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홋웹진 참여글 입니다
뭐래…. 야, 전원우가 순영이 여친 뺏어서 그런 거야. 존나 그게 다야.
구지별이 정색했다. 얘는 술도 못 먹으면서 여긴 왜 왔어? 왜 왔겠냐. 오지랖이지. 두 사람은 지별을 보며 표정을 일그러트려 고뇌에 빠진다. 지별은 아직 술엔 입도 안 댔는데 과도하게 상기되었다. 원래 주연 나타나기 전에 내가 앞을 깔아줘야 하는 거 아니겠냐. 마음을 먹은 게 틀림이 없이 공기는 텁텁하고 맥박이 세차게 뛰어노는데 세 사람은 철판에 눌어붙은 쌀알들이나 쳐다보고 있다.
그래서. 순영이 오면 뭐라해.
눈초리만 진자처럼 왔다 갔다……
너 그때 봤어? 뭐 말이야? 권순영 문자. 권순영이 전원우한테 받은 문자. 아 그거……. 누가 뭐라 말할 새도 없이 자리 잡은 침묵. [나도 너 보고 싶은데.] 그거. 찬물이 쓰다. 누가 알약을 넣은 것 같다. 손가락 마디만 한 것이 혓바닥을 바늘마냥 찌르듯이. 과열했다. 세 사람의 고개가 차례대로 떨어진다. 시발 여기서 이러고 있을 게 아니라. 권순영의 동창 셋은 우울감이 묻은 눈짓으로 비장하게 다짐한다. 눅눅한 겨울밤 웬 닭갈비 집에서 쪽팔리게……. 이게 뭐 하는 짓이냐고. 차라리 도망가자. 그냥 집으로 돌아가야겠어. 불똥이 우리한테 튀잖아. 안 그래? 여기 있다가 순영이한테 압살당할지도. 생각하자니 입안엔 돌멩이가 씹힌다. 사실 씹히는 건 돌멩이보다 전원우여야 하지만.
사람이 어떻게 그래?
철판 바닥까지 눌어붙은 공기를 뚫고 먼저 입을 뗀 건 지별이다. 지별은 화를 못 참고 나서는 성격이라 꼭 말 열 마디씩을 더 얹곤 했다. 미친놈 같애. 소정이랑 순영이랑 잘 어울리는 거 누가 몰라. 그런가. 그렇지. 소정이가 많이 좋아했나? 야 하기는 순영이가 먼저 좋아했어. 근데 씨발 전원우가 왜? 왜 그 지랄인데? 몰라. 어쨌든 권순영이 피해자잖어. 전원우 개같은 새끼. 야, 너네 조용히 해. 아직 걔네 입장 들은 거 없으니까 확실해지면 얘기해.
미친놈아. 확실해, 존나 확실해. 지금 나만 예민한 거냐?
……어. 아마도.
어딜보나 유쾌한 지점이 없다.
안 되겠다. 안 먹으려고 했는데, 술이나 시키자. 졸업이 코 앞인 4학년 도예과 학생들 사이에서는 이런 말이 돈다. 사랑 같은 걸 해서 사람은 망한다고. 그러나 글쎄. 그게 진짜라면 권순영은 여태 헛고생이나 한 거다. 그걸 주제로 작품까지 만드는 불도저 같은 성향의 사람이니까. 얘가 언제 이렇게 감성적이었지. 신입 시절이랑 완전 딴판이 된 순영의 연애사에 측근인 지별 외 두 사람은 그를 옆에서 지켜보며 좀 의아하게 생각했다. 하지만 순영은 태생부터가 감성적인 사람인데. 단지 곁에 누가 있느냐의 차이가 클 뿐이었다. 그리고 가장 이해 안 되는 조연이 가장 가까이에서 등장하는 것이 다였다. 그게 전원우였다.
순영이가 전원우 열대만 치고 털어버리게 하자.
야, 구지별. 입 다물어.
