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공웹진 참여글
노을빛 물이 들면 경계가 생겨났다.
공대 출신이라 아날로그여도 전자기기쯤은 껌이다. 둥둥 떠돌아다니는 전축을 잡아 고물차 빈 트렁크에 올려놓고 악기점에서 쌔벼온 앰프를 연결했다. 밤이 사라진 지 22일이 되어간다. 통화는 끊겼고 사람은 증발했어도 우리는 그대로였다. 모르는 사람들의 다발적 목소리를 들은 게 언제가 마지막이었던지……. 거리가 허허벌판이었으나 그나마 볼거리로 부서진 건물들과 중력 잃은 것처럼 하늘을 떠돌아다니는 물건들이 있었다. 우리는 현대미술이 익숙지 않았지만 그것은 나름대로 운치가 있었다. 그걸 과학적으로 설명하는 일은 포기했다. 밤이 사라지는 이유를 우리가 규정하지 못하듯이.
멀쩡한 줄 알았던 전축이 금방 고장이라 근처의 철물점으로 향했다. 부서진 유리 조각에 손을 찔릴뻔한 걸 뒤로하고 가게 안을 뒤졌다. 기기에 연결 가능한 전선을 찾아 돌아와 보니 최한솔은 핸드폰을 꺼내 오래전 음원사이트에서 산 음원을 틀었다. 데이터 없어도 재생할 수 있는 노래가 몇 곡 안 되었다. 들을 만큼 들었고 가수의 목소리 떨림까지 외웠어도 반복되는 로직. 나는 그대로 뻗었다. 노을이 지면 새로운 새벽이 시작된다. 우린 그걸 해가 떴다고 불렀다. 사실상 해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두 눈으로 보기 힘든 다량의 빛이 쏟아지는 것인데. 무슨 계시처럼. 신의 마지막 가호 아니면 신의 시체처럼. 그럼 우리는 허수아비처럼 오도카니 거기 있을 뿐.
트렁크에 반만 걸쳐 누운 채로 하나씩 손가락을 접는다. 그러니까 지금은 17시 59분이고 피엠 여섯 시부터 에이엠 여섯 시까지 총 열두 시간이 텅 빌 셈이었다.
일 분 후.
에이엠 여섯 시. 빨갛던 주변이 금세 시퍼렇다. 최한솔이 웅얼거린다. 형. 해 떴다. 나는 고갤 돌린다. 철제 삽을 어디서 구해왔는지 너는 팔을 걷고 땅을 판다. 땅에 떨어진 위성을 심을 작정이다. 하지만 새벽에 몸을 쓰는 건 고된 일이다. 눈 뜨기가 괴로울 정도로 머리가 허했는데 최한솔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형. 볼륨 최대로 틀까? 어 그러자. 응. 그게 좋을 거 같아. 나는 바람을 맞으며 후드를 뒤집어썼다. 앞머리가 갈라졌다. 최한솔이 다가와 전축을 매만지고는 누워있는 나를 내려봤다. 나는 머리를 팔로 받쳐 후드를 벗었다.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살살 쓸어 넘기고 있으니 최한솔이 피식 웃는다.
기분 좋아 보여.
희미하게 웃으며 전축 옆에서 하늘을 올려다본다. 둥둥대는 베이스 소리. 따라 쿵쿵대는 드럼 박동. 그리듯 발목을 까딱까딱까딱. 왜 하필이면 다 뒤진 결말의 이 공기가 달달한 것일까. 나는 절대 사라지고 싶지 않았다. 금방 새 세상이었다. 망했지만서도 새 세상은 온다. 밤을 죽이고.
“원우 형.” “어.” “우리 참치캔 다 먹었나?” “아니. 조금 남았어.” “몇 개?” “음… 글쎄. 한 아홉 개?”
