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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21. 5. 6. 16:10
작성자
hhh..

포스타입에서도 보실 수 있습니당.. murmur0526.postype.com/

 

*아나버스

 

 

인간 본성에 기인한 인류 최상의 욕구란 무엇인가? 인간은 기본적으로 욕구에 충실하다. 그렇게 설계되어 태어났기 때문인데 우리가 어떻게 태어났느냐 하면. 

일단 사람이라는 말 자체로 사람의 존재가 정의된다. 사람은 삶이다. 삶을 산다, 산다, 살아, 사라, 사니까, 사람이라, 즉, 살기를 알기 때문에 사람으로 불리게 된 건데 이 세상에 사람만 生하는 것이 아니니 이름을 독점하는 건 인간 우선주의가 아닐지 싶을 수 있다. 어쩔 수 있나. 본래 사람 처지에서 쓰인 것은 사람에게 유리할 수밖에 없는 도리. 아무튼 사람의 출발은 태초부터. 우주 만물이 죽고 생명이 태어나는 시점부터 커져 왔다. 신이 신인 줄 알게 된 인간에 의해 신이 신격화되고 수많은 실화가 역사로 쌓이는 과정에서 사람은 언제나 견고히 칼을 갈아 발전해왔다. 그러하니 우린 인간의 욕구를 다양한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는데. 인류는 그걸 본능이라 한다. 원초적으로는 생리. 생존의 법칙에 기인한다. 그다음은 뻔하다. 서로 간에 관계에서 오는 척도. 앞이 육체를 지배한다면 뒤는 정신이 지배하는 차례다. 안정과 소속감은 두말할 것도 없고 여기서 존중감이나 자아실현은 조금 더 나아간 관념이다. 혹여나 당신이 정신병자에 우울증을 끼고 사는 시궁창 인생이라면 당신한테는 곧 후자가 필요 없겠지. 그렇다면 처음으로 돌아가서 생각해보자. 이 가운데 최상의 욕구란 무엇인가. 인류가 기뻐하고, 끊임없이 바라는 것은? 살아가는 데에 꼭 필요하지만 가끔은 그 앞에서 추악해지기도 하는. 누구나 염원하고, 가장 좋은 것을 바라고, 싫은 감정이 없는. 피처럼 붉게 타고난 것. 그러니까 그건 자아 성찰을 통해 깨달은 기질이 아니라 인간이 DNA와 별을 구성하는 물질로 만들어지기 시작했을 때부터 있던.

 

인류가 필수적으로 가지고 태어난

 

맛의 욕구

 

인류는 맛을 쫓고

배반당하고

엮이기도 하며

추억을 상기한다.

 

피골이 상접해서 그릇 위의 잘 익은 홍옥을 안 먹을 사람 따위 있을까. 이브가 몰래 따먹었고 스피노자가 가식으로 심었듯이. 스노우화이트가 먹고 쓰러졌듯이 탐스럽고, 죽일 듯이 말야. 타고난 단 육즙이 여름 해변처럼 흐르는 열매는 먹는 순간 그 이상의 가치를 지닌다. 누가 심었을까 세상에 이딴 걸. 어떤 이가 최초 번식시켰길래 널리 재배되고 그 열매를 영글게 한 건지. 혹여나 사과 자체일지도 모르지.

 

사과의 향을 떠올려보라. 우리는 입을 벌린다.

 

향기가 나는 걸 입에 넣으려는 본능이 인간을 지배한다. 그렇다면 그건 인류에게 씐 저주일까?

 

맛.

 

전원우가 극치로 혐오하는 유일 감각.

 

그래서 식욕이 저주야? 그건 말이 되지 않는다. 배를 채우고픈 욕구가 저주일 리가. 외려 축복에 가깝지. 식욕은 본능이고 본능은 이해받아야 마땅한 것. 이를 저주라고 말하는 건……. 생각을 안 하고 사시네요? 소리를 듣기 딱 좋다. 인간은 욕구를 경계해야 한다. 하물며 경계도 이해받아야 한다. 지구 상에 인간을 이해하는 생물은 인간밖에 없어서 인류는 맛을 소중히 여겨도 모자란다는 건데……. 하지만 몇억분의 1. 희박한 가능성으로 누군가에게는 그게 아니었다.