바람이 휙 끼쳐 문 쪽을 바라본다. 권순영이 조끼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고 들어왔다. 제일 마음이 여린 한 명이 반사적으로 일어나 순영에게 길을 터준다. 측은지심이 가득한 얼굴을 하고선. 곧 울어버릴 것 같다. 그리고 왜 이렇게 일찍 온 거냐고, 나머지 둘은 서로 간에 눈치를 본다.
너희들 전원우랑 소정이 얘기하지. 권순영이 자연스럽게 가운데에 앉았다. 셋은 시선을 주고받으며 술잔을 나누고 권순영은 한숨을 쉬고. 적막과 마찰이 넘실대며 넷의 몸을 간지럽힌다. 무채색의 옷을 입은 탓인지 권순영은 빛을 빼앗긴 사람 같다. 친구들의 모습을 스캔하고 뒷머리를 긁적였다. 그리고 그동안 열리지 않던 입을 열었다. 소정이 원우랑 바람 나서 나 찬 거 아니야. 내가 먼저 그만하자고 했어. 오해하지 마. 순간 휘둥그레지는 여섯 개의 눈. 권순영은 한 템포 쉬었다가 잘 마시지 않는 소주를 입에 털어 넣는다. 단숨에 목이 텁텁해졌다. 차라리 목구멍을 포크가 긁고 지나갔으면 하는 마음……. 그래도 할말은 해야했다.
앞으로 이 일로 어떤 말도 얹지 말아줬으면 해. 헤어지고 딴 사람 만날 수도 있는 거니까 함부로 씨불이지도 말고.
권순영이 정말 안 괜찮아 보이는 표정으로 상대방의 기분을 달래주는 행동을 할 때마다, 셋은 어이 없게도 급격히 무너진다. 단순하고 고집이 센 줄로만 알았는데 실상은 의외로 단단하고 기가 센 사람. 셋은 알게 된다. 권순영은 그 애 얘기가 나오면 판연히 달라지는 것 같았다.
그리고 전원우 걔……, 착해. 뭐라 하지 마.
야. 넌 우리가 대신 화내주는데 그게 할 소리냐?
새끼들아. 적어도 너희들이 여기서 안주 삼을 애 아니라고.
팔짱을 풀고 고개를 슬쩍 숙인다. 은근히 자존심이 신경 쓰여 보이는 행동이었다. 제발 과에서도 안 좋은 말 그만 나오게 애들 입단속 좀 해줘. 곧 졸업인데 1학년인 애 흉흉한 소문 내서 뭐 하냐. 순영의 당부에 셋은 서로의 면면을 살핀다. 조심스레 부탁할 정도로 전원우를 챙기는 이유가 뭐길래 대체 애인이랑 바람 난 놈을 용서할 수 있단 말인가. 아, 용서는 아직 안했나? 어쨌던간 납득 따위 되지 않고 이해할 기력도 없지만 권순영이 안주를 집어 먹는 사이에 끄덕여지는 고개들. 하지만 지별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다. 순영과 금세 대치상황에 빠진다.
걔가 권소정 집에서 나오는 걸 봤다매. 야, 수녕아. 네가 우리한테 그랬잖아. 너 전원우랑 모르는 사이로 지낼거라며, 이제. 저번에 우리 앞에서 울고 불고 졸라, 졸라 화냈잖아.
중학생 때부터 알던 애야. 근데 내가 시발 뭘 어떻게…….
아무리 그래도. 전원우한테 뭔 사정이 있어서 수능 치고 일학년으로 들어왔는지는 난 모르겠고. 과거에 너랑 어떤 사이였는지 하나도 모르겠지만. 이제 와서 나타나가지고 이러는 건 아니지. 진짜 순영아. 내가 볼땐 이건 아냐. 애가 왜 이래. 수리 해야 되는 거 아냐? 너 고장 났냐?
