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공웹진 참여글
이 이야기는 환상과 현실의 어디쯤에서 비롯된다.
안녕(bye) 그날 이후 정말 오랜만이야. 마지막 만찬의 풍경은 단지 태터솔 체크무늬였다고 일컬을 수 있다. 즐겁지 않은 이곳에서 점심을 먹는 일은 한심하고 또 앞에 있는 사람은 더더욱 한심했다. 찬은 입술을 우그러트린다. 언제부터 이별이 내게 소풍이었던 거지? 식당 안 인테리어는 적당히 유럽식을 따르고 있다. 유럽 가보지도 않았는데. 차르다시 바이올린 소리가 깔리는 여름 한낮. 스산한 에어컨 바람이 목 뒤에 끼친다. 유리병에 꽂힌 분홍색 장미 한 송이가 옆에. 배경은 온통 깨끗하게 때 안 탄 하얀색. 몰딩까지 완벽하게. 케첩이라도 묻으면 눈 째진 건물주가 노발대발할 것 같고. 이게 꼭 마치 자기 심정 같은 것이라, 인상 깊게 남은 건 튀는 태터솔 체크 식탁보뿐이었다.
나한테 할 말 있어서 온 거 아니야?
입술 사이로 새어 나오는 언어가 식탁 위로 내려앉는 중에 상대방 나이프 짓이 잠시 느려지는 걸 목도. 찬은 디저트로 나온 과자를 손에 들고 서성였다. 하필이면 저게 쟤 앞에 있을 게 뭐람. 그렇다면 최대한 얼굴을 보지 않겠다는 전략으로. 시선 프레임에 잡히는 것은 오직 테이블을 두드리는 다섯 개의 손가락만을 유지. 제각기 움직이는 긴 손가락을 보며 찬은 아무렇지 않게끔 말을 꺼냈다.
형. 나 소스 좀.
찬아….
상관없다. 흥. 안달 나는 건 그 사람뿐. 뒷머리를 긁고 안절부절못하는 건 그 사람의 일일 뿐. 하…. 한숨을 땅이 꺼지라 쉬는데, 그 망설임은 마음속까지 와닿아 심장이 쿵쿵댔다. 이제 이런 거 다 지긋지긋해. 마치 생쇼 하는 거 같애. 그동안 아주 파란만장했다. 그래서 붉어지고 싶다. 붉은 해와 마주하여 찬은 새사람이 되기로 다짐했다. 그 산물로 소스에 과자를 콕, 찍어 입안에 넣어서 우물우물 씹기로 한다.
부탁할게. 내 남친인 척 좀 해줘라.
사기그릇은 파찰음을 내지. ㅈ이나 ㅊ같이. 포크가 접시에 떨어질 때도 그런 소리가 나고 머리가 띵할 때도 차갑고 따가운 소리가 난다. 무언가에 얻어맞았다면 지지직 지지직 공같은 머리가 깨질 듯이 혹은 텔레비전 나간 것처럼 파열해 찌직 금이 가버리는데 찌직. 뭐라고? 뭐…… 라고? 찬은 바로 말을 하지 못했다. 생각이 뇌에 진입하지도 않았기 때문에. 말이라는 것을 해야 하는 동물인 인간임을 잠깐 잊어버렸다. 하지만 전원우는 기도하는 자세로 두 손을 하나의 주먹으로 모으고서는 찬을 향해 가련한 눈빛을 쏘아댔다. 갑작스레 놀란 찬은 옆에서 들리는 심장 박동 소리에 심장이 저쪽으로 튀어 나갔으리라 여겼다.
기껏 다시 만나러 왔더니.
기껏 만나러 왔더니!
형 미쳤어? 아니, 미친 건 아니고… 내 말 좀 들어 봐. 어이가 없다. 찬은 너무나도 어이가 없어 일단 어안이 벙벙했고. 전원우가 멋쩍어하며 이어가는 말을 어떤 태클도 걸지 않은 채 끝까지 들어주었다. 미치지 않은 전원우의 계획은 이랬다.
한 이십 년만이래. 에스엔에스로 초등학교 동창들에게 연락이 온 게. 그들은 원우를 어떻게 알고 찾아냈는지 원우를 불러내어 만남의 자리를 가졌다. 세월은 흘렀지만, 옛날의 얼굴 그대로인 친구들은 이미 결혼해 누군가의 남편 혹은 아내가 되어있고 최고급 직장에 돈도 많아서 남의 부러움을 사며 생활을 이어나가는 중이었다. 원우는 온갖 비교와 자랑이 넘실대는 그 식사 자리에서 못마땅하게 삐쭉대며 앉아있었지만, 오지랖 넓으신 친구들은 원우의 생활을 너무나 궁금해했고. 실은 궁금한 척 깎아내리기 위해 떠보는 짓이었음을 원우는 넘어오는 단어 사이사이마다 느끼고 있었다. 그래서 결국.
