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e what I have done
카테고리
작성일
2021. 5. 6. 16:13
작성자
hhh..

포스타입에서도 보실 수 있습니당

*헤테로 윤홋 (호시 젠더스왑) 

 

이 고딩은 태생부터가 구리다. 고딩 윤정한의 부양의무자는 정한을 눈 내리는 날 밤, 정류장에 버렸다. 30인치 캐리어에 담아 용의주도하게. 그래서 웬 이름 모를 정류장이 정한의 고향이자 첫 번째 인생 시작점. 하지만 지나가던 공무원의 값싼 정의로움으로 정한은 미리내 고아원으로 옮겨졌다. 그곳이 두 번째 인생 시작점. 당시 정한의 나이 1.05세였다. 1.05살이면 죽임당해도 지가 죽는지 모를 나이잖아. 와씨…. 특권이었는데. 졸라 그때가 기회였는데.

정한이 나이를 더 먹고 입양되지도 않는데 캐리어 태생이라고 줄지어 놀림만 당하자 정한은 얼떨결에 고아원을 가출했다. 그때는 가출이 가출인지도 모르는 특권의 나이 일곱 살. 아득바득 기어 나와서는 저와 비슷한 남자의 눈에 띄어 출생신고 안 된 핏덩이들이 모여 사는 벌집 아지트로 들어가 키워졌다. 자기 같은 벌들이 떼로 가득가득했다. 그렇지만 그 중 유일하게 출생신고가 됐다. 사유는 몸 쓰는 일을 잘해서. 거기의 짱인 엄마와 아빠라는 사람은 정한보다는 돈을 좋아해서 사춘기 끝말에 있던 정한이 열여섯 살이 되는 해에 정한을 손두부 집으로 옮겨놨다. 순두부가 아니라 손두부 집? 간판 왜 이러는데 아빠? 오타라고 생각해 따졌으나 그럴 새도 답안도 없이 손두부 집 아르바이트를 시작하게 되고……. 허드렛일 며칠이 한 달이 되고 한 달이 삼 년이 되고 정한은 피죽도 못 먹고 피골은 상접을 하고 인생의 단맛을 모두 쓴맛으로 먹는 미맹이 돼. 그럼 나 인생 실패자야? 컨버스 위로 터진 발목을 만지며 안 쓰던 머릴 굴린다.

내가, 내가… 태어나기만 했음 그걸로 성공 쳐줘야지. 내가 실패자야? 깨달은 건 어느 거미줄 짱짱한 저녁. 이러고 살 바엔 난 이제 나가야겠어! 사실 인생은 잘못 사는 것보다 안 사는 것이 끔찍한 거야. 나는 잘 살 거야. 누가 뭐래도 보란 듯이 행복하게 누구보다 잘! 살 거라고! 잘! 나는 말야! 어? 그건 텔레비전에서 흘러나오는 <두근두근 유럽 여행기 51화-파리 편>을 보고 말아서였다. 심장이 쿵 쿵 쾅 쾅. 그래 나는 간다. 두 주먹을 꽉 쥐고 나는 떠나리라. 손두부를 절대 맛볼 수 없는 곳으로 사람 사는 곳이어도 내가 아는 사람은 없는 곳으로 떠나 아무도 나를 욕하지 않는 곳으로 저 이국으로 PARIS! 그러니 허둥지둥 정한은 방에 구겨져 있던 친구 한 명을 구해 접힌 몸을 쭉쭉 펴서 마트에서 카트도 구해 그 안에 들어가 내리막길을 달려서는 이름 모를 정류장에 세이프. 걔가 버려주었다. 정한이 폴짝, 카트 밖으로 점프한다. 윤정한아. 연락해. 보고 싶을겨.

너나 나나 휴대폰도 없는데 무슨…. 정한은 친구와 가볍게 주먹 인살 하고 주머니에 손을 꽂아 넣어 카트를 발로 툭, 밀었다. 친구는 이게 뭔 천하의 제일가는 이별 씬이라도 되는지 자기가 주인공이다시피 눈물을 흘리며 돌아섰다. 그리하여 세 번째 윤정한 인생. 버튼을 누르면 시작점이 찍히고 그 무대가, 어…. 어라, 첫 번째 시작점처럼 다시 정류장이었던 것인데…….

 

그럼 뭐야, 오빠. 오빠 학대당한 거야?

순영은 스토리를 다 듣고 쫌 허무맹랑 감격한다. 대박. 우리 대본 바꿔야겠다. 오빠 얘기로. 개 세다 진짜 이걸 어떻게 이겨. 순영은 제 앞에 둔 대본을 들고 감독을 찾았다. 넌 이 얘기가 재밌냐? 정한이 입에 문 빨대로 비눗방울을 더 크게 분다. 방울이 커지고 커지다가 툭, 터졌다. 순영은 당연히 농담이라면서 세운 무릎에 가슴을 기대 정한을 바라본다. 지그시.

오빠는 비눗방울이 재밌냐?

응. 너는 이런 내가 불쌍해 죽겠지? 정한은 막대기를 비눗물에 가득 묻히고 바람을 분다. 바람과 방울이 순영의 얼굴에 닿아왔다. 손가락을 들어 방울을 꺼트리는 권순영. 둘 사이에 끼어든 침묵.

아니, 별로. 불쌍하지 않은데.

미리내 고등학교에 다니면서도 아역 배우 생활을 전전했다. 순영의 두 가지 인생이다. 몇 개월째 이어지는 촬영은 몸에 익숙히 뱄다. 하지만 촬영 차 제 나이 역할에 맞는 교복을 입어본 것은 처음. 야외 대기실에 놓인 전신 거울 앞에서 이리저리 포즈를 취해보다가 집에 가져가고 싶을 정도로 마음에 든 적색 니트에 문득. 정한이 오빠는? 옆에 앉아있는 정한을 흘깃 본다. 이 사람도 학교에 다녔던 적이 있다는데……. 오빠. 순영이 다가가 정한에게 손을 내민다.

순영은 두 달 전에, 촬영장 한 편에서 정한을 만났다. 밤이었고, 스태프들은 지쳐 있었고, 순영은 차 안에서 다음 테이크 대기 중이었다. 초여름인데 밤이면 추웠던 날. 얇게 입은 옷만으로는 쌀쌀해서 밖으로 나가기가 꺼려졌던 때. 저 멀리 익숙하지 않은 사람 한 명을 보게 된 순영은 차창을 내렸다. 뭘까 저건. 창문 재질이 사라지고 나서 보니 반팔 차림의 남자애랑 눈이 마주쳤다.

아…. 안녕? 성큼성큼 쫓아오는 눈동자가 흰 토끼를 닮아 불그스름히 빛나자 순영은 머쓱 거리며 볼을 긁었다. 팔에는 생채기가 꽤 있었다.

야. 너 나한테 인사한 거야? 정한은 보기 좋게 동그란 눈을 가지고 있었다. 순영은 차창 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끄덕거렸다. 정한이 바투 얼굴을 붙여와 차 내부를 살폈다. 아…. 너 혹시 배우? 아까 촬영하는 거 본 거 같애. 너 이 지역 살아? 아니지? 내가 웬만해서는 여기 사람들 속속들이 알거든. 정한이 으스대자 순영은 서서히 긴장을 풀었다. 아니야, 얼마 전에 이사 왔어. 저기 아파트.

