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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내 얘기 안 해. 네 얘기 하려고. 그리고 나는 유리컵에 든 물을 한 모금 마셨다. 언제였는지 날짜까진 몰라. 하지만 너를 처음 봤던 그 날은 초봄이었어. 확실해. 너를 본 것도 처음, 내가 기억하는 봄도 처음이거든. 그리고 또 학교에서 춤으로 일 등 한 날이었으니까 생각 나. 우리는 같은 빌딩에 있었어. 내가 거기에 간 이유는 엄마 손에 이끌려서였는데 엄마는 나를 그곳에 보내고 싶어 했어. 너희 부모님처럼. 남양주에서 오느라고 내가 제일 늦게 도착했는데 보니까 네 옆자리가 비어있었어. 그래서 내가 네 옆에 앉았잖아. 어쩌면 그게 운명이었던 거 같아. 아, 나 운명 안 믿는데. 근데 네가 운명 믿는다고 해서 그래서 나도 그냥 믿어. 안녕하세요. 어디 사는 누구입니다. 나는 이렇게 살아요. 하면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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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진짜 형, 형! 좀 더 세게 밟아봐요! 더 더 더! 계속 밟아! 밟으라구……, 밟아아아! 이럴 수가. 정한이 순영의 허리에 붙어서 소릴 내지른다. 아, 야… 재촉하지 마아! 간결하고 애교 묻은 목소리로 응답하며 복잡한 머리를 쥐고 싶은 순영은 핸들을 우에서 좌로 꺾으며 다채롭게도 심각한 표정으로 바이크를 몬다. 서늘한 몸체가 기운다. 저 광나는 라이더 자켓이 일그러져도 정한은 허리를 두 팔로 꼭 붙잡아 깍지를 끼고 부닥치는 바람과 맞서는데 그 순간! 그 순…… 간? 깜짝이야! 이게 뭐야, 구석에서 튀어나오는 저 트럭은 뭔데! 정한의 얼굴이 차차 구겨진다. 순간이었다. 눈앞에 보이는 2.5톤 화물 트럭에 양손과 한발을 빠르게 움직여 제자리를 찾으려 하나 삽시간에 두려운 표정을 짓는 순영. 살갗이 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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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한낮의 여름이었고, 창 너머 밖에는 굽이친 담쟁이덩굴 사이로 맹렬히 강한 빛이 침투하여 어느 때보다 예쁘고 투명한 날이었고, 에어컨에서 나오는 가공의 바람이 가게 안을 감도는 덕분에 두 팔 엔 소름이 돋아 없던 긴장감마저 생길 정도였는데, 컵에 담긴 차가운 사이다를 탁자 위에 내려놓으며 그때 나의 대사는, ‘생각해보니까, 거의 3년이더라고요. 우리 함께하지 못한 시간이 3년…….’ 이었고, 다분히 이어지던 침묵을 멈춘 건 콜라를 마시던 그가 스트로를 놓으며 입을 열었기 때문이었는데……. ‘그거야, 네가 나보다 3년 어리잖아.’ 아, 이래서 안 돼. 이지훈은 안 돼. 안된다고! “안되긴 뭐가 안 되냐?” 진형은 아직 남은 핫도그를 한입 더 베어 먹고선 물었다. 오늘 낮에 있었던 일을 생각하다 헛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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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물에 그림자가 따라붙는 건 이치에 맞는 일이자 당연한 것이라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해 여름, 그 지독히 더웠던 여름에 내게 달라붙은 건 그림자가 아닌 다른 누군가였고 그 애는 나를 집어삼켰다. 그리고 아이스크림처럼 녹아내린 나는 물이 되어 걔의 발목에 고였다. 야, 전원우. 문만 열면. 문을 열면 제일 먼저 보이는 그것은 빛도 아니고 바람도 아니고 동그란 얼굴이다. 권순영 얼굴. 안녕. 과장되게 손을 흔들어 인사를 한 권순영은 오늘도 나를 기다렸는지 밖으로 나온 나를 잡아채 팔짱을 낀다. 뭐가 좋아서. 나는 서로의 팔짱을 끼는 게 뭐가 좋은지 도저히 이해하지 못해 권순영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런데도 권순영은 그런 나를 이해한다는 둥 뭐라는 둥 옆에서 주절대며 콘크리트 바닥을 걷는 등굣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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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 같이 치켜뜬 눈으로 먹잇감을 찾는 너는 온몸을 블랙으로 무장한 채 밤 아홉시에 우리 집 앞을 어슬렁거린다. 