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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관 아르바이트?
초롱한 눈망울을 주시한다. 부딪혀오는 게 기시감인지 뭔지 모를 감정이 드는 건 특별한 일이 아니다. 영화관 아르바이트를 하고 싶다며 지극한 갈망을 토로하던 친구 A에게 있어 윤정한은 이 지금, 정보를 제공해야 하는 A, Answer에 불과할 뿐. 대화 주제를 자신의 동거인으로 바꿔버린 A에게 윤정한은 무어라 되짚어 뱉어낼 말이 없다. 주춤대며 시간을 끈 지 몇 초. 흐른다…… 십오 초쯤. 십오 초가 넘어가는 고개에 멈춰 서있는 윤정한은 망설이다가,
너랑 같이 사는 걔, 걔가 거기 메가박스에서 일하잖아. 아니야?
이 문장에서 휘청여 넘어진다.
맞긴 한데.
한데, 뭐?
걔랑 안 친해서.
A는 금세 당황한 표정을 일궈냈다.
같이 사는 데도 안 친하다니 그럴 수 있냐고 벌써 여러 번 달궈졌던 물음. 끈적이며 달라붙는다. 부대끼며 사는데 잘 모르는 게 말이 되냐고? 글쎄. 여기서 집중해야 할 부분은 ‘같이 사는 데 잘 모른다’가 아니라 ‘같이 살지만 부대끼며 살지 않는다’이다. 걔를 알고 모르고는 부대끼며 살아봐야 느끼는 부분이라 전제부터 그릇된 셈. 윤정한은 돌돌 말린 파스타 면을 시선에 담다가 긴 면발처럼 끊어지지 않고 이어지는 생각을 도장마냥 찍어본다. 걔는 날 알아도 나는 걜 모를걸. 그것이 이제야 내린 윤정한의 결론. 내가 걔를 잘 모르는 이유는…. 걔는 소설가 버지니아 울프를 존경하는 듯했다. 아마. 그 작가의 책만이 책장 한 편에 가득 꽂혀있었거든. 그래서인지 몰라도 방에도 잘 안 나오고 나랑 한마디 안 해. 어쩌다 말하는 건 정말 묻고 싶은 게 생길 때. 쓰레기 어떻게 치워요. 형, 소파에 있던 제 충전기 가져가셨죠. 반찬통에 이름 좀 써놔 주세요, 헷갈려서요. 정말이지 살아가는데 딱 필요한 말만 하더라. 윤정한은 포크에 말린 면을 풀어헤친다. 그리고 가장 어이없었던 말이 하나 있는데, 검지로 안경 올리면서 나한테 뭐라 했는지 알아? 제 방에 허락 없이 들어오는 것은 삼가 주세요. 선전 포고였다. 만물이 생동하는 봄에 하필. 그래 놓고 진짜 자기만의 방으로 들어가 문을 잠갔고. 윤정한은 생각한다. 저건 사람이 아니다, 라고. 자기 혼자 겨울을 사는 누에고치다. 자기만의 방으로 들어가는 누에고치. 그런 탓에 버지니아 울프의 동명의 소설을 좋아하는 줄 알았다.
그래서 이것은 전원우에게 대항하려는 어쩌다 고시생인 윤정한의 괴상한 수기.
그래도 누에의 실은 쓸데가 있지. 근데 걔는 살면서 어느 누구한테 도움이 되어주느냔 말이야. 생각해도 모르겠다. 윤정한이 말을 않자, A는, 거기 사람 뽑는다니까 걔한테 내 얘기 좀 잘해주면 안 돼? 묻는다. 윤정한은 생각을 끊는 대신 입을 연다. 나 걔랑 안 친하다니까…. 그러니까 왜 안 친한데. 왜, 와이? 어째서. 뭔 일이라도 있었어? 아니면 친해질 마음이 없는 거야? A가 실망을 한가득 윤정한에게 넘겨주며 WHY를 건너 REASON으로 넘어가는 궁금증을 전송한다. 하지만 이에 피력하여 대적할 생각은 다 떨어졌고. 결국은 힘이 빠지게 웃는 수밖에.
왜냐니…….
카멜 닷컴
야, 너 진짜 최악의 새끼야. 알어?
아까는 등짝을 때리더니 이번엔 발길질을 한다. 허공에 움직이는 두 발에 전원우는 허벅지를 안은 두 팔을 재정비한다. 등에 업힌 권순영은 아프지도 않은 주제에 아픈 애처럼 골골대는데, 조그마한 손 하나가 꼬물꼬물 움직여 옆구리 옷깃에 닿으면 전원우는 하나부터 열까지 세기 위해 천천히 눈을 감는다. 이것도 다 지나가리라……, 하고.
지나가, 지나가라고.
그러나 빌어봐도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 게 떼쓰는 권순영 목소리이고.
움직이지 마. 떨어질 것 같으니까 가만히 있어.
가만히 있기는. 야, 네가 가만히 있어야지.
권순영이 전원우의 등에 얼굴을 비비며 닦달한다. 지금 가만히 있어야 할 사람이 누군데. 전원우는 속으로만 삼키며 어부바를 한 권순영을 살짝 들었다가 놓는다. 그 찰나에 권순영이 전원우의 목덜미 아래에 입술을 붙였다 뗀다. 뭐 하는 거야. 닿은 말랑함에 눈 감을 뻔했다. 하마터면 힘이 풀려 손을 놓칠 뻔했다. 뼛속 깊이 간지러운 건 걸어오는 복도가 오늘만 유독 춥고 길은 탓이라 치부한다. 종합해보면 전원우는 지금껏 긴 꿈을 꾸고 있고 아직 깨어나지 못한 상태다. 권순영의 세계에 갇힌 꿈. 아주 길고 사라지지 않을……. 연영과 학생답게 하루의 장르는 코믹 혹은 로맨스 그쯤의 어중간한 선. 주체? 권순영. 그리고 뒤섞여 로맨스 코미디로 그려지는 형편이 전원우의 위치이자 둘의 투 샷 시퀀스에서 매 순간 난처한 배역으로 치환되는 풍경이라 전원우는 드리우는 몸살에 몸을 파르르 떨었다. 물론 권순영은 아무렇지 않은 듯 호수처럼 잔잔히 고요하다. 지금도 별반 다름없이.