순영이 가리키는 손가락을 따라 정한이 벙찐 표정을 지었다. 그 후 정한은 자주 찾아와 순영의 촬영장 말동무가 되었다. 순영이 고급 아파트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시간이 지나 차츰 무뎌져서, 정한은 순영 옆에 없으면 안 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일 없으면 여기서 나랑 같이 있자. 이런 말로 유혹을 버무려서.

난 이제 촬영 들어갔다 올게. 오빤 여기 계속 있을 거야?

글쎄. 정한은 어깨를 으쓱였다. 너 하는 거 보고 뭐. 가든가 말든가 할게.

응. 오늘은 알바 안 가?

어. 안 가는 날이야. 그러자 순영은 알겠다며 금방 타타타, 달려나갔다. 정한은 멀어지는 순영의 등을 보며 비눗방울을 계속하여 불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순영이 돌아왔다. 쏟아지는 비를 맞아 축축해진 순영은 정한에게 다시 손을 내밀었다. 정한 오빠, 나 오빠랑 갈 데 있어. 뭐? 어디? 그런 데가 있어. 나랑 같이 좀 가줘. 그리고 도착한 곳은 촬영장에서 얼마 지나지 않은 비 피하기 좋은 천막이었다. 순영은 으슬으슬 떨었다. 몸이 살살 젖은 두 사람. 그런데 너는 천막 밑에서 쭈그려 앉아 젖은 어깨를 붙여오는 그런 사람.

야, 권순영….

순영이 내민 것은 여벌의 촬영용 학교 체육복이었다.

이거 주려고 가져왔어. 입어 봐.

당신이 나의 부모입니까? 정한의 눈은 그렇게 묻고 있었다.

 

 

난 애기 때부터 연기 시작했어.

아, 정말?

내 인생이 연기고 연기가 내 인생인 거지.

그래…. 그렇구나, 그래서?

근데 지금은, 지금은 좀, 있잖아….

어. 지금은?

근데 오빤 왜 그렇게 내 말에 리액션해?

어? 정한은 순영의 반반한 얼굴을 빤히 본다. 초겨울 햇빛을 받아서 선명해지는 낯. 아니…. 할 만하니까, 할 만하니까 하지……. 정한이 얼버무리자 순영이 어깨에 기대왔다. 귀여워서 그래. 귀여워서. 오빠 은근히 귀엽다.

아닌데. 무슨 소리야, 귀여운 건 넌데. 바람 빠지는 소리와 함께 정한은 눈을 맞대고 반박했다. 순영이 빙그레 웃었다. 순영이 준 체육복을 입은 정한은 옷이 마음에 들었다. 제 어깨에 기댄 순영은 색색거리며 잠들 것만 같았다.

오빠가 우리 반에 있었으면 난 학교 다닐 맛 났을 텐데.

그렇게 정한은 순영만의 고등학생이 된 것이다. 어디서 이런 별을 닮은 애가 나타난 걸까. 이제 윤정한은 큰일이 났다. 그저 얼굴 보러 몇 번 왔던 것뿐인데 바보처럼. 권순영이 연기하고 대본 읽는 모습을 옆에서 보고, 멀리서 보고, 대기하는 차 안에서 같이 놀고 시시한 대화나 주고받으면서. 하숙집을 전전하며 밖으로 나와 먹고살려고 일을 하고 현금을 벌고 하루하루 힘들어 당장 죽고 싶다가도 파리로 떠날 최신식 비행기와 꾸역꾸역 덮은 이불의 간극을 동시에 느끼면서 자기 전에 생각나는 권순영의 얼굴. 때문에 산다. 네 얼굴. 귀여운 얼굴 왜 항상 잘 때 생각이 나? 아이씨…. 정한은 자려다가도 술을 먹은 게 아닌데 얼굴이 홧홧하여 벌떡 일어났고. 그 결과로 순영을 보러 그 부자 아파트 문을 서성였고. 기다리다 마침내 순영이 셔츠를 입고 내려오면 알바 가게 사장님이 준 과자랑 포카리를 들어 올리며, 먹을래, 순영아? 웃었다.

그러는 순영도 마찬가지였다. 오빠는 좀 지켜주고 싶게 생겼어. 순영은 정한이 가끔 싸움에 휘말리면 보호자처럼 달려가 경찰에게 선처를 요구하거나 제집에 끌고 들어와 밥을 먹였다. 정한이 순영 엄마의 따가운 눈총을 받아도 모르는 척했다. 내가 싸운 건 어떻게 알았냐고. 나랑 연락도 못 하는데. 정한의 물음에 순영은 웃었다. 오빠가 가는 곳은 내가 알기 쉽게 정해져 있어서 그래.

정한은 자유에 대한 갈망에 파리로 떠나 모두 잊어버리길 원했고 그러기 위해 권순영이 필요했다.

 

 

돈 필요하면 나한테 말하지. 왜 주먹을 쓰냐고.

돈 때문에 그런 거 아냐. 내 신조 상, 난 남의 돈은 안 훔쳐.

우리 집 와서 살래?

너희 엄마 싫어.

왜 싫어?

정한은 촬영장에서 순영을 따라다니던 어머니를 떠올렸다. 그리고 그와 통화하던 휴대폰 너머의 아버지도.

너무 세. 못 이겨. 그리고 아빠도 싫어.

아빠는 왜?

그냥 싫어. 본 적 없어도 싫어.

근데 나는 좋아?

그 말에 멈칫했다. 정한은 뜸을 들여 말한 뒤 국을 떠먹었다.

어. 너는 좀 짜증 나게 좋, 착해.

히히. 알고 있어.

미리내 고등학교 2학년 3반 권순영은 연극부 부장이다. 순영은 여름방학 전, 축제에서 선보일 연극에서 로미오가 되기로 했다. 왜 로미오였냐면.

원래는 줄리엣에 지원했으나 이 때문에 다른 여학생들이 줄리엣에 도전하는 일은 없었고 로미오에 지원한 남학생들만 우수수 쏟아지는 바람에 학생 회의를 거쳐 로미오로 역할이 바뀌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이번엔 줄리엣 역할을 탐내는 여학생들이 앞다투어 경쟁하였고 치열한 오디션을 통해 학교 부회장이 줄리엣 역을 따낸 것이다. 돈이 오갔다는 소문이 있긴 했지만 아무튼, 미리내에선 그게 당연한 순서였다. 순영은 학교에서마저 연기를 선보여야 했다. 특기가 그뿐이었으니까. 그런데 정한은 소신이 있었다. 소신과 강단을 바탕으로, 해가 없는 발언을 뱉어낸다.

순영아. 넌 로미오 안 어울린다. 개는 좀 화려하잖아. 너는 수수하고.

아, 왜! 나도 살면서 한번 왕자 역할 해보고 싶은데!

놀려먹는 정한을 순영이 뒤돌아 등을 보이자 정한이 빠르게 다가가 순영의 목덜미를 한쪽 팔로 껴안는다. 아! 윤정한! 아파 아파 아파, 순영이 팔을 잡고는 뒤로 넘어가려 하자 정한은 능청스러운 어투로 말했다.

그러게 순순히 져주지. 넌 아무리 해도 나 못 이기는데.

으…. 재수 없어. 손을 휘젓던 순영이 등에 붙은 정한을 흘겨보며 입을 열었다. 정한이 순영의 머리에 제 얼굴을 비볐다. 순영의 긴머리는 은색으로 빛이 난다. 아무리 촬영이라도 그렇지 말이야.

