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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4. 6. 2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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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hh..

 

듣기만 해도 성격을 알 것 같은 이름들이 있다. 이름만 들어도 다정할 것 같은. 정-한-. 선배. 나는 당신의 이름을 입안에 넣고 굴리다가 혀가 설탕물에 발려 진득해지는 탓에 당신 이름을 되뱉어냈습니다. 갑작스러운 복통으로 얼굴이 찌푸려진다. 싸이코-메트릭 설탕물의 효과다. 그 사이 윤정한은 턱을 괴고 나를 잠깐 봤다가 다시 고개를 돌렸다. 그렇다면 나는 윤정한의 행동들을 머릿속에 집어넣고 수억 개의 의미를 짜 맞춘다. 내가 그렇게 소모되는 동안 윤정한은 금세 사람들에게 둘러싸인다. 바보들. 만인에게 관대한 게 대수인가. 뭐 아무에게나 친절할 줄 아는 게 업적도 아닐 텐데. 윤정한은 사랑하면서 사랑하지 않는다. 쓸데없이 아무한테나 사랑받고 사랑으로 갚는다. 그래서 남는 게 영이 된다. 받은 사랑을 되돌려주는 일. 사랑하면서 사랑하지 않는 윤정한은 꽤 착실했다. 착실히 갚아나갔다. 그러나 그 틈에서 나를 향해 미소짓고 미소짓는 윤정한은 어딘가… 어딘가 좀 잘못되었다. 무심의 영역으로 들어갈 사람고치인 나를 윤정한은 어째서 가만히 놔두질 못하는가. 도대체 왜 내버리질 않는가. 뭐 좋다고 나한테 늘 지나친 다정을 일삼는가?

학원은 금방 열로 꽉 찼다. 히터가 윙윙 돌아가고 사람들이 잔기침한다. 감기는 추위와 함께 돌아왔고 우리는 유행처럼 평균 일주일 정도를 앓았다. 평범하게 나도 물론 그 저면역 커뮤니티에 속한 일원 중 하나였다.

생강차가 좋다던데.

샤프심이 뚝, 부러진다. 벌레처럼 샤프질을 하던 나는 알파벳 디와 아이를 쓰다가 다음 글자인 에스를 쓰지 못했다. 윤정한은 내 노트에서 벌어진 일도 모른 채 꿋꿋하게 날 보고 이어 말했다. 혹시 목도 아파? 그럼 생강차 마셔. 생강차가 목에 좋아. 하고는 생뚱맞게 이마에 손을 올리는 것이다. 나는 몸을 뒤로 빼지도 못하고 그 손바닥을 그대로 받아들인다. 누가 볼까 웃긴 형색이었다.

열은 안나네….

네. 안나요. 열은.

방금 늘어놓은 단어 중 거짓말이 아닌 건 없다. 나는 이마가 아니라 볼과 손과 몸 안에 열이 올라 후덥지근했다. 신발 안에는 땀도 찼다. 윤정한은 덧붙여 웃었다. 난 겨울에도 감기 웬만하면 안 걸려봐서 잘 모르겠는데 원우 너는 허약한 거 같아. 여름에도 에어컨 바람 쐬면 은근히 추워하고. 남들보다.

그랬었나. 생각하는 척, 나는 여름의 나를 상기했다. 윤정한의 뒷자리에서 더위를 반쯤 먹고 땀을 흘리는 윤정한의 나른한 얼굴을 보고 싶어 하던 그 여름날을 열심히 생각하는 척했다. 이 시간을 끌려고. 원래 선천적으로 추위도 잘 타고 몸이 찬지라 나는 아무렇지 않았는데 윤정한은 내 아무렇지 않음에 익숙한 게 아니니. 그런가요. 남들보다. 대꾸하고 고개를 숙인다. 그런데도 윤정한은, 그게 아니면… 건조한가? 음…. 외려 고민했다. 이리저리 나를 뚫어지게 쳐다본다. 내 손가락이 굽어져 갔다. 저 이거마저 해야 하는데…. 아 미안. 윤정한은 자리에서 일어나 멋쩍은 웃음만 남기고 사라졌다. 나는 무슨 단어를 쓰고 있었는지 기억도 안 나고 그냥 멈췄다. 조용히 사람들 틈으로 걸어가는 꽁지머리를 눈으로 좇을 뿐이었는데 윤정한은 무어라 대화를 나누다가 다시 내 쪽을 본다. 눈과 눈이 마주친다. 괜히 봤다. 윤정한이 살포시 웃으며 내 자리로 다시 와서는 묻는다.