어쩌면 이 세계의 유일 생존자로 사는 건 나쁘지 않다. 근데 생존이라 하기에 뭐하지 않아? 목숨만 붙어있는 거잖아. 최한솔이 자동차 보닛에 앉아 아이스크림 통 붙잡고 웅얼거렸다. 솔직히 나는 걔가 하는 말 따위보다는 입안으로 빨려 들어가는 플라스틱 숟가락 따위에 신경이 왈칵 쏟아져 흘러내려. 저 입술을 먹으면 어떨까. 혀를 집어넣으려는 충동. 뭉친 애욕은 가슴속에 남아 들불처럼 펄펄 끓는 것. 이런 걸 뭐라 하나. 뭐라 할까……. 우리 눈도 맞췄으니 입도 맞춰볼래? 순간적으로 내 입에서는 뜬금없는 물음이 튀어나오고 최한솔은 내게 눈을 떼지 못했다.
어, 형도 먹고 싶어?
그때 나는 내가 한 말이 실제가 아님을 알았다.
한솔아.
최한솔은 금붕어처럼 두 눈동자를 느리게 움직였다. 하필 입술에 묻은 크림을 핥는다. 하필 나는 그걸 봐버려서. 터벅터벅 다가가 네 몸을 살짝 밀어 넘어뜨렸다. 최한솔은 차체에 기대어 눈을 내리깔며 나를 은은히 쳐다본다. 형. 왜 그래? 떨떠름한 웃음으로 내 얼굴을 담으려 애를 썼다. 너는 이런 게 뭔지 모르잖아. 나는 그렇게 말하며 코앞까지 다가가 이마를 맞댔다.
응. 몰라. 뭐 하는 건데?
애정표현.
어……. 키스할 거야?
응.
그 순간 입술을 훔쳐 숨을 들이마시니 빼앗은 숨결이 서서히 얼굴 위로 퍼졌다. 오 마이 갓…. 중얼거리며 얼굴을 매만지는 너. 안달 난 내가 손가락을 하나씩 떼어내자 최한솔은 큰 눈을 끔뻑거리며 사랑스럽게 웃었다. 이게 이렇게 좋은 건지 몰랐어. 원우 형. 그러고는 벌떡 일어났다. 나 할 일이 떠올랐어.
여기서 끝이에요, 하고 딱 끝나는 종말은 없어. 뭐든지 조금씩 변해가고 있단 거지.
달각달각 달각달각……. 다음날에도 최한솔은 열심히 위성을 고쳤다. 조금만 제대로 묻으면 복구될 것이다. 이런 건 금방 돌아올 수 있다. 최한솔은 새 숨이 자라나고 붙을 수 있게끔 모든 걸 고쳤다. 인형도 별도 찢어진 책들과 부서진 소품도. 갖가지를 네 손으로 만들어서 재창조했다. 그런 일이 당연한 것처럼 태연자약했다.
밤 같지 않은 환한 노을이 핀 밤에 짐가방을 내려놓은 최한솔이 텐트 안으로 들어왔다. 비상용 노란 텐트는 둘이 있기에 조금 좁았다. 왜 쓰다 말아? 최한솔은 노트를 끄적이던 내 옆에 바짝 붙어 엎드렸다. 아, 미안. 여기까지만 쓸래. 나는 자리를 비켜 옆으로 살짝 이동했다. 넌 뭐 하고 왔어? 얼굴에 웬일인지 아주 작은 상처가 묻어있었다. 나는 심상치 않음을 느꼈다. 그게… 그냥 거슬리는 게 있어서 처리하고 왔어.
최한솔은 우주에 가기 위해 바삐 살았다. 매일을 버릇처럼 말했다. 우리 이곳을 벗어나 함께 우주로 가자. 나는 바보처럼 대꾸했다. 죽어 거기 가면. 하지만 최한솔은 신경 쓰지 않았다. 그래. 그러면 거기서 죽자. 그리고 위성을 손봤다. 나는 꼭 너를 우주로 보내야 하나 하는 딜레마에 빠지곤 했다. 죽어도 거기서 죽고 싶어? 물으면, 응. 한 번쯤은. 하는 천연한 대답이 돌아왔다. 너는 아직 모르는 게 너무 많다. 거슬리는 게 뭐였어? 코코아를 따라주고 컵을 건네니 최한솔은 뜨거운 김을 얼굴에 갖다 대며 작게 중얼거렸다. 그냥. 형 욕하는 현수막 같은 게 있더라. 그러는데, 꼭 말하기 싫은 걸 억지로 뱉어내는 느낌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게 무엇인지 어렴풋이 눈치챌 수 있었다. 그런 게 왜 있는 거지, 아… 형. 미안한데 나는 형에 대한 기억이 별로 없는 거 같아. 최한솔은 솔직하게 말하며 머리를 긁적였다. 나는 떨리는 눈동자를 깊게 들여다봤다. 당연했다. 사실 너는.