취해가지곤 준다고 좋다고 다 마시고. 적당히 마시라니까. 한숨이 섞인 걱정을 몸 안쪽에서 끄집어내니 권순영은 알기 힘들게 웅얼거리며 전원우의 등에 고개를 파묻는다. 네가나가자하안니까글치. 한쪽 볼살이 눌려 새는 발음. 내가 나가자고 안 해서 그렇다고? 그 문장을 캐치하니, 권순영은 어, 그렇다. 발길질로 답한다. 아파, 하지 마. 도저히 해석 불가인 이국의 언어인지도 모를 권순영의 애먼 소리를 죄 들으며 오다 보니 눈앞에는 목적지가 어느덧 코앞.
내려와.
싫어. 안 내려가.
내려와.
싫다고.
하나, 둘 센다. 셋 셀 때까지 안 내려오면,
내려갈 이유가 없는데 내가 왜 내려가? 싫어.
다 왔으니까 내려. 우리 집이야. 응? 이유 있잖아.
팔에 힘을 주고 반대쪽 손을 뻗어 현관 키패드에 올리자 떨어질 것을 감지한 권순영이 몸을 바짝 붙여 더 세게 목을 끌어안는다. 전원우는 캑캑, 숨이 막혀 조금만 이대로 두면 물 밖에 나온 물고기 신세를 면치 못할 테다. 앞이 흐려져 신중을 가해 손가락을 뻗어보지만 삐끗해 잘못 눌러진 키패드에선 삐삐-거리는 전자음이 나불대고. 아는데 모르는 척하는지 권순영은 등에 매달려 아등바등. 그러니 어지러운 수영장으로 잠수하는 느낌이다. 필요하다면 새로운 호흡이 필요한지라 간신히 재정비하고 간신히 심호흡한 뒤에 문에 바짝 다가간다. 문이 우연히 열린다. 고개를 들었던 권순영이 꽥. 쓰러진다. 연기하기는.
원우야?
집 안으로 들어서니 색이 거의 빠진 은발 머리가 전원우를 마중한다. 이름이 윤정한. 스물여섯쯤 먹었다.
미안해요, 형. 사전에 말 안 하고 누구 데려오면 안 되는데.
신발을 털고 집 안 가장 안쪽으로 들어가면 네 평 남짓한 방이 있는데 윤정한의 뒷말이 그 13 제곱미터에 이르는 순간까지 꼬리처럼 따라붙는다.
괜찮아, 괜찮아. 난 괜찮은데… 완전히 취했네, 얘는. 얘 괜찮은 거야?
아니요. 안 괜찮은 거 같아요.
권순영은 열심히 죽은 체하고. 윤정한은 등에 업힌 작은 몸에 무의식적으로 손을 올렸다가 흘겨보는 기다란 눈에 움찔했다. 손을 뗀다. 조심, 조심. 실내화를 질질 끌며 문 앞까지 따라온 발소리가 곧이어 닫히는 문소리에 먹힌다. 윤정한은 닫힌 문 앞에서 벙벙하게 서 있다가 발을 옮긴다.
이층짜리 침대의 일 층에 권순영을 던지듯 눕힌다. 눈 떠. 너 자는 척하는 거 난 다 아니까. 식은땀이 흐르는 이마를 손등으로 훔치고 양 옆구리에 손을 올려 주시하니 잠자코 있던 입을 서서히 여는데….
너 변했어.
눈을 깜빡이는 권순영은 새우처럼 말은 몸을 풀어 전원우가 있는 바깥을 보고 중얼거린다. 전원우는 한숨을 쉬었다.
내가 뭐가 변해.
변했어, 변했잖아.
내가 어디가 변했는데.
하나부터 열까지 다 변했어….
전원우는 깜빡거리는 권순영의 두 눈에 은근 약하다.
하나부터 열까지 다 변했어?
개새끼, 왜 콘돔 껴? 안 꼈었잖아. 어? 권순영이 벌떡 일어나 앉는다. 전원우도 시선에 맞추기 위해 쭈그려 앉아 권순영을 본다. 안 그래도 기분이 좀만 깎여도 금방 티가 나는 얼굴인데 이리 보니 제법 화가 났다. 진심이었다. 적잖이 당황한 전원우가 입을 연다. 무슨 소리야, 나… 원래 안 했다가 네가 싫어하는 것 같아 보이지가 않길래 그래서 그냥.
말조심해. 확 덮치기 전에.
하라면 한다. 권순영은 자기감정을 허투루 넘기지 않는다. 진심이었고 진지했다. 지나가던 꼬마도 저 눈을 읽을 수 있을 만큼.
너나 말조심해.
웃음이 터져 나오기 직전, 전원우도 권순영의 진지함을 따라 해본다. 하지만 권순영은 미동도 없다.
야. 애무 왜 안 하냐? 난 네가 내 등 뒤로 손 넣는 게 좋은데. 그리고 펠라는 왜 못하게 하냐. 귀는 또 왜 안 무는데… 너 변한 거 맞아, 맞잖아. 맞으니까 인정해봐. 내가 싫냐? 싫은 거지, 어? 이제 나랑 안 할 거지? 재미가 없지?
얇은 원목 침대 기둥을 잡고 폭주 기관차처럼 말을 후다닥, 내뱉는 권순영에 전원우는 한기를 느꼈다. 주위를 살피니 살짝 열린 문틈으로 거실의 불빛이 들어와 있다.
조용히 하자. 밖에 다 들려.
그럼 해, 나랑 지금.
안돼.
안되긴 뭐가! 안 그래도 우리 집에서 몰래 하는 거 아직도 애들 몰래 모텔 가서 하는 거 서러워 죽겠는데 왜 그래. 아! 전원우 진짜 싫어, 완전! 진짜… 존나 짜증 나.
당연히 몰래 하지. 그럼 남들 다 알게 광고하면서 할까?
그때였다. 장판을 밟는 발소리가 서서히 가까이서 들려온다. 권순영은 헛숨을 삼키곤 이불을 확 젖히고 숨어든다. 전원우는 몸을 움직여 본능적으로 권순영 앞을 가린다. 윤정한이 문을 들고 들어왔다.
술을 얼마나 마신 거야. 얼굴이 제대로 빨갛던데, 괜찮은 거야?
전원우는 가만히 두지 못하는 손으로 슬금슬금 안경을 닦으려는 척하려다 목덜미를 긁었다. 그….
친구? 윤정한이 말문을 자른다. 네. 숫기 없는 대답에 웃음이 나온다. 조심히 잘 재워. 자다가 토할지도 모르니까 베개 옆으로 해주고. 말을 해주고 떠난 자리에는 문이 닫히고 빛이 사라졌다. 그리고 벌떡 일어난 권순영은.
