 것 같단 이유로 뭉뚱그렸으니 더 그리지 않아도 우리 이야기는 소문으로 퍼질 새도 없이 어디를 가던 사실로 돌아다녔다. 나와 같이 데뷔 못 한 연습생 동기들이 한 마디씩 얹었다. 너희 둘이 데뷔 같이 해봐, 못 견디는 게 정상 아닌가? 잘한 거야. 잘했어. 잘하긴, 데뷔 못 하는 놈 하나 더 생겨서 편해지니까 족하는 거지. 저들끼리 조잘대다 시야에서 사라진 그들은 애당초 내 관심 영역이 아니었다. 한쪽 구석에서 춤을 추다 지쳐 쓰러진 권순영이 누워서 고양이처럼 치켜뜬 눈으로 나를 주시하는 거. 그것만이 내 구미였다. 한참을 쳐다보니 서서히 일시 정지하는 사고. 야옹. 권순영이 바짝 일어나 내게 왔고 일부러인지 모르는지 땀을 뚝뚝 흘리면서 민소매 티셔츠를 죽 늘였다 줄였다, 야트막한 시선을 얽었다가 숨을 몰아쉬었다. 물었다. 이제 연습실도 따로 써야 할까? 안경을 벗고 눈가에 묻은 땀을 닦아내자 덕분에 흐리게 보였다. 흔들리는 상에 맺힌 권순영이 당장이라도 녹아내릴 것만 같이 흐렸는데 권순영은 나를 선명히 보고 있겠다는 생각에 조금 억울했다.
걱정하지 마.
걱정은 무슨 걱정, 아무 걱정도 안 했는데. 입 밖으로 내뱉지는 못하고 속으로 대꾸하며 권순영 눈을 본다. 야옹… 야옹야옹 야옹. 머릿속에 울리는 낯선 고양이 울음소리. 낮은 헤르츠에 머리가 찌릿했다. 권순영이 즉각 반응한다. 권순영은 이마 땀을 닦으며 처연한 표정을 지으려 애쓰는 듯 보였다.
너 우리 집 올래?
아니, 어쩌면 평온한 척을 하고 있거나. 고개를 끄덕이니 권순영이 내게 손을 내밀었다. 나는 일어섰다. 하지만 손을 잡지는 않았다. 권순영은 내심 당황한 얼굴이었고 나는 정의가 필요했다. 우리가, 우리가 무슨 사이일까. 기억을 되감아 따지고 보면 우리의 유별한 관계 사슬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기 전부터 층층이 쌓여 덩굴처럼 얽혀있다.
말해도 돼.
아, 말해도 돼?
기말고사가 끝난 날이었다. 나는 파우치를 들고 권순영 집에 갔다. 권순영 팔을 붙잡고 얼굴에 낙서하는 일은 그 당시 내 유일한 취미였다. 눈에 섀도를 바르면 권순영은 말하다가도 조용해진다. 그러면 내가 말해도 된다고 하면 그 말에 권순영은 굳은 얼굴을 풀면서 웃는다. 바보같이 귀여웠다.
야, 전원우 이거 어때? 잘 됐지?
떨어져서 뭔가를 꾸무럭거리며 하더니 돌아서서 얼굴을 들이민다. 그때 난 붓을 정리하고 있었다가 권순영이 가까이 다가와서 입술을 오리처럼 꽥꽥 붙였다 오므렸다 하길래 고개를 갸웃거렸더니 내가 직접 발랐어, 빨리 칭찬해줘 봐. 재촉했다. 안 괜찮아. 피식 웃었다. 입술 선을 빗겨 난 색이 두드러져서 웃겨 보였는데, 안 괜찮아도 해. 권순영이 뚱한 표정으로 옷깃을 잡아당기자 기어코 웃음이 터져 나왔다. 어, 잘했어. 내 말에 권순영은 사라질 듯이 푸슬푸슬 웃었다. 사랑스럽게.
정말 어떡하지.
왜.
집중이 안 돼. 어떻게 집중이 돼.
색을 지우고 새 색으로 입술을 그려 넣기 위한 십오 센티미터도 안 되는 짧은 거리의 권순영 얼굴 때문에 자꾸만 손이 가야 할 데로 안 가고 미끄러졌다.
힘 빠져 너 때문에.
뭐야, 잘 좀 해.
눈을 아래로 깔고 가만히 있는 권순영의 숨이 얼굴에 닿아 나는 숨을 참는다. 나는 한번 제대로 숨을 못 쉬니 너는 나한테 매 순간 빚을 지는 셈. 하필이면 쳐다보는 얼굴도 불그레해 사람을 곤란하게 만든다.
가까이 와봐.
결국 권순영과 얼굴이 붙을 새로 가까워져서 키스했다. 그게 내가 좋아하는 사람과의 생애 첫 키스였다.
이거로 하기 잘했다. 향이 좋은 거 같아.
내 입술을 떼고 권순영의 입술을 문지르자 권순영이 목에 팔을 감고 한 번 더 내게 키스했다. 그건 내 상상에 없던 일이라 짐짓 당황했는데 눈을 질끈 감고 키스에 몰두하려는 권순영을 보자 웃겨서 집중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살짝 밀어냈더니 멍한 얼굴로 눈만 깜빡거린다. 권순영은 내 생각보다 무해하고 무반응으로… 나는 그 반응에도 당황했다. 할 말 있어? 무언가 말하고 싶은 듯이 입술을 달싹이는 게 신경이 쓰여서 물었더니 권순영이 답했다.
왜 키스 더 안 해?
왜일까. 왜인지 그건 하고 싶어서 재촉하는 사람의 목소리라 여기기 어려웠다. 예를 들어, 마치 나를 시험하려는 듯한……. 등골이 잠깐 시려 바보가 될뻔했다. 머릿속을 잠식한 바보 같은 생각에 헛웃음이 나와서 한번 웃자, 권순영은 내가 눈을 마주하기 전 갑작스레 다시 입술을 부딪쳐왔고 나는 반사적으로 권순영의 볼을 양손으로 잡았다. 서로를 그렇게 간지럽히다가 천천히 떨어졌다. 권순영 볼에 립 제품의 붉은 기가 묻었다.