너는 머리 그래도 안 혼나?

나? 응.

왜?

난 양아치라.

정한이 씨익 웃었다. 뭐야. 너무 귀엽네. 정한은 순영의 머리를 쓰다듬고 어깨에 얼굴을 파묻으며 웃었다. 오후는 그렇게 아스러져 갔다. 순영은 달음박질치는 심장을 무시하기 어려웠다. 그런데 그러고 나서 어쩐지 그 이후, 정한이 통 촬영장에 나타나지 않았다. 순영은 비는 시간에 할 게 없어 같은 대본을 또 읽고 또 읽고 여러 번 읽었다. 촬영이 들어갔다 빠지면 다시 멍해지고. 정한을 찾기 위해 정한의 근무처도 가봤지만 얼마 전에 그만뒀다는 답변만 듣고 왔다. 순영은 심각하게 걱정했다. 엄마가 사 온 빵도 점심으로 먹지 않고 내버려 둔 채 차 안에만 있었다. 언젠가는 오빠가 다시 오겠지. 하는 마음으로 눈을 감고 잠이 들려는 차, 주인공은 역시 간절할 때 나타나는 법일까.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나서 고개를 돌렸다. 얇은 반팔을 입고 정한이 서 있었다. 손차양을 만들어 차 내부를 살피는데, 벌어지는 입 모양이 누가 봐도…… 순, 영, 아. 순영이 기쁜 맘을 감추지 못하고 입꼬리를 올려 웃으며 창문을 내렸다. 뭐야? 요새 통 얼굴도 안 보여주고. 들뜨면서도 걱정 서린 낯빛의 순영이 정한을 올려다보자 정한은 주머니에 손을 넣어 다급히 무언가를 꺼낸다. 현금 뭉치다.

이거, 파리 가기엔 턱없이 부족하겠지?

파리?

응. 파리.

파리… 말이야?

어, 왜. 정한의 얼굴이 삽시간에 굳어진다. 야, 너… 파리 몰라? 프랑스 파리 말하는 거잖아, 파리. 아니……, 넌 나이가 몇 갠데 파리를 몰라.

아니, 그게 아니라…. 오빠 여권 만들 수 있어?

그러자 그 순간 정한의 얼굴은 더더욱 굳어졌다.

부모님 동의 있어야 해. 없으면 생일 지나야지 돼, 지금 오빠 나이로는. 근데 오빠는 주소도 없잖아.

아, 망했다. 아… 어떻게 그걸 생각 못 했지? 내 인생 어떡해 그럼?

어떡하긴. 몰라. 근데 나도 거기 가야 하는데.

뭐? 너는 왜?

정한은 정돈 안 되는 머리를 헤집으며 인상을 찌푸렸다. 우리 사이에 비밀은 없기로 했잖아…. 뭔데? 정한의 일갈에 순영은 피식 웃었다. 어느새 순영은 밖으로 나와 차 문에 기대어 섰고 정한은 운동화로 발밑을 긁었다. 가루처럼 흙이 채인다. 순영은 느긋하게 정한의 이름을 부르면서 마주 봤다. 그리고는 뜸을 들였다가 입술을 움직인다. 그것은 권순영 인생에 처음 해보는 최초의 고백.

나 심장이 좀 아파.

나도 아파. 정한이 자기 가슴팍에 손을 대자 순영이 정한의 손을 다급히 잡았다. 나눠 가진 온도가 뜨겁다.

오빠. 나는 병이 있어, 심장병.

정한의 눈이 커진다. 진짜로? 너 무슨….

계속 말 안 하려고 했는데.

지금 말했잖아….

아, 그러네. 순영은 고개를 숙인다. 정한은 순영에게 잡힌 자기 손을 바라보고 아무 말 하지 않는다. 어찌 됐건 말하고 나니 속이 후련한 거 같았다. 정한은 못 믿겠다는 표정으로 순영의 얼굴에 시선을 가만히 두고, 순영은 차체에 기대있던 몸을 떼온다. 그리고는 정한의 앞을 지나쳐가며 웃었다. 진짜야 진짜. 진짜라는 데에 내 심장 걸게. 미쳤어? 그걸 왜 거기다가 걸어! 정한이 화들짝 놀라 순영을 따라가자 순영이 뒤를 돈다. 눈빛이 선명했다. 그래서 오빠 안 불쌍하다 한 거야. 내 생각에 불쌍한 건 나라서. 오빠는 아프지 않아도 된다고. 순영의 완강한 어투가 정한의 발목을 잡아 왔다. 아플 자격 없어. 어느덧 정한은 순영의 앞에 와 있다. 그걸 왜 지금 말하는 거야. 마음속으로는 질책하고 싶었으나 순영의 눈을 보면 정한은 생각을 더듬다가 가까스로 문장 하날 만들어냈다. 그거 가만히 있어도 아픈 병이냐? 순영은 답하기를 망설였다. 지금 안 아프냐고. 응. 그럼 됐어. 순영의 가슴팍을 보았다가 자리를 비켜서는 정한. 그럼 된 거야? 순영은 서운했다. 이것은 엄청난 비밀이었다. 이 사실을 친구들한테 말하지 않은 것. 촬영장에서 한 번 언급하지 않는 것. 오디션에서 약한 게 있냐는 물음에 그런 거 없다고 한 것도. 모두 비밀이기에 가능했던. 부모님을 제외하고선 아무도 모르고 아무도 생각하지 않아 언젠가 죽게 된다면 모두가 그런 배경이 있었냐며 시시덕댈 비밀이 될 것. 하지만 그걸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털어놓게 되는 게 오직 윤정한인 건 우연이 아닌 건데.

지나가다가 우연히 티비 봤어. 너 나오길래 멈춰서 봤는데… 와, 완전히 딴 사람 같았어. 어떻게 그렇지? 신기해. 네가 두 명인 건가. 싶기도 했고.

정한이 실없는 소리로 금방 화제를 돌려버리자 순영은 정한이 위로를 어려워한다고 생각했다. 순영도 딱히 할 말이 없어 어제 본 대본과 정한이 봤을 인터뷰를 떠올렸다. 순영은 돌무더기에 앉아 정한을 올려다봤다. 오빠, 배우는 배워야 해서 배우래. 난 진짜 이걸 아기 때부터 했는데. 지겹게 했는데, 아직은 잘 모르겠어. 평생 배워야 한다는 게 정말 틀린 말은 아닌가 봐.

어쩌면 평생 발목이 잡혀서 할 수 있는 게 이것밖에 없어. 어릴 적부터 자리 잡아놓은 인생은 눈에 훤하게 일직선이었으니까. 그 한탄에 정한은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대꾸해온다.

뜬금없다. 그런 생각은 저절로 하는 거야?

몰라. 대본에 빠지면 그렇게 돼.