야, 못 자! 섹스하고 자!
여기 이거로 얼굴이라도 닦아주고 재워. 피부 상해.
돌아간 줄 알았던 윤정한이 리턴하자마자 전원우는 아주 빠른 속도로 권순영의 얼굴을 손바닥으로 밀쳐 눕힌다.
그럴게요, 형. 쉬세요.
그때가 처음이었다. 눈을 질끈 감고 자는 척하는 권순영 덕에 권순영의 얼굴을 윤정한이 기억하게 된 것은 그때가 처음. 윤정한은 권순영을 이리저리 살피다 돌아갔고 마침내 온전히 문이 닫히자 전원우는 윤정한이 건네준 물티슈로 권순영의 얼굴을 비비며 닦아낸다. 순영아, 잠이나 자. 장난스러운 말투로 얼굴을 벅벅 문지르니 권순영의 두 팔이 허공에서 허우적거리며 춤을 춘다. 어푸어푸 헤엄치다 전원우의 두 팔을 밀쳐내고 몸을 일으키는 권순영.
저 사람 근데 누구야?
신경질적이다.
같이 사는 사람.
둘이? 단둘이, 단둘만 살아?
어.
왜?
다 나갔어. 다 몰래 끼리끼리 사귀다 들켜서. 말했잖아. 우리 집에선 사는 사람들끼리 연애하면 안 된다고.
와, 나간 거 왜 말 안 했냐? 자리 있었으면 내가 꿰차고 들어오면 되잖아. 너 일부러 말 안 한 거지, 그렇지?
뭘 일부러 말 안 해 내가.
짜증 나.
뭐가. 왜 또 짜증이 나.
잘생겼어.
나?
너 말고 저 형. 잘생긴 형이랑 같이 산다고 말도 안 하고…. 권순영이 헛헛하게 웃으면 그건 농담이라는 뜻이었으나 전원우가 보기엔 지금은 작용하지 않는 법칙인 듯했다. 나는. 어깨를 밀어 눕히며 묻는다. 그러나 권순영에게선 늘 비슷비슷한 답변이 나온다. 야, 너는 나보다 별로라니까.
아무튼 네가 제일 짜증 나. 변해… 전원우 왜 자꾸 변해. 왜 변하고 그래, 왜… 야, 미안해. 내가 잘할게. 나 잘할 자신 있다 너한테. 그러니까 변하지 말아 주라, 원우야……. 원우야. 드라마 속 주인공처럼 독백하는 잠꼬대가 버릇이다. 팔로 눈을 가려 표정을 볼 수 없으나 목소리만 들어도 서운함이 느껴지는 게 특기. 전원우는 알코올과 잠에 취한 권순영을 본다. 너는 네 인생의 주인공이 너니. 근데 왜 내 인생의 주인공도 너인지. 하지만 권순영은 잘못 알고 있다. 전원우는 변하지 않았다. 오히려 권순영이 좀 변해야 하지. 잠자리에 든 권순영을 한참 보던 전원우는 이불과 베개를 정돈하다 턱 밑까지 억울함이 서린다. 우울함이 겹겹이 층을 이뤄서는, 내 몸만 좋아하지 말고 나를 좋아해 봐. 속삭인다. 허나 바보 같다. 그리고 권순영도 바보다. 변할 줄도 모르는 바보니까. 바보 같은 친구, 그 친구의 그 친구다. 그런데도 바보 같은 권순영 꿈에 나타나 보는 게 소원이었다. 그럼 말이라도 전할 수 있을 텐데. 내가 네 꿈에 나올 수만 있다면 무슨 짓이라도 할 텐데. 전원우는 매번 바라고 바라기만 할 뿐. 권순영은 변태 하지도 않는다.
권순영은 전원우만 아는 고질병을 가지고 있다. 어느 날의 술자리에서 그리 오래 만남을 가지지 않았던 친구들이, 대체 둘이 얼마나 친한 거야? 물었던 적 있다. 그리고 둘이 답할 새도 없이 먼저 누군가 우스갯소리를 했다. 얘네 거의 부부잖아. 키득키득. 그거 빼고 다 하지 않았을까. 술자리는 금방 게걸스러운 웃음으로 가득 차는데… 장난치며 웃는 친구들에게 전원우는, 그것도 안 빼고 했지. 우리 만나면 몸부터 섞는데. 반박하려다 게네 눈이 웃고 있어서 못했다. 둘의 학창 시절은 다를 바 없이 지금과 비슷했다. 고등학생 때는 점심시간마다 화장실로 달려갔다. 권순영 체내에 가득 찬 욕구 때문에 전원우의 몸은 권순영의 것이었다. 권순영은 틈나는 대로 소유권을 주장했고 전원우는 몸과 함께 사랑까지 퍼주었다. 그러나 권의 체내에는 사랑이 쌓이지 않았다. 권순영은 아무렇지 않았다. 전원우는 아무렇지 않음을 뒤늦게 알았다. 권순영이 말도 안 되는 이유로 자신과 몇 번의 약속을 깨고 깨고 여러 번 깼을 때는 이미 밀려나 권순영의 소매만을 붙잡고 있는 채로 매달려있다는 걸 고전문학 결말처럼 권순영은 나중에야 깨달았다. 전원우보다 늦게. 그래서 질병을 초래했다. 병명은 전원우를 좋아하는 척 연기하는 병.
전원우는 한참이나 권순영을 보다가 앞머리를 쓸어 넘기고 이마에 키스를 남긴다. 꿈에서라도 내게 고백해, 순영아. 새근새근 잠든 얼굴에 입술을 맞대고 싶었으나 그러지 못해 볼을 쓰다듬고 이층에 올라 억지로 잠이 든다.
권순영 일어나. 아침에는 전원우가 일찍 눈을 떴다. 오아시스가 필요해. 오아시스고 나발이고 여긴 없어, 일어나. 누운 권순영을 향해 전원우가 손을 뻗어 권순영은 몸을 일으키려다 금방 윗 침대와 부딪힐 상황이라 방향을 튼다. 누운 자세로 팔만 잡혀서는 질질 이끌려 나온다. 전원우가 바닥에 누워버린 권순영을 발로 슬쩍 민다. 살았니. 권순영은 은근슬쩍 놀려대는 전원우의 발을 때리며 무거운 입을 연다. 나쁜 고양이…. 짜증 내는 모양새는 외려 자기가 고양이 눈을 하곤 전원우의 신경을 긁고 있다. 그것도 모르면서. 눈을 비비며 밖으로 나가보니 어제 봤던 은발의 형이 싱크대 앞에 있다. 권순영은 즉각적으로 몸을 숙인다.