볼에 묻었어.
네가 묻힌 거잖아.
알았어, 이리 와. 지워줄게, 지워줄게.
묻은 색조를 닦아내려 권순영 팔을 잡아끌었는데 문득 본 방긋한 두 볼이 귀여웠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키를 낮춰 뺨을 비볐다. 권순영이 너무 밝게 이를 드러내며 웃는다.
지워준다면서 자꾸 부비면…….
웃으며 나한테서 나오려 해서 할 수 없이 팔을 풀었다. 곧 약속 시각이 다가오자 권순영은 초조해졌는지 허둥지둥 댔다. 나는 권순영이 벗었던 하복 셔츠를 손에 쥐여주고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권순영을 따라다니며 지켜봤다.
잘 다녀와.
응.
재밌게 놀고.
알았어.
시간 되면 내 생각도 좀 하고.
그건 별로……, 아!
현관 앞에 서서 얘기하던 중에 신발 뒤 축에 발을 집어넣던 권순영이 몸을 일으켜 다가왔다. 그리고 팔을 뻗어 단숨에 나를 안았다.
다녀오겠다는 인사.
사랑해주고픈 사람이 사랑스러운 행동을 하는 걸 볼 때 도파민이 열두 배로 과다하게 뿜어져 나오는 실험 결과는 없나. 입꼬리가 올라감을 주체하지 못해 몸 안 내벽이 갉아 먹히는 기분이었다. 그러니 새로운 가설이 필요한 상태다. 큐피드의 화살이란 원래 심장을 뚫고 여기까지 들어올 수 있는가에 대해. 내가 할 수 있는 건 권순영을 껴안고 어깨에 얼굴을 묻는 일이었다. 팔에는 힘이 들어갔고 맞닿은 가슴엔 나의 심장 소리뿐. 지나가는 사람에게도 들릴 만큼 광광 울리고 있었다.
숨 막혀. 오늘따라 왜 이러냐.
내가 오늘만 이랬을까.
아닌 거 알지만 오늘 너 좀 더…….
더?
애처럼 굴어.
권순영의 손가락 끝들이 내 등을 가볍게 두드렸다.
나 애야.
내 말에 권순영은 푸흐흐, 웃고 떠났다. 나는 권순영을 기다리는 방 안에서 시간이 흘러 반씩 없어져만 갔다. 자꾸만 흔적을 남기는 권순영. 그런 권순영 때문에 전화가 통 오지 않는 핸드폰 액정만 밝혔다가 끄기를 반복하고 시계 초침 소리를 세고 또 세다가 눈을 감고. 하지만 권순영은 보고 싶다는 둥 연락도 없고. 연락도 없고. 연락도……. 연락도 없어서 깜빡 잠이 들었다. 눈을 떴을 땐 이미 저녁이 지난 늦은 밤이었는데 다시 쏟아지는 졸음을 그대로 맞으려다 반발적으로 몸을 일으켰다. 입꼬리가 스르륵 올라갔다.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으며 들어오는 권순영을 보고.
어우, 뭐야 진짜……. 보고 싶어 죽는 줄 알았네. 야, 나 길 잃을 뻔했어.
나는 기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너 나한테 이렇게 해주는 거 네 인생에서 몇 프로 차지해?
왜에….
클렌징 오일을 솜에 묻혀 권순영의 얼굴 이곳저곳을 닦아내던 중에 권순영이 물었다. 일부러 눈 쪽만 계속 지우고 있다 보니 두 눈을 빠르게 깜빡깜빡하는 게 웃겨서 피식 웃으니 권순영은 저지하려고 내 손목을 자꾸 잡아 내렸다.
아니, 그냥 생각해보니까 너 이런 취미 생활하는 거 나 없음 안 되겠더라고. 그래서 말인데 내가 갑자기 네 옆에 없거나 하면 너는 어떻게 살아갈까 싶어서.
너 아니더라도 해줄 사람은 많은데.
어?
일단 나를 포함해서.
세상이 무너진 듯한 표정을 짓는 권순영은 내 멱살을 쥐는 시늉을 했고.
야, 다시 생각해.
보챘다.
다시 생각할 필요가 어디 있어.
다시 생각해봐. 나 없음 안 되는 거지?
권순영 눈썹이 팔자로 내려갔다.
어, 농담이야. 없으면 어떻게 살아.
내 대답에 권순영이 피식 웃는다. 가만히 두 눈을 감고 있는 탓에 그 반반한 얼굴 위로 나는 입을 맞추었다. 사랑해. 사랑한다고 몇 번을 반복하면서. 권순영은 듣고 있으면서도 아무 말 없었다. 우리는 그날 손을 잡고 잤다. 날 부드럽게 만들어주는 유화제가 너라는 걸 자각은 할까, 스스로 곱씹으면서.
수개월 뒤, 데뷔하고 처음 맞은 휴가는 권순영과 함께 고향 집으로 가는 데에 쓰였다. 우리 집과 권순영 집을 왔다 갔다 하며 서로의 시간을 기억했다. 우리에게 익숙한 가족들은 오랜만에 만난 권순영을 반가워했다. 비록 같은 공간에서 함께하지는 않지만 바라던 꿈을 이룬 우리의 무용담은 끼니마다 찬거리였고 같이 누워 별을 세는 밤들은 꼭 동화 속 얘기 같았다.
서울로 돌아가는 날에 처음 발길을 내민 곳은 지하철이었다. 상가 골목에서 안경원에 들러 이전에 맡겨놨던 안경을 찾아 썼는데 권순영이 바보같이 생겼다며 놀렸다. 시력이 많이 떨어졌나 봐, 바꿔서 적응이 잘 안돼. 안경 코를 올리고 내리고 뺐다 다시 쓰면서 계단을 내려가는데 가던 중, 발을 헛디디던 찰나에 넘어질 뻔한 걸 권순영이 막아줬다.
