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글 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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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곳을 돌아다녀 봐도 너는 어디에도 없었다. 해가 길어졌다. 늘어나지 않을 것만 같던 하루가 그제야 단추를 채우듯 그 자리에 꼭 맞게 떨어지자, 얼굴에 그림자가 졌다. 너를 기다리는 시간의 반복이었다. 넘치던 오전의 활기는 오후가 되자 잠에 들듯이 수그러들었다. 학생들은 저마다의 길에 서있었고 나는 소리 없이 멈춰있었다. 모든 사물들이 포물선을 그리며 서서히 느려지더니 동작을 멈추자 어느새 교실로 들어서는 너의 모습만이 남아버렸다. 오랜만에 만나는 너였다. 시간이 흘러 모두가 변화를 찾았을 때, 계절이 바뀌어도 너는 변하지 않았다. 단정히 접은 소매 끝과, 턱 아래까지 잠근 와이셔츠는 아직도 그걸 증명하듯 너 자체였고, 나는 그런 너를 관찰하는 습관이 생겼다. 너의 하루 일과 중 가장 쓸모없는 한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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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더라인이 진해졌다. 권순영이 만든 타임머신이 가동해야 할 시간이다. 시간이 역 또는 순 또는 선행하는 프로그램이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를 전체 망가뜨려놨기에 누구도 일자선에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세상을 이분화하여 나누던 경계가 지워져서 서 있을 데가 없었다. 머신의 모니터에 줄줄이 머리 부분이 깨져 깜빡거리는 전구가 프렉탈 노이즈를 일궈내며 유치한 밤을 밝힐 때 그것을 연구의 산물이라 자찬하는 건 인류의 유치함이었다. 그건 권순영의 성과… 보다는 일과였다. 권순영은 무쓸모한 것들에 아름다움을 찾아 넣었다. 낭만이었다. 실패작을 꾸미느라 하루가 다 가도 개의치 않을 정도의 낭만. 그래서 권순영의 총체적 관심사는 남들의 비웃음거리와 부산물로 이용됐고 그럴수록 권순영은 그들과 자신 사이에 선을 그었다.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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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코미디 그 자체. 태어날 때부터 주어진 이름으로 살아야 한다는 건 코미디다. 나중에서야 바꿀 수 있다 한들 그 이름은 알맞은 이름인지 이름 모를 사람에게 검증을 받아야 한다. 총체적 난국이다. 주변 사람들은 청춘들에게 하는 말로써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살라며 수백 번 설교를 전파했고 그래서 당연히 맘속 깊이 그 말을 새긴 채 살아왔다. 그런데 내 정체성의 확립에 과반을 차지하는 이름 세 글자를 바꾸기 위해선 허락을 받아야 한다니. 물론 나의 이름이 싫어서 이런 생각이나 하고 앉아있는 건 아니다. 외려 반대다. 문제는 보이지 않는 곳에 숨어 있다. 이름이 뭐라고요? 묻는 음성이 확고했다. 눈을 감고 누워있는 순영은 입술을 바짝 탄 입술을 혀로 축인다. 권순수입니다. 마른 목소리가 갈라져 나와 순영은 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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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한이 순영을 처음 알았을 때 벤츠는 박살 나 있었다. 고가다리 밑은 사람이 없고 황마처럼 달리는 차들만 즐비했는데 넘실거리는 클랙슨 소리 때문에 먹먹하던 귀가 윙윙대었다. 벌떼 같은 소리가 십자형 도로 어디에서 나는지 구분되지 않는다. 