너는 지구를 위해 개발된 특파원. 그러나 그걸 잊어버린, 한마디로 내가 만들어낸 내 최초의…….
어차피 지구는 멸망한다! 그날은 악을 쓴 얼굴들이 도로를 달렸다. 뒤따라 여러 청년이 줄줄이 뛰쳐나오며 양쪽 모퉁이로 제각기 갈라졌다. 우리는 희생이 필요하다고 쓰인 피켓을 든 중년 남자가 주차된 차에 색깔 라카를 뿌려댔다. 널찍한 검은색 보닛이 햇빛을 받아 들끓더니 쩌저적 갈라지다가 위로 솟구쳐 금방 깨져버렸다. 변화는 언제고 옆에 있었다. 기온상승과 원인불명의 이상 현상들. 벽을 가르는 원색의 노랑이 짓궂다. 뿌려져 붙은 글자가 유연히 흘러내려 아스팔트의 갈라진 사이마다 스며든다. 저 남자는 멸망을 반대하는 집단에 속한 자다. 이런 일이란 비일비재하다. 메시아를 염원하는 자들은 도시에 깔리고 널렸으며 그들은 희생자를 바쳐 멸망으로부터 구원받고자 했다. 신을 대신하여 숭고한 일을 저지르고자 자기애에 도취한 사람들. 연구소 밖은 그새 적의를 가득 품은 시위자들로 가득 찼고 사방으로 거대한 반발이 오갔다. 나는 잡고 있던 가방끈을 놓았다. 저들 때문에 결국 연구소 단지 안으로 들어가지도 못한 채 망설이다 걸음을 반대로 돌렸다. 어딜 가나 송출되던 뉴스는 어느덧 카운트다운에 들어갔다. 디데이 5일. 일반인들은 생명 연장의 마지막 기한이다. 최한솔은 그 길을 마냥 걸었다. 긴급히 속보를 띄운 상가 안의 모니터를 지나치며 분명 이 끝이 정말 끝이라 생각지 않았을 것이다. 자신의 혼만은 사후에도 남아있으리라 믿었다. 끝까지 질긴 삶이지. 죽을 듯 죽지도 못하는 걸 알면서도 우연처럼 죽기를 바라지만 불사란 최한솔의 껍질이었다. 최한솔이 우주의 강제 입주자로 등록된 지 이십여 일이 지났고 내 손에서 탄생한 지 1년이 지났을 때였다. 이제는 남은 세상의 끝. 떠나야 했다.