그래 봤자지… 권순영은 걱정 소리 따위 듣지 않는다. 친구들은 왜 저렇게 과민반응하는지 모르겠으며 여자친구와의 이별에 주인인 양 구는지 이해되지 않는다. 마치 사자를 앞에 세워 잘잘못을 캐묻는 염라대왕처럼. 물론 전원우가 백번 잘못한 건 맞지만 그렇다고 내 잘못이 지워지지도 않지. 여기서 권순영의 잘못이란……. 권순영은 사실 연락을 기다리고 있다. 곧 진동할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며 시간을 잰다. 전화주겠다는 말을 되새김질하며. 주위를 둘러보면 이 테이블만 시간 개념이 사라진 것 같아서, 차라리 평행우주라도 있었으면 어땠을까. 권순영은 그편이 낫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했으면 좋겠다고. 처음부터 전원우 곁을 떠나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또다른 세계에서는 우리가 처음부터 완벽한 사이라면……. 그러니 침묵과 한숨이 오가는 이 자리에서 난 도피해야겠어. 권순영이 벌떡 일어나 서자, 여섯 개의 시선이 앞 따라 얼굴에 붙어온다.
뭐야. 어디 가?
나 갈 데 있어.
그러니까 어디.
아, 화장실.
싫어. 못가. 다 얘기하고 가.
하…. 나 배 아파. 진짜 가야돼서 그래. 어?
친구들과 적당한 거리를 두고 실랑이를 벌이는 중, 때마침 기다렸던 휴대폰이 진동한다. 화면에는 익숙하지만 저장되지 않은 번호가 떠 있고. 셋은 처음보는 전화번호에 눈길이야 단 1초도 주지 않았다. 그 순간 한명이 바깥을 가리키며 주위를 끌어서였다.
야, 저기.
권순영은 휴대폰 전화번호에 눈을 떼지 못한다. 시간이 뒤로 돌아갔다. 아직도 생동하는 고등학교 교실 문 앞 복도로.
'하고 싶은 말이 뭔데?'
'나 번호 바꿨다고.'
'갑자기? 그걸 왜 쉬는 시간에 불러내서 말하냐.'
'그냥. 바꾸고 싶어져서. 그리고 그만큼 중요한거야.'
'뭐야… 이상해. 뭐로 바꿨는데?'
'어…… 네 생일?'
010-xxxx-0615.
'네가 네 생일 기억하라고 좀 하는데 난 자꾸 까먹으니까. 네 핸드폰 줘 봐. 내 번호 저장할래.'
그러니까 저 투명창 밖에 서 있는 사람이 너라서. 권순영은 휴대폰을 들었다. 수화 버튼을 누르자마자 공백이나 여백 따위는 없었다. 어디야. 가게 안. ……나와. 어. 오랫동안 알고 지낸 목소리를 다시 듣는 거 이런 기분이구나. 강의실 구석에서 가끔. 친구들 사이에서 불쑥 스쳐 지나가던 순간순간의 눈짓과 인사들이 한꺼번에 떠올랐다. 내 이름을 부르고 나를 보고 있었지. 무슨 생각해. 가끔은 내 펜을 툭 치고 나를 깨우기도 했고. 도자기 속에서 내 얼굴을 찾곤 했다. 지난 시간이 너한텐 전혀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너는 너를 설명할 때 꼭 내가 들어가. 어렸을 때 같은 반이었다는 걸로 널 정의하고는 당연하다는 듯이 웃어 보여 주면서. 노란 조명은 곧 권순영을 괴롭히기라도 할 것처럼 시선 아래로 깔리고 머릿속을 엉키어 둘의 관계는 더욱 복잡해진다. 코트 소매 밖으로 꺼내놓은 빨개진 손. 건드려보고 싶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권순영이 말한다. 너 이러는 거 후회하지 마라. 전원우가 대답했다.
안 해.
구지별은 인상을 퍽 잘 쓴다. 전원우 왜 저기 있냐고. 순영이 찾아왔냐고. 권순영은 아무 말 없이 테이블 위에 휴대폰을 두고 바깥으로 나간다. 이건 [나도 너 보고 싶은데.]의 답변. 야, 어디 가! 친구들이 불렀지만 소용없었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에 셋은 멍하니 입을 떡 벌리고 한마디씩 거들었다. 전원우한테 다시는 눈앞에 나타나지 말라고 그랬다면서. 그러니까. 그런데 말이야. 근데 쟤네 정말…….
어떡 할거지?