마치 공장에서 출고를 대기하는 차들의 거대 창고 같았다. 울리는 귀에 얼굴을 찡그리며 걸어오던 정한이 마주한 건 노란 머리칼. 정한은 반사적으로 자신의 머리를 헤집는다. 후진하다 세워진 차를 박았어. 흘깃 이쪽을 쳐다보고 문자를 보내는 손은 빠르다. 뭐 박았는데. 외제차? 답장도 빠르게 도착했다. 몰라ㅋㅋ근데 벤츠s클래스 같음 아. 순영은 다가오는 구둣발 소리에 핸드폰을 집어넣고 손톱을 물어뜯는다. 한숨을 내쉬던 정한은 차 앞쪽을 살피고 마침 순영의 주머니 속 핸드폰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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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홋윤 리버시블 는 몇 달 전 두어 번의 앨범을 냈지만 이렇다 할 성과 없이 묻혔다. 신규 인디밴드의 정체성이란 그런 거지. 독창성 독특함 이런 거 다 기성 그룹이 우리인 척하고 뺏어가서 그래. 우린 킥드럼을 찢어도 나이롱 여섯 줄 피크질로 손톱 피 철철 뜯겨 나가도 직캠 하나 안 뜰걸. 보컬이 거든다. 스네어를 깨부숴도! 마이크로 스네어를 강타하자 챙, 하는 소린 합주실을 울린다. 그렇지, 맞아. 고개를 끄덕인 멤버들은 자연스럽게 배고픔에 허덕였다. 꿈은 허상이다. 윤정한은 리더라는 덕목을 지닌 이상 팀을 살려야 하는 강박에 시달려 늘 손에 뭔가를 쥐고 있었는데, 그 주 업무가 SNS에서 팀 계정의 반응을 살피는 일이다. 그러나 1페이지 이상 떨어지지 않는 스크롤 바에 곧장 얼굴은 찌그러들고. 형.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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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홋원 젠더스왑 리버시블 윤정한. 마을 초입 도로를 끼고 있는 의 삼 남매 중 장녀, 열아홉 첫째 딸. 설명할 수식어는 이 한 줄이면 끝나는 윤정한은 살면서 둘째 여동생 윤해민과 막내 남동생 윤다빈을 자신과 비교하거나 동떨어진 자기 이름에 불만을 가진 적은 없었다. 정한의 얼굴을 모르고 이름만 들어본 자들은 정한을 남자라고 착각하여 남 화장실에서 찾거나 간혹 성별을 1로 표기해놓고 마는 실수를 저지르곤 했기에 정한은 이왕 남자로 사는 것이 좋겠다, 속으로 생각하곤 했다. 정한의 하루는 볼품없는 수증기와 같이 가늘게 연명한다. 아침부터 오후까지 학교에서 썩는 것이 그 반증. 썩어 물든 몸뚱어릴 끌고 집에 오면 해민다빈은 숙제를 하였고 정한은 머리를 하나로 묶고 고기를 썰었다. 고기를 못 써는 날에는 돈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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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하기로 했다. 전원우랑. 전원우는 19쇄까지 발행된 자기 삶을 바둑돌로 수놓았고 나는 그걸 펼쳐보는 관찰자에 불과했다. 그랬으나……, 분명 그랬는데 언젠가부터 전원우는 한여름 뙤약볕 아래서 공명한다. 이건 전원우의 인생에 끼어든 다른 한겹의 페이지. 벤치에 앉은 전원우의 눈동자가 왔다 갔다, 네트를 넘어가는 공을 따라 고개가 돌아가니까 우리의 위치는 뒤바뀐 거다. 이번엔 내가 당했다. 전원우가 나를 관찰하고 있다. 전원우와 내가 상생이 맞지 않는다는 건 공공연한 사실로써 이에 기반하는 근거들은 저기 저기 한 트럭으로 쌓여있다. 예를 들어 내가 양 볼 가득 밥알을 욱여넣을 때 전원우는 깨작거리다가 젓가락을 놓는다는 것. HP 포션을 마시지 않아도 회복되는 나와 다르게 픽 쓰러지고 픽 누워버리는 전원우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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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해. …내가 뭐라고 했게. 