 

 

 

원우야. 너 밥은. 계단에선 C가 올라오고 있었고 그 뒤로 모르는 사람들이 지나갔다. 따라서 강의실 문 앞에서 강의실 내부를 보는 건 그만둔다. 전원우는 여러 명이 가까이 오는 것이 불편했다. 정확히는 다가오는 것과 제게 관심을 내비치는 것이 불편하다. C는 전원우의 앞에 서서 다시 의문을 가진다. 너 지금 누구 기다리는데? 근데 전원우는 말을 않았다. C는 왜 말을 하지 않지? 하지 않는다. 이 상황이 익숙하다. 그 사람이야? 투명한 문 밖에서 기웃대며 과하게 신이 난 C와 다르게 전원우는 C의 행동반경을 파악하고 눈을 끔뻑거리다가 입을 뗐다. 

누구 말하는 거야? 전원우가 의뭉스러운 낯빛을 유지하는 동안 이번엔 C가 이름을 생각해내느라 애를 쓴다.

그 있잖아. 너랑 같이 다니는 밥 많이 먹는 선배.

전원우는 유추되는 사람을 떠올리곤 가늘게 눈을 접었다.

아, 응. 맞는데…….

C가 웃었다.

그럴 줄 알았어. 나 지금 밥 먹으러 갈 건데, 선배랑 너랑 이렇게 우리 셋이 같이 먹자고. 좋지? 

아니. 선배는 안돼.

왜? 야, 같이 먹자 그래. 이 기회에 나도 그 선배랑 한번 친해져 보고 싶으니깐. 

그러자 전원우는 문에 기대 서 있던 자세를 바꿔, 재차 문 너머의 강의실을 살핀다. 그 선배는 턱을 괴고 펜을 돌리고 있었다. 권태가 몸에 배서 저런다. 전원우는 한숨을 쉬고 팔짱을 꼈고 또다시 문에 기대었다. 그 반동으로 문이 살짝 흔들렸다. 쟨. 쟨 많이 먹으면 안 돼. 몸이 안 좋아서. 그런 버릇 고치라고 했는데 이상하게 말을 안 들어. C. 여기서 웃을 타이밍이다. 푸흡. 바람을 빼내며 발랄하게 웃는 C. 야, 뭐야. 보호자인 줄. 그래도 한번 물어는 봐봐. 네가 선배 부모도 아니잖아. C의 비웃음에도 전원우는 고정적이다. C가 전원우의 팔을 살짝 밀어도 전원우는 웃지 않고 C를 내려다볼 뿐이었고.

왜. 네가 쟤 좋아해?

그러다 그지같은 말을 뱉어내 C의 뇌가 굳어서 펼쳐질 생각을 않는다. 박제됐나? 생각 쓸 겨를없이 살필 여력 없이 전원우가 C의 눈빛을 죽여버리니까 C는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야, 왜, 왜 그렇게 생각해. 이것이 유일한 대꾸였다. 

너도 저 선배 좋아하냐고. 진심으로.

C는 알리고 싶었다. 좋아. 좋아하지. 난 너를 좋아하는 거지…. 하고, 내 로맨스가 가리키는 피사체 그러니까 그 화살의 방향의 진실을 피사체에게 알리고 싶었다. 그러나 달아날까 봐 지금까지 못 했던 짓을 이 지금 내 피사체가 박살 내려고 한다. 기분 역하게. C는 치가 떨렸다. 하지만 전원우는 사실 알고 있었다. 전원우가 간파하지 못하는 사람 마음 따위는 없으니까.

 

권순영은 늙은 교수의 지론을 듬성듬성 듣는다. 책상에는 반쯤 접힌 교재와 굴러다니는 펜을 방치해놓은 채. 눈이라도 열중해 보이는 척 치켜뜬다. 교수는 오래된 책의 진화형이다. 적어도 권순영이 그건 알 수 있었다. 권순영은 이 시간이 약간은 흥미롭고 약간은 지루했다. 권순영의 일생이 거의 그렇듯이. 흥미가 쾌락으로 이어지는 건 단시간이었고 쾌락이 권태로 이어지는 건 단시간의 반절이었다. 그리고 교수는 그 반절 안에 있는 사람으로서, 어느새 판서를 멈추고 입을 벌렸다. 그럼 지금까지 내 설명을 들었으니 여러분이 각자 가장 좋아하는 음식을 떠올려 봅시다. 흥미롭지 않은 지시였다. 권순영은 설명을 들은 게 아니라 일방적인 들림이었을 뿐이라 치부한다. 차라리 가방 안에 있는 과자를 꺼내먹고 싶어 맛을 상기한다. 입맛을 다시던 그사이에 교수가 한 발짝 가까이 다가오는데, 그건 아마 턱을 괴고 있었기 때문이었으리라. 권순영이 자세를 바로 하고 교수와 눈을 맞춘 짧은 순간, 아주 잠깐 권순영은 문밖 소동을 본 것 같았다.