형 그거 사기야.
찬이 이야기를 멈춘다. 머뭇대다 고개를 끄덕이는 전원우. 하지만.
사기는 아니고… 거짓말.
뭐래. 나를 대동하면 사기가 되는 거야! 사람들 앞에서 가짜로 연기하자는 거잖아.
너 그런 말 하니까 진짜 변호사 같다.
아, 또 왜 그래. 내가 로스쿨을 왜 갔냐?
법 공부 괜히 한 게 아니네.
골치가 아프다. 몇 달 전 헤어진 남자친구가 밥만 먹자며 대뜸 약속을 잡더니. 만나니까 남친 자리 재탈취라니.
그냥 이별 선물이라 생각하고… 해주면 안 될까? 나 걔네들 이제 안 보고 싶어.
보지 말고 살어라 그냥.
그게 마음대로 돼? 걔네들이 인스타로 나를 찾아낸 이상 계속 나한테 연락하겠지. 봐봐 지금도.
식탁 위에 둔 핸드폰을 굳이 굳이 찬의 앞에 보여준다. 몇 개의 다이렉트 메시지가 원우의 계정에 새로운 알림으로 와 있다. 내용은 하나같이 일관적이었다. 은근한 비난으로 시작해서 자기만족으로 끝내는 일방적인 과시. 동물들이 영역 싸움하는 것보다 천박한 괴롭힘으로 보인다. 이성을 가진 사람이라면 이러면 안 되지. 형은 이런 사람들이랑 친구를 왜 해? 목구멍 바깥으로 하고픈 말이 넘어갈 뻔함을 구태여 참았다.
-그래서 다음 주에 찬이도 데려오는 걸로~
-원우야 왜 답이 없어?
-설마 너 거짓말한 건 아니지? 그 정도로 인생 실패자는 아니잖아
-여전하구나 너
에스엔에스를 끊으세요.
사실 너랑 이민 간다고 했어.
찬은 마시던 물컵을 내려놓았다.
미안해. 이미 결혼했다고 했어. 비공개 결혼식으로.
잠깐만 기다려봐. 잠깐만. 나 상황 파악 좀 할게.
그렇다. 대본은 완성판이었다. 찬은 얼른 물을 마시고 가야겠다고 마음을 먹으며 물을 꿀떡꿀떡 삼켰다. 눈앞에 보이는 벽시계는 13시 15분을 가리키고 있다. 찬은 30분에 시작되는 강의를 들어야 한다.
찬아, 다음 주 주말만. 다음 주 일요일만 나한테 시간 내주면 안 될까? 딱 그날이면 돼. 그 후로 어떤 부탁도 하지 않을게.
원우는 간절하다. 찬의 손을 잡으려 팔을 뻗어 보지만 찬은 손을 식탁 밑으로 내렸다. 이에 원우가 아쉽다는 표정으로 찬의 식기를 정리해준다. 그리고는 또 다른 얘기를 꺼냈다. 그날 본 친구들이랑은 단순히 남친이 있다는 것에서 끝난 게 아니었다. 찬의 머리가 필름마냥 사샤샥 굴러간다.
그러니까 형은. 형 친구들이 자기 자랑하고 막 우쭐거리는 폼이 짜증이 나서. 너는 사귀는 사람 없냐는 질문에, 우리가 헤어진 줄도 모르고 ‘얘 중찬이랑 사귀잖아.’라고 누가 그래 가지구, 어? 맞다고 호응하고. 근데 또 옆에 있던 형 친구가, 중찬이가 아니라 찬이 아니야? 이랬다고? 그래서 형은 찬이가 중찬이고 중찬이가 찬이라고 정정하고선 사실 나랑 비공개로 결혼식을 올렸다고 지금은 이민 준비 중이고 나는 되게 잘나가는 법조계 집안에 법인 로펌에서 일하는 억대 자산가라고 해버렸다는 거야? 그러니까, 나는…… 남친이 아니라 남편인 거네 지금?
응. 내가 두 명 사귀는 줄 알더라. 중찬이랑 찬이랑.
와아… 신분 세탁 미쳤다. 내가 형 고소 좀 할게.
안돼!
<고소, 한눈에 이해했나? 그렇다면 실전이다!>는 찬이 가방에 넣어 다니는 책이다. 제목이 요란해 친구들한테 이상한 취급을 받지만. 그렇지만 찬은 캠퍼스 휴식공간에서 심심할 때마다 실제 판례 사례를 읽으며, 이런 일도 있구나. 깨닫곤 했다. 교재에는 안 나오는 사례를 통해 다각도로 세상을 보기 위함이었다. 책의 첫 페이지는 이런 말이 나온다. 법은 어디에도 있으며 어디에도 없답니다. 찬은 심오한 그 말에 깊이 공감했다. 지금 여기에는 법이 있을 차례다. 옆을 보니 튀어 나갔던 심장이 바닥에 데구루루. 굴러다니고 있었다. 찬은 일시적으로 시간을 멈추고 그것을 주워 가슴 깊숙이 꽂아 넣었다. 손에 피가 얼룩졌다. 덥다 더워. 불타오르는 건 바깥뿐만이 아니었다. 찬의 가슴 속에도 반짝거렸다.