어제 술 먹고 들어와서 꼬장 부린 거 죄송합니다….
꼬장 부렸어? 난 못 봤는데. 아쉽다. 윤정한은 아침인데도 아이러니하게 해사하다. 꽃처럼 웃으며 딸기 우유를 마신다. 권순영은 어색한 공기에 떠밀어진 기분이 들어 두 손만 꼼지락거리다가 윤정한 쪽으로 발을 옮긴다. 저, 있잖아요. 형은 근데 원우랑 언제부터 친…. 넘어가려던 권순영을 윤정한이 말을 끊고 빠르게 다음 지문을 캐치한다. 원우는 뭐해? 하릴없이 권순영은 멋쩍게 뒷머리를 긁으며 거짓말한다.
원우는 자요.
나 안자.
푸석한 머리와 퉁퉁 부은 얼굴로 원우야…. 부르는 권순영을 보고 어떻게 웃지 않을 수 있을까. 나오자마자 전원우는 눈도 제대로 못 뜬 권순영의 모습에 웃음을 터트린다. 왜, 왜 웃는데. 영문을 모르겠다는 눈빛으로 따라 웃는 권순영에 전원우는 망가진 머리를 정리해준다. 그때에 윤정한은 느낀다. 저렇게 웃을 수 있는 애였다니. 그럼 친해질 수 있을듯싶다. 그러나 싶은 건 싶은 거고. 이상 전원우와 윤정한은 친해질 수 없었다. 이유는 간략하고 짧아서 덧없는 것. 권순영 때문이었다.
너 저 형이랑 단둘이 있지 마. 어떻게 단둘이 안 있어, 단둘만 사는데. 뭔 말이 많아? 단둘이 있지 말라 하면 말면 되지. 일미 터 이상 거리 유지해, 알았어? 아침 수업 때문에 일찍 나가봐야 하는 권순영을 버스정류장까지 마중하러 나온 전원우는 쏟아지는 햇빛 대신 쏟아지는 일 리터의 잔소리를 들었다.
아, 얼른 대답해!
알았어.
옆구리를 팔꿈치로 밀어오는데 가만히 있을 수가 없어서 응답해주었더니 도리어 툴툴대는 꼴.
진짜 싫다.
싫으면 나랑은 왜 다녀.
누가 너 싫다 했냐. 그냥 이 상황이 싫은 거지.
이죽대던 권순영이 전원우를 제치고 걸어간다. 아스팔트 아지랑이는 상황 파악도 못 한 채 피어오르고, 멀어져 가는 뒷모습에 전원우는 갑작스레 아침에 윤정한과 했던 대화를 떠올린다. 원우야. 너희 영화관에서 새로 사람 안 뽑아? 전원우는 그 물음에 뽑는다고 답했고 윤정한은 잘됐다며 친구가 전달한 부탁과 자랑을 동시에 늘어놓았다. 친절한 사람이었다. 친절하고 착한. 도덕과 양심이 뭔지 배우지 않아도 범법 따위 저지르지 못할 사람. 권순영이 좋아하는 타입의. 전원우는 선량한 윤정한의 눈을 뚫어지게 보다가, 귀 기울여 듣다가, 좋다고, 얘기해보겠다고 선뜻 나섰다. 윤정한이 기쁜 얼굴로 전원우의 어깨를 토닥였다.
잘 가. 인사를 하고 돌아서 가는데 들려오지 않는 목소리에 걱정이 어려 뒤를 돌아보니 전원우를 빤히 보고 있다. 왜 인사 안 해줘? 전원우가 묻는다. 운동화 코를 바닥에 차던 권순영이 답하는 대신 한숨을 쉰다. 전원우가 그려놓은 영역을 은근슬쩍 넘어오는 셈이다.
할 말 있어?
어.
그리고 걸어온다. 권순영은 전원우의 눈을 똑바로 보고 바람 빠지게 웃으며 살짝, 아주 조금 입꼬리를 올리면서 전원우의 재킷을 잡는데,
너 거기서 나오면 안 되냐? 그 집에서 나와. 안 나오면 내가 들어가.
입꼬리에서는 줄줄, 잼을 흘린다. 내뱉었다. 뱉어낸 말로 또 이렇게 주도권을 잡는 식. 전원우는 흔들리는 선에 서서, 안돼. 이렇게 돼버리면… 우리는 무의미한 경계의 불투명한 사이가 된 지 오래잖아. 속으로 카운트 다운. 숫자를 센다. 세상에 흑과 백만 남는다면 섞어서 회색을 만들어버리고 마는 내 인생의 유일한 주인이자 절대 조연 따윈 못하는 너 때문에 나는 늘 발목에 덫을 걸고 있는데 네가 자꾸만 덫을 건드리니까 나는 발목이 조여 오고 너는 유희만 가져가잖아…. 하고픈 말은 정확히 십 초짜리. 그렇지만 십 초 동안 전원우는 차라리 사색에 잠긴다. 권순영이 덫에 완벽히 걸리기를 바라면서.
들어오면 뭐 하려고?
차가운 말이 눈앞에 떨어지자 권순영은 미간을 찌푸리고 전원우는 탁한 말로 권순영의 심기를 건드린다. 근데 넌 내가 왜 나가야 해. 정한이 형 때문에? 아… 너 첫눈에 반하기라도 했나 보다. 네가 좋아하는 타입이잖아. 그 형 딱 봐도. 권순영이 팔짱을 끼게 만드는 얘기를 늘어놓고 있으니 권순영은 대번 화난 얼굴에서 놀람이 다분한 얼굴로 바뀌어 서서,
말을 왜 그딴 식으로 해.
일갈한다. 전원우는 주춤한다.
미안. 내 동거인이 네 이상형인데 알고도 그동안 말 안 해줘서 빡친거야?