손.
내 앞으로 내밀어진 권순영의 손에 나는 손을 포개어 올렸다.
착하다.
착하니까, 권순영은. 표정 변화 없던 권순영이 옅게 미소를 지었다. 누군가 우리가 사랑한 거냐 물었을 때 나는 답할 수 있었다. 사랑이었다. 털끝만 한 감정이었어도 내게는 사랑이었음을. 그래서 고백했다. 순영아, 할 말 있어. 자판기에서 콜라를 꺼내 마시며 지하 철도에서 열차를 기다리다가 나 너 좋아해 사귀어 줄래, 말했다. 고갤 돌려 본 권순영의 두 눈은 커지고 콜라 캔의 탄산 거품 소리만이 귀에 남도록 주변의 왁자지껄함은 시들어갔다.
원우야.
순영아, 나 남자 좋아하는 거 너 알았잖아. 내가 너 좋아하는 건 더 이전에 알았을 거고…….
구구절절 읊었다. 내 사랑쯤이야 너는 아니까, 싶어서. 그런데 권순영은 아니었다. 권순영은 나와 같지 않았고.
알아, 알고 있지. 우린 친구니까 말하지 않아도 알지…….
여태껏 사랑한다 말한 것으론 증명은 안 되는 거였다.
근데 원우야 나는 연애나 사랑이나 그런 얘기가 너무… 미안. 어색하고 싫어.
그래서 나는 그쯤에서 권순영이 내게 한 행태들이 우정에서 기반을 둔 소유욕이라 남긴다. 떨어지지 않으려는 것도, 연습실에서 둘이 몰래 키스하던 것도 권순영의 집에 가서 뒹구는 것도 어쩌면 우주보다 광활한 네 친구라는 그 영역. 그 안에 기록된 순서밖에 되지 않아 너는 그걸 따르는 것뿐이라고. 권순영의 얼굴에 애써 무마하려는 듯한 여색이 가득해 나는 일부러 더 묻지 않았다. 권순영도 멋쩍은 듯 뒷목을 자주 긁었다. 돌아가는 열차와 버스 안에서, 우리는 평소처럼 평소같이. 친구인 사이로 옆에 앉아서 서로 시퍼렇게 멍든 마음을 숨기고 있었다. 사옥에 돌아와서는 숨죽여 있기만 했다. 권순영은 나와 다른 선상에 있었으니 굳이 나와 만날 필요가 없어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 사실은 마주쳐도 먼저 자리를 뜬 건 나였다. 나는 하루하루를 끝내기 전에 권순영을 상상한다. 내가 좋다고 말하는 권순영을. 내가 권순영에게서 필요한 건 해답뿐이다. 친구라고 못을 박고 네가 할 수 있는 게 어디까진 지, 너는 어디까지 나를 허락하려는 건지에 대한 명확한 해답. 나 없으면 안 되는 거 맞느냐고 묻던 어린 날의 너는 내가 너를 떠나지 않는다는 확인만이 필요했던 거였나? 그럴 수도 있다. 내게 마음이 없는 거라면. 나는 그 후로 날마다 소모적으로 살다가 없어지는 기분으로 잠들어 하루를 마감했다. 권순영은 먼저 연락하는 법이 없었고 나는 먼저 나설 용기가 없었다. 그러나 며칠 뒤에 답을 내민 건 권순영이었다. 어물쩍하게 넘어가 끝날 줄 알았던 뒷이야기는 권순영의 답으로 인해 빠르게 쓰였다.
네가 나 좋아해 줘서 나도 좋아. 하지만 우리가 사귀는 건 상상이 안 가, 이게 내 대답이야. 물론 그거와 별개로 너는 정말 좋은 사람이야. 내게 좋은 사람.
너는 뭘 원하세요? 권순영에게 좋은 사람인 나는 이해하지 못한다. 우리가 그동안 한 건 뭐라고. 키스하고 손잡고 껴안고 더한 것도 다 했는데 사귀는 건 아닌 거 같다고?
어. 우리 키스도 하고 다 해.
권순영 너 사실 나 좋아하지?
네, 아니요.
짜증 나게 한다 진짜.
키스를 해도 애정은 안 묻으면서 너의 집에 오라고 할 때마다 나는 금방 또 가고. 몸 이곳저곳을 전부 탐해도 반바지에 손이 들어가도 미친 사람같이 사랑은 안 하고. 그래서 나는 저주한다 권순영을. 언젠가 나한테 푹 빠지라고. 몇 번이고 되풀이하여 저주한다. 내가 짜 놓은 트랩에 걸렸으면 한다고. 달아나는 권순영을 놓치는 건 내겐 질식과도 같아 권순영이 한 번만이라도 넘어져 내가 숨을 쉴 수 있었으면 하지만,
전원우 우리 집 올래?
매상 넘어지는 건 나뿐이었다.
너는 팔다리도 뜨겁고 영혼도 뜨겁고 다 뜨거워. 전부 뜨겁고 간지러워서 그래서 내가 감당하지 못하는데……. 근데 왜. 대체 왜 그 하나, 사랑만. 사랑은 왜 그래 너? 왜 네 사랑만 차가워?
권순영은 뜸을 들였다. 그리고 뭔가 깊이 생각하다 고백했다. 자기가 에이 로맨틱이라고. 얘기했다. 로맨틱한 감정을 못 느끼고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네 해석이 차가운 거야.
무덤덤하게 초연히 말하는 권순영에 나는 거기서 하마터면 매달릴 뻔했다. 우리는 이별했다. 권순영은 소매로 내 볼에 흐르는 눈물을 닦아주었다. 사귄 적도 없는데 내 맘대로 헤어지자고 했더니 권순영은 알겠다고 네가 좋을 대로 하라 했다. 사랑만 받아주지 않고 내 모든 걸 우선시하는 권순영……. 왜 이제야 말했냐고 쥐어짜 내는 울음에 권순영은 수그러드는 내 얼굴을 계속해서 들췄다. 다정하게 눈물은 왜 닦아주니. 말하고 싶었으나 그러면 권순영이 복잡한 표정을 지을까 봐 무서워 입을 못 열었다. 여름으로 옮겨지는 계절에 그 조용한 방 안에서 숨죽이고 있던 우리의 밤은 누구의 잘못도 없는 밤이었다.