권순영은 그것만 알면 됐다. 전원우가 권소정이랑 사귄다는 소문. 진짜인지 아니면 그냥 장난인 건지. 전자면 짜증 나고 후자면 역겨울 것이다. 전원우는 다가오는 권순영에 하얀 코트 주머니로 휴대폰을 넣고 벽에 기대어 섰다. 가까워질수록 권순영의 얼굴이 붉어지는가 싶더니 귀에서부터는 열이 났다. 권순영은 참아야 했다. 이 모든 상황을 참고 일단은 전원우 낯짝이나 봐야 했다. 왜 여전히 나를 괴롭히는지에 대해. 하지만 전원우는 권순영의 찌든 마음 따위 안중에도 없는지 반갑다며 헝클어진 머리를 쓸어주고 먼지를 떼준다. 언제 이렇게 시선이 달라졌을까. 권순영은 저보다 높이, 그러니까 옛날보다 키가 큰 전원우를 올려다본다. 그리고 묻는다. 왜 하필 권소정이냐고. 전원우는 달라진 공기가 낯설었다. 하지만 낯선 게 좋았다. 익숙하면 금방 질리는 법이므로.
쌍방과실인 거 뿐이야. 네가 먼저 나랑 바람났잖아. 그러고 나서 권소정도 나랑 바람난 거고. 너희 둘 다 날 좋아해서 그런 거 아냐? 근데 뭐 내가…… 어떻게 해줘야 돼?
내가 널 좋아해?
응. 원하는 방식 있어? 난 이해 해 순영아. 너 이러는 거.
권순영은 주머니에서 담배를 찾았다. 뭐라도 입에 물지 않으면 헛웃음만 계속 나올 것 같아서. 전원우는 오래전부터 권순영에게 눈을 떼지 않고 있다. 권순영이 신경이 쓰여 눈짓으로 담배를 권한다.
누가 먼저냐?
나 끊었어.
나도 끊었어. 근데 네 얼굴 보니까…… 해야겠어.
전원우가 성냥갑을 꺼내 연다. 권순영은 전원우가 내민 성냥불에 연초를 가져다 대고 불을 붙인다. 여전히 이걸 가지고 다니네. 속으로 생각했다. 고등학교 졸업을 앞둔 날부터 버릇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권순영은 답답한 마음에 머리를 쓸어 넘긴다. 내가 왜 이런 것도 기억하고 있는지. 황당해하며.
하나만 물을게. 소정이가 나보다 먼저 너랑…….
잤냐고?
전원우가 피식 웃었다.
아니. 너야. 너랑만 해봤어. 난 권소정이 날 그런 눈으로 쳐다보는지도 몰랐어, 너 보느라.
간절한 이야기일수록 가끔 예상치 못한 곳으로 흐르기도 한다. 권순영은 순식간에 침착해진다. 머리를 써야 했다. 이런 식으로 알면 안 되는데. 그런 다음엔 눈을 굴린다. 하지만 궁금한 걸 못 참는 건 전원우다.
너 권소정 얼마나 사랑하는데?
야, 하고도 남아, 나는. 넌 보지도 않았잖아. 근데 네가 뭔데? 뭘 아는데 새끼야. 네가 뭘 알어. 난 한 번도,
나보다 더? 순영아. 너 나보다 권소정이 끌려? 그거, 확신할 수 있는 감정이니.
좋아했어.
빈말 하지 마. 소정이한테 미안하잖아. 걔가 그랬어. 너랑 계속 사귈 바에야 나랑 함께 쌍년 되는 게 낫다고. 그래서 나도 쌍놈 되어 보려고. 봐봐 넌 지금도 권소정 사랑한다고 네 입으로 말 안 하잖아.
이름도 비슷해서 헷갈리게……. 중얼거리며 전원우는 권순영의 입에 문 담배를 뺏어 바닥에 떨구었다. 권순영이 꼼짝 못 하게끔. 정말로 권순영은 할 게 없었다. 연기가 속수무책으로 꺼지는 것을 바라보다가, 아. 이건 너무 해. 억울했다. 나는 당하기만 했으니까 죄가 없다. 지금 이 관계에 있어 내가 한 게 뭐가 있다고. 권순영은 이마를 짚었다. 그렇게 흐트러진 앞머리를 전원우가 가만히 보지 않고, 정돈해준다. 얘 또 이러네……. 친절이 몸에 밴 거야 권소정한테도 이랬을까? 권순영은 혼란스럽다.