청년의 목숨이야말로 유일한 무한동력입니다
새하얀 빌딩에 걸린 현수막을 한참이나 쳐다보았다. 온갖 미디어와 길거리를 장악한 문장들이 날이 서 있다. 멸망은 한참 전에 예고된 일이었다. 정부는 지구를 대신할 새 보금자리인 행성84를 발견하였고, 청년들을 정부의 실험 주체로 이용한다는 공식 안을 발표했다. 그러나 84로 이주하려면 필수 테스트를 모두 통과해야 했다. 물론 최한솔에게 그따위 것들은 필요 없었다. 죽을만한 고통이 찾아와도. 예를 들어 옥상에서 떨어지거나 포크레인에 치이는 일들을 겪어도, 질병을 일으키는 바이러스를 투여해도 죽지 않는 불사자가 된 건 내 연구 성과로부터 비롯됐다. 시청 관계자는 말했다. 병원에서 보내준 기록에 의하면 최한솔98218은 특별하네요. 원우 씨가 만드셨고. 흐음, 근데 말이죠. 멸망도 다가오는데 행성84로 이주하려면 테스트를 통과해야 하잖아요. 그러니까 이렇게 신체조건이 우수하면, 선발대로 얼른 가야 하지 않겠어요? 연구소장 권순영은 원체 일을 잘했다. 부하 직원들에게 주민들을 설득할 대본까지 직접 써준다는 소문이 있을 정도로. 그는 행성84의 직업 연계 시스템에 등록되어 활동하는 지구인의 대리인이면서 이주자로 등록된 합격자들에게 지시를 내리는 일을 했다. 정부와 연구소의 협력으로 최한솔은 사람처럼 완벽한 안드로이드로 자라, 행성84의 테스트 선발대로 등록되었고 나는 나와 함께 한다는 명목으로 그 서류에 서명했다. 사람들은 연구소장을 불가침의 영역이라 불렀다. 그런 연구소장을 맹목적으로 따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부정하는 사람들도 마땅히 있긴 했다. 절망과 두려움은 정부가 미는 슬로건처럼 거리마다 공공연한 공공재. 국민들은 슬픔을 공유했다. 자식들은 너나 할 거 없이 일찌감치 어른들에게 사랑이라 하는 답을 먹고 번호표를 받았다. 청년들을 불사의 몸으로 개조하는 것이 정말 사랑이라면, 내가 그런 사랑에 질 수밖에 없다면……. 나는 생각을 곱씹었다. TV 광고 문구는 심의도 거치지 않았을 게 틀림없고. 어찌 됐든 정부는 쥐도 새도 모르게 그 문구를 아이덴티티로 삼아 지구의 멸망과 새로운 보금자리로의 대 이주 앞에 기대하고 있었다. 나는 불어오는 한랭함에 몸을 으스스 떨었다.
84를 찾아낸 우주비행사로서 나는 행성을 살리기 위해 최한솔을 만들어냈다. 그건 나의 임무였다. 우리는 선발대였다. 우리가 떠나던 그 날의 우주선이 발사될 때, 아래에서 인사하는 국민들을 향해 최한솔은 웃음을 지었다. 그러나 우리의 항해는 곧 어려운 국면에 들어서기에 이른다. 행성84가 쏟아지는 유성을 맞아 처참하게 죽어버린 것이다. 도착한 행성은 생명력이란 없이 참혹했다. 몇 달 전에 본 상황과 너무나도 달리, 망가져 폭파했기에 우리는 할 수 없이 돌아가야 했다. 그런데 갑작스레 선체에 결함이 생겼고, 어느 우주 영화에서 나오다시피 나는 당장 센터와 교신을 시도했으나 센터장의 얘기에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었다. 지구에도 유성이 떨어지고 있었다.
추락하기 하루 전. 최한솔은 자신이 누구인지에 대해 내게 물었다. 그건 지난 일 년 중에 내가 들은 처음의 고백이었다.
형. 진짜 나 안 죽는 거야?
나는 절망에 빠져있던 터라 에너지 실에서 나오는 최한솔에게 대꾸할 힘이 없었다.
무슨 수를 써서도 앞으로 그냥, 진짜, 막, 영원히 존재하는 걸까?
너 지금 피곤하다. 가서 자.
형은?
나는 안 피곤해.
아니. 나는 그걸 묻는 게 아닌데.
그렇게 묻는 눈이 반짝반짝했다.
형은 어떻게 되냐고.
어떻게 되냐니.
죽는 게 아무렇지 않아?
아무렇지 않았을까. 난 서로 다른 결말을 가질 것인 우리가 너무나도 불쌍했다.
형은 가족도 친척도 없고 걍 이렇게 사는 내가 뭘 해도…… 이제 형, 내가 형 없이 살아가도 괜찮다, 그렇게 믿어?
하지만 쏟아지는 얘기를 듣고 싶지 않았던 나는 더 이상의 말들을 막았고.
정말 그래?
한솔아. 그만할래.
형. 우주가 옆이에요.