다음은 호시 씨한테 드리는 질문입니다. 원우 씨가 생각하는 호시 씨의 장점이 뭘 거 같아요?
말을 잘 안다?
말을 잘 아는 게 뭐야.
아, 아! 아니…그 뭐라 해야 되냐. 마음을 잘 안다! 그러니까 원하는 거 딱 눈치채는. 제가 원우 진짜 잘 챙겨주거든요.
첫 번째는 마음을 잘 알아준다. 어 뭐 그거 말고 다른 건 없나요?
음…. 귀엽다? 사랑스럽다! 같이 있으면 즐겁다! 항상 함께하고 싶…….
호시가 못하는 말이 없어요.
사회자와 함께 나온 출연자들의 박장대소가 스튜디오를 채웠다. 신나서 자기 자랑을 하는 권순영의 입을 막았더니 원우 씨 재밌는 사람이라며 사람들이 즐거워했다. 우리가 알고 보니 동창이라는 사실이 재밌나. 그 프로그램은 우리에게 조명을 비추고 우리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 했다. 연습생 시절은 어땠나. 왜 같은 그룹으로 데뷔하지 않았나. 학창 시절은 어떻게 보냈나. 그러니 나는 속으로, 사람들은 우리에게 구설이 필요했나. 따위의 생각에 잠식한다. 2번 카메라가 우리의 정면을 길게 녹화했다. 자막으론 귀여운 둘의 우정 앞으로도 영원하여라 어쩌고 식의 문구가 나갈 것이다.
헤어지고 통 연락 없다가 겹친 예능프로그램 스케줄에서 같은 대기실을 쓰게 될 줄 미리 알진 못했으니 권순영이 말을 걸 거라고 생각도 않았다. 너랑 키스하면 아무런 감정도 들지 않아. 그럴 걸 알고 하긴 하는 건데……. 그렇다고 그게 슬프지도 기쁘지도 않아. 오히려 안도했어. 있잖아, 난 누구도 사랑하지 않아. 앞으로도 그럴 거야. 넌 어떤 답을 원해? 널 좋아하니까 연인 하자는 말? 널 좋아하는 건 당연한 일이야. 하지만 나 너 사랑하지 않아. 우리 그냥 옆에만 붙어 있자, 너도 내 옆에 있는 거 좋아하잖아. 나도야. 나도 네 옆이 좋고 편해 원우야.
그래서 그래? 그래서 나한테 집착해? 나는 물음표를 던지고 싶었으나 권순영이 입을 다물 것 같아 하지 못했다. 거짓말. 네가 한 모든 말이 차라리 거짓말이었으면 했는데. 물론 그런 일은 없었다. 권순영은 나를 사랑하지 않으며 옭아맸다. 내 옆에 다른 사람이 있는 것을 싫어했고 신경 썼다. 프로그램 녹화를 2주에 걸쳐하면서 다미 씨와 점점 가까워지는 내게 권순영은 반항도 하고 응석도 부렸다. 원체 나를 잘 알았던 거지. 내가 너를 너무 좋아한다는 것과 집에 오라고 권하는 한마디에 나를 굽히는 것까지 너무.
둘이 다시 사귀어?
네?
헤어진 거 아닌가.
헤어진 거 맞아요.
스케줄을 마치고 회사로 귀가하는 차 안에서 매니저 형은 후사경으로 내 상태를 살폈다. 이상하겠지. 우리 관계가 물처럼 녹아 흐르는데도 아무렇지 않게 지내는 게.
왜 헤어졌는데.
그러게 왜 헤어졌지……. 왜 헤어졌을까. 형은 답을 찾았어요?
아니, 내가 뭐 왈가왈부할 수가 없는 거고 애초에 난 그냥 호시가 너 많이 좋아했다는 것만.
형은 단어 사이사이마다 일정한 침묵으로 말을 이었다.
그게 눈에 보여요?
당연하지.
나한테만 보이는 줄 알았는데.
나는 너한테 유독 그러던 거 같은데. 너 대하는 거 보고 아, 호시가 원우 너 진짜 좋아하나 보다 하고.
그럴 리가.
말과 동시에 울리는 휴대전화의 알람 소리에 나와 형은 반사적으로 주목했다. 삼십 분 전에 보냈던 문자에 대한 답장이다. 모니터링했던 화보 사진 하나를 권순영에게 보냈었다. 나는 문자를 보려다 매니저 형이 주는 눈길에 시선을 돌렸다.
호시 집엔 왜 자꾸 가.
걔가 불러서요.
부른다고 가? 이상하네. 헤어졌는데 부르면 가고 하는 게.
키스만 하고 가라고…….
권순영이 내 말을 잘 들어서. 사랑해주는 일 빼고 다 해주니까. 나는 알람이 떠서 환하게 빛나는 휴대전화를 손끝으로 두드리다가 결국에 못 참고 화면을 열었다. 그리고 권순영에게서 온 문자를 눌렀다.
애인이었던 거 맞아?
형은 우리의 이야기를 궁금해했다. 마치 아까 전 스튜디오의 관객 중의 한 명으로서의 관심과도 같았다. 그러나 나는 들려줄 이야기가 없다. 우리가 그려온 날들은 우리에게만 견고해서 말하고 싶지 않은 채로 남았으니. 누구에게도 보여주고 싶지 않을 정도로.
애인이었던 거 같아요. 연애는 안 했지만.