너 끝나고 뭐해. 저기 같이 안 갈래?

윤정한이 가리킨 사람들도 나를 보고 같이 가자고 말하는데 텔레비전 속 꾸며진 필름 같았다. 나는 그 익숙하지 않음에 윤정한이 저 무리에서 나오는 방법이 있는지 사전에서라도 찾아봐야겠다고 다짐하고.

선배는 혼자서 하는 거 안 좋아해요?

내 말에 윤정한은 머뭇거리더니 아하하, 하고 이를 보이며 웃는다. 내가 외로움을 많이 타서…. 다음에 나온 말은 의외였다. 그래서 어울리려고 하는 건가요. 사람들이랑? 나는 속에 담은 말을 꺼내지 못한채 에둘러 얼버무렸다. 같이 가요. 저, 같이 하는 거 좋아해요. 그럼 잘됐다. 윤정한은 빙그레 웃고 사라진다. 사람이 왜 그렇게 쉽게 웃는지. 나는 침착해야 했다. 침착하게 아무렇지않게 부풀어 오르는 마음을 숨기는 건 내가 가장 잘하는 일 중 하나니까. 나는 심호흡을 크게 한 뒤 책상 위의 무시했던 노트를 폈다.

dis까지 쓰고 말았던 흔적.

dis… dis…

this isn't love.

disturb.

나는 친절하고 다정하고 착해빠진 윤정한을 좋아하는 게 아니다. 다만 나랑 다르니까 관심이 가는 거지. 천성이 이 모양으로 일종의 호기심. 내 일종의 호기심은 윤정한한테만 작용하지 않는다.

 

밥 먹고 카페 가고 노래하고 재미없는 자리에 끼어있다. 도대체 죽을상인 사람은 여기 없나 싶어 주위를 둘러봤는데 다들 괴로움보단 기쁨만 나눠 갖고 있어 벌써 포기했고 윤정한은 여즉 사람들 틈에 맞물려있다. 안 맞는 시계태엽을 닮았다. 턱을 괴고 눈을 느리게 깜빡였다. 그러다 나를 본다. 나는 가만히 윤정한을 보고 있다가 매번 들켜버리는 꼴. 윤정한은 입을 벌려 천천히 무언가를 말했고 나는 윤정한의 입 모양을 알아챘다. 나갈래? 나는 고개를 끄덕인 다음 겉옷을 챙겨 나왔다. 원우 너는 막 이런 자리 안 좋아하는 거 같아. 불편하고. 그렇지? 겨울바람이 매섭게 부는 바깥이다. 나는 코트 깃을 여미고 윤정한은 목도리를 턱까지 끌어당겼다. 선배는 어떠세요. 윤정한은 숨을 내쉬었다. 차가운 공기가 눈앞에 보일 정도로 입김이 서리는 겨울 저녁이었는데 우리는 가로등 불과 상가들 네온 사이에 쏘이며 서로의 각기 다른 빛을 내비치었다. 노란 불이 물든 윤정한의 얼굴은 예쁘고 아름답고 고귀했는데 그런 생각을 하는 나는 매우 초라했다. 나? 나는 뭐… 사람들 말 듣고 얘기하고 그러다 보면 정도 나누고. 그러는 게 재밌어. 뭔가를 이루려거나 무언가를 위해서 하는 게 아니라 그냥. 얘기 듣고 있는 게 편해. 시간도 가고. 재미도 있고… 아! 미안해. 혹시 내가 네 시간 방해했어? 나는 고개를 저었다.

걱정이 되네. 억지로 온건 아닌가 해서.

왜 제 걱정을 선배가 하세요?

어?