재수 없는 놈. 이 꽉 깨물고 벌레 보듯 노려본다. 너랑 같이 살고 싶어서 그랬다! 근데 네가 거기 있는 게 싫어서! 싫은데… 내가 괜한 말 했네. 그때 마침 버스가 도착하고 권순영은 가운뎃손가락을 전원우에게 들이민 뒤 버스로 향한다. 발을 올렸다. 전원우는 화를 삭이려 노력한다. 개소리. 마음에도 없는 소릴 하고. 같이 살고 싶다니 무슨. 전원우는 권순영이 버스 뒷좌석에 앉을 때까지, 버스가 사라질 때까지 지켜보다가 다시는 널 우리 집에 들이지 않겠다고 다짐… 다짐했건만 새로 씌워진 프레임에서의 전원우는 벨벳 소파에 앉아 윤정한과 마주 보고 있다. 이렇게 될 줄 몰랐으나 이렇게 안 되면 안 될 것 같은 게 역설. 권순영이랑 같이 있고 싶어. 마음 안에 거짓말쟁이가 산다. 자신이 왜 이러지 짜증스럽다. 사실은 오랫동안 염원하던 일이었나. 어색하게 마주 보고 있는 컷에 시침 소리만 커져가는 시간을 깨고 윤정한이 찻잔을 들었다. 입을 연다. 전원우는 헛기침을 한번 하고선 친구 데려와서 같이 살아도 되냐 물었고 윤정한은 그걸 왜 나한테 허락받냐 물었고 할머니가 형한테 물어보라 해서요, 답했다. 윤정한은 방긋 웃으며 쉽게 고갤 끄덕인 뒤 빵 한 조각을 입에 넣고는 역시 셋이 딱 나은 거 같아. 예전에 여섯 명이서는 어떻게 살았더라…. 하고 만다. 윤정한과 전원우가 각자 방에 들어가고. 그리하여 며칠 지나 권순영이 이 집에 들어온다.
너, 그때 만취했던 애?
윤정한은 한눈에 권순영을 알아봤다.
누가 집에 온다면 올 때 미리 알려줘야 해. 예를 들어 가족이나 손님이나 친구들. 그게 상호 간의 예의니까. 피치 못할 사정이라면 어쩔 수 없고, 지난번 너처럼. 둘의 반응을 본다.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처음 만났던 그 장면이 권순영을 새초롬히 웃게 했다. 이에 윤정한도 따라 웃는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저기 쓰여 있는 거 보이지? 가내에서는 연애하지 말기. 어차피 우리 셋밖에 없어서 그럴 일도 없겠지만 전에는 남자 여자 하나씩 눈 맞아서 짝짓고 나갔다니까. 무슨 유성애에 미친 예능프로라도 찍는 줄 알았네. 전원우는 말없이 탄산음료 캔을 든다.
이제 캐릭터가 다 모였으니 설명이 필요한 시점이다. 이곳, 연남 카멜 빌리지 301호의 학생 둘은 한 명은 배우 지망생이고 한 명은 극작가 지망생이다. 제대로 출연한 작품도 없고 제대로 써본 시나리오도 없으나 권순영과 전원우는 연영과 학생으로의 나름대로 프라이드는 있었다. 연기와 연출. 그러니까 물감과 팔레트. 동향으로 교집되지는 않으나 서로의 도움으로 하나를 창조한다는 공생 가치적 학문과 어릴 때부터 유대감으로 십 년 넘게 불투명한 사이로써 결속된 관계. 친구이기엔 연인처럼 기댔고, 연인이라기엔 친구 비율의 퍼센트가 차고 더 남을 것 없이 다 차서 흘러넘칠 듯 말 듯한 바보 같은 관계. 그 비율을 초과하거나 넘어간 적은 없었으나 항상 놀랍게도 사랑 비슷한 걸 하고 있어서 문제라 칭한다. 그리고…. 이곳의 오랜 거주자 윤정한은 할머니가 하는 셰어하우스 사업에 이끌리듯 발을 담갔다. 졸업하기는 마찬가지로 둘과 같은 학교의, 권순영과 같은 연기전공으로 졸업했지만 광고 모델 일을 조금 하다 말고 할머니가 물려준 임대 사업으로 덕에 다달이 생계를 유지한다. 연기로 데뷔하던 친구들 얘기를 들어보면 연기는 본인에게 체질이 아니었다. 그러니 이렇다 할 꿈도, 취미도 없고 목표도 없고. 윤정한에게 미래를 상상하라 하는 건 어려운 일이다. 물론 대학생 때 가장 그랬고. 그러나 그건 끊어지지도 않고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그렇다고 윤의 인생이 불안한가? 그건 아니다. 윤정한은 지금이 삶의 최대치 기쁨을 누리고 있다고 전언한다. 게다가 올해부턴 마음을 바꿔먹기까지 했다. 근래 직장을 가져볼까 생각해 서점에서 책 몇 권을 사들였다. 행정고시에 관한. 시작하긴 했으나 되면 좋고 안되면 그만이었다. 그래서 어찌 될진 몰라도 윤정한은 일단 고시생이다. 가진 돈과 사람과 시간이 많은.
방에 들어온 전원우는 스탠드 불을 켠다. 책상 밑 서랍에서 종이 무더기를 꺼낸다. 콘티였다. 시나리오 콘티는 아니고 그리는 만화의 일부. 전원우는 저번 학기에 휴학계를 냈다. 원 취미였던 시나리오 집필을 접고 보조 취미인 만화 연재를 시작한 지 꽤 되었다. 포털사이트에서의 반응은 심심찮게 괜찮아 연재를 할 수 있는 양분이 되었으나 다수가 모두 좋아하는 주류의 만화는 아니었다. 얼마나 아니었는지 전원우를 가진 권순영조차 보지 않는 만화였으니. 권순영은 전원우가 비엘 만화, 그러니까 남자끼리 떡 치는 만화를 그리게 된 게 자기 때문이라고 어림짐작한다. 그리고 거기엔 망할 자존심이 포함되어있어서 전원우가 연재 텀을 오래 갖거나 쉬거나 하면 권순영은, 나한테서 더는 창작욕이 안 생겨? 묻곤 했다. 전원우는 레퍼런스가 떨어지면 권순영한테 자세 좀 바꿔보라고 하곤 했는데 떡칠 땐 워낙 말을 잘 듣는 타입이라 전원우는 속으로, 이런 거나 잘 맞고. 한탄했다. 그런데도 전원우는 이렇게라도 권순영과 같이 있는 게 불행 중 다행으로 여긴다.