남친이 아니라 남편, 내가 왜 남편인 척을 해줘야 하냐!
미안해. 내가… 말을 하면서 신경 쓸 정신이 없었어.
아오! 찌질… 하, 이건 보통 일이 아니잖아, 거짓말쟁이야. 그리고 형은 무슨 그런 얘기를 독서클럽 끝나고 여기서 해? 아, 아니지. 장소가 중요한 게 아니라, 우리가 헤어진 사이라는 걸 잊은 거 같아, 형. 형 너무 특이하다. 이상한 사람인 건 알고 있었지만. 알았지만…….
미안 미안. 미안해 중찬아. 나 이렇게 미안하다는 말 입으로 잘 안 하잖아. 응? 나 지금 엄청. 네 앞에서 민망한데…….
그러게. 형 원래 말로 잘 안 하지.
응. 따지자면 몸으로…….
구려. 어쨌든 난 못 해.
너 연기 잘하잖아.
나 그런 거 못 해! 친구들이 나보고 솔직해서 탈이라더라.
찬은 자리에서 일어나 옷매무새를 정리했다. 시간 다 됐다. 들어가 볼게. 형도 가. 옆자리에 둔 가방을 집어 들고 어서 여길 떠야만 했다. 원우는 나가는 찬의 뒷모습까지 눈으로 좇으며 또 입을 열었다. 중찬아, 생각 바뀌면 연락해! 아니다. 내가 연락할게!
이상해. 엘리베이터를 타고 버튼을 누르는 동안 찬은 머릿속을 지배하는 한 가지 의문에 꽂힌다. 우리는 헤어졌는데 말야. 그래. 근데 왜 헤어졌지? 아무리 떠올려 보려 하지만 헤어지던 당일의 기억이 온전히 나지 않았다. 다만 확실한 건 그때도 밥을 먹고 있었다는 것. 저녁이었고, 법원 근처였기에 회식을 온 회사원들이 많았다는 것. 아스러지는 풍경 속에서 찬은, ‘나 때문에 형이 발목 잡히는 거 같아.’와 같은 대사를 뱉었으며 전원우는… 모르겠다. 뭐라 말하진 않고 그냥 웃고 있었다. 거기까지가 찬이 기억하는 이별 씬.
자?
찬아 자?
중찬이 자?
자는구나.
잘자.
형은 못 자는데.
네가 생각나서 연락했어.
혹시 넌 가끔 내 생각 안 해?
나는 보고 싶어 네가. 찬아. 항상 보고 싶어.
아이구 문자로 트리를 만들겄네. 그날 밤에 전원우는 뭘 먹고 취했는지 메시지를 연달아 보냈다. 찬은 미리 보기로 뜨는 텍스트에 관심을 거두고 음악 어플에서 플레이리스트를 재생시키고 잠이 들려 했다. 그런데 그때, 띠링 울리는 알람 소리. 질끈 감았던 눈을 뜨고 화면을 보니 전원우가 음성 녹음을 하나 보내왔다. 어쩔 수 없지. 찬은 진심 어린 목소리로 하는 말이라면 약한 타입이었다. 이걸로 이별한 상대에게 실례를 저지르는 건 피차일반이라니까. 궁금증에 못 이겨 재생 버튼을 누른다. 아, 이 형은 진짜.
다정한 걱정이 묻어나오는 목소리가 이어폰을 꽂고 누워 자려던 찬의 머리 안에, 공중에, 사방에, 방의 벽 모서리마다 녹아들었다.
찬아. 넌 나의 행복한 추억이야.
얼씨구. 아무렇지 않게 절절, 잼처럼 스며들어 끈적거리게. 속삭대는 이런 목소리는 반칙이다. 찬은 원우를 사랑하게 된 계기를 떠올렸다. 원우는 찬이 뭘 좋아하는지를 알아서 이러는 것이다. 찬은 시청각이 아름다운 걸 좋아한다. 어쩌면 유미주의자일지도 모르겠다. 그렇기에 워낙 직업적 특성을 잘 타고났다. 전원우 걔는,
못된 녀석들아! 내가 너희들을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어디 이 맛 좀 봐라!
성우다.
○니버스 공채 9기.