억지로 온 거 맞는데. 선배 때문에 억지로 온 건데. 나 선배 보려고……. 윤정한은 억지로 하는 일 따위 없을 듯이 선함을 타고났기에 그럴 일 없겠지만 나는 내 목적을 거짓말을 내세워 숨긴 채 당신을 따라왔다고, 말하고 싶었다. 윤정한이 나의 변화를 원하는 것 같다. 뱃속에 가득 찬 나비들이 날갯짓을 한다. 나는 입술을 깨물다가 먹먹하게 말했다. 선배는 내가 사람들이랑 잘 어울렸으면 좋겠어요? 매일 같이 놀고 매일 시간 할애하고. 제가 저 사람들 중에 누구랑 눈 맞고 연애도 하고 그렇게 사랑하며 사는 걸 보고 싶으세요? 어리광 혹은 투정처럼 보였는지 윤정한은 내게 가까이 다가와 나를 달랜다. 우리 입술의 사이 거리는 멀지 않았고 윤정한에게는 내 얼굴이 남김없이 읽혔다. 왜… 그럴 수도 있잖아. 원래 사랑은 논리 없이 하는 거 아냐? 말하는 윤정한은 찬란했고 천진난만하다. 나는 반대로 슬퍼지고 눈물을 품에 담는다. 그게 선배랑 일수도 있잖아요. 그런데 어떡해요. 사랑엔 논리가 없다는 당신의 논리엔 내가 없는데.

아냐, 미안. 미안해. 네가 싫으면 나도 싫어. 너하고 싶은대로 해. 응? 네가 제일 중요하니까. 알겠지? 구겨지는 내 얼굴에 윤정한은 놀란 나머지 사과를 했고, 들어가자. 말을 남기고 계단을 올라갔다. 아무렇지 않게 그런 말을 하면서. 아무렇지 않게 당신은 당신의 다정을 막 쓰면서, 낭비하면서. 나를 사랑한다 좋아한다 한마디 말 안 해. 내가 싫다 좋다 같이하고 싶다 함께 있고 싶다 표현을 안 해. 누구에게나 밝은 모습으로 사랑을 주고 사랑을 받는 게 당연한 일인 것처럼 당연하게만 살아. 그리고 나는… 당신을 사랑하고 있는데 사랑한다고 당연하듯이 말을 못 해. 그러니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라면 안 하는 게 낫다고.

원우야. 나 학원 앞인데 데리러 와줄래.

그러던 어느 날 또 한 번 나는 너무 쉽게 넘어갔다. 내일은 무슨 일 있어도 사랑 안 해야지. 오늘만 생각하고 내일은 그만둬야지. 학원도 어제가 마지막이었다. 학교에서 볼 수도 있었는데 층이 다르니 피해 다니기 어려운 게 아니었다. 물론 윤정한은 그런 거 따위 모르고 오늘을 살았을 것이다. 그러니 당신의 다정은 지켜질 필요가 있다. 당신의 낭비벽 때문에 당신의 다정이란 이리저리 쓰이고 깎여나가고 소모되고 소멸하고. 사라지면 다시 차오르고 또 흘러넘치고 또 남용되고 또 남발되고 또 원점으로 돌아가 낭비되는 것. 그리고 윤정한의 전화 한 통에 추운 날 나와서 이러고 있는 나는 바보임이 분명하고. 학원 계단 앞, 윤정한은 쭈그려 앉아있었다. 검은 꽁지 머리를 묶고 남색 떡볶이 코트를 입은 채. 인기척에 나를 올려다보는 얼굴은……. 눈가는 붉어져 있었다. 윤정한이 우려는 모습은 처음이었다. 아니면 이미 울었거나. 윤정한은 그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않고 말했다.

학원 왜 그만뒀어?

편의상 물어보는 것일까. 그런데도 날 선 질문. 노려보면 위협적일걸 알아 꽤 일부러 노려보는 듯한 눈매였다. 초면의 모습에 나는 키를 맞춰 눈앞에 앉았다.

나 왜 불렀어요. 

왜 그만뒀는지부터 말해.

……저 그냥 가요.

보고 싶어서. 너 없으니까 심심해서….

윤정한은 교차한 팔 위로 얼굴을 묻었다. 도로에는 클랙슨을 울리는 차들이 꼬리를 물고 이어지고 사람들은 제각기 바쁘게 움직였다. 조명을 내는 상가들과 불이 꺼지지 않은 빌딩들과 노을에 버무려진 보랏빛 저녁 하늘이 작은 마음속을 헤집고 소용돌이쳤다. 심심해. 그래서 불렀어……. 거짓말. 사람한테 함부로 의지하면 이렇게 되는 거예요. 눈물이 나오는 거예요……. 나는 말하고 싶었으나 대신에 나는 거짓말하는 윤정한의 팔을 꺼내 손을 잡았다. 일으키려고 힘을 주어 당겼는데 꿈쩍도 안 한다. 정말로 그게 다인 건지 모르겠다. 보고 싶다는 말에 의미를 덧씌우고 얽매이는 건 내가 하는 짓일 뿐이니까. 그리고 윤정한은.