너 때문에 소정이가 헤어지자고 해서 헤어진 거야 난.
응. 내가 부탁했으니까.
그건 또 무슨 소리야. 뭐라는 거야.
너랑 헤어지라고 했어. 걔한테.
미쳤어? 너…… 그거 사실이야?
알겠어. 말해줄게. 권소정이 내가 좋대서 내 번호 주는 대신 너랑 헤어지라고 했어. 그리고 난 걔 차단했어.
야, 전원우. 너 소정이 좋아하잖아.
나는 권소정이 아니라 권순영 좋아하는데.
근데 너 겨울 되면 열 많이 나는 거 여전하네. 전원우가 권순영의 볼에 손등을 댄다. 차가웠다. 그러고 보니 늘 전원우는 몸이 차가웠다. 권순영 머릿속이 비상이다. 이러지 마, 제발 이러지 말라고. 어렸을 때 이별하고 다시 만나서 한번 잔 거 갖고 그러는 거냐고. 그건 그냥 술김에, 분위기 탓에, 환경 때문에. 네가 먼저 그 얼굴로 날 유혹했으니까 아니야? 질문에 질문에 질문을 거듭하는데도 전원우는 평안해 보였다. 이건 정말 너무해.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넓어져 가는데 전원우는 눈을 내리깔고 권순영의 입술을 본다. 시선이 느껴졌다. 알고 있는데. 이러면 안 되는 걸 아는데. 그런데도. 그렇지만, 나는 아직도. 내가 만약 전원우를…….
네가 어떻게 나한테 이래.
권순영은 고개를 돌려 피했다.
너는 어떻게 나한테 그랬는데.
그리고 전원우는 그대로다.
순영아. 9년 전 일 기억해? 나는 아직도 생각해. 틈만 나면.
그 말에 머릿속이 분주해졌다. 9년 전, 우리가 고등학생이었던 그때를 떠올렸다. 전원우는 게슴츠레하게 다가와 권순영을 밀어붙이고 고개를 꺾었다. 숨결이 닿는다. 니는 온몸은 차가우면서 숨이 뜨거웠다. 나쁜 놈. 둘의 입술 사이 거리가 짧아지자 귓가에는 사람들의 말소리가 차차 들려온다. 시끄러워. 권순영은 가까스로 마음을 잡고 정신을 차린다.
나 안에 핸드폰 놓고 왔어.
애써 시선을 피하는 권순영에게 전원우가 속삭였다.
이게 네 계획이면 망했어 순영아.
턱을 잡고 고갤 돌리자 눈이 맞는다. 키스하고 싶은데. 대신 이마가 먼저 닿았다.
놔줄게. 가서 휴대폰만 들고 와.
하지만 혼자 남는 것도 싫다.
아니다. 같이 가야겠다. 그렇게 말하곤 권순영의 손목을 잡고 앞장서 걷는다. 가게 안으로 오는 둘에 친구들 셋은 서로를 치며 집중했다. 그 짧은 시간에, 그 찰나에, 권순영은 전원우가 얘기 꺼낸 그 당시를 반추했다.
[9년 전. 권순영과 전원우의 사이는.]
전원우하트권순영
밑에
ㄴSEX (옆에는 졸라맨끼리 떡치는 그림)
밑에
ㄴ둘이 했대 ㅋㅋ
밑에
ㄴ좆됀다
좆됀다. 순영의 시선이 여기서 멈췄다. 원우야. 이게 무슨 뜻이지. 어깨를 비스듬하게 내려간 윗옷 안으로 들어온 손이 간지러웠는데 화장실 벽에 쓰여 있는 글까지 유난이었다.
쪽.
아... 하지 마 여기서.
왜. 아무도 없잖아.