이름이 어떻게 되지요? 

권순영입니다.

권순영…. 질문 하나 할게요. 순영 학생. 학생이 가장 좋아하는 맛은 어떤 맛이죠? 그런 게 있나요?

혀로 입술을 축여. 깊게 고민할 필요 없는 질문이다. 근데 못 먹을 것도 입에 넣으면 죄 음식이 될까? 사실 권순영은 얼마 전부터 어떤 맛에 사로잡혀 있다. 그것은 여태껏 실존하지 않았던. 새로운 맛이다.

 

야, 전원우… 너 뭐라고… 한 거야?

선배는 너 안 좋아한다고. 그러니까 나랑 선배한테 함부로 말 걸지 말라고.

 

사람이 먹어 본 맛 중에 가장 황홀하고 천연한.

 

너야말로 그거 진심으로 하는 소리야?

앞으로 더 이상 찾아오지도 말고. 네가 이름 부를 때마다 기분 더러워서.

미친놈……. 넌 내가 설마 권순영 선배 때문에 찾아오는 게 아니라고 해도?

 

누가 만들어버린 건지 모를 그 어떤 맛에 깊이 빠져버린

 

저는 좀 특이하게요…. 꽃을 좋아합니다. 

 

권순영은 

생화를 먹는다.

 

 

 

[n개월 전.]

원우야, 먹는 건 정말 행복한 거 같아.

맞아요. 많이 드세요.

둘은 아주 밝고 사람도 없는 양식집에 있다. 새벽 세 시의 바깥은 어둠인데 우리 자리와 주방만은 밝게 빛났다. 차 바퀴가 아스팔트에 마찰하는 소리가 배경음으로 깔렸다. 양식집은 음악도 안 틀어준다. 권순영은 작곡을 오랫동안 해서 귀가 아주 예민한데. 오히려 음이 없는 일이 고통으로 느껴진다. 누군가 저 소음을 가려줬으면. 터무니없이 귓가가 간지러웠다.

맞다. 네가 만든 거 들어볼까?

아 넵.

부스럭거리며 꺼낸 건 전원우가 담아온 음악 파일. 하나씩 귀에 이어폰 나눠 끼우고 재생을 눌렀다. 소란이 한순간에 침전하여 바닥에 깔렸다. 권순영은 끄집어내려 하지 않아도 감상을 드러냈다. 벌써부터 졸작 만든 거야? 너 재능있다. 그것은 전원우 인생 최대의 칭찬이었다. 나 기죽이려고 실음과 들어왔네. 참 재수 없다 너. 권순영은 쉴새 없이 입을 놀리면서도 음식을 입에 넣었다. 전원우의 것을 뺏어 먹기까지 했다. 그러고보면 볼수록 다정다감한 성격……. 그러다 권순영의 포크짓 서서히 멈추고 식탁에 떨어질 때쯤. 전원우는 깨작거리다가 사기그릇에 포크가 긁히는 소릴 지어버림과 동시에 삑. 별 희한한 얘기를 꺼냈다. 선배는 저작권료 들어오면 뭐 하세요. 응. 다 식비로 나가. 엇 정말요? 응. 그래서 생각해보니까 대학 굳이 안 다녀도 되겠더라고. 그러게. 그럼 선배는 정말 그만 다녀도 되지 않아요? 이미 활동도 하고 있으니깐……. 왜. 네가 학교에 오잖어. 저요? 어. 너 때문에. 너 밥 맥이러 오는 거지. 고기 썰다가 플러팅하는 천재를 보았는가. 놀랍게도 이 작은 선배는 그걸 해낸다. 전원우는 그날 어떻게 그 가게를 나섰는지도 모르겠다. 권순영이 손을 잡아 이끌어줬었나? 정말 기억까지 상실이다. 착각은 자유고 왜곡은 실수가 아닌 건 알았다. 권순영이 먼저 가게를 나가고 반짝반짝한 헤드라이트들이 우리를 스쳐 지나갈 때. 찬 기운이 옷깃을 잡아당길 때. 전원우는 뒤늦게 나와서 권순영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고마워. 나랑 밥 먹어줘서.