여보 자기 돼지야, 허니 달링 스위티까지는 안 바랐다. 전원우의 목소리로, 찬아, 중찬아. 이름만 불러줘도 사르르 얼었던 마음은 녹아내리고 리본 풀리듯 화가 풀리니까. 전원우는 주로 나르시스트 미소년 역할이나 전문직을 맡는다. 게임캐릭터 섭외 1순위에, 외화 더빙도 잘해서 잘생긴 소년-미중년 사이를 넘나들었다. 탐정 만화 주인공의 라이벌 탐정 혹은 집사 학생 마법사 선생님과 빌런. 연민을 불러일으키는 불쌍한 청년까지. 사랑이 처음인 상처받은 영혼 역할도 물론… <사랑의 불쏘시개를 써주시겠어요? 제 마음을 후벼파주세요> 이 대사는 여성향 게임 최고의 설렘 대사 상반기 1순위에 뽑히기도 했다. 하지만 가장 문제 되는 것은 찬이 좋아하는 히어로 캐릭터인 박한울의 CV도 역시 전원우라는 것. 찬은 전원우를 처음 만났을 당시에 목소리를 듣고서 까무러칠뻔했다. 한울이가 왜 거기서 나와? 전원우의 머리 위, 떠오른 타이틀이 찬의 눈에 확 꽂히는 것이었다.
박한울(cv. 전원우)입니다.
찬의 주변인들은 둘의 연애에 축하를 건넸다. 성덕이지. 성덕이네? 네가 좋아하는 캐릭터 성우가 네 남친인 거잖아! 맞아. 좋지! 좋았지. 쫑나기 전까진 완전히 내 거였으니. 한 플랫폼에는 전원우 성우 보이스 모음, 캐릭터송, 성우들과의 토크 시사회, 극장판 개봉 인터뷰, 만화 뉴시즌 예고편 응원 영상들이 올라왔고 선배 성우들이 진행하는 팟캐스트랑 공중파 라디오에 게스트로 출연하기라도 하면 청취율이 꽤 높았다. 조금만 서치해도 세상에는 전원우가 차고 넘쳤다. 찬은 연애 내내 원우를 빤히 바라보곤 했다. 신기해. 화면에서 만나는 목소리를 옆에서도 듣는 것이. 찬도 늘 바빴지만, 더빙 스케줄로 스튜디오를 오가며 자신보다 더 바쁜 원우를 이해했다. 어쩌면 원우에서 비롯되는 원우의 캐릭터를 원우만큼이나 사랑했을지도 모르겠다. 전원우의 자식들인 히어로 박한울, 최말중 형사, 리키 말코, 아드릭스, 김상윤, 라일리 맥퀸, 탐정 손태양과 스패니얼. 대박. 형, 스패니얼도 형이 했어? 응. 진짜? 어. 근데 왜? 그럼 짖어봐. 뭐라고? 한마디만 해줘. 저기, 찬아… 여기 지하철 안인데? 아! 대사 하나만 해죠. 나 스패니얼 되게 좋아한단 말이야. 근데 좀 짜증 나. 사람들이 스패니얼 매력을 모르더라. 분량 늘어났으면 좋겠어. 진짜? 응. 나 진짜 좋아해. 부탁할게, 이번 한 번만! 어? 형아….
(아…. 어떡하지.) 알겠어.
원우는 찬의 애교에 약하다.
(킁킁) 월월! 아닛? 어디서 벌레들의 냄새가 나는 거 같군. 흐음……, 저쪽이다, 제군들! 뛰어라! 월!
와, 대박… 진짜, 진짜 스패니얼 짱이다. 형 최고야. 형이라서 멋있는 거야. 이건 형이라서 할 수 있는겨. 형은 진짜……. 원우는 자괴감에 손바닥에 고개를 묻었지만 찬이 좋다면 뭐든지 다 해줬다. 타이밍은 제멋대로였어도. 마음은 변치 않았다. 그런데 우리는 왜 쉽게 헤어진 것일까. 시간이 지나서 그런지 기억은 여전하지만, 확실히 무언가 싫었던 감정은 남아 있다. 헤어진 이유가 있을 거야. 사람이 이유도 없는데 어떤 이별을 하겠어? 찬은 방아쇠 대신 물음표를 당겼다. 이유가 있지, 분명히?
전화 준다더니 정말이네. 동의한 약속도 아닌데 이것 봐. 약속을 참 잘 지킨다. 찌질이 형아, 그만둬. 핸드폰 너머의 여보세요…. 를 덮는 찬의 꾸짖음에 원우는 안심했다. 안 받을 줄 알았는데. 뭐, 그것보다야.
중찬아. 우린 궁합도 안 본다는 세 살 차이야.
하아… 난 가끔 형이 세상을 잘못 배운 건지 세상이 형을 방치하는 건지 헷갈릴 때가 있어.
음… 근데 너 내 번호 안 지웠어?
아뿔싸. 찬은 이별의 제1원칙을 하지 않았다. 헤어지면 미련 따위 남기지 말고 상대방의 연락처를 휴지통에 집어넣어라. 정곡을 제대로 찔린 찬은 뜨겁게 데인 가슴에 식힐 게 필요했다. 씩씩대는 발걸음으로 부엌에서 우유를 꺼내 벌컥벌컥 마신다. 어쩔 수 없다. 이 말을 하려면 준비 운동이 필요하니까. 원우는 꼿꼿하게 찬의 말을 기다렸다.