순영이 다리를 뻗자 신발에 뭉그러진 흙이 채였다. 정한은 그 모습을 물끄러미 보다가 신발을 질질 끌고 와 옆에 기대 누웠다. 망설임 없이 순영의 옆얼굴을 감상했다. 감상하기 좋은 자세였다. 그러다 갑자기 순영이 심장병으로 세상을 떠나는 생각을 한다. 그건 굉장히 이질적이었다. 전에 봤던 인터뷰를 다시금 떠올린다. 순영은 편해 보이는 소파에 파묻혀 진행자의 질문에 눈을 소동물처럼 반짝이며 대답한다. 이 연약한 낯짝의 여자애는 태어나기 위해 태어난 사람 같다. 신이 기필코 이 세상에 자랑하기 위해 만든 존재임이 틀림없는데 신도 참 진짜 무심해. 얘가 이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라고 얘를 빚어 내놓았을까. 정한은 순영에게서 사라지지 않는 그림자들을 떠올린다. 나랑 살아야 해. 마침 순영은 제 옆을 찌르는 시선을 느끼고 눈을 맞춰 정한을 의아하게 쳐다본다. 정한은 마음속으로 적잖이 놀랐다. 얼른 시선을 떼고 팔로 머리를 받쳐 하늘을 본다. 가슴이 뜨겁고 심장이 간지럽다. 왜 이러지. 하늘에서도 순영의 얼굴이 보였다. 마치 순영을 비추는 거울 마냥. 정한은 다시 순영을 보고, 순영도 정한을 본다. 내가 권순영 옆에 계속 있으려면 일단 얘네 엄마와 아빠 사이에서 구출하여 넓은 전원주택에 얘를 데려다 놓고. 그랜드피아노를 사줘서 낮에는 그걸 치게 할 거고, 그리고 지금보다 더 열심히 대본 상대역을 해주고. 그렇게 할 거야. 그러면 우리는 같이 집 마당에다 개 한 마리를 키우면서.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정한은 한편의 깨달음을 얻는다. 그래, 맞아. 결론은 하나뿐이다. 삽시간에 사로잡히는 확증…….

난 너랑 결혼하는 생각 한다. 이거는 왜 그러지. 이것도 대본에 빠져서 그래?

사람이 어떻게 이렇게, 이렇게. 같은 사람을 당황시킬 수 있지. 순영은 눈을 크게 뜬다. 결정적인 시선으로 정한을 바라본다. 하지만 정한은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평온했다. 자신과 상대방의 귀에 열이 오르는 것도 모르고.

오빠가 더 뜬금없는 거 알아?

순영아, 생각해 봐. 사람이… 결혼을 해야만 같이 살 수 있는 건 아니잖아. 그렇지? 너 일단 그 집에서 나와. 설마 너 그거, 네 병. 그거 불치병이야?

불치병은 아니고…. 희귀병이라 파리에 가서 수술해야 한대.

언젠데? 수술 날짜가.

축제 끝나면 바로.

아…. 부모님?

어?

너희 부모님이 잡은 거? 안 봐도 뻔하긴 해.

응. 맞아. 오빠 있잖아…. 나 사실 촬영하기 싫다.

그 말에 벌떡 일어나는 정한을 순영의 시선이 따라간다.

나 오빠 안 오는 사이에 심심해서 오토바이 면허 땄어. 그리고 다음 주면 여름 축제고, 그다음엔 방학인데 나는 아무것도 하고 싶지가 않아. 난 차라리… 내 시간을 의미 있게 쓰고 싶어. 뭐라도 하고 싶어. 그냥 차라리, 오빠 끌고 멀리 사라지고 싶어. 어때? 우리 떠날까?

떠나겠다고? 어디로?

몰라, 어디든. 그걸 왜 나한테 물어봐.

너 은근 나약하네….

하지만 바닥에 무릎을 굽혀 앉은 순영이 정한을 올려다보니 정한은 그 기운에 무력해져서 왜인지 마음속에는 지금이 아니면 안 돼! 하는 목소리를 따라 다짐하고 손을 잡아 달아나고 싶어져 버린다. 밖에서는 순영을 찾는 스태프의 목소리가 들리고 그러니까 정한은 금방이고 초조해져서. 너 여기서 기다려. 먼저 가지 마, 가기만 해 봐. 그러면서 순영의 손목을 잡아끌고는 차 뒤로 숨었다. 어디 가는 건데! 순영은 어디론가 가려는 정한의 팔을 잡으려다 놓치고. 내가 어떻게든 해볼게. 그러니까 뭐를! 순영이 따라갈 새도 없이 정한은 뛰어나갔다. 그때 마침 한 스태프가 주차해놓은 차 쪽으로 다가와, 얘 어디 갔지? 휙휙, 고갤 돌린다. 아뿔싸 들켜버릴까. 정한은 뜀박질을 멈추고 숨을 골라 쉬면서 스태프에게, 권순영 걔 아파서 병원 갔어요. 홀로 온 스태프는 낯선 사람 윤정한을 그날 처음 마주했다. 정한은 눈에 띄게 거짓말을 했으나 그 시간만큼은 제 말이 진짜라고 우기고 싶었다. 이렇게 우기고 싶은 적은 살면서 오늘이 유일했다.

그래? 얘기도 없이?

걔 매니저 누나가 데려가시는 거 같던데…….

무슨 소리니. 이제 슛 들어갈 건데. 인상을 잔뜩 찌푸리고서 팔짱을 낀, 한순간에 조연을 빼앗긴 스태프. 그는 정한을 아래위로 훑어보다가 정한이 입고 있는 옷에 의아한 점을 발견한다.

야, 그 체육복은 네 거야?

정한은 그 말에 머리가 하얘져 누가 봐도 드라마 속 학교 체육복을 입고 있는 모습을 감출 맘은 들지 않고 떠오르는 건 이 옷을 준 얼굴뿐이었다.

아, 아뇨. 이건…. 순영이가 준건데요.

스태프는 이제는 확연히 모르겠다는 듯이 허리에 손을 받친 채 한 발자국 다가갔다. 진짜? 애가 참 가지가지 하네. 근데 넌 누구니?

모르겠어요.

정한은 할 말이 없었다. 스태프는 어이가 없어, 정한을 째려보며 의아한 시선을 거두고 자리를 벗어났다. 다행이었다. 정한은 다시 차로 향했다. 그러나 그건 제법 방심한 짓이었다. 밑에서 누가 잡아당길 줄을 몰랐으니.

이게…… 뭘까……. 말캉한 것이 정한의 입술에. 둘의 무릎이 매우 가까워 닿을 것만 같았다. 순영의 손은 정한의 옷깃에, 정한은 순영의 팔을 잡은 채 굳었다. 키스일까? 입술과 입술이 하나가 돼서 동그랗게 뜬 눈을 깜빡이지도 못한다. 순영이 제 입술 위에서 뜨거운 숨을 비비적대다가 떨어질 때까지.

뭐… 한… 거야?

오빠가 방금 나 일렀잖아. 화가 좀 나서.

넌 화가 나면…… 뽀뽀를 해?

뽀뽀가 아니라 키스인데.

정한은 헛웃음이 나왔다. 제 눈앞에 성을 내는 작은 얼굴에 반해 설렘이 이런 거다 싶다. 순영은 웃지도 않고 가만히 있었다. 자기를 못 쳐다보고 괜히 발끝을 본다. 정한은 웃음이 나왔다. 내가 좋아? 순영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미치겠네. 간지럽다. 원래 이렇게 부드럽고 막 그런 걸까?

순영은 하늘을 향해 고갤 든 정한을 본다. 너는 마음을 숨기지 않는구나. 그렇다면 나는 네 것이 되고 싶다. 마음이 벅차서 심장박동 소리만이 귓가를 울린다. 좋았다. 정한이. 새파란 하늘만큼이나. 순영은 바닥에 둔 정한의 손을 살금살금 잡았다. 같은 곳에 기대앉아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는 시간. 손끝이 닿아서인지 귀가 빨개져 언제까지고 옆얼굴을 계속 보고 싶었다.