고장 난다. 뒤돌아 눈 맞추며 이런 말을 하는 이유는? 전원우는 차라리 비라도 떨어져서 이 순간 내 모습을 모두 씻겨 내려가게 해버리고 싶었다. 물론 그럴 수 있었고. 그래서 두 주먹 쥔 손을 허리 뒤로 가리는 것이다. 빌어먹을 용기. 선배 앞에서 잘만 얘기하던 나는 어디로 가고 내가 빈껍데기밖에 남지 않은 건지. 권순영은 아직도 눈웃음을 짓고 있다. 미친 새끼. 전원우의 아랫배에서부터 전기가 올랐다. 마치 제 몸이 제 몸이 아닌 듯이. 

저도 고마워요. 형.

그러자 권순영이 속살거리며 웃는다. 시발.

야. 네가 형이라 불러주니까 기분 되게 좋다. 진작에 이러지 그랬어? 앞으로 선배 말고 형이라고 해주라. 응?

그러니까 미친 거지. 첫 번째 폭발은 거기서부터였다. 가슴에서 뜨거운 것이 펑. 펑펑. 터지자 뒤로 획 넘어갔다. 그리고선 미친 듯이 빠져나가길래 이게 무슨 일이지 고개를 쳐 내리고 심장께를 바라봤다. 웬 꼭두새벽에 아스팔트 도로에 나뒹굴어 나 죽는 거야. 꼭 죽음이야 이건. 꺅 붉은 핏덩어리 뭐야! 그런데 자세히 보니 이건 피가 아니라 꽃잎이었다. 흐끅 히끅. 강박이 태풍마냥 전원우를 덮쳤다. 딸꾹질이 시작되고 순식간에 몸이 으슬으슬 떨렸다. 많은 것이 몸 안에서 밖으로 빠져나가버렸다. 전원우는 흔들거리는 상체를 부리나케 일으켰다. 야 너 병원을! 권순영이 휘둥그레 눈 뜨며 다가온다. 심장에 손을 대고 꽃잎을 가득 주워 손에 담는다. 뭐. 뭐 하시는 거예요… 선배 피해요… 어서… 저 저 죽을 거 같아… 너무 아파요……. 끊어지는 음절이 황망함을 축약해서 들려준다.

얼마나. 얼마나 아파?

이게 무슨 일이야? 하지만 웃기는 소리. 권순영은 눈썹을 시옷으로 내려 보이며 전원우의 심장에서 꽃잎을 긁어모아 허겁지겁 꽃을 먹기 시작한다. 선배… 이것도 먹어요? 진짜 먹는 거 좋아하네요……. 전원우는 울 것 같았지만 권순영은 아니었다. 권순영은 기이한 신세계를 맛본 것이다.

원우야 한 번만 더 해보면 안될까…?

전원우의 가슴을 뚫어져라 쳐다보면 더 나올까. 이미 터지고 끝난 꽃들인데.

나 신기해 난 아무것도 모르잖아. 한 번만 더 보여주면 안 돼? 너 원래 자주 이랬어?

전원우가 권순영의 손을 치웠다. 그만 하세요. 손 더러워지고 있으니까. 이게 무슨 일이지. 전원우는 혼란스럽다. 손이 달달 떨리고 심장이 아파졌다. 마치 가시가 박혀있다가 빠져나간 것처럼 가슴은 뻥, 하고 뚫렸다. 근육이 경직되어 움직이지 못해 엉거주춤, 권순영이 허리를 받쳐주어 안겨 있었다.

어떡하면 심장에서 꽃이 나와?

그건 제가 하고 싶은 말이고요.

날름날름 아삭아삭 소리는 안 나지만 붉은 꽃잎의 표면은 매우 부드럽다. 권순영의 혀끝에서 녹아내리고 목을 타고 달콤한 맛이 떠내려갔다. 내려간 자리가 조금 따끔하다고 느꼈다.

이거 되게 맛있어.