할게. 이번만 해주는 거야, 다음부터는 뭣도 없어.
다행이었다. 기다린 보람이 있는 대답이었다. 사실 2초 전에 끊을 뻔했다.
정말? 고맙다 찬아. 사…, 정말 고마워.
어. 됐고. 이게 정말 마지막이다? 앞으로 연락하지 마. 우리 헤어졌으니까. 오키?
응. 오키.
엘리베이터를 같이 타는 게 얼마 만인지. 엘리베이터뿐만 아니라, 자주 다니던 길목도, 원우는 손을 잡고 걷던 찬과 함께 다시 걷는 것이 좋았다. 한여름의 아지랑이가 아스팔트 위를 떠도는데 당장 옷을 벗고 풀장에 뛰어들고 싶었다. 지금은 손을 잡기 어려웠으나 옆에 있다는 것만으로 예전 기억은 재생됐다. 추억 속의 물장난. 찬의 함박꽃처럼 피어나는 웃음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깨어보면 현실은 다르지만. 엘리베이터는 층마다 멈추더니 사람들이 여럿 들어왔다. 원우는 뒤로 물러서서 모자를 눌러쓴다.
괜찮아. 형 누군지 아무도 몰라.
지하철에서 꽤 알아봐 주시더라. 몇 번 그런 적이 있어서.
흐음… 그래? 찬은 어깨를 으쓱하며 앞장서 걸었다. 입구에서부터 만난 친구들이 처음 보는 찬을 반갑게 맞이해주었다. 동창들 모임은 무난하게 넘어갈 것 같다. 결혼한 척은 쉬웠다. 보통의 질문들에 끄덕거리면 대강 다들 그렇게 믿었다.
둘이 참 사이 좋아 보인다. 찬이 씨, 원우가 잘해줘요?
어… 네.
얼마나?
그냥 뭐……. 찬이 망설이자 원우는 발로 찬의 발을 살짝 쳤다. 찬이 원우를 본다.
다양하게… 잘해줘요.
상상도 안 된다! 잘해주기는. 얘가 퍽이나? 울리지는 않고요?
생각에 잠겨있었는지 초점 없는 눈으로 원우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울리는 건 이제 밤에…….
미쳤어? 밖에서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내 몸 좋아하면서…….
갈수록 작아지는 목소리에 친구들이 방금 뭐라고 했느냐며 다시 묻자 찬은 사색이 된 얼굴로 원우를 쏘아봤다. 그제야 정신이 번쩍. 원우는 미안하다고 귓가에 속삭였으나 찬은 시무룩해진다. 맨날 사과나 하고. 밉기는 미운데, 그런데도 자꾸만 신경이 쓰이는 건 왜일까.
하는 일은 잘 돼가? 얘 아침에 방송국 갔다 왔대. 오, 그래? 원우 몰랐는데 잘나간다. 뭐 하는데. 팬미팅? 아, 정말? 성우도 팬미팅도 해? 아니. 이번에는 만화축제. 초청받아서 가게 됐어. 그거 준비하느라 녹음하고 왔어.
혹시 형, 한울이로 가?
찬이 걱정스러운 톤으로 물었다.
음? 어… 그렇지, 내가 가면 당연히 한울이도 가는 거고.
왜? 찬이 씨는 못 가요? 부부동반으로 가면 되잖아요.
아니요, 가요….
형은 좋겠다. 한울이 목소리 듣고 싶을 때 자기가 직접 내면 되니까. 진짜 개 부럽다. 한울이 목소리로 형한테 생일 축하 받던 거 생각나서 더 우울했다. 형이랑 헤어지고 나서 탈덕할까 생각도 했었는데. 하지만 찬은 고인물 오타쿠라서 탈덕이 쉽지 않았다. 인생 장르를 어떻게 쉽게 놓을 수 있겠어. 휴덕은 있어도 탈덕은 없는데 말이야. 찬은 친구들에게 둘러싸여 환하게 웃는 원우의 얼굴을 보며 더더더 슬퍼졌다. 슬픔은 배로 증폭해서, 신경질이 나 괜히 밝은 척을 했다.
술자리가 무르익고 술김이 서서히 올라올 때쯤, 원우는 선배의 전화를 받는다고 자리를 비웠다. 그사이 어색했던 관계가 서서히 풀리며 동화된 찬은 사람들과 웃으며 담소를 나눴다. 아까 전의 우울한 감정은 언제 그랬냐는 듯 옅게 묻어두고.
우리 원우 없으니까 얘기해보자. 솔직하게 말해봐.
솔직하게요?
사는 거 어때? 원우랑 잘 맞아?
안 맞아요.