권순영은 전원우의 다작을 싫어했다. 작업에 빠져있으면 연락도 잘 안 되고 재미없게 굴어서. 그래서 권순영은 속으로, 너만 바쁘냐…. 나도 곧 바쁠 거야. 한탄했다. 프로필을 제출하고 돌아와 연락을 기다리는 시간이 늘어났지만 방학이다 보니 가만히 있기만 해서 그런 기분이 드는 거라고 합리화한다. 할 일이 없을 때 권순영은 가끔씩 전원우의 옆에 붙어서는, 만화 그만 그려. 내가 여깄는데. 칭얼거렸다. 그럴 때면 전원우는 셔츠 단추를 풀었다. 둘의 시간이 흐르는 동안 옆 방에서는 윤정한이 흥미를 잃은 행정고시 책에 낙서를 하며 꾸벅꾸벅 졸았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서 의외로 가까워진 셋에겐 잔잔한 폭풍이 불었다.
scene 1
아침에 전원우는 이상한 광경을 목격한다. 윤정한이 권순영에게 딸기를 입에 넣어 준다. 너희 여기서 뭐해. 물으니 소파에 앉아있던 둘이 동시에 쳐다본다. 웃었다. 앉아, 너도. 전원우는 권순영의 옆에 바짝 붙여 앉는다. TV 안에는 사랑스럽게 서로 마주 보는 커플이 나온다. 보는 것도 하필이면 로맨스 코미디 드라마. 원우야, 딸기 먹어. 윤정한이 딸기를 집어 건넨다. 일단 받아 든다. 그리고 전원우는 TV에 시선을 고정하고 손뼉을 쳐가며 웃는 윤정한의 옆얼굴을 보다 권순영의 귓가에 대고, 나 보고는 형이랑 가까워지지 말라면서 네가 그러면 어떡해……. 속삭인다. 권순영은 눈이 동그래지면서 전원우의 옆구리를 찌른다. 그 말 취소할게. 형 좋은 사람 같아. 권순영은 지나치게 밝게 웃었다.
scene 2
담배 피우니? 전원우가 아르바이트를 하러 밖에 나간 어느 날에 윤정한이 권순영에게 물었다. 윤정한은 권순영이 주머니에서 꺼내든 담배에 라이터 불을 붙였다. 권순영은 빨래를 널다가 옥상으로 올라온 윤정한이랑 담배 하나를 손가락에 끼고 대화를 나눈다. 얘기를 나누는 시간은 빨래를 널던 시간의 배를 넘어 계속… 흐른다. 십여 분쯤. 꼼꼼히 말을 다 들어주던 윤정한은 권순영의 답이 안 나오는 인생에 연민을 느끼고는, 자기가 현장에서 뛰는 아는 선배를 소개해준다며 현업 배우 연영과 동기들의 단체 메신저 그룹에 권순영을 초대했다. 이렇게 전원우가 모르는 권순영의 세계는 일 픽셀씩 넓어진다. 전원우가 영화관에서 열심히 티켓을 끊고 있을 때.
scene 3
셋이 타기엔 적당했으나 공기는 적당치 않은 택시 안이었다. 드라마 촬영을 마친 권순영을 둘이서 데리러 왔다. 윤정한의 아는 선배 덕에 드라마에 단발적 조연으로 출연한 권순영은 이 모든 것이 형이라 가능한 거라고 정말 고맙다고 윤정한을 껴안았다. 전원우는 그 순간 자신이 조연처럼 느껴졌다. 가장 왼쪽에 앉은 권순영은 창문에 머릴 기울여 마포대교의 야경을 뚫어지게 봤고 윤정한은 전원우한테 기울어져 어깨에 머릴 기댄다. 전원우는 손이 간지러웠다. 윤정한의 섬유유연제 향 때문인지 배도 아픈 거 같았다. 택시는 조용히 대로를 달리고. 한참이나 말이 없던 공간 속에서 어둠을 깬 건 전원우가 된다.
왜 순영이한테 잘해줘요, 형?
전원우의 말에 권순영이 윤정한을 본다. 윤정한은 전원우를 본다.
나는 도움 필요한 사람 그냥 못 지나쳐.
알아. 근데 순영이가 형한테 도와달라 한 적이 없잖아요.
꼭 말로 해야만 아는 건 아니지.
법령을 쉽게 이해하듯 전원우의 의도도 쉽게 읽어내는 윤정한은 첨예하고 어둠이 가득한 차 내부로 창을 통해 들어오는 밤의 빛은 얼굴의 일부만을 비추고 있었다.
말 안 해도 알아서 도와주는 게 서로서로 좋은 거잖아.
미소 짓는 윤정한. 침을 삼키는 전원우. 말 없던 권순영은 고갤 돌린다. 그리고 전원우의 손등에 손을 포갠다. 원우야. 나 졸려…. 졸려. 졸리다며 전원우의 손을 가져간다. 전원우는 권순영 때문에 희미하게 웃었다.
후로는 비슷비슷한 씬의 연속이라 숫자를 붙이는 건 여기서 그만둔다. 권순영은 늘 간절했고 전원우는 예민하다. 윤정한에게는 권순영을 데리고 나가는 일이 잦아졌다. 권순영은 전원우에겐 뮤즈겠지만 권순영에게 윤정한은 제게 도움을 주는 구세주와 같았다. 자신은 도움을 받아야 할 사람. 그리고 그러고 싶지 않았지만 윤정한은 자꾸 전원우와 권순영을 비교 선상에 두었다. 권순영은 윤정한에게 잘 붙었고 착하게 굴어줬고 따스하게 대해줬다. 아무에게나 그런 거였지만. 그런 권순영의 불특정 다정함을 좋아해서. 그래서 끌리나? 윤정한은 어느새 권순영이 중심에 들어온 인생을 영유한다. 끌림은 사랑스럽고 자연스러운 것. 프로필을 돌리고 돌아와 지쳐 소파에 누운 권순영의 앞머리를 쓸어 넘겨주며 이마에 손을 올려 열을 잰다. 권순영은 자는 듯 보였지만 실은 자고 있지 않았다. 그저 윤정한이 그러도록 놔두었다.