현재의 손끝이 영원에게 가닿는다. 영원은 대답 대신 현재의 입술을 손톱으로 문지른다. 좋아한다고. 영원이 느리게 속삭이자 현재는 입술을 매만지던 영원의 손을 잡아끌어 제 볼에 갖다 댄다. 멈춘 시간이 촘촘히 기록되는 장면. 발설하는 이는 일절 없다. 적막만이 감싸 흐르는 영원과 현재의 시공간 그 틈에 먼저 반응을 보인 건 지금까지의 기록이 담긴 아리플렉스 카메라다. 둘은 35㎜ 필름에 감겨 잠긴다. 잠시 후에 컷 소리가 나면 순영은 달뜬 숨을 내뱉고 주위를 환기한다. 수고하셨습니다. 개운한 얼굴로 분주히 들뜬 모든 이에게 인사를 한다. 세트 장 밖을 나서는 순영에게 감독과 여러 스태프들이 뒤돌아 손을 흔든다……. 현재 잘 가. 순영은 꾸벅 고개를 숙인다. 장영원. 부름에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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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 또다. 루이 루이. 또 저 벽 뒤에서, 루우이. 정말 끈질기게……. 루이, 어딨어! 수장님, 저 테스트 할 땐 말걸지 말라 했잖아요! 또 저기 저 벽의 뒤 거실에서 루이를 부르는 호시. 루이는 그 고질적인 반복에 미간을 찌푸렸다. 그런데 여기서 호시란? 그 유명한 팀 에이치의 수장, 권호시. 덧붙이자면 에이치란 팀명은 본부 놈들이 멋대로 호시의 앞글자 알파벳에서 따왔다. 깐깐한 척하지만 사실 대충 쓱쓱 일처리 해버리는 게 본부의 역할이었고. 때문에 그들을 욕하는 일은 에이치의 일부분이었다. 걔네는 매번 센스가 구려. 호시는 그 말을 달고 산다. 어찌 됐건 본래 이름은 모른다. 나이도 알 수 없다. 허나 나보다는 많다. 생긴 거로 봐선 그렇게는 안 보이나 일단 나한테 반말을 하니까. 루이가 머릿속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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끊어진 기타 줄은 버리고 새 줄을 가져와야만 했다. 신곡을 올릴 수 있다 하여 고대하던 무대가 가동을 멈춘 사이 낡은 폴리에스테르 커튼이 입구를 가로막는 방 안에서 A와 B와 C는 원우가 기타 줄을 갈 때까지 기다렸다. A는 퀭한 눈으로 원우를 지긋이 본다. 본래 가진 거 하나 없이 태어난 A는 상상으로라도 부유해야만 했다. 작사를 하는 몸이라 사고의 폭을 넓혀야 하는 것이 강박이라면 강박. 회상이 버릇으로 고착된 유물. A는 생각을 카세트테이프처럼 되감기 시작한다. 줄이 끊어졌던 걸 잊고 있었다 한 것은 핑계일 게 뻔하다. 전원우가. 기타를 자기 분신이라 여기는 것 같이 애지중지하는 애가? 오히려 무슨 일이 있어서 공연하기 싫다고 시작하는 소설이 훨씬 있음 직하고 설득력 있다. 샤를. 사실 기타 줄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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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창작에 목마른 상태라서 그림을 업으로 삼길 원했고 그러기 위해 윤정한이 필요했다. 신물 나도록 학원에 다니며 입시 미술을 공부한 까닭은 배워야만 했으니까. 내 손으로 만들어내는 한 장의 피조물이 좋아 죽을성싶다는 흐리터분한 이유. 그거 하나 때문에. 뛰어나게 잘하되 이상하면 욕먹고, 그렇다고 남들 배우는 만큼만 하면 뒤처지는 기준선에서 갈팡거리던 나를 윤정한은 구원하고파 했다. 처음 만났을 당시 윤정한은 특별히 내 그림에 예민하게 굴었다. 그때가 여름이었다. 종이에 끼이는 삶과 동시에 열망에 녹아내리던 시기. 만약 살면서 하나를 저주할 수 있다면 주저 없이 여름을 고를 정도로 도화지가 수분을 머금어 눅눅해지는 때였다. 일찍 학원에 나와 소도구를 정리하고 있던 차에 누군가 창고에서 나와 내게 말을 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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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살률 백 퍼센트. 