뜸 들여 고민도 없이 술잔을 테이블에 소리 나게 내려놓았다. 반항심이었을 것이다. 의외의 대답이라며 친구들은 숙덕거렸다. 그중 가장 취하지 않은 한 명이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수신이 가는 핸드폰을 테이블에 올려놓는다.
내가 원우를 아주 잘 아는 사람을 알지. 원우가 대학 때 얘기해? 우리도 궁금하니까 어떻게 지냈는지 얘한테 한번 물어보자.
전원우 거짓말 덕분에 일이 이렇게 꼬이는구나…. 찬은 속으로 생각한다. 그렇다고 남의 과거사를 남의 입으로 듣는 건 실례지!
원우? 대학 때 정한이랑 룸메이트였지. 공대 다녔을 때 말이야. 아! 기억나. 체크 셔츠만 그렇게 입고 안경 쓰고 다니고. 백팩 이만한 거 들고 다니고. 완전 너드 그 자체였어. 그때 한창 공채 준비 때문에 정한이한테 히스테릭 부렸대. 아, 맞아. 웃긴 거. 막 치킨 시킬 때 있잖아, 실전시험 보는 거처럼 아기인 척도 하고 연기하고 그랬다더라. 치킨집 사장님이 속는지 안 속는지 테스트해 본다고. 아, 짱 웃겨. 근데 다행이야. 잘됐잖아. 안됐으면 어쩔뻔했어. 정한이가 집에서 나와서 다행이지. 둘이 절연할 뻔했대.
다 윤정한이 날조한 거야.
아씨바! 깜짝이야! 뭐예요.
형이지.
간 떨어질 뻔했네, 언제 왔어?
찬의 옆에서 전화 통화를 함께 듣고 있었던 전원우. 환장하겠어! 내가 아주우……. 찬은 원우의 어깨를 밀었다. 민망했다. 원우는 씩 웃으며 다시 찬의 옆에 앉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말들은 점점 더 오갔고 원우는 아까보다는 아니었어도 종종 끼면서 얘길 듣고 있었다. 찬은 확실히 조용해져 가만히 있었다. 살짝씩 안주를 주워 먹으며 가끔 웃거나 고개를 끄덕거렸다. 원우는 사람들 몰래 찬의 손을 잡았다. 손은 차가웠다. 찬은 원우의 옆모습을 오래도록 봤다. 몽롱한 기분이 시야를 어지럽혔다.
원우 형은요. 목소리 빼고 얼굴 빼고 몸 빼고 다정한 성격도 빼고 츤데레까지 빼면 시체예요.
뺄 게 왜 이렇게 많아?
게다가 봐봐요. 이렇게, 청순한데 섹시한 사람은 흔치 않죠. 판타스틱한 양면성까지.
찬이 취했네. 집에 갈까, 찬아?
와씨…. 목소리도 좋은데 발음도 좋아서 사람 환장하게 해요.
늦었다. 우리 가볼게. 누가 봐도 찬은 고개를 가누기 어려워 보였다. 취한 찬이 신경 쓰이는 원우는 손을 잡은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나 친구들이 예상했듯이 가지 말라며 둘을 붙잡았다. 그럴 순 없어. 내일 방송국에 일찍 시사하러 가야 해서. 찬이도 졸린 거 같고. 원우는 찬에게 두 손을 주고 일으켜 세웠다. 찬은 순순히 일어나서는 붉은 볼을 손등으로 식혔다. 원우는 찬의 손목을 잡고 앞장서 걸었다. 신혼집 초대해달라는 말을 무시하며. 원우는 밖으로 나가며 찬의 귓가에 속삭였다. 나 쟤네들이랑 인연 끊을 거야. 걱정하지 마, 이제 다시 만날 일 없어.
걸어가는 데 세상이 울렁거린다. 마치 아지랑이가 핀 것처럼. 여름밤의 더위는 취기만큼이나 가시지 않는다. 찬은 혼란스러웠다. 원우에게 끌려가면서도 확정할 수가 없었다. 도저히……. 우리는 왜 헤어진 거지? 원우를 만나면 만날수록 찬은 기억이 사라지는 대신 두려움이 남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우리가 헤어질 이윤 없는 거 같아서. 원우 형 잠깐만. 찬은 원우를 불러 세워놓고 화장실에 들어갔다. 원우는 밖에서 기다리기로 한다.
어지러운 머리를 식히기 위해 세면대 앞에 서서 거울을 봤다. 이상하네. 두 개의 눈썹이 하나로 이어져 있다. 망했다. 나 엄청 취했나 봐. 이대로 가다 좋지 않은 꼴을 보일까 봐 노심초사. 찬은 두 눈을 느리게 끔뻑거리다 허리를 숙여 차가운 물을 얼굴에 끼얹는다. 그런데.
반짝!
우리는 헤어지지 않았다.
어?