 

장소는 바뀌어서 디저트 가게. 마침내 우리의 숙명이 이루어지는 날이 찾아온 것이다. 순영은 흰 민소매 위에 푸른색 체크 남방을 걸치고 반바지에 챙이 넓은 밀짚모자를 썼다. 정한이 보기에 그건 매우 잘 어울렸다. 정한은 아껴뒀던 셔츠를 오랜만에 꺼내입었다. 둘은 설탕 덩어리 하늘색 케이크를 앞에 두고 포크질을 했다. 포크와 눈이 마주칠 때마다 웃었다. 정한은 케이크 조각을 찍어 먹다 말고 포크를 든 채 순영에게 우물거렸다.

병 있다고 인생 달관한 척 끝난다고 여유롭게 구는 척 난 딱 정말 정말 질색이야. 그거 개구려. 네 연기가 구리다는 게 아니고. 그렇게 살면 삶이 좀 구려져. 내가 해봐서 알아. 그러니까 봐봐, 일로 와 봐. 난 너 지금처럼 철없는 상태일 때가 맘에 들어. 그니까 영원히 어린이인 것처럼 굴어. 너나, 나나. 우리는 어린 나이니까 억지로 어른인 척 담담하게 굴지 말라고 적어도 나랑 있을 땐. 알겠어, 순영이? 어디서 듣고 온 건지 영화 대사 같은 소리나 내뱉는 정한에 순영에게서는 천연덕스러운 웃음이 나왔다. 우물거리는 정한의 볼을 찔러줄까 고민하는 차에 정한의 눈썹은 산 모양으로 내려가는 중이었다.

아! 오빠! 팔을 뻗어 순영의 볼에 크림을 묻히고는 웃어버리는 정한에 순영은 깜짝 놀란다. 역시 난 네 이런 점이 맘에 든다니까. 완벽한 내 파트너가 될 수 있단 뜻인 거지. 정한이 능청스럽게 윙크를 하며 뒤로 물러나자 순영은 손등으로 볼을 닦으며 따라 웃을 수밖에 없었다. 촬영장을 벗어나 다른 곳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 그것을 정한과 함께한다는 건 순영의 마음속에선 어떤 혁명을 일으키는 것 같았다. 정한은 순영이 다 먹기를 기다리면서 소파에 기대 바깥 유리창을 유심히 살폈다. 그리고는 때가 됐다는 듯이 순영을 보며 눈짓을 보냈다. 순영의 두 눈이 느리게 깜빡거렸다.

 

 

 

*정한의 회고 : 나 너희 부모님께 혼나겠어! 나는 분명 그렇게 말했다. 순영이가 오토바이 면허도 땄으니 운전하겠다고 원래 도망갈 땐 오토바이가 날렵하고 좋은 거라며 키를 몰래 가져와서 그랬다. 나는 화들짝 놀라 순영이를 껴안아 버렸다. 너 면허도 얼마 전에 딴 거라면서, 너 다치면 난 어떡해? 내가 꽉 안아 뭐라고 하니 순영이는 시무룩해져서 그럼 따라와 보라고 했다. 나는 순영이가 휑, 하고 앞장서 가버려서 그 순간 우리가 멀어지는 줄 알았다. 하지만 순영인 나를 걱정시킬 애가 아니었다. 걔는 새로운 장난을 알려줄 애였다.

자전거였다.

순영이가 내 허릴 끌어안았다. 우리는 함께 자전거를 타고 감감한 터널을 달렸다. 마치 바다를 찾아가는 사람같이. 사람도 차도 없는 이상한 밤에는 터널 안이 조명으로 인해 반짝거렸다. 순영이와 나는 손을 놓고 팔을 들었다. 그리고 소리를 질렀다. 내 생에 처음 느껴보는 개운함. 짜릿함. 마치 그 길이 온통 우리만의 파티장이었다. 귀가 새빨개지고 얼굴이 굳고 손이 무척 차가웠음에도 나는 그 모든 게 좋아서, 순영이랑 같이 웃는 게 좋아서 계속해서 이 시간이 안 갔으면 했다. 우리는 수많은 상점을 지나치며 구경하고 나란히 걷기도 했고 옷가게에 들려서는 서로의 옷도 골라줬다. 순영이는 내 몸에 반짝이가 찬란한 옷을 대고 어울린다며 나를 놀려댔다. 가게 주인이 얼른 가라는 눈치를 줬기에 그곳에서 벗어날 수 있어 다행이었지. 하마터면 말 못 하게 입에다 뽀뽀할 뻔했다. 그건 그렇고……. 그 후에는 행복한 사람들이 꽉꽉 들어찬 음식점에 들어가 시원한 것을 먹었다. 순영이가 숟가락질하면서 나를 자꾸 흘깃 쳐다봐서 신경이 얼마나 쓰였는지. 우리는 일정량의 대화를 하고 주머니 속 현금 뭉치의 절반을 쓰고선 오락실에 갔다. 순영이가 인형 뽑기를 잘한다 해서 기대했는데 세 번 해서 세 번 다 못 뽑았다. 그에 비해 나는 한 번에 뽑아서 순영이에게 다람쥐 인형을 안겨줬다. 그리곤 순영이가 나를 닮았다며 걔 이름을 내 이름으로 붙여주며 내내 부르고 다녔다. 치사해. 치사하지만 귀여워서 봐줬다.

순영이랑 나는 이번엔 다른 길을 개척했다. 낮은 주택 집이 일렬로 이어져 있는 길목에 접어들어서자 우리는 자전거의 속력을 줄였다. 어떤 집 한 채에서 시끄러운 음악 소리와 은은한 조명이 새어 나오고 있었고 사람들이 떠들썩 웃으며 그곳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우리는 마치 서로를 처음 마주한 사람들처럼 그 호기심을 못 견뎌 사람들을 따라 같이 그 집에 들어가 모르는 사람들의 파티에 참석했다. 그게 어떻게 가능하냐고? 모르겠다. 다만 그때의 우리가 우리라서 그랬던 것은 확실하다. 서로가 있으면 용기를 배로 얻는 우리는 이름도 모르는 사람들과 함께 그 클럽 같은 거실에서 춤을 추고 손을 들어 방방 뛰었다. 음악이 나오는 내내. 그 순간 나는 별종이고 권순영도 별종이었다. 처음 듣는 전자음에 맞춰서 신나게 뛰는 순영이가 내 눈동자 안에서 아주 느긋하게 흘러갔다.

슬로우모션이라도 걸린 듯이.

나는 사랑이 무엇인지 확실히 알았다.

배우 권순영의 인생에는 많은 타자들이 등장했고 나도 그중 하나였지만 나는 걔 맘속에서 그들과는 다른 자리에 가 있었다. 순영이는 모든 타자에게 회의감을 느끼면서도 모든 타자에게 감사해했다. 나도 순영이랑 같은 마음이었다.