당연하지. 사람의 몸에서 나온 꽃이 아닌데. 권순영의 몸을 지배한 식욕이 결국 전원우까지 영향을 미치게 될 줄은 예상하였지만 그 시대가 이렇게 빨리 올 줄은 나 그리고 여러분 중 아무도 몰랐을 것이다. 권순영은 전원우랑 같이 다니면서 대체 어디까지 알게 될까. 혹은 전혀 모르고 살 것인가? 전원우가 사람이 아닌 것을. 전원우는 태어나지 않았다. 태초부터 존재했기 때문에 태어남으로 분류해선 안 되었다. 사실이 그랬다. 전원우의 일생이 지구의 존재 증명이나 다름이 없다는 건 그러니깐 전원우는 인류의 절반이 믿고, 절반도 믿게 될 예정인, 인류를 탄생시킨 그것.

전원우가 신이다.

전원우는 지상 세계 욕구들을 관철하기 위해 내려왔다. 대강 인간인 척 하면서. 그런데 하필 보인 게 권순영이었고. 적당히 평범한 선善을 찾던 중에 눈에 보여서 권순영의 껍데기를 뒤집어쓰고 권순영인 척 행세를 하며 인간들의 세계를 정리할 목적이 생겼다. 그런데 말이야. 껍데기를 쓰려 했으나, 무엇을 했냐. 권순영 옆에서 권순영한테 반해버리고야 말았다. 신의 마음이 이렇듯 제멋대로다. 권순영의 얼굴과 목소리 행동과 성격에 죄다 안 반한 데가 없어서 결국 전원우는 권순영 옆에 있던 애를 뒤집어썼다. 걔는 전원우와는 다른 이름 (아마도 P)이었고 생김새도 판이하였는데, 전원우는 이를 들키지 않기 위해 걔를 집어삼킨 후 이름을 바꾸고 사람들의 기억을 변질시킨다. 원래 신은 이런 짓을 자주 한다. 그래서 전원우는 그때부터 전원우라는 형태를 가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전원우가 나타난 것이다. 여기까지가 순간 인간이 된 전원우 이야기. 대학생인 척을 하고 살지만 실은 대담한 사기꾼인 전원우는 어쨌든 권순영이 마음에 들다 보니 주고 싶은 게 너무나 많았다. 신이니까 줄 수 있는 건 무궁무진했지만 가장 권순영이 좋아하는 것이 뭐더라 떠올려보다가 그것이 음식이었고 그래서 식욕을 최대치로 줘버린 거다. 권순영이 가는 들판엔 사과 열매가 영글게 하고, 가는 길목마다 새 음식점들이 생기게 하고, 멀리서도 무화과 향을 맡을 수 있게 하고……. 전원우는 천하를 호령해도 배부르고 따듯한 게 무엇인지 평생 느껴보지 못했다. 당연하다. 신이란 비로소…… 정치를 하지 않고 교주가 되지 않고 내가 만든 피조물한테 휘둘리지 않고 감기지 않고 자참형예*되지 않고 음식을 먹지 않고 음식을 먹지 않아 식욕을 알지 못하고 인간들 눈에 띄지 않는 것. 그래서 권순영에게 넘치는 식욕을 준 것인데 그런데 씨와 열매를 맺는 생식 기관까지 먹게 될 줄은. 좀 놀라운데.

 

 

현재로 돌아와서. 강의가 끝나고 권순영이 문밖으로 나오자마자 전원우의 손을 빼앗듯 잡고선 계단을 빠르게 달려 내려갔다. 나는 염통이랑 꼬치, 파전, 양고기도 좋고 소도 좋고 돼지도 좋고. 버섯전골 아님 어묵탕도 있었으면 해. 거기에 맥주 한잔 마시면……. 권순영은 캬 소리를 내고 전원우의 손목을 세게 쥐었다. 맞아, 너는 맥주는 잘 안 마시지? 음. 그럼 뭐 마시고 싶은 거는? 네? 있어? 아뇨…, 없어요 선배. 그래? 그럼 내가 먹을 거로 시켜도 돼? 전원우는 생각했다. 어차피 주면 다 먹을 거면서 허락은 왜 받는 거람. 잡힌 손목에서 열이 났다. 선배는 원래 손이 뜨겁냐고 이 온기는 제 것이냐고 선배 것이냐고 분간이 안 된다고 말하고 싶었으나 못했다.

연회를 선포할 가게는 사람들로 꽉 차 있었다. 웅얼거림이 곳곳에 깔리고 귀가 먹먹해지는 동안 권순영은 능숙하게 주문을 했다. 기분 좋은 얼굴이다.