네 사진을 왜 나한테
미리 보기라 미리 보여주는 거야 궁금해서 못 참을까 봐
대박 잘생기긴 했네 역시 전원우
그런 말은 직접 얼굴 보고 해ㅋㅋㅋ
시시콜콜한 농담이 오가는 대화 창을 손에 쥐고 차는 도로를 달렸다. 나는 창문을 내려 밖을 봤다. 별을 세던 그날과 똑같은 밤. 달라진 게 있다면 나는 나이를 먹었고 별은 모습을 감춘 것. 그러자 옆자리에 나타난 권순영이 대답한다. 별도 같이 나이를 먹어서 그렇겠지. 가려진 거지……, 없어진 게 아니라고. 자기도 그렇다고. 언젠가 권순영이 해줬던 말이 되살아나는 까닭은 무엇일까. 피어오른 기억에 나는 가방에서 책 한 권을 꺼냈다. 예전에 우리가 처음 헤어질 때 권순영이 내게 전해준 노트다. 몇 번이고 읽어서 닳은 앞장을 펼쳐 글을 눈에 담는다. 내게 수많은 답을 주었던 권순영의 한 가지 책. 내가 되돌려 받은 최초의 고백이었다.
2014년 4월 1일
전원우 나 좋아한다 원우가 나를 좋아하는 것쯤은 예전부터 알았다 한 중학교 졸업 전에? 나를 대하는 거 보면 바보가 아닌 이상 다 알게끔 행동하니 모를 리가 근데 원우는 말 안 한다 당연하다 말 못 하겠지 나도 말 못 하는데 원우는 내가 비혼 주의자 아니면 비연애 주의자로 알고 있을 거다 매년 연애 얘기를 안 할 수가 없는 유성애 중심 사회에 사니까 거들어 말하게 된다 난 생각 안 해봤다고 모르겠다고 그런데 이렇게 살다 보니 어느새 헤테로지만 연애 안 좋아하는 놈이 돼버렸다 단순한 놈들 셋 다 아닌데 예부터 비非자가 붙는 것은 선택성이 있다는 뜻이다 나는 외의 영역에 있는 사람이고
2014년 4월 8일
원우랑 미래에 관해서 얘기했다 너 나 좋아하지라고 직설적으로 물어보고 싶었는데 그러면 전원우는 또 상처 받은 얼굴로… 걔는 좀 차갑게 생겨서는 그런 표정 잘 짓는다 마음 아프게 일부러 그러나? 잘생겨서 좋긴 하지만 아무튼 원우는 나중에 배우자와 결혼을 하든 안 하든 아이와 함께 셋이서 살고 싶다 했다 나는 뭐 좋다고 맞장구쳤는데 아 지금 생각해보니 그러지 말걸 되게 후회된다 근데 지나간 거 후회해서 뭐해 나중에 원우가 나한테 제대로 말하면 그때가 되면 나도
원우도 물어봤다 나한테
그래서 연애든 결혼이든 잘 모르겠다고 얼버무리긴 했는데 사실 이건 그거랑 다르다 무얼 하나 선택하는 것 자체가 나한텐 없는 개념이니까
사랑이 뭔지 세상 사람들은 다 안다고 어린 아기들도 사랑이 뭐냐 물으면 자기만의 대답을 한다고 그리고 나도 그 세상 사람 중 하나인지라 사랑이 뭔지 알지만 나와는 죄다 상관없는 일이다 결혼이든 연애든 사랑이든 로맨스든 내게 존재하지 않는 것들 내게 없는 것들에 어떻게 선택성이 있나 어떻다 어떻게 하고 싶다 싫다 좋다 고를 수가 없는 것이 내겐 결혼이고 연애고 사랑이고 로맨스 야 전원우 나 사랑 안 해 네가 주는 사랑받아서 못 돌려줘 너뿐만 아니라 모든 이들과의 연애적 관계에 있는 사랑은 내겐 없는 일이라고 네가 날 보고 가슴이 뛰어도 나는 아니라고 대체 어떻게 말해 애당초 성립이 안 되는 명제라는 걸 전원우한테 어떻게 설명해? 머리 아프다 이렇게 두서없이 얘기해서 이해는 될까 모르겠다 그래도 전원우는 공식이 주어지면 답을 보려 할 것이다 원우는 나보다 미적분도 잘 푸니까
2014년 5월 19일
김지우네 애들이 여자 소개해준다며 유난을 떨었다 고삼 놈들이 할 일도 없나 봐 멍청한 새끼 아무튼 게네가 원우한테 제일 먼저 물었는데 원우는 당연히 거절했고 남은 건 나 하나였는데 나는 애들 오기 전에 자리에서 일어나려다 애들한테 걸렸다 김지우랑 제일 친한 걔 이름 뭔지 모르겠고 어쨌든 걔가 나한테 시발 너 대체 왜 여소 해준다 할 때마다 족족 거절하고 안 받는데 혹시 게이냐? 더러운 놈 이 지랄했는데 하필이면 전원우도 보고 있었다 그래서 걔 한 대 때리려다 원우가 보고 있어서 못하고 편견이야 새끼야 이러면서 그냥 나왔다 어떡하지 전원우 상처 안 받았겠지? 하루 종일 다운되어 보여서 걱정된다 내일 그 야채맛 과자 그거라도 사줘야지
2014년 6월 9일
연습실 답답하다고 원우가 우리 집에 왔다 휴가가 주어지면 원우는 우리 집 온다 나는 원우가 우리 집에 오는 게 좋다 우리 데뷔 못 해도 원우는 나 잊지 않고 살 거 같아서 시간이 지나도 원우는 그렇게 해줄 것 같다
2014년 8월 22일
전원우 괜찮냐 원우가 가버리지만 않았으면 좋겠다 뭐든 잘해주는 전원우는 이해도 잘해주니까 자꾸 기댈 수밖에
2014년 10월 24일
언제부터인지 날씨가 춥다 하지만 그것보다 진짜 큰 문제!! 아직도 원우한테 아무 말 못 했다 원우도 아무 말 안 했고 이제 봄이면 데뷔하는데 근데 전원우 데뷔 안 한단다 보컬 실에서 키스한 거 두고 사귄다고 건물 전체에 소문났다 누가 본 건지도 모르겠다 연습생들끼리 연애하면 퇴출이라고 했던 거 기억 안 나느냐고 정 쌤이 불렀다 나는 그때 저희 연애 안 하는 데요 좋아하면 같이 있고 싶은 게 사람 일 아니냐고 대꾸하려다 못했고 일이 왜 이렇게 되는지 모르겠는데 근데 또 전원우 어디 가서 혼자 마음고생할는지 걱정이 됐다 그래서 이곳저곳 한참 찾아다녀 본 결과 다행히 연습실에 있었다 다행이었다 나 떠나지 않아서 가버리지 않아서 진짜 다행이다 근데 우리가 키스만 했게 더한 것도 많이 했는데
2014년 12월 12일
내 데뷔곡 가이드가 나왔다 원우는 며칠 집에 갔다 피디님한테 들어보니 원우는 그룹으로 데뷔할 거 같다고 데뷔조 들어갔다고 했다 설마 그룹 안에서 눈 맞거나 하지 않겠지? 전원우 아직 나한테 고백 안 했는데 걱정이다 혹시나 만약 원우가 나한테 고백하면 나는
① 나 사실 에이 로맨틱이야
② 나 에이 로맨틱이야 만약 우리가 사귄다면 너는 방황할 거야 그런데 네가 다른 애랑 사귄다면 미안 그건 잘 상상이 안 가 → 이건 좀 아니다 (절대 절대!)