막아도 최한솔은 멈추지 않았다. 그 말에 나는 사방을 둘러봤다. 우리는 그래도 여전히 우주 공간에 있었다. 나는 침대에서 벗어나 바깥으로 걸어 나왔다. 정말 이상하게도, 심장이 터무니없이 빨리 뛰었다. 최한솔은 내 옆에서 방긋이 웃으며 우주의 밤을, 어쩌면 아침을, 새벽을. 끝없이… 사랑에 빠진 듯이. 바라보고 있었다. 이것 봐봐, 정말 좋아. 깜깜한 공간 아무것도 없는 우리의 공간. 너의 눈. 나를 보는 너의 눈동자. 갈빛의 눈동자. 나는 결심이 섰다. 너는 도무지 무슨 이유인지 모른 채 태어나 나 때문에 이곳에 왔으므로 널 책임지는 건 나여야만 한다고.
지구에 추락하고 나서 황무지가 된 그곳을 둘러보고 있었을 땐 눈에 눈물이 고여 꼼짝을 못했다. 우리의 실험은 전체 실패다. 애초에 행성84는 없고 멸망이 눈앞에 있었다. 최한솔은 내 눈물을 닦아주었다. 내가 무엇 때문에 슬퍼하는지조차 모르면서도 마음이 향하는 대로. 온갖 테스트와 실험으로 죽을 수도 없어진 인간도 아니고 안드로이드도 아닌 최한솔을 보며 나는 후회를 쏟아내었다. 애초에 너와 같은 우주선에 탑승하지 말걸. 그편이 좋았을걸. 실험으로 인해 네가 모든 데이터를 잃어버린 채 진짜 사람이라 착각하고 있는 이 순간에 나는 없는 게 좋을 텐데. 나는 이미 우주를 한차례 겪었어. 그래 놓고 네 앞에서 모르는 척했다. 그 때문에 이 사달이 났는데 말이야.
나는 태초에 빛으로 자라서 온 우주를 푸르뎅뎅한 살갗으로 버텼다. 은하수를 떠내려오는 동안 미치는 줄 알았어. 혀에 바늘이 꽂혀 자라났고 수억 개로 갈라지는 혈관에 쏟아지는 뇌수와 꼿꼿한 내 육신이 뜨거워서. 종말이 거깄는 줄 알았지. 내 피부가 벗겨지는 파열음을 들은 적이 있어? 그래서 나는 떨어지는 방향을 틀었어. 지하에도 살 구멍은 있거든. 틀었더니 안락해지더라. 마치 새로 살아나는 기분이야. 뭔지 알아? 나는 만끽했어. 살아 숨 쉬고파서. 그런데 너와 함께 지구로 추락하던 날에도.
“그 기분을 느꼈어. 유토피아를 찾은 거 같아.”
나는 텐트 안에서, 몸을 돌려 내 옆에 누운 최한솔을 바라본다. 너는 처음 듣는 얘기를 곱씹으며 사색에 잠기는 듯했다. 그러다 손을 내게로 뻗었다. 손가락 사이사이가 얽혀오며 피부의 온기로 나를 덥혔다. 그리고 천천히 내 손등에 입술을 맞춘다.
형은 살면서 연애해봤지? 나는 살면서 안 해본 게 너무 많은 거 같애. 연애나 사랑이나… 그것도 그렇고. 난 나랑은 전혀 관련이 없는 것들까지 다 해보고 싶어. 못한 게 아직 많아.
속삭이는 목소리가 편안했다. 사랑스럽고. 우리 있는 이 텐트 안은 고요했다. 어쩐지 녹아내리고 싶었다. 그렇게 무더운 날씨도 아닌데. 나는 내 앞의 얼굴을 한참 바라보다가 말했다. 내 목소리가 어떻게, 너한테 어떻게 들릴까. 나와 같을까. 같으면 내 떨림을 너도 알까. 곤욕이었다. 바람도 불지 않는 초여름에 나는.
내가 만든 내 최초의 사랑에게 마음을 빼앗겨서.
한솔아. 그럼 형이랑 해볼래? 못하면…… 아쉽잖아. 유토피아도 찾았는데.