생각이 바뀌었어. 난 무알콜 먹을 거야.

응. 마음대로 하세요.

건배! 권순영의 목젖이 꿀덕꿀떡 넘어간 뒤 입술을 닦는다. 크 원우야 진짜 시원하다. 권순영은 눈을 접어가며 웃었다. 볼이 빵긋했다. 무알콜을 알콜처럼 드시네요. 전원우는 피식 웃었다가 젓가락을 들어 음식들의 냄새를 한번 맡고, 입술에 문질러보았다. 맛이란 무엇인가. 왜 나의 피조물들이 맛에 빠지게 되는지. 전원우는 알길이 없다. 그럴 수가 있는지 모르겠지만 권순영은 전원우와 대화를 하면서도 계속된 무알코올 섭취에 점점 취기가 올랐다. 혼자서 그러고 있는게 머쓱했는지 전원우의 그릇에 음식을 나눠주는 것을 잊지 않는다. 배는 부르고 안온하고 편안했다. 전원우는 그래도 선배라고 걱정이 되어 보기 좋게 먹으라고 보리차를 가져다 줬다. 

그거 정말 무알콜 맞는 거죠? 

응. 근데 나… 기분이 좋아서 그런가봐.

권순영은 햄스터가 세수하듯 두 손으로 얼굴을 쓱쓱 씻었다. 그리고 그 앞으로 깔렸거나 깔릴 음식들. 막창 야채 볶음 홍합 떡볶이 오징어탕 주꾸미 숙주 볶음 모듬소세지 닭꼬치 치킨고로케 김말이 염통구이 두부조림……. 흐억 이거 다 먹을 수 있어요? 했을 때 끄덕거렸던 결과다. 전원우가 권순영을 만든 결과이기도 하고. 그런데도 배는 아직 다 차지 않았다. 권순영은 메뉴판을 넘기며 입술을 댓 발 내밀었다. 진짜 이게 마지막 주문이야. 너도 더 먹든가! 괜히 화를 낸 다음에는 하이볼과 맥주를 시켰다. 이제는 취하고 싶어. 말하는 권순영은……. 귀여움에 져주고 싶어. 전원우는 할 수 없이 알겠다고 했다.

그래서 내가 그 새끼 아가리에 죽빵을 갈겼어요. 전원우는 거짓말 조금 보태서 C와 싸웠던 무용담을 들려준다. 그럼 걘 이제 나 안 만나려 하겠지? 뭉개지는 발음으로 해롱해롱. 권순영은 만취했다. 만취했어. 전원우 얼굴이 흔들리고 가게 사람들이 다 짓눌린 그림자 같았다. 노랗게 농익은 조명이 얼굴 아래로 내려앉으니 이곳이 현실 같지 않고 꼭 꿈속에 들어앉은 것 같았다. 제 낯은 홧홧했는데 전원우는 표정 하나 수틀리지 않고 평소대로여서 권순영은 한참 고민에 빠진다. 전원우 앞에 놓인 접시에 먹다 만 음식들이 흩뿌려져 있었다. 왜 안 먹었지. 권순영은 턱을 괴고 전원우를 빤히 쳐다봤다. 술을 따르던 전원우 손이 자연히 멈춘다. 왜요.

원우야. 난 네가 차암 걱정돼. 그렇게 안 먹으니까 쓰러질까 봐.

괜찮습니다.

아냐. 너는 저기, 더 먹어야 돼……. 그래서 내가 너 데리고 다니는 거야.

저한텐 먹는 게 일이에요.

자꾸 그런 식으로 말대답 할거니?

확실히 선배 취하셨어요.

그래. 근데 네가 나 취한 모습도 받아 주니깐.

권순영이 젓가락을 딱딱 맞부딪히며 씩 웃는다. 전원우는 권순영의 손을 억지로 부여잡고 자신과 술잔을 맞대게 했다.

왜 그렇게 생각해요?

왜. 아니야?

…….

너 그거 다 마실 거야?

전원우는 술잔을 내려다본다.

생각하지 말고 나를 봐.

그 한마디를 듣자마자 권순영을 보면서 천천히 끝까지 술을 삼켰다. 맛이 없었다. 쓰고 말고 따위가 아니라 정말 아무 맛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런데 속은 뒤집힐 것만 같았다. 내가 만들었지만. 그래. 삼라만상이라는 게 신의 마음에 드는 것만 있으랴. 인상을 팍 찌푸리고 있자니 권순영이 소세지 한 개를 입에 넣어준다. 전원우는 코팅된 그 표면을 이로 살짝 베어 물고 여러 번 씹었다. 도저히 먹을 게 못 되었다. 인간들은 왜 이런 걸 맛있다고 먹을까.