순영이는 나름대로 외모에 신경을 쓰는 것 같았다. 상가 유리창에 비친 자기 모습을 보면서 몇 번이고 머리를 빗고 고치고 빗고 고치고 하다가 자전거를 끌었다. 나는 옆에서 걔 얼굴을 빤히 보며 말했다. 왜, 너 앞머리 깐 것도 잘 어울려. 그리고 그 이마가 드러나게 머리를 만져줬다. 귀여웠어. 부끄러워하는 감정이 얼굴에 다 드러나잖아. 우리는 한참 자전거를 끌면서 모두 불이 꺼진 길을 걸었다, 걷는데 광장 한가운데 높이 떠 있는 스크린에서 빛이 났다. 나는 고층 건물에 달린 화면에서 순영이를 찾을 수 있었다. 발걸음을 멈추고 화면 속 순영이를 지켜보았다. 촬영 중인 드라마 인터뷰였는데 권순영은 성경 신화를 모티브 했다더니 뭐니 리얼리즘 따위니 포스트모던이니 그런 얘기들은 귓등으로도 듣는 것 같지 않았고 나만이 그런 걔의 표정을 읽을 수 있었다. 순영이가 프랑스 수술 일정을 미루면서까지 드라마 출연을 거부하지 않은 덕분인지 나는 내 옆에 있는 순영이와 저 안에 있는 순영이가 다른 사람같이 느껴졌다. 순영이 자전거 핸들을 꽉 잡고 내 옆에 바짝 붙었다. 그리고 그맘때. 순영이한테서 자기 연기를 좋아하지 말라는 부탁을 들었다.

나는 그 여름 축제를 가지 않았다. 로미오 이즈 스틸 어 하이스쿨 스튜던트. 시간이 갈수록 소중해지는 것은 그 순간일 뿐.

 

 

그리고 2주가 지났다. 정한은 안절부절 초조했다. 순영이 며칠째 연락이 되지 않고 보이지 않아서였다. 아파트 앞 촬영장은 로케이션의 역할을 다해서 즐비하던 얼굴들은 더는 찾아오지 않았고 촬영 세트마저 사라졌다. 문득 날짜를 보니 곧 프랑스로 가야 할 때임을 인지했다. 덕분에 일이 끝나면 늘 공중전화 박스를 서성였다. 썅. 권순영 전화 왜 안 받아. 정한은 전화를 안 받는 순영에게 공중전화 박스 안에서 다섯 통의 음성 메시지를 남겼다. 순영은 병원에 있었다. 병원 침대에 앉아 이어폰을 낀 채 정한의 메시지를 들었다. 답장하고 싶었으나 용기가 나지 않았다. 며칠 전 집 안에서 쓰러지면서 윤정한 걱정을 했다. 거의 윤정한 생각을 한다. 정한을 알고 나서부터는 순영에게 우연이라는 건 없었다.

그러니깐 이 병실엔 필시 권순영이 있어야 했다. 정한은 화가 난 발걸음으로 계단을 두 칸씩 올라간다. 눈부시도록 깨끗한 병원. 두근대는 가슴 부여잡고 일인실 문을 열면 병원복을 입은 순영이 침대에 앉아 창문 밖을 보고 있다가 문소리에 고갤 돌렸다. 정한은 다가갔다. 다가오는 시선이 맹하다.

미안해하진 않을게. 오빤 내 연극 쌩깠잖아.

그래서 고작 이런 거야? 쓰러졌는데도 일언반구 말도 없고 병원 어디인지 안 알려주는 거?

그러게 누가 아무 소식도 없으래? 축제 끝나니까 잠수나 타고. 사람 애타게.

너도 나 만나러 안 왔잖아.

촬영 끝나니까 그렇지.

어떻게 한번을 안 오더라. 나 때문이라도 촬영장 다시 와보는 게 정상아냐? 내가 거기서 널 한두 번 기다렸어?

오빠만 기다렸냐? 나는 매니저 언니랑 차 안에서 몇 시간을 대기하고 있는데. 오늘은 오빠가 올지 안 올지, 대본보다도 더 신경 쓰고 체크하면서 살았어, 알고는 있어?

그런 건 말로 해야지, 바보야! 말로 해야 알지, 내가 어떻게 알어? 어? 용기가 없어 진짜…. 그런 애가 집에다가는 어떻게 편지를 두고 갈 생각했냐? 나 보라고 식탁에다 아주 잘 보이게, 그러려고 나한테 집 비밀번호 알려준 거지, 일부러?

어. 맞아, 그거 보라고 그렇게 했다. 갑자기 입원했는데 어떻게 전화해서 알려줘? 오빠는 핸대폰도 없고. 근데 나 보고 어떡하라고. 난 오빠가 공중전화로 전화해줄 때만을 기다려야 되잖아. 억울해 죽겠어. 보고 싶은데.

참아, 바보야. 곧 살 거야, 휴대폰.

됐어. 내가 사줄래.

또 허튼 데 돈 쓴다.

그게 뭐가 허튼 데야? 다 날 위해서 하는 짓이야.

웃기기는. 그래서 축제도 오지 말라 했어?

이씨… 미안. 그때 말한 건 진심 아니었어.

니 연기 좋아하지 말라매.

그래서, 나도 안 좋아해?

누가 안 좋대? 씨, 짜증 나…. 먼저 좋다구 한 사람은 너야.

어이없어. 오빠야.

뭐? 야, 키스 누가 했어!

하, 지금이 그때랑 같아?

같지! 너 예전부터 나 좋아한 거잖아!

그러게! 누, 누가, 차 안에 있는데 인사하래?

바보. 야…. 됐어. 좋아한단 말이나 취소해.

왜.

그래야 내가 화낼 수 있으니까.

충분히 오빠 화내고 있거든?

야. 우리가 지금 왜 싸워?

오빠 진짜 싸움 못 한다.

너랑 싸우기 싫어.

순영의 미간이 살짝 좁혀졌다가 퍼진다. 정한은 숨을 크게 들이쉬려다 간신히 삼켰다. 제게 뻗어오는 손이 희멀겋고 독특하게 말랑말랑해 보여서. 화를 내고 싶은데 정작 아쉬운 마음이 커서. 곧 가야 하는 사람 앞에 두고 이러고 있는 게 웃겨서. 이상하잖아.

삽시간에 눈두덩이가 아파져 왔다. 꾹꾹 누르고 싶을 만큼.

내가 더 좋아하는데 무슨. 내가 너보다 훨씬….

그거 내 대사인데. 오빠가 뺏었어.

손을 잡아끌자 맥없이 스르르 기울어지고 떨어지는 윤정한은 약하다. 정한은 침대에 올라 순영의 어깨에 고개를 파묻었다. 순영은 나지막이 속삭인다.

좋아할 거면 오빤 이런 식으로 해.

하고, 입술에 불어넣는 숨결. 물컹한 것이 맞물린다. 눈동자들이 또르르 구른다. 구슬처럼. 좋아해. 빤짝빤짝한 순영의 한마디에 정한이 순영의 카라 깃을 잡고선 시선을 마주하면 사랑이 눈앞에서 생동한다 할까. 숨은 멎을 것 같고. 넌 참았던 마음을 꾹꾹 눌러 담았다가 터트리는 거라면. 이건 막연히 하는 소리가 아닐 거잖아. 정한이 고양이 세수를 하고 눈도 깜빡거려보지만, 순영을 똑바로 보기엔 등부터 부끄러움이 밀려왔다. 순영도 볼을 긁적였다. 미적지근한 긴장감이 맴도는 공간이었다. 순영은 손을 뻗어 그대로 정한의 머리칼을 넘겨주었다. 순영은 바닐라스러운 빛에 반한다. 시간이 멈추고 생명이 강해지는 순간에. 우리 사귀는 사이, 라고 해도 되나?