머리가 개운해짐과 동시에 쏟아지는 기억. 찬이 찾기 위해 노력하던 기억이 선명히 그려졌다. 차가워진 볼을 손으로 감싼다. 조각 사진처럼 그려지는 그 날의 진상이 필름처럼 찬의 머릿속에 재생되고 있었다. 불안과 두려운 감정이 마음속에 부산물처럼 내려앉는다. 그래. 우리는 헤어지지 않은 거 같애. 찬의 눈동자가 천장 조명에 비쳐 반짝거렸다. 시작은 이랬다.
원우 형, 진짜…. 표현 좀 하고 살어.
회식하는 사람들이 가득했던 한 고깃집에서 찬은 얼굴을 쓸어내렸다. 그날은 유독 공부가 버거워서 때려치우고 싶다는 생각이 강력하게 들었던 날. 원우는 더빙 스케줄을 마치고 오느라 약속한 시각을 조금 넘겨서 도착했고 그렇지만 찬은 상관없었다. 문제는 원우가 아니라 자신에게 있었다. 어쩌면 더위를 먹어서 정신이 헤까닥했었거나, 이유 없이 미쳤었거나. 기분을 풀어주려는 원우의 노력을 봐도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던 이상한 날.
나는 이렇게 말했다.
안 되겠어. 연습할 거야.
연습? 어떤 거 말이야?
이별하는 연습.
그 멘트는 충동적이었고.
이별 연습?
응. 우리가 이별하면 통보는 내가 할 거야. 막 이렇게 할 거야.
원우 형. 우리 헤어지자.
하하. 찬아. 너 진짜처럼 연기 잘한다.
형은 그저 웃어준 게 죄일 뿐.
형. 그 드라마 씨디 안 하면 안 돼?
왜?
십구금이고 비엘이니까.
이미 계약을 해서 안 할 수가 없는데. 찬아, 씨디도 만들어지고 있고 펀딩도 시작돼서 바꾸긴 힘들어.
그렇구나. 그러면…. 헤어지자 형.
나는 미친놈이야.
찬은 화장실 문을 박차고 나간다. 문을 열자마자 원우가 고개를 들어 찬을 맞이했고 나가자고 눈짓을 주었다. 그리고 더는 손을 잡아주진 않았다. 찬은 발을 동동 구르고 싶었다. 이미 벌써 걸어가는 원우를 뒤따라 가는 수밖에.
형. 그때 그 드라마 씨디 나 때문에 결국 안 했어?
아니. 했어.
왜 말 안 했어?
무슨 말? 근데 갑자기 왜? 너 그 얘기 하는 거 안 좋아하잖아.
사실은 형. 내가, 그거 때문에 헤어지자고 한 거….
찬이 말을 잇지 못하고 망설이자 원우는 궁금한 표정을 짓다가 웃었다. 아, 뭔데. 웃는 얼굴을 보고 있자니 입술이 바짝바짝 마르는 찬. 쉽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어느새 원우는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고, 찬의 심장은 입 밖으로 튀어나와 계단을 데굴데굴 굴러갔다. 아, 저거 잡아야 하는데. 하릴없이 찬은 조금씩 멀어지는 원우를 향해 뛰어 내려간다.
그렇게 입구 밖으로 나올 때쯤이었다. 원우는 내려오는 찬을 보고 있었고 찬은 다급해진 마음으로 원우에게 다가섰다. 그리고 그날의 진상을 들려줄 참이었는데.
……사랑해.
순식간에 굳는 몸. 그뿐만 아니라 뇌까지 얼은 듯이 굳어버린다. 찬은 잘못 들은 건가 싶어 가만히 서 있다. 상황 파악을 하려는 사이, 원우가 한 발짝 다가와 찬을 껴안았다.
너랑 헤어지고 싶지 않아. 그러니까 나를…. 정상 참작해줄래? 너는 나 사랑하지 않아도 돼. 근데 나는 너 사랑하게 해줘. 그렇게 해주면 안 돼?
코끝이 찡해져. 여름밤은 후더웠다. 찬의 사라진 심장은 원우의 심장으로 메꿔졌다. 가슴이 맞닿자 심장 박동이 새롭게 뛰었다. 원우는 찬의 어깨에 얼굴을 파묻고는 색색이며 숨을 쉰다. 바보 같은 사람. 왜 그렇게 되는데. 짜증 나…. 형 진짜 밉다. 형 하는 꼴이 웃음만 나오고. 어이없어서 실소만 자꾸 해. 찬이 속삭였다. 원우는 찬을 떨어트리고 얼굴을 마주 본다. 고개를 갸우뚱, 거리면서.
내가 맨날 놀려서 형한테 서운해? 이중찬이라 하지 말고 찬이라고 해줘?
장난치는 것이다. 찬은 제법 입술을 내밀었다. 원우는 재차 반했다. 찬과 있으면 웃음을 멈출 수가 없으니까. 그 모습이 귀여워 또 한 번 껴안으려고 하는 중에 찬이 아까보다 많이 진정됐는지 원우를 멈춰 세운다.