그 새벽. 나는 너의 위에서 아가미를 빼앗긴 사어가 되어 헐떡댔다. 다리가 얽힌다. 시선이 겹친다. 나는 본능이 이끄는 대로 했고 너는 내 본능에 따랐다. 하늘을 배반하고 더러운 돈으로 생명도 사고 너를 선택한 것이 짜릿하다고 느끼는 나를 위해. 이게 내가 정한 운명이라면……. 금세 너의 손가락들이 내 옆구리를 살살 파고들고 나는 예상치 못한 편안함에 질식해버린다. 내가 널 아이스박스 포장에 담아 폐기물 처리장에 버려도 고물차 트렁크에 몸을 구겨 넣어도 줄을 매달아 헬륨에 떠나보내도 청산가리를 혀에 발랐을 때도 너는 살아났었다. 그것들이 진짜일까. 현실과 이상이 구분되지 않게 된 건 워낙 오래전 일이다. 하지만. 기억 나? 너는 원래 질겼단 것을. 너는 내가 남긴 이 유언을 혹시 알고 있어? ‘최한솔이 가고 싶어라 하는 우주에는 실제 별것이 없고 재미도 없지만 최한솔을 구원하러 나는 새로 태어난다. 그러기 위해 나는 최한솔과 또다시 우주로 향한다.’ 정말 웃을 수가 없어. 내가 지구를 떠났던 진짜 이유.
나는 숭고한 키스를 원해. 신박한 패배와 결말을 원해. 어디 내놔도 죽지 않을 네 몸뚱어리에 결속 당한 채로 지옥에나 떨어져 너와 함께 불타버리고 싶어.
덜떨어진 고백. 모자란 문장들을 무시하며 나는 내 입술을 너의 입술로 헐뜯고 네 입안으로 혀를 집어넣었다. 푸르죽죽한 손톱이 속수무책 힘없이 스르륵 빠져나갔다. 너의 목덜미를 껴안자 너는 마치 내게 속삭이는 듯했다. 달뜨는 신음을 내뱉으며. 형을 사랑하는 나를 사랑해 줘. 허리가 꺾여도 좋으니까 날 더 달아오르게 해줘. 부르는 것 같았고. 그 반들거리는 다리를 벌려 내 허리를 세게 껴안으면 나는 네 몸 위로 넘어져 너를 속박한다. 더해지는 열. 매끄러운 다리. 미천한 감각. 허벅지를 타고 들어오는 손. 이것이 내 업보로 인한 저주라면 우리는 사랑을 죄악처럼 저지르는 것일까.
어서 나를 데리고 나가! 불타는 머리가 소리쳤다.
나는 너를 만들어놓고 정말 죄책감이 없다. 내 손목이 강한 힘으로 잡히고 너는 내 쇄골에 한참 얼굴을 파묻은 채로 숨을 몰아쉬었다. 너의 몸은 뜨거워져만 갔다. 나는 반대로 차가워져 갔다. 몸속에 파문이 일었다. 피가 다 빠져 돌지 않는 너절하고 추잡한 내 몸 껍데기 그것만이 네 품에 남을 터였다. 지옥 같은 침묵. 그걸 깨부숴보는 행위. 그 행위를 행하는 지독한 순례자. 한솔아. 이제 이게 다야. 나는 없어지는 것이 내 결말이고 너는 내 결말에 홀로 남는 것이 시작이고 이 세상이 그거로만 이루어져서 그게 다여도 한솔아, 한솔아. 나는 왠지 계속 살고 싶어. 종말도 끝나버려서 지구가 가루가 되고 우리가 우주에 남게 될 때 그때까지도 너는 내 옆에 있어 줄 수 있겠어? 생각해줘. 만약에, 만약에 말이야. 그런데도 불구하고 말야. 혹시 너도 나를 안고 싶은 거라면 이렇게나 영원히 안고 싶을 뿐이라면 우리 걍 미쳐버린 밤낮을 겪으며 오래…… 오래오래 함께여도 괜찮지 않을까.
너와 나 사이엔 여기서 끝이에요, 하고 딱 끝나는 사랑 따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