저 복 달아나게 먹죠?

네가 옆에 있으면 그게 내 복이야.

콜록콜록 기침하던 전원우는 얼굴이 벌게져서는 권순영과 눈을 맞추지 못했다. 권순영은 상냥하게 다음 차례를 준비한다.

그만 갈까? 먹고 싶은 게 생겼어.

또요?

 

네온사인이 흐르고 빗물이 밝게 빛나는 바깥이 투명하게 보이는 패스트푸드 집. 인스턴트 햄버거 가게다. 사람이라곤 없이 둘은 거대한 타일 속에 앉아있었다. 채도가 낮은 푸른 초록빛 조명이 매장 내를 감돌고 흰 테이블과 체스판 같은 바닥이 많은 발자국으로 인해 때가 탔음을 알려준다. 권순영은 햄버거를 두 손에 쥐고 입을 벌렸다. 벌써 2개째. 술 깨기 위해서 콜라를 마셔보지만 별 효능 없고 리필만 세 번 했다. 전원우는 옆의 감자튀김을 한 가닥 잡고 테이블에 시답잖은 장난을 쳤다. 많이 배고픈가 봐. 속으로 구시렁거리며 가게 안에서 흐르는 기타곡을 흥얼거리며 고개를 까닥까닥. 이쯤 되니 정신이 빠져나가는 듯하다. 야. 너 진짜 어떡하냐. 나랑 계속 다니니까 먹기밖에 더 해? 그때 권순영이 안쓰러운 눈으로 쳐다본다. 아 선배……. 저는 정말루 괜찮다니까요, 저는 그냥 같이 있는 게 좋아서 그래요. 그래두. 혹시 무슨 병 아닐까? 아니에요. 그런거. 바로 돌아오는 답변에 권순영이 한숨을 쉰다. 감자를 케첩에 찍으며 말했다. 교회 가서 기도나 해. 많이 잘 먹게 해달라고 기도나. 전원우는 웃겼다. 누구 앞에서 그런 말을 하는가. 신이 어딨는지도 모르는 주제에. 

빗줄기가 유리창을 타고 수도 없이 떨어지는 밤. 권순영은 어느새 더 먹지 않고 꾸벅꾸벅 졸았다. 마침 전원우가 손목시계를 보고 정각이 가까워진 시각임을 알았다. 선배, 선배. 부르니, 응? 으응. 대꾸는 하지만 여길 보지 않으므로 전원우가 일어나 권순영의 어깨와 손목을 잡았다. 택시 잡아 드릴게요. 일어날까요? 그러나 권순영은 발을 헛디뎌 몸이 기울어졌고 방심할 겨를 없이 전원우가 권순영을 끌어당겨서 어정쩡하게 안긴 꼴이 되었다. 전원우는 권순영의 허리를 껴안았다. 심장에서 싹트는 내부의 감촉.

네 품 따듯하다.

전원우의 손이 꼼지락거렸다.

형. 나한테는 사실만 말하는 거예요.

응. 그래.

왜냐고 왜 안 물어보는데?

그래, 왜. 무슨 걱정 있어?

네.

무슨 걱정.

형한테 애인 있다는 소문 걱정. 진짜예요?

누가 그래.

8년 사귄 여자친구 있다고 하던데요 애들이.

웃기네. 그거 헛소문이야. 이미지 메이킹 하는 거야, 괜히 걔네가. 나를 뭐, 짝사랑해도 안 이뤄지는 선배 재질 만들려고.

거짓말.

들켰네.

여친 있다고요. 진짜?

흠……. 있었어, 옛날에. 8년은 아니고 4년 사귀었어. 지금은 정리했고. 한지 꽤 됐지.

헤어졌구나.

응. 지금은 친구로 지내.

그럴 수가 있어요? 4년 연애하고, 헤어져서…… 다시 친구가 된다고요?