정한이 숨을 삼킨다. 눈이 커졌다. 순영이 미세하게 웃는데 밝아오는 볼이 붉었다. 그렇다면 나도 아마……. 그때, 운명처럼 바람이 불어 창문의 블라인드가 흔들거렸다. 순영의 긴 머리카락이 정한에게 닿자, 마음에 노란 꽃이 폈다.

다, 당연하지…….

정한은 불편한 자세를 취하던 침대에서 내려와 플랫 운동화를 벗어 두고 이불 안으로 들어갔다. 장난기 가득한 얼굴과 목소리가 순영을 간지럽힌다.

순영아. 궁금한 게 있어. 많고 많은 사람 중에 하필 왜 나야? 이유 알고 싶어.

할 사람이 오빠밖에 없잖아.

그 자리에서 멈춘다. 정한은 지그시 순영의 어깨를 누르고 맥없이 풀린 팔이 순영의 목을 천천히 휘감았다. 눈을 벗어나 방황하는 시선이 아래로 흐르니까.

그러니까 우리 싸우지 말자. 나 혈압 오르면…….

그 순간 가슴팍에 붙어오는 정한에 순영의 손이 허공에 떠 있게 되었다. 작은 머리통은 옷 섬유와 맞닿아 몸 내부를 뒤집어 놓는 것 같고…….

뭐 하는 거야?

네 심장 소리 듣는다.

순진무구한 건지 눈치가 없는 건지 알 순 없는데 불규칙적으로 몸 안에서 요동치는 그 소리를 쫓는 진지한 눈빛을 보고 있자면 휘말릴 수밖에.

심하게 비정상이네.

조용히 웃으며 정한이 고개를 들었고 그러면 순영의 가슴이 에여온다. 얼굴에 끼치는 짜릿한 열감. 심장은 누가 조이는 것처럼 아릿했다. 오빠가 하는 짓 좀 봐. 잘 다듬은 조각같이 생겨가지곤……. 귀여운 짓만 해. 순영은 손끝으로 귀여운 머리를 쓰다듬는다. 오빠가 나 이렇게 만들었어. 말을 마치며 정한의 목을 껴안았다. 그렇지만 이게 정상이야. 그러니까 가지 마. 가버리면 내가 오빠 없이 어떻게 살아? 말하자마자 뜨거운 온도가 옮겨붙는 진귀한 경험은 처음이다. 머리칼은 부드럽고 숨결이 생동했다. 윤정한이 살아있다는 것이 이 한갓진 세상 그 무엇보다 소중해 이대로 껴안고 몇 시간이고 있고 싶었다.

뽀시래기.

응.

입술이 닿을 거리였다. 정한은 울고 싶었다. 고아원에서 도망쳐 나왔을 때도 눈물이라곤 요만큼도 나오지 않았는데. 울고 싶어서 울기 위해 멍하니 순영을 바라봤다. 하지만 눈물은 응어리져 가슴속에 남고, 작은 손으로 제 눈을 만져오는 손길을 간지럽혔다.

핸드폰 사주기로 했는데. 미안해.

순영이 입을 열었다.

됐어, 그지야. 내가 살 수 있어 그런 거. 이번에 돈 많이 주는 일 받았거든.

정말? 잘됐다. 계좌도 만들었어?

아니. 신용평가 안 돼서 아직 현금으로 받아.

순영의 품 안에서 색색 숨 쉬던 정한은 그 품을 벗어나 순영의 볼을 한 손에 담았고 순영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이 정한을 보고선 먹먹한 목소리를 들었다.

내가 먼저 파리 갈 수 있는데 이번 한 번만 너한테 봐주는 거야.

알겠어. 순영은 배시시 웃으며 정한의 머리칼을 넘겨준다.

근데 딱 지금만 봐주는 거야. 마지막이야. 다음부턴 절대 나 두고 못 가게 할 거라 얄짤도 없어, 바보 뽀시래기야.

창밖에는 비바람이 몰아치고 이불을 잡은 손은 차갑고 바람에 흔들리는 투명창 내부는 고요했는데 둘의 자리는 벽난로처럼 따듯하고 간지러웠다. 순영은 말하진 않고 그저 웃었다. 서로를 나눠 가진 채 눈을 감아 오랜만에 가져보는 여유. 순영은 정한의 뒤에서 정한의 몸을 껴안고 정한은 순영과 손을 얽었다. 우리는 이렇게 서로를 위로하자. 말하지 않아도 공통으로 느껴지는 무언가를 입속에 집어삼키면서.

 

 

프랑스에서 이곳까지. 수술 직전까지 편지가 오갔다. 편지에는 장난스러운 유머가 깃들었고, 몇 밤 자면 오는데? 같은 어리숙한 말도 있었다. 정한은 구태여 순영을 걱정하진 않았다. 정한의 편지는 정한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에 대한 증거가 되어서 순영을 애타게 했고 정한은 그런 순영이 좋았다. 순영은 편지에서조차 정한을 염원하고, 그리고, 꿈꾸며, 만지고 싶어라 했고 그건 정한도 마찬가지였다. 정한은 열심히 일했다. 누구보다 열심히. 열렬히 순영을 생각했고 꼬박꼬박 들른 DVD방에서 로망스 영화를 보며 순영 꿈을 꾸었다. 스르륵 쓰러져 잠드는 것도 예전만큼 괴롭지 않았다. 종내에는 휴대폰을 사서 며칠 내내 달고 살았다. 편지로 받은 병원 전화번호를 오래 까먹지 않고 기억했기 때문에 비 내리는 여름밤, 빗소리를 들으며 이어지는 전화는 일상이었다.

야, 순영아. 나 이번에 전입 신고했다? 나도 이제 사람 된 거 같아. 어때? 오빠 멋있어? 부럽지?

바보. 안 부럽거든?

왜? 아냐. 너 지금 엄청 부러워해야 하는 건데?

의구심에 정한은 발걸음을 멈춘다. 그다음에 나온 말이 발목을 잡아 이끌어, 정한의 마음이 넘어진 꽃병처럼 쏟아졌기 때문에. 꽃병을 세우고 병실의 창틀을 매만지던 순영은 손에 새겨진 향기를 맡는다.

오빠는 처음부터 가장 사람다운 사람이었으니까.

그 한마디가.

보고 싶다……. 얼른 보고 싶어, 오빠. 정말로.

그게 뭐라고. 마음을 졸이는 것일까.

낯부끄럽게 왜 그러는데.

오빠가 너무 보고 싶어. 왜 이렇게 보고 싶지?

정한은 발길을 멈췄다. 차가운 빗물을 맞아도 묻고 싶은 말이 잔뜩이었다. 그쪽도 이렇게 비가 오니. 수천 킬로 떨어진 내 마음이 네 마음에 옮겨붙었니. 한국에 오면 가장 먼저 뭐가 하고 싶어? 외로 수백 개 생동하는 물음들. 비 대신에 바람이 분다고. 응. 붙었다고. 보자마자 안아주고 싶다고. 순영은 모두 다 답해줬다. 그리고 있잖아. 오빠는 내게 처음부터 가장 사람다운 사람이었어, 정말로. 정말 정말 사랑스럽고 신비해서 보기만 해도 아까웠어. 오빠는 내가 사랑이란 걸 할 수 있게 만들어줬고……. 그건 기적이야. 오빠가 내 행운이야.