그래도... 누가 오면 어떡하라고.
나 싫어?
그게 귀여워서 웃었다. 아니. 전원우 개 좋아.
연인 사이였다. 아무도 연인이라고 봐주지 않았지만 권순영과 전원우는 연인이었다. 비록 둘조차 알지 못했지만. 정의는 둘에게 필요 없었다. 취향과 취미가 달라도 어찌어찌 살을 맞대며 붙어 다니다 보니 그래도 이상하게 톱니바퀴가 서로에게 맞춰 돌아갔다. 방과 후 공사장에서 남몰래 키스하거나, 여름엔 도서관에서 책장을 사이에 두고 눈이 맞거나. 둘만 남은 교실에서 무릎을 베고 눕는 일들이 그런 것이었고 순영은 같이 노는 친구 무리랑 있을 땐 원우를 굳이 찾지 않았다. 원우가 불편해하는 게 이유였다.
이 새끼 개쫄보 아다 새끼임?
씨바 좀 대주면 덧나냐? 후다 놈이 졸라 비싸게 굴어.
그런 말을 듣기 전까진. 특정의 조잡한 소문이 괴괴하게 원우를 따라다니기 시작했다. 순영은 그 일로 빡돌아 무조건 원우를 끼고 다녔다. 친구들 사이가 깨져도 상관없었다. 일부러 급식을 같이 먹고 도서관에 다섯 시간씩 앉아있는 원우의 옆에서 잠이 들곤 했다. 집까지 바래다주겠다고 손목을 잡고 나가고 영화관, 도서관, 미술관. 두 사람이 갈 수 있는 곳이라면 언제든 함께 가주었다. 원우는 부모님과 떨어져 혼자 살았기 때문에 순영이 원우네 집에 오래도록 머물기도 했다. 그 때문에 미술학원을 째기도 했다. 그리고 원우는 이 모든 것들이 자기 때문이라고 여겼다. 내가 너무 좋아하는 티를 내서 그런 거라고. 하지만 순영은 절대적으로 아니라고 말했다.
원우야. 내가 너 책임질게.
그렇게 중학생 시절이 다 지나가고 고등학교에 입학하고 나서부터는 순영에게도 고난의 성장기 시절이 찾아왔다. 순영은 목표인 예술대학을 위해 미술학원을 끊고 부모님의 권유로 스승님의 공방에서 도예 수업을 들었다. 그럴 때도 곁에 원우가 있어서 좋았는데, 있어서 힘들기도 했다. 늘 바쁜 나 때문에 외로워하면 어떡하지. 내가 안 놀아줘서 화가 나면 어떡하지. 걱정은 일상이 되었고 제 한 몸 간수하기가 힘들어진 고등학교 마지막 겨울 방학쯤. 둘 사이에 연락은 소홀해지고 순영은 난생처음으로 스승님 집에서 내쫓긴 채 밖에서 오들오들 떨었다. 손발이 얼고 귀와 눈이 시렸어도 이 일을 포기할 수 없어서 문 앞을 지키며 몇 시간이고 있었다. 못하면 들어올 자격도 없었다. 아니 어쩌면 생각이 많아서 탈이었다. 사방이 눈이고 눈이 녹아 눈물이었다. 순영은 마지막으로 원우에게 전화를 걸어 보았다. 받지 않았다.
나 이사간다.
잘됐다 원우야. 너랑 있기 힘들었는데.
미안. 선수 친 건 전원우다. 잘못도 전원우가 다 했다. 대학이라도 같이 가자던 약속은 잊어버렸나 봐. 순영은 머들러로 카페 라테를 휘저으며 별 생각 없이 앉아 있고 원우는 순영이 줘서 하고 온 목도리에 코를 박았다. 내가 그동안 널 너무 붙잡아 둔 거 같애. 순영이 먼저 미안하다고 했다. 그런데 원우는 자기가 더 미안하다고 한다. 순영은 상관없다고 했다. 나중에, 우리 나중에 얼굴이라도 보자. 그렇게 이별해도 괜찮을 것 같았던 둘은 동시에 말했다. 응. 너 시간 되면.