마지막 장에는 네 이름 옆에 그렇게 썼다. 너는 반드시 죽는다. 권호시는 반드시, 남의 손을 빌리지 못하는 경우에 제 손으로 명을 끊을 것이다. 끊어지는 순간에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씨발 바다 보고 싶어. 그런데도 네가 이 막되고 무질서한 악습은 끊어내질 못하는 이유는? 존재가치가 불확실한 너는 자기 자신을 잡견(雜犬)이라 부른다. 혹시 그것이 너의 자존심이었나 하면서도 나는 피 한 방울, 심장에 헛돌지 않았다. 때때로 지나치게 무력해서 살아 있는지조차 의식하지 못했으니까. 그러나 권호시 너는 오히려 재기발랄했다. 너는 손톱마다 듬성히 스민 푸른 핏자국과 박혀있는 인간의 살점을 이쑤시개로 긁어내다가 나를 본다. 자세히 보니 손등에서부터 묻은 피는 검은 피였고 피는 너를 타고 올라 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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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생일날 다시 태어나고 싶어. 원우의 문장이 그렇게 시작돼서 나는 일기 첫머리에 그걸 적어놓았다. 원우의 시집을 사기로 한 건 계획된 일은 아니었다. 원우가 떠난 지 오랜 시간이 지나 문득 생각이 났기에. 머릿속 어딘가에 묻혀있을 거라 예상했으나 구태여 꺼내려고 하진 않았다. 살다 보니 전원우 생각이 나게 되는구나 하고, 읊조렸을 뿐이다. 원우가 새 삶을 찾는다고 했을 때 나는 딱 죽고 싶었다. 원우가 살고자 하는 만큼 죽어버리고 싶었다. 그럼에도 원우는 떠났고 나는 남았다. 퇴근 후 쏟아지는 눈바람에 점퍼에 달린 모자를 뒤집어쓰고 종종걸음으로 걸었다. 걷는 길마다 꽁꽁 얼어 있어 찬 기운에 온몸이 시려왔다. 손을 주머니에 찔러넣어 숨겨봐도 붙어오는 차가움은 쉽게 가시지 않아 발까지 숨기고 싶었다. 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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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닷속으로 향했다. 줄줄 흘러나오는 소금기가 녹아지는 바닷물은 여름이라 후더운 줄 알았다. 하도 일렁거리며 반짝거리니까. 물속에 햇빛이 파편처럼 녹아 열을 내고 있어서 가뿐히 화상을 입을만해 보이는 해수면에 나는 데었으면 했다. 급한 마음으로 끈덕진 목덜미 위로 흘러내리는 땀을 훔치고 준비 없이 다리 한쪽을 앞세워 물에 들어간다. 숨은 화들짝 놀라 가빠진다. 차갑다. 밟히는 물이 발목을 치고 올라오면 얼음 위에 올라선 것과 같다. 진정 안 되는 폐호흡을 다스리느라 몇 초 남짓을 낭비한다. 뭐든 허투루 소모되는 게 싫어. 눈을 꼭 감는다. 걸어 들어가 마침내 허리 너머까지 완전히 물이 찼을 때, 잠수한다. 물살이 온몸을 감싸고 도는 이치. 시간은 삶의 단위이고 삶의 단위가 별처럼 쏟아지는 이 지금. 내 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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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정한이 형이 치앙마이에서 돌아오기 전까지 무슨 일이 있었나. 치앙마이라는 곳이 그때는 누구나 가는 흔한 여행지가 아니라서 나는 형이 오기 전날의 어슴푸레한 저녁부터 다음날 이슬이 풀잎에 맺히기까지 뜬눈으로 지새우며 형의 그림자가 나타나길 고대했다. 이번엔 형이 어떤 새로운 세상을 보여줄까, 하고. 마침내 정한이 형이 낡아 으스러질 법한 대문을 열고 내 이름을 불러올 때, 나는 먹일 기다린 아가새처럼 버선발로 현관에 나서서 환호했다. 내 부축을 받으며 돌계단을 걸어 올라 집 안으로 들어서는 형을, 나는 뛰어가 형보다 앞서 걸으며 작다란 날개를 푸드덕거렸다. 뒤를 돌아보고 연신 종알거리어도 일부러 나와 눈을 맞춰 싱긋 웃는 파안의 얼굴. 핑크빛 바람이 불어. 솜사탕 같아. 솜사탕같이 포근한……...