이때부터는 윤정한의 기억이 부분밖에 남아있지 않으니 대본은 배속으로 넘어간다. 윤은 권에게 정보를 조달했다. 권은 윤이 하라는 대로 다 하고 윤은 권이 해달라는 부탁을 다 들어준다. 간혹 윤과 권은 같이 외출하기도 했다. 그래서 전은 자기가 집에 없는 시간에 권한테 매번 전화를 걸어 무얼 하고 있는지 확인해야 했다. 윤은 또 연기지도라는 명목으로 권을 제 방에 들어오게 했다. 권은 윤 앞에서 대사를 뱉는다. 대사는 주로 사랑을 갈구하는 사람의 문장들. 그렇다면 윤정한의 방이 권순영의 물품이 즐비한 방으로 변하던 것은 언제부터였을까. 둘만 놔두니 불안해진 전원우는 방 청소를 위해 윤정한의 공간에 들어선다. 일기라도 있을까 기대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보이는 건 침대엔 권순영 옷. 책상엔 권순영이 쓰던 가습기. 바닥엔 권순영 이어폰. 권순영 권순영 권순영 윤정한 윤정한 윤정한 미친놈. 여기가 권순영 방이야, 윤정한 방이야? 전원우는 더 있을 수 없어 방을 나온다. 밖으로 나와 문을 닫으려는 순간, 책상에 펼쳐진 윤정한 지갑에 익숙해 보이는 사람의 사진 하나를 본다. 본능적으로 지갑을 들어 확인하니 언제 찍은 것인지 끼어있는 권순영과 윤정한이 다정하게 같이 찍은 사진. 전원우는 지갑을 내던졌다. 프라이드 앤 프레쥬디스, 덧붙여 내 질투는 누굴 향해 있는지. 그날 영화를 보던 전원우는 옆에 있는 권순영에게 묻는다. 너 정한이 형이랑 많이 친해졌어? 물음표가 내던져지기 무섭게 대답이 바로 돌아온다.
친하다는 기준이 뭔데. 너랑 나만큼?
……같이 사진도 찍을 만큼.
일방적이었다. 이 정도로 얘기하면 알아들어야 하는데. 전원우는 진지한 얼굴이었는데 권순영은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릴 하느냐는 듯 피식 웃는다.
아니, 난 형이랑 사진 찍어 본 적 없어.
그렇담 네 몸속에도 필시 거짓말쟁이가 산다. 전원우는 권순영을 눌러 눕히고 그 위에 올라탔다. 야, 원우야. 턱을 한 손으로 움켜쥐고 입꼬리 옆에서부터 키스를 퍼부었다. 권순영의 가슴이 오르락내리락, 권순영은 발개져서는 숨을 고르며 헐떡인다. 아야…. 간지러워. 여기서 하게? 전원우는 권순영의 옷 안에 차가운 손을 집어넣는다. 너 소파에서 해보고 싶다 그랬잖아. 입술을 핥으며 가슴과 배를 쓸어 손가락이 지나간 자리에 자국이 남는다. 뜨거운 마찰이었다. 야, 아파…. 권순영이 전원우의 머리카락에 손가락을 끼우자 전원우는 권순영의 쇄골을 깨물고 바지춤에 손을 집어넣는다. 권순영이 입을 틀어막는다.
그런데 하필이면 이때… 핸드폰이 울린다. 권순영의 것이다. 뒤로 넘어가던 목을 꼿꼿이 세워 소리가 나는 위치를 확인한 권순영이 팔로 전원우를 밀지만 전원우는 채 꿈쩍도 안 한다. 살살 귀를 혀로 간지럽히는 전원우에, 원우야… 진짜 잠깐만. 캐스팅 회사 전화일 수도 있어. 애원한다. 권순영의 눈썹이 휘어지며 서운함을 내비칠 때, 마침내 전원우는 감았던 눈을 뜨고 권순영에게서 떨어져 나온다. 권순영은 옷매무새를 단정하고 좁은 탁자 위 핸드폰을 들어 수화 버튼을 누른다. 어디야? 밥 안 먹었지. 안 먹었으면 나랑 먹자 순영아. 전원우는 쏟아지는 윤정한의 목소리에 얼이 나간다. 알았어. 좀 이따 바로 나갈게, 형. 전원우 눈치를 보며 조곤조곤히 얘길 하는 권순영. 전원우는 천천히 손을 뻗어 뒤돌아 있는 권순영의 허릴 뒤에서 껴안는다. 비참하게도. 너 형이랑 단둘이 있지 말고 일 미터 이상 거리 유지해. 귓가에 숨소리를 불어넣으며 허리를 꽉 조이니 권순영은 그 팔을 풀어내고 싶은 마음이 들었으나 전원우를 어르고 달래기 위해 팔을 올려 전원우의 턱을 쓰다듬는다. 이렇듯 권순영이 부드러워질 때는 몸과 몸이 닿을 때뿐인지라 전원우는 권순영에게서 일말의 부드러움을 계속 캐낸다. 그러나 권순영은 끝까지도 대답 않았다. 전원우는 권순영의 귓바퀴를 살살 긁고, 핥다가 이를 눌러 잇자국을 남긴다. 전원우를 쓰다듬던 권순영의 손이 툭, 내려간다. 아프다고 원우야. 붉어졌다. 강제로 붉어진 귀는 권순영에게 반창고로 가려졌다.
의자에 착석하는 권순영을 유심히 보던 윤정한은 의문점을 가졌다. 귀 왜 그래? 권순영은 귀를 만지려다가 멈칫한다. 아, 이거…. 아무것도 아니야. 어물쩍 넘겨버리고 만다. 윤정한은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무슨 말을 하려다 집어삼킨다. 대신, 뭐 시킬까? 메뉴판을 보며 테이블에 올려진 권순영의 손을 잡아 온다. 따뜻하고 다정했다. 권순영은 방금까지만 해도 축축하던 손이 부끄러워졌다.
식사하고 나와서 집에 들어오다가 윤정한이 옥상의 빨래를 걷어오겠다며 권순영을 먼저 올려 보내려 한다. 이에 권순영은 미안해서 극구 사양한다. 자기도 하겠다고 말리는데, 윤정한은 바람 빠지는 소릴 내며 웃고는 권순영의 뒷머리와 목을 쓰다듬으며 새로운 얘길 꺼낸다. 아니야. 원우가 너 기다리는 거 같던데. 식당에서 자꾸 전화하고…. 무슨 일 있는 건가 봐. 어떻게 그리 말할 수 있지. 윤정한은 권순영이 여태 겪어보지 못한 타입의 사람이었다. 그렇게 하라고 시켜도 못할 배려를 윤정한은 당연하듯 하니까 마치 사람 외적인 존재 같았다. 권순영은 쑥스럽게 웃는다. 그리고 차오르는 존경심이 억눌리기도 전에 윤정한은 권순영 등을 밀어 집 앞에 세워둔다. 권순영은 계단을 올라가는 윤정한을 눈으로 가만히 좇다가 입꼬리를 올려 웃으며 현관문을 연다. 순간 아차, 싶다. 눈앞에 갓 샤워를 하고 나온 듯한 편한 차림의 전원우가 서 있었다. 머리에 물이 뚝뚝 떨어지는 채다.
아까 못했잖아. 들어오자마자 손을 잡고 벽에 기대게끔 만든다. 권순영은 차가운 벽에 등을 부딪치고 전원우는 권순영의 긴 팔 티셔츠 안으로 손을 집어넣어 옆구리를 살살 매만진다.