남자 한 명을 데리고. 네가 발걸음을 옮겨 으슥한 골목으로 들어가면 나도 따라 왼쪽 끝방으로 들어간다. 여기서 보면 창문 너머로 황황한 골목이 다 보이기 때문에 네가 뭘 하는 지 알 수 있으니까. 깜깜한 밤에는 드문드문 떨어져 있는 가로등만이 밤과 골목을 밝히는데, 암울한 벽은 무서울 정도로 너한테 딱 어울리는 형태다. 너는 벽에 스며든다. 이름이 전원우랬다. 웃기지. 할렘가와는 안 어울리는 얼굴로. 쓰레기더미에 자릴 잡은 동네와 전혀 상관없는 이름을 달고. 코카인을 담은 봉지를 소매 밑에 숨겨오는 전을 매일 이 시간에 본다. 그래서 나는 창문 앞에 눌어붙었다. 전의 거래는 단순한 구조로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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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의 이름표는 상앗빛이 난다. 우의 하얀 가운과 상앗빛 이름표. 가운은 세탁한 지 얼마 안 되어 보이나 종이는 빛이 바래 이름 끝이 잿빛으로 변색했다. 민규는 머릿속에 그걸 패러독스라 새겼다. 원 우. 신물 나도록 듣고 봤던 이름. 이름표에 쓰인 이름을 작게 읽다 글자 위에 부착된 생기 없는 얼굴을 주시했다. 생기뿐만 아니라 핏기도 없다. 피가 돌고 있긴 한 거야? 민규는 우의 왼쪽 가슴의 인쇄된 얼굴과 실제 낯을 번갈아 보며 그가 살아있음에 의아함을 품는다. PVC 명찰 안의 종이는 쭈글쭈글했다. 어쩐지 바탕색이 말갛지 않은 게 커피에 한 번 빠졌었나 하고 상상하지마는 별 볼 일 없는 생각이라 처분하여 포기한다. 그랬음 젖은 종이를 바로 빼버리곤 새것을 출력해서 넣었을 것이다. 향에 민감한 사람이라 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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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 여름 향기가 가득하다고 말하던 장미 덩굴 담 너머로 윤정한과 나는 열여덟의 언저리에 얽혀 습관처럼 청춘을 소비하는 데에 심혈을 기울였다. 일종의 관성과도 같이 서로에게 돌아오는 철칙. 그대로 우리는 우리끼리 몇 달을 붙어살았다. 살갗이 닿게끔. 그게 우리의 성질일지 익숙해진 타성일지는 뭐가 되었든 중요치 않았다. 싸웠다가도 시간만 지나면 스르륵 풀리는데. 자연히 서로를 찾는데. 윤정한과 나는 어지간히 맞아야 할 취향이 맞지 않아서 그거는 그거대로 분투하기 일쑤였지만 그런데도 우리는 살을 비비며 지냈다. 왜일까. 나의 의문에 윤정한이 카프리썬의 스트로우를 고무줄 씹듯 질겅이다 나를 본다. ─본능이지. ─본능이야? ─어. 그냥 그런 거야. 당연하다는 듯 결론을 매듭지은 윤정한의 턱이 상하 운동을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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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술 안쪽에 화상을 입었다. 나는 필히 그것이 보석에 짓눌린 자국이었으리라 믿는다. 함께 살아가는 거, 공생이라고 하죠? 눈앞에 교단을 서성거리며 팔을 휘두르는 이름 모를 늙은 교수는 지난 시간부터 지나치게 사람과의 유대를 강조하는 주장을 펼쳤다. 사람과의 관계에 대한 구체적이고 본질적인……, 무언가. 무언가 세세하고 전문적인 단어들의 집합을 열거했다. 그래봤자 주관적 견해인 뻔한 이야기. 자신보다 몇 배의 삶을 더 산 남자는 이것 보세요, 하며 자신의 경험담을 때 묻혀 줄줄 늘어놓았다. 아직은 청춘이라 칭하는 나이대에 속해서 반 정도는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였다. 아무리 학구열에 지속하는 취미라 해도 이런 내용까지 원한 건 아니었지만 준훼이는 가방을 열었다. 꼬박꼬박 오르는 참여율은 신경 안 쓴 지 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