선배들 오랜만에 보네.
그랬던 전원우와 권순영이 가게 안으로 들어와 자리에 앉는다. 구지별을 비롯한 셋의 얼굴이 삽시간에 일그러졌다. 애당초 기분을 숨길 생각이 없어 보이는데 권순영은 전원우에게 손이 잡힌 채 멋쩍은 표정을 짓는다. 어지간하면 조용히 넘어갈 줄 알았겠지만... 이번에도 구지별이 먼저 입을 열었다.
권순영이 너한테 잘못한 게 있냐 아니면 약점이라도 잡은 거냐. 왜 못되게 굴어. 우리 다 너 면상 치고 싶은데 참는 거야. 쓰레기 새끼야. 눈깔이 있음. 봐 등신아. 네가 순영이한테 한 짓을.
순영이 잘못한 거 없지. 차라리 잘못했으면 좋겠는데. 내가 욕심이나 내보게.
순영의 손에 여전히 전원우가 끼어있는 꼴이었다. 그리고 식사는 더 못하여서 가만히 있었다. 이게 끝일까? 시작일까. 권순영은 의아해진다. 전원우는 잘 먹지 않는 권순영에게 반찬을 구태여 넘겨줘서, 일찍 먹을 게 떨어졌으므로 순영의 얼굴만 쳐다보고 있었다. 그래서 권순영의 앞접시에 음식이 그득하게 쌓인 채였다. 친구들은 더는 관심이 남아있지 않아 돌아가겠다고 했다. 전원우가 웃었다. 그래. 나는 순영이랑 더 있다가 갈게. 친구들이 진저리를 치며 바깥으로 나가자 전원우는 순영의 손을 들어 올려 손등에 입을 맞췄다. 권순영에게는 졸음이 쏟아졌다. 그래서 걱정이 됐다. 이대로 있다가 전원우 품에서 잠들면 어떡하지. 선 넘는 걱정. 왜 이런 생각이나 하는지 모르겠다. 아무래도 안 되겠어. 잠이라도 깨기 위해서 밖으로 나가야 했다.
바깥바람은 아까보다 더 찼다. 전원우와 권순영은 아까처럼 똑같은 장소에서 서로를 보며 마주 서 있다. 권순영은 또다시 담배를 물었다. 당연하듯이 전원우가 불을 지펴준다. 연기를 전원우의 얼굴에 내뿜었다. 무슨 화가 나서인지 충동적으로. 그냥 저 얼굴을, 평탄한 저 표정을 굴복시키고 싶어졌다.
너 이제 뭐 할 거야.
글쎄. 모르겠네. 어… 네 옆에 있음 생각이 나겠지. 그냥 여기 있을래.
그런 거 말고. 네 계획이 있을 거 아니야.
하지만 전원우는 태연자약하다.
순영이 네 친구들 이름은 구지별, 이백이... 다들 특이한 것 같아. 이백이는 거꾸로 해도 이백이네.
원우야 내가 말하잖아. 내가 지금 장난칠 기분도 아니고.
응. 알아. 듣고 있어.
그러면서 권순영에게로 손을 뻗는다. 그리곤 권순영이 피우는 담배를 낚아채 제 입에 물었다. 권순영은 허탈한 표정을 응당 지었다. 전원우의 앞머리가 바람에 흔들거렸다. 살짝 괴로운 표정을 원한 듯 전원우가 인상을 썼다.
근데 내가 너 대학 가서 그런 애들 사귀라고 그랬어?
…….
아니잖아.
연초를 물고도 새지 않는 발음으로 노려보는 얼굴. 그건 화가 난 거였다. 전원우가 있는 곳에는 항상 소문이 따라다녔다.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까지. 전원우를 게이어플 회원 프로필에서 봤다는 소문, 게이클럽 뒷골목에서 딥키스하고 있었다는 소문, 데리러 오는 남자친구가 있다는 소문, 온갖 소문이 전원우를 따라다녔지만 전원우는 늘 모르는 척했다. 전원우가 권순영이 다니는 대학교에 입학하고 나서, 권순영을 찾았을 때. 원우의 과에서 원우는 인기가 있었다. 외모 탓이었다. 그렇기에 권순영은 속으로 이런 생각도 했다. 저 얼굴. 내가 제일 먼저 좋아했는데.