신호가 나지막이 이어지는 휴대폰을 오랫동안 쥐어 순영의 그 목소리를 담는다. 눈으로는 올라선 세상을 훑고 손으로는 순영의 얼굴을 만졌다. 보이지 않아도 느낄 수 있었다. 어떡하니. 나는 너의 큐티한 감성을 좋아하고 너에게 목이 메고 디지털로 이루어진 화면을 봐도 그 속엔 너만 살아 숨 쉬는 듯해서. 네가 로미오든 뭐가 되든 나한테 너란 사람은 너뿐이라 너를 절대 잊을 수가 없을 텐데. 우리 밤이고 낮이고 사랑을 하자. 그러면 마침내 우리는 쉼 없이 서로에게 스며든 채 살아갈 것이다.

안 되겠네. 순영아, 나랑 살자. 데리러 갈게.

진짜로? 내가 그 말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알아?

현실이 너무나도 자세하면 오히려 허구 같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어. 그런데 너는 진실이지. 적당히 환상 같고 또 투명하기도 해서. 정한의 발이 빨라진다. 순영이 탄 비행기가 곧 출발하여 내일이면 도착한다는 소식은 꿈만 같았다. 보랏빛 밤이 소리 없이 머리 위로 내려앉는다. 황금색 불빛들이 눈앞에 아롱진다. 어디선가 흘러나오는 피아노 선율이 달리는 차들의 소음과 한데 어우러져 바람과 함께 쏟아졌다. 정한은 야경을 보며 섰다. 순영을 끌어안을 상상을 하면서. 순영아, 그때 로미오를 보러 가지 않은 건 내가 줄리엣한테 질투한다는 것을 인정하기 싫어서였어…….

나는 앞으로 내 세계를 조금씩 넓혀볼 심산이야.

혼자서?

아니? 당연히 너랑 같이해야지. 내가 누구랑 해. 그러니까 너, 약속 안 잊었지? 나랑 파리 가서 뭐할 거야?

음…. 글쎄.

순영이 비행기에 올라타기 전, 바깥 하늘에서 눈이 부신 빛이 흘러나왔다.

오빠랑 비포 선라이즈 찍을래.

그게 뭔데?

그걸 몰라?

야! 내가 모를 수도 있는 거지.

아니, 오빠 나이가 몇 갠데 비포 선라이즈를 몰라.

그리하여 이 모든 것은 환희를 찾기 위한 두 사람의 분투. 특별나게 더운 날. 더워도 땅을 뚫고 자라는 벌레들이 흙 표면에 기대어 숨을 쉬기 좋은 날이었다. 끝날 여름이었다. 그리고 비행기를 타고 날아 고국의 땅으로 곤두박질칠 순영은 정한의 여름에 다시금 올 것이었다.

놀리지 마. 나 바보 아니야.

미안. 근데, 계속 모르는 채로 있어. 나랑 해보면 알아.

히히, 하고 웃는 순영. 싱그러운 비가 조금씩 내리기 시작했다.

내가 오빠 가르쳐줘야겠다.

12시간 뒤엔 머리 위로 비행기가 비상한다. 하늘을 배경으로 공존하는 비행기의 배를 보며 비행기를 따라, 저절로 붕 뜨는 몸으로 정한은 열을 내며 뛰었다. 저 안에는 네가 있으리라.

세상은 아직 증명할 거 천지고 갓 태어난 나는 사람임을 계속 증명해내야겠지만, 그렇게 오래 걸리겠지만 내가 널 사랑한다는 것만은 영원히 변치 않고 지속할 테지. 내 맘과 꿈 안에는 네가 있으니까. 그러니까 나는 열심히 온 힘을 다해서 살게. 우리의 세계를 살아갈 너와 나를 위해. 일렁이는 시원한 바람이 머리칼을 파헤치고 지나가, 식은땀에 짓눌린 등이 옷과 하나가 된다. 발이 뜨겁다. 숨도 가쁘다. 그래도 그 상태가 좋아서 뛴다.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간다. 대각선으로 달 앞을 지나가는 비행기를 보며 새어 나오는 웃음을 나는 도통 못 참고. 하이. 하이 로미오. 내 여자 로미오는 절대

절대

절대로

죽지 않아

사라지지 않아

내 마음속에

영원히

영원히 끝까지 살아가, 살아, 살아갈 것이다. 저 달보다 눈부시게, 어딜 가도 반짝거릴 것이다!

 

 

 

*순영의 회고 : 야, 나 힘들어! 오빠가 말해서 뛰쳐 올라간 거였다. 별다른 이유 없었다. 우리는 오후 5시 55분, 샤르드골 공항에 있었다. 계단이 편한 나에 비해 오빠는 어제까지 일하느라고 다리가 아프다고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내려왔다. 인파가 많아서 나를 못 볼까 걱정했는데 내 키에 내 얼굴인 사람은 아무리 해도 나밖에 없다고 해서…. 되려 나를 걱정한다. 자기 딴에는 내가 훨씬 챙겨줘야 할 대상으로 보이나. 하여튼 우리는 바깥으로 나왔다. 자주빛 노을 밑에서 올려다본 에펠탑이 말 못 하게 거대하였다. 도처에는 연인들이 깔려있고 그들은 나눗셈을 처음 배우는 아이처럼 사랑들을 나누었다. 막상 오고 나니까 우리의 계획은 물처럼 기화되어서 우리는 몇 분을 풍경 속에서 나란히 걷기만 했다. 손이 자꾸 맞닿을 듯이 스쳤는데 냉큼 잡지를 못한 건 어쩔 수가 없어 그랬다. 오빠도, 나도. 부끄러움 때문에…. 볼 거 다 봤으면서. 허연히 웃기는 꼴이었다. 나 진짜 오빠 좋아하나 봐. 얼굴 붙잡고 키스 날리고 싶어서 어떡하냐는 심장 부여잡고 우리는 저녁으로 야외테라스가 딸린 식당에 있었다. 간단히 배를 채운다. 느린 라틴 음악이 깔리는 밤 배경으로 흔들리는 머리칼. 내 이름 부르는 목소리. 작은 손. 같은 거 눈 못 떼고 보고만 있어도 마음이 아파지는 나는 그게 좋아.

어설픈 고백을 했다. 그 시간이 여태껏 꿨던 꿈들 중 가장 꿈 같았다.

야, 순영아.

이것 봐, 야.

비 와. 다 젖겠어. 정말이었다. 진짜네…. 갑자기 초록비가 입안에서 달콤히 맴돌아, 나는 널 보고만 있었다. 정한. 윤정한. 나를 챙겨 어깨를 잡아 오는. 너는 겉옷으로 나를 감쌌다. 찬 숨결이 기운다. 우리가 엉겨 붙는다. 마치 뚝뚝 떨어지는 둥근 세면대에 들어간 듯했어. 온몸이 다 젖어가는데 오빠한테선 비누를 머금은 샤워코롱향이 났어. 그 목에 입을 맞추면 시간조차 흔들려. 손쉽게, 축축해. 그리고 나는 그 볼에 얼굴을 비비며 묻지. 관람차 타러 갈까, 오빠? 응. 그러자. 그래 그러자 오빠는 간지럽다며 라일락꽃처럼 웃고는 내 손을 잡아 그럼 나는 어쩔 수 있겠나 싶어 이게 내 운명이라는 걸까 싶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