야, 잠시만.
전원우는 권순영의 벌어지는 입에 짧게 키스를 하고 떨어진다. 두 손으로 양 허리를 쓰다듬으며 코와 코가 맞닿는 거리만큼 가까워졌다. 전원우는 입술을 머금으려 입을 벌리다가 잠시 멈춰, 권순영과 눈을 마주한다.
궁금했어. 빠는 게 좋아, 핥는 게 좋아?
권순영은 아무 말도 못 한다. 옆으로 흘깃 눈을 굴리며 열릴 것만 같은 현관을 쳐다본다.
정한이 형 곧 들어와.
어느 쪽도 아니면 깨물을게.
전원우는 천천히 손을 허리에서 가슴으로, 위로 살살 매만지며 삼키듯이 권순영의 입술을 내리누른다.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권순영은 초조했지만 당장은 좋아서, 전원우의 목에 팔을 감는다. 입술이 붙었다 떨어지는 소리만 거실을 가득 채우고. 전원우는 고개를 꺾으며 입술에서 턱, 눈과 코와 입. 눈에 보이는 권순영의 모든 것에 흔적을 남긴다. 권순영은 현관이 열리는 소리에 흥분했던 숨을 내쉬면서도 전원우를 부른다.
원우야, 원우야, 원우야…. 심장이 빠르게 달음박 쳐 숨을 몰아 내쉬는 것을 윤정한은 다 봤을 것이다. 갑작스레 떨어지는 모습도. 그러나 떨어졌음에도 전원우의 손은 권순영의 옷 안 옆구리에 가닿아 있고 권순영은 전원우의 가슴팍에 두 손을 올려놓고 미처 밀어내려던 것을 멈춘 채 들어온 윤정한과 마주했다.
둘이 뭐 했어?
말을 꺼낸 사람은 윤정한이 아닌 전원우. 권순영의 얼굴은 아직도 상기되어 있었다. 윤정한은 그 얼굴을 보다 둘을 지나쳐 품에 안고 온 빨랫감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산책.
형.
전원우는 권순영의 흐트러진 앞머리를 정리해주곤 윤정한에게 다가간다.
거짓말하지 말고요.
너는 안 했어?
바늘같이 날카롭다. 윤정한의 닿아오는 시선에 권순영은 초조하고 불안해진다. 전원우가 다시 입을 연다.
우리가 나갈게.
전원우가 축축한 목소리로 차분히 대항하자 윤정한은 헛숨을 뱉고는,
누가 나가래?
툭 쏘아붙인다.
우리 사귀는 거 다 봤잖아요.
모르겠는데.
모르긴 뭘 몰라… 방금 키스했는데.
키스한다고 다 사귀나.
능청스러운 결말. 전원우는 윤정한의 뻔뻔함에 신물이 난다. 그리고 자신의 멀쩡했던 자존심은 거지같이 지지를 못하여 배는 더 과격해져야 했다.
우리가 키스만 할까.
전원우.
그때 권순영이 낀다.
형, 못 본 척해주라. 나 여기 아니면 우리 집으로 돌아가야 하는데 그러기 싫단 말이야. 부모님 만나기 싫어. 나 언제까지고 나보고 연기하지 말라는 소리나 듣고 살 수 없어. 응? 형은 내 사정 다 알잖아. 알잖아, 형……. 형은 내 얘기도 다 들어줬으면서 나를 내보낼 수 있어?
윤정한의 앞에 서서 절절하게 애원한다. 이건 전원우의 미래에는 없던 페이지. 쓰일 거라 예상 못 한 씬의 시작. 전원우는 걱정이 든다. 만약 있던 규율을 깨버리고 권순영의 애절함 하나에 단순히 윤정한이 녹는다면. 그래 버리면.
가내 연애 적발 시 강제퇴거, 할 거면 나가서나 실컷 하세요. 괄호 열고 짐 빼고 눈웃음 괄호 닫고. 저거 형이 쓴 거죠.
응.
윤정한은 식탁 앞에서 일어나 전원우에게 다가간다.
내가 썼으니 바꾸는 것도 내가 바꿔.
그런데 여기서, 권순영이 한마디를 더 보탠다. 제법 진지한 얼굴로 전원우를 무시한 채. 굳이 하지 않아도 될 말을.
근데 형, 알지? 있잖아. 우리 그런 사이 아니야.
그 순간 전원우의 머릿속에는 파노라마가 감긴다. 잔잔한 파도처럼 밀려오는 기억의 조각들. 파도 결은 전원우의 몸을 치고 가고 결 따라 전원우는 온몸이 휘감겨 물이 뚝뚝 빌 밑에 고인다. 권순영의 말에 윤정한은 어떤 마음이 들었는지, 전원우는 모른다. 안도였을까, 당황이었을까. 전원우가 윤정한의 마음마저 스캔하려 할 때 갑작스레 윤정한은 가까이 다가와 전원우의 얼굴 가까이에서 소릴 낮춰 읊조린다.
원우야. 가만히 있어. 그냥 서로서로 민폐 끼치며 살자…. 지금까지 잘만 살았잖아. 여길 순영이도 맘에 들어하고.
권순영은 어느새 윤정한 옆에 서있다. 윤정한은 상실감을 느끼는 듯한 권순영의 두 눈을 쳐다보고 다시 전원우를 마주 본다.
그리고 나도 순영이가 맘에 드는데.
윤정한이 햇살을 닮도록 웃는다. 전원우는 한기에 손이 떨려 두 손을 뒤로 숨기었다.
형. 무슨 개소리를 정성스럽게 해….
전원우는 이게 뭘까 싶다. 뇌 내로 묻어두었던 생각의 파편 중에 하날 꺼낸다. 내 질투는 누구에게 쓰이고 타들어 갈는지. 아직도 덫이 달린 발목으로 그 생각에 묶여있는 전원우는 권순영과 윤정한을 번갈아 보며 어이없게 웃었다. 천장에는 언제 들어왔는지 모를 나방들이 날갯짓을 하고, 빛을 따라 들어와 붙어있는 그 모습은 꼭 셋의 상황 같다. 우리는 열렬히 사랑하기엔 이미 낡은 청춘을 등에 하나씩 지고. 빛을 쫓아가는 거라고. 전원우는 권순영의 손을 잡아끌어 자기 옆으로 오게 해, 허리를 안았다. 그리고 그것이 짐일지 아닐지는 지내다 보면 앞으로 알게 되겠지.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