2014년 12월 15일
원우가 돌아왔다 역시 솔로보단 그룹이 더 재밌겠지 요새 원우는 데뷔조 애들이랑 다 같이 막바지 준비하느라 정신이 없다 나도 그렇긴 하지만 나는 혼잔데 그래도 원우가 재밌어 보여서 좋다 그리고 나는
나는 요새 뭐 그냥 이렇게 살다가 말라죽을 거 같아서 못 참고 원우 몰래 다른 애들한테 먼저 커밍아웃했다 예상은 했지만 역시 이상한 눈으로 본다 사랑 안 하는데 전원우랑 키스 왜 했냬 그 얘기할 줄 알았다 멍청한 놈 원우가 나 좋아하니까라고 어떻게 말하겠냐 내가
하여튼 걔들은 입이 가벼워서 문제다 절대 소문내지 말라 했는데 나중엔 동네 사람들도 다 알 것 같지 부질없는 짓이었다 좀만 참을걸 근데 나는 내가 사랑과 상관없는 사람이라고 평생 이해시키면서 살아야 하나?
일기의 이름을 빌려 써놓은 권순영의 회고는 거기가 마지막 장이라 책장을 덮었다. 그날, 스케줄을 위해 권순영이 집을 나가기 전에 우리는 오 분 동안 포옹을 했다. 오래 전의 내 고백에 내가 답했다. 내 옆에만 있어 달라고. 권순영은 고개를 끄덕였고 나는 권순영의 일정하고 느린 심장박동을 맞부딪힌 나의 심장으로 느끼고 나서야 홀로 권순영의 까만 고양이와 함께 권순영의 방 안에 눌어붙었다.
여보세요? 뭐하는 중이야?
네 생각.
어, 뭐라고?
네 생각……. 네 생각하고 있었어.
아하하……, 내 생각하고 있었어? 야 이거 방송이야.
아, 하다 말았어요.
그건 뭔 말이야.
방송이니까 하다 말았어. 근데 너 라이브…… 진짜로 생방송하는 중이야?
어. 진짜 하고 있지, 거짓말 같냐.
몇 명이나 보시는데?
지금 거의 사만, 사만 명 가까이? 사만 팔십… 팔, 팔천육십 아니 팔천육백오…….
숫자도 못 세. 너 나온다고 사만 명이나 보시는 거야?
어우, 네. 그렇죠.
왜요?
왜요는 뭔 왜야.
호시야.
어.
호시야……. 혹시 술 마시니?
안 마셨어!
어느 날에 걸려온 전화는 권순영으로부터의 전화였다. 원우 씨 안녕하세요. 아, 안녕하세요. 혼자 하는 게 아니었구나. 그 전화엔 곧 우리의 대화를 제재하려는 듯이 누군가 끼어들어 인사했다. 그래서 인사를 받았다. 뒤이어 뭐하고 계시냐고 물어오는 말에, 호시 생각…… 하다 말았고요. 하던 중에 딱 전화가 와서요, 네. 말았네요. 얼버무렸고 그 누군가는 실실 웃어댔다. 권순영이 내게 전화를 걸 이유라면 외로워서인데. 추측이었지만 나는 꽤 묻고 싶은 욕심이 들었다. 그래서.
근데 저 혹시, 초면에 묻기 좀 그렇지만 순영이한테 술 주셨나요. 권순영은 바로 당황했고 누군가는 더 크게 웃었다. 웃음소리가 수화기를 타고 흘러들어와 매니저 형이 후사경으로 나의 안위를 걱정했다. 얘 술 마시면 안 되거든요. 내가 왜 술 마시면 안 돼요. 이상한 주사 있잖아. 자, 끊겠습니다. 그때 누군가는 끊으려는 권순영을 막아 세우고 자세히 물었다. 나는 곰곰이 생각하고 입을 열며 조용해진 권순영을 상상했다. 그냥 귀엽게 애교 부려요, 조용히.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누군가는 이제 권순영을 넘어 나에게까지 질문을 던졌다. 원우 씨는 뭐하시고 계세요? 아, 저는 촬영 중이에요. 화보 촬영? 그거 예전에 끝났잖아. 아니 그거 말고 전원우 티비라고…… 내가 하는 거 있어. 너 유투버 시작했어? 너 진짜 단순하구나. 그냥 회사에서 만들어준 거야.
셋의 대화가 얼마쯤 길어졌을까, 권순영은 내게 문제를 내야 하고 나는 맞춰야 한다며 전화를 건 의도를 돌려 말했다. 네가 평소에 나한테 하는 말이 뭐지? 웃긴 이야기였다. 그만 먹어. 아니이. 그거 말고, 근데 내가 언제 그랬어. 그거 말고 뭐? 네가 나 어떻게 생각하냐고. 바보 같아. 뭐? 왜? 내 맘도 몰라주니까. 그건 좀 새로운데. 원우야 너 나 싫어해? 아니. 그러면? 안 싫어해. 안 싫어하면 어떤데, 안 싫어하니까 어떻다 말이 있을 거잖아. 모르겠는데. 모르겠어?