게다가 권순영이 권소정과 헤어지고 나서, 이번엔 전원우랑 권소정이 사귄다는 얘기가 따라다녔을 때. 권순영은 아무렇지 않은 척했다. 주변 사람 모두 다 권순영을 걱정했지만, 권순영은 오히려 저를 걱정해주는 사람들을 걱정했다. 소정이 그런 애 아니란 말야. 원우 걘 과마다 한두 명씩은 꼭 있는 애잖아. 그런 애를 누가 좋아해. 권소정이 전원우를 왜 좋아해. 왜.
좋아하지 마.
미친 소리.
본인만 아닌 척했다.
뭔데. 너 그런 표정 못 숨길 거면 너 마음대로 해. 전원우가 권순영의 볼을 살살 매만지면서 살포시 웃는다. 언제 뭐 씹은 표정이 된 권순영은 그게 참 서럽게 느껴졌다. 이 새끼 일부러 나를 안달 나게 하는거다. 그러니까 자가용의 엔진 소리. 지나다니는 사람들의 말소리. 모든 게 귓가를 괴롭혀도 얘 목소리가 제일 괴롭게 느껴지는 거다. 알면서 빠지는 거였다. 알면서 전원우에게 추락하는 것이다. 다시금 권순영은 전원우를 소문에서 구해내야 하는 역할로 치환된다. 그런데 혹시 내가 그걸 즐기는가?
소정이한테 가서 말해. 너 번호 삭제했다고. 너 안 좋아한다고.
권순영의 눈빛이 단단했다. 전원우는 살짝 당황하여 눈을 깜빡인다. 이제야 본심을 드러내 주는 거야? 묻고 싶었다. 묻지 않아도 대답하고 싶어 보이는 얼굴의 권순영이지만.
그럼 나 누구 좋아한다고 할까?
쉬웠다. 한 단어만 뱉으면 되는걸.
너?
어.
전원우와 권순영의 사이는 그렇게 쉽게 정의되지 않는다.
그렇게 말해.
질투 많은 새끼……. 질투만 하는 순영이.
연초를 짓밟아 버리고 목을 물었다. 전원우는 키만 컸지, 생각이나 행동은 그대로였다. 숨 막혀. 권순영이 그 품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니 냄새나.
하지만 전원우는 놔줄 생각이 없어 권순영과의 사이를 더 결속시켰다. 마치 하나의 덩어리처럼.
너랑 이러고 싶었어. 아주 예전부터. 그러니까 순영아.
화내지 마. 나 무섭단 말야.
…….
네가 나 책임진다 그랬잖아.
목에서 쇄골로, 쇄골에서 이마, 눈, 코, 입 어디하나 놓치지 않고 키스했다. 권순영이 입고 있는 패딩이 바스락거리며 헤엄쳤다. 권순영은 입을 맞댄다.
그날 자기 집에서, 순영은 원우의 등을 보며 생각했다. 누워 잠들 때까지. 바보 같애. 나한테 훤히 등을 내다보이고. 권순영은 전원우한테로 바짝 다가갔다. 이런 등에 온기가 전해지는데 뭐를 위한 집착이고 욕망이었는지. 그러자 전원우는 몸을 돌린다. 잠에 취한 눈을 하곤. 권순영에게 입 모양으로 말을 전한다. 안길래?
권순영은 구지별에게 단단히 일러주고 싶었다. 야, 나 권소정 안 좋아했어. 둘 다 좋아한 게 아니라고. 나는 특정 한 사람한테 영원히 자릴 내주어야 할 것 같애. 그러니까 돌아간 거지, 고장 난 게 아니라고. 나는. 권순영은 조금씩 제빛을 잃어갔다. 아무래도 상실의 시대는 아무도 모르는 사랑에서 시작된다. 권순영의 전원우 되찾기를 도와준 세 친구에게 감사를. 그건 효과 만점의 애프터 서비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