나, 이의 있어.
난 없어.
난 진짜 있어!
그래. 무슨 말이 하고 싶어?
미안해. 내가 그때, 헤어지자고 한 거 그때 그거 장난이야. 나 그날 충분히 취했었잖아. 형, 형은 알고 있었지?
원우의 눈이 커진다.
장난이었어?
어!
순간적으로 차오르는 눈물을 막을 순 없었다. 어느새 격한 감정으로 숨을 쉬었다. 두 눈동자가 가로등 불빛에 비쳐 처연해진다. 원우는 찬의 눈꼬리 끝에 맺힌 눈물을 얼굴을 감싼 손으로 쓸어주면서 얼굴 곳곳을 내려다보았다.
장난, 이었어. 미안해. 나는 그때 내가 형을 진심으로 싫어하는 줄 알았어. 나도 내 감정을 몰랐어. 정말 미안해. 내가 미쳤나 봐. 정신이 나간 걸 거야. 나도 내가 왜 그랬는지 이해가 안 가! 형, 내가 진짜 형한테…. 형한테 말야. 못되게 굴었어. 형, 형 근데 형은 왜 아무 말 안 했어? 왜 나한테 뭐라 하지도 않았어? 내가 나쁘게 굴었는데도 왜 가만히 있었어?
머릿속에 가득 차 있던 복잡한 수학 공식이 풀린다. 그런 거라면 원우는 제 앞에 있는 이 귀여운 생명체보다 자신이 바보 같아 미칠 지경이었다.
찬아. 나는 네 말 다 진심으로 알아들어. 그렇게 십 년이야. 하지만 나는 널 알아가는 시간이 하나도 아깝지 않아. 나 오늘도 택시 타고 왔어. 너 빨리 만나려고.
씨…. 면허를 따. 바보냐? 찬이 괜히 원우를 툭, 치며 중얼거렸다. 그렇게 올려다보는 시선이 사랑스럽다. 견딜 수 없이. 원우는 다른 의미로 정신이 나갈 것 같았다. 찬의 두 손을 맞잡으며 고개를 숙였다. 눈을 마주 보면 미칠지도 모르니까.
내가 잘못했어. 어, 형…. 울어?
안 울어.
원우는 시선을 회피하며 코를 훌쩍였다. 그저 그 상태로 가까이 다가가서 찬과 이마를 맞대었다. 너 잘못한 거 없어 찬아. 좋아해. 너는 사랑해보다 좋아해가 더 좋다며.
으응, 한울이 목소리로 말고. 형 목소리로.
찬이 고개를 도리도리 젓는다.
좋아해, 찬아.
기분 좋게 웃던 입술과 입술이 살짝 맞닿았다 떨어지면 무더운 이 밤, 시원한 바람이 불어와 땀 나는 머리를 적신다. 가로수들도 바람에 살랑이듯 흔들거렸다. 취기와는 전혀 다른 기분 좋은 몽롱함은 뱃속에 나비가 가득 들어 있어서. 간지럽다. 원우는 찬의 볼과 눈에도 한 차례씩 입을 맞춘다. 그리고 재차 눈을 바라봤다. 나를 보는 너의 눈. 내가 제일 사랑하는. 내가 제일 잘하는 일은 너를 사랑하는 일이야. 두 사람은 무언으로 말하고 있었다.
사실, 오늘 같이 걸으면서 너랑 들으려고 플레이리스트 담아왔어. 내가 네 취향에 다 맞췄어.
부드럽게 웃으며 속삭이는 원우에게 찬은 웃음으로 회답했다.
손.
찬이 손을 내밀자 원우는 그 손을 잡았다. 잡고서 깍지를 끼었다.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진심. 우리는 서로의 마음을 아니까 함부로 떨어지지 말자고.
근데 그 드라마 씨디 있잖아, 나도 들어도 돼?
아, 그거? 그거 뭐, 그런 거 그냥… 듣지 말고 실제로 해줄까?
아, 진짜! 이 형이 드디어 미쳤구만.
팔 한대를 얻어맞고서는 함께 길을 걷는다. 나눠 낀 이어폰으로 흘러나오는 노래를 들으며. 원우는 찬의 옆얼굴을 계속 보다가 볼에 쪽, 하고 입을 맞춘다. 몇 발자국. 몇 발자국. 가다가 멈추고 가다가 멈추는 연인 둘. 가로등 불빛에 자리 잡은 곤충들처럼. 그들은 빛이 있는 곳을 찾아간다. 그곳은 서로의 옆자리. 손가락 사이를 메꾸는 각자의 손가락에는 따듯해지는 마음이 끼어있고 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 보며 희맑게 웃는다. 사람들이 별로 없는 여름밤. 이별 사유 같은 것은 애당초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가 왜 헤어지겠어. 의미를 메꾸는 건, 의미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