좋아해.
세 글자. 권순영이 뱉은 말. 이런 식이면 발목에 가시가 돋친다. 나는 매니저 형을 한번 보고 볼륨을 낮췄다. 권순영은 아무렇지 않게 할 말을 이어갔고 갈수록 내 손에는 끔찍한 물기가 잡혔다. 나는 내게 주입해야 했다. 이건 방송이니까.
원우야 좋아한다고.
어…….
너는?
어?
너는.
……나도.
너도 뭐, 뒷말이 있을 거 아니야, 너 나 좋아해?
방송이니까. 방송이니까……. 나도 너처럼 아무렇지 않고 싶다고. 그런데 내가 아무렇지 않은 건 있을 수가 없고 그러니 나는 너를 따라서 밖에 못한다.
말해. 나 좋아하지?
권순영은.
응. 나도 너 좋아해.
에이 로맨틱일 뿐이다.
결국 얼굴이 붉어졌다. 열이 금방 오르막을 올라 식은땀이 나는 걸 매니저 형에게 들킬까 봐 반대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핸드폰에는 많은 사람의 웃음소리와, 몇 초 나왔어요? 어떠한 성공을 축하하는 목소리와, 일 분 안에 '내가 너를 좋아해' 문장 듣기였어요. 원우 씨. 내 꼬인 사고를 펴주는 답안이 쏟아져 나왔다.
원우야 고마워 이따가 내가 전화할게.
그리고 전화는 걸려오지 않았고 전화가 오지 않았다 해서 나는 다시 전화를 걸지 않았다. 대신, 열심히 달리는 차 안에서 포털 사이트 하단을 장식한 권순영의 라이브 영상을 다시 돌려봤다. 좋아해. 그때의 권순영은 어떤 표정을 지었을까 궁금해서. 싸인을 그린 앨범을 펼쳐 들고 밝게 웃는 권순영은 무해했다. 앨범 제목 아이, 알, 엘, 유는 당신을, 정말, 좋아한다는 뜻입니다. 권순영은 나를 좋아해. 나를. 일반 집처럼 꾸민 스튜디오 안에서 숨죽이는 스태프들 덕에 웃는 목소리는 권순영의 것만 들렸고 나는 이어폰을 빼고 잠이 들었다.
이거 이름이 뭔데? 전원우 티비. 아하, 이게 그 전원우 티비야? 응. 그냥 이름 없이 전원우 티비? 생각보다 평범하네요. 이름이 왜 없어, 전원우 티비라니까…… 그리고 아니지. 내가 나오는데 평범하지 않지.
와, 넌 진짜……. 나는 뭐하면 돼?
너는 그냥 호시. 권호시로 나오면 돼.
안녕하세요. 호시입니다.
그냥 호시 아니잖아.
맞아, 안녕하세요. 어제 컴백한 솔로 가수 호시입니다 여러분. 원우 소리 질러! 네. 어….
너 솔직히 할 말 없지?
아니……. 사실은 오월 팔일에 저의 세 번째 미니앨범이 발매됐어요. 어버이날이니까, 부모님께 이렇게 노래 들려주시면서 효도도 하고, 네.
네 노래가 효도 노래였어? 근데 나 그거 하라고 너한테 카메라 쥐여준 거 아닌데.
서로서로 돕고 사는 세상 아니냐. 사실 할까 말까 망설이긴 했는데.
한 주 지나 또 대기실에서 만난 우리는 소소한 대화를 나눴다. 나는 권순영이 발매한 음반을 들었다. 귀여운 오렌지 색 커버가 권순영에게 잘 어울려 그거는 그거 나름의 안도감을 들게 했다. 어떤 색이든 권순영 앞에 붙으면 제 것처럼 잘 소화해내는 게 변치 않을 일이라서인지는 몰라도.
앨범 이름이 아이, 알, 엘, 유…….
응. 너한테 하고 싶은 말이야 이번 수록곡들이 거의 다 그래.
그러게. 나랑 어울린다.
권순영은 웃음으로 답했다. 내 말을 기대했는지 빤히 나를 보다 눈을 접어가며 웃었다. 그때 문을 열고 들어온 한 남자가 녹화 시간이 다 되었음을 알려왔고 권순영은 카메라를 끄려다 방법을 몰라 어리둥절했다.
아… 네 여러분. 아쉽지만 저희가 또 이렇게, 시간이 다 돼서 들어가 봐야 한대요. 야 이거 어떡해. 네 티비인데 내가 마무리해? 나는 권순영 뒤에 붙어서 몸을 숙였다. 앉아있는 의자 헤더를 잡고 권순영의 어깨 위로 손을 흔들었다. 호시 컴백해요. 신곡 많이 들어주세요.
그냥 이렇게 끝난다고?
어. 내 콘텐츠는 매력이 약간 그런 거야 쿨함. 인사도 쿨하게 해야 해.
그리고 카메라를 껐다.
계단 내려갈 때 내가 손잡아줬었잖아. 그때 네가 착하다고 했었어……. 그게 너무 좋았어.
그랬어?
응. 좋았어, 착하다……. 착하다. 고갤 돌려 권순영이 나를 보고 웃는다. 나한테 착하다고 해준 사람 너밖에 없어. 내 칭찬이 좋은 기록으로 남아 네 지반을 단단하게 만들어 준다면 나는 그것으로 만족스러웠다. 우리는 권순영네 집 거실 소파에 다리를 올리고 거꾸로 누워 대화했다. 나는 권순영에게 안긴 채로 팔을 쓸어내렸다.
고양이 두 마리를 키우는 기분이네.
야옹, 마야옹. 저 위에서 권순영의 고양이가 울었다.
나 사랑해?
묻는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서. 물론 예상했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도 답을 해줄 정도로 권순영은 착했다.