놀란 얼굴의 전원우를 보며 권순영은 못 할 게 뭐 있냐는 표정이었다. 그리고 비틀대며 앞으로 걸어가자 전원우가 따라붙어 어깨를 부축한 채 밖으로 나갔다. 원래는 택시를 타야 하겠지만 지금 기분으로는 이 가냘픈 도심의 전차를 타서 더위를 식혀야 할 판이었다. 권순영도 좋다고 눈을 감고 웃어주었다. 푸른색이 도는 미드나잇 익스프레스는 빨랐다. 전차가 도시를 가로지르는 동안 권순영과 전원우는 제일 뒷자리에 앉았고 권순영은 좌석 뒤 가장 큰 창문을 통해 뒤로 달려온 풍경을 구경했다. 전원우가 뜸을 들이다 발로 권순영의 발을 살짝 밀었다. 그럼 애인 자리는 남는 거네요. 분명 정확히 말했는데 몇 초간 권순영은 반응이 없다. 사실 들렸는데 못 들은 척한 거였다. 전원우가 또다시 말했다. 좋아해요. 그러니 권순영이 그제야 전원우를 본다. 저랑 사귀어주시겠어요? 낮게 읊조리듯이 속살거리는 전원우 목소리가 떨렸다. 권순영은 전원우의 얼굴을 마주 보다가 시선을 내렸다. 그러자 가격당한 듯 머리가 빙빙 돌았다. 심장을 움켜쥔 손. 그 손가락 사이마다 꽃잎이 새어 흘러나오고 있던 것이다.

좋아한다니까요. 그러니까 이런 짓도 하는 거잖아요. 이런 게 되잖아요, 형 저는…….

특이점이 있다면 꽃은 전처럼 폭발로 터져 나오지 않고 줄줄 새어 떨어졌다. 하천 옆 배수로에 고인 물이 떨어지듯이. 물에 젖어 저것이 꿀인지 뭔지 모르겠는데 달콤한 향이 코끝을 간지럽히고 먹음직스러워 보이는 것이다. 권순영은 전원우의 손을 겹쳐 잡고 반대 손으로 꽃잎을 직접 만져 살펴보았다. 원우야. 이게 왜, 너 이게 안 멈추냐? 아씨… 너 이거 맛 갔네. 젖은 꽃잎을 매만져보고 말아보고 깨물어보고. 권순영이 홀리는 것은 한순간이다. 진짜 잘할게요. 전원우가 가까워진다.

잘해요. 저 잘해요 형. 

막을 새 없이 단숨에 가까워 지는 두 사람의 거리.

제 꽃, 계속 먹고 싶지 않아요?

누가 이 전차에 끈적한 재즈곡을 틀었어. 권순영은 은은하게 흘러나오는 음악과 슬며시 퍼지는 꽃향기에 취해 정신이 몽롱하여 금방이라도 키스를 날리고 싶었다. 그리고 전원우의 볼은 달빛인지 네온사인인지 웬 하얀빛에 감겨 피부가 환하게 빛났다. 그건 몽환적이었고 꿈속이라 해도 찰떡같이 믿을만했다.

응…. 먹고 싶어…… 원우야.

전원우는 도저히 권순영이 없으면 못 살 것 같았다. 왜 내가 많고 많은 만인 중 하필 이 창작물에 반하게 된 건지, 피그말리온의 마음을 마침내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이런 생각도 했다. 우리를 묶어놓고 싶다. 그러니 차라리 나를 포기하고…… 이쯤에서 내가 인간이 되자. 하는 생각. 오로지 누구 때문에.

감히 내 몸을 관통해 심장 판막을 뚫고 자라나는,

너.

때문에 나도 심장이 있다는 걸 알았지. 이건 천지개벽 이후 처음 있는 일로 내 심장 박동은 이제 뛰기 시작한 것이고 그렇담 종내에 나는 내 세계에서 추방당할 것 아니겠어. 감히 피조물을 사랑해 이 세계에 내려오기 전에는 절대 절대 이럴 일 없다고 여겼으니깐. 그래도 나는 너의 신념을 정의로 만들 수 있는 놈. 널 위해서라면 우주의 규칙 또한 전부 바꿀 수 있고 낮과 밤을 달리할 수 있어. 아니 어쩌면 너로 인해 문명이 시작될지도 몰라. 이게 뭐겠어. 신이 신이길 포기함을 행하는 시대인 거지. 그 시대가 한 인간에 의해 도래하였는데 이게 어떤 의미인지. 어떤 인류가 감히……

 

아나?

 

 

*자참형예 : 自惭形秽 남보다 못함을 스스로 부끄러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