사랑에는 논리가 없다고 했죠. 나도 논리 없이 하고 있으니까요. 선배의 남은 다정 그냥 다, 내게 다… 주면 안 될까요…. 무슨 용기가 있어 내가 그런 말을 내뱉었는지 모르겠다. 윤정한이 가여워서. 나를 걱정하는 당신이 가엾고도 가여워서 아무래도 달래야 할 것만 같아서……. 윤정한은 바로 고개를 들었다. 붙어있던 눈물 자국은 볼에 굳혀 사라지고 그 처연한 얼굴에 나는 진다. 하지만 내 짝사랑에 윤정한을 가둬놓을 수는 없다. 윤정한은 특히 사랑받을 것. 틀에 지지 않는 것. 나보다도 많은 것들을 사랑하기 위해 태어난 운명적인 시나리오의 주연. 그런데 왜 윤정한은 나를 빤히 보고 얼굴을 뜯어보고 미소짓는 것일까. 만약 이 모든 당신의 행동이 내가 생각하는 단 하나의 이유가 아니라면 당신은 왜

원우야, 너 나 좋아해?

이런 말을 하고.

아닌데요.

나는 왜 이런 말을 하나.

그렇구나.

윤정한은 몸을 일으켜 걷기 시작했다. 나는 윤정한을 따라 옆에서 함께 걸었다. 발을 맞추고 걷다가 전구를 감은 트리 앞에 멈춰선 윤정한한테 감겨 눈을 돌릴 수가 없다. 속눈썹부터 눈동자와 코와 입술. 그 모든 게 하나같이 사랑스러워서. 그렇구나, 그게 당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다정이라면 나는 구태여 원하지않을 거라고. 나는 고쳐 말했다. 포기했어요. 윤정한은 눈동자를 굴리다가 나를 봤다. 알고 있었을 수도 있다. 내가 놓아버린 짝사랑을. 당신을 가둬둘 수 없어서 내가 갇힌 짝사랑을.

왜 포기했는지 물어봐도 돼?

내 얼굴을 천천히 담으며 묻는 윤정한이 빛이 나서 해롭다. 뱃속의 나비는 아직도 날갯짓하고 나는 아직도 스스로 토해내질 못했다. 윤과 나와 나비들은 죄가 없다. 그렇다면 죄는 누구에게 있는 걸까. 사랑?

영원한 게 없어서요. 끝끝내 나는 답을 한다. 당신이 눈앞에서 사라지라고 하거나 단번에 없어지라고 소원하면 없어질 자신이 있는 게 나야. 그런데 이건 뭘까, 나의 염원. 나의 염원 윤정한 네가 너무 좋아서 사실 나는 너를 잡아먹으려고 했어. 입안에 넣어서 꼭꼭 씹어 삼켜보고 싶었어. 내가 당신 이름을 녹여 먹고 그러듯이 당신도 하나씩 내 일부를 넘어 전부를 가져간다면 더는 바랄 게 없다 믿었어. 그랬다고요. 그런데 내 생각을 당신이……,

그렇구나.

깨부순 거야. 파열음을 내고. 또 한 번 그렇구나, 라고 말한 당신은 내 어깨에 기대왔다. 팔짱을 꼈다. 이때 나비들이 입 밖으로 탈출한다. 이게 뭘까. 혼자 하는 사랑이 가여웠던 걸까, 뭘까 윤정한. 두꺼운 외투는 우리의 팔과 팔의 이음새가 되고 당신에게서는 상당히 좋은 섬유유연제 향이 난다. 상당히 따듯하고도 차가운 오묘한 겨울바람이 분다. 휘감는다. 우리를. 그리고 당신은 잠시 뒤에 입을 연다. 그건 내가 들은 최초의 고백. 최선의 다정을 넘어서는, 만인의 소모품이었던 당신이 나에게만 반응하는 특별한 화학식이 되는 일.

그런데 있잖아, 영원한 건 없으니까 우리는 영원히 눈이 맞아보는 건 어떨까. 영원한 게 없다는 말도 이 세상에 영원하지 않을 거잖아, 하고. 당신이, 당신이……

당신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