우린 지금처럼 그냥 서로를 위해서 같이 있으면 돼. 네가 그랬잖아. 옆에만 있어달라고. 네가 얘기한 거니까 난 진짜 그렇게 할 거야. 네가 같이 밥 먹자 하면 밥 먹으러 나갈 거고 네가 원하면 원하는 만큼 사랑한다고……. 말할 거야. 널 사랑하지 않는데도 말이야. 변함없이 지금처럼 늘 하던 대로. 네가 말하는 우리의 연애가 지금까지 했던 거라면 난 할 수 있어. 지금처럼 아침에 일어나 인사하고 하루에 한 번 이상 통화하고 얼굴 보고 만나고 손잡고 어깨에 기대고 같이 밥 먹고 같이 웃고 키스도 하고. 근데 원우야 너는. 넌 할 수 있어? 그렇게 다 하면서 사랑해달라고 안 조를 수 있어? 오늘은 나한테 진심으로 사랑한다 하지 않을까 기대 안 할 자신 있냐고.
권순영이 착하다는 걸 온 세상이 다 알게 만들어야지. 나는 그저 함께 있는다면 바랄 게 아무것도 없다. 그것이 사랑이던 아니든 간에. 우리가 만들어진 사랑을 하든 하지 않든 간에. 삶의 지향점에 사랑을 넣던 넣지 않든 간에.
연애고 결혼이고 다 사람이 만든 거야. 어디부터 어디까지가 연애인지 정해놓은 것도 사람들이고 키스하고 섹스하고 사랑해……, 사랑한다고 서로 증명해야만 하는 게 연인들의 사랑이라고 다수가 만들어놓은 틀을……. 우리 무시하자. 우리는 우리의 연애를 하면 돼, 순영아. 평생 내 옆에 있어 줘, 사라지지 말고……. 나는 너랑 있기만 하면 뭐든 좋아. 누구든 필요 없어. 그러다 우리 어디론가 떠나자. 이렇게 계속 서로를 찾자. 아무도 없는 곳에 둘만 있자. 응?
누구도 필요 없으니까 나랑 평생? 원우야, 나는 해. 네가 하라 하면 나는 진짜 해. 나도 너랑 평생 있고 싶으니까. 미안한데 사랑 안 하면서 집착하는 거 맞아. 네가 떠날까 봐 무서워서. 그런데 넌 못할 거잖아. 넌 누군가에게 받을 사랑이 필요할 거잖아, 평범한 사람들처럼. 나랑 있는 게 싫증 나서, 어? 누군가 만져주고 사랑하는 눈으로 봐주고 네가 떨리면 상대방도 떨려하는 보통의 사랑을 하고 싶을 거라고. 내가 못하는 거.
왜 그랬을까. 나는 권순영이 무너지려 할 때 지켜야 한다는 강박이라도 생긴 것처럼 굴어야만 해 말문을 열었다.
너의 보통이 나의 보통과 같은 거라면.
순진하고 무구한 권순영은 타이밍을 잘 못 맞춘다. 보통의 사랑을 못 하는 게 결점이 될 리가 없다. 뜯어보면 보통의 기준을 써 준 사람은 없고 써야 할 사람도 정해지지 않은 게 지금이었으니.
내가 화나게 했어?
어. 화나게 했어, 화나.
저 옛날 선인의 시를 빌려, 사랑이 이렇게 쉽게 써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어느새 다가와 천천히 내 볼을 쓰다듬는 손길이 나를 무력화했다.
아니야, 사실 화 안 나.
사랑해.
그리하여 내 세상은 무너진다. 그건 그렇게 듣고 싶었던 말이었으나 내 하늘을 무너뜨린다. 속이 텅 빈 카스테라 사랑 고백. 겉은 부드럽지만 속에는 아무것도 없는 너와 가장 잘 어울리는 그 말이 내 발부터 머리끝까지 물에 잠기게 하고 빼앗아간 숨을 들이마시게 했다.
근데 원우야.
권순영의 허리를 끌어안아 온 얼굴을 묻었다. 머리 위로 손이 올라와 내 머리카락을 매만진다. 손에 잡힌 물기 때문에 자꾸만 권순영에게서 미끄러져도 내 손은 권순영의 얼굴을 쓰다듬고 권순영은 내게.
원우야, 난 오래전에 할 말 다했어. 사랑을 정의하는 일은 여기까지야. 더는 할 이유가 없거든.
잠시만. 내가 그렇게 듣고 싶었던 것이 과연 사랑한단 말이 맞을까. 절실한 사랑이란 누구에게나 있을까. 수많은 감정이 융합하여 사랑을 만들어내는 거라면 수많은 감정의 조각인 우리는 지금까지도 변하지 않고 사랑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충분히. 충분했다. 충분한 사랑. 네 말이 전부 맞아. 사랑을 정의할 이유가 어디 있어. 손에 맺힌 물기가 팔을 타고 흘러 뚝뚝 떨어지고 바닥에 고여 방 안이 습기로 가득 차올랐다. 차올라 하늘을 향해 붕 떴다. 붕 떠서 나는 사람의 목소리는 나오지 않을 고립된 결정체. 나는 생각을 잊기로 하고 말을 잃기로 한다. 그리하여 몸의 팔 할이 녹아 없어지려는 순간, 그 순간에 내 쪽으로 다가오는 까만 동물. 권순영의 고양이가 내 발목을 핥는다. 트랩이었다.
사랑이 필요하단 얘기 아니야. 이제 중요하지 않아 그건.
나는 그렇게 웅얼대며 고양이가 사라질 때까지 너를 껴안고 있었다.
……맥주 마실래?
싫어. 이러고 더 누워있자.
그래.
술 싫어하면서 분위기는 왜 타.
아하하, 그냥 내 마음이야.
못한다고 부족한 게 아니었어. 부족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뒤늦게 알았어. 남들보다 공감능력이 결여된 게 아니라고, 결핍하지 않으니까 나는. 이렇게 태어나 이